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바이오웨어 온리전에 냈던 카피본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트레스패서 DLC 스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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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투화 :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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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나의 베난,

 

  얇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쳤다. 첫 마디를 적고 난 라벨란의 손이 허공에서 머물렀다. 뒤에 이어질 내용을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적으려하니 쉽게 써지지 않았다.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손이 펜을 내려놓고 잉크병을 닫았다. 그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짚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추운 헤이븐의 겨울 하늘 아래, 나는 갈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지친 상태로 생전 처 음 보는 수많은 솀렌들 사이를 걸었어요. 하늘 위의 대균열도, 손을 태울 것 같은 녹색의 알 수 없는 마법도,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악마와 악령들도, 모든 것이 꿈속을 걷는 듯 한 꺼풀 너머의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 산 위에서 당신이 내 손을 잡아끌어 균열에 가져간 순간까지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순간. 그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세계의 구원이 달려있다고 했 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벨란은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혼돈 속에서 라벨란을 움직인 것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정의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살아남아서 클랜으로 돌아가겠다는 목적뿐이었다. 솀렌들이 그녀의 신에 대해 무지한 만큼 라벨란 역시 챈트리도, 안드라스테도, 메이커와 빛의 성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믿는 챈트리의 이념을 따라 심문회를 이끌겠다는 카산드라나 렐리아나의 신념은 존경할만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창조주를 신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임무를 하나씩 해결해나갔을 뿐인데 어느샌가 사람들은 그녀를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혐오의 눈길은 점차 경외와 신뢰의 눈빛으로 바뀌어 갔지만 라벨란은 점점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면 그녀는 솔라스를 찾았다.

  레탈란,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사실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호칭을 쓴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끼기엔 그는 이질적인 존재 였다. 데일리시도, 시티엘프도 아닌 동족의 이단마법사. 그는 분명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라벨란은 그가 머무는 헤이븐 외곽의 작은 오두막에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 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일상적인 잡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경우 가 많았다. 하지만 라벨란은 토론에 가까운 그들의 대화방식에 점차 적응해갔다. 솔라스는 그녀가 던지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가볍게 흘려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계에서의 신비한 경험, 그가 세상을 떠돌며 본 인간들의 이야기, 고대 엘프의 신화, 잊힌 그들의 역사,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담, 그가 들려주는 것들은 어떤 하렌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신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날도 라벨란은 솔라스가 가볍게 던진 질문에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솔라스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해도 비웃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되도록 바르고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사람에게 없는 강대한 힘과 불멸성 아닐까요?"

  "그 옛날에 우리 엘프들은 불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신은 있었습니다."

 

  솔라스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아니, 보통 그들의 토론에는 정해진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길을 열어주었고 라벨란은 그와 대화하며 자신이 얼마나 폭 좁게 생각해왔는지 새삼 깨닫곤 했다.

 

  "단순히 힘이나 수명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군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 아닐까요? 세상을 창조하고 새 생명을 창조하는 건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하잖아요."

  "전설이라는 건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사히 대균열을 봉인하고 테다스를 지켜낸다면 백 년 뒤쯤에는 당신의 손짓 한 번에 악마와 악령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겠지요. 그것이 백 년이 아니라 몇 천 년 을 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전에 솔라스는 그녀에게 어떤 영웅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었다. 그녀의 현재는 후대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란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니라 그들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의 기록이었다. 백 년 뒤 후세의 기록에는 그녀가 정말로 안드라스테의 화신이었다고 적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그마한 데일리시 클랜 출신의 평범한 엘프였다는 사실 같은 건 어디에도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가 믿는 신들이 사실은 강대한 힘을 가진 위대 한 마법사였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나요, 그럼?"

  "글쎄요. 세상을 창조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과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숭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레탈란."

 

  그날의 토론은 그렇게 끝이 났다. 라벨란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녀의 신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키퍼로부터 그들을 수호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믿고 따르는 이들을 수호한다는 신들은 그들이 할람쉬랄에서 쫓겨날 때 어디에 있었는지. 펜하렐이 그들을 장막 너머에 봉인해버린 탓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신들을 여전히 숭배해야 하는지. 키퍼 이스마토리엘은 그녀의 불경한 질문에 화내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간구하는 이들에게 신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들을 지켜주는 거란다."

 

  당시에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습관처럼 사냥을 나가기 전 안드루일의 석상 앞에서 기도문을 읊으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얼룩처럼 남아 맴돌았다. 장막 너머의 신들은 지금도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을까.

