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2017. 9. 29. 23:3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셀린느 여제는 그녀의 측근들을 거느린 채 그녀의 챔피언인 서 미셸을 호위로 대동하고 올레이 대학의 웅장한 챈트리 안뜰을 가로질렀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교수진이 모였고, 다가서는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아침햇살 아래 대리석 벽면이 갓 내린 눈송이처럼 반짝였다. 안뜰의 석조 바닥은 진주모 갑옷을 입고 카넬리안 색 불꽃을 등 뒤에 두른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인 얼굴의 안드라스테가 모자이크로 수놓아져 있었다. 셀린느는 마지막 방문 때 사람들의 발길과 무관심 속에 군데군데 부서진 모습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보수된 모자이크에 흡족해했다.


  안드라스테의 모자이크 상은 라피스 라즐리 빛 눈으로 뜰에 그 이름을 부여하게 한 챈트리 안뜰을 바라봤다. 이곳은 대학 내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로 빛나는 한 쌍의 청동 돔이 우뚝 솟아 있어 학생들이 농담 삼아 "안드라스테의 유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학장이 그 사실을 셀린느에게 굳이 말할 리는 없었다.


  거대한 구리문 너머, 안드라스테와 사도들의 벽화 너머로 돌 위에 금으로 새겨진 빛의 성가가 적혀있었다. 잘 배운 아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기쁨이다. 학장과 다른 교수들은 셀린느가 측근들과 함께 안드라스테의 모자이크 앞을 지날 때까지 그 문구 아래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황제폐하," 헨리 모락 학장이 말했고, 셀린느의 손짓이 있자 그와 다른 교수들이 고개를 들었다. "귀하신 방문에 영광이옵니다."


  "모락,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에 나는 그대와 그대들의 대학이 올레이의 미래를 위해 제공하는 지식과 지혜안에서 위안을 느끼네." 셀린느의 미소와 눈짓을 따라 두 명의 하인이 정밀하게 세공된 실버라이트 뭉치를 꺼냈고, 작은 금속뭉치 같던 덩어리는 이내 독창적인 방식을 거쳐 단숨에 작고 편안한 벤치로 형태를 바꿨다.


  서 미셸은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서 통로와 대리석 벽면의 창문에 시선을 향했다. 여제를 향한 어떤 위협에라도 깨어 있되 셀린느가 그녀를 섬기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는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락은 망설였다. 그는 사실 여제를 그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로 초대해, 셀린느의 방문 이유에 대해 논할 겸, 재능 있는 학생이 최근에 발표한 논문에 대해 자랑도 할 생각이었다. 모락 가문의 막내아들 치고는 상당히 단순한 디자인의 가면 아래, 그의 입술이 혼란과 불안으로 굳게 다물린 채 예상치 못한 이 실외 회담에 접근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셀린느는 그를 당황시킨 게 만족스러웠다.


  여제가 걸친 크림색 새틴 드레스는 알알이 꿰인 진주를 두르고 발몽 가문을 상징하는 자수정이 복잡한 무늬의 금사와 함께 수놓아져 있었다. 이 드레스는 승마복을 제외하면 그녀가 여제라는 지위를 가진 채 입을 수 있는 그나마 가장 가볍고 편안한 드레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마칠 쯤엔 그 무게 때문에 등과 허리가 뻐근해지곤 했다. 그녀는 실버라이트 벤치에 앉으며 언제나처럼 어떤 안도감이나 불쾌감도 그 얼굴에 떠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모든 올레이 귀족들이 공공장소에서 언제나 이용하는 얼굴의 반을 덮는 가면이 그녀의 감정을 감추는 걸 도왔다. 월장석으로 음각된 그 가면은 황금으로 광대뼈와 콧대를 강조했다. 보라색 사파이어가 눈가를 에워쌓고 염색한 공작새 깃이 머리 뒤쪽으로 뻗어 자수정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둥글게 휘감았다. 사파이어와 깃털은 다른 드레스나 특정 상황에 맞춰 교체할 수 있도록 돼있었다. 가면 아래 여제의 얼굴은 분칠로 하얬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모락 학장이 입을 열었다. "두시 교수가 쿠나리 사회의 열등함에 대해 다룬 그의  논문을 기꺼이 읽어드릴 것입니다. 제니비티 수도사의 초기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담대한 접근이 돋보이는 내용으로, 제 기억이 맞는다면 폐하께서 그의 초안에 관심을 보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네만," 셀린느의 짧은 대답은 모락이 오른편에 선 교수를 향해 반쯤 몸을 돌렸을 때 추가로 이어졌다. "내 생각에 그 파 볼렌의 대단하신 뿔 달린 지배자에 관한 논의는 겨울의 손아귀가 다가서는 이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 그가 다시 주의를 돌리자 그녀는 이어 덧붙였다. "어쩌면 그대들 중 하나가 수학에 관한 토의를 통해 날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내 나름대로 바이라니온의 정리에 대해 골몰해왔는데, 명망 높은 그대의 학자들이라면 그 증명법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테지."


  잠시 동안 웅장한 뜰 내부에 정적이 흘렀고, 학생들과 정원사들이 남쪽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가둬 기르는 새 몇 마리의 재잘거림만 들려왔다.


  모락 학장은 침을 삼켰다. 아무리 막내아들이라곤 하지만 그는 이보다는 나은 태도를 보여야 했다. 셀린느는 문득, 그의 속이 다 드러나는 감정표현 탓에 가문에서 그를 궁정암투에서 벗어나 학자의 삶을 살도록 쫓아낸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대학에 머무는 사이 그가 궁정의 사교 기술을 잊어버리고 만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간에,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폐하," 마침내 그가 말했다. "스스로를 너무 겸손히 낮추시는 듯싶습니다. 바이라니온의 정리는 극히 복잡한 공식입니다. 부끄럽게도 고백하자면, 수학을 탐구하던 저의 학구열의 파도조차 그 단단한 암초 해안에서 산산이 부서졌을 따름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수학적인 논증을 원하신다면 제가 발견한 특별한 비례에 관한 논문이 있는데, 자연 속에서 어찌나 쉽게 관찰되는 비율인지 마치 창조주의 손길이 닿은 것만 같습니다. 영광스런 기회를 주신다면-"


  "차?" 셀린느는 뒤에 선 수행인에게 손짓했고, 이내 불 없이도 물을 따듯하게 유지해주는 룬이 새겨진 우아한 은제 주전자가 나타났다. 다른 수행인이 이어 아침 햇살이 그 안에 담길 만큼 고운 안티바제 찻잔과 받침을 앞으로 내밀었다. "분명 그대들 중 바이라니온의 정리를 해독한 교수가 한명은 있을 테지. 올레이 대학이 티빈터 학자의 단순한 연구물 하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테다스 최고의 학당이라 할 수 있겠나."


  모락 학장은 그 말에 모멸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그가 귀족으로써의 자존심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닌 듯 했다. "폐하,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올레이대학은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 그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고, 그 이유는 티빈터 학자들이 마법사 군주들의 노예나 다름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종교적, 정치적 압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덕에 저희 뿐 아니라 나아가 올레이의 문화 전반이 크게 발전할 수 있던 것입니다."


