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etc. 2020. 11. 8. 18:20

2004.12 ~ 2019.08.25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에 딸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집엔 가하와 보리, 두 마리 고양이가 있었다. 가하는 손바닥 만할 때부터 키운 내 첫 고양이였고, 보리는 아는 분이 임보 중이던 걸 내가 첫 눈에 반해 데려온 경우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사료비며 병원비며 모두 부모님께 의지해야 했던 지라 두 마리로도 충분히 부담된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더 고양이를 늘릴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딸기는 우리 큰이모 댁 아랫집 이웃 아주머니의 아들이 파양한 고양이였다. 그 시절에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고양이에 대해 알고 키우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 아들은 아마 예쁘다는 이유로 터키쉬 앙고라 품종의 아기 고양이를 들였다가, 생각보다 통제가 되지 않는 아깽이의 난장판에 키우기 힘들다고 여긴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화장실을 잘 가린다는데 소변도 아무데나 보고 감당할 수가 없다며 파양하고 싶어했고, 아는 사람 중에 고양이 키우는 사람 있냐는 말에 서너 다리를 건너 나한테 넘어왔다. 사촌언니 네 집에 잠시 맡아두려고 데려다놓은 딸기를 보러 엄마랑 이모랑 같이 찾아간 게 우리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이미 엄마한테 무슨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들이냐며, 품종묘니까 키울 사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거절하는 게 낫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의외로 딸기한테 한 눈에 반한 건 우리 엄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딸기는 정말 귀여웠으니까. 3개월 반 가량 된 아기 고양이가 얼마나 예쁜지는 말 안해도 당연할 테고, 그 와중에 유달리 천진난만하고 생각 없이 구는 모습에 엄마가 홀딱 넘어가 버렸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먹는 엄마 무릎 위로 거침없이 올라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 순간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딸기는 귀가 안 들리는, 하얀 털의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들의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첫 날부터 그걸 알았다.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파란 눈의 흰털 고양이는 그렇다더라, 하는 내용을 알고 있었고, 방울 달린 장난감을 흔드는데 시야에서 사라지면 못 찾는 모습에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모네 아랫집 아주머니 아들 놈은 그런 사실도 몰랐던 것 같다. 진짜 뭣도 모르는 새끼가 고양이는 키운다고 나대가지고는, 싶지만. 짠함+귀여움+예쁨 등등의 이유로 딸기는 그렇게 우리집 셋째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딸기는 좀 특이하긴 했다. 단순히 귀가 안 들려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지, 지능이 실제로 좀 떨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고양이들이 안 하는 행동을 많이 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벌였다. 누구에게나 착착 안겨서 가족들은 붙임성이 좋다고 마냥 예뻐했으나, 나는 사실 딸기가 사람을 구분하긴 하는 건지 항상 의문이었다. 오히려 나밖에 모르는 붙박이 가하나 유순한 듯 보여도 성격 확실한 보리 쪽에 더 정이 갔지 아무래도 딸기는 '내' 고양이 같지가 않다는 생각에 정이 잘 안 들었다.

  하지만 딸기는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고양이였다. 같이 살면서 그 누가 딸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가 앉고 싶으면 대뜸 무릎이건 가슴 위건 타고 올라 냅다 드러누워 고르릉거리는 고양이를. 맛있는 걸 내밀면 허둥지둥 달려와 손가락 째 깨물고 보는 고양이를. 들리지도 않는 주제에 목청은 좋아서 도무지 고양이 같지 않은 뫠애애앵 하는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고양이를.

  딸기는 손님들한테도 가장 사랑받았다. 낯을 안 가리는 유일한 고양이었으니까 (다시금 말하지만, 사람을 구분하기는 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장난감에도 제일 열정적이어서, 레이저 포인터로 놀아주면 벽을 따라 펄쩍펄쩍 뛰다가 지쳐서는 개처럼 입을 벌리고 헥헥거리기도 했다.

  딸기의 기행은 꼽자면 끝이 없지만, 유달리 다른 고양이들이 안 가는 곳에 잘 올라가는 편이었다. 커다란 냉장고 꼭대기에서 자다가 내가 집에 오면 뫠애애앵 하고는 그 높은데서 바닥으로 한번에 쿵 하고 뛰어내리기도 했고, 베란다 천장에 매달린 빨래건조대를 무슨 수로 올라가서는 그 위에서 잘 때도 많았다. 가장 아찔했던 기억은, 당시 11층 복도형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집들이로 친척들이 잔뜩 다녀간 후 딸기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서, 귀도 안 들리는 애를 어떻게 찾나 하며 사색이 되어 오밤 중에 딸기를 찾으러 뛰쳐나갔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어서 아파트 화단 구석구석을 뒤지던 도중, 어디 멀리 높은 곳에서 딸기 특유의 뫠애애앵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보니 딸기가 담배 피운다고 방충망까지 열어둔 베란다 난간을 타고, 옆집 베란다 난간 사이로 넘어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11층 베란다를! 난간을 따라 넘어갔다고!! 옆집 사람들이 집에 돌아와 불을 켜자 놀라서 야옹거리는 바람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었다. 대체 거길 왜 넘어갔을까 정말...