 

*

 

  혹자는 사랑을 두고 운명적인 것이라 하겠지요. 음유시인들이 첫눈에 반해 멈출 수 없는 이끌림을 따라 정신없이 빠져드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듯이. 나는 우리가 나눈 것이 그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해요. 우리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때에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들, 별 특별한 이유 없이 당신과 이야기하기 위해 찾아가던 나의 발걸음,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고 생각하던 작은 호기심, 그런 것들을 두고 운명적인 이끌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나 쉽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다가갔어요. 당신이 나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헤이븐이 무너지던 날, 라벨란은 그녀가 이제 다시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의 존재와 홀로 맞서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다. 어차피 성유골신전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기에,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을 지키는 데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걸으며 라벨란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이 길 끝에 살아남는다면, 정말로 그녀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비다쌀라는 솔라스가 그 모든 상황을 이끌었다고 했다. 닻이 그녀를 죽이지 않게 지키고, 심문회를 스카이홀드로 인도하고, 코리피우스에 게서 오브를 되찾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그녀의 죽음과 삶조차 솔라스가 의도한 거였다면 그들의 감정 또한 그가 이끈 것일까. 만약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어디부터가 그들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운명인 걸까.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 야영지에서 나눈 대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끼던 순간의 교감, 그 감정들조차 그에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까.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지게 된 호감조차도 그의 의도한 바였을까.

  라벨란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향하던 발걸음은 낯선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동질감 느껴지는 대상을 향한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정도 따라 변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올 때, 스카이홀드의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그가 머무는 원형돔을 향해 한 번 더 눈길이 갈 때, 야영지 천막 너머 부스럭거리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일 때, 라벨란은 서서히 그녀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영계에서의 키스는 다소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로 인해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그의 태도를 흩트려 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에게 끌리는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솔라스가 다시 키스해온 것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결코 충동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뿐더러, 그러한 충동이 그 안 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익숙한 가면 뒤로 자신을 감춰버렸다. 영계에서는 모든 게 쉽게 느껴진다는 변명 같은 말과 함께. 그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라벨란 역시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둘 사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간 듯했으나 정말로 그렇게 될 리는 없었다. 라벨란은 그와 이야기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연한 색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따금 그 시선을 깨달은 솔라스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한 번 벌어진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영계에서 보는 게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해도, 영계를 걷는 우리의 의식은 진실인 거죠?"

 

  마법사가 아닌 라벨란에게 영계의 개념은 아무리 들어도 모호했다. 그녀는 솔라스와 함께 헤이븐을 걸으면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인 걸까. 막연하게 이해하려 해봐도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현실 같았다.

 

  "쉽게 왜곡되고 휩쓸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행동했다면, 거기엔 어떤 왜곡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라벨란은 무심한 솔라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했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현실보다 영계를 걷는 일이 편하고 즐겁다고 했던 그인데 자신의 의지로 한 입맞춤이 단순한 감정의 흔들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주인 대신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기대선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 서서 눈을 마주쳐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셔츠를 그러잡고 가볍게 당긴 것만으로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레탈란."

 

  라벨란은 발꿈치를 들어 솔라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 한번, 그리고 다시 입술에 한번. 그리고 뒤로 물러서기 전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뒤로 물러서 마주한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면 그녀의 착각일까. 

 

  "나는 진심이었어요."

 

  아마 얼굴이 붉어져 있겠지만, 라벨란은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문을 나서기 직전 돌아보았을 때 얼핏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는 솔라스를 본 것 같았다.

 

*

 

  마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 작은 불꽃일 무렵에는 작은 손짓 한 번으로 쉽게 꺼트릴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게 두었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거예요.

 

  붓을 잡은 손이 느릿하게, 무게를 싣고 선을 그린다.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섬세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손놀림에는 이미 같은 행위를 수백 번, 수천 번은 한 것 같은 능숙함이 묻어있다. 그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 어느 잠 오지 않는 새벽에 스카이홀드를 돌아보던 라벨란은 당연히 비어있을 거라 생각한 그의 거처에서 장막화염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솔라스는 그녀의 기척에 잠시 눈짓만 해 보이곤 별다른 말없이 계속 작업에 집중했다. 그 무언의 허락에 라벨란은 종종 쉽게 잠이 들지 않을 때면 그의 작업을 지켜보러 원형돔으로 향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그를 보러 내려가기 위해 밀려드는 잠을 애써 깨우는 때가 더 많았다.

