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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는 밤

etc. 2023. 11. 21. 00:38

발더스 게이트 - 다크 어지 x 카를라크 로맨스

티플링 다크 어지 배경, 캐릭터 고유 이름 있음

다크 어지 3막 스토리 스포일러 포함

 

*

 

  야영지는 고요했다. 동료들 모두 개인 천막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분위기에 영향 받았는지 덩달아 스크래치도 동그랗게 몸을 만 아울베어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이해할 만했다. 오린을 죽이고 마침내 네더스톤 3개를 모았다는 흥분도 잠시,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엘더 브레인을 마주하는 것 뿐. 느슨해졌을 속박을 생각하면 머뭇거리거나 추스를 틈도 없었다. 결전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밤, 그게 오늘이었다.

 

  활줄을 갈고, 류트 조율을 마치고, 화살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큰 전투를 앞두고 늘 하던 일상적인 행동에도 묘하게 긴장이 스며 있었다. 부족한 물약을 채워넣고 마지막으로 가방끈을 단단하게 동여맨 뒤, 라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 말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은 따로 있는데. 라샤는 자신이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을 혼자 먹겠다는 핑계로 개인천막으로 빠져 나가면서도 등 뒤가 따갑게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카를라크와 이야기 해야하는데. 미루거나 외면할 시간조차 사치라는 걸 아는데도, 라샤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신병, 안에 있어?"

 

  아, 언제나 한 발 앞서 나가는 그의 연인이란. 망설이며 낭비하기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라샤는 천막 입구를 살짝 들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연인의 주홍빛 눈을 마주했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카를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좀 걷자. 오늘 별이 잘 보이네."

 

  그들이 정한 야영지는 도시 북쪽의 숲 속에 있었다. 너른 공터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동료들의 천막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불빛이 여전히 새어 나왔다. 다들 쉽게 잠들 수 없을 터였다. 라샤와 카를라크는 사람들의 발길로 빚어진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어슴프레한 별빛만으로는 어둠을 밝히기 부족했지만 티플링 두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따금 정적을 깨는 풀벌레 소리 외엔 적막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있잖아,"

  "저기,"

 

  야영지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걷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주고 받았다. 카를라크가 먼저 살풋 웃으며 라샤에게 우선권을 양보했다.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몇 번 입을 달싹이던 라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네가 내 곁을 지키던 밤에 있잖아."

  뚜렷하게 지칭하지 않음에도 카를라크는 즉시 라샤가 말하는 '그날 밤'이 언제인지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인데도 어쩐지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날의 일. 터져나오는 어두운 충동을 이겨내려 사투하던 라샤를 묶어두고 지켜보던 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욕과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끝없이 사랑한다 속삭이고, 몸부림치는 그를 품에 안고 다독이던 밤. 카를라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밤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처럼 피해지는 주제였다. 카를라크가 이 자리에서 듣게 될 거라 생각한 주제는 아니기도 했고.

  "나는... 그때 이미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 혹시라도 나를 갉아먹는 어둠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더 이상 네가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카를라크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 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의 시선은 걷고 있는 자신의 발끝에 머물러 있었다. 라샤 역시 카를라크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잠시 반응을 기다리던 라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물었었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거냐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죽음을 택할 만큼."

  이 또한 그들이 외면하던 묵은 주제 중 하나였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사랑만큼 불안과 두려움이 차오를 때면 라샤는 카를라크에게 아베르누스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물었고, 아무리도 달콤한 사랑의 말과 기약 없는 미래의 약속을 주고 받는 와중에도 카를라크는 한결같이 단호하게 거절로 일축했다. 일시적인 거라고, 아베르누스에 가서 심장을 고칠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몇 번이고 되물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묻는 라샤의 절박함을 아는지라 카를라크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 단단함에 지쳐 화내는 건 도리어 라샤 쪽이었다. 감정이 격해져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거냐며,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냐고 비수 같은 말을 쏟아낸 일도 있었다. 감언이설도, 폭언도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을 쯤에야, 라샤는 더 이상 그 일을 화제에 올리지 않게 됐다. 어차피 그들은 당장 내일에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삶을 사는 모험가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달콤한 약속은 시한폭탄 같은 심장이 없는 이들에게도 사치인 세상인 것을. 그런 라샤가 지금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는 이유는 카를라크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카를라크는 라샤가 죽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온몸을 짓누르는 살인의 군주의 존재감과 영혼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카를라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레이어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의 연인이 자신의 창조주를 마주하고, 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절대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피웅덩이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 어떻게 그의 심장이 그 순간에 재가 되지 않았는지는 카를라크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위더스가 나타나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독백을 하며 라샤에게 다가갈 때까지도 카를라크는 눈앞의 상황을 머릿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바알의 아이가 죽었다. 살인의 군주의 선택 받은 자가 되길 거부하며, 내면의 어두운 충동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그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인가. 그야말로 영웅의 귀감 같은, 그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이성의 목소리가 늘어놓는 말 같지도 않은 찬양은 현실도피를 위한 일말의 발악이었다. 그의 실제 내면은 그저 끝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 왜 네가. 어떻게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리고 라샤가 다시 눈을 떴다.

 

  위더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카를라크의 눈에 들어오는 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카를라크를 바라보는 라샤와, 그를 발견하자 빛을 되찾는 파란 눈동자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데, 카를라크는 그제야 자신의 심장이 다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계로 된 심장이니 정말 잠시 멈췄었는지도, 그대로 두었다면 과열로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해냈어. 자유를 찾은 거야. 네가 미친 듯이 자랑스러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품에 그대로 끌어안고 정말 그가 괜찮은지, 온전히 살아난 게 맞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라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전투의 여운을 음미하며 야영지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 할 때까지, 카를라크는 라샤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무지 평소 같은 마음으로 라샤를 대할 자신이 없었기에. 라샤 역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빠 그런 카를라크를 굳이 찾지 않았고.

  그들이 걷던 숲길은 작은 호숫가를 마주하고 커다란 그루터기가 놓인 공터로 이어졌다. 근처 사는 연인들의 밀회장소로 쓰일 법한 곳이었다. 카를라크는 사람들이 앉은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진 그루터기를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작은 그루터기가 빠듯하게 채워졌다.

 

  "...미안해."