  그래, 모락은 여전히 기회를 노려 논평을 던질 수 정도로는 궁정예법을 배웠을 터였다. 셀린느는 이 대화가 흥미롭게 흘러갈 수 있으리란 기대에 즐거워졌다. "학생 중에 하나라면 어떻겠나? 지난번 헬레네 백작부인과 말을 타던 도중 그이가 수학적 재능이 비견할 데 없이 특출한 젊은이 하나를 후원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그녀는 수행인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고 작게 한 모금 마셨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아이가 바이라니온의 정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에 관해 이야기한 덕에 나도 그 내용에 대해 찾아보게 됐다네. 레난, 아마 그런 이름이었지."


  "아, 맞습니다." 그제야 셀린느가 꺼내려는 이야기를 짐작한 모락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의 지원서를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배움의 문은 귀족의 피가 흐르거나 적절한 후원자를 두기만 했다면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열려있습니다, 그저 우리의 특별한 전통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야-"


  "말해보게, 모락." 셀린느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을 끊었다. "그대는 수학을 전공했지. 숫자 0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 차는 리베인 블렌드로 계피, 생강, 정향을 섞고 꿀을 첨가해 단맛을 더해 셀린느의 취향에 딱 맞았다.


  "예, 폐하." 잠시의 침묵 뒤, 이 질문이 학구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깨달은 모락이 대답했다. 그는 셀린느의 수행인이 불쾌감을 거의 감추지 않은 채 내민 찻잔을 받아들었다.


  "다행이군. 그건 바로 그대의 대학에 있는 학생 중 귀족 출신이 아닌 이의 숫자니까. 이에 관해 나는 조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군, 모락 학장. 지난번 우리가 대화한 후로 어느 정도 발전이 있으리라 믿었는데 말이지."


  "폐하-"


  "차를 마시게, 모락. 나는 그대에게 이 홀을 농노들이 헤집고 다니도록 하라고 명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평민들 중 혈통을 넘어서는 재능을 타고난 이가 이를 알아본 귀족에게 적절한 후원을 받는다면 올레이를 위해 발전할 기회를 줘보라고 한 거지."


  컵받침을 쥔 모락의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말씀하신 그 젊은이 말입니다만, 그는 엘프입니다, 폐하."


  셀린느는 황실의 문장을 새긴 실버라이트 갑옷을 입고 기품있게 서있는 그녀의 챔피언, 서 미셸 드 셰빈을 돌아봤다. 그의 가문을 표시한 문장은 심장 부근에 새겨져 있었고, 그가 쓴 가면은 셀린느의 것을 단순화 시켜놓은 형태였다. "서 미셸, 내 기억에 슈발리에들은 눈썰미가 매우 좋았던 것 같군. 말해보게, 혹시 이 뜰 안에 이미 엘프가 들어와 있나?"


  서 미셸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폐하." 그는 거대한 청동 문 위의 챈트리 상징, 그 중에서도 벽화를 향해 손짓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벽화는 전설적인 화공 앙리 드 리다의 신심 깊은 성화로 안드라스테와 그분의 사도들을 재현한 것입니다. 앙리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엘프들은 아직 우리 올레이를 배신하기 전이었고, 우리의 우방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나 교황 레나타께서 엘프들을 향한 숭고한 거병을 일으켰을 때, 그분께선 엘프가 그려진 모든 챈트리 성화를 파괴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앙리 드 리다는 깊은 은총과 열정으로 탄원했고 이에 감복한 성하께선 이 작품을 남겨두시되, 앙리에게 이제는 이단이 된 사도 샬탄의 귀를 깎아내도록 명하셨습니다."


  셀린느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그랬지. 그리고 이 대학은 그 원본을 매우 신실하게 복제해온 것 같군. 모락, 저 안에서 샬탄을 짚어내 보겠나? 비록 귀 모양이 바뀌었다지만 그 큰 눈을 보면 구분하기 어렵지 않을 걸세."


  모락은 벽화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셀린느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입니다, 폐하. 챈트리와는 달리, 저희 대학은 역사에 대해 정확한 관점을 고수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자는 안드라스테께서 티빈터의 가혹한 노예제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바로 그 엘프입니다."


  "이토록 학문의 연구에 종교적 억압을 거부하며 싸워온 대학에서, 이런 문제에 있어서 레나타 성하 당신만큼도 굽히려 하지 않는다는 게 참으로 이상할 따름이군."


  "과연 수수께끼 같군요, 폐하." 서 미셸은 그렇게 대답하곤, 그 너머의 모락 학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학장은 찻잔을 길게 들이마신 후 받침 위에 내려놨고, 도자기가 맞닿으며 찰그랑 거렸다. "물론 저희도 헬레네 백작부인의 지원서를 다시 재고하는 것이 무척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올레이 제국도 그대들의 학문과 문화에 대한 헌신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네." 셀린느는 고개를 기울여 보이곤 일어섰다. 수행인 하나가 작은 실버라이트 벤치를 접어들었고, 셀린느는 다른 이에게 찻잔과 받침을 건넸다. "그럼, 종교 문제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이쯤 접어두고, 나는 이 작은 성소가 줄 수 있는 가르침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고 싶군. 내 기분에 대해 더는 심려치 말게, 모락 학장." 이어 그녀는 화해의 의미로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일을 마치면 그대가 말한 창조주의 손길이 묻어나는 특별한 비례수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군."


  교수들은 고개를 숙여보이곤 셀린느가 거대한 청동문을 향하도록 빠르게 옆으로 물러섰다. 서 미셸을 뺀 셀린느의 수행인들도 뒤로 물러서 자리를 지켰다.


  "미리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언급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폐하." 그가 웅얼거렸다. "이단자 샬탄의 이야기는 그리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셀린느는 돌아보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대를 믿고 있던 거지, 나의 챔피언."


  "안으로 동행할까요?"


  "안드라스테의 유방 안에서라면 충분히 안전할 거라 생각하네만." 셀린느의 말에 서 미셸은 문을 당겨 열었다. 미셸은 문 안의 공간에 어떤 위협의 조짐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여제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홀로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비해 훨씬 쾌적하고 선선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진홍색 빛이 나무 벤치 위로 깔리고 기름칠한 나무냄새가 성소 안을 채우고 있었다. 홀의 먼 끝에는 거대한 금빛 화로 안에 영원의 불길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고 이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곤 유일한 것이었다.


  성소 내부는 사제복을 입고 무릎 꿇은 붉은머리의 여인만을 위해 비어있었고, 여인은 셀린느가 다가서자 두 발로 일어섰다. "황제폐하," 여인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모락 학장과 엘프 문제로 논쟁한 것은 이날 아침의 진정한 시험을 준비하는 부드러운 전주곡에 불과했다. 셀린느는 눈앞의 여인에게 고개를 들라고 손짓했다. "교황 성하께서 만남에 응하시다니 영광이오."


