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란에게 인퀴지터가 되고 나서 딱 하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각지에서 들여오는 고급 품질의 찻잎을 종류별로 마실 수 있다는 점을 꼽을 것이다. 데일리시 문화에도 차를 즐기는 문화는 있었지만 주로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허브잎을 이용한 종류 뿐이었다. 차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사치는 여기저기 떠도는 데일리시의 삶에 있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클랜은 솀렌 상인들과 교류가 있다보니 라벨란도 어릴 적 키퍼가 마시던 홍차를 몇번 얻어마신 적이 있었다. 사실 다소 떫고 쓴 맛이 강해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키퍼도 그 찻잎을 어떻게 우려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 라벨란은 죠세핀이나 비비엔이 권해오는 다양한 종류의 차와 그에 곁들이는 티푸드에 점차 적응해갔고, 이제는 하루의 시작을 따듯하게 준비된 티팟과 함께 하는 게 일상처럼 돼버렸다.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지위로 사람들에게 시중받는 걸 꺼리는 그녀가 부리는 얼마 안되는 특권이었다.

  솔라스가 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나 의외였다. 그는 차라리 찻잎의 종류나 차를 우리는 시간, 티팟이나 찻잔의 모양 등에 까다롭게 굴 지언정, 차 자체는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스의 개인 찬장에는 항상 두어가지 찻잎이 구비되어 있었다. 어찌 됐든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을 때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라벨란은 몇번 그와 이야기하러 갈 때 그녀가 좋아하는 찻잎을 골라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차를 우려낸 후 혹시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그의 기호품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럼 현실 세계에서의 당신 취미는 대체 뭐예요? 술도 안 마시고, 차도 안 마시고, 입맛도 까다롭고. 먹는 낙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이해가 안 가요."

  "말하신대로, 먹는 낙을 재미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외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편인 거지요. 그러는 당신도 여전히 체스에는 재미를 못 느끼지 않습니까, 베난?"

 

  지난번 솔라스에게 내리 세판을 지고 나서 체스판을 엎어버린 후 라벨란은 한동안 체스판만 보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초심자에게 한 수도 봐주지 않는 솔라스가 나쁜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솔라스에게 체스로 이겼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제는 곧잘 작전도 짜고, 그날그날 운에 따라 컬렌이나 불과는 호적수로 맞붙을 때도 있었지만, 라벨란은 솔직히 워테이블 밖에서까지 전략을 세우는데 몰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 그렇다 치죠. 오늘 밤에는 내가 좀 특별한 걸 가져와볼게요. 그건 어쩌면 마음에 들지도 몰라요."

  솔라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며 의문을 표했지만 라벨란은 씩 웃고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

 

  "따듯하게 데운 우유에, 크게 두 스푼..."

 

  부엌의 고용인들의 초조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언불의 투박한 글씨가 적힌 쪽지를 내려다보는 라벨란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한손은 우유가 담긴 냄비를 국자로 휘저으면서 몇번씩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지만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대목에서 라벨란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 주방장을 바라봤다.

 

  "적당량의 설탕은 얼마만큼이죠?"

  "그...글쎄요. 저희도 처음 보는 레시피라서...제가 시도해봐도 될까요, 각하?"

 

  대뜸 주방을 빌리겠다고 찾아든 인퀴지터의 방문은 사실 그리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스카이홀드의 고용인들은 처음 그들의 인퀴지터가 데일리시 엘프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낯설어했지만, 생각보다 털털하고 소탈한 그녀의 성품에 금세 적응했다. 언제나 그들이 만든 음식에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오고, 고용인 한명한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그녀의 서슴없는 태도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이따금 세라와 함께 남은 비스킷이 없나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 과자바구니를 남겨두기도 하고, 그녀의 다과를 준비하는 담당을 일부러 제비뽑기로 돌아가며 정하기도 한다는 건 인퀴지터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불 앞에 서서 처음 보는 레시피를 두고 골몰하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주방과 친숙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걸 짐작하게 했고, 그들은 자신들과 인퀴지터의 안전을 위해 다소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예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하려는 거니까. 소금을 잘못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

  "앗, 각하. 계속해서 젓지 않으면 겉에 막이 생깁니다! 계속 저으세요!"

 

  조금의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약간의 소음과 다수의 한숨이 섞인 부엌의 소란은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었고, 라벨란은 직접 나르겠다며 손수 쟁반 위에 얹은 찻주전자와 잔을 가지고 원형돔으로 향했다.

 

  "솔라스!'

 

  책에 몰두하고 있는 솔라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라벨란 말고는 없을 거라는 도리안의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솔라스는 라벨란의 목소리에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라벨란의 얼굴에서 손에 들린 쟁반으로 살짝 내려가고, 그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어서 오십시오, 베난. 아까 말한 특별한 게 그것입니까?"

 

  라벨란은 설렘이 섞인 싱글거리는 얼굴로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쟁반을 내려놓고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자 분명 차라고는 할 수 없는 탁한 검은색의 음료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솔라스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코코아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솔라스, 이게 뭔지 알아요?"

 

  솔라스의 반응에 눈이 동그래진 건 라벨란 쪽이었다. 이어 김빠진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언 불이 귀한 기호품을 구했다며 신나 보이길래 호기심에 함께 청했다가 처음 맛본 이국의 음료는 그녀에게 신세계를 선사했다. 오를레식 마시멜로를 첨가하면 더 완벽한 맛이 난다며 아쉬워하는 불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고 쌉싸름한 맛 위로 달콤함이 뒤섞인 그 맛은 그녀가 마셔본 어떤 음료와도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배릭이 어렵게 구해준 거라 많이는 나눠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불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코코아가루를 조금 얻어내어 손수 주방까지 가서 주방 고용인들을 귀찮게 한 것은, 솔라스가 처음 맛보는 음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예전에 여행 중에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퍼렐던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케 구하셨군요."

  "불이 배릭한테 부탁해서 특별히 구한 거래요. 그럼 무슨 맛인지도 알겠네요. 에이, 아쉽다."

 

  실망한 라벨란의 표정에 솔라스는 작게 웃으며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의 잔에 각각 음료를 따른 그는 자신 몫의 잔을 집어 들고 가볍게 향을 맡았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것이긴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얼마 안되는 음료니까요."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라벨란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은은한 향을 음미한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걸리는 걸 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그가 입가에 잔을 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모금 음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

  "...어, 이상해요? 아닌데, 내가 맛 봤을 땐 괜찮았는데?"

  "너무 달군요."

 

  '보통은 뜨거운 우유에 설탕을 첨가하지만, 원래는 설탕 없이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더군'하고 말하던 아이언 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단 게 맛있잖아?' 하며 아낌없이 설탕을 부어넣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솔라스의 표정은 굳이 말하자면 불쾌함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예상하던 맛이 아니라는 거겠지.

 

  "내 취향은 단 쪽이니까...정말 설탕 없이 마실 수 있는 거였어요? 이상할 것 같은데..."

 

  솔라스는 더 마셔야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손에 든 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라 치겠다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걸까. 라벨란은 그녀의 잔을 들어 아직 따듯한 음료를 한모금 삼켰다. 맛있는데.

 

  "아직 불한테 뺏은 가루가 좀 더 있어요. 다음엔 한 번 설탕을 빼고 만들어볼게요. 내가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배려 감사합니다, 베난. 지나치게 달긴 하지만, 오랜만에 좋아하던 향을 맡는 건 나쁘지 않군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실없는 미소가 오갔다. 음료보다는 그녀의 시도를 높이 사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결국 그날의 도전은 라벨란이 두 사람 몫의 핫초코를 몽땅 비우는 걸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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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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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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