 

  발끝만 바라보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라샤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사과였다. 카를라크는 그제야 연인의 얼굴을 돌아봤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물든 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보였다. 카를라크는 허둥거리며 벌떡 일어나 라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사랑, 왜 사과하는 거야?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아니, 아니야. 카를라크, 나는... 몰랐어. 그게 어떤 일인지. 어떤 마음으로 네가 그런 말을 했던 건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던 때에도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구름낀 듯한 기억 속을 되짚으며 내가 행했던 끔찍한 일들이 덩굴처럼 수렁으로 나를 끌어들일 때에도, 나는 살고 싶었어. 내가 누구였는지 모른다면, 내가 앞으로 행하는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주는 거라 자위하며, 모든 걸 덮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카를라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카를라크는 라샤의 우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독백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내 길을 밝혀줬어. 너는 빛나는 사람이야, 카를라크. 네 심장을 불태우는 파란 불빛 때문이 아니야. 너는 정말로, 태양 같은 사람이야.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모두에게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네 자신을 불태우는. 그래서, 나도 네가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내가 과거에 어떤 끔찍한 사람이었을지라도 그 빛으로 나를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아, 하지만 얼마나 순진한 기만이었던가. 그가 그저 '끔찍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그저 잘못된 길을 들어 악행을 저지르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평범한 악당이었다면, 과거를 후회하고 속죄를 추구하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인의 군주가 직접 빚은 그의 피조물은. 의심 없이 자신의 선택 받은 소명을 믿고 따르던 그의 과거는. 태어난 순간부터 부정한 그의 존재는.

 

  그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탓에, 라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알에게 복속돼버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네가 아는 라샤가 아니겠지. 네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지킬 수도 없을 거고. 모르겠어, 너라면 그런 나라도 살아서 함께 있어주길 바랐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만큼, 그렇게는 할 수 없었어."

 

  카를라크가 어떻게 그 마음을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단어 뒤에 올 수 있는 수많은 말들. 비장하게 장애물을 극복하겠다는 결심이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체념이든. 라샤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생의 의지를 넘어서서 스스로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상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엔 익숙한 카를라크였지만, 라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서 문득 치미는 열망이 느껴졌다. 그 순간, 라샤가 쓰러지는 그 순간에는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날 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때, 라샤가 본인의 선택을 앞두고 카를라크에게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살인의 군주의 도구가 되어 세상을 살육의 바다로 만드는 삶을 살지, 고귀한 영웅으로서 죽을지, 연인인 그에게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라샤, 내 사랑."

 

  어느 새 카를라크의 얼굴도 라샤와 똑같이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타오르는 심장만큼 뜨거운 두 손이 눈물에 젖은 연인의 뺨을 감싸안았다.

 

  "그 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네가 정말로 자랑스러워. 그 누구도 그 순간에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쉽게 내리진 못했을 거야. 혹여 네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해도, 그 누구도 널 탓하거나 재단할 수 없었을 거야. 아마 나는 네 선택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카를라크의 이마가 라샤와 맞닿았다. 말하는 숨결과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라샤에게 전해졌다.

 

  "네가 살기를 바랐을 거야. 내가 그 자리에서 널 말릴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살인의 군주에게 내 심장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냈을 거야. 네가 이렇게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감사하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 거야. 분명히. 널 내 눈앞에서 잃는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어. 아베르누스의, 아홉 지옥의 겁화를 끌어다 영혼 위로 쏟아 붓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다 잘 풀렸으니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라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알고, 그 결과가 어떨 수 있었는지 아는 이상.

 

  "그런데 내가... 네게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하려는 거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너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깊어갈수록, 사랑이 짙어질수록 괴로움도 커져갔으니까. 차라리 순간적인 육욕이나 외로움을 채우려는 절실함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주제에 어째서 다른 사람까지 마음에 담고 말았을까. 오래 전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 평범한 삶을 꿈꾸게 돼버린 걸까.

 

  "카를라크, 그건..."

 

  또 다시 지지부진한 언쟁으로 이어질까, 지레 물러서려는 라샤를 카를라크가 제지했다.

 

  "미안, 자기야.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자리에서 널 위해 내 결정을 번복하겠다고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감정에 휩쓸려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은 해보려고. 우리에겐 아직 남은 과제가 있고, 늘 그랬듯 어쩌면 엘더브레인과 맞서 싸우는 중에 우리 중 누가 어떻게 될 수도 있고, 그 전에 내 심장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마음 대로 끝을 내버릴 수도 있는 거지만. 우리는 늘 현재에 충실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래."

 

  라샤의 눈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 몰아쳤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감정에 호소해 카를라크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파고들어 억지로라도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가능할 테지. 하지만 라샤는 카를라크를 알았다. 여린만큼 고집있는 그의 연인이 이 정도로 말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고마워, 카를라크. 그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너는 모를 거야."

 

  라샤는 무릎 꿇은 카를라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와락 품으로 끌어안아 잘게 떨리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키 차이 때문에 자주 볼 일 없는 카를라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라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뤄놨던 피로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에겐 아직 구해야 할 세계가 있잖아. 제대로 쉬어놔야지."

  "...응."

 

  코를 훌쩍이며 일어선 카를라크가 라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철부지 어린 연인들처럼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돌아가는 숲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 했다. 내일의 결전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늘 한 고비 넘길 때마다 삶에 감사하는 영웅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연인의 존재를 등불 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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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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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반추

etc. 2021. 2. 21. 05:32

  "...사적인 감정은 없어."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머릿 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허리춤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의 간격이 결과를 갈라놓았다.

 

  탕-

 

  총성은 거의 하나였지만, 총알의 궤적은 달랐다. 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타는 것 같은 감각에 뒤로 나동그라져 몸을 웅크린 채로, 벨은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애들러를 올려다 봤다. 그의 총알은 애들러의 왼쪽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왼쪽 얼굴 위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실금 하나를 만들어 그 위로 피가 주륵 타고 흘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벨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더듬더듬 흙바닥을 짚으며 뒤로 향하던 그의 등이 나무등치에 닿았다. 허나, 그가 예상한 다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들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버겁게 내쉬는 숨 사이로 탄식 같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총알이 빗맞은 거라면 아마도 왼쪽 어깨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총알은 정확히 노린 것마냥, 벨의 오른 어깨를 맞췄다.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오른팔의 감각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애들러가 빗맞췄을 가능성은 없었다.