  붉은머리의 여인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챈트리를 섬기는 다른 이들처럼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고, 완벽한 올레이식 억양에도 불과하고 그 외양은 퍼렐든 느낌이 났다. 가면은 올레이의 무수한 왕조가 세워지고 몰락하는 무자비하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게임'의 일부로 함께해 왔고, 챈트리 사제들이 고집스럽게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 관점을 넘어선 존재임을 강조하는 바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올레이 귀족들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폐하의 전령이 고한 바 그대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며, 교황께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십니다. 저는 그분의 대변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나이팅게일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가면 너머로 셀린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올레이의 여제는 누군가 그 앞에서 가명을 대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저스티니아는 분명 그녀가 깊이 신뢰하는 이를 보냈을 터였다.


  셀린느는 별다른 의식을 거치지 않고 벤치 위에 자리 잡았고, 그녀의 크림색 새틴 드레스가 거추장스럽게 구겨지며 자수정 장식과 나무가 닿아 달각거렸다. "나이팅게일, 그대는 템플러와 마법사 간의 고조된 긴장감이 익숙하시오?" 나이팅게일이 머뭇거리는 사이, 셀린느는 그녀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나이팅게일은 자연스런 우아함이 배인 몸짓으로 다가와 앉았고 그녀의 단순한 사제복은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다. 그 미세한 움직임은 분명 훈련받은 바드의 것이었고, 셀린느는 그 정보를 언젠가 쓸 요량으로 새겨담았다.


  "템플러들은 커크월 사태 이후로 훨씬 불안정해 보이오." 셀린느는 불길 속의 안드라스테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타오르는 붉은빛을 바라봤다. 수년간의 훈련은 시선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여인조차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도로시아께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이오?"


  그녀는 일부러 저스티니아 교황의 본명을 사용하고 시선 가장자리로 나이팅게일의 반응을 살폈다. 여인의 자세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두 눈만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분노일까, 무례함 때문은 아닌 듯 한데. 나이팅게일은 아마 교황의 본명을 부를 것이고, 어쩌면 그녀가 현재 위치에 오르기 전부터 알아왔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판단이 심박 한번 뛸 사이에 이뤄졌고, 나이팅게일이 입을 열었다. "교황께서는 커크월에서 터진 사건이 지나치게 열성적인 템플러들 때문에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만 미친 마법사 한 명의 실수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라십니다. 아시다시피 자유 동맹의 몇몇 지역에서는, 올레이에 비해 마법사들의 규제가 좀 더 강한 편이지요."


  "알고 있소." 셀린느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 만일 도로시아께서 템플러와 마법사를 화합시킬만한 행동에 나서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커크월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며 기도만 하고 있던 대주교 엘시나의 전처를 밟고 계신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이팅게일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여인은 이번에도 교황의 본명을 사용한 것에 대해 반응을 보였다. "저스티니아께서는 이 세계가 더 나은 곳이길 바라십니다, 폐하. 변덕스럽게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상황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시간을 주지 않기도 하오, 특히 마법이 연관됐을 경우엔." 셀린느는 단순한 사제복 차림임에도 교양 있는 레이디처럼 편안하고 안정돼 보이는 나이팅게일을 바라보며 한 가지 추측에 이르렀다. "마지막 대재앙 때, 퍼렐든의 한 마탑에서는 선임마법사가 타락의 괴물이 되어 거의 궤멸할 뻔 했다고 알고 있소. 괴물을 죽인 퍼렐든의 영웅은 탑의 남은 마법사들을 모두 죽여야 할 지 말아야할 지 결정해야만 했지."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이 먹혀들었고, 나이팅게일은 눈을 깜빡이고는 강한 열기를 품고 대답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게 아닙니다, 폐하."


  "우리는 언제나 전쟁 중이지." 셀린느가 대답했다. "그저 언제나 그걸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뿐. 마졸렌이라는 바드가 내게 했던 말이오. 그이가 퍼렐든에서 불운한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슬픈 일이지 않소,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조심스럽게 셀린느를 관찰하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제 생각엔," 마침내 그녀가 대답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군요. 그리고 부디 렐리아나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무쪼록." 셀린느는 작게 미소 짓고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스티니아 교황께선 아셔야 하오. 개인적인 면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달라 간청하는 귀족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충격 받은 얼굴의 렐리아나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올레이인들 중에는 우리가 안전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행군하길 원하는 이들이 있소. 내겐 달갑지 않은 일이오. 도로시아께서도 내가 원치 않는 일임을 알 것이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어떤 대안이라도 제공해야 하오."


  렐리아나는 생각에 잠겨 찌푸린 얼굴로 일어섰다. "폐하는 교황께서 상황을 해결하려는 명백한 표시를 보이시길 원하는 거군요."


  셀린느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떤 명백한 표시를 보이더라도 내가 제국을 내 멋대로 이끌기 위해 챈트리의 고삐를 풀어줬다는 불평을 피할 순 없을 테지." 그녀의 말에 렐리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스티니아께서 제국이 스스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지 않도록 그 성화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기꺼이 치르겠소."


  렐리아나가 웃어보였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스스로에 앞서 올레이를 우선시 하는 분이시군요, 폐하는. 통치자에게 값진 자질이지만 드문 자질이기도 하지요."


  셀린느가 따라 일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의 진홍색 빛이 그녀의 드레스 위를 뒤덮었다. "궁금한 게 있소. 어둠의 군주는 얼마나 거대했지?"


  렐리아나는 귀족 아가씨나 훈련받은 바드마냥 세련된 웃음을 터뜨렸다. 입고 있는 사제복이 형편없는 변장으로 보일만한 웃음이었다. "충분히 거대했답니다, 폐하. 그걸 본 이후론 어지간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더군요." 허나 그 얼굴은 이내 진지하게 굳어졌다. "저스티니아께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권해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이 자신의 권력을 굳히려 한다는 오명에 휩싸이지 않도록 폐하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물론이오. 그분의 이름하에 열리는 무도회에서 연설을 하는 건 어떻겠소?"


  렐리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분께서 그런 발언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닌 듯 싶습니다만..."


  "그러니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소?" 셀린느가 웃으며 대답했다. "또한 내게 행동에 나서라고 청원하는 귀족들이 그 연설을 듣고 말테니 이 문제가 충분히 다뤄지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겠지."


  렐리아나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폐하께서도 바드로 훈련받으셨겠지요, 당연히. 잊고는 한답니다. 그 제안을 교황께 전하겠습니다."


  "3주." 셀린느가 말했다. "길어도 한 달 이내여야 하오. 그 이상이 되면 나도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소. 귀족들은 그들의 겨울별장으로 향하기 전에 뭐라도 해결되길 바랄 테니."


  렐리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쪼록, 여제시여."


  교황의 스파이는 측면에 숨겨진 문을 통해 사라졌고, 셀린느는 벤치에 다시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훈련받은 몸가짐 그대로, 드레스자락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였다.


  3주나 더, 다른 귀족들을 충동질 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인 가스파르 대공과 이를 악물고 다퉈야 한다. 3주 동안 덜떨어진 템플러들과 마법사들이 세상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멍청하게 싸워대는 꼴을 계속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인내의 끝에는 그녀가 챈트리에게 더 큰 권력을 실어줬다고 꽥꽥대는 가스파르의 아우성이 있을 터였다, 마치 권력이란 게 한 번에 한 사람만 쥘 수 있는 검이라도 되는 것 마냥. 결코 그렇지 않았다. 권력이란 파트너와 함께하는 춤과 같아서, 어디로 이끌어야 할 지, 어디로 따라가야 할 지 알아야만 하고, 때론 적수의 드레스자락에 발을 헛딛는 것만으로도 멸시 속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는 것이었다.


