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공개 된 바이오웨어 드래곤 에이지 4 관련 영상 번역입니다. 공식 영상에 자막 다는 기능이 없어서 스크립트만 참조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JPvKbUgOA&feature=youtu.be)

 

00:02
6년 전 저희는 2014년 게임 어워즈에서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된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의 수상을 위해 무대에 섰습니다. 그 후 저희는 새 시대의 기술을 드래곤 에이지 세계와 인물들에게 삶을 불어넣는데 사용할 방법을 상상해 왔습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이제는 여러분께 바이오웨어의 열정 넘치는 개발자들이 이 특별한 게임을 어떻게 빚어내고 있는지 처음으로 보여드릴 때가 된 것 같군요.

(음악)

00:34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저는 바이오웨어에 꽤 오래 있어왔고, 35명 규모였던 회사가 300명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는 걸 봐왔습니다.
00:44
그레이엄 스콧 (수석 게임 디자이너)
이 산업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단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00:48
(회의 중) "나 이 캐릭터 진짜 좋아해." (일동 웃음)

00:51
멜리사 자노윅스 (게임플레이 디자이너)
바이오웨어는 굉장히 실험적인 편이고,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가져와요.

00:57
존 레니쉬 (기술 감독)
우리는 언제나 발전하고, 개혁하고, 새로운 캐릭터들에 삶을 불어넣어 플레이어와 팬들이 즐길 수 있게 합니다.

01:07
매튜 골드만 (크리에이티브 감독)
드래곤 에이지의 세계는 모든 걸 갖추고 있어요.
새로운 개척, 서사, 수수께끼 같은 것, 가차없는 탐정 소설 같은 이야기요.
물론 전부 판타지 세계관에 잘 포장돼 있죠.

01:22
에스더 코 (수석 크리쳐 애니메이터)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바로 영웅이야! 드래곤 에이지 세계에서! 사람들도 구하고!" 이런 느낌을 느껴요.

01:26
루크 크리스트 잰슨 (수석 작가)
제게 드래곤 에이지는 플레이하고 싶은 환상적인 세계예요.

01:34
매튜 골드만 (크리에이티브 감독)
드래곤 에이지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기대가 돼요. 여기엔 독자적인 세계관, 독자적인 생태계, 독자적인 야생풍경과 독자적인 건축양식 등 흥미진진하게 탐험하고 발견할 것들로 채워져 있죠.

01:51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드래곤 에이지 차기작에서는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장소들을 보고, 그 안에서 살고 자라온 사람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요.

02:03
패트릭 위크스 (수석 작가)
지금 제작 중인 게임 안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힘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려 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이예요.

02:14
존 에플러 (내러티브 감독)
차기작에서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과 당신이 만들 친구, 가족들에게 집중하는 이야기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02:23
젠 셰버리 (Associate Producer)
드래곤 에이지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게임 캐릭터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진짜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예요.

02:31
존 레니쉬 (기술 감독)
우리는 캐릭터들이 아주 사랑받거나, 혹은 미움 받기를 원해요. 가장 좋은 예로 솔라스가 있죠. 팬들 중 절반은 그를 죽이고 싶어 하고, 다른 절반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해요. 둘 다를 원하는 분들도 있고요.

02:40
가렛 데이빗-로이드 (솔라스 성우)
그들은 나를 공포의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그들은 당신을 뭐라고 부를까요?

02:48
에스더 코 (수석 크리쳐 애니메이터)
바이오웨어와 EA는 모션 매직 테크놀로지의 선두주자였어요. 그 덕에 캐릭터들이 걷고, 움직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죠.

03:00
실비아 페케테쿠티 (작가)
플레이어들은 이 허구의 디지털 픽셀 모음이 진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그 아슬한 긴장감을 원해요.

03:08
한지영 (벨라라 성우)
아냐 아냐, 괜찮아! 이건 좋은 징조의 울림이야!

03:13
(아티스트 분 성함이 안나옴)
저는 보스 몹 디자인을 하는데, 크리쳐 디자인 팀에도 도움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이 마주할 그 거대한 위협들을 만드는 거예요.

03:19
아이크 아마디 (다브린 성우)
누구도 내 눈 앞에서 죽게 두지 않겠다! 워든을 위하여!

03:23
안드레 가르시아 (게임플레이 감독)
드래곤 에이지 프랜차이즈에서 중요한 선 선택지예요. 당신이 내린 선택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03:30
카트리나 바크웰 (RPG 프로그래머)
이 선택이라는 건 파티 동료가 사느냐 죽느냐 같은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와 반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기도 하고요.

03:42
(이름 안나옴)
저는 드래곤 에이지가 제안하는 가능성들을 사랑하고, 기꺼이 그걸 탐색하고 싶어요.

03:48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제게는 바로 그런 것들이 아침에 눈을 뜨게 하는 원동력이고, 언제나 환상적인 기회인 겁니다.

Posted by 깜장캣
,

2016년 바이오웨어 온리전에 냈던 카피본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트레스패서 DLC 스포 포함.

 

 

*

 

비아투화 :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을 일컫는 말

 

*

 

  사랑하는 나의 베난,

 

  얇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쳤다. 첫 마디를 적고 난 라벨란의 손이 허공에서 머물렀다. 뒤에 이어질 내용을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적으려하니 쉽게 써지지 않았다.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손이 펜을 내려놓고 잉크병을 닫았다. 그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짚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추운 헤이븐의 겨울 하늘 아래, 나는 갈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지친 상태로 생전 처 음 보는 수많은 솀렌들 사이를 걸었어요. 하늘 위의 대균열도, 손을 태울 것 같은 녹색의 알 수 없는 마법도,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악마와 악령들도, 모든 것이 꿈속을 걷는 듯 한 꺼풀 너머의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 산 위에서 당신이 내 손을 잡아끌어 균열에 가져간 순간까지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순간. 그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세계의 구원이 달려있다고 했 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벨란은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혼돈 속에서 라벨란을 움직인 것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정의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살아남아서 클랜으로 돌아가겠다는 목적뿐이었다. 솀렌들이 그녀의 신에 대해 무지한 만큼 라벨란 역시 챈트리도, 안드라스테도, 메이커와 빛의 성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믿는 챈트리의 이념을 따라 심문회를 이끌겠다는 카산드라나 렐리아나의 신념은 존경할만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창조주를 신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임무를 하나씩 해결해나갔을 뿐인데 어느샌가 사람들은 그녀를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혐오의 눈길은 점차 경외와 신뢰의 눈빛으로 바뀌어 갔지만 라벨란은 점점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면 그녀는 솔라스를 찾았다.

  레탈란,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사실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호칭을 쓴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끼기엔 그는 이질적인 존재 였다. 데일리시도, 시티엘프도 아닌 동족의 이단마법사. 그는 분명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라벨란은 그가 머무는 헤이븐 외곽의 작은 오두막에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 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일상적인 잡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경우 가 많았다. 하지만 라벨란은 토론에 가까운 그들의 대화방식에 점차 적응해갔다. 솔라스는 그녀가 던지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가볍게 흘려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계에서의 신비한 경험, 그가 세상을 떠돌며 본 인간들의 이야기, 고대 엘프의 신화, 잊힌 그들의 역사,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담, 그가 들려주는 것들은 어떤 하렌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신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날도 라벨란은 솔라스가 가볍게 던진 질문에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솔라스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해도 비웃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되도록 바르고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사람에게 없는 강대한 힘과 불멸성 아닐까요?"

  "그 옛날에 우리 엘프들은 불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신은 있었습니다."

 

  솔라스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아니, 보통 그들의 토론에는 정해진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길을 열어주었고 라벨란은 그와 대화하며 자신이 얼마나 폭 좁게 생각해왔는지 새삼 깨닫곤 했다.

 

  "단순히 힘이나 수명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군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 아닐까요? 세상을 창조하고 새 생명을 창조하는 건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하잖아요."

  "전설이라는 건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사히 대균열을 봉인하고 테다스를 지켜낸다면 백 년 뒤쯤에는 당신의 손짓 한 번에 악마와 악령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겠지요. 그것이 백 년이 아니라 몇 천 년 을 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전에 솔라스는 그녀에게 어떤 영웅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었다. 그녀의 현재는 후대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란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니라 그들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의 기록이었다. 백 년 뒤 후세의 기록에는 그녀가 정말로 안드라스테의 화신이었다고 적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그마한 데일리시 클랜 출신의 평범한 엘프였다는 사실 같은 건 어디에도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가 믿는 신들이 사실은 강대한 힘을 가진 위대 한 마법사였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나요, 그럼?"

  "글쎄요. 세상을 창조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과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숭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레탈란."

 

  그날의 토론은 그렇게 끝이 났다. 라벨란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녀의 신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키퍼로부터 그들을 수호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믿고 따르는 이들을 수호한다는 신들은 그들이 할람쉬랄에서 쫓겨날 때 어디에 있었는지. 펜하렐이 그들을 장막 너머에 봉인해버린 탓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신들을 여전히 숭배해야 하는지. 키퍼 이스마토리엘은 그녀의 불경한 질문에 화내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간구하는 이들에게 신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들을 지켜주는 거란다."

 

  당시에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습관처럼 사냥을 나가기 전 안드루일의 석상 앞에서 기도문을 읊으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얼룩처럼 남아 맴돌았다. 장막 너머의 신들은 지금도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을까.

 

*

 

  혹자는 사랑을 두고 운명적인 것이라 하겠지요. 음유시인들이 첫눈에 반해 멈출 수 없는 이끌림을 따라 정신없이 빠져드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듯이. 나는 우리가 나눈 것이 그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해요. 우리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때에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들, 별 특별한 이유 없이 당신과 이야기하기 위해 찾아가던 나의 발걸음,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고 생각하던 작은 호기심, 그런 것들을 두고 운명적인 이끌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나 쉽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다가갔어요. 당신이 나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헤이븐이 무너지던 날, 라벨란은 그녀가 이제 다시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의 존재와 홀로 맞서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다. 어차피 성유골신전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기에,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을 지키는 데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걸으며 라벨란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이 길 끝에 살아남는다면, 정말로 그녀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비다쌀라는 솔라스가 그 모든 상황을 이끌었다고 했다. 닻이 그녀를 죽이지 않게 지키고, 심문회를 스카이홀드로 인도하고, 코리피우스에 게서 오브를 되찾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그녀의 죽음과 삶조차 솔라스가 의도한 거였다면 그들의 감정 또한 그가 이끈 것일까. 만약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어디부터가 그들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운명인 걸까.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 야영지에서 나눈 대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끼던 순간의 교감, 그 감정들조차 그에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까.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지게 된 호감조차도 그의 의도한 바였을까.

