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나 라벨란은 겨울에 태어났다. 데일리시는 겨울에 태어나는 아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유랑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픈 계절이기에. 그녀가 태어난 겨울은 그래도 한 곳에 정착하여 풍족하게 보내던 편이었기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자라나며 수많은 황량한 겨울을 겪는 사이,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겨울을 싫어하게 됐다. 달빛 외에 한 점 빛도 비추지 않는 긴 밤을 텐트 속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춥고 메마른 기억은 쌓이고 쌓여 겨울이라는 단어 위에 차가운 껍질 같이 덧입혀졌다.

*

- 그러고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뭐가?"
- 내가 보낸 선물.

수정 너머로 들려오는 초콜릿을 녹인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담겨있었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수정을 굴리며 듣는둥 마는둥 대답하던 라벨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선물? 그러고보니 죠세핀이 티빈터로부터 뭔가 왔다고 한 것 같았는데...

"오, 세상에. 그게 네 거였구나, 도리안. 아직 확인을 못했어."
- 저런. 우리 인퀴지터께선 여전히 할 일이 많으신가 보군. 괜찮아, 상하는 건 아니니까. 확인하면 꼭 연락하라고. 반응이 기대되니까. 아무튼, 미리 말해둘게. 생일 축하해, 인퀴지터.
"고마워, 도리안! 역시 도리안 밖에 없어!"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의 표정을 도리안이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몇개의 농담을 더 주고 받은 뒤 통화가 끝나자마자 라벨란은 재빠르게 죠세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녀의 책상 옆으로 쌓여있는 몇개의 소포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고풍스럽고 화려한 포장을 찾아 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우아한 필기체로 마기스테르 도리안 파부스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아, 도리안에게 온 거 말이죠. 아직 확인 안하셨군요?"
"맞아요. 늦게 열어본다고 혼났어요, 안 그래도."

금박으로 장식된 푸른빛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상아빗이 들어있었다.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눈색을 닮은 에메랄드로 장식된 상아빗은 도리안의 취향을 가득 담아 우아하고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사치품의 팔할은 도리안이 마련해준 것들이었는데 이로써 그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고보니 내일이네요. 이번에는 정말 우리끼리 소박하게 기념하는 거다보니 준비도 금방 끝났어요. 그래도 음식은 훌륭할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인퀴지터."

어느새 내일이었다. 그녀, 리아나 라벨란의 생일. 작년까지만 해도 수많은 친구들과 스카이홀드에 그녀를 아끼는 이들 모두 함께 파티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심문회 규모를 축소하기로 한 결정 때문이기도 했고, 최근 그들의 상황이 파티와 영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생일은 기념해야죠, 하는 죠세핀의 제안에 가볍게 저녁식사 만찬으로 끝내기로 결정한 바였다.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 선물받은 빗을 머리에 대 보았다. 오, 도리안. 이건 한낱 데일리시 엘프가 쓰기에 너무 고급이잖아,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직은 손에 익지 않은 감촉의 상아빗으로 머리를 빗어내리며 라벨란은 도리안의 생일에 맞춰 보낼 망토핀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생축! 위들이랑 내가 같이 손 본 거야! 새로 정제한 영혼 룬을 박았다고 하더라."

다그나는 그녀의 의수에 장착된 석궁을 개조하는데 단단히 재미를 붙인 듯 했다. 세라 또한 활에 있어선 자기가 선배라며 으스대는 와중에도 그녀가 새 무기에 적응하는데 아낌없는 응원 - 스무번의 야유와 한번의 칭찬을 두고도 응원이라 할 수 있다면 - 을 보탰다. 손볼 게 있다며 가져갔을 때 짐작하긴 했으나 다그나의 손길을 거친 석궁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고마워, 세라."

모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아이언불과 크렘, 컬렌, 죠세핀, 그리고 세라와 다그나. 멀리 떠난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올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도리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배릭 또한 자작 업무가 바빠 짬을 내기 힘들 거란 편지를 보내왔다. 다행히 아이언불은 최근까지 나가있던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교황이 된 렐리아나는 심문회에 공식적인 축하를 보내기보단 조용히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표했다. 비비엔은 심문회가 축소된 후로 다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으나 그녀 개인이 라벨란에게 가진 호의를 거둘 정도는 아니라 편지와 함께 '요긴하게 쓰일 지 모르는' 올레이 궁정식 반쪽가면을 보내왔다. 톰 레니에, 한때 블랙월이었던 친우는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지가 오래라 그녀를 떠올리고 들러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 때 전령의 쉼터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노래했던 걸 떠올리면 다소 쓸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인퀴지터!"

"축하해, 보스!"

"축하드립니다, 인퀴지터."