  가족들이 예뻐하는 편이다보니 대학생 때 자취할 때에는 가하랑 보리만 데려오고 딸기는 류하랑 같이 집에 두고 왔었다. 류하는 묘하게 딸기를 예뻐해서, 지나가는 딸기를 붙잡아다가 그루밍도 해주고, 딸기가 퍼스널 스페이스를 무시하고 옆에 딱 달라붙어도 짜증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잠시 류하만 데려와 살면서 딸기 혼자 집에 남은 기간이 지나고서는 둘 사이도 다시 좀 서먹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자취하는 동안 고양이들을 전부 다 챙기지 못한 게 참 미안하다. 류하랑 딸기는 엄마랑 지냈는데, 우리 엄마는 고양이들을 예뻐는 해도 돌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화장실도 항상 더러운 편이었고, 장모종이지만 딸기 털은 항상 좀 뭉쳐있었다.

  옛날 기억은 사진으로 볼 때 말고는 사실 많이 떠오르는 건 없다. 항상 새로운 기억이 옛날 기억을 덮어쓰다보니 당장 딸기를 떠올리면 최근 일 위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내가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집을 얻어 나오면서 요씨랑 같이 네 마리와 함께 살고, 류하가 떠나고, 남은 세 마리를 들고 비행기를 타고 넘어오고...그 사이 딸기는 여전히 해맑고 망충한 우리집 막내였지만, 중간에 원인불명의 신경증상으로 MRI도 찍고, 이후로 조금씩 끝없이 뱅뱅 도는 서클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크게 병치레 하는 일 없이, 이 정도면 무탈하게 잘 지내온 것 같다.

  네덜란드에 와서 다시 신경증상을 보이고 어지러움으로 구토를 계속 하는 바람에 스테로이드를 먹이기 시작했다. 추가로 뇌 검사를 한다 해봤자 크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서 증상 억제용으로 1년 반정도 먹였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예전만큼 장난감에 반응하는 일도 줄었고 잠이 늘었지만, 그래도 다른 두 마리에 비해선 제일 활발했다. 뱅뱅 돌기는 해도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녔고, 여전히 이상한 곳을 찾아 서랍 뒤, 창틀 난간 등 좋아하는 자리를 바꿔가며 잠을 잤다. 뱅뱅 도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화장실에 들어가 출구를 못찾고 뫠애앵 거리는 걸 종종 구하러 가야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배도 너무 빵빵해지고, 다시 구토를 시작하는 바람에 약을 다른 종류로 바꾼지 한 달 정도만에, 딸기는 밥을 안 먹기 시작했다. 안락사를 택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초음파 상으로 관찰 된 림프종으로 의심되는 덩어리 때문이었다. 고양이 림프종은 악성 종양 중에서도 유달리 답이 없는 종류고, 이미 비장에도 전이된 것 같아 보인다는 말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먹인 스테로이드 덕에 종양 성장이 좀 더뎠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았을까. 고르릉거리며 자는 와중에도 종종 꼬리를 퍼덕이던 게 사실 만성 통증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원래 이별하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나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을까. 이제는 아프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 더 일찍 덜 아프게 해줄 수 있던 게 아닐까.

  슬픔은 생각보다 한 번에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다. 파도처럼, 물결치며 밀려들었다가 멀어져간다. 보내고 온 다음 날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쉬며 평소처럼 할 일을 하다가 울고, 다시 대청소를 마치고, 다시 울고, 웹툰을 보면서 조금 웃다가 또 울고. 엉엉 소리내어 우는 언니를 보고 놀라 달려오는 가하 때문에 다시 좀 웃고. 그리고 다시 출근해서는 평소처럼 일하다가, 어쩐지 허기지고 텅 빈 느낌에 초콜릿 따위를 계속 주워먹었다.

  집은 넓고, 내 시야에 꼭 세 마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법은 없었는데도, 집에서 가하랑 보리를 보고 있으면 매 순간 매 초 딸기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 텅 빈 소파를 보며 저 방 너머 침대에라도 있어야 할 딸기를 떠올린다. 혹은 서랍 뒤일 수도, 변기뚜껑 위일 수도.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어딜 봐도 뼈아프게 와닿는다. 이 느낌은 슬픔보다는 부당함에 가깝다. 어떻게 우리 집에 고양이가 둘 밖에 없을 수가 있지? 왜 둘이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뭔가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 이상한 평행 세계에라도 떨어진 느낌. 이게 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려면 아직은 흘릴 눈물이 더 남은 것 같다.

  첫 만남부터 이별은 예정돼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반려동물이 자신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진 않는다. 이미 반평생을 함께 해 왔으니 '더 오래'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것도 안다. 항상 바람은 그 뿐이었다. 아프지 않게 있다가, 혹시 아프면 빨리 아프지 않게 보내줄 수 있기를.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이별은 바람직했다.  중요한 건 사랑한 기억 뿐이다. 딸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고양이였는지,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감정을 안고 가야한다. 딸기는 이제 없으니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고양이라 나 말고도 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영혼도, 저 너머나 무지개다리 건너 같은 것도 믿지 않아서, 이제는 그저 없을 뿐인 딸기가, 있는 동안에는 행복했으리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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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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