<전해야 했던 말> - 클론셰퍼드 x 개러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너를

 

수십번, 수백번을 되새기는 장면. 귀를 울리는 요란한 폭격음과 먼지와 피로 얼룩진 얼굴. 뺨에 와닿던 떨리는 손길. 돌아서기 직전 마주쳤던 눈빛.

 

*

 

차가운 새벽공기에 잠이 깼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개러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두시간쯤 눈을 붙인 것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온몸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전날 무리해서 몸을 움직인 여파였다. 신병훈련을 돕는단 핑계로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켰다. 멍청한 짓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잠시 눈을 붙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른세수로 얼굴을 쓸어내린 개러스는 비척거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어찌 됐건,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예전, 시타델에서 시도니스를 다시 대면했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음식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고, 눈을 감아도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죽은 이들의 망령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그를 두고 돌아섰을 때 개러스는 일말의 동정심마저 느꼈다. 그는 차라리 동료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개러스는 그가 말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 보존식을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며 개러스는 옴니툴을 확인했다. 그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기획안을 확인하고, 새로 들어온 우주 연합 뉴스를 대충 눈으로 훑고 나니 가장 마지막으로 한 개의 개인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 잘 지내고 있나요? 조만간 시타델에서 모두 모인다고 하더군요. 일정이 괜찮으면 함께 해요. L.

 

그의 개인 기록을 모두 삭제하고 모든 연락망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섀도우 브로커의 정보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개러스는 사려 깊은 그녀의 메시지에 한번 눈길을 준 뒤 그대로 옴니툴을 꺼버렸다. 모임이라모두들 올 것이다. 리아라, 탈리, 조커함께 노르망디에 있던 이들 모두. 웃으며 안부를 전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나눌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의 중심에는 물을 것도 없이 당연히, '셰퍼드'가 있을 터였다. 개러스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가능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다한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웃으며 셰퍼드의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개러스는 여전히 그의 상실감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고 악몽에 쫓기다 눈을 뜨면, 개러스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시간에 의해 흩어져갈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침상에서 눈을 뜬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혼란에 빠진 우주였다. 노르망디는 무사히 카론 릴레이를 벗어났지만 바로 직후 항성계와 항성계를 이어주던 매스릴레이가 파괴되어 그들은 불시착한 행성에 갇힌 채 어떠한 소식도 전해들을 수 없었다. 항성계 내 다른 행성들과 겨우 통신을 연결하고 나서야 리퍼들이 모두 공격을 중지하고 정지상태로 우주에 유영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셰퍼드에 대한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은 개러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지구에서 노르망디가 이륙하던 마지막 순간에 붉은 빛이 대지를 뒤덮는 것을 본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셰퍼드가 그 안에서 무사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든 '크루시블'을 작동시켜 이 전쟁을 끝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우주를 유영중인 리퍼의 존재는 여전히 모두를 불안하게 했지만 적어도 적대적인 공격이 없는 것만으로도 평화가 찾아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 상태로 전시 체제를 유지하던 군에서 대응을 준비하는 사이 그들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 리퍼들은 하나 둘 매스릴레이로 이동해 파괴된 매스릴레이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매스릴레이 복구 작업은 자원과 기술력 부족으로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던 상태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리퍼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군은 이내 리퍼가 어떤 적대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였다.

개러스는 침상에서 서서히 상처를 회복해가며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매스릴레이가 복구되어 우주로의 통신이 연결되기를. 그가 기다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동료들이 메마른 웃음을 나누며 셰퍼드에 대한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그들의 섣부른 위로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동료들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그를 걱정의 눈으로 지켜봤지만 그들이 개러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매스릴레이 수복이 끝나 우주로의 통신이 복구된 날, 개러스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팔라븐으로 떠났다.

 

투리안 사회는 그를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했다. 전쟁으로 인해 투리안의 지휘체계는 엉망으로 무너진 상태였다. 갑작스런 리퍼의 비활성화 후 서서히 전후 사태 복구에 힘쓰고 있던 투리안들에게 전쟁 영웅 개러스 바카리안의 귀환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개러스는 그들이 제안하는 모든 공식적인 지위를 거부한 채 수도 시프리틴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 칩거에 들어갔다. 차마 그들의 도움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전시에 그러했듯 '전후피해복구위원회 자문위원'이라는 어정쩡한 지위를 받아들여 이런 저런 회의에 참석하고 필요한 조언을 제공했지만 그는 여타 모든 사회적인 활동을 중지한 채 자신의 아파트에 틀어박혔다. 그야말로 '숨만 붙어있는 채'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했다. 셰퍼드가 없었기에. 그는 더 이상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개러스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바로 그 날이 오기 전까지.

 

*

 

그의 시선은 뉴스 화면에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얼라이언스의 영웅, 커맨더 셰퍼드의 생환 소식입니다. 6개월 전 리퍼 전쟁의 종결과 함께 사라져 사망처리 되었던 그녀의 극적인 귀환은 인류 뿐 아니라 전 우주를 기쁘게 하는 소식인데요, 얼라이언스 측에서는 그녀가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아 공식 석상에 나서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 밝혔습니다. 우주 영웅 커맨더 셰퍼드의 이후 행보는'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바닥을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셰퍼드.

 

입 밖으로 차마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었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돌아왔구나.

 

*

 

홀린 듯 멋대로 움직여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지구 행 우주선에 올라타 있었다. 군에는 개인적인 이유로 휴가를 요청한다고 일방적인 메시지 하나만 남겨두고(그들도 이유는 알고 있을 터였다) 무작정 행동에 나섰지만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왜 그녀는 돌아와서 그에게 연락하지 않은 걸까? 얼라이언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정도면 거짓 루머는 아닐 텐데, 얼마나 큰 부상이기에 사진조차 공개되지 않고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과 불안감이 밀려들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사로잡은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만나고 싶다. 어떤 모습, 어떤 상태여도 괜찮으니 두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구의 모습은 팔라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작 6개월, 그토록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어느새 이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결코 복구할 수 없는 것을 잃었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많은 것을 덮어주었다. 개러스는 당장 어디로 향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셰퍼드의 거처는 시타델의 개인아파트 뿐이었다. 설령 지구에서 그녀의 거처를 알았다 해도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투리안 군용 통신을 이용한 연락은 조금도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고 그가 가진 셰퍼드의 개인 연락망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짜고짜 지구로 온 건 너무 무모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우선 숙소를 잡아 짐을 풀었지만 좀처럼 혼란과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개러스는 호텔 지하의 바로 향했다.

 

그 언젠가 퍼가토리의 바에 앉아 셰퍼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온 우주가 전쟁에 휩싸여 있어도 사람들은 웃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며, 그런 식의 현실도피가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해 한탄했다. 셰퍼드를 잃은 뒤, 괴로움에 못 이겨 술이나 약의 유혹이 밀려들 때면 개러스는 그 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이렇게 홀로 바를 찾은 것은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가장 도수가 높은 술을 주문해 스툴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그를 향해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팔라븐에서 인간을 보기 힘든 만큼 지구에서 투리안의 존재 또한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모든 종족이 자신의 별에서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시점에는 더더욱. 특별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 한 개러스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서 술병을 반쯤 비웠을 즈음, 취기가 오른 그의 곁에 다가온 존재를 깨닫는 게 조금 늦어졌다.

 

"상륙 휴가 나온 투리안? 여길 자주 오나봐요?"