그래도 한동안 다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를 떨쳐내고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술이 들어가자 흥이 올라 웃음소리와 환호로 빈자리를 채우니 쓸쓸함도 금세 잊혀졌다. 그렇게 템플러의 규율 상 과음은 안된다던 컬렌마저 얼큰하게 붉어진 얼굴로 위키드 그레이스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을 때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일 없이 밤을 새워 즐겼다.

*

평소보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벨란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달간 그녀 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어색한 긴장 속에 시간을 보내왔다. 비어있던 왼팔 소맷자락을 의수 고정장치로 채우고, 미련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원형돔의 낡은 책상과 책장을 들어내 정리했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사실 라벨란은 3년 전, 코리피우스를 해치운 그 날 이후로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 진 느낌을 떨쳐본 적이 없었다. 솔라스가 그녀를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그가 있을 땐 어땠더라? 라벨란은 일부러 묻어두고 떠올리지 않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와의 대화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생일 언저리였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 데이트를 위해 잠시 짬을 내기도 어려운 두 사람은 평소처럼 원형돔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 선물로 받았던 보호룬은 아직도 그녀의 서랍 안에 잠들어 있었지만, 선물 외에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일부러 잊으려 노력한 탓에 이제는 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 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먼지쌓인 기억을 뒤적이던 라벨란은 취기에 섞여 달콤하게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라벨란은 그녀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계인지, 그저 그녀 자신의 꿈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공기가 희박한 것 같은 특유의 느낌은 익숙했다. 눈 앞에는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마을이라기엔 폐허에 가까웠다. 불에 타 무너진 잔해 사이로 형체를 갖춘 건물이라곤 두어채 남짓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마을의 형태는 뚜렷해졌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조차 오래된 것이었다. 불에 타고 남은 건물 벽 일부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었다. 약탈과 대규모 학살의 흔적. 현실에서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풍경이었으나 라벨란은 한꺼풀 덧씌운 풍경을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으나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길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길은 마을 밖으로 이어져 높다란 언덕으로 향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녀를 기다리던 이가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지만 아직 어린 소년인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소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언덕 끝에 마저 올라서자 야트막한 구렁 너머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희뿌연 지평선 근처로 하늘 높이 솟은 원형의 탑, 구름 위에 떠 있는 웅장한 도시의 윤곽. 라벨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 알라산.

 고대 엘프 제국의 황금도시. 정말로 하늘 위에 있었구나. 라벨란은 태양빛을 머금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를 바라보다 등 뒤를 돌아봤다.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진 폐허. 라벨란에겐 오히려 더 익숙한 '엘프의' 것들.

"그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파괴해."

소년의 주변에는 서툴게 만든 봉분이 여러개 있었다. 나무판 위에 새긴 글자는 그녀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적혀있었다. 소년의 흙투성이 손에 작은 생채기가 여러개 나 있었다. 소년의 시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공중도시의 첨탑에 꽂혀 있었다.

"하늘 위에 사는 고귀한 이들에게, 땅 위의 우리는 벌레나 다름 없으니까."

소년의 남루한 차림은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군데군데 기우고 덧댄 흔적이 가득했다. 황금도시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갈망과 분노로 빛났다. 라벨란은 소년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에 속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이곳은 아마 영계일 것이다. 이 풍경은 그 옛날에 살았던 누군가의 기억인 것일까.

"언젠가, 저들을 무너뜨릴 거야."

라벨란은 시선을 돌려 소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르스름하게 민 흔적이 있는 옆머리와 길게 땋아내린 검은머리는낯선 형태의 매듭장식으로 묶여있었다. 세파에 찌들지 않은 단정한 이마. 그 아래 결의와 확신으로 빛나는 청회색 눈. 라벨란은 그 눈 안에 담긴 불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 불꽃.

"붉은 피를 흘리는 이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고귀하거나, 비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 거야."

라벨란은 그녀를 둘러싼 주위 풍경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그녀와 소년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들리지 않을 목소리임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너는 누구야? 그 때, 소년이 라벨란을 향해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 땅의 이름은 '오만'이야."

*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익숙한 방 안에서 익숙한 외로움 속에 홀로 누워있었다. 왼팔 소매 밑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그녀의 맨얼굴엔 발라슬린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벨란은 텅 빈 그녀의 왼팔을 끌어안았다. 그 언젠가, 그가 약속했었다.

'기회가 된다면, 제 고향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오만의 이름을 가진 땅. 오랜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벨란은 오랜만에 마주한 연인의 흔적을 눈 안에 담은 채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 속에 갈무리했다.

아주 특별한 생일선물이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오로지 그만이 줄 수 있는.

 

===

 

포스타입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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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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