 

  "너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그 정도는 알겠지."

 

  마치 지령을 내릴 때와 비슷한, 딱딱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나 정말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벨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그 말을 듣고 있지도 않으리라. 그는 왜-.

 

  "최대한 조용히 숨어 살아. 그 이상은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출혈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벨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할 것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수고했다, 벨."

 

  그 말을 끝으로, 벨은 의식을 잃었다.

 

*

 

  러셀 애들러. CIA 특수활동부의 정예 비밀요원. '페르세우스'를 위시한 러시아의 대규모 핵공격을 막아낸 구국의, 세계의 영웅. 그가 해낸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위기를 막아낸 건지 모르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일의 일부였기에, 그는 딱히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임무와, 국가에 닥칠 위협을 차단하는 일, 그 뿐이었다.

 

  솔로베츠키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와 꼬박 일주일에 걸쳐서 결과 보고와 잡다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애들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실상 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장소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현관키를 가방 밑바닥에서 끄집어내 열쇠구멍에 꽂아 넣으면서 그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어두컴컴한 거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주머니의 담배갑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천장으로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제서야 나른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이대로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씻고 끼니를 챙기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달리 없었다.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이,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잔상처럼 남은 이미지가 맴돌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던 바다 냄새. 신음 섞인 한숨 소리. 영영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을 것 같던 무기질의 눈동자에 맺혀있던-.

 

  "...멍청하긴."

 

*

 

  애들러가 변화를 눈치챈 것은 두 달 가량 정도 지나서였다. 집을 자주 비운다고는 하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침입을 눈치챌 수 있는 장치를 몇 가지 마련해 두었다. 그의 방문자는 보란듯이 그 모든 장치에 다녀간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집안을 살폈을 때 무언가 사라지거나 헤집은 흔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 설치된 도청장치나 카메라 등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지만 그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다. 애들러는 만약을 대비해 요원 몇몇에게 집을 감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일주일 간 아무 흔적도 없어 그마저도 해제해야 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방문자는 귀신 같이 애들러가 없는 날만을 찾아서 다녀갔다.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이란 창문에 다 이중잠금장치를 설치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일주일에 세네 번일 때도 있었다. 애들러가 집을 오래 비우는 때를 아는 건지, 심지어는 그가 없는 사이 먹고 잔 흔적마저 미세하게 남아있기도 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암살이라면 그렇게 숨어들 실력으로 이미 시도를 했을 것이고, 그가 가진 자료나 정보가 목적이었다면 무언가 훔치려는 시도가 있었을 법 했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것은, 애들러가 점차 그 상황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름없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마치 아는 것만 같았다. 딱히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방문자를 잡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마치 생활패턴이 다른 동거인을 둔 것 마냥, 그는 방문자와의 이상한 공생 관계에 적응해갔다.

 

  그래서 어느 밤,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때 거실에 앉아있는 그를 마주했을 때에도, 애들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애들러."

  "안녕, 벨."

 

  반 년만이었다. 애들러는 가장 먼저 가죽 자켓에 청바지를 차려입은 벨의 차림새에서 무기가 숨겨져 있을 만한 위치를 가늠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여위어 보였다. 머리는 그 사이 길어져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신 듯, 테이블 위에는 빈 캔이 두엇 놓여있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겠군. 눈 깜빡할 사이 빠르게 분석을 마친 애들러는 습관대로 현관에 열쇠를 걸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벨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지 그래? 맥주 갖다줄까?"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군."

 

  애들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고, 벨은 말한대로 맥주를 꺼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애들러는 어째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긴장은 별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듯한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맥주를 가져온 벨이 캔을 따서 내밀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받아서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벨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으면 더 일찍 했겠지. 와서 잠도 자고 간 것 같던데, 월세도 좀 같이 내지 그래?"

  "아, 다음 주에 주급 받으면 생각해 볼게."

 

  주급이라니,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길이 없는 실없는 이야기였다. 애들러는 머릿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을 골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든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라든가, 혹은...

 

  "당신을 죽이러 온 거 맞아."

 

  그의 생각을 끊고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러는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맥주에 독이라도 넣었나, 아니면 이제라도 총을 뽑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경각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켰다. 벨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냥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에 든 맥주캔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사실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눈치챘었나 모르겠네. 아무튼, 기왕 끝내는 거 얼굴이나 한번 더 볼까 해서 기다렸어. 그랬는데..."

 

  벨은 말을 잇지 않고 그제야 애들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항상 벨의 눈빛이 파충류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 때도 좀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는 차가운 무기질의 눈. 나고 자란 조국의 영향인지, 세뇌 과정에서 무언가 망가진 탓인지, 애들러는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벨의 눈빛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인간다워졌다고 해야할까.

 

  "관둘래. 어차피 당신은 신경 안 쓸 것 같으니까. 내가 죽이려 들든, 말든."

  "...아니, 죽이려 들면 신경 쓰겠지, 나도."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답하고 나자, 이 모든 대화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주한 벨 역시 비슷한 표정인 걸 발견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벨마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별 뜻도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주보고 한참 웃어댔다. 그리고 벨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총으로 손이 향한 애들러는, 후련한 표정의 벨을 보고 다시 자세를 풀었다.

 

  "...갈게.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

 

  벨이 현관으로 향하고, 문을 열고 반쯤 나설 때까지도, 애들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벨이 문을 닫기 직전, 그제서야 애들러는 그가 해야할 마지막 인사를 던질 수 있었다.

 

  "잘가라, 벨."

 

  벨은 말없이 문을 닫았고, 애들러는 그제서야, 정말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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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일상

etc. 2021. 2. 21. 05:10

  CIA라고 하면 으레들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두침침하고 은밀한 느낌의 비밀 본부. 온갖 암호화된 서류와 컴퓨터로 차있는 사무실. 시종일관 진지한 인상으로 작전 회의에 집중한 요원들. 실제는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24/7로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이기에 때가 되면 끼니도 챙겨 먹고 한숨 돌리면서 쉴 시간이 필요했다.

 

  "또 나야?"