 

순간 숨이 멎었다. 환청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옆자리에 자리 잡은 그녀는 살풋 웃으며 눈인사를 던졌다. 그 모습마저 환영처럼 느껴져 개러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자주긴장 푸는데좋은 곳이죠."

 

개러스는 잔뜩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 유달리 멍청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의 여인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후드를 눌러써 얼굴 위로 음영이 깔려 있었지만 바로 앞에 앉아있는 개러스는 그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셰퍼드.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환상일 것만 같아 손을 뻗으려 하자 그녀가 개러스에게 몸을 기울여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여긴 보는 눈이 많아서 좀 위험해. 장소를 옮기지."

 

나쁜 짓을 꾸미는 어린아이처럼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인 그녀는 개러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 마디 반문도 못한 채 이끌려 가며 개러스는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집중했다. 따듯했다. 꿈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셰퍼드가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셰퍼드가 그를 이끈 곳은 호텔 최상층의 특별실이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셰퍼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개러스가 들어서고 뒤따르는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은 셰퍼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돌린 그녀는 그제야 입을 열었으나 와락 끌어안는 손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개러스, 잠시"

"셰퍼드."

 

꺼질듯한 목소리가 쥐어짜듯 내뱉는 그녀의 이름에 셰퍼드는 밀어내려 뻗었던 손으로 가만히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부서지기 쉬운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이 품안의 여인을 어루만졌다. 등을 타고 어깨로, 목으로 올라온 두 손이 후드를 벗겨내고 익숙한 그 얼굴을 두 손안에 담았다. 기억보다 조금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셰퍼드."

 

그 이상의 말은 필요없다는 듯 물기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부르는 개러스를 보며 셰퍼드 또한 손을 뻗어 개러스의 뺨을 쓸었다.

 

"개러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개러스는 이마 위에, 눈꺼풀에, 뺨과 콧등 위에 입 맞추며 셰퍼드의 존재를 거듭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 뒤로 팔을 걸고 안겨오는 셰퍼드의 입맞춤에 개러스는 눈을 감으며 다시 찾은 연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두 사람은 거실을 지나쳐 침실로 향하면서도 계속해서 서로에게 입 맞췄다. 침실에 다다라서야 가쁜 숨을 고르며 떨어진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서로 마주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읽기 힘든 투리안의 얼굴에 미묘한 이질감이 서린 것을 셰퍼드는 놓치지 않았다.

 

"? 왜 그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실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이는 셰퍼드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셰퍼드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개러스에게 그 사실 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개러스는 다시 그의 연인에게 고개 숙여 입 맞추고 그녀를 두 팔로 안아들었다. 많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지만 당장은 다시 찾은 온기를 느끼는데 집중할 때였다.

 

*

 

새벽, 어둠 속에서 개러스는 여전히 품안에 느껴지는 여인의 온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깬 그의 기척에 그녀도 깨어난 듯 작게 뒤척였다. 이토록 익숙한 느낌.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이. 늘 그래왔던 것 마냥. 하지만.

 

"너는 누구지?"

 

개러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목 뒤로 속삭이듯 내뱉는 그 말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안겨있던 셰퍼드가 눈을 떴다. 두 사람 다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셰퍼드는 개러스의 품안에 안긴 채였다. 개러스는 대답 없는 그녀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지나치게 달콤한 유혹이다. 이렇게나 진짜 같은데, 이대로 그가 눈감고 모른 척 할 수 있다면 모든 게 완벽할 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넘어간 줄 알았는데, 역시 당신한텐 안 먹힐 것 같았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개러스의 품안을 벗어난 여인은 어둠 속에서 벌거벗은 나신으로 개러스에게 돌아섰다. 셰퍼드. 그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의 셰퍼드였고, 동시에 한없이 낯선 이였다. 여인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는 개러스의 시선에 피식 웃어 보이고 바닥에 떨어진 속옷이며 셔츠 따위를 몸에 걸쳤다. 그 동안에도 개러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이래뵈도 구면인데 말이야."

 

침대 맡에 걸터앉은 여인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개러스를 내려다봤다.

 

"그 때 그 파이잭인가. 서버러스의."

 

개러스는 비척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긍정도 부정도 않고 있는 그녀의 태도에 그의 확신이 굳어졌다. 개러스가 옷을 갖춰 입고 일어설 때까지도 여인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가벼운 손짓으로 방안의 조명을 켜자 그가 처한 꼴이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어제 이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셰퍼드의 클론, 복제품에 불과한 여자와. 그리고 개러스는 그에 대해 모르고 한 일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개러스의 흔들리는 눈을 보던 여인은 비뚜름하게 걸터앉은 자세로 무릎에 턱을 얹었다. 그녀는 개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이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왜 네가 셰퍼드의아니, 그 전에"

 

개러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많은 생각을 해왔다. 있을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일에 충격 받을 것도 없었다.

 

"셰퍼드는, 죽은 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개러스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 6개월간 익숙하게 함께 해온 고통. 지난 밤 한순간의 환상에 취해 잊을 수 있던 고통이 다시 밀려들었다. 개러스의 담담한 태도가 의외였는지 여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래. 아니, 사실 우리도 몰라. 시타델을 복구하며 상층부에서 앤더슨 대령과 일루시브맨의 유해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없었으니까."

 

결국 셰퍼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개러스는 그 사실을 희망의 이유로 삼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뿐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개러스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미 만난 적 있는 사이였다. 결코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강렬한 기억도 드물 터였다. 셰퍼드의 자리를 빼앗으려 그들의 목숨을 위협했던 그녀를 셰퍼드는 끝내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다. 마지막까지도 셰퍼드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개러스는 그녀가 사용한 단어에 초점을 맞췄다. 그녀가 이렇게 셰퍼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얼라이언스 측에서 벌인 일이라는 뜻이었다.

 

"해켓이겠군. 이런 되도 않는 수를 쓰는 걸 보니."

"머리가 잘 굴러가는군. 군대에서 구른 시간이 공은 아니었다는 건가."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개러스는 빠득 이를 갈았다. 그들은 셰퍼드가 곱게 죽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건가. 이런 우스운 짓을 해서라도 '커맨더 셰퍼드'의 환상을 유지하고 싶은 건가. 분노의 화살은 눈앞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네가 감히, 셰퍼드가 구해준 목숨으로 이딴 짓에 동참하고 있는 거지? 그 썩어빠진 근성은 변함없는 건가? 수치라곤 모르는 건가?"

 

새파랗게 불타는 개러스의 눈빛에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이봐, 개러스 바카리안. 혼자 고결한 척 하지 말라고. 정치가 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먼저 접촉해온 건 얼라이언스 쪽이고, 난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리고"

 

여인은 경멸 섞인 개러스의 어조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 했다. 개러스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잔뜩 독기를 품은 채 셰퍼드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던 그녀를 생각하면 차라리 '셰퍼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개러스는 그 침착함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여인의 입에서 이어진 말에 개러스는 멈칫했다.

 

"나는 빚을 갚고 있는 것뿐이야."

"?"