  부주의한 손길로 다룬다면, 그런 권력은 테다스의 가장 위대한 제국조차 무너뜨릴 수 있었다. 셀린느는 올레이의 모든 문화와 역사를 수호해야 했다.


  한때는 그녀도 꽉 막힌 교수나부랭이를 뜻대로 굴복시키는 그런 일에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3주야." 나지막이 속삭이고, 셀린느는 잠시 동안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일렁이는 불길 같은 빛사위를 바라봤다.




* * *




귀족이 쓰는 반쪽짜리 가면은 대개 그들의 사용인의 가면에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유행에 따라 다양하게 구비하는 주인과 달리 화려함은 덜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주인의 가면이 상아로 조각한 사자 문양에 흑요석과 황금을 덧새긴 모양이라면, 그 사용인의 가면은 역시 사자 문양이되 검은색으로 칠하고 황동으로 선을 덧댄 식인 것이다. 이러한 가면은 그들이 거친 태도의 장인들이나 상인들을 대할 때, 그들에 대한 모욕이 곧 주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가문의 사용인들끼리는 가면을 동해 누가 잠재적인 아군인지 알아볼 수 있기도 했다. 혹은 잠재적인 적인지도.


  발 로이어의 왕궁에서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사용인들은 셀린느 여제의 가면을 본뜬 가면을 썼다. 여제의 가면은 월장석을 덧입힌 반면, 그들의 것은 에나멜 재질에 불과했고 상급 책임자 정도라야 상아를 덧입히고 금색과 보라색으로 칠을 한 것을 썼다. 발 로이어의 사용인들은 반쪽 가면 아래 추가로 얼굴을 하얀색으로 칠해 지위를 구별했다.


  방문객의 눈으로 보면 금색과 보라색을 덧댄 창백한 얼굴이 줄지어 선 모습은 전부 똑같은 사람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시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 딱 맞는 바지를 입은 남자들 모두 황실을 상징하는 색이 염색된 최신 유행으로 재단한 모양새였다. 경비병이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예를 들면 요리장이나 그 시종, 혹은 개인실을 청소하는 청소부처럼-만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사용인들의 이 반쪽 가면은 의례를 위한 것이지, 익명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가면은 브리알라의 엘프 귀를 가릴 수 있었을 테니.


  "거기, 너, 토끼야!" 대회랑을 지나던 브리알라를 시녀장이 불러 세웠다.


  브리알라가 돌아섰다. "네, 부인?"


  "쫓겨났구나, 그렇지?" 시녀장은 다시 대회랑으로 시선을 돌려 사다리 위의 하인들이 셀린느 여제의 발몽 가문을 상징하는 금빛 사자 깃발이 적절한 높이에 위치하도록 조절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소 같은 날이라면 네가 폐하의 몸단장을 맡는 게 허용되겠지만, 무도회를 위해서는 모든 게 완벽해야 하니까." 그녀는 작게 찡그렸다. "좀 더 위로, 그리고 왼쪽으로!"


  브리알라는 시녀장이 무도회를 준비하는 걸 셀 수 없이 많이 봐왔다. 여인은 언제나 짜증을 분출할 상대를 찾아내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그녀의 비꼬는 말에는 분노가 섞여있었고, 사용인들 중 브리알라가 평소 셀린느의 치장을 담당하는 하녀와 잘 지낸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잘 지내지 않고서는 서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면 아래로 흐트러진 잔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왕궁에서 일하는 이에게 절대 용납되지 않는 실례였다. 가면을 벗었다가 급히 써야했던 게 아니라면 시녀장 같은 사람이 놓칠 리 없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브리알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 셀린느가 수많은 황위 후계자들 중 한명이었을 때부터 개인시녀로 함께 지냈다. 그리고 지금, 브리알라는 발 로이어에서 대중 앞에 나설 때 가면을 쓸 자격을 가진 몇 안 되는 엘프 중 하나였다.


  "뭐, 그럼 다른 일에 도움이 되어 보렴. 주방으로 가서 요리장과 시종들한테 말을 전해줘. 아무래도 날씨가 건조한데 고기가 마르게 두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녀는 브리알라를 향해 돌아섰다. "지난 가을에는 말이다, 레이디 몽시마르가 말하길 마탑에서 내놓은 오리고기가 우리보다 훌륭했다지 뭐니." 가면 틈새로도 가늘게 뜬 눈이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걔들한테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다들 채찍질을 면할 수 없을 거라 전하렴."


  "알겠습니다, 부인." 브리알라는 깊이 고개 숙여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 왕실의 위계질서는 매우 엄격하고 뚜렷한 것이기에, 브리알라가 셀린느의 개인시종으로 그 질서의 사슬 밖에 따로 나와 있다 해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 너무 걱정하지 마렴, 토끼야." 시녀장은 친근하게 브리알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브리알라는 그 와중에 여인의 손목단추 하나가 풀려있는 걸 발견했고, 이 또한 시녀장의 옷시중을 드는 이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그저 그 게으른 것들에게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것뿐이란다. 절대 너를 채찍질 할 일은 없을 거야. 이제 가보렴."


  "네, 부인." 세 번째로 대답하고 나서, 브리알라는 깃발을 왼쪽 아래로 내리라며 소리 지르는 시녀장을 두고 물러섰다.


  그녀는 대회랑을 따라 걸어 내려갔고, 네바라제 카펫이 깔린 바닥과 고전적인 벽화가 걸린 소용돌이 모양의 스터코 벽을 지나며 브리알라는 생각했다.


  시녀장은 10년도 넘게 셀린느를 충직하게 모셔왔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매우 중요히 여겼고,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게 아니고서야 이런 무도회 날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풀려있는 손목단추와 지푸라기는 어떤 새 연인이 시녀장의 시간을 잠시 훔쳤던 흔적일 것이다.


  물론 그저 그 뿐일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발 로이어에서는 모든 것이 '게임'의 일부였고, 높은 위치의 사용인에겐 은밀한 치정 문제조차 그 일부에 포함됐다. 브리알라는 '게임'을 지켜보며 자라왔고, 셀린느의 밑에 있는 한 그녀는 언제나 이기는 쪽이었다.


  최악을 가정할 경우, 시녀장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문제에 휘말려 있는 것일 수 있었다. 셀린느의 곤경은 곧 시녀장의 곤경이었고, 창조주께 불경한 상상이지만 만약의 경우, 셀린느가 죽거나 권력을 잃는다면 시녀장 역시 당연히 교체될 것이다. 이 일이 그저 열정적인 불장난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라면, 시녀장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음모 속에서 움직이는 도구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누구의 도구냐는 것이다.


  부엌의 열기는 숨 막힐 정도였고, 온갖 지역의 다양한 요리가 준비돼 있었다. 요리장 라일렌은 덩치 크고 혈색이 좋은 여인이었고, 그녀의 두터운 팔뚝에는 어린 시절의 사고 - 이전 시녀장이 라일렌을 지나치게 주제 넘는다고 여긴 일을 "사고"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로 인한 화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브리알라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게임'의 복잡 미묘함을 다루는 일보다는 파이를 만드는 일에 뛰어난 이 여인을 지켜주려 노력해왔다.