  라벨란은 예술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의 그림 실력이나 그림에 담긴 상징과 의미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평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는 색다른 열정이 느껴 졌다. 그림과 그 자신 외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은 집중한 눈을 보고 있자면 은근한 질투심마저 들었다.

 

  "그림은 누구한테 배웠어요?"

  "따로 누군가에게 배운 건 아닙니다."

  "아, 또 그저 살다 보니 어디선가 익혔다는 거죠?"

 

  좀처럼 과거에 대한 단서를 흘리지 않는 그의 대화방식에는 어느정도 적응했다. 처음에는 그가 집중하는데 방해될까 봐 최대한 조용히 지켜보려 했지만 라벨란은 성실한 관객이 되기엔 예술적 소양이 부족했다. 어두운 주방을 뒤져 비스킷이나 사과 따위를 챙겨 자리 잡는 그녀를 보며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솔라스는 특별히 좋다 싫다 하는 말없이 그녀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에게 기습적인 질문이라도 던지면 자신에 관한 얘길 조금이라도 듣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라벨란은 여느 날처럼 그의 붓놀림을 지켜보다가,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들어 뒤적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초상화도 그려줄 수 있어요?"

 

  테이블 위에 엎드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는 방만한 자세를 죠세핀이 본다면 분명 인퀴지터의 체면을 운운하며 잔소리를 할 테지만 다행히 보는 눈은 없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진지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지금 그리는 것도 결국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그림은 읽어내기 어려웠다. 단순하게 축약되고 기호화된 이미지 속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어둠 속의 마법사들, 장막과 회색감시자 같이 큼직한 형상들뿐이었다. 라벨란은 굳이 그림의 의미를 캐물어서 예술에 대한 그녀의 무지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인퀴지터의 초상화라면 몽틸리예 대사께서 이미 좋은 화가를 구해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푸, 하고 반사적인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미 죠세핀에게 초상화 문제로 한참 시달린 후였다. 무슨 옷을 입을 건지, 어디를 배경으로 할 것인지, 심문회의 상징물로 뭘 들고 있으면 좋을지 등등 그녀에게는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정하는 데만 반나절은 걸린 듯했다. 그녀가 이 일로 불평하자 도리안은 실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열 배는 더 괴로울 거라 겁을 주기도 했다. 빛이 드는 창가를 배경으로 수 시간 동안 고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그건 순전히 심문회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잖아요. 그런 거 말고, 나는 당신이 내 얼굴을 보고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솔라스는 그제야 붓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원하던 관심을 끌었 지만 라벨란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언제나 묘하게 긴장됐다. 팔레트 위에 붓을 내려놓고 다가온 그가 가볍게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마주친 눈빛이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 라벨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에겐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내게 그럴 기회를 주긴 할 건가요?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라벨란은 이번엔 먼저 물러서기로 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위험신호가 울려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괜찮다. 지금 이대로 일어서 방으로 달려간다면, 그리고 다시는 새벽의 돔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불러일으키는 영계의 매혹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다면.

  하지만 라벨란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미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

 

  베난,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온기, 돔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면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얼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 이런 것들이 사랑을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 나를 사랑했겠지요. 나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몇 번이고 이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의 감정이 어떤 비극을 불러올지에 대해 경고하는 당신의 말은 당신 자신조차 멈추지 못했 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두려움을 나누겠다고 말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좀 더 빨리 진실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나의 감정에, 우리의 감정에 취해 눈이 멀어있던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을까요?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사랑이란 단어는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충분한 단어이긴 한 걸까. 대륙공용어의 ‘사랑’과 엘프어의 ‘lath’가 가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만큼,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을 한 단어 안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라벨란에겐 때때로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은, 특히나 어떤 이름을 붙이고 난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휩쓸려 가고 만다. 그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던 선은 그날 발코니에서의 키스 이후 너무나도 가볍게 무너졌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거리를 두려 한 그의 노력이 어떤 불안에서 기인한 것인지 라벨란은 알지 못했다. 솔라스는 마치 그때까지 억누른 감정의 반동인 것처럼 그 날 이후 세상없이 다정한 연인으로 변했다. 그의 변모에 놀란 것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내가 실실이라고 부르는 건 그 친구가 보통 입매만 슬쩍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에 대한 반어법이었지 정말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단 뜻은 아니었어."

 

  야영지에 모인 동료들은 솔라스가 없는 틈에 라벨란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아무 데서나 실실거리진 않는데요, 라고 항변하려 해도 그가 이전보다 더 자주 웃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세라는 예상했던 대로 질색하며 싫어하는 한편 그럴 줄 알았다며 의외로 유하게 받아들였다.