  라벨란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향하던 발걸음은 낯선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동질감 느껴지는 대상을 향한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정도 따라 변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올 때, 스카이홀드의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그가 머무는 원형돔을 향해 한 번 더 눈길이 갈 때, 야영지 천막 너머 부스럭거리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일 때, 라벨란은 서서히 그녀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영계에서의 키스는 다소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로 인해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그의 태도를 흩트려 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에게 끌리는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솔라스가 다시 키스해온 것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결코 충동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뿐더러, 그러한 충동이 그 안 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익숙한 가면 뒤로 자신을 감춰버렸다. 영계에서는 모든 게 쉽게 느껴진다는 변명 같은 말과 함께. 그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라벨란 역시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둘 사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간 듯했으나 정말로 그렇게 될 리는 없었다. 라벨란은 그와 이야기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연한 색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따금 그 시선을 깨달은 솔라스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한 번 벌어진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영계에서 보는 게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해도, 영계를 걷는 우리의 의식은 진실인 거죠?"

 

  마법사가 아닌 라벨란에게 영계의 개념은 아무리 들어도 모호했다. 그녀는 솔라스와 함께 헤이븐을 걸으면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인 걸까. 막연하게 이해하려 해봐도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현실 같았다.

 

  "쉽게 왜곡되고 휩쓸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행동했다면, 거기엔 어떤 왜곡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라벨란은 무심한 솔라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했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현실보다 영계를 걷는 일이 편하고 즐겁다고 했던 그인데 자신의 의지로 한 입맞춤이 단순한 감정의 흔들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주인 대신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기대선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 서서 눈을 마주쳐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셔츠를 그러잡고 가볍게 당긴 것만으로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레탈란."

 

  라벨란은 발꿈치를 들어 솔라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 한번, 그리고 다시 입술에 한번. 그리고 뒤로 물러서기 전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뒤로 물러서 마주한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면 그녀의 착각일까. 

 

  "나는 진심이었어요."

 

  아마 얼굴이 붉어져 있겠지만, 라벨란은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문을 나서기 직전 돌아보았을 때 얼핏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는 솔라스를 본 것 같았다.

 

*

 

  마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 작은 불꽃일 무렵에는 작은 손짓 한 번으로 쉽게 꺼트릴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게 두었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거예요.

 

  붓을 잡은 손이 느릿하게, 무게를 싣고 선을 그린다.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섬세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손놀림에는 이미 같은 행위를 수백 번, 수천 번은 한 것 같은 능숙함이 묻어있다. 그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 어느 잠 오지 않는 새벽에 스카이홀드를 돌아보던 라벨란은 당연히 비어있을 거라 생각한 그의 거처에서 장막화염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솔라스는 그녀의 기척에 잠시 눈짓만 해 보이곤 별다른 말없이 계속 작업에 집중했다. 그 무언의 허락에 라벨란은 종종 쉽게 잠이 들지 않을 때면 그의 작업을 지켜보러 원형돔으로 향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그를 보러 내려가기 위해 밀려드는 잠을 애써 깨우는 때가 더 많았다.

  라벨란은 예술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의 그림 실력이나 그림에 담긴 상징과 의미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평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는 색다른 열정이 느껴 졌다. 그림과 그 자신 외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은 집중한 눈을 보고 있자면 은근한 질투심마저 들었다.

 

  "그림은 누구한테 배웠어요?"

  "따로 누군가에게 배운 건 아닙니다."

  "아, 또 그저 살다 보니 어디선가 익혔다는 거죠?"

 

  좀처럼 과거에 대한 단서를 흘리지 않는 그의 대화방식에는 어느정도 적응했다. 처음에는 그가 집중하는데 방해될까 봐 최대한 조용히 지켜보려 했지만 라벨란은 성실한 관객이 되기엔 예술적 소양이 부족했다. 어두운 주방을 뒤져 비스킷이나 사과 따위를 챙겨 자리 잡는 그녀를 보며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솔라스는 특별히 좋다 싫다 하는 말없이 그녀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에게 기습적인 질문이라도 던지면 자신에 관한 얘길 조금이라도 듣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라벨란은 여느 날처럼 그의 붓놀림을 지켜보다가,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들어 뒤적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초상화도 그려줄 수 있어요?"

 

  테이블 위에 엎드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는 방만한 자세를 죠세핀이 본다면 분명 인퀴지터의 체면을 운운하며 잔소리를 할 테지만 다행히 보는 눈은 없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진지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지금 그리는 것도 결국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그림은 읽어내기 어려웠다. 단순하게 축약되고 기호화된 이미지 속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어둠 속의 마법사들, 장막과 회색감시자 같이 큼직한 형상들뿐이었다. 라벨란은 굳이 그림의 의미를 캐물어서 예술에 대한 그녀의 무지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인퀴지터의 초상화라면 몽틸리예 대사께서 이미 좋은 화가를 구해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푸, 하고 반사적인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미 죠세핀에게 초상화 문제로 한참 시달린 후였다. 무슨 옷을 입을 건지, 어디를 배경으로 할 것인지, 심문회의 상징물로 뭘 들고 있으면 좋을지 등등 그녀에게는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정하는 데만 반나절은 걸린 듯했다. 그녀가 이 일로 불평하자 도리안은 실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열 배는 더 괴로울 거라 겁을 주기도 했다. 빛이 드는 창가를 배경으로 수 시간 동안 고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그건 순전히 심문회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잖아요. 그런 거 말고, 나는 당신이 내 얼굴을 보고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솔라스는 그제야 붓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원하던 관심을 끌었 지만 라벨란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언제나 묘하게 긴장됐다. 팔레트 위에 붓을 내려놓고 다가온 그가 가볍게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마주친 눈빛이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 라벨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에겐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내게 그럴 기회를 주긴 할 건가요?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라벨란은 이번엔 먼저 물러서기로 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위험신호가 울려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괜찮다. 지금 이대로 일어서 방으로 달려간다면, 그리고 다시는 새벽의 돔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불러일으키는 영계의 매혹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다면.

  하지만 라벨란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미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

 

  베난,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온기, 돔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면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얼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 이런 것들이 사랑을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 나를 사랑했겠지요. 나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몇 번이고 이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의 감정이 어떤 비극을 불러올지에 대해 경고하는 당신의 말은 당신 자신조차 멈추지 못했 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두려움을 나누겠다고 말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좀 더 빨리 진실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나의 감정에, 우리의 감정에 취해 눈이 멀어있던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을까요?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사랑이란 단어는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충분한 단어이긴 한 걸까. 대륙공용어의 ‘사랑’과 엘프어의 ‘lath’가 가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만큼,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을 한 단어 안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라벨란에겐 때때로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은, 특히나 어떤 이름을 붙이고 난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휩쓸려 가고 만다. 그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던 선은 그날 발코니에서의 키스 이후 너무나도 가볍게 무너졌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거리를 두려 한 그의 노력이 어떤 불안에서 기인한 것인지 라벨란은 알지 못했다. 솔라스는 마치 그때까지 억누른 감정의 반동인 것처럼 그 날 이후 세상없이 다정한 연인으로 변했다. 그의 변모에 놀란 것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내가 실실이라고 부르는 건 그 친구가 보통 입매만 슬쩍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에 대한 반어법이었지 정말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단 뜻은 아니었어."

 

  야영지에 모인 동료들은 솔라스가 없는 틈에 라벨란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아무 데서나 실실거리진 않는데요, 라고 항변하려 해도 그가 이전보다 더 자주 웃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세라는 예상했던 대로 질색하며 싫어하는 한편 그럴 줄 알았다며 의외로 유하게 받아들였다.

 

  "같이 있을 때면 그 반질반질한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거 엄청 뻔했거든! 축하한다고는 못 해주겠다. 알지?"

 

  세라의 말처럼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진 호의는 누구나 알 법한 명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벨란은 솔라스가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하려 했으나 라벨란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다른 연인들이 상대방을 사랑하게 하는 특별함과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사랑하기에 특별하다 믿고 싶었을까, 정말로 그녀가 특별하기에 사랑하게 되고 만 걸까.

  그들은 시작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난 지금에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리 진실을 알았다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정작 모든 걸 알고 있던 그조차도 자신을 멈추지 못했는데. 어느 밤,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내려다보는 솔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청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고요했지만 라벨란은 어쩐지 그 눈빛이 낯설었다. 서늘한 손끝이 그녀의 왼쪽 눈가를 따라 발라슬린을 그려냈다. 왜? 하고 입모양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어째선지 라벨란은 아다만트의 영계에서 보았던 그의 묘석을 떠올렸 다. 홀로 죽는 것. 모두의 두려움이 적혀있던 비석들 사이에서 유달리 그의 것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었다.

 

  "…솔라스."

 

  새벽의 정적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라벨란의 왼손이 그의 뺨을 스치자 희미한 녹색 빛이 그의 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라벨란이 이전에 본 적 없는 무방비한 얼굴 위로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빠르게 스쳐갔다.

 

  "베난."

 

  몸을 숙여 이마 위로 입맞춰오는 입술이 차가웠다. 누구보다 가까이 닿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선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벨란은 그런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껏 끌어안는 것으로 그에게도 따듯함이 옮겨갈 수 있다 믿는 것처럼.

 

*

 

  사랑에 눈이 먼다는 표현처럼, 나는 눈앞에서 나를 삼키는 절망을 마주하고도 물러설 수 없었어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우리의 감정이 위대한 과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당신의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의 어떤 애원도 당신을 되돌릴 수 없었지요. 어떻게 당신은 한결같이 사랑을 담은 그 눈으로 나를 보며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나요. 내가 어떻게 그런 당신을 그대로 놓아버릴 수 있었겠나요.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이 끝난다면 모든 것이 훨씬 간단해질 텐데. 라벨란은 모든 사랑이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상호합의 하에 이어지던 관계는 상대방이 끝을 선언하는 순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이다.