 

의문에 찬 눈빛에 여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고르는 듯 했다. 햇살이 비쳐드는 발코니 쪽으로 다가선 여인은 이제는 제법 도시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지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신네들의 잘난 영웅 커맨더 셰퍼드가 자비롭게도 내 목숨을 살려준 덕에, 나는 새로 삶을 얻었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어. 마땅한 신분도 없이 서버러스에 쫓기며 뒷골목을 전전해야했지. 한동안은 분노에 차서 엉망으로 살았어. 그러다가 뉴스를 봤어. 내가 리퍼의 습격을 피해 이 행성 저 행성 떠돌며 도망치고 있는 동안, '셰퍼드'는 단신으로 리퍼와 맞서 싸우고, 크로건을 구해내고, 온 우주를 하나로 모았어. 그리고 끝내, 이 우주를 구해내고 산화해버렸지. 참으로 영웅다워. 그렇지 않아?"

 

여인은 뒤돌아 서있어서 개러스는 그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노나 질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정제된 종류의말하자면 동경에 가까운 감정.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나도,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잖아. 그렇지? 그녀는 내게 당신네 잘난 동료들을 자랑해 보였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그렇게나 다를 수 있던 걸까? 당신이라면 그 이유를 알 테지, 바카리안?"

 

빛을 등지고 돌아선 여인의 눈빛에선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개러스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여인은 작은 한숨을 쉬고 다시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당신을 굳이 만나려 시도한 건, '위장'이 얼마나 잘 먹히나 보려던 것도 있지만 사실 큰 기대는 안했어.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나와 함께 내 함선에 타줘. '커맨더 셰퍼드'의 부관으로. 나를 둘러싼 의심을 가라앉히려면 당신이 필요해."

"? 제정신이야?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개러스는 다시금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셰퍼드의 자리를 탐내어 그녀를 위험에 몰아넣었던 주제에, 기어코 그녀의 자리를 다시 꿰어 차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 그 뻔뻔한 거짓말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감히 어떻게! 허나 여인은 개러스의 분노엔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대로 나가서 동네방네 얼라이언스의 사기극을 퍼뜨릴 셈인가? 그렇게 하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아? 그래봤자 잠시 언론에서 가십 삼아 며칠 가량 떠들고 씹어대고 말겠지. 물론 욕먹는 건 얼라이언스 뿐 아니라 당신의 소중한 '커맨더 셰퍼드' 또한, 싸구려 사기극에 이용당한 어릿광대 취급 받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개러스는 이를 악물었다. 분통터지는 일이었지만 그 말 그대로였다. 우주를 위해 목숨 바친 그녀의 이름이 이제와 하찮은 광대놀음에 이용당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그가 이 사기극을 눈감아 넘겨야할 이유는 없었다. 셰퍼드는 그녀의 이름이 이런식으로 이용되는 것 또한 원치 않았을 테니.

 

"그래서, 내게 뭘 원하지?"

"당신이 내 곁에 머문다면 날 두고 의심하는 목소리도 잦아들 거야. 내가 완벽한 '셰퍼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줘. 그게내가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네가 말하는 빚이라는 건네 목숨을 말하는 건가?"

 

개러스의 질문에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을 기다리겠다며 호텔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그녀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구차한 설득도 시도하지 않았다. 홀로 방에 남은 개러스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꼼짝하지 않은 채 침묵에 잠겨있었다.

 

다음 날, 부대로 복귀하는 그녀의 곁에는 개러스가 함께하고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얼라이언스는 공식적으로 커맨더 셰퍼드의 귀환을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그녀의 지위를 복귀할 뿐 아니라 리퍼 전쟁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녀에겐 새로운 함선이 주어졌다. 이전처럼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스펙터로서 특수임무에 나설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진 셈이었다. 엑스트라넷에는 6개월간 소식이 없다가 다시 나타난 셰퍼드에 대해 수많은 루머가 떠돌았다. 닮은 대역을 데려온 것이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VI 로봇이다, 심지어는 얼라이언스 기술로 복제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소문까지-이를 발견한 개러스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여태껏 셰퍼드의 영웅적인 죽음이 기정사실화 돼있던 차에 갑자기 나타나 좀처럼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그녀를 두고 온갖 추측이 뒤따랐지만 대부분은 근거 없는 음모론 투성이였고 그마저도 오래지 않아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짤막한 인터뷰며 파파라치의 스냅샷에 찍힌 사진에는 셰퍼드 못지않게 유명세를 탔던 전설적인 대천사, 개러스 바카리안이 함께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리안 측에서는 개러스 바카리안의 소재에 대해 특수임무를 맡아서 공개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밝혔지만 이 영웅적인 인물이 그의 가장 소중한 동료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커맨더 셰퍼드의 귀환을 점차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려줘요. 우리의 우정에 걸고, 내게는 알 권리가 있어요. 제발. L.

 

개러스는 옴니툴에 도착한 메시지를 흘끗 보고 화면을 종료했다. 세 번째 메시지였다. 그가 거듭 주소를 바꿔도 그녀는 금세 추적해냈다. 이 정도면 직접 찾아올 만도 한데 아무래도 섀도우 브로커 일이 꽤나 바쁜 듯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노르망디의 동료들 중 누구한테 말한들 그의 행동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 바카리안, 회의 시간이야.

 

다시 한 번 옴니툴이 울렸다. 개러스는 따로 답신을 보내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날의 안건을 다시 확인했다. 요 근래 추적해온 바타리안 해적집단에 대해 새 정보가 들어와서 간단한 행성 탐사 임무가 주어질 듯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커맨더."

 

회의실엔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개러스는 그들에게 따로 시선을 주지 않고 중앙에 선 여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그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여인은 그런 개러스에게 한번 눈짓을 던진 뒤,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자리 잡아 설명을 듣는 개러스의 눈빛은 진지하게 화면에 머물렀다. 임무의 세부사항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던지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고 투입 멤버를 지정한 뒤 길지 않은 회의가 끝났다. 다른 이들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두 사람만 남았을 때 개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얘기했지?"

"서케쉬에서, 모딘과 함께 이브를 구출해낸 데까지."

 

여인은 옴니툴을 켜고 작은 화면을 열어 몇 가지 기록을 확인했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건조한 침묵이 잠시 스쳤다.

 

"그래, 당시 서버러스는 어떻게든 이브를 데려갈 작정인 것 같았지. 마지막에는 아틀라스까지 동원했으니까. 그리고"

 

개러스의 이브를 설득하던 과정, 그 후 렉스와 나눈 대화, 모딘의 선택, 제노페이지 치료제를 슈라우드로 살포하던 순간의 기억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다소 감정이 실릴 수 있는 부분에서도 그는 극히 담담한 목소리로 객관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이야기를 듣는 여인 또한 전술 보고서를 듣는 것 마냥 무감동하게 듣다가 몇몇 대목에서 옴니툴을 열어 기록을 남길 뿐이었다.

개러스가 승선한 뒤, 그녀는 그에게 셰퍼드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여인은 개러스가 어째서 그녀를 돕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승선일에 선착장에 나타난 그를 보고 당연하다는 듯 '협조하기로 했다면 제대로 해'라며 그의 도움을 구했을 뿐이었다. 개러스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가 요구한대로 지구에서의 재판 이후 셰퍼드가 이룬 일들에 대해 문서로 남아있는 기록 이외의 사소한 일들을 하나둘 시간이 날 때마다 들려주기 시작했다.