  "브리아 아가씨!" 라일렌이 부엌에 들어서는 브리알라에게 활짝 웃어보이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저녁식사 전에 요기를 달랠만한 걸 원하시나요? 리다에서 들여온 맛있는 파이가 있거든요."


  "고마워요, 라일렌. 하지만 괜찮아요." 라일렌의 주방보조들은 몇몇 인간을 제외하곤 거의 엘프였고, 누구도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귀족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이들이었다. "시녀장께서 오리고기에 신경 써달라 하시더군요. 특별히...강조해서 말하셨어요."


  라일렌은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로 살피도록 할게요." 그녀는 밀가루 투성이의 손을 털어내고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에서 소스에 졸이는 중인 고기요리를 살피러 향했다.


  "그리고 혹시 일손이 남는다면 마지막으로 스케쥴을 변경한 게 있는지 시녀장께 확인하러 보내주겠어요?" 브리알라가 물었다.


  "물론이죠, 브리아 아가씨." 라일렌이 미소지었다. "확인하고 아가씨께 보내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브리알라는 부엌을 나서 왕궁으로 향했다. 대회랑에서는 깃발 위치를 고정시킨 시녀장이 테이블 정리를 지휘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회랑에 인접한 카드놀이용 접객실들은 거대곰가죽 깔개와 황금 마바리 조각상이 놓인 퍼렐든 식이나, 퇴폐적인 비단과 마법등이 놓인 티빈터 식처럼 각기 다른 나라 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발코니에선 대회랑을 내려다보며 신선한 공기를 쐴 수 있었고, 베란다를 통해 대리석 분수가 군데군데 자리한 미로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거기, 너! 뾰족귀!"


  가벼운 멸시를 담아 종종 사용되는 "토끼"라는 호칭이 브리알라가 가볍게 이를 악물게 하는 수준이었다면, "뾰족귀"는 어떻게 봐도 모욕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멸칭이었다. 인간들은 일하기엔 너무 게으르거나 뭔가를 훔치기에도 너무 멍청한 구제불능 쓰레기라는 의미로 그 단어를 썼다.


  왕궁경비대의 대장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경비대원 모두 그랬다. 암살자가 무장한 채로 섞여들어 여제 곁에 접근하기 너무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겼고 겉옷 아래 발몽 가문의 황금 사자문양이 새겨진 의전용 흉갑이 빛을 발했다.


  브리알라가 눈여겨 본 것은 그의 흉갑 고리 중 하나가 느슨해져 있다는 것과 한쪽 귀 아래쪽에 남은 키스마크의 흔적이었다.


  "흘끔거리고 다니면서 일은 내팽겨쳐둔 거냐, 뾰족귀?" 그는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여제께서 오늘 저녁 연회의 준비가 제대로 이뤄지는 지 확인하고 오라고 보내셨습니다." 브리알라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원칙대로면 경비대장은 그녀가 고개숙여야할만한 지위의 인물이었지만, 브리알라는 원하는 때에 그 원칙을 무시해도 될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훌륭한 이야기로군." 그는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좀 다른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훑어봤다. "혹시라도 좀 딴짓을 하고 싶은 거라면, 생긴 건 반반하니 그 얼굴 옆에 펄럭이는 지저분한 돌기 정도는 무시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한걸음 다가선 그가 정원이 보이지 않게 시야를 가렸다. "어쩌면 그걸 고삐처럼 잡아도 괜찮겠는데." 그에게선 땀 냄새에 섞여 라벤더 향이 났다. 시녀장이 좋아하는 향이었다.


  그녀는 한걸음 안쪽으로 물러섰다. "여제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선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걸었다.


  경비대장이 시녀장과 놀아나는 사이인 게 분명하고, 거기에 그녀에게 수작을 건 의도는 분명 그녀가 미로 정원을 보지 못하게 가리려는 것이었는데...시야를 가리기 위해 움직이기도 했고. 브리알라의 기억이 맞다면, 경비대장은 최근 선임자가 사망한 뒤 자리를 이은 사람이었다. 그 전까지는 군에 있었다. 어디 소속이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병사들 사이에 가스파르 대공의 인기를 고려하면...


  누구인지, 어디인지도 알아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대리석 위에 붉은 벨벳이 깔린 나선계단을 따라 서둘러 내려간 그녀가 미로 정원으로 향하는 문에 닿기 직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리아 아가씨!" 부엌에서 일하는 엘프 하나가 브리알라에게 달려왔다. "아가씨를 찾아가라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디지렐." 브리알라는 어린 티가 나는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뭘 찾았죠?"


  디지렐은 목소리를 낮추고 불안한 듯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시녀장께서 멜리센드레라는 바드 하나를 초대 명단에 올렸습니다."


  브리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혹시 라일렌이 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다면, 경비대장이 오늘 뭘 했는지 확인해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예요, 브리아 아가씨. 라일렌님이 아가씨 분부를 따르라고 했는걸요."


  "좋아요." 미로 정원을 향해 몸을 돌린 브리알라가 말했다. "저는 저 안에서, 사냥을 좀 하고 있을 게요."




***


  셀린느는 올레이 슈발리에들의 훈련을 봐왔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입단시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무 감판 위에 여러 개의 칼날이 설치된 기둥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하인들이 바닥에 숨겨진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면 칼날들이 회전하며 맹렬한 속도로 근처의 모든 이를 공격했다. 여름 축제 때면 용감한 젊은이들이 두텁게 속을 채운 튜닉을 걸치고 그 사이로 뛰어들곤 했고, 미리 무디어 놓은 칼날은 대개 도전자들의 자존심 외에는 아무 것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실제 시험에서는 칼날이 예리하게 벼려져있고, 병사들은 맨몸으로 시험에 응해야 한다고 했다.


  셀린느는 언제나 궁중 무도회가 그 입단시험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홀로 그 시험에 나서지 않아도 됐다. 그녀의 챔피언, 서 미셸은 군중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맨몸 차림이었지만 검만은 빼놓지 않고 몸에 지닌 채 언제나처럼 한걸음 뒤에 따라섰다. 그는 금색 공단 재질의 바지를 입고 드워프가 소 대신 키우는 가축의 가죽으로 만든 보라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검집에 새겨진 황금 사자는 보라색 사파이어로 눈과 갈기를 강조해놨고, 비록 다른 귀족들처럼 반지나 팔찌를 하지 않아 맨손 - 그는 검을 쥐는데 무엇도 거슬리지 않길 원했다 - 이었지만 그 가면에는 슈발리에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털이 꽃혀 있었다.


  "명령하실 게 있습니까, 폐하?" 그는 그녀에게만 들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셸은 이런 행사 때 거의 말이 없는 편이었고, 셀린느는 그 점을 좋아했다. 챔피언으로서 그는 자신보다 그녀에게 주목이 쏠릴 수 있게 그녀의 일부로 존재해야 했다. 그는 '게임'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제법 예리한 눈을 가졌고, 적절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는 선임 챔피언이 암살 시도를 막다가 사망한 이후, 벌써 10년 째 그녀를 섬기고 있었다.


