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워] 일상

etc. 2021. 2. 21. 05:10

  CIA라고 하면 으레들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두침침하고 은밀한 느낌의 비밀 본부. 온갖 암호화된 서류와 컴퓨터로 차있는 사무실. 시종일관 진지한 인상으로 작전 회의에 집중한 요원들. 실제는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24/7로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이기에 때가 되면 끼니도 챙겨 먹고 한숨 돌리면서 쉴 시간이 필요했다.

 

  "또 나야?"

 

  제비뽑기를 뽑아 든 벨이 끙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공평하게 숫자대로 종이를 넣고 뽑는 건데도, 유달리 벨은 식사 배달 당번으로 자주 뽑혔다. '나 모르게 뭔가 표시라도 해두는 거야, 다들?' 하고 물어도 실없는 소리 말라며 재빠르게 자기 몫의 뽑기를 집어들고 멀어지는 팀원들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을 텐데, 길게 물고 늘어져 봐야 이런 걸 알아채는 것 또한 스파이의 자질이라며 비웃을 우즈를 생각하며 벨은 얌전히 자기 역할을 따르기로 했다. 그 날의 메뉴는 중식이었다. 사실 굳이 '그날의'라고 꼽을 것도 없이, 그들의 메뉴는 주로 터키식 도너, 중식당, 얄팍한 이탈리아 피자 사이에서 로테이션을 도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그마저도 사치일만큼 바빠서 마른 빵쪼가리에 육포나 햄 따위를 씹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모두가 고른 메뉴가 적힌 쪽지를 들고 밖으로 나서기 위해 자켓을 챙겨입는데 따라 와서 자신의 가죽 자켓을 주워 입는 애들러가 눈에 들어왔다.

 

  "같이 가게?"

  "담배 떨어졌다."

  "그럼 나가는 김에 당신이 가져오든가."

  "까불지 마라, 꼬마야."

 

  담배까지 사오라며 심부름 목록에 더 얹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지만, 웬일인지 애들러는 군말없이 문을 나섰다.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벨은 오토바이 열쇠를 애들러에게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애들러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였다.

 

  "빗길 운전인데 더 잘하시는 분이 해야죠."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오토바이에 올라탄 애들러의 뒷자리에 나란히 자리잡은 벨은 가죽자켓 안쪽으로 애들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티셔츠 너머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애들러는 손이 차다 어쩌다 하며 뭐라 궁시렁거리고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가장 가까운 시내까지도 오토바이로 20분은 달려야했다.

 

  "꽉 잡아라."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애들러는 냅다 급발진했다. 벨은 확 뒤로 쏠리는 몸을 끌어당겨 애들러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들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뒤를 따랐지만, 입밖으로 굳이 내진 않았다.

 

*

 

  쪽지에 따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애들러는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두침침한 조명의 식당 안에는 좁은 주방 안에서 큰 소리로 명령을 주고받는 종업원들의 목소리와, 촘촘히 들어앉은 테이블에 두세 명씩 자리한 몇 무리의 손님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했다. 푸른 드래곤. 아시아 식당들은 어째서 그렇게 이름들이 다 거창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벨은 습관처럼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곁눈질 했다. 이 식당이 팀의 단골인 이유는 손님 대부분이 아시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안, 혹은 동유럽계 이민자들. 문득 강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생강 냄새에 벨은 코를 찡그렸다. 한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어디선가 먹었었는데...

 

  "아직이냐?"

 

  문을 열고 들어선 애들러가 문가 테이블에 자리잡은 벨의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를 툭툭 터는 손길에 테이블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벨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긋이 눌렀다.

 

  "뭐야, 괜찮아?"

  "어, 아무 것도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그나저나 애들러, 거기 이름이 뭐였지?"

  "응?"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눈앞에 빛이 명멸했다. 삐-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흡 하는 심호흡과 함께 벨은 다시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 파리 안전가옥 건물 건너편에 있던 중식당 말이야.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팔았는데..."

  "아아, 거기, 그래, 그거 맛있었는데 말이야."

  "특이하게, 무슨 꽃 이름이었어, 목...목..."

 

  다시 두통이 확 밀려들어 눈앞이 하얘졌다. 애들러는 눈을 질끈 감은 벨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시야가 확 또렷해졌다. 이명도 사라지고, 두통도 잦아들었다.

 

  "목련, 맞아?"

  "어, 그런 이름이었지. 맞아."

 

  애들러는 잠시 말없이 벨을 바라봤다. 그의 선글라스는 눈 부위가 유달리 까매 마주 보고 있어도 좀처럼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벨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음식이 나왔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배고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벨은 금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걸쳐둔 자켓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고, 청소당번을 정할 겸 벌인 주사위놀이 판에서 이번에는 불운을 피해 간 벨은 꼴지가 돼버린 라자르에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준 뒤, 회의 테이블에 걸터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애들러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쉬나? 다음 작전은 일주일 뒤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느슨하지. 그보다 너...목련이랬나?"

 

  벨은 애들러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련? 꽃 말야? 그게 뭐?"

 

  생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양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의 표정에 애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들러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손에 쥔 담뱃대에서 길게 탄 끄트머리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아니, 됐다. 너야말로 가서 쉬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 하고 한숨을 흘린 벨은 고개를 내젓고는 돌아섰다. 그가 이상하게 구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었다. 의자에 둘러 앉아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던 벨이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애들러는 늘 잠가두곤 하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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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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