 

'셰퍼드'에게 내려진 새 함선은 이전까지 한 번도 셰퍼드와 직접적으로 만난 적 없던 젋은 신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엔 커맨더 셰퍼드의 영웅담을 교본 삼아 군인의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들의 영웅을 뒤쫓는 시선은 그 못지않은 존경의 눈으로 개러스 또한 뒤따랐기에 이따금 개러스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셰퍼드와 그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셰퍼드의 부관 자격으로 승선한 개러스가 꼬박꼬박 그녀에게 '커맨더'라는 호칭과 경어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단둘이 몇 시간씩 밀실에서 시간을 보내더라 하는 소문이 가십이 섞인 채 선내에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개러스도, 여인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크로건과 투리안이 지원에 협력하게 되었어. 대신 살라리안은 한발 뒤로 물러섰고."

"오늘은 여기까지. 이번 작전에 당신은 포함돼있지 않으니까, 되는대로 시간을 보내도 좋아."

 

한시간 가량 지속된 이야기가 한 단락 정리되었을 쯤 여인은 옴니툴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 회의에서 논의한 탐사임무에는 그녀와 두 명의 분대원이 내려갈 예정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개러스를 임무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를 불신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그저 전투가 주가 되는 임무가 아니고선 굳이 그를 다른 이들과 섞여 어울리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여인이 회의실을 나선 후에도 개러스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해묵은 기억을 되짚는 것은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딘의 마지막 모습, 투창카의 메마른 하늘 위로 흩날리던 하얀 빛무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지켜보던 셰퍼드의 옆얼굴. 전쟁이 끝나도 잃은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개러스는 되도록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언제나 늘 옆에 서있는 소중한 한 사람이 있는 한 그는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으니까.

 

셰퍼드. 그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은 결코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그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개러스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재차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멍청한 일이었다.

 

 

*

 

 

셰퍼드의 몸에는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군인이었으니까. 서버러스가 육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흉터가 없어졌다고, 그래서 이나마라고 멋쩍어 하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감촉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른쪽 어깨 위에 하나, 왼쪽 옆구리에 하나,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목 뒷부분에도 하나. 함께 밤을 보낸 후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도드라진 흉터자국을 매만지면 간지럽다며 키득거리곤 했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상처 하나 없이 새하얗고 매끄러운 등.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이 이토록 낯설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가빠진 호흡을 고르느라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개러스도 깊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방 안을 채운 정적은 달콤한 사랑의 행위 뒤의 여운이라 하기엔 질척하고 무거웠다. 개러스는 여느 때와 같이 말없이 옷을 챙겨 입고 일어섰다.

처음 그가 한밤중에 방문했을 때 여자는 조금의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선실 문을 닫은 여자를 붙잡고 키스했을 때에도, 급한 손길로 침대에 쓰러트렸을 때에도 그녀는 개러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특별한 말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를 애무하는 그의 손길은 그야말로 소중한 연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배려 넘쳤고 여자 또한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그를 마주 안았다. 그저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든가, 애틋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보는 것 같은 몇 가지 사소한 애정표현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 누가 봐도 그것은 연인의 행위였다.

다만, 실수로라도 그의 입에서 셰퍼드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절정의 순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자를 품에 안는 순간 목구멍 안쪽이 턱 막힌 것처럼 갑갑해질 때에도 개러스는 끝내 그 이름만큼은 내뱉지 못했다. 그것을 최소한의 양심이라 부르든, 그가 가진 일말의 도리라 부르든 차이는 없었다. 소금물로 갈증을 채우듯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의외였던 건 그런 그의 속을 모를 리도 없을 여자 또한 그런 점을 지적하지 않고 그를 받아줬던 점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노골적으로 비웃거나 그를 모욕한다면 하루하루 조금씩 쌓여가는 불쾌한 찌꺼기 같은 감정도 덜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밤마다 개러스가 여인의 선실을 찾는 것은 암묵적인 일과가 되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행위뿐인 밤을 보내면 개러스는 곧바로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밤의 일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낮에는 언제나처럼 깍듯한 태도의 부관 개러스 바카리안과 커맨더 셰퍼드가 있을 뿐이었다.

 

*

 

그들의 기묘한 공생관계는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여인은 개러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커맨더 셰퍼드'의 역할을 잘 해냈다. 대부분의 활동은 스펙터 임무 위주였고, 굳이 그의 도움이 없어도 팀원들을 운용하여 작전을 짜는 능력은 이미 훌륭한 지휘관의 그것이었다. 이따금 개러스의 조언을 구하는 경우는 '이런 경우 셰퍼드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식의 것들이었다. 개러스가 보기에 그녀가 내리는 선택은 다소 과격하고 목적지향적인 면이 없지 않았지만 보통 그가 익히 보던 '셰퍼드'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묘한 기시감 또한 개러스를 불편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 때,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미란다를 구하지 못했을 거야. 그녀도 동생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미란다 로슨나는 그녀가 일루시브맨을 배신할 줄은 몰랐는데."

 

그날은 생츄어리에서의 전투를 얘기하던 중이었다. 여인은 보통 개러스의 이야기에 어떤 감상이나 첨언을 하는 일이 없이 묵묵히 듣는 쪽이었다. 그녀가 미란다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야 개러스는 미란다가 한 때 라자러스 프로젝트의 담당자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를 본 적 있나?"

"딱 한 번. 마야는그녀를 싫어했어."

"마야 브룩스. 그래, 미란다가 그 여자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지."

 

개러스는 새삼 그가 여인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서버러스에서 빠져나왔는지, 마야 브룩스와 그녀가 목표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셰퍼드가 그녀를 살려준 뒤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녀가 셰퍼드의 대역을 맡게 되었는지. 개러스는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애매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드물게도,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야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나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 건지. 그녀가 말했어. 당신은 얼라이언스의 커맨더 셰퍼드입니다. 사고로 기억을 잃어서 회복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라고."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여인은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과거를 되짚었다. 여느 때와는 반대로,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쪽은 개러스였다.

 

처음에 여인은 진심으로 자신이 셰퍼드라고 믿었다. 아마도 셰퍼드가 정신을 차리기 전, 라자러스 프로젝트의 성공이 불투명하던 시점이었을 터였다. 마야는 그녀가 '셰퍼드'로 돌아갈 수 있게 모든 지식을 습득시켰다. 셰퍼드의 과거, 그녀의 업적, 그녀가 가졌던 동료들, 앞으로 해야 할 일들그리고 라자러스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진짜 셰퍼드가 깨어난 날, 그녀는 다시 서버러스에 의해 냉동되었다. 다시 눈을 뜬 시점은 셰퍼드가 결사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마야가 일루시브맨으로부터 그녀를 빼돌려 도망친 후였다. 그 때까지도 여인은 아무 것도 몰랐다. 세상과의 모든 통신이 단절된 곳에서 여전히 셰퍼드로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며,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과거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엿들은 외부 통신에서는 '커맨더 셰퍼드'의 놀라운 활약상에 대해 떠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야는 일부러 내가 엿듣게 놔뒀었어."

""

 

여인의 목소리에는 그 당시의 분노나 충격 같은 건 담겨있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마냥 무덤덤한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러스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스스로 믿고 있던 모든 진실이 부서지는 순간. 자신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눈에 아릿한 연민이 스치는 것을 여인도 느낀 듯 했다.

 

"그래, 참 우스운 상황이었어. 그녀가 충격에 빠진 나를 붙잡고 울면서 사과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마야는 나를 서버루스의 욕심에 희생된 불행한 제물처럼 묘사했어. 내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며, 얼마든지 내가 '셰퍼드'가 될 수 있다고 되레 나를 북돋았지. 나는 점차 그녀의 주장이 옳다고 믿게 됐어. 모든 증오와 분노를 내가 당연히 서 있어야할 자리에 서있는 '셰퍼드'에게로 돌렸고."