  분명 그녀의 삶은 홀로 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을 텐데도, 잠시 가졌던 온기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떠 빈 옆자리를 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대하는 솔라스의 태도였다.

 

  "인퀴지터,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말투도, 표정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말로 그녀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정말 그뿐이라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베난."

 

  그녀는 고집스럽게 그 특별한 호칭을 고집했다. 오히려 이전에는 쓰지 않던 단어였다. 미련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부를 때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솔라스의 눈빛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무삼림그늘에서 병사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병력이 정리되는 대로 코리피우스의 위치를 추적할 인력을 나눌 예정이에요. 따로 조언 해줄 만한 게 있나요?"

  "그는 이제 궁지에 몰렸을 것입니다. 그가 준비한 군대는 심문회 앞 에 무너졌고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 테지요. 우리가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지도 모릅 니다."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라벨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당신은 정말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배신과 속임수의 신이라 했던가. 그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거짓과 기만에 능했다면 그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한 번도 라벨란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벨란은 솔라스를 놓을 수 없었다. 장막 너머에 홀로 남겨진 지금까지도.

 

*

 

  수많은 밤을 괴로워했어요. 모든 것이 끝나면 알려주겠다던 진실은 내 손 안에 없었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 외에 무엇도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좀먹어갔지만, 괴로움과 비탄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어요. 함께 한 시간에 거짓은 없었다던 그 말을. 더 이상 당신의 무엇을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는 순 간에도 그 말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요.

 

  2년의 시간이었다. 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기도 했다. 라벨란은 그녀가 관성처럼 사랑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던 이는 이미 떠났는데,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이 했던 모든 약속도 맹세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녀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시간에 매여 있는 느낌이었다. 대균열이 사라지고 오브는 부서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녹색 균열이 남아있었다.

  균열의 통증은 하루하루 심해져 갔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언젠가 그것이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벨란은 죽음을 생각해도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을 발견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라벨란은 원형돔을 찾아가 솔라스가 사용하던 의자에 앉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밑그림뿐인 마지막 그림을 보고 있자면 대답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째서 떠난 건지, 들려주지 못한 진실이 무엇인지, 왜 말없이 떠나야 했던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끝에 따라오는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나를 사랑했나요, 정말로?

 

  더 이상 새벽의 돔을 찾지 않게 되고부터, 라벨란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로도 보낼 수 없는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사소했다. 오늘은 세라가 드디어 제대로 된 건포도 쿠키를 처음으로 구웠어요. 컬렌이 청혼을 거절한 오를레의 공작영애가 스카이홀드로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소동이 있었답니다. 침대 장식을 연녹색으로 바꿔봤어요. 당신은 붉은 천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다 쓴 편지는 심문회의 인장으로 정성스럽게 봉인한 뒤 난롯불에 불태웠다. 그녀의 새로운 습관을 알아차린 렐리아나는 ‘흔적이 남지 않게 잘 태워주세요, 인퀴지터.’하고 짧은 코멘트만 남겼을 뿐 그 이상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아마 그녀가 상처를 딛고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벨란은 그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그녀를 불태우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커져 가는 불길이 언젠가 그녀를 집어삼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라벨란은 열병 같은 사랑을 놓지 못했다.

 

*

 

  그리고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기대했던 방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갈 수밖에 없던 당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의 Din’anshiral은 내가 함께 걸을 수 없는 길이었지요. 함께 걷게 해달라던 내 바람은 당신에게도 내게도 불가능한 선택지였고.

당신은 내 손에서 균열의 흔적과 함께 2년간의 의문과 불안, 고통도 가져가 버렸어요. 내가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은 웃을까요.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는 당신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내 마음을 이어나갈 수 있는 대답을 얻었는걸요.

 

  혼자 가야겠어, 하고 말하는 라벨란에게 동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엘루비앙 너머로 돌아온 그녀는 녹색빛이 꺼져가는 왼팔을 도리안에게 내밀었다.

 

  "팔을 잘라야겠어.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인퀴지터! 대체 무슨 일이…. 솔라스를 만났어?"

 

  라벨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만난 건 펜하렐이었다. 그들이 알던 솔라스는 그곳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을 무시한 채 라벨란은 옆구리에서 단검을 뽑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이를 악문 채 칼을 치켜든 그녀를 카산드라가 붙잡았다.

 

  "…단검으로는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거야. 내가 할게."

 

  라벨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쥔 단검을 입으로 가져가 이 사이에 물었다. 검을 꺼내 드는 카산드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리안의 지팡이 끝에 불꽃이 맺혔다. 라벨란은 눈을 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겨울궁에 돌아와서 모두를 모아두고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을 전했다. 숭고한 의회는 심문회의 규모를 줄여 챈트리 밑으로 들어 가겠다는 라벨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막으려면 그들에겐 아직 힘이 필요했다.

  오가며 마주치는 이들이 더 이상 그녀의 빈 소맷자락을 흘끔거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라벨란은 하얀 늑대가 찾아오는 꿈을 꾸기 시작했 다. 달빛만이 어슴푸레 비치는 숲 속에서 그들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라벨란은 거듭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솔라스,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답을 알고 있었다.

 

*

 

  아마 이 편지가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라 생각해요. 아무래도 한 손으로 쓰는 글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나는 빈 자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Var lath vir suledin. 나는 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이 시간을 견뎌낼 것을 믿어요.

  사랑하는 나의 베난, 나는 내 마음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이 사랑으로 당신을 찾아갈 거예요. 내가 줄 수 있던 내 마음, 내 영혼, 내가 지키고 추구하던 모든 것들은 이제는 모두 잿더미 속에 잔해로 남아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가져갈 수 있는 건 내가 주는 죽음뿐이겠지만,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걸 나는 알아요.

  내 사랑,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나는 당신의 가슴에 칼을 꽂을 거예요. 그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 순간 당신이 지어 보일 표정을 상상해봐요.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질 때면 보이곤 하던 조금 놀란 듯한,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짓겠지요.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서로를 품에 안는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거예요.

 

  잔 구김 하나 없이 바르게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심문회 문장이 박힌 도장으로 봉투를 봉했다. 라벨란은 봉인 위로 한번 입을 맞추고 촛불에 봉투를 가져갔다. 모서리 끝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봉투를 완전히 불살랐다. 책상 위로 검은 재가 내려앉았다.

 

===

 

2016년에 바이오웨어 온리전에서 판매했던 솔라벨란 카피본을 전체공개로 전환합니다. 이전에 구매해주신 분들, 새롭게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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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신년'과 '축제'.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스카이홀드 광장 가운데 커다랗게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로 축제가 한창이다. 퍼렐던의 신년 축일은 오를레에 비해 가볍고 쾌활한 분위기이다. 사람들은 축일 오전에 짧은 예배를 드리고 서로에게 덕담을 건넨다. 마을 공동체 단위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밤이 오면 묵은 해의 액운을 부적에 담아 불태우는 의식을 치르며 새로운 해의 운을 기원한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나무 둥치에 앉은 솔라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활기가 그에게까지 미처 전해지지 않은 듯 그의 표정에선 특별히 들뜬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고요한 그의 시선 끝에 라벨란이 있다. 그녀는 류트 반주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무리 한 가운데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 평소 단정하게 차려입던 예복이 아닌 가벼운 평상복 차림을 한 그녀는 축제를 맞아 그녀의 무거운 책무를 내려놓은 듯 한껏 신이 나 있다. 자유롭게 풀어헤친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새빨갛게 상기된 두 뺨 위로 모닥불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잔뜩 흥에 겨워 누구든 앞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도는가 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는다. 심문회 사람들은 그들의 인퀴지터가 신분이나 종족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럼 없이 어울려 오는데 익숙하다. 사실, 왼손의 빛나는 앵커와 데일리시 특유의 발라슬린을 제외하면 그녀를 일반 사람들과 구분지을만한 특별한 특징은 없다. 지금처럼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때면 더더욱.

 

  "반짝이고, 바스락거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 손에 잡힐 듯 다가와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귀 옆에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솔라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친구를 돌아보았다. 콜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라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아. 기꺼이 손 안에 머물 거야."

  "네, 맞습니다. 콜."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연민의 영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했다. 연주하던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사이에서 라벨란이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숙여 인사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솔라스를 발견하고, 만개한 꽃 같은 미소가 그 얼굴 위로 순식간에 번졌다. 라벨란은 어둠 속에 있는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와 아직 가쁜 숨을 잘게 내쉬었다.

 

  "솔라스, 난 당신이 방에서 쉬는 줄 알았어요. 함께 어울리지 않을래요? 당신이 춤추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지만."

 

  솔라스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라벨란은 기대도 안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같이 좀 걸어요. 너무 뛰었더니 지치네요."

 

  콜은 어느샌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솔라스는 라벨란의 손을 마주 잡고 성의 외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느라 바빠 인퀴지터의 공백 쯤은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달빛을 조명 삼아 걷는 두 사람 사이엔 편안한 침묵이 함께했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라벨란에게 솔라스가 질문을 던졌다.

 

  "클랜에서는 신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평소 라벨란은 솔라스가 데일리시에 대해 물을 때면 늘 약간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대답에 뭐라도 꼬투리를 잡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말하곤 했지만 오늘은 축제의 기분에 취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요? 보통 새해 전야에 사냥꾼들끼리 다 함께 사냥을 나가 제의를 위한 사냥감을 잡았어요. 운이 좋을 땐 동면 중인 곰을 잡기도 했고, 보통은 여우나 산양 정도로 그쳤죠. 그렇게 잡은 사냥감 중 가장 큰 녀석을 제의에 올려 새해의 운을 기원하는 게 풍습이었어요"

 

  솔라스는 그 풍경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퍼렐던, 오를레, 티빈터 어디든 간에, 엘프든 인간이든 드워프든 간에.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한 해를 나누고, 그들의 마음을 새로 다잡고 목표를 정할 수 있게 기념할 날을 정한다. 고대 알라산에서도 그들은 비슷한 의식을 치렀다. 수백, 수천의 엘프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 그 옛날의 기도 중에는 펜하렐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현대의 데일리시는 그의 이름을 찾지 않는다. 오직 적의 이름을 저주할 때만 불리는 배신과 경멸의 이름.