  "브리알라가 알아낸 사실을 전달 받았나?"


  "수풀 속의 검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폐하." 낮고 차분한 목소리와 움직임 덕에, 그들은 마치 음료 테이블에 놓인 와이번 얼음조각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멜리센드레라는 바드를 눈여겨보게. 거기서 시작될 테니."


  "이번에는 부디 종교적인 성화 해석 시험에 들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셀린느는 가볍게 웃었다. "혹시 그런 불상사가 생긴다면 꼭 미리 언질을 주겠네."


  가스파르의 바드 멜리센드레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여름의 끝과 잃어버린 사랑을 노래하는 동안 셀린느는 적과 아군, 독지가와 잠재적 적수가 뒤섞인 전장으로 들어섰다.


  "황제폐하." 눈이 마주치고 벨룬에서 온 샨트랄 백작이 고개를 숙이자 그의 진주 가면에 달린 흑진주가 사그락거렸다. "폐하의 광영에 가을을 맞아 떠나던 철새들이 여전히 여름인 줄 알고 머무르겠습니다." 샨트랄은 그녀에게 꾸준히 구애해온 구혼자였다. 그의 뚜렷한 충성심과 서투른 '게임' 실력 탓에 셀린느는 되도록 그 기대를 꺾지 않는 한에서 편안하고 친근한 거리를 유지했다.


  셀린느의 가슴이 파인 상아색 드레스는 옐로 다이아몬드가 풍성한 금빛으로 반짝이며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대조를 이뤘다. 커다란 보석은 드레스를 빛냈고, 가슴에서부터 손목까지 노란색에서 금색으로 짙어지는 리본 위로 눈물모양의 호박이 줄지어 달려있었다. 그녀의 가면은 깃털 장식만 금세공으로 바꿔 달았을 뿐 아침에 쓴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대의 다정함이 셀레스틴 호수의 따스한 물결처럼 나를 위로하는군." 셀린느가 대답했다. "비록 겨울의 손아귀에 새들이 떠나거나 죽음을 맞이할 지라도, 그들은 벨룬의 봄 하늘을 다시 우아하게 노닐 걸세."


  자리를 옮기자 이어 레이디 몽시마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가면 위로 올레이 마탑의 수석마도사가 선물한 리륨 크리스탈이 두 뺨을 장식하고 있었다. "코신느." 그녀는 여인이 깊은 예를 표하는 모습에 친근한 태도로 응했다. "오랜만이군. 말해보게, 이번 오리 요리는 어떤가?"


  "소스가 아주 훌륭하네요, 폐하." 레이디 몽시마르와 그 남편은 여름 내내 가르파르 대공의 비위를 맞추며 보냈고, 지난 몇 해간 마탑을 미끼삼아 가문끼리 친밀하게 지내오고 있었다. 셀린느가 보기에 그 남편을 위험한 이였지만 아내는 다소 멍청했고, 여기 이 레이디 몽시마르는 작금의 마법사를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레이디 몽시마르가 덧붙인 말에 그 의심에 확신이 갔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마탑을 방문했을 때-"


  "오, 거기서 저녁을 먹을 땐 항상 주의해야 하지." 셀린느는 작은 웃음으로 그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그이들이 식사를 준비하면 언제나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나는 것 같으니 말일세." 그대로 지나쳐가는 그녀의  뒤로 레이디 몽시마르가 뻣뻣한 미소와 함께 더듬거리며 작별을 고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셀린느는 서 미셸이 불쾌해하는 눈으로 레이디 몽시마르에게 주의를 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셀린느가 그 상황에서 웃으며 '게임'을 이어갔을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레이디 몽시마르의 머리를 창끝에 꽂을 수도 있었다는 걸 알리는 경고였다. 그녀는 궁정마도사 마담 드 페에게 몽시마르 가문의 친-마법사 성향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을 기억해뒀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거닐며 인사말을 주고받고, 독으로 꾸며진 친절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막 대재앙에서 복구 중인 신흥 국가 퍼렐든과 올레이 사이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거래를 밀어붙여야 할까? 커크월 같은 사태가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귀족 자제들의 수학 장소인 대학에서 정말 뾰족귀를 받아들일까? 계속 미소를 유지해온 턱이 아파왔다. 미소는 반쪽 가면과 얼굴을 덮은 화장 아래서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감정표현이었다. 날이 선 단어들 사이로, 멜리센드레의 노래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스파르 대공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 가장이 끝났다.


  그 소리는 전장에서 깊게 울리는 포효 같기도 했다. 겁쟁이들과 사용인들은 사형선고라도 들은 듯 입을 다물었고, 귀족들은 그 무게에 휩쓸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셀린느 앞을 막던 인파가 갈라서서 대공과 그 옆에 선 검은머리의 바드를 향해 길을 냈다. 멜리센드레는 가면을 쓰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모임에 불려온 평민들이 으레 그러하듯 두터운 분장을 뒤집어썼고, 가스파르 대공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셀린느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다잡았지만 겉으로는 안색 하나 변함없었다. 그녀는 일생을 '게임'에 어울리며 살아왔다.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든,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하고 계획과 전략을 짰든 간에 언제나 두려움이 찾아드는 한 순간이 있었다.


  그 한 순간이 지나가고, 그녀는 가스파르 수하의 경비대장이 손님명단에 추가시킨 수상쩍은 바드를 향해 다가갔다. 서 미셸이 바로 뒤에서 그녀의 속도에 딱 맞춘 안정적인 걸음으로 뒤따랐다.


  멜리센드레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셀린느가 보기에 완벽하진 않았다. 두터운 분장은 실제 당황했을 때 얼굴이 붉어져도 티가 나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라면 일부러 뺨에 붉은 칠을 해서 모여 있는 귀족들이 볼 수 있게 했을 것이었다. 이런 미세한 결점을 - 굳이 실수라도 말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셀린느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사소한 점이지만 - 발견하자 갑자기 모든 게 쉽게 여겨졌다.


  "내 사촌께서 어떤 재치로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잠재우셨을까?" 관심이 집중된 고요 속에서 셀린느가 질문했다.


  멜리센드레가 불편한 듯 망설이는 사이, 가스파르는 머리를 살짝 숙여 무례를 간신히 벗어날 정도로만 예를 표했다. "황제폐하," 여전히 키득거리며 그가 대답했다. "저는 그저 이 아가씨의 노래가 '메그렌 왕의 마바리'라는 곡과 비슷한 멜로디 같다고 짚었을 뿐입니다."


  주위의 귀족들이 과장되게 즐거워하며 함께 깔깔거렸다. 셀린느는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좋은 첫 수였다. 그 노래는 올레이가 퍼렐든을 통치하던 시절까지는 별 탈 없이 인기 있는 곡이었다. 노래의 내용은 플로리안 황제 시절, 퍼렐든으로 억지로 보내진 불행한 메그렌의 이야기였다. 가사에서 이 불쌍한 귀족은 퍼렐든의 거친 문화에 매번 우스꽝스럽게 좌절하곤 했는데, 게걸스런 마바리가 그의 가면을 먹어치운 내용도 들어있었다.