 

그 뒤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여인은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정적이 두 사람을 맴돌았다. 개러스는 무언가 말해야할 것 같았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부로 동정하고 싶진 않았다. 한 때 그들은 적이었고, 그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많은 것이 다르게 흘러갔을 터였다.

 

"전에 말한 빚이란, 셰퍼드가 널 살려준 데 대한 것인가?"

 

개러스의 질문에 여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개러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무치게 그리운 이와 똑같은 눈. 똑같은 얼굴. 개러스는 이 상황이 몹시 우습다고 생각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여인 쪽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미워하지 않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 뿐이야. 이제 그만 돌아가줘. 피곤해졌어."

 

 

*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딘가 달라졌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개러스는 느낄 수 있었다. 개러스는 적의 사정에 대해 일일이 공감하고 동정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를 적이라 할 수 있을 때의 얘기였지만. 다만 그날의 대화로 인해 개러스는 여인이 셰퍼드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처음으로 인지했다. '커맨더 셰퍼드'의 가면을 쓰고 그녀가 되기 위해 한없이 노력해도 그녀는 결국 셰퍼드가 아니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개러스는 그가 보고 있던 여인의 모습에서 얇은 껍질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엇인가 점차 어그러져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쯤 그의 동료들은 셰퍼드의 생환 소식에 대해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일 터였다. 리아라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개러스는 그녀가 셰퍼드를 찾아내는 것을 포기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언제까지 진실을 감출 수 있을까. 진실을 감춰서 어쩌겠다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왜 그는.

 

"안됩니다, 커맨더. 이대로 진행할 경우 인질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그리고 침투조가 성공한다 해도 인질들이 현재까지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어."

 

최근 들어 부쩍 두 사람의 대립이 잦아졌다는 것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바타리안 해적집단을 추적 중이었다. 알파 릴레이 붕괴 이후 모든 이들이 바타리안의 멸망을 예견했지만 그들은 집요하게 살아남아 우주 이곳저곳에서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매스릴레이 복구로 온 우주가 통신이 단절돼있던 기간 동안 그들은 한곳에 뭉쳐 제법 거대한 조직을 형성한 듯 했다. 이번 작전은 소규모 인간 식민지 행성을 점령한 바타리안 집단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행성이었기에 점령군의 무장상태가 만만치 않아 쉽게 상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됐다. 개러스는 소수의 침투조를 이용해 수뇌부를 점거할 것을 제시했지만 여인은 위장 드론을 잠입시켜 기지 전체에 폭탄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문제는 점령지에 잡혀있는 민간인 포로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 차가 좀처럼 좁혀질 것 같지 않자 여인은 개러스를 제외한 이들을 회의실 밖으로 내보냈다.

 

"좋아, 바카리안. 정확히 어느 부분이 문제인 건지 말해봐."

"우린 아직 인질들의 위치를 몰라. 폭탄을 설치하려면 드론을 이용해서 우선 그들의 위치를 확인해야해."

"그랬다간 우리의 존재를 들킬 수 있어. 아직 그들은 우리가 여기에 와있다는 걸 몰라. 한번 들켜버리면 일을 더 위험하게 할 뿐이야. 빠르게 행동할수록 우리가 유리해."

"그러니 침투조를 보내! 통신시설을 점거해버리면 남은 무리도 혼란에 빠질 거야. 그 틈에 다른 부대원들을 투입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

"그 쪽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대체 누굴 보내라는 거지? 앨런? 루스? 침투조가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봤어?"

 

점차 언성이 높아지고 여인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들은 충분히 엄선된 엘리트 군인들이었지만 실전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내가 가겠어. 루스와 켄을 붙여줘."

"왜 굳이 어려운 방식을 택하겠다는 거지? 위험부담이 너무 크잖아!"

"어느 정도의 피해, 라고 말할 때 그 안에 생명이 포함되는 일은 있어선 안 돼! 셰퍼드였다면!"

 

개러스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무심코 흘러나온 이름은 그가 이전까지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이름이었다. 개러스는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도 결코 셰퍼드의 이름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라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뿐이었다. 그것이 눈앞의 여인에 대한 배려인지, 혹은 다른 방식의 조롱인지, 혹은 그가 가진 죄의식의 단면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여인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건가? 위대한 '커맨더 셰퍼드'는 결코 무고한 죽음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위험에 내던질지언정 누구도 죽게 두지 않는다고? 그것 참 유감이군, 내가 '셰퍼드'가 아니라서! 나는 그녀처럼 이상적인 길만 쫓을 수 없어!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동안 부딪힐 때마다 쌓여온 응어리가 한 번에 터진 듯, 여인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스스로 던진 말이 준 충격에 창백한 얼굴로 그녀의 비난을 듣고 있던 개러스는 순간, 여인의 어깨를 붙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그의 파란 눈 안에서 분노, 좌절,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의 단편들이 소용돌이 쳤다.

 

"그럼, 너는 뭐지? 말해봐. 네가 '셰퍼드'가 아니라면,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네가 '셰퍼드'가 될 수 없다면, 나는 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개러스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당황이었다. 분노의 대상이 잘못됐다는 깨달음이 강렬한 수치심을 동반한 채 개러스의 심박을 빠르게 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떨려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의 그를 보며 여인은 말없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다시 입을 연 여인의 목소리는 이전의 차분함을 되찾은 뒤였다.

 

"침투조의 선두를 맡아. 루스와 베인을 데려가도록 해. 투입은 6시간 뒤야. 선실에서 대기하도록."

 

냉랭한 축객령에 개러스는 대답 없이 도망치듯 돌아섰다.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미세한 경상자 외의 인명피해 없이 돌아온 개러스에게 찬사가 쏟아졌지만 그는 곧바로 선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 밤, 개러스는 여인의 선실을 찾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개러스는 회의 자리 외에는 자신의 선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사령관이 그의 친우-이자 잠정적 연인-와 가진 사소한 불화는 임무의 진행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훈련된 군인답게 회의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둘 사이의 불편한 공기는 약간의 논쟁을 동반한 뒤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데 오히려 도움을 주는 듯 했다. 어느덧 그들은 쫓고 있던 바타리안 집단의 주축이 되는 지도자의 위치를 추적하는데 성공했다. 수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 끝을 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다가올 마지막 전투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선내를 맴돌았다. 터미너스 시스템 너머의 그리 주목받지 않던 바타리안 식민지가 그들의 목적지였다. 적들 또한 이번 전투가 그들의 마지막 방어선이 걸린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전력으로 저항할 터였다.

비록 선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개러스 또한 선내를 감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겐 익숙한 감각이었다. 소버린과 싸우기 전에도, 오메가 4 릴레이에 진입하기 전에도, 리퍼 부대에 맞서던 크고 작은 전투에서도, 그는 늘 죽음의 바로 옆에 선 이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그를 비롯한 동료들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추구하는 원동력이었다. 홀로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힌 채 개러스는 그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가 거쳐 온 일들, 그의 삶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 그가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마지막 회의 날, 최종전투답게 각각에게 맡겨진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개러스는 셰퍼드와 함께 중심 기지에 침투하는 역할에 자원했다. 본디 그에게 맡겨질 역할은 제 2 지휘관으로서 후방전투부대를 이끄는 것이었는데 개러스는 최근의 다소 물러서던 태도를 버리고 강하게 주장을 고수했고, 여인은 그 이상 논쟁하지 않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여 전략을 설정하였지만 모두들 희생 없이 끝날 수 있는 종류의 전투가 아니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최종 브리핑까지 모두 끝난 뒤, 전투지로 이동하기까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요원들은 각자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갖추기 위한 시간을 가지도록 명령받았다.