 

  "그러고보니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 새해맞이 땐 늑대를 잡았어요. 늑대를 잡는 해는 특별하다고들 해요. 펜하렐의 마수를 피하는 한 해가 될 거라고 키퍼가 축복해 주셨는데, 이렇게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그 축복이 효과가 있던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옛날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달을 올려다 본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직접 잡은 늑대를 제단에 올리던 그녀는 스카이홀드에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새해를 맞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키퍼의 축복은 그녀를 콘클라베에서 살아남게 했을 지 모르겠지만 펜하렐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했다. 그 아이러니에 웃음이 났지만 솔라스는 익숙한 가면 아래 표정을 숨겼다. 그는 섣부른 위로의 말 대신 화제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조금 있으면 자정입니다. 이번에는 사냥감 대신 부적을 만들지 않았던가요? 사람들과 함께 태우려면 슬슬 돌아가야겠군요."

 

  그의 지적에 라벨란은 그제야 생각난 듯 품 안을 뒤적여 그녀의 부적을 꺼내었다. 사람 형태의 지푸라기 인형 안 쪽에는 새해의 소망을 적은 쪽지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인형 사이로 삐져나온 쪽지 끝에 머무는 것을 눈치 챈 라벨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무슨 기원을 적었습니까?"

  "비밀이예요. 남한테 말하면 부정 탄다고 했어요."

 

  '정말로 믿는 건 아니지만,' 하는 단서를 말꼬리에 흘리면서 그녀는 총총거리며 앞서 걸어간다. 솔라스는 그를 두고 멀어져가는 라벨란에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게 두어야 한다. 혹여 그녀가 머물기 원하더라도 그는 잡아선 안된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라벨란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안 가요? 부적은 안 태워도 옆에 있어줄 수는 있잖아요. 춤 추자고는 안 할테니까 가요."

 

  언제나 먼저 다가서는 쪽은 그녀이다. 먼저 손을 내민 것도, 먼저 입맞춘 것도. 하지만 솔라스는 그에게 언제나 물러설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는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가까워진 그녀를 에워싸 품 안에 가둔다. 그녀가 사냥한 늑대는 펜하렐의 제단에 바쳐졌다.

 

===

 

옛날에 소리뼈님(@soribone)과 연성교환 하기로 했던 글을 너무 늦게 썼습니다ㅠ 분량도 짧네요...솔라스 시점에서 보는 라벨란은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포스타입 201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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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나 라벨란은 겨울에 태어났다. 데일리시는 겨울에 태어나는 아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유랑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픈 계절이기에. 그녀가 태어난 겨울은 그래도 한 곳에 정착하여 풍족하게 보내던 편이었기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자라나며 수많은 황량한 겨울을 겪는 사이,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겨울을 싫어하게 됐다. 달빛 외에 한 점 빛도 비추지 않는 긴 밤을 텐트 속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춥고 메마른 기억은 쌓이고 쌓여 겨울이라는 단어 위에 차가운 껍질 같이 덧입혀졌다.

*

- 그러고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뭐가?"
- 내가 보낸 선물.

수정 너머로 들려오는 초콜릿을 녹인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담겨있었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수정을 굴리며 듣는둥 마는둥 대답하던 라벨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선물? 그러고보니 죠세핀이 티빈터로부터 뭔가 왔다고 한 것 같았는데...

"오, 세상에. 그게 네 거였구나, 도리안. 아직 확인을 못했어."
- 저런. 우리 인퀴지터께선 여전히 할 일이 많으신가 보군. 괜찮아, 상하는 건 아니니까. 확인하면 꼭 연락하라고. 반응이 기대되니까. 아무튼, 미리 말해둘게. 생일 축하해, 인퀴지터.
"고마워, 도리안! 역시 도리안 밖에 없어!"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의 표정을 도리안이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몇개의 농담을 더 주고 받은 뒤 통화가 끝나자마자 라벨란은 재빠르게 죠세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녀의 책상 옆으로 쌓여있는 몇개의 소포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고풍스럽고 화려한 포장을 찾아 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우아한 필기체로 마기스테르 도리안 파부스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아, 도리안에게 온 거 말이죠. 아직 확인 안하셨군요?"
"맞아요. 늦게 열어본다고 혼났어요, 안 그래도."

금박으로 장식된 푸른빛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상아빗이 들어있었다.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눈색을 닮은 에메랄드로 장식된 상아빗은 도리안의 취향을 가득 담아 우아하고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사치품의 팔할은 도리안이 마련해준 것들이었는데 이로써 그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고보니 내일이네요. 이번에는 정말 우리끼리 소박하게 기념하는 거다보니 준비도 금방 끝났어요. 그래도 음식은 훌륭할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인퀴지터."

어느새 내일이었다. 그녀, 리아나 라벨란의 생일. 작년까지만 해도 수많은 친구들과 스카이홀드에 그녀를 아끼는 이들 모두 함께 파티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심문회 규모를 축소하기로 한 결정 때문이기도 했고, 최근 그들의 상황이 파티와 영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생일은 기념해야죠, 하는 죠세핀의 제안에 가볍게 저녁식사 만찬으로 끝내기로 결정한 바였다.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 선물받은 빗을 머리에 대 보았다. 오, 도리안. 이건 한낱 데일리시 엘프가 쓰기에 너무 고급이잖아,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직은 손에 익지 않은 감촉의 상아빗으로 머리를 빗어내리며 라벨란은 도리안의 생일에 맞춰 보낼 망토핀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생축! 위들이랑 내가 같이 손 본 거야! 새로 정제한 영혼 룬을 박았다고 하더라."

다그나는 그녀의 의수에 장착된 석궁을 개조하는데 단단히 재미를 붙인 듯 했다. 세라 또한 활에 있어선 자기가 선배라며 으스대는 와중에도 그녀가 새 무기에 적응하는데 아낌없는 응원 - 스무번의 야유와 한번의 칭찬을 두고도 응원이라 할 수 있다면 - 을 보탰다. 손볼 게 있다며 가져갔을 때 짐작하긴 했으나 다그나의 손길을 거친 석궁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고마워, 세라."

모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아이언불과 크렘, 컬렌, 죠세핀, 그리고 세라와 다그나. 멀리 떠난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올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도리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배릭 또한 자작 업무가 바빠 짬을 내기 힘들 거란 편지를 보내왔다. 다행히 아이언불은 최근까지 나가있던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교황이 된 렐리아나는 심문회에 공식적인 축하를 보내기보단 조용히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표했다. 비비엔은 심문회가 축소된 후로 다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으나 그녀 개인이 라벨란에게 가진 호의를 거둘 정도는 아니라 편지와 함께 '요긴하게 쓰일 지 모르는' 올레이 궁정식 반쪽가면을 보내왔다. 톰 레니에, 한때 블랙월이었던 친우는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지가 오래라 그녀를 떠올리고 들러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 때 전령의 쉼터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노래했던 걸 떠올리면 다소 쓸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인퀴지터!"

"축하해, 보스!"

"축하드립니다, 인퀴지터."

그래도 한동안 다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를 떨쳐내고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술이 들어가자 흥이 올라 웃음소리와 환호로 빈자리를 채우니 쓸쓸함도 금세 잊혀졌다. 그렇게 템플러의 규율 상 과음은 안된다던 컬렌마저 얼큰하게 붉어진 얼굴로 위키드 그레이스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을 때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일 없이 밤을 새워 즐겼다.

*

평소보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벨란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달간 그녀 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어색한 긴장 속에 시간을 보내왔다. 비어있던 왼팔 소맷자락을 의수 고정장치로 채우고, 미련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원형돔의 낡은 책상과 책장을 들어내 정리했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사실 라벨란은 3년 전, 코리피우스를 해치운 그 날 이후로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 진 느낌을 떨쳐본 적이 없었다. 솔라스가 그녀를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그가 있을 땐 어땠더라? 라벨란은 일부러 묻어두고 떠올리지 않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와의 대화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생일 언저리였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 데이트를 위해 잠시 짬을 내기도 어려운 두 사람은 평소처럼 원형돔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 선물로 받았던 보호룬은 아직도 그녀의 서랍 안에 잠들어 있었지만, 선물 외에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일부러 잊으려 노력한 탓에 이제는 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 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먼지쌓인 기억을 뒤적이던 라벨란은 취기에 섞여 달콤하게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라벨란은 그녀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계인지, 그저 그녀 자신의 꿈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공기가 희박한 것 같은 특유의 느낌은 익숙했다. 눈 앞에는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마을이라기엔 폐허에 가까웠다. 불에 타 무너진 잔해 사이로 형체를 갖춘 건물이라곤 두어채 남짓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마을의 형태는 뚜렷해졌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조차 오래된 것이었다. 불에 타고 남은 건물 벽 일부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었다. 약탈과 대규모 학살의 흔적. 현실에서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풍경이었으나 라벨란은 한꺼풀 덧씌운 풍경을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으나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길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길은 마을 밖으로 이어져 높다란 언덕으로 향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녀를 기다리던 이가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지만 아직 어린 소년인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소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언덕 끝에 마저 올라서자 야트막한 구렁 너머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희뿌연 지평선 근처로 하늘 높이 솟은 원형의 탑, 구름 위에 떠 있는 웅장한 도시의 윤곽. 라벨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 알라산.

 고대 엘프 제국의 황금도시. 정말로 하늘 위에 있었구나. 라벨란은 태양빛을 머금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를 바라보다 등 뒤를 돌아봤다.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진 폐허. 라벨란에겐 오히려 더 익숙한 '엘프의' 것들.

"그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파괴해."

소년의 주변에는 서툴게 만든 봉분이 여러개 있었다. 나무판 위에 새긴 글자는 그녀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적혀있었다. 소년의 흙투성이 손에 작은 생채기가 여러개 나 있었다. 소년의 시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공중도시의 첨탑에 꽂혀 있었다.

"하늘 위에 사는 고귀한 이들에게, 땅 위의 우리는 벌레나 다름 없으니까."

