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워] 반추

etc. 2021. 2. 21. 05:32

  "...사적인 감정은 없어."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머릿 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허리춤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의 간격이 결과를 갈라놓았다.

 

  탕-

 

  총성은 거의 하나였지만, 총알의 궤적은 달랐다. 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타는 것 같은 감각에 뒤로 나동그라져 몸을 웅크린 채로, 벨은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애들러를 올려다 봤다. 그의 총알은 애들러의 왼쪽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왼쪽 얼굴 위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실금 하나를 만들어 그 위로 피가 주륵 타고 흘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벨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더듬더듬 흙바닥을 짚으며 뒤로 향하던 그의 등이 나무등치에 닿았다. 허나, 그가 예상한 다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들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버겁게 내쉬는 숨 사이로 탄식 같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총알이 빗맞은 거라면 아마도 왼쪽 어깨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총알은 정확히 노린 것마냥, 벨의 오른 어깨를 맞췄다.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오른팔의 감각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애들러가 빗맞췄을 가능성은 없었다.

 

  "너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그 정도는 알겠지."

 

  마치 지령을 내릴 때와 비슷한, 딱딱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나 정말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벨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그 말을 듣고 있지도 않으리라. 그는 왜-.

 

  "최대한 조용히 숨어 살아. 그 이상은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출혈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벨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할 것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수고했다, 벨."

 

  그 말을 끝으로, 벨은 의식을 잃었다.

 

*

 

  러셀 애들러. CIA 특수활동부의 정예 비밀요원. '페르세우스'를 위시한 러시아의 대규모 핵공격을 막아낸 구국의, 세계의 영웅. 그가 해낸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위기를 막아낸 건지 모르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일의 일부였기에, 그는 딱히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임무와, 국가에 닥칠 위협을 차단하는 일, 그 뿐이었다.

 

  솔로베츠키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와 꼬박 일주일에 걸쳐서 결과 보고와 잡다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애들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실상 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장소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현관키를 가방 밑바닥에서 끄집어내 열쇠구멍에 꽂아 넣으면서 그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어두컴컴한 거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주머니의 담배갑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천장으로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제서야 나른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이대로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씻고 끼니를 챙기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달리 없었다.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이,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잔상처럼 남은 이미지가 맴돌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던 바다 냄새. 신음 섞인 한숨 소리. 영영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을 것 같던 무기질의 눈동자에 맺혀있던-.

 

  "...멍청하긴."

 

*

 

  애들러가 변화를 눈치챈 것은 두 달 가량 정도 지나서였다. 집을 자주 비운다고는 하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침입을 눈치챌 수 있는 장치를 몇 가지 마련해 두었다. 그의 방문자는 보란듯이 그 모든 장치에 다녀간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집안을 살폈을 때 무언가 사라지거나 헤집은 흔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 설치된 도청장치나 카메라 등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지만 그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다. 애들러는 만약을 대비해 요원 몇몇에게 집을 감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일주일 간 아무 흔적도 없어 그마저도 해제해야 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방문자는 귀신 같이 애들러가 없는 날만을 찾아서 다녀갔다.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이란 창문에 다 이중잠금장치를 설치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일주일에 세네 번일 때도 있었다. 애들러가 집을 오래 비우는 때를 아는 건지, 심지어는 그가 없는 사이 먹고 잔 흔적마저 미세하게 남아있기도 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암살이라면 그렇게 숨어들 실력으로 이미 시도를 했을 것이고, 그가 가진 자료나 정보가 목적이었다면 무언가 훔치려는 시도가 있었을 법 했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것은, 애들러가 점차 그 상황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름없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마치 아는 것만 같았다. 딱히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방문자를 잡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마치 생활패턴이 다른 동거인을 둔 것 마냥, 그는 방문자와의 이상한 공생 관계에 적응해갔다.

 

  그래서 어느 밤,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때 거실에 앉아있는 그를 마주했을 때에도, 애들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애들러."

  "안녕, 벨."

 

  반 년만이었다. 애들러는 가장 먼저 가죽 자켓에 청바지를 차려입은 벨의 차림새에서 무기가 숨겨져 있을 만한 위치를 가늠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여위어 보였다. 머리는 그 사이 길어져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신 듯, 테이블 위에는 빈 캔이 두엇 놓여있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겠군. 눈 깜빡할 사이 빠르게 분석을 마친 애들러는 습관대로 현관에 열쇠를 걸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벨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지 그래? 맥주 갖다줄까?"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군."

 

  애들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고, 벨은 말한대로 맥주를 꺼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애들러는 어째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긴장은 별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듯한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맥주를 가져온 벨이 캔을 따서 내밀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받아서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벨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으면 더 일찍 했겠지. 와서 잠도 자고 간 것 같던데, 월세도 좀 같이 내지 그래?"

  "아, 다음 주에 주급 받으면 생각해 볼게."

 

  주급이라니,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길이 없는 실없는 이야기였다. 애들러는 머릿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을 골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든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라든가, 혹은...

 

  "당신을 죽이러 온 거 맞아."

 

  그의 생각을 끊고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러는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맥주에 독이라도 넣었나, 아니면 이제라도 총을 뽑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경각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켰다. 벨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냥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에 든 맥주캔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사실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눈치챘었나 모르겠네. 아무튼, 기왕 끝내는 거 얼굴이나 한번 더 볼까 해서 기다렸어. 그랬는데..."

 

  벨은 말을 잇지 않고 그제야 애들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항상 벨의 눈빛이 파충류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 때도 좀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는 차가운 무기질의 눈. 나고 자란 조국의 영향인지, 세뇌 과정에서 무언가 망가진 탓인지, 애들러는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벨의 눈빛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인간다워졌다고 해야할까.

 

  "관둘래. 어차피 당신은 신경 안 쓸 것 같으니까. 내가 죽이려 들든, 말든."

  "...아니, 죽이려 들면 신경 쓰겠지, 나도."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답하고 나자, 이 모든 대화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주한 벨 역시 비슷한 표정인 걸 발견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벨마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별 뜻도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주보고 한참 웃어댔다. 그리고 벨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총으로 손이 향한 애들러는, 후련한 표정의 벨을 보고 다시 자세를 풀었다.

 

  "...갈게.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

 

  벨이 현관으로 향하고, 문을 열고 반쯤 나설 때까지도, 애들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벨이 문을 닫기 직전, 그제서야 애들러는 그가 해야할 마지막 인사를 던질 수 있었다.

 

  "잘가라, 벨."

 

  벨은 말없이 문을 닫았고, 애들러는 그제서야, 정말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라나_0. 악마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0) 2023.12.31
마주보는 밤  (0) 2023.11.21
[콜드워] 일상  (0) 2021.02.21
가하  (0) 2020.11.08
보리  (0) 2020.11.08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