 

개러스는 모두의 눈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여인의 선실 문이 열렸을 때, 개러스는 그녀 또한 그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며칠간의 공백이란 없던 것 마냥, 개러스는 익숙한 태도로 그녀를 안았다. 두 사람은 세상의 끝을 앞둔 연인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고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 개러스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여인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머물렀다. 품안에 들어오는 작은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불안한 것일까.

 

"이 일이 모두 끝나면, 당신은 이 배에서 내리도록 해."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인이었다. 개러스는 침묵으로 답했다. 살아남는다면, 이라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불안을 감싸고 보듬어줄 사이가 아니었다. 위로나 격려는 필요하지 않았다. 씻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여인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붙들었다.

 

"이전에, 다른 이름이 있었나?"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 여인은 잠시 침묵하다 짧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없었어. 제인 셰퍼드, 처음부터 그 뿐이었어."

 

개러스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샤워를 마친 여인이 나왔을 때 개러스는 이미 방을 떠난 후였다.

 

 

*

 

 

요란한 폭발음을 뒤로한 채 개러스는 여인을 품에 안고 통로 너머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온몸을 강타하는 격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품안의 여인이 쿨럭거리며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마지막 수류탄을 이용해 바로 뒤의 통로를 끊어냈다. 이걸로 잠시 추적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닐 테지만. 여인은 통신기를 확인했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임무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계획한대로 중심기지에 침투해 주 통신실을 폭파하고 바타리안 지도자를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예상치 못했던 점은 탈주 경로에 몰려있던 잔존 병력이었다. 중화기와 메크로 무장한 병력이 집요하게 그들의 퇴로를 봉쇄하고 공격해왔다.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요원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어느새 남은 인원은 개러스와 여인뿐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출구였지만 상황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조잡한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고르던 여인이 지친 눈으로 개러스를 바라봤다.

 

"바카리안, 탄창이 얼마나 남았지?"

"세 개. 그쪽은?"

"이게 마지막이야. 환상적이군."

 

여인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출구가 코앞이었지만 방금 끊어버린 길 외의 통로에도 적들이 없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이대로 끝인가. 그녀는 이런 식의 끝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본들 마땅히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두 사람 뿐인 전열을 다듬어 다시 출발한다 해도 이 상태로 남은 적들을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말해봐, 바카리안. '셰퍼드'는 이런 순간에 어떻게 행동하지? 아니, 애초에 그녀였다면 이렇게 구석으로 몰릴 만큼 허술하지 않았겠지?"

 

자조 섞인 여자의 물음에 개러스는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몰리다니, 벌써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겪어봤어. 아직 끝을 말하기엔 일러."

 

개러스의 태도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탄창을 새로 장전하고 총열을 체크했다. 다시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걸까. 투리안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여인은 그가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불안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개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똑바로 여인을 바라봤다.

 

"셰퍼드."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여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누구도 이 순간에 너보다 잘 할 수는 없었을 거야. 후회나 반성은 필요 없어.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돼. 네가 생각한대로, 네 방식으로. '셰퍼드'가 어떻게 했을지 같은 건 궁금해 하지 마."

 

나직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여인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가 이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앞으로는 네가 셰퍼드야. 그러니 아무 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나아가. 그럼 누구도 너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커다란 두 손이 먼지투성이의 두 뺨을 붙잡았고, 그는 고개 숙여 그녀와 이마를 마주 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여인은 이마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에 몸을 떨었다.

 

"너를 그녀 대신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그리고 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개러스는 그녀의 탄창을 가져가 자신의 중권총에 장전했다. 엄폐물 너머로 쿵쿵대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곧 적들이 나타날 것이었다.

 

"10시 방향의 환풍구가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야. 2시 방향에 보이는 연료탱크에 과부하를 걸 거야. 폭발로 놈들의 시야가 가려진 틈에 달려가도록 해. 내가 신호하면 돌아보지 말고 뛰어."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맞춰 심박이 빨라졌다. 무언가 말해야할 것 같아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개러스가 쉿, 하고 입술 앞에 손을 갖다 댔다. 지금이야, 하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모퉁이 너머 한무리의 적이 나타났고 곧이어 폭발로 인해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요란한 총성을 뒤로 한 채 통풍구 뚜껑을 발로 차서 부수고, 좁은 통로에 몸을 밀어넣고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 여인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통로 밖으로 빠져나와 후방부대와 통신을 연결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의료팀이 놓은 마취제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에야, 셰퍼드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름을, 불렀어야 했는데.’

 


*



썰로 풀었던 걸 끝내서 몹시 기쁘긴 하나 쫓기듯 쓴게 몹시 아쉬웁다ㅠㅠㅠㅠ 하지만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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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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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 10 추위

Mass Effect 2014. 9. 3. 10:24
C님이 던져준 소재로 솊개러스 쓰려던게 걍 노르망디 일상물이 돼버렸다 어째설까...

네타 없는 ME1 배경. 뻘함 주의.



*


"조커, 다시 한번 확인해줘. 몇 도라고?"

방한복 지퍼를 목끝까지 끌어올리며 묻는 셰퍼드의 질문에 통신기 너머로 조커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하 20도 맞습니다, 커맨더. 스키 타기 딱 좋은 지형인 것 같네요."

"다음에 꼭 함께 데려가줄게. 잊지 말라고."

킬킬대는 조커의 웃음을 한귀로 흘리며 통신기를 끈 셰퍼드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코 문을 열고 올라 타려는데 어쩐지 등뒤가 당기는 느낌에 돌아서니 질린 표정의 두 외계인이 어울리지 않게 애처로운 시선을 셰퍼드에게 보내고 있었다.

"커맨더,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투리안은 추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생김새를 보면 알겠지만, 크로건은 변온동물이야. 이런 곳에선 활동하기 힘들다고."

아머 헬멧 너머로 눈만 보이는 개러스와 렉스의 눈빛은 셰퍼드의 동정을 구하고 있었지만 셰퍼드는 그 간절한 눈빛을 못 본척 고개를 돌렸다.

"둘 다 그만. 영하 25도는 어떤 종족에게든 힘든 온도인 거 알지? 제비뽑기는 공정하다고. 자신의 불운을 탓해."

난 제비 뽑을 기회라도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셰퍼드는 뒤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를 무시한 채 마코 조종석에 자리잡았다. 지형이 험난한 곳이라 그나마 멀미를 덜하는 두 사람이 뽑힌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방한복으로 꽁꽁 둘러싼 세 사람을 태운 마코는 잠시 뒤 강하지점에 접근하자 가차없이 그들을 떨어트렸고, 마코의 단단한 장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와 눈보라에 오래 지나지 않아 마코 안의 세 사람은 덜덜 떨리는 이를 부딪혀야 했다. 목표지점은 멀지 않았다. 게스 신호가 나오는 기지를 추적해 신호기를 파괴하고 돌아오면 끝이었다. 조커가 불쌍한 스쿼드 멤버를 위해 최대한 신호범위를 추적해 강하지점을 골랐으니 산등성이 두어개만 타넘으면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마코는, 난방장치 같은 건, 없는 겁니까?"