 

  제비뽑기를 뽑아 든 벨이 끙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공평하게 숫자대로 종이를 넣고 뽑는 건데도, 유달리 벨은 식사 배달 당번으로 자주 뽑혔다. '나 모르게 뭔가 표시라도 해두는 거야, 다들?' 하고 물어도 실없는 소리 말라며 재빠르게 자기 몫의 뽑기를 집어들고 멀어지는 팀원들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을 텐데, 길게 물고 늘어져 봐야 이런 걸 알아채는 것 또한 스파이의 자질이라며 비웃을 우즈를 생각하며 벨은 얌전히 자기 역할을 따르기로 했다. 그 날의 메뉴는 중식이었다. 사실 굳이 '그날의'라고 꼽을 것도 없이, 그들의 메뉴는 주로 터키식 도너, 중식당, 얄팍한 이탈리아 피자 사이에서 로테이션을 도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그마저도 사치일만큼 바빠서 마른 빵쪼가리에 육포나 햄 따위를 씹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모두가 고른 메뉴가 적힌 쪽지를 들고 밖으로 나서기 위해 자켓을 챙겨입는데 따라 와서 자신의 가죽 자켓을 주워 입는 애들러가 눈에 들어왔다.

 

  "같이 가게?"

  "담배 떨어졌다."

  "그럼 나가는 김에 당신이 가져오든가."

  "까불지 마라, 꼬마야."

 

  담배까지 사오라며 심부름 목록에 더 얹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지만, 웬일인지 애들러는 군말없이 문을 나섰다.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벨은 오토바이 열쇠를 애들러에게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애들러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였다.

 

  "빗길 운전인데 더 잘하시는 분이 해야죠."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오토바이에 올라탄 애들러의 뒷자리에 나란히 자리잡은 벨은 가죽자켓 안쪽으로 애들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티셔츠 너머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애들러는 손이 차다 어쩌다 하며 뭐라 궁시렁거리고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가장 가까운 시내까지도 오토바이로 20분은 달려야했다.

 

  "꽉 잡아라."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애들러는 냅다 급발진했다. 벨은 확 뒤로 쏠리는 몸을 끌어당겨 애들러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들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뒤를 따랐지만, 입밖으로 굳이 내진 않았다.

 

*

 

  쪽지에 따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애들러는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두침침한 조명의 식당 안에는 좁은 주방 안에서 큰 소리로 명령을 주고받는 종업원들의 목소리와, 촘촘히 들어앉은 테이블에 두세 명씩 자리한 몇 무리의 손님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했다. 푸른 드래곤. 아시아 식당들은 어째서 그렇게 이름들이 다 거창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벨은 습관처럼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곁눈질 했다. 이 식당이 팀의 단골인 이유는 손님 대부분이 아시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안, 혹은 동유럽계 이민자들. 문득 강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생강 냄새에 벨은 코를 찡그렸다. 한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어디선가 먹었었는데...

 

  "아직이냐?"

 

  문을 열고 들어선 애들러가 문가 테이블에 자리잡은 벨의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를 툭툭 터는 손길에 테이블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벨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긋이 눌렀다.

 

  "뭐야, 괜찮아?"

  "어, 아무 것도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그나저나 애들러, 거기 이름이 뭐였지?"

  "응?"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눈앞에 빛이 명멸했다. 삐-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흡 하는 심호흡과 함께 벨은 다시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 파리 안전가옥 건물 건너편에 있던 중식당 말이야.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팔았는데..."

  "아아, 거기, 그래, 그거 맛있었는데 말이야."

  "특이하게, 무슨 꽃 이름이었어, 목...목..."

 

  다시 두통이 확 밀려들어 눈앞이 하얘졌다. 애들러는 눈을 질끈 감은 벨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시야가 확 또렷해졌다. 이명도 사라지고, 두통도 잦아들었다.

 

  "목련, 맞아?"

  "어, 그런 이름이었지. 맞아."

 

  애들러는 잠시 말없이 벨을 바라봤다. 그의 선글라스는 눈 부위가 유달리 까매 마주 보고 있어도 좀처럼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벨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음식이 나왔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배고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벨은 금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걸쳐둔 자켓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고, 청소당번을 정할 겸 벌인 주사위놀이 판에서 이번에는 불운을 피해 간 벨은 꼴지가 돼버린 라자르에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준 뒤, 회의 테이블에 걸터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애들러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쉬나? 다음 작전은 일주일 뒤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느슨하지. 그보다 너...목련이랬나?"

 

  벨은 애들러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련? 꽃 말야? 그게 뭐?"

 

  생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양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의 표정에 애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들러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손에 쥔 담뱃대에서 길게 탄 끄트머리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아니, 됐다. 너야말로 가서 쉬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 하고 한숨을 흘린 벨은 고개를 내젓고는 돌아섰다. 그가 이상하게 구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었다. 의자에 둘러 앉아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던 벨이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애들러는 늘 잠가두곤 하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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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하

etc. 2020. 11. 8. 18:58

2003.08.02 ~ 2020.11.06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내가 네 마리 고양이를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가하에 대한 글을 쓰는 날이. 시간은 기억을 너무나 무색하게 흩어놓기 때문에 아직 생생할 때 조금이라도 기록해둬야 한다.