소년의 남루한 차림은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군데군데 기우고 덧댄 흔적이 가득했다. 황금도시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갈망과 분노로 빛났다. 라벨란은 소년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에 속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이곳은 아마 영계일 것이다. 이 풍경은 그 옛날에 살았던 누군가의 기억인 것일까.

"언젠가, 저들을 무너뜨릴 거야."

라벨란은 시선을 돌려 소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르스름하게 민 흔적이 있는 옆머리와 길게 땋아내린 검은머리는낯선 형태의 매듭장식으로 묶여있었다. 세파에 찌들지 않은 단정한 이마. 그 아래 결의와 확신으로 빛나는 청회색 눈. 라벨란은 그 눈 안에 담긴 불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 불꽃.

"붉은 피를 흘리는 이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고귀하거나, 비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 거야."

라벨란은 그녀를 둘러싼 주위 풍경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그녀와 소년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들리지 않을 목소리임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너는 누구야? 그 때, 소년이 라벨란을 향해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 땅의 이름은 '오만'이야."

*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익숙한 방 안에서 익숙한 외로움 속에 홀로 누워있었다. 왼팔 소매 밑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그녀의 맨얼굴엔 발라슬린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벨란은 텅 빈 그녀의 왼팔을 끌어안았다. 그 언젠가, 그가 약속했었다.

'기회가 된다면, 제 고향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오만의 이름을 가진 땅. 오랜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벨란은 오랜만에 마주한 연인의 흔적을 눈 안에 담은 채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 속에 갈무리했다.

아주 특별한 생일선물이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오로지 그만이 줄 수 있는.

 

===

 

포스타입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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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덕과 가정을 수호하는 실라이세, 사냥을 수호하는 안드루일...정말 이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은?"

  흙바닥에 끄적거린 이름을 하나하나 세어 보던 브리알라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따라 빛의 성가를 외우던 때가 훨씬 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라산은 그녀의 투덜거림에 빙긋 웃을 뿐이었다.

  "어린 아이 때부터 듣는 이야기 속에 섞여 있으니까. 클랜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좀 차이가 있겠다만."

  "스승님은 그럼 창조주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안드라스테의 전설도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어린 브리알라의 머릿 속에서 두 가지 신화가 섞여드는 과정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신들의 수호와 함께 하던 엘프들의 마법 제국과 장막 너머로 영원히 사라진 신들. 엘프의 쇠락과 함께 나타난 솀렌들. 영생을 잃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 굴욕의 시간들. 희망을 찾아 안드라스테의 옆에서 싸운 사도 샬탄. 이어지는 배신과 쇠락. 많은 부분이 거의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엘프들에게 따로 신이 있다는 사실조차 그녀에겐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마법과 요정이 함께 하던 조상들의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의 어머니조차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 된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니까. 티빈터로부터의 해방을 주도한 안드라스테라는 인간이 존재했던 건 사실이겠지. 그 외엔..."

  "그럼 장막 너머의 신들은요? 그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와 우리를 구해줄까요?"

  그 말에 펠라산의 눈을 스쳐간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브리알라는 후에야 그것이 연민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

 

  "스승님은 몇 살이에요?"

  "먹을만큼 먹었지."

  "스승님의 클랜은 어디 있어요?"

  "찾아가기 귀찮을만큼 먼 곳에."

  "왜 따로 떨어져서 혼자 다녀요?"

  "다들 내 성격을 못 견디고 내쫓더라고."

  무엇 하나 제대로인 게 없는 대답 중에서도, 마지막만큼은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브리알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

 

  "어디로 가는 길이었니, 달렌?"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사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지만, 산 채로 불에 붙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아무리 직전까지 그녀를 죽이려 했던 이라 해도 차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던져 오는 상대의 목소리는 산책 중에 이웃이라도 만난 것마냥 쾌활했다.

  "제 이름은 브리알라에요."

  두려움 속에서도 브리알라는 은인을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두건 사이로 삐죽이 솟아 있는 귀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손에 들린 지팡이가 뿜어내는 은은한 녹색빛 아래 반쯤 그늘진 얼굴 위로 처음 보는 낯선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양쪽 눈가를 따라 콧등에서부터 가느다란 선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형태였다.

  "달렌, 이건 나이가 어린 상대를 부르는 우리의 말이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데일리시를 찾아가. 날 위해서야, 브리아. 넌 날 위해 살아남을 거야, 알아들었어?

  떨리던 손길과 타는 듯이 뜨겁던 찰나의 접촉이 떠올랐다. 그 날 이후 이 순간을 기다리며 견뎌 왔다. 생전 처음 겪는 굶주림과 추위.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저택 밖의 엘프들의 삶. 그 모든 고난을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당신은 데일리시인가요?"

  그 말의 어디가 웃겼는 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고향은 데일스가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꾸나. 펠라산이라고 부르렴, 달렌."

 

*

 

  "저는 오늘로 열여섯 살이에요."

  모닥불 옆에서 화살촉 끝을 다듬던 그녀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펠라산은 반쯤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슬쩍 돌아봤다.

  "아, 그랬었나? 생일 축하한다, 달렌."

  그녀의 스승은 때때로 자상했지만 대부분 무심했으므로 딱히 어떤 기대를 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도 감회가 새로운 느낌에 감상에 젖었을 뿐이었다.

  "데일리시는 성년이 되면 얼굴에 발라슬린을 새기는 거죠? 그거 아파요?"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이 안나는데."

  이번에도 건성인 대답에 브리알라는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제 너무나도 익숙해진 그의 얼굴 위 문신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청회색 안료를 처음 새겼을 때는 더 진한 색이었을까. 그려놓고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일부러 작은 무늬를 고르기도 하려나? 그녀의 스승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도 데일리시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클랜을 찾아가면 안되냐는 질문에도 요리조리 말을 돌리기 일수였고, 브리알라도 이제는 그가 간혹 던지는 단서 같은 흔적들로 어렴풋이 유추하는 게 전부였다.

  "각 무늬마다 신을 상징하는 거 맞죠? 당신 얼굴에 있는 무늬는 누구의 것이에요?"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의외로 펠라산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진지한 얼굴로대답했다.

  "미쌀. 모두의 어머니이자 수호자이신, 정의와 복수의 신."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고, 그 목소리는 다소 슬프게 들렸다. 브리알라는 마음 속에서 피어 오르던 질문들을 내리 누르고, 스승의 눈을 마주 봤다.

  "이 문신을 새김으로서, 나는 그 분이 수호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고, 그 분의 신념을 따르기로 맹세한거란다. 그렇기에, 발라슬린을 새긴다는 건 그저 단순한 성년의식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뭐, 요새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그는 다시 가벼운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브리알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지껏 배워왔던 엘프들의 신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펜하렐을 상징하는 발라슬린도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펠라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때때로, 이렇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웃곤 했다.

  "아니, 그는 배신의 상징이기에, 아무도 그를 감히 섬기려 하지 않지. 왜, 그가 마음에 드니?"

  브리알라는 아직 엘프들의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이기 좀 어려웠다. 그녀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서 창조주의 이름을 외쳤다. 최대한 너그럽게 생각한다 해도, 장막 너머에 갇혀 돌아올 수 없는 신들을 섬기는 게 큰 의미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저랑 비슷하잖아요. 어느 쪽 편에도 속하지 않고, 모략과 술수로 앞길을 헤쳐나가는 게."

  그러니, 그녀에게 발라슬린을 새긴다면, 아마도 펜하렐의 것이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던 브리알라는, 머리 위로 묵직하게 얹히는 스승의 손길에 눈을 돌렸다.

  "그래, 너와 잘 어울리지."

  그는 언제나처럼 모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만큼은 장성한 제자를 대하는 스승의 다정함이 담겨 있었기에, 브리알라는 따라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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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라스, 생일이 언제예요?"

  로툰다의 작은 소파에 드러누워 보고서를 건성으로 들춰보던 라벨란이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잊어버렸습니다."

  "에이, 생일을 어떻게 잊어버려요? 또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리는 거죠?"

  "따로 기념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 돼서 그렇습니다."

  "또, 또, 엄청 나이 많은 척 한다. 하긴, 나이 먹을수록 생일이 달갑지 않아진다고는 하던데. 나는 아직 생일이 좋은 거 보니 철이 덜 들었나봐요. 남의 생일도 이렇게 신나다니."

  얼마 전 황소돌격대와 함께 아이언 불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전령의 숨결에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신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녀는 황소돌격대가 즐겨 부르는 단순한 곡조의 응원가를 연신 흥얼거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넘기는 솔라스는 자신의 공간에 라벨란이 찾아와 느슨한 태도로 시간을 죽이는 데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영생을 살던 고대의 엘프들도 생일을 챙겼을까요? 막 천 년씩 사는데 매해 기념하긴 귀찮았을 것 같다. 그래도 가끔 친구들이랑 모여서 맛난 것도 먹고, 선물도 주고 받고 하는 날이 있으면 좋긴 할 텐데."

  라벨란은 솔라스가 그녀의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도 늘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걸 내심 즐기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고대 엘프에 관한 질문에 솔라스는 책에서 눈을 떼고 그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생일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죽음을 기념하곤 했습니다."

  "죽음이요?"

  호기심이 동한 라벨란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솔라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았다. 그는 옛날 이야기를들려주는 키퍼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은 아닙니다. 우세네라, 삶의 고락을 누리고 영원한 잠을 택하는 이들은 의식을 행하기 전 오랜 친우, 친지를 초대해 함께 한 시간을 추억하고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들은 떠나는 이에게 영계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고, 보물 같은 지식을 얻어 영혼을 온전하게 하도록 축복을 남겼습니다. 그 옛날 우리는 생이란 예기치 않은 때에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것이라 여겼고, 우세네라에 접어드는 것을 영혼을 완성시키는 삶의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그런 건 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려던 말은 자연스레 혀 끝에 먹혔다. 어떤 키퍼도 알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어제 본 것처럼 말하는 그의 화법에는 익숙하다. 라벨란은 그녀가 마법사였다면, 그가 하듯 영계의 비밀을 탐구할 수 있었다면 언젠가 그렇게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우세네라에 들어가도 죽는 건 아니라고 했죠? 그럼 아직도 어딘가에 잠에 빠진 이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알라산이 몰락한 줄도 모르고, 영계의 비밀을 탐구하면서."