"그런, 세심한, 장치가, 있을 거였으면, 충격완화장치부터, 있지 않겠어?"

어차피 두터운 아머 때문에 소용도 없을 텐데 뒷좌석에서 최대한 서로 붙어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두 외계인의 모습에 셰퍼드의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빨리 도착하려는 마음에 전속력으로 속도를 냈더니 평소의 배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골이 울리는 느낌이었지만 셰퍼드는 몇번의 조종을 거친 뒤 제법 적응한 바였다. 추위로 떠는 와중에도 투덜거리는 소리가 몇마디 들려왔지만 셰퍼드는 그 또한 적응한 지 오래였다.
산등성이를 넘어 평평한 대지가 나타났고 레이더 상에 신호 발신지가 표시됐다. 거의 도착한 것 같았다. 좀 더 속력을 밟으려던 셰퍼드의 귀에 송신기 너머 조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커맨더, 앞쪽은 얼음호수입니다. 기온이 기온이니만큼 깨질 염려는 없지만 마코를 타고 가기엔 좀 불안할 것 같군요.

조커의 무전은 기어코 셰퍼드 입에서도 욕이 튀어나오게 했다. 맙소사, 이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라고?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어렴풋이 붉은 빛이 보였다. 호수 너머에 기지를 짓다니, 이 얼마나 사악한 종족인가, 하는 탄식과 저주를 속으로 삼키며 마코를 세우고나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왜들 그러고 있어? 내려야지. 빨리 끝내야 한시라도 빨리 노르망디로 복귀하는 거라고!"

뻔뻔한 표정으로 재촉하던 셰퍼드도 막상 마코 출입문 스위치를 누르기 직전엔 심호흡을 해야했다. 문이 열리자 헬멧 너머로 금세 눈보라가 시야를 가려버렸다. 신호추적기를 옆구리에 달고 마코에서 뛰어내린 셰퍼드를 선두로 어기적거리며 내린 개러스와 렉스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바닥은 얼음이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단단하고 견고한 느낌이었다. 걷는동안 한마디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셰퍼드는 다들 이를 악물고 있어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통 날씨였다면 10분이었으면 도착했을 거리를 천년같은 기분으로 걸어서야 목표했던 게스 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금속 재질의 도어락 앞에 선 세사람은 비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손에 쥐었다. 얼어붙은 손끝에 거의 감각이 없어 몇번 주먹을 쥐었다 펴야 했다.

셰퍼드는 투덜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따라온 두 사람에게 씩 웃어보였다.

"이 날씨에 이 고생을 시킨 녀석들을 곱게 보내줄 수는 없겠지? 가자고."

개러스는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이리저리 비틀어 몸을 풀었고 렉스는 두 팔로 가슴께를 쿵쿵 두들겨서 온몸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눈빛만으로도 기지를 무너뜨릴 것 같은 분노가 두 사람에게 느껴졌다.

"그래, 뭔가를 부셔야 좀 열이 날 것 같군."

"동감이야, 렉스. 이 별에 존재하는 무기체를 싹 쓸어버려야 추위를 좀 잊을 수 있겠어."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이번 임무의 최대 난항은 험악한 날씨 뿐이었다. 보초병 몇 개체를 제외한 게스 개체들은 대부분 동면 상태로 잠들어있었고 중앙에 위치한 신호기를 부수고나니 이내 기지 내의 모든 생체신호가 사라졌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난 전투에 맥빠진 한숨소리가 들렸다. 기지 안은 결코 따듯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몰아치는 눈폭풍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아늑한 느낌이었다. 동면 중인 게스 포드를 향해 산탄총 몇발을 쏘아댄 렉스는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표했다.

"고작 이런 녀석들을 없애려 이 눈보라를 헤치고 왔다는 건가? 차라리 마코 캐논을 몇방 날렸으면 편했을 뻔 했군!"

신호기를 부수며 같은 생각을 했던 셰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임무에 신중을 기하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이건 지나치게 허무했다. 그 때 남은 잔당이 없나 확인하러 갔던 개러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셰퍼드를 불렀다.

"커맨더, 이 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이머가 있는데, 아까 신호기를 부순 시점부터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길 빠져나가야할 것 같은데요!"

세 사람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고, 이어 신속하게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자폭장치나 그런 종류의 것일 터였다. 기지 내에도 시끄럽게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고 급박하게 달려 렉스를 마지막으로 출입문을 빠져나온 순간 뒤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세사람의 헬멧 위쪽으로 후끈한 열기가 스쳐갔고, 다행히 파편에 맞아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휴, 잘 끝내놓고 엄한 데서 골로 갈 뻔 했군. 고마워, 바카리안."

주먹으로 가볍게 개러스의 어깨를 쳐서 인사를 표한 셰퍼드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 모든 위험이 사라진 걸 확인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휩싸인 기지의 잔해는 이 날씨 앞에 오래 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고, 노르망디로 복귀하고 나면 임무는 무사히 끝나는 셈이었다. 폭발의 열기에 추위가 조금 가신 세 사람은 한결 가벼운 얼굴로 멀리 보이는 마코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반쯤 걸어 마코의 검은 형체가 시야에 들어올 때 쯤, 선두의 렉스가 우뚝 멈춰섰다.

"셰퍼드, 방금 들었나?"

따라 멈춰선 셰퍼드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얼음이...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크로건의 청력을 의심하는 바보같은 일을 할 생각은 없던 셰퍼드와 개러스는 렉스의 말을 듣자마자 조심스럽게 발밑을 확인했다.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은 두께의 얼음이었지만 아까의 폭발이 영향을 줬을 수 있었다.

"어...달려서 빨리 벗어나자고 하기엔 좀 많이 남은 것 같지?"

"네, 커맨더. 조심해서 가야할 것 같습니다."

다시 세 사람 사이에 무언의 눈빛이 오갔고 이번엔 셰퍼드가 앞장서 아까보다 더 느릿한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깨질 위험이 있는 얼음 호수 위를 안전하게 걷는 법'같은 것은 얼라이언스 교본에도 따로 나와있지 않았기에 한발한발 내디는 발걸음이 몹시 불안했다.

그리고 눈앞에 대지의 경계가 보일 때쯤, 반쯤 마음을 놓았던 셰퍼드의 귀에 불안한 소리가 들려왔다. 찌이익 하는 불쾌한 소리는 셰퍼드를 둘러싸고 퍼지는 듯 했고, 그녀가 뭐라 주의를 던지기도 전에 셰퍼드의 발밑이 무너졌다.

"커맨더!"

"셰퍼드!"

두 사람의 외침 너머로 아머 너머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수 없는 수준의 한기가 엄습했다. 물속으로 잠겨드는 그녀의 어깨를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고 모든게 슬로우모션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 보였다. 어지러운 시야가 물속과 바깥을 번갈아 비췄고 셰퍼드는 물속에서 그를 붙드는 개러스와 그런 두 사람을 한꺼번에 붙잡아 끌어올리는 렉스를 바라보다가 눈앞이 깜깜해졌다.



- 와, 진짜 스쿼드 멤버에 렉스가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죠.

"크로건은 만능이 아니다. 나까지 빠졌다면 아마 얼음호수 안에 세 종족의 얼음동상이 박제됐겠지."