 

  "같이 있을 때면 그 반질반질한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거 엄청 뻔했거든! 축하한다고는 못 해주겠다. 알지?"

 

  세라의 말처럼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진 호의는 누구나 알 법한 명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벨란은 솔라스가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하려 했으나 라벨란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다른 연인들이 상대방을 사랑하게 하는 특별함과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사랑하기에 특별하다 믿고 싶었을까, 정말로 그녀가 특별하기에 사랑하게 되고 만 걸까.

  그들은 시작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난 지금에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리 진실을 알았다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정작 모든 걸 알고 있던 그조차도 자신을 멈추지 못했는데. 어느 밤,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내려다보는 솔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청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고요했지만 라벨란은 어쩐지 그 눈빛이 낯설었다. 서늘한 손끝이 그녀의 왼쪽 눈가를 따라 발라슬린을 그려냈다. 왜? 하고 입모양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어째선지 라벨란은 아다만트의 영계에서 보았던 그의 묘석을 떠올렸 다. 홀로 죽는 것. 모두의 두려움이 적혀있던 비석들 사이에서 유달리 그의 것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었다.

 

  "…솔라스."

 

  새벽의 정적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라벨란의 왼손이 그의 뺨을 스치자 희미한 녹색 빛이 그의 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라벨란이 이전에 본 적 없는 무방비한 얼굴 위로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빠르게 스쳐갔다.

 

  "베난."

 

  몸을 숙여 이마 위로 입맞춰오는 입술이 차가웠다. 누구보다 가까이 닿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선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벨란은 그런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껏 끌어안는 것으로 그에게도 따듯함이 옮겨갈 수 있다 믿는 것처럼.

 

*

 

  사랑에 눈이 먼다는 표현처럼, 나는 눈앞에서 나를 삼키는 절망을 마주하고도 물러설 수 없었어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우리의 감정이 위대한 과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당신의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의 어떤 애원도 당신을 되돌릴 수 없었지요. 어떻게 당신은 한결같이 사랑을 담은 그 눈으로 나를 보며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나요. 내가 어떻게 그런 당신을 그대로 놓아버릴 수 있었겠나요.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이 끝난다면 모든 것이 훨씬 간단해질 텐데. 라벨란은 모든 사랑이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상호합의 하에 이어지던 관계는 상대방이 끝을 선언하는 순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이다.

  분명 그녀의 삶은 홀로 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을 텐데도, 잠시 가졌던 온기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떠 빈 옆자리를 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대하는 솔라스의 태도였다.

 

  "인퀴지터,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말투도, 표정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말로 그녀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정말 그뿐이라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베난."

 

  그녀는 고집스럽게 그 특별한 호칭을 고집했다. 오히려 이전에는 쓰지 않던 단어였다. 미련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부를 때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솔라스의 눈빛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무삼림그늘에서 병사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병력이 정리되는 대로 코리피우스의 위치를 추적할 인력을 나눌 예정이에요. 따로 조언 해줄 만한 게 있나요?"

  "그는 이제 궁지에 몰렸을 것입니다. 그가 준비한 군대는 심문회 앞 에 무너졌고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 테지요. 우리가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지도 모릅 니다."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라벨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당신은 정말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배신과 속임수의 신이라 했던가. 그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거짓과 기만에 능했다면 그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한 번도 라벨란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벨란은 솔라스를 놓을 수 없었다. 장막 너머에 홀로 남겨진 지금까지도.

 

*

 

  수많은 밤을 괴로워했어요. 모든 것이 끝나면 알려주겠다던 진실은 내 손 안에 없었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 외에 무엇도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좀먹어갔지만, 괴로움과 비탄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어요. 함께 한 시간에 거짓은 없었다던 그 말을. 더 이상 당신의 무엇을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는 순 간에도 그 말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요.

 

  2년의 시간이었다. 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기도 했다. 라벨란은 그녀가 관성처럼 사랑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던 이는 이미 떠났는데,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이 했던 모든 약속도 맹세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녀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시간에 매여 있는 느낌이었다. 대균열이 사라지고 오브는 부서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녹색 균열이 남아있었다.

  균열의 통증은 하루하루 심해져 갔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언젠가 그것이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벨란은 죽음을 생각해도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을 발견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라벨란은 원형돔을 찾아가 솔라스가 사용하던 의자에 앉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밑그림뿐인 마지막 그림을 보고 있자면 대답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째서 떠난 건지, 들려주지 못한 진실이 무엇인지, 왜 말없이 떠나야 했던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끝에 따라오는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나를 사랑했나요, 정말로?

