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터, 인퀴지터!"

 

  묵직하게 부르는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들자 그녀를 향해 모아진 조언자들의 눈과 마주쳤다. 벌써 세번째였다. 

 

  "아, 죄송해요. 듣고 있었어요. 그...서부진입로에 병사들을 보내겠다는 거죠?"

  "그 안건은 30분 전에 지나갔습니다, 인퀴지터. 피곤하신 듯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낼까요?"

 

  언제나처럼 결코 화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차분한 렐리아나의 말투 속에서 한숨이 느껴지는 건 라벨란의 착각일까? 라벨란은 고개를 저어 계속 진행하자고 말하려다가 세 조언자 모두 그녀 못지 않게 피곤해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되는 회의와 업무에 지친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네. 그럼 남은 안건은 내일 오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다들 오늘은 좀 쉬어요."

 

  사실 누구보다도 휴식이 필요한 건 에메랄드 묘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반나절 째 회의실에 붙들려 있는 라벨란 자신이겠지만, 어차피 회의실을 나간다 해도 네 사람 다 개인 업무를 보느라 쉬지 못할 건 자명한 일이었다. 눈가를 비비며 남은 졸음을 쫓아낸 라벨란은 조언자들이 하나 둘 나가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앉아있던 사이 여행의 피로가 축적된 두 다리며 허리 근육이 잔뜩 뭉쳐 비명을 질러댔다.

 

  '올라가면 죠세핀이 맡긴 서류에 승인을 하고...이번에 찾아온 엘프 유물에 관한 자료도 찾아봐야 하고...'

 

  회의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른 오전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을 벗어난다 해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앙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인퀴지터, 명령하신 마구간 개조 건에 대해..."

  "새로 제작하는 심문회 깃발 색깔 문제로..."

  "이번에 전령의 안식처에..."

 

  그녀의 개인실로 향하는 문을 지척에 두고 한걸음도 채 떼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붙들린 라벨란은 이대로라면 정말 쓰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요청과 보고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순간, 여러갈래로 뒤섞인 목소리 사이로 또렷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퀴지터."

 

  순식간의 주위의 소음이 가라앉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솔라스가 다가왔다. 그녀가 회의에 들어간 사이 짐을 풀고 씻었는지 깔끔한 모습이었다. 라벨란은 그녀가 겨우 세수만 한 꼴이라는 걸 떠올리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몇 주 간 함께 숲속에서 구르며 온갖 모습을 다 봤다곤 하지만 이렇게 땀냄새와 먼지 투성이인 꼴로 그와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

 

  정작 솔라스는 그런 라벨란의 모습에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라벨란을 보는 그의 눈빛엔 걱정어린 염려, 그리고 평소같은 다정함 뿐이었다. 솔라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에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에 라벨란은 살풋 미소지었다.

 

  "너무 졸아서 렐리아나한테 쫓겨났어요. 솔라스는 좀 쉬었어요? 나도 우선 좀 씻어야할 것 같은데...밥도 먹어야 하고. 아, 다그나가 회의 끝나는대로 잠깐 와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횡설수설 말을 하는 사이에도 금세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그러시군요. 저도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는데, 잠시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낮은 톤의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이 신호라도 된 듯, 인퀴지터에게 전달할 용무를 가지고 서성거리던 이들은 조용히 하나둘 물러섰다. 감사한 기분이었지만, 솔라스가 따로 상의해야겠다고 할만한 일이라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라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잠시나마 그녀를 우러르는 시선에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갖는 건 좋았다. 비록 공적인 이유에서라 해도.

 

  "그래요. 그럼 방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솔라스와 함께 인퀴지터의 개인실로 향하면서도 계단을 오르는 두 다리가 천근같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1시간만, 아니 10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면...

 

  "그래서, 무슨 일이죠?"