- 어쨌든 결과적으로 모두 무사하잖아요. 중요한 건 그거죠.

익숙한 수다스러운 목소리와 묵직한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셰퍼드는 감았던 눈을 떴다. 직전까지 느꼈던 한기가 꿈인 것 마냥 그녀가 있는 공간은 온기가 가득했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차콰스 박사가 셰퍼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 일어났군요. 셰퍼드. 좀 어떤가요?"

셰퍼드는 몸을 일으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보았다. 조금 뻣뻣한 느낌은 있었지만 크게 이상한 곳은 없었다. 주위를 살피자 끝쪽 침대에 멀뚱히 앉아있는 렉스와 그녀의 옆자리에 누운 개러스가 눈에 들어왔다.

"별 문제 없어요. 어떻게 됐던 거죠?"

렉스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앞쪽 얼음이 깨지며 셰퍼드 네가 물에 빠졌고, 저기 물불 안가리는 투리안 녀석이 널 건지겠답시고 가까이 가다가 얼음이 더 갈라지는 바람에 같이 빠졌다. 다행히 내 쪽 바닥은 무사해서 내가 너희 둘을 건졌고, 추위에 쇼크가 왔는지 둘다 뻗는 바람에 마코까지 둘 다 끌고가느라 고생을 좀 했지. 마코 운전은 생각보다 할만하더군. 역시 셰퍼드 네 운전실력이 별로인 것 같다."

무뚝뚝한 렉스의 말투 덕에 셰퍼드는 잠시 뒤에야 그의 농담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보같은 해프닝이었지만 렉스 말대로 자칫 큰일로 이어질 수 있을 뻔했단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고마워, 렉스. 덕분에 살았어. 개러스는 아직인가?"

"...좀 전에 깼습니다. 일어날 타이밍을 못 잡아서 듣고 있었어요. 고맙군, 렉스. 위험할뻔 했는데."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개러스는 하악을 작게 팔락이며 시선을 내렸다. 투리안의 감정표현은 익숙치 않았지만 아마 꽤 멋쩍은 듯 했다. 렉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고 셰퍼드는 그런 그에게 피식 웃어보였다. 차콰스는 개러스와 셰퍼드의 체온을 한번씩 체크하고 몇가지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하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세 사람을 향해 돌아봤다.

"좋아요. 둘 다 체크했을 때 큰 이상은 없었으니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고생들 했으니 보상으로 좋은 걸 드리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차콰스가 세 사람에게 내민 것은 쟁반 위에 놓인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세개의 머그잔이었다.      

"와, 초콜릿이네요. 노르망디에 이런 것도 실려있었어요?"

머그잔을 집어든 셰퍼드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코코아 가루는 얼라이언스 보급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당연히 아니죠. 내 개인물품이니 고마운 줄 알아요. 참고로 개러스 건 탈리 조라 양에게 받았어요. 두 사람 소식에 놀라서 올라오더니 개러스를 위해 선물로 두고 갔어요. 함께 못 나가서 미안하다더군요."

렉스는 낯선 느낌의 음료에 냄새를 확인하곤 머그잔을 입안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에게선 드물게도,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흠, 인간의 음식 중엔 제법 괜찮은 편이군."

개러스 또한 자신의 머그를 집어들고 후후 분 다음 조심스럽게 한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셰퍼드는 달콤하고 쌉싸름한 초콜릿의 맛을 음미하다가 문득 생각난 사실에 개러스를 바라봤다.

"바카리안, 투리안은 수영을 못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수영할 줄 알아?"

셰퍼드의 질문에 개러스는 눈을 옆으로 한번, 위로 한번 굴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못 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날 따라 물에 빠진 거야? 아니, 빠질 생각은 아니었겠다만...너무 무모하잖아."

"상황이 위급해보여서, 생각 없이...죄송합니다, 커맨더."

언젠가 조커가 '노르망디 크루들이 점점 커맨더를 닮아서 점점 무모해지는 것 같아요'하고 불평했던 걸 떠올리며 셰퍼드는 미소가 입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차피 같은 상황이었으면 셰퍼드도 그다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을 알았기에.

"어쨌거나,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야. 두 사람 다, 수고 많았어."

셰퍼드는 건배하듯 머그잔을 치켜들었고, 렉스와 개러스도 가볍게 잔을 들어보이고 이내 진료실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추위에 관한 크로건식 농담과 투리안식 괴담이 오가는 가운데, 노르망디의 하루가 무사히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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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3 배경. 시타델 침공 전 어드메쯤.

*

- 모든 일이 끝나면, 사막에 가보고 싶습니다.

사막. 그와 어울리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고 까끌까끌한 모래의 감촉과, 오아시스를 품은 건조한 바람을 닮은...테인.

- 그래요, 모든 일이 끝나면...함께 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

결사임무가 끝나고도 그들에게 여유를 즐길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짧은 휴식이나마 최선을 다해 함께 보내려 노력했다. 상륙 휴가가 주어지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유행하는 영화를 보러 가고, 야경을 감상하며 강변을 걷는 평범한 연인 같은 데이트를 즐겼다.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녀의 과거, 그의 과거, 두 사람의 현재.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둘 중 누구도 미래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 함께 사막에 가요.

다만 그 하나의 약속만은 언제 올지 모를 그들의 미래를 상징하듯, 언제라는 말도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입버릇처럼 화제에 올랐다.
사막의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하다든가, 오아시스 근처에 있다는 시장에서 군것질을 하고싶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사막에 가려는 계획을 결코 구체화하지 않았다.

*

셀수없이 많은 선에 연결된 그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기계에 잡아먹힌 것만 같았다.
모니터를 통해 규칙적인 심박소리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다시...눈뜰 수 있을까?

셰퍼드는 링겔바늘이 꽂힌 창백한 녹색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다시 이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걸 느낄수 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낮은 목소리가 시하, 하고 부르는 걸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재판에 소환되어 지구로 돌아가기 전, 테인과 단둘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나는 노르망디에서 내려야할 것 같습니다.

- 함께 가요. 지구에서도 지낼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아니오. 내가 이곳에 머물러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할수 있는 일은 리퍼의 침략을 대비하는 것 뿐인데, 일개 암살자에 불과한 나는 당신 곁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점차 무뎌져 가는 이 몸은...오히려 방해만 되겠지요.

- ...어디로 갈건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시타델의 병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반년만에 보는 그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병이 깊어져서, 병원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중요한 싸움을 앞둔 그녀 곁에 함께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숨쉬는 것조차 쉽지 않다며 씁쓸하게 웃는 그를 두고 돌아서야 했다.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에도 그녀는 바로 병원으로 향할수 없었다. 수행하던 임무를 마치고 시타델에 도착하기 전 다행히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추가적으로 소식을 전달받았다.

"테인."

그녀는 다시 떠나야했다. 그가 깨어나길 기다릴만한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돌아올게요. 조금만 더 버텨줘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내가 돌아오면..."

모든 일이 끝나면. 셰퍼드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이 모든 일이 과연 끝나기는 하는 걸까? 이토록 거대한 적 앞에서, 그들이 정말 이겨낼 수 있을까?

"사막으로, 가요."

함께, 단 둘이.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곳으로.

*

ㅇ님께 키워드 받아서 쓰던건데 끝난듯 안끝난듯 하다...영원히 내 아픈 손가락 테인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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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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