  의외로 가장 덜 힘든 이별이었던 것 같다. 제일 마음의 준비가 된 채로 보내서일까.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원하던 때에(그나마) 이별할 수 있어서였을까. 최근 몇 달 새 체중이 야금야금 줄어 처음 네덜란드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3.3kg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2.1kg였다. 체중의 1/3이 줄어드는 그 변화는 행동에서도 드러나 점차 걷는 모습도 버거워 보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자면서 보내는 걸 보면서 이제는 정말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7년 전에 가하를 만났다. 그 때 나는 16살이었고, 모부가 별거에 들어가면서 여섯 식구 살던 집에서 엄마랑 나와 10평 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둘이 살기 시작했다. 모부가 이혼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할머니랑 같이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두 다 너무 충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던 사춘기였다. 엄마는 아마 그런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는 분 건너건너 새끼 고양이가 태어난 집이 있다는데, 고양이를 키워볼까, 하고 나한테 제안했다. 그렇게 그 집에 가서 네 마리 형제 중에 골랐던 게 가하였다. 삼색이 하나, 턱시도 둘, 그리고 올블랙 아깽이 가하. 턱시도 친구들도 귀여웠지만 한창 중2병 터지던 새끼 덕후는 올블랙 고양이가 뭔가 특별하게 여겨져 가하를 골랐었다. 이름도 지금 와서 밝히자면 당시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에 나오던 주인공의 반려 호랑이 이름에서 따왔다. 나중에는 쪽팔려서 사람들이 물어보면 그냥 별 뜻 없다고 대답했지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도 많이 없던 시기였고, 아무 것도 모르고 데려온 거나 다름 없었다. 생후 6주 경에 우리집에 온 가하는 정말로 내 손바닥 만했다. 지금이야 아깽이들 목덜미 잡고 번쩍번쩍 잘 들어 올리지만 그 때는 가하가 정말 너무 작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잘 안아들지도 못하고 어떻게 쓰다듬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도 혹시 깔아 뭉개기라도 할까봐 겁났다. 엄마는 새로 찾은 자유를 만끽하느라 집에 잘 없었다. 그 작은 아파트에서 나에겐 가하 뿐이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이후에 업둥이도 잠깐씩 들이고 보리, 딸기, 류하 이렇게 고양이가 자꾸 늘어나는 동안, 가하는 내내 가족들에게는 '항상 까칠한 고양이', 나한테는 '나한테만 덜 까칠한 고양이'로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하는 퍼스널 스페이스도 중요하고 외동 고양이로 사는 게 제일 좋았을 성격인데, 고양이에 대한 이해도 별로 없는 가족들에 다른 고양이들 셋이나 부대끼며 사느라 항상 좀 탐탁치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가하는 참 나를 좋아했다. 나는 언제나 가하가 무슨 기분인지 알았다. 정확히 왜 기분이 나쁜지는 몰라도 언제 물 건지, 언제 쓰다듬 받고 싶은지, 언제 이불 속에 들어오고 싶은지, 항상 알았다. 둘만 침대에서 잘 때면 슬그머니 가슴께로 올라와서 고르릉 거리면서 쭉쭉이, 꾹꾹이를 했다. 좀 더 나이 들고 나선 그나마도 안했지만.

  대학 때는 집에 잘 안 붙어 있어서, 떠올려 보면 미안할 따름이다. 그나마 자취하러 나가서는 가하랑 보리만 데리고 나가서 원룸에서 셋이 옹기종기 잘 지냈지만, 집에는 머리만 누이러 오는 언니가 야속했을 법도 한데. 항상 지나고 나서야 생각한다. 가하는 네덜란드 와서 참 행복했겠구나. 그전까지 집에 잘 붙어있지도 않고, 집에서도 맨날 게임하고 어쩌고 잘 놀아주지도 않는 동거인을 잘도 참아줬구나. 좀 더 많이 시간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을.

  결국 가장 최근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에, 네덜란드 와서 가하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 창틀에 놓인 바구니에서 햇살 가득 누리며 괭합성 하던 모습. 가뜩 까만 털이라 따끈따끈해진 옆구리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으면 풍기던 가하 냄새. 늙어서 발톱도 잘 못 감추는 탓에 트친 분이 '쌀알 발톱'이라 부르던 하얀 발톱이 사진마다 꼭 찍혀 있었는데.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눈을 감아서 항상 반쯤 눈감은 사진만 찍혔다. 다른 트친 분은 멜론빛 눈이라고 하셨는데. 천년 만년 무릎고양이라곤 안하던 애가 보리, 딸기가 떠나고 외동 고양이가 되고 나니 고르릉도 너무 잘하고, 무릎 고양이로 사는 모습이 정말 놀랄 노자였다. 이렇게 혼자 관심 독차지하는 걸 좋아하는 고양이였을 줄이야.

  신부전 고양이들을 병원에서 많이 봐서,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는 이미 상상하고 있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소변량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구토를 보이고, 활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끝. 중간중간 활력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이번인가? 하는 생각에 울고 불고 마음 졸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그 때마다 변비약 먹이고, 구토억제제 먹이고 하면서 어떻게든 유지가 돼왔다. 요씨는 약 먹이는 걸 전혀 엄두도 못내는 사람이라 내가 매 번 약을 먹였더니, 나를 미워하고 요씨랑만 친하게 지내서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영영 미워하지는 못하고 5분쯤 화냈다가 다시 풀린다는 점이 또 고마웠다.

  사람은 떠날 때를 안다고 하는데, 고양이도 그럴까. 마지막 3일 정도, 가하는 고르릉도 전혀 안하고, 식빵 자세로 꼬리만 계속 탕탕 치고 있었다. 속도 더부룩하고, 통증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 마음 졸이며 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내일이면 정말 안녕인걸까 하면서 자던 그 밤, 몇 번씩 일어나서 가하가 아직 숨을 쉬고 있나 확인했다. 그런데 새벽 중에, 요씨가 나를 깨워서는 자기 가슴팍에 올라와 앉은 가하를 가리켰다. 아주 작게 고르릉을 하고 있다고. 그 뒤 가하는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구리에서 잠들었다. 마치 아프기 전 같은 모습. 요씨는 '다시 괜찮아지는 걸까?'하고 물어봤지만, 나에게는 그게 마치 마지막 인사 같이 느껴졌다.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하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사랑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아이를 내 뜻대로 보내주는 게 정말로 옳은 선택일까, 하는 질문을, 많은 보호자들이 품는다. 애들은 대답을 못하니까, 그리고 아마 묻는다고 해도 죽고 싶다고 대답하는 아이는 없겠지. 아이가 원하는 것은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 텐데, 어떤 방법으로도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프지 않게'라도 해주는 것이 보호자의 선택인 것이다. 불공평한 선택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 불공평함에 대한 죄책감까지도 보호자 몫이기 때문에.

 

  삶의 절반을 넘게 함께 했는데,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다니. 너무 이상하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 내 사랑. 내 새끼. 천사 같은 내 고양이. 언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누구보다도 오래 언니 옆에 머물다 간 천재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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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etc. 2020. 11. 8. 18:21

2003. 06 ~ 2019. 09. 26

  보리가 세상을 떠난 지 2주가 지났다. 류하와 딸기에 대해서 썼던 것처럼 보리에 대해서도 더 늦기 전에, 내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빨리 뭐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 시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나는 아직도 보리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랄 것이다. 아이가 최대한 나와 함께 오래 있길 바라되, 아파서 고생하다 떠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보리와의 이별은 참 '이상적'이었다. 갑작스런 흉수 증상으로 짧게 아파하다가 떠난 류하나, 식욕부진과 통증으로 한동안 쳐져 있다가 간종양으로 보내줘야 했던 딸기에 비하면, 보리는 크게 앓거나 힘들어하지 않다가 떠났다. 혹은 그랬다고 생각한다. 확신할 수 없는 건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사실 휴가 중이 아니라 집에 있었어도 내가 어떤 신호를 알아차렸을지는 모르겠다.