  금지된 노래는 아니었지만, 퍼렐든의 마릭왕이 메그렌을 죽인 후로 그 인기를 잃은 노래였다. 옥좌에 앉은 뒤 셀린느는 두 나라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왔고, 거친 퍼렐든인들과 그 미개한 풍습을 비웃는 내용의 노래는 결코 다시 유행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순간까지는 말이었다.


  "행군 중에 부하들과 이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가스파르가 말했다. "그럴 때면 우리 올레이가 세계를 제패할 준비가 돼있던 시절이 떠오르더군요. 가여운 메그렌, 창조주의 보살핌에서 먼 땅에 갇혀, 개장수들 사이에 적응하려던 모습이라니." 그는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졌고, 상하의 모두 갑옷 같은 느낌을 주도록 은색으로 반듯하게 재단돼 있었다. 금색 가면은 출신 가문의 상징을 위해 에메랄드로 장식돼 있었고 긴 노란색 깃털이 꽂혀 있었다 - 서 미셸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슈발리에의 일원이었다.


  그는 퍼렐든의 대사 티건 구에린 남작과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남자의 맨 얼굴이 "개장수"라는 표현에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 시절은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지." 셀린느는 대사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올레이는 이처럼 고된 시기에 퍼렐든이 우리의 우방인 것을 기쁘게 여기네."


  티건은 기꺼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퍼렐든도 그렇게 바라옵니다."


  "물론이겠지요." 가스파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오, 음, 티건? 그리고 우리야 그저 두 명의 늙은 전사들일 뿐이잖소." 그는 대사의 어깨를 두들겼고, 티건 남작은 낯선 친밀감의 표시에 굳어졌다.


  "혹시 키우시는 개를 올레이에 데려오셨나요, 나으리?" 멜리센드레가 물었고, 검은 머리의 바드의 그야말로 천진한 모습에 주위에서 킬킬거렸다.


  티건은 주먹을 꽉 쥔 채로 그녀에게 돌아섰다. "그렇소, 이 무도회에는 아니지만. 그 녀석에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구려."


  그 말에 주위에서 웃음을 터져 나왔다. '게임'에 능숙한 이는 아니었지만, 이 퍼렐든 귀족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떻게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할 지 알만큼 영리했다.


  "언젠가 그대의 개를 꼭 봤으면 좋겠소, 티건." 가스파르는 그의 술수에 휩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우리 제국과 그대의 어, 왕국 사이의 친교를 기념하는 의미로 내가 그대를 위해 가져온 게 있소." 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사용인 하나가 녹색 벨벳에 싸인 길다란 뭉치를 들고 달려왔다.


  가스파르는 그 뭉치를 받아 진한 미소를 지으며 티건에게 내밀었다. 함정 속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피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대사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 포장을 벗겨냈다.


  그 안에는 브리알라가 셀린느에게 앞서 미리 알려준 대로 검 하나가 들어있었다. 퍼렐든제로 보였고, 실용적인 형태였지만 칼자루와 가드 부분에 장식이 있던 흔적을 보아 귀족이 쓰던 전투용 검인 듯 했다. 차고 다닐 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검날 위로 자자한 흠집과 녹이 슬어있었다.


  "가스파르 대공!" 미셸이 검과 셀린느 사이를 막아섰다. 회랑 안에는 어떤 무기도 들일 수 없었다. 암살자가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왕궁경비대가 입구에서 모든 짐을 체크하기 때문이다. 셀린느는 그제야 가스파르가 온갖 노력을 다해 저 뭉치를 숨겨 들어와 미로 정원에 감춰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러서게, 슈발리에." 가스파르가 검을 내려다봤다. "나라면 이걸 드느니 차라리 벽난로의 부지깽이로 사람을 찌를 테니." 그는 티건 남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건 가여운 메그렌을 괴롭히려다 잡힌 어떤 퍼렐든 귀족 여인의 시체에서 회수한 것이오. 모이라였나, 그런 이름이었지." 그의 눈이 재치 있는 농담에 금색과 녹색의 가면 너머로 반짝였다. "내 하인들은 이걸로 창고의 쥐를 죽이곤 했다오."


  티건은 마치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처럼 고요히 그 검을 바라봤다. 녹색 벨벳을 쥔 주먹이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그게 귀족의 검이었나요? 멜리센드레의 의구심을 품은 질문은 주위 사람들이 그 낡아빠진 검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에, 그리고 티건이 가스파르가 모욕으로 여길만한 말을 던지도록 하기에 딱 적당했다.


  아주 단순한 술수였고,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티건 남작이 분노를 터뜨릴 때까지 계속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순간 멜리센드레는 충격으로 숨이 막히는 시늉을 해, 아무리 눈치 없는 귀족이라도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게 할 것이다. 그러면 셀린느는 올레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 미셸이 티건 남작과 결투하도록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스파르가 슈발리에의 명예를 들먹이며 직접 나서는 꼴을 봐야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올레이와 퍼렐든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고, 멍청하고 쓸데없는 전쟁에 한발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가스파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무대였다.


  이 모든 것이 셀린느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사이, 가스파르는 그 검을 살짝 비틀어보였다. "글쎄, 그 여자는 자신을 저항군 여왕이라고 불렀지. 실상은 도적떼나 용병단 우두머리에 가까웠지만 말이야. 그 여자는 자신이 우리를 퍼렐든에서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그리고 그 분은 옳았습니다." 여전히 가스파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티건이 대답했다. "그 분의 아들이신 마릭왕께서 당신들을 우리 왕국에서 몰아냈으니까요."


  "모이라가 그 꼴을 살아서 못 본게 아쉽구려." 가스파르는 진한 미소를 띠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 여자에게 당신네 그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있기만 했다면..."


  몇몇 귀족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쯤 되니 티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셀린느는 그의 어깨가 굳어지고, 가스파르가 기다려온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티건 남작."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20년간 통치해왔고, 군중을 휘어잡는 목소리를 내는 법쯤은 잘 알고 있었다.


  반쯤 입을 연 채로, 퍼렐든의 대사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가스파르와 그녀는 충분히 오랜 시간 '게임'을 함께해온 친숙한 숙적이었기에, 그녀는 그 사촌에게 작은 미소를 던지며 한걸음 나섰다. 썩 괜찮은 시도였어, 그 미소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정말로 성공할 만큼 똑똑해질 수도 있겠지...하지만 오늘밤은 아니라네.


  "황제폐하." 티건 남작의 목에는 핏대가 불거져 있었고, 그는 준비된 태도로 서 있었다.


  "그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검이 그대의 안에서 낡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 하군. 올레이가 퍼렐든의 저항군 여왕, 모이라 디어린의 죽음을 모욕했나?" 사람들이 저마다 숨을 들이키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그 명예를 되찾고 싶은가?"


  티건은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고, 가스파르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록 '게임'에는 무지할 지언정 바보는 아니었기에, 그는 셀린느의 모습과 태도를 확인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지고, 셀린느는 미소 지었다. 가스파르는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패배한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바드인 멜리센드레는 혼란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본 뿐, 자신이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셀린느는 미셸을 향해 작게 고갯짓을 했고, 그녀의 챔피언은 검을 뽑아들었다. 대회랑의 불빛 아래 파랗게 빛을 내는 실버라이트 앞에서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럼 그대의 명예를 되찾으시게." 셀린느는 퍼렐든의 대사에게 말했다. 


