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레스패서 DLC 스포일러 포함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왼손의 고통을 억누르며 거울 너머로 들어간다. 거울 너머의 세상은 고요하다. 역동감 있는 동세 그대로 굳어진 쿠나리 석상들을 걸으면서 호흡을 고른다.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여지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들의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돌아가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비다쌀라의 분노에 찬 괴성, 그리고 순간의 번쩍임과 함께 그녀 또한 다른 동료들과 같이 돌로 굳어지고 만다. 라벨란은 정돈된 걸음으로 천천히 익숙한 뒷모습을 향해 다가간다. 곧이어 다시 온몸을 찢을 것 같은 격통이 찾아든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그녀를 향해 그가 돌아선다. 한번의 눈짓으로 불타는 균열을 잠재운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솔라스.”

  “이걸로 시간을 좀 더 벌겠지요.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라벨란은 그의 팔에 의지해 일어선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입 속에서 말을 고른다. 또 다시.

 

  “당신은 펜하렐이지요.”

 

  그의 눈이 잠시 커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잘 알아냈군요. 지나오는 길에 있던 단서들로...”

 

 

  라벨란은 차분하게, 단호하게 그 말을 끊어냈다.

 

  “아니요. 그게 아니예요.”

 

  눈시울이 뜨겁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라벨란은 그녀가 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솔라스. 펜하렐. 공포의 늑대. 당신은 에바누리스의 일원이었고, 알라산의 타락한 신들이 세상을 무너뜨리기 전 그들을 막으려 했던 유일한 진짜 신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가져버린 이 세상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준비했지요. 심문회에 합류하기 전, 코리피우스에게 오브를 넘겨줬을 때부터.”

 

  그녀를 부축하던 팔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결코 알 리 없는 진실을 늘어놓는 사이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베난, 어떻게...”

 

 라벨란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독한 기시감에 뼛속깊이 피로감이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언제부터 세는 걸 포기했는 지도. 처음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땐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을, 혹은 나를, 우리의 미래를, 주어진 선택지를. 하지만 아무 것도 소용 없더군요. 나의 어떤 시도도, 어떤 선택도.”

 

  잠깐 사이에 솔라스의 얼굴 위로 깨달음이 찾아든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단편적이고 축약된 라벨란의 말에서도 금세 진실을 찾아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차라리 심문회를 떠나버렸더라면, 아니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은 가치를 찾아냈더라면...그 어떤 가정도 소용 없었어요. 언제나 마지막은 이 곳. 엘루비앙 너머에 마주 선 당신과 나, 두 사람.”

 

  솔라스의 얼굴에 맺히는 비통한 절망감조차도, 라벨란에겐 낯설지가 않다. 라벨란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 솔라스와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반복일 뿐이다.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한없이 반복되는 절망뿐인 그들의 론도.

 

  “하지만 솔라스, 그 어떤 사실보다도 절망적인 게 뭔지 알아요?”

 

  라벨란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대답을 읽는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를 리가 없겠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간을 돌이켜 몇 번을 거듭해 당신을 만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번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어요.”

 

  아마 그녀의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했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슬슬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신음 한번 내지 않고, 균열이 맺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등 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베난.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서려는 솔라스에게, 라벨란은 타오르는 녹색빛 왼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솔라스, 이제 나에게 더 이상 남은 선택지는 없어요. 나는 너무 지쳤거든요. 이제는 내가 어떤 결말을 원했는 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그걸 떠올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요.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세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카로운 단검이 라벨란의 가슴 위를 찔렀다. 절망 섞인 솔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무너져내리는 라벨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다. 두번 다시 눈 뜨지 않을 것이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좌절도, 후회도, 절망도, 사랑조차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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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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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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