  작년 1월 네덜란드에 처음 올 때까지만 해도 2.6kg 정도였던 몸무게가 최근 1년 사이 점점 줄어서 2kg, 1.8kg, 마지막엔 1.6kg까지 조금씩 줄어갔다. 장모종이라 티가 안날 법 한데도 쓰다듬으면 척추뼈가 그대로 손끝에 느껴질만큼 야위었고, 뒷다리 근육도 많이 위축돼 식탁 의자를 뛰어오르다가 떨어질 정도였다. 식욕도 활력도 그대로인데 그냥 그렇게 점점 약해져갔다. 그 외에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보다 훨씬 사람한테 치대고 꼭 붙어있으려 했던 정도? 아마 체온 유지가 힘들어서 추웠던 게 아닐까 싶다. 소파에 앉기만 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냉큼 무릎이며 옆구리에 꼭 붙어서 고르릉 거리며 잠을 잤다.

  그래서 인사할 틈이 없었다. 공항에 가기 전 이마에 뽀뽀하고 쓰다듬으며 '언니 금방 올게, 엄마아빠랑 친하게 지내면서 잘 있어' 하고 인사할 때에는 상상도 못했다. 나한테 훨씬 의존적인 가하를 걱정하면 걱정했지, 누구든 사람만 있으면 금세 고르릉거리고 안기는 보리에겐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 산책 가자고 조르고, 맛있는 거 달라고 조르면서 아버님이랑 친하게 지내겠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사진도 거의 매일 받았다. 매일 부모님이 번갈아 다녀가시며 무릎에 앉은 사진, 침대에서 자는 사진 같은 걸 보내오셨다. 예전에 잠시 그 댁에 묵을 때에도 정원 산책도 하고 거실에서 쉬기도 하며 친해졌던 터라, 두 분 다 보리를 참 예뻐하셨다. 그런 보리가 죽어있는 걸 발견한 아버님도 많이 놀라고 슬프셨겠지.

  그 날 나는 대만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와 맛있게 샤브샤브를 먹었고, 칵테일이나 한 잔 하자며 요씨랑 만나기로 한 술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요씨가 심각한 얼굴로 나한테 '보리가 돌아가셨어.'라고 말했다. Passed away의 한국어형을 그것 밖에 몰라서...지금 생각하면 역시 좀 웃긴데 단어를 듣는 순간에는, 즉각적으로 그 뜻이 머릿 속에 박혔는데도 이해가 안 돼서 '뭐?'하고 되물었고, 요씨는 다시 '보리가 돌아가셨어.'라고 말했다. 당장 눈물이 터져나와서 밖으로 뛰쳐 나가는 동안에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계속 '뭐? 무슨 소리야?' 하고 질문이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해와 의문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아, 갔구나. 하지만 왜?

  놀랍지만, 아주아주 놀랍지는 않은 일. 점점 야위고 자그마해져간 만 16살 고양이가 잠들듯이 세상을 떠난 일. 크게 앓거나 지병으로 고통에 시달리진 않았고, 그냥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작동을 멈춘 일. 사람으로 치면 다들 호상이라고 할 만한 그런 일.

  엉엉 울다가 요씨한테 집에 가자고, 빨리, 그냥 빨리 집에 가자고 했다. 예정된 비행기는 이틀 뒤 저녁이었지만, 어떻게든 빨리 가자고. 택시를 타고 짐을 맡아준 친구집으로 돌아가는 사이에는 눈물은 안 나고 그냥 묵묵히 인터넷을 뒤졌다. 암스테르담 행 가장 빠른 비행기. 같은 항공사인지, 이전 표는 취소가 가능한지, 당장 오늘 밤 비행기가 과연 체크인이 가능한지, 온갖 경우의 수를 찾으며 심지어 밤 중에 공항까지 갔지만 결국 그 밤에는 뜰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전화통을 붙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한 끝에야, 저녁에 출발해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하는 비행기표를 살 수 있었다.

  하루 차이. 그걸 위해 써야한 돈이 왕복 항공표보다 더 들긴 했다. 요씨는 나보다 이성적인 편이라 사실 일찍 돌아가기 위한 이 비용을 그리 내켜하진 않았다. 나도 이해는 간다. 일찍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다만 그렇게 대만에 하루 더 머문다는 게,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환승을 서너 번씩 해서 30시간이 걸려서 돌아가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있으면 있었지 낯선 땅에서 '휴가'를 보내며 시간이 가길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자해를 했다. 팔을 물어뜯고, 손톱으로 피부를 긁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뺨을 때렸다. 자해 습관은 중고등학생 때까지 있다가 없어졌는데,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아서 자꾸 다른 데로 고통을 분산시켜야 했다. 당장 보리 옆에 있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하루 일찍 집에 돌아와, 가하랑 인사를 하고, 보리 사체를 맡아두고 있는 병원에 전화해 오후에 가겠다고 약속을 잡은 뒤 잠깐 눈을 붙였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말고는 그 때까지도 그리 많이 울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보리를 볼 때까지만 참자'고 나를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병원에서 일했으니까 사체를 맡긴다는 게, 결국 부패가 진행되지 않도록 얼려둔다는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사후세계나 영혼도 믿지 않으니까, 내가 병원에 가서 보게 될 것은 보리가 아닌, 이제 없는 보리의 반쯤 얼어있는 시체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차갑고 작은 털뭉치. 아마 안 보고 그대로 태워달라고 했었어도 됐을 일을. 그래도 맡아달라고 한 건, 그래도 보러 간 건, 그렇게 보지 않으면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보리가 정말로 죽었고, 내 앞에 있는 건 보리의 있었던 흔적이고, 이제 나는 다시는 보리를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래서 한 때 보리였던 보리의 사체를 보며 그제서야 억누른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하는 전해질리 없는 말도 하며, 이름도 부르며. 이미 없는 보리한테.