 

  책상을 돌아 의자에 앉기도 전에 용건을 묻는 라벨란의 모습에 솔라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의자에 앉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놀란 라벨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솔라스는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안은 자세 그대로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솔라스...?! 뭐하는 거예요?"

 

  라벨란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허둥거리다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솔라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별 것 아닌 신체접촉인데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솔라스는 침대에 다다르자 이번엔 조심스런 태도로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찡그린 미간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베난, 좀 쉬도록 하세요."

 

  "...네? 할 말이 있다면서요?"

 

  "핑계였습니다. 에메랄드 묘지에서 발견한 엘프 유물에 관해 상의했다고 하십시오, 나중에. 보고서는 제가 써놓을테니. 일단 좀 자고나서 보고서만 읽어보면 될 겁니다."

 

  라벨란은 이제 어안이 벙벙해져 동그란 눈으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한 말을 하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녀를 쉬게 하겠다고? '그' 솔라스가? 어이없어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솔라스는 어느새 이불을 정돈하여 라벨란이 눕기 쉽게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흙투성이 부츠를 손수 벗기려는 시점에 가서야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얼떨결에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눕고 말았다. 라벨란의 이성은 결재를 기다리는 수많은 업무 목록을 떠올리며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침대에 몸을 누이고나니 휴식을 갈망하던 육체는 이미 수마의 유혹에 넘어가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다그나가...리륨 조사 때문에..."

 

  "스파이마스터와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렐리아나도 피곤할 거예요, 이미 다른 일이..."

 

  "베난."

 

  반쯤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웅얼웅얼 항변하던 라벨란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부르는 솔라스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녀도 이제 한계였다. 막중한 책임감이나 다른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걸로 버티기엔 너무 피곤했다. 달콤하게 밀려드는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 와중에 라벨란은 들릴 듯 말듯 인사했다.

 

  "고마워요...솔라스."

 

*

 

  헉, 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라벨란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위였다. 창밖은 해질녘의 불그스름한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어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사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집무실 책상에 앉은 솔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라벨란에게 말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푹 잤습니까?"

 

  집중한 와중에도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솔라스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종이에 고정된 시야와 깃펜을 든 손가락이 춤추듯 종이 위를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없었다. 그제야 솔라스도 피곤할 거란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역시 돌아와서 한숨 돌릴 새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는 언제나처럼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솔라스, 당신도 피곤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침 보고서도 다 끝났으니 제가 가고 나서 읽어보시면 될 것 같군요."

 

  정말로 피곤하지 않은 걸까? 라벨란은 솔라스의 표정이나 눈빛에서 지친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분명 스카이홀드의 그 누구도, 라벨란만큼 솔라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떨 때 기분이 나쁜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표정이나 행동변화도 라벨란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란은 솔라스가 그녀 앞에서 완벽하게 긴장을 풀고 있다는 느낌은 한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살아온 환경 탓인 걸까, 아니면 아직도 그녀나 심문회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할게요. 덕분에 잘 잤어요. 솔라스도 이제 좀 쉬어요."

 

  라벨란은 책상으로 다가가 솔라스가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사무적인 태도로 방을 나서려는 그를 붙잡아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드물게도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 당신의 안녕이 가장 우선입니다. 이곳에서는, 그리고 저에게는. 쉬십시오, 베난."

 

  그가 떠나고, 아직 온기가 남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로, 라벨란은 솔라스의 다정함에 대해서, 그의 배려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했다.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보고서에는 리아나 라벨란의 연인 솔라스가 아닌, 인퀴지터 라벨란의 이단마법사 동료 솔라스의 흔적 뿐이었다.

 

==

 

포스타입 2017.10.23

'Dragon Age > D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스크드 엠파이어 - 단문 모음  (0) 2020.05.11
솔라벨란 - 우세네라  (0) 2020.05.11
인퀴카산 - 배릭의 인터뷰  (2) 2020.05.11
솔라벨란 - 코코아  (0) 2020.05.11
솔라벨란 - 론도  (0) 2020.05.11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