  그 말에 솔라스의 눈에 어떤 슬픔이 지나쳐 가는 것을 라벨란은 미처 보지 못했다. 언제나 고요한 그의 얼굴 위로 아주 짧은 순간, 세상의 모든 비탄을 담은 것 같은 상실감이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럴 지도요. 하지만 대부분 우세네라에 들어간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혹여 누군가 남아 있더라도, 지금 같은 세상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게 낫겠지요."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라벨란은 그 안에 답긴 씁쓸함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영생을 누렸던 고대 엘프의 삶을 알지 못하기에, 지금 이 테다스의 엘프들의 삶이 그들 눈에 얼마나 충격적일 지 미처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챈트리를 대표하는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이 데일리시 엘프 출신인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현실에는, 우세네라에서 돌아온 수 천년 전의 엘프라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막상 지내보면 괜찮은 점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에도 가끔 쓸모 있는 건 있으니까요."

  라벨란은 덧붙이듯 가령, 아침 잠을 깨우는 홍차 같은 거? 하고 말하고는 가볍게 찌푸려진 솔라스의 이마에 깔깔거리며 입을 맞췄다. 솔라스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돌아서려는 연인을 붙잡고, 조금 더 길게 제대로 입을 맞췄다.

  "예시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 세상에도 좋은 점은 있을 겁니다."

  다시 마주 한 솔라스의 얼굴에는 오직 라벨란만이 볼 수 있는 따스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라벨란은 보고서를 돌려주러 방으로 가기 전, 다시 한번 연인의 뺨에 입을 맞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원형돔을 벗어났다. 여느 날과 같은, 스카이홀드의 짧은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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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네라 설정은 날조입니다.

포스타입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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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터, 인퀴지터!"

 

  묵직하게 부르는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들자 그녀를 향해 모아진 조언자들의 눈과 마주쳤다. 벌써 세번째였다. 

 

  "아, 죄송해요. 듣고 있었어요. 그...서부진입로에 병사들을 보내겠다는 거죠?"

  "그 안건은 30분 전에 지나갔습니다, 인퀴지터. 피곤하신 듯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낼까요?"

 

  언제나처럼 결코 화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차분한 렐리아나의 말투 속에서 한숨이 느껴지는 건 라벨란의 착각일까? 라벨란은 고개를 저어 계속 진행하자고 말하려다가 세 조언자 모두 그녀 못지 않게 피곤해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되는 회의와 업무에 지친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네. 그럼 남은 안건은 내일 오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다들 오늘은 좀 쉬어요."

 

  사실 누구보다도 휴식이 필요한 건 에메랄드 묘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반나절 째 회의실에 붙들려 있는 라벨란 자신이겠지만, 어차피 회의실을 나간다 해도 네 사람 다 개인 업무를 보느라 쉬지 못할 건 자명한 일이었다. 눈가를 비비며 남은 졸음을 쫓아낸 라벨란은 조언자들이 하나 둘 나가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앉아있던 사이 여행의 피로가 축적된 두 다리며 허리 근육이 잔뜩 뭉쳐 비명을 질러댔다.

 

  '올라가면 죠세핀이 맡긴 서류에 승인을 하고...이번에 찾아온 엘프 유물에 관한 자료도 찾아봐야 하고...'

 

  회의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른 오전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을 벗어난다 해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앙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인퀴지터, 명령하신 마구간 개조 건에 대해..."

  "새로 제작하는 심문회 깃발 색깔 문제로..."

  "이번에 전령의 안식처에..."

 

  그녀의 개인실로 향하는 문을 지척에 두고 한걸음도 채 떼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붙들린 라벨란은 이대로라면 정말 쓰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요청과 보고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순간, 여러갈래로 뒤섞인 목소리 사이로 또렷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퀴지터."

 

  순식간의 주위의 소음이 가라앉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솔라스가 다가왔다. 그녀가 회의에 들어간 사이 짐을 풀고 씻었는지 깔끔한 모습이었다. 라벨란은 그녀가 겨우 세수만 한 꼴이라는 걸 떠올리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몇 주 간 함께 숲속에서 구르며 온갖 모습을 다 봤다곤 하지만 이렇게 땀냄새와 먼지 투성이인 꼴로 그와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

 

  정작 솔라스는 그런 라벨란의 모습에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라벨란을 보는 그의 눈빛엔 걱정어린 염려, 그리고 평소같은 다정함 뿐이었다. 솔라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에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에 라벨란은 살풋 미소지었다.

 

  "너무 졸아서 렐리아나한테 쫓겨났어요. 솔라스는 좀 쉬었어요? 나도 우선 좀 씻어야할 것 같은데...밥도 먹어야 하고. 아, 다그나가 회의 끝나는대로 잠깐 와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횡설수설 말을 하는 사이에도 금세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그러시군요. 저도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는데, 잠시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낮은 톤의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이 신호라도 된 듯, 인퀴지터에게 전달할 용무를 가지고 서성거리던 이들은 조용히 하나둘 물러섰다. 감사한 기분이었지만, 솔라스가 따로 상의해야겠다고 할만한 일이라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라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잠시나마 그녀를 우러르는 시선에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갖는 건 좋았다. 비록 공적인 이유에서라 해도.

 

  "그래요. 그럼 방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솔라스와 함께 인퀴지터의 개인실로 향하면서도 계단을 오르는 두 다리가 천근같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1시간만, 아니 10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그래서, 무슨 일이죠?"

 

  책상을 돌아 의자에 앉기도 전에 용건을 묻는 라벨란의 모습에 솔라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의자에 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놀란 라벨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솔라스는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안은 자세 그대로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솔라스...?! 뭐하는 거예요?"

 

  라벨란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허둥거리다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솔라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별 것 아닌 신체접촉인데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솔라스는 침대에 다다르자 이번엔 조심스런 태도로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찡그린 미간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베난, 좀 쉬도록 하세요."

 

  "...네? 할 말이 있다면서요?"

 

  "핑계였습니다. 에메랄드 묘지에서 발견한 엘프 유물에 관해 상의했다고 하십시오, 나중에. 보고서는 제가 써놓을테니. 일단 좀 자고나서 보고서만 읽어보면 될 겁니다."

 

  라벨란은 이제 어안이 벙벙해져 동그란 눈으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한 말을 하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녀를 쉬게 하겠다고? '그' 솔라스가? 어이없어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솔라스는 어느새 이불을 정돈하여 라벨란이 눕기 쉽게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흙투성이 부츠를 손수 벗기려는 시점에 가서야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얼떨결에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눕고 말았다. 라벨란의 이성은 결재를 기다리는 수많은 업무 목록을 떠올리며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침대에 몸을 누이고나니 휴식을 갈망하던 육체는 이미 수마의 유혹에 넘어가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다그나가...리륨 조사 때문에..."

 

  "스파이마스터와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렐리아나도 피곤할 거예요, 이미 다른 일이..."

 

  "베난."

 

  반쯤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웅얼웅얼 항변하던 라벨란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부르는 솔라스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녀도 이제 한계였다. 막중한 책임감이나 다른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걸로 버티기엔 너무 피곤했다. 달콤하게 밀려드는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 와중에 라벨란은 들릴 듯 말듯 인사했다.

 

  "고마워요...솔라스."

 

*

 

  헉, 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라벨란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위였다. 창밖은 해질녘의 불그스름한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어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사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집무실 책상에 앉은 솔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라벨란에게 말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푹 잤습니까?"

 

  집중한 와중에도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솔라스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종이에 고정된 시야와 깃펜을 든 손가락이 춤추듯 종이 위를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없었다. 그제야 솔라스도 피곤할 거란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역시 돌아와서 한숨 돌릴 새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는 언제나처럼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솔라스, 당신도 피곤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침 보고서도 다 끝났으니 제가 가고 나서 읽어보시면 될 것 같군요."

 

  정말로 피곤하지 않은 걸까? 라벨란은 솔라스의 표정이나 눈빛에서 지친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분명 스카이홀드의 그 누구도, 라벨란만큼 솔라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떨 때 기분이 나쁜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표정이나 행동변화도 라벨란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란은 솔라스가 그녀 앞에서 완벽하게 긴장을 풀고 있다는 느낌은 한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살아온 환경 탓인 걸까, 아니면 아직도 그녀나 심문회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할게요. 덕분에 잘 잤어요. 솔라스도 이제 좀 쉬어요."

 

  라벨란은 책상으로 다가가 솔라스가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사무적인 태도로 방을 나서려는 그를 붙잡아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드물게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 당신의 안녕이 가장 우선입니다. 이곳에서는, 그리고 저에게는. 쉬십시오, 베난."

 

  그가 떠나고, 아직 온기가 남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로, 라벨란은 솔라스의 다정함에 대해서, 그의 배려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했다.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보고서에는 리아나 라벨란의 연인 솔라스가 아닌, 인퀴지터 라벨란의 이단마법사 동료 솔라스의 흔적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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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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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퀴지터 합작에 제출했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커플이 탄생했다고 할 때, 으레 묻는 질문이 있다. '어떤 점이 좋아?' '언제부터 끌렸어?'같은 류의, 호기심을 채우면 그만인 가벼운 질문에서부터 '결혼 생각은 있어?' '그 남자 지참금은 있대?' 같은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질문까지.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스카이홀드 안에도 크고 작은 연애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이들의 연애사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그만이었기에 새로운 커플이 탄생하면 한동안은 이런 시덥잖은 질문으로 가십을 나누곤 했다.

 

"그래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

 

물론, 테다스를 구하기 위해 창조주가 보낸 그들의 구세주,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 불리는 심문관 카라스 아다르에게 이렇게 서슴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건 배릭 테스라스 뿐이었다. 배릭의 개인 숙소는 두 사람, 한 명의 드워프와 한 명의 쿠나리를 수용하기엔 좀 비좁은 감이 있었고, 찻잔과 원고뭉치를 앞에 두고 앉은 배릭의 맞은 편에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한 자세로 앉은 카라스 아다르는 배릭의 심문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요. 특별히 어느 부분이라고 말하기엔...그녀는 심문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료이고...언제든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는 훌륭한 전사이고...또..."

 

"이봐, 누가 그런 고지식한 대답을 듣고 싶은 줄 알아?"