  직접 보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화장을 부탁하고 시체를 보고 왔는데도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엔 별로 슬픈 줄도 모르고 지낸다. 집에 가면 혼자 남은 뒤로 유독 사랑이 넘치는 가하를 열심히 예뻐하고 사랑하며 그냥 살던대로 살다가, '아 정말 한 마리네' 하고 이따끔 생각한다. 그 때 드는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부조리함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나한테 고양이가 한 마리 밖에 없을 리가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이질감.

  잘 때면 자연스레 베개 사이를 비워놓았는데. 그러면 무게도 안 느껴질만큼 가벼운 몸으로 폴짝 침대에 뛰어 올라 자그마한 몸을 그 사이에 맞춰 웅크린 뒤 고르릉 거렸는데. 아침이면 시리얼 먹을 때 우유며 요거트를 달라며 식탁 위에 뛰어 올라와 큰 소리로 보챘는데. 햇살이 좋은 날이면 빨리 바람 쐬러 가자고 조르다가 날씨가 추우면 3분 만에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낮 시간 동안에는 괭합성 하면서 바구니에서 자는 걸 좋아했는데. 게임 중이면 꼭 키보드 바로 앞에 좁은 틈새에 엉덩이를 걸치고 냅다 얼굴을 들이대면서 뺨을 쓰다듬어 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생생한데 네가 없을까. 밀려든 추억들이 댐을 무너뜨리는 순간에야 눈물이 터진다. 너무너무 보고싶어서 가슴이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힌다. 항상 '보↗리야!'하고 부르던 이름을 부를 일이 없다는 것조차 서럽고 억울하다. 이제 없다니. 정말로 이제는 없다니.

 

  보리를 처음 만난 건 14년 전, 보리를 임보 중인 지인 분 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지인 분은 작업실에 고양이 7~8마리를 두고 계셨고, 그 댁 검은 고양이 총각과 갓 1살을 넘긴 가하 사이에 새끼를 보고 싶어서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겠지만) 가하를 잠시 그곳에 데려다 놓은 상태였다. 2주 가량 가하를 맡겨둔 사이에 그 분 블로그에 잠시 임보 중이라는 보리 사진이 올라왔고, 가하도 볼 겸 주말에 찾아간 작업실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보리를 처음 실물로 마주하자마자, 나는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보리는 페르시안 믹스라 약간 코가 눌린 얼굴을 가졌다. 그래서 가만히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을 때조차 사람들은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뚱해?'하고 묻는다. 헌데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정말 단 한 번도 보리가 항상 찡그린 얼굴이라든가, 험상궂은 인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평생 보리를 볼 때마다 보리가 정말정말 사랑스럽고 예쁜 얼굴로, 요정 같은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보리는 체구가 자그마한 고양이였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마치 요정 같이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작은 고양이가 세상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홀린 듯이 바라봤다. 그런데 그렇게 보고 있던 와중, 작업실에서 사는 지인 분 고양이가 옆을 지나가자 아무 예고도 없이 지나가던 그 친구를 앞발로 빡! 때렸다. 지인 분 고양이들은 대부분 사람한테나 고양이한테나 붙임성이 좋은 편이었는데, 맞은 친구는 ㅇㅁㅇ...? 하는 얼굴로 잠깐 당황하고선 다시 지나갔고, 보리는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다시 요정같은 모습으로 새침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난 어쩐지 그 모습에 운명을 느꼈다.

  보리는 그렇게 우리집 둘째 고양이가 됐다.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기로 한 두 번째 고양이. 내가 보리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온 날, 바로 다른 사람한테 입양 문의가 들어왔다고 들었다. 역시 운명 아닐까. 내가 그 날 가서, 그렇게 보리를 본 게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한 운명적 만남일 거야. 그런 생각을 했다.

  이동장에 담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보리는 이동장 안에서 작게 고르릉 거렸다. 상대적으로 고르릉을 거의 안 하는 가하만 키워왔던 나에겐 신선한 반응이었다. 집에 데리고 돌아와 가방을 열자마자 보리는 숨는 기색도 없이 냉큼 내 방 침대에 올라가 식빵을 구웠다. 마치 이 집이 앞으로 살 자기집이라는 걸 아는 것마냥. 목욕을 시키는 중에도, 밥을 먹는 중에도 끝없이 고르릉거렸다. 우리집에 와서 행복했던 것 같다.

  가하도 참 외동 성격이긴 한데, 보리도 정말 '사람'만 좋아하는 고양이였다. 가하랑은 그나마 데면데면 척은 했으나 새로 류하가 오고 딸기가 올 때마다 질색팔색 싫어했다. 근처에 너무 가깝게 지나가기라도 했다간 냅다 앞발을 날렸지만, 거리만 유지하면 먼저 싸움을 걸진 않았다. 체구는 제일 작은 게 깡은 대단하다고 가족들이 다 웃었다.

  사람한테는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할 수가 없었다. 누구든 자길 예뻐할 것 같은 사람이다 싶으면 냅다 가서 머리를 들이밀고 고르릉거렸다. 나는 항상 보리에 대한 내 사랑은 외사랑이라고 하곤 했다. 내가 아무리 보리를 사랑해도 보리는 정말 만인을 평등하게 대했어서.

    워낙 누구한테는 예뻐해달라 들이대는 성격이라 손님들 중 보리를 안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같이 살았던 린언니도 작업할 때 다른 고양이는 다 내보내도 보리만은 꼭 끼고 일했고, 쓰다듬어 달라는 애교에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누군들. 반쯤 감은 물기어린 눈으로 야옹 소리와 함께 바라보는 보리한테 어떻게 안 넘어가겠어.

  꽤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선 가하랑 보리, 이렇게 둘이 내 고양이였다. 류하는 미처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아픈 손가락, 딸기는 내가 아니어도 사랑해줄 사람 많은 귀염둥이, 내가 선택해서 평생 함께 하기로 한 내 고양이는 가하랑 보리 두 마리. 물론 시간이 사랑을 쌓아 결국 나는 내 고양이 네 마리가 있는 사람이 됐지만.