  "서 미셸?"


  "예, 폐하." 미셸은 검을 뽑은 채, 티건 남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명예를 청하는 자가 있고, 그대는 나의 챔피언이지. 귀족으로서 올레이의 명예를 지키는 결투에 나설 준비가 돼 있는가?"


  잠시의 지체도 없이 서 미셸이 대답했다. "아니요, 폐하. 저희가 도전받은 쪽이기에 결투에 쓰일 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결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아." 셀린느는 잠시 여유를 두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군. 나는 여전히 고쳐나가는 중인 양국의 관계를 사소한 불화 때문에 귀족의 피를 흘려 더럽히고 싶지는 않네." 그녀는 티건 남작에게 돌아섰다. "그러하니, 무기를 고를 나의 권한으로 이 결투의 무기를...깃털로 고르겠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폐하." 서 미셸은 그렇게 대답하고 망설임 없이 가면 옆에 꽂혀있던 길다란 노란색 깃털을 뽑아들었다.


  주위를 둘러싼 귀족들은 천성이 변덕스럽고, 유혈사태를 즐기고, 허영심이 강했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피가 낭자한 결투 사건을 즐기겠지만, 위트가 섞인 볼거리도 충분히 즐길 줄 알았다. 서 미셸이 그의 깃털을 들고 숙련된 검사의 정확한 자세를 취하자, 귀족들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티건 남작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녹색 벨벳 뭉치를 옆으로 내려놓은 뒤, 셀린느에게 누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제시여, 제가 미처 이 결투를 위한 무기를 지참하지 않은 게 후회되는군요. 제 고향의 풍습은 깃털보다 털을 선호한다는 것을 폐하께서도 아시겠지요." 그가 털로 둘러싸인 소매를 들어보이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인파 속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렇겠군." 셀린느는 가스파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패자가 승자에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 만족감을 주지 않기 위해 짓곤 하는 궁정식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촌이여, 그대는 우리의 퍼렐든 형제를 위해 첫 선물을 준비함으로써 그대의 관대함을 보였네." 그녀는 감사의 표시로 손짓했다. "그러니 두 번째 선물로 그대의 친절함을 보여주겠나?"


  가스파르는 눈을 깜박이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그는 빠르고 절제된 몸짓으로 그의 가면에서 깃털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전설적인 올레이 슈발리에의 영광스런 상징인 바로 그 노란색 깃털을, 바로 방금 전 그가 모욕한 퍼렐든 개장수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서 미셸과 티건 남작이 서로의 깃털로 겨루며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이, 셀린느는 웃음 띤 얼굴로 멜리센드레에게 분위기를 띄울 노래를 청했다.




* * *




  그날 밤, 브리알라는 셀린느 여제의 침실에 있는 거대한 전신거울 뒤에 숨겨진 문을 통해 찾아들었다.


  여제는 무도회를 마치고 목욕을 한 참이었고 - 무도회 후에 으레 그러하듯 - 진한 보라색의 부드러운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책상 위의 촛불은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겨우 비추는 정도였고, 방 안을 밝히는 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뿐이었다 - 가을의 창백한 달빛과 발 로이어가 발하는 주홍색 불빛.


  "그가 입을 열던?" 셀린느는 책상에 앉은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질문했다.


  브리알라는 그녀의 여제에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긴 금발머리는 아직 물기가 남아 달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네, 하지만 폐하의 귀중한 저녁시간을 방해할만한 내용은 없었어요. 폐하의 전대 경비대장은 이미 자신이 가스파르의 선물을 몰래 들여왔다고 자백했고, 폐하의 자비에 처분을 맡기겠다고 했거든요."


  "참으로 바람직한 결정이구나." 셀린느는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브리알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셀린느의 얼굴은 어릴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아, 그녀의 가면을 더 고급스럽게 다듬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섬세한 광대뼈와 도자기 같은 피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 "그럼 시녀장은?"


  브리알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셀린느는 호기심어린 미소로 재촉했다. 결국, 브리알라가 대답했다. "멍청하고 사랑에 눈이 멀긴 했지만, 불충한 건 아니었어요." 그 오리요리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채찍질을 당했을 라일렌과 디지렐을 떠올리며, 그녀는 덧붙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징벌이 있어야 그녀가 자신의 실책을 받아들이고 폐하의 성은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셀린느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일어섰다. "물론 그래야지." 앞으로 걸어오며 그녀가 대답했다. "가스파르 대공에 대한 이 밤의 승리를 생각하면, 관대함을 보일 법도 하지." 셀린느의 손끝이 브리알라의 목선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졌고, 작은 바스락거림과 함께 브리알라의 가면이 풀려내렸다. "무엇보다도 브리아,"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가면을 옆에 내려놨다. "우리는 사랑에 눈이 먼 실수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잖니."


  맨 뺨끼리 스치며 브리알라는 여제의 욕조에 사용한 장미와 금은화향을 맡을 수 있었고, 브리알라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나이트가운의 서늘한 자락 아래로 새하얀 맨살을 쓸어내렸다 .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라면."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손짓해 촛불을 껐다.

'Dragon Age > The Masked Empi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챕터 5  (0) 2017.11.02
챕터 4  (0) 2017.10.24
챕터 3  (0) 2017.10.03
챕터 2  (0) 2017.09.29
각 챕터 비밀번호  (0) 2017.09.23
Posted by 깜장캣
,

각 챕터별 기준입니다. 해당 챕터 내 문단을 기준으로 세면 됩니다.

챕터 2 : 첫 번째 문단의 여덟번째 단어(대문자 지켜서)

챕터 3 : 챕터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빼고)

챕터 4 : 챕터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빼고)

챕터 5 : 두 번째 문단의 첫번째 단어(대문자 지켜서)

챕터 6 :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두 단어(띄어쓰기 지켜서, 문장부호 빼고)

챕터 7 : 마지막 문단의 두번째 단어

챕터 8 :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의 첫 단어(대문자 지켜서)

챕터 9 : 마지막 문단 마지막 단어(대문자 지켜서, 문장부호 없이)

챕터 10 : 두번째 문단의 두번째 단어

챕터 11 : 마지막 문단 뒤에서 일곱 번째 단어(고유명사 그대로, 문장부호 지켜서)

챕터 12 : 마지막 문단 뒤에서 네 번째 단어

챕터 13 : 마지막 문단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없이)

챕터 14 : 마지막 문단 뒤에서 여섯 번째 단어

챕터 15 : 마지막 문단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없이)

챕터 16 : 마지막 문단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없이)

챕터 17 : 두번째 문단의 첫 번째 단어(대문자 지켜서)

에필로그 : 마지막 문단 마지막 단어(문장부호 없이)

'Dragon Age > The Masked Empi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챕터 5  (0) 2017.11.02
챕터 4  (0) 2017.10.24
챕터 3  (0) 2017.10.03
챕터 2  (0) 2017.09.29
챕터 1  (4) 2017.09.23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