 

  더 이상 새벽의 돔을 찾지 않게 되고부터, 라벨란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로도 보낼 수 없는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사소했다. 오늘은 세라가 드디어 제대로 된 건포도 쿠키를 처음으로 구웠어요. 컬렌이 청혼을 거절한 오를레의 공작영애가 스카이홀드로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소동이 있었답니다. 침대 장식을 연녹색으로 바꿔봤어요. 당신은 붉은 천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다 쓴 편지는 심문회의 인장으로 정성스럽게 봉인한 뒤 난롯불에 불태웠다. 그녀의 새로운 습관을 알아차린 렐리아나는 ‘흔적이 남지 않게 잘 태워주세요, 인퀴지터.’하고 짧은 코멘트만 남겼을 뿐 그 이상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아마 그녀가 상처를 딛고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벨란은 그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그녀를 불태우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커져 가는 불길이 언젠가 그녀를 집어삼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라벨란은 열병 같은 사랑을 놓지 못했다.

 

*

 

  그리고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기대했던 방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갈 수밖에 없던 당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의 Din’anshiral은 내가 함께 걸을 수 없는 길이었지요. 함께 걷게 해달라던 내 바람은 당신에게도 내게도 불가능한 선택지였고.

당신은 내 손에서 균열의 흔적과 함께 2년간의 의문과 불안, 고통도 가져가 버렸어요. 내가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은 웃을까요.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는 당신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내 마음을 이어나갈 수 있는 대답을 얻었는걸요.

 

  혼자 가야겠어, 하고 말하는 라벨란에게 동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엘루비앙 너머로 돌아온 그녀는 녹색빛이 꺼져가는 왼팔을 도리안에게 내밀었다.

 

  "팔을 잘라야겠어.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인퀴지터! 대체 무슨 일이…. 솔라스를 만났어?"

 

  라벨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만난 건 펜하렐이었다. 그들이 알던 솔라스는 그곳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을 무시한 채 라벨란은 옆구리에서 단검을 뽑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이를 악문 채 칼을 치켜든 그녀를 카산드라가 붙잡았다.

 

  "…단검으로는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거야. 내가 할게."

 

  라벨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쥔 단검을 입으로 가져가 이 사이에 물었다. 검을 꺼내 드는 카산드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리안의 지팡이 끝에 불꽃이 맺혔다. 라벨란은 눈을 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겨울궁에 돌아와서 모두를 모아두고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을 전했다. 숭고한 의회는 심문회의 규모를 줄여 챈트리 밑으로 들어 가겠다는 라벨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막으려면 그들에겐 아직 힘이 필요했다.

  오가며 마주치는 이들이 더 이상 그녀의 빈 소맷자락을 흘끔거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라벨란은 하얀 늑대가 찾아오는 꿈을 꾸기 시작했 다. 달빛만이 어슴푸레 비치는 숲 속에서 그들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라벨란은 거듭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솔라스,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답을 알고 있었다.

 

*

 

  아마 이 편지가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라 생각해요. 아무래도 한 손으로 쓰는 글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나는 빈 자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Var lath vir suledin. 나는 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이 시간을 견뎌낼 것을 믿어요.

  사랑하는 나의 베난, 나는 내 마음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이 사랑으로 당신을 찾아갈 거예요. 내가 줄 수 있던 내 마음, 내 영혼, 내가 지키고 추구하던 모든 것들은 이제는 모두 잿더미 속에 잔해로 남아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가져갈 수 있는 건 내가 주는 죽음뿐이겠지만,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걸 나는 알아요.

  내 사랑,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나는 당신의 가슴에 칼을 꽂을 거예요. 그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 순간 당신이 지어 보일 표정을 상상해봐요.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질 때면 보이곤 하던 조금 놀란 듯한,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짓겠지요.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서로를 품에 안는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거예요.

 

  잔 구김 하나 없이 바르게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심문회 문장이 박힌 도장으로 봉투를 봉했다. 라벨란은 봉인 위로 한번 입을 맞추고 촛불에 봉투를 가져갔다. 모서리 끝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봉투를 완전히 불살랐다. 책상 위로 검은 재가 내려앉았다.

 

===

 

2016년에 바이오웨어 온리전에서 판매했던 솔라벨란 카피본을 전체공개로 전환합니다. 이전에 구매해주신 분들, 새롭게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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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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