 

배릭이 던진 구겨진 원고뭉치가 아다르의 왼쪽 뿔에 맞고 튕겨나왔다. 타격감은 전혀 없는 그의 항의에 아다르는 괜시리 뿔끝을 긁적였다. 얼굴도 좀 붉어졌을 테지만 쿠나리의 튼튼한 피부 위로는 티가 잘 안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참, 애초에 당신이 말해달라고 졸라서 처음부터 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이 이걸 알고있다는 걸 카산드라가 알면 절 죽이려고 할 거라고요."

 

비밀을 털어놓기에 배릭 테스라스만큼 위험한 사람도, 그만큼 안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다르는 카산드라를 위한 꽃과 양초를 준비하고 시집을 고르는 과정부터 배릭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조언을 얻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꽃이라고 하면 가시 모양의 세장짜리 붉은 꽃잎을 가진 꽃은 독을 가졌으니 먹으면 안 된다, 부은 상처 위에는 잎 끝의 색이 연한 참엘프뿌리를 빻아서 붙이면 좋다, 이상으로 아는 게 없었고, 시라 하면 발로카스에 있을 적 허풍쟁이 자칭-시인 카리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외설스런 소설집에서 골라 읊어주는 것 외에 들어본 적도 없는 아다르였다. 처음 배릭에게 상담할 땐 그저 마음 가는 사람이 있다고 돌려말했지만, 이미 ‘검과 방패’ 사건 이후 카산드라와 아다르 사이의 미묘한 감정 교류를 눈치챈 배릭의 집요한 추궁을 피해 둘러대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가 구애하려는 대상이 카산드라임을 알게 된 배릭이 배를 잡고 웃어대는 바람에 거의 화를 낼 뻔도 했지만, 배릭과 카산드라의 복잡하고 깊은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법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배릭은 맹렬하게 폭소한 뒤 태도를 바꿔 사뭇 진지하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툭별한 꽃말을 가진 낭만적인 꽃들을 추천해준 것도, 심문회에 납품되는 고급 양초장인을 소개해준 것도, 아다르가 구해 온 시집 안에서 적절하고 매력적인, 다소 은근하기까지 한 사랑시를 골라준 것도 전부 배릭이었다. 물론 그 뒤에 홀로 숨어서 시를 외우다 들켜 한참 더 비웃음을 산 건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오, 이게 책으로 나온다면 그 땐 정말 추적자 양반이 날 죽이러 올 테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아무튼 좀 더 극적인 느낌이 필요하다고. 결정적으로 이거다, 하고 느낀 순간이 있을 거 아냐? 헤이븐에서 구하러 왔을 때? 아니면 서부진입로에서 탈진해서 쓰러진 자네를 들쳐메고 끌고 갔을 때? 아니, 이건 별로 로맨틱하지 않군."

 

아다르는 배릭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도 된다고 한 게 과연 잘한 결정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차피 심문회의 전설적인 업적도, 그 중심에 있던 심문회 구성원들의 무용담도,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 후대로 전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이야기의 중심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모두를 관찰한 배릭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 물론 아다르가 그의 ‘챔피언 이야기’의 열렬한 팬인 것도 결정에 한몫을 했다.

지금 배릭이 쓰고 있는 글은 심문회 이야기가 아닌 오로지 인퀴지터 아다르와 그의 일대기라고 했다. 이렇게 써 놓더라도 제대로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는 거라며, 배릭은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아다르를 방으로 불러 시시콜콜한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연애담을 들려주는 건 여간 민망하고 멋쩍은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봐도 아다르는 배릭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산드라의 어떤 점이 좋냐고? 그는 카산드라의 모든 점을 좋아했다. 이쯤 되면 거의 숭배에 가깝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강인한 성품과 굳건한 신념도, 그 안에서 드러나는 부드러운 유연함도, 다른 사람들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낭만적인 감성도, 무엇 하나 싫은 구석이 없었다. 사랑에 빠진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다르는 카산드라가 그에게 자꾸 의미없이 유혹하지 말라는 말을 할 때까지도, 그가 하고 있던 게 ‘유혹’이라는 걸 깨닫지조차 못했다. 쿠나리와 인간의 문화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다르 개인의 경험부족 탓이 컸다. 아다르는 살면서 그의 부모님과 발로카스 용병단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본 일이 없었다. 가벼운 친구 관계든, 진지하고 깊은 연인 관계든. 그저 끌리니 다가가고, 마음에 차는대로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 감정에 어떤 특별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카산드라가 정중하고 단호하게 그에게 선을 긋고 돌아선 순간에야, 이게 다른 친구들에게 느끼던 친밀감이나 호감과는 다른 감정이란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

 

긴 고민 끝에 내놓은 아다르의 대답에 배릭의 펜이 우뚝 멈췄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스스로 말해놓고 나서도 어이가 없어서 아다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 사람 취향 하고는...손목에 수갑 차고 목에는 칼이 들이밀어진 상황에서? 나도 비슷한 거 당해봤는데 그거 참 가슴 떨리는 일이긴 하지. 사랑으로 착각할만큼.”

“물론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첫만남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건 상황이 그럴만 했지 않습니까?”

 

킬킬거리는 배릭의 비웃음을 피해 아다르는 그의 말을 되받았다. 과히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챈트리 성당 폭발 후에 발견된 쿠나리 마법사라니. 카산드라가 그에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줬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아다르 본인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날이 선 터라 카산드라와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모두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신념을 따르는 강인한 의지. 개인의 사욕을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믿는 정의를 추구하는 고결한 성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쨌든, 그녀는 아름답잖아요."

 

"켁!"

 

이번에는 급격한 기침소리가 터져나왔다. 배릭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잔기침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는 듯한 반응에 되려 아다르가 이마를 찌푸렸다.

 

"왜요, 이상합니까? 드워프의 미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인간 기준으로 봐도 카산드라는 아름답잖아요. 아닙니까?"

 

얼굴까지 빨개져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배릭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다르의 확고한 표정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카산드라가 '그' 카산드라 펜타가스트이지만, 그와는 다소 악연으로 얽힌 사이이지만, 그 성품을 생각하면 차마 쉽게 나올만한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인간 여성의 기준으로 미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뻔뻔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눈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아다르의 태도라니.

 

"흠. 크흠. 그래. 얼굴, 그거 중요하지. 맞아, 인정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만났다 해도 얼굴은 눈에 들어올 수 있지. 아무렴."

 

얼굴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고 항변하기엔 변명이 궁했기에 아다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이 이야기가 배릭의 손을 거쳐 한 권의 책이 될 쯤에는 첫눈에 반한 아름다운 여기사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쿠나리 영웅의 로맨스 스토리가 돼있을 게 뻔했지만, 그에겐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할만한 근거도 없었다.

 

"아무튼 전 가봐야겠습니다. 몽틸리예 대사님이 저녁식사 전에 잠시 들러달라고 했어요."

 

어쩐지 이야기 할 때마다 비웃음만 잔뜩 사는 느낌이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가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게 썩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다르는 작은 의자에 구겨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문고리를 잡는 아다르의 뒤통수에 배릭이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충고를 흘리듯 던졌다.

 

"이봐, 인퀴지터. 방금 한 얘기,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 꼭 카산드라한테 말해주라고. 반응이 볼만할 거야."

 

*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최근 시작한 글쓰기에 열중해 있었다. 종이 위로 꼼작않고 고정된 시선과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펜 끝에는 검을 들고 적을 마주할 때와 같은 집중력이 서려있었다. 아다르는 그가 온 줄도 모르고 생각에 몰두해있는 카산드라의 옆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해질 무렵의 타는듯한 붉은 태양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역광을 드리웠다. 아다르는 하루 종일이라도 그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있었다.

 

"아, 카라스? 왔으면 부르지 그랬어. 무슨 용무라도?"

 

문가에 선 그를 발견한 카산드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번졌다. 최근 렐리아나가 카산드라의 그런 미소는 처음 봤다며 놀리던 일이 떠올랐다. 오직 그 한사람만에게만 보이는 미소. 아다르는 자신이 멍하니 바라보느라 대답도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니요. 용무는 아니고...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카산드라는 궁금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아다르는 그녀가 잉크병을 닫고, 깃펜을 내려놓고, 종이뭉치를 갈무리 해두고 그에게 다가와 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다르는 손을 뻗어 카산드라의 뺨을 감싸안았다. 다른 한 손은 가깝게 붙어 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가벼운 입맞춤이 오가고,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카산드라가 킥킥 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그래서, 할 말은?”

 

아다르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배릭의 말을 따라 카산드라를 찾아왔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껏 한 번도 이렇게 말한 적 없다는 게 이상할만큼, 그는 진심으로 카산드라를 경외하고 흠모했다. 아다르는 온기를 품은 부드러운 갈색눈을 마주한 채 그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카산드라.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다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붉게 물드는 카산드라의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

 

인퀴카산 달달한 이야기를 쓰려 했으나 내내 아다르와 배릭만 나왔습니다. 카산드라님 얼빠인 제 마음을 아다르에게 200% 투영했지만 카산드라님은 아름답고 존엄합니다. 반론은 받지 않습니다.

 

드에 합작 주소는 https://sleeplazycat.wixsite.com/dacollab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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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벨란에게 인퀴지터가 되고 나서 딱 하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각지에서 들여오는 고급 품질의 찻잎을 종류별로 마실 수 있다는 점을 꼽을 것이다. 데일리시 문화에도 차를 즐기는 문화는 있었지만 주로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허브잎을 이용한 종류 뿐이었다. 차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사치는 여기저기 떠도는 데일리시의 삶에 있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클랜은 솀렌 상인들과 교류가 있다보니 라벨란도 어릴 적 키퍼가 마시던 홍차를 몇번 얻어마신 적이 있었다. 사실 다소 떫고 쓴 맛이 강해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키퍼도 그 찻잎을 어떻게 우려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 라벨란은 죠세핀이나 비비엔이 권해오는 다양한 종류의 차와 그에 곁들이는 티푸드에 점차 적응해갔고, 이제는 하루의 시작을 따듯하게 준비된 티팟과 함께 하는 게 일상처럼 돼버렸다.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지위로 사람들에게 시중받는 걸 꺼리는 그녀가 부리는 얼마 안되는 특권이었다.

  솔라스가 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나 의외였다. 그는 차라리 찻잎의 종류나 차를 우리는 시간, 티팟이나 찻잔의 모양 등에 까다롭게 굴 지언정, 차 자체는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스의 개인 찬장에는 항상 두어가지 찻잎이 구비되어 있었다. 어찌 됐든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을 때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라벨란은 몇번 그와 이야기하러 갈 때 그녀가 좋아하는 찻잎을 골라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차를 우려낸 후 혹시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그의 기호품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럼 현실 세계에서의 당신 취미는 대체 뭐예요? 술도 안 마시고, 차도 안 마시고, 입맛도 까다롭고. 먹는 낙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이해가 안 가요."

  "말하신대로, 먹는 낙을 재미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외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편인 거지요. 그러는 당신도 여전히 체스에는 재미를 못 느끼지 않습니까, 베난?"

 

  지난번 솔라스에게 내리 세판을 지고 나서 체스판을 엎어버린 후 라벨란은 한동안 체스판만 보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초심자에게 한 수도 봐주지 않는 솔라스가 나쁜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솔라스에게 체스로 이겼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제는 곧잘 작전도 짜고, 그날그날 운에 따라 컬렌이나 불과는 호적수로 맞붙을 때도 있었지만, 라벨란은 솔직히 워테이블 밖에서까지 전략을 세우는데 몰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 그렇다 치죠. 오늘 밤에는 내가 좀 특별한 걸 가져와볼게요. 그건 어쩌면 마음에 들지도 몰라요."

  솔라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며 의문을 표했지만 라벨란은 씩 웃고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

 

  "따듯하게 데운 우유에, 크게 두 스푼..."

 

  부엌의 고용인들의 초조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언불의 투박한 글씨가 적힌 쪽지를 내려다보는 라벨란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한손은 우유가 담긴 냄비를 국자로 휘저으면서 몇번씩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지만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대목에서 라벨란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 주방장을 바라봤다.

 

  "적당량의 설탕은 얼마만큼이죠?"

  "그...글쎄요. 저희도 처음 보는 레시피라서...제가 시도해봐도 될까요, 각하?"

 

  대뜸 주방을 빌리겠다고 찾아든 인퀴지터의 방문은 사실 그리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스카이홀드의 고용인들은 처음 그들의 인퀴지터가 데일리시 엘프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낯설어했지만, 생각보다 털털하고 소탈한 그녀의 성품에 금세 적응했다. 언제나 그들이 만든 음식에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오고, 고용인 한명한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그녀의 서슴없는 태도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이따금 세라와 함께 남은 비스킷이 없나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 과자바구니를 남겨두기도 하고, 그녀의 다과를 준비하는 담당을 일부러 제비뽑기로 돌아가며 정하기도 한다는 건 인퀴지터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불 앞에 서서 처음 보는 레시피를 두고 골몰하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주방과 친숙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걸 짐작하게 했고, 그들은 자신들과 인퀴지터의 안전을 위해 다소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예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하려는 거니까. 소금을 잘못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

  "앗, 각하. 계속해서 젓지 않으면 겉에 막이 생깁니다! 계속 저으세요!"

 

  조금의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약간의 소음과 다수의 한숨이 섞인 부엌의 소란은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었고, 라벨란은 직접 나르겠다며 손수 쟁반 위에 얹은 찻주전자와 잔을 가지고 원형돔으로 향했다.

 

  "솔라스!'

 

  책에 몰두하고 있는 솔라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라벨란 말고는 없을 거라는 도리안의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솔라스는 라벨란의 목소리에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라벨란의 얼굴에서 손에 들린 쟁반으로 살짝 내려가고, 그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어서 오십시오, 베난. 아까 말한 특별한 게 그것입니까?"

 

  라벨란은 설렘이 섞인 싱글거리는 얼굴로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쟁반을 내려놓고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자 분명 차라고는 할 수 없는 탁한 검은색의 음료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솔라스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코코아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솔라스, 이게 뭔지 알아요?"

 

  솔라스의 반응에 눈이 동그래진 건 라벨란 쪽이었다. 이어 김빠진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언 불이 귀한 기호품을 구했다며 신나 보이길래 호기심에 함께 청했다가 처음 맛본 이국의 음료는 그녀에게 신세계를 선사했다. 오를레식 마시멜로를 첨가하면 더 완벽한 맛이 난다며 아쉬워하는 불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고 쌉싸름한 맛 위로 달콤함이 뒤섞인 그 맛은 그녀가 마셔본 어떤 음료와도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배릭이 어렵게 구해준 거라 많이는 나눠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불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코코아가루를 조금 얻어내어 손수 주방까지 가서 주방 고용인들을 귀찮게 한 것은, 솔라스가 처음 맛보는 음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예전에 여행 중에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퍼렐던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케 구하셨군요."

  "불이 배릭한테 부탁해서 특별히 구한 거래요. 그럼 무슨 맛인지도 알겠네요. 에이, 아쉽다."

 

  실망한 라벨란의 표정에 솔라스는 작게 웃으며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의 잔에 각각 음료를 따른 그는 자신 몫의 잔을 집어 들고 가볍게 향을 맡았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것이긴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얼마 안되는 음료니까요."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라벨란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은은한 향을 음미한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걸리는 걸 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그가 입가에 잔을 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모금 음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

  "...어, 이상해요? 아닌데, 내가 맛 봤을 땐 괜찮았는데?"

  "너무 달군요."

 

  '보통은 뜨거운 우유에 설탕을 첨가하지만, 원래는 설탕 없이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더군'하고 말하던 아이언 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단 게 맛있잖아?' 하며 아낌없이 설탕을 부어넣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솔라스의 표정은 굳이 말하자면 불쾌함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예상하던 맛이 아니라는 거겠지.

 

  "내 취향은 단 쪽이니까...정말 설탕 없이 마실 수 있는 거였어요? 이상할 것 같은데..."

 

  솔라스는 더 마셔야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손에 든 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라 치겠다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걸까. 라벨란은 그녀의 잔을 들어 아직 따듯한 음료를 한모금 삼켰다. 맛있는데.

 

  "아직 불한테 뺏은 가루가 좀 더 있어요. 다음엔 한 번 설탕을 빼고 만들어볼게요. 내가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배려 감사합니다, 베난. 지나치게 달긴 하지만, 오랜만에 좋아하던 향을 맡는 건 나쁘지 않군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실없는 미소가 오갔다. 음료보다는 그녀의 시도를 높이 사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결국 그날의 도전은 라벨란이 두 사람 몫의 핫초코를 몽땅 비우는 걸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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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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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스패서 DLC 스포일러 포함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왼손의 고통을 억누르며 거울 너머로 들어간다. 거울 너머의 세상은 고요하다. 역동감 있는 동세 그대로 굳어진 쿠나리 석상들을 걸으면서 호흡을 고른다.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여지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들의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돌아가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비다쌀라의 분노에 찬 괴성, 그리고 순간의 번쩍임과 함께 그녀 또한 다른 동료들과 같이 돌로 굳어지고 만다. 라벨란은 정돈된 걸음으로 천천히 익숙한 뒷모습을 향해 다가간다. 곧이어 다시 온몸을 찢을 것 같은 격통이 찾아든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그녀를 향해 그가 돌아선다. 한번의 눈짓으로 불타는 균열을 잠재운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솔라스.”

  “이걸로 시간을 좀 더 벌겠지요.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라벨란은 그의 팔에 의지해 일어선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입 속에서 말을 고른다. 또 다시.

 

  “당신은 펜하렐이지요.”

 

  그의 눈이 잠시 커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잘 알아냈군요. 지나오는 길에 있던 단서들로...”

 

 

  라벨란은 차분하게, 단호하게 그 말을 끊어냈다.

 

  “아니요. 그게 아니예요.”

 

  눈시울이 뜨겁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라벨란은 그녀가 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솔라스. 펜하렐. 공포의 늑대. 당신은 에바누리스의 일원이었고, 알라산의 타락한 신들이 세상을 무너뜨리기 전 그들을 막으려 했던 유일한 진짜 신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가져버린 이 세상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준비했지요. 심문회에 합류하기 전, 코리피우스에게 오브를 넘겨줬을 때부터.”

 

  그녀를 부축하던 팔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결코 알 리 없는 진실을 늘어놓는 사이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베난, 어떻게...”

 

 라벨란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독한 기시감에 뼛속깊이 피로감이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언제부터 세는 걸 포기했는 지도. 처음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땐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을, 혹은 나를, 우리의 미래를, 주어진 선택지를. 하지만 아무 것도 소용 없더군요. 나의 어떤 시도도, 어떤 선택도.”

 

  잠깐 사이에 솔라스의 얼굴 위로 깨달음이 찾아든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단편적이고 축약된 라벨란의 말에서도 금세 진실을 찾아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차라리 심문회를 떠나버렸더라면, 아니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은 가치를 찾아냈더라면...그 어떤 가정도 소용 없었어요. 언제나 마지막은 이 곳. 엘루비앙 너머에 마주 선 당신과 나, 두 사람.”

 

  솔라스의 얼굴에 맺히는 비통한 절망감조차도, 라벨란에겐 낯설지가 않다. 라벨란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 솔라스와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반복일 뿐이다.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한없이 반복되는 절망뿐인 그들의 론도.

 

  “하지만 솔라스, 그 어떤 사실보다도 절망적인 게 뭔지 알아요?”

 

  라벨란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대답을 읽는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를 리가 없겠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간을 돌이켜 몇 번을 거듭해 당신을 만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번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어요.”

 

  아마 그녀의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했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슬슬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신음 한번 내지 않고, 균열이 맺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등 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베난.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서려는 솔라스에게, 라벨란은 타오르는 녹색빛 왼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솔라스, 이제 나에게 더 이상 남은 선택지는 없어요. 나는 너무 지쳤거든요. 이제는 내가 어떤 결말을 원했는 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그걸 떠올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요.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세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카로운 단검이 라벨란의 가슴 위를 찔렀다. 절망 섞인 솔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무너져내리는 라벨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다. 두번 다시 눈 뜨지 않을 것이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좌절도, 후회도, 절망도, 사랑조차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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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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