  자취할 때도 가하랑 보리는 나랑 같이 살았으니까, 보리는 내가 여행 가있거나 할 때 빼고는 한시도 나와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내 삶에 보리가 없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보리한테 입버릇처럼 '언니는 너 없으면 못 살아. 그러니까 딱 10년만 같이 더 살자.'하고 속삭이곤 했다. 이제는 귀도 거의 안 들리는데도. 밥도 잘 먹고, 산책도 좋아하고, 맛있는 거 달라고 보채니까 10년은 아니라도 좀 더 같이 있엊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진첩에는 동그랗게 만 털뭉치 같은 보리, 햇살 아래 괭합성 하는 보리, 산책하며 꽃 옆에서 찍힌 보리, 가슴 위에 올라와 꾹꾹이에 심취한 보리, 맛있는 걸 안 줘서 심통난 표정의 보리, 수천 장의 보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믿을 수 있을 때만 눈물이 난다. 이제는 정말 고양이가 한 마리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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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etc. 2020. 11. 8. 18:20

2004.12 ~ 2019.08.25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에 딸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집엔 가하와 보리, 두 마리 고양이가 있었다. 가하는 손바닥 만할 때부터 키운 내 첫 고양이였고, 보리는 아는 분이 임보 중이던 걸 내가 첫 눈에 반해 데려온 경우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사료비며 병원비며 모두 부모님께 의지해야 했던 지라 두 마리로도 충분히 부담된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더 고양이를 늘릴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딸기는 우리 큰이모 댁 아랫집 이웃 아주머니의 아들이 파양한 고양이였다. 그 시절에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고양이에 대해 알고 키우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 아들은 아마 예쁘다는 이유로 터키쉬 앙고라 품종의 아기 고양이를 들였다가, 생각보다 통제가 되지 않는 아깽이의 난장판에 키우기 힘들다고 여긴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화장실을 잘 가린다는데 소변도 아무데나 보고 감당할 수가 없다며 파양하고 싶어했고, 아는 사람 중에 고양이 키우는 사람 있냐는 말에 서너 다리를 건너 나한테 넘어왔다. 사촌언니 네 집에 잠시 맡아두려고 데려다놓은 딸기를 보러 엄마랑 이모랑 같이 찾아간 게 우리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이미 엄마한테 무슨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들이냐며, 품종묘니까 키울 사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거절하는 게 낫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의외로 딸기한테 한 눈에 반한 건 우리 엄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딸기는 정말 귀여웠으니까. 3개월 반 가량 된 아기 고양이가 얼마나 예쁜지는 말 안해도 당연할 테고, 그 와중에 유달리 천진난만하고 생각 없이 구는 모습에 엄마가 홀딱 넘어가 버렸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먹는 엄마 무릎 위로 거침없이 올라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 순간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딸기는 귀가 안 들리는, 하얀 털의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들의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첫 날부터 그걸 알았다.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파란 눈의 흰털 고양이는 그렇다더라, 하는 내용을 알고 있었고, 방울 달린 장난감을 흔드는데 시야에서 사라지면 못 찾는 모습에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모네 아랫집 아주머니 아들 놈은 그런 사실도 몰랐던 것 같다. 진짜 뭣도 모르는 새끼가 고양이는 키운다고 나대가지고는, 싶지만. 짠함+귀여움+예쁨 등등의 이유로 딸기는 그렇게 우리집 셋째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딸기는 좀 특이하긴 했다. 단순히 귀가 안 들려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지, 지능이 실제로 좀 떨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고양이들이 안 하는 행동을 많이 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벌였다. 누구에게나 착착 안겨서 가족들은 붙임성이 좋다고 마냥 예뻐했으나, 나는 사실 딸기가 사람을 구분하긴 하는 건지 항상 의문이었다. 오히려 나밖에 모르는 붙박이 가하나 유순한 듯 보여도 성격 확실한 보리 쪽에 더 정이 갔지 아무래도 딸기는 '내' 고양이 같지가 않다는 생각에 정이 잘 안 들었다.

  하지만 딸기는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고양이였다. 같이 살면서 그 누가 딸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가 앉고 싶으면 대뜸 무릎이건 가슴 위건 타고 올라 냅다 드러누워 고르릉거리는 고양이를. 맛있는 걸 내밀면 허둥지둥 달려와 손가락 째 깨물고 보는 고양이를. 들리지도 않는 주제에 목청은 좋아서 도무지 고양이 같지 않은 뫠애애앵 하는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고양이를.

  딸기는 손님들한테도 가장 사랑받았다. 낯을 안 가리는 유일한 고양이었으니까 (다시금 말하지만, 사람을 구분하기는 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장난감에도 제일 열정적이어서, 레이저 포인터로 놀아주면 벽을 따라 펄쩍펄쩍 뛰다가 지쳐서는 개처럼 입을 벌리고 헥헥거리기도 했다.

  딸기의 기행은 꼽자면 끝이 없지만, 유달리 다른 고양이들이 안 가는 곳에 잘 올라가는 편이었다. 커다란 냉장고 꼭대기에서 자다가 내가 집에 오면 뫠애애앵 하고는 그 높은데서 바닥으로 한번에 쿵 하고 뛰어내리기도 했고, 베란다 천장에 매달린 빨래건조대를 무슨 수로 올라가서는 그 위에서 잘 때도 많았다. 가장 아찔했던 기억은, 당시 11층 복도형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집들이로 친척들이 잔뜩 다녀간 후 딸기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서, 귀도 안 들리는 애를 어떻게 찾나 하며 사색이 되어 오밤 중에 딸기를 찾으러 뛰쳐나갔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어서 아파트 화단 구석구석을 뒤지던 도중, 어디 멀리 높은 곳에서 딸기 특유의 뫠애애앵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보니 딸기가 담배 피운다고 방충망까지 열어둔 베란다 난간을 타고, 옆집 베란다 난간 사이로 넘어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11층 베란다를! 난간을 따라 넘어갔다고!! 옆집 사람들이 집에 돌아와 불을 켜자 놀라서 야옹거리는 바람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었다. 대체 거길 왜 넘어갔을까 정말...

  가족들이 예뻐하는 편이다보니 대학생 때 자취할 때에는 가하랑 보리만 데려오고 딸기는 류하랑 같이 집에 두고 왔었다. 류하는 묘하게 딸기를 예뻐해서, 지나가는 딸기를 붙잡아다가 그루밍도 해주고, 딸기가 퍼스널 스페이스를 무시하고 옆에 딱 달라붙어도 짜증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잠시 류하만 데려와 살면서 딸기 혼자 집에 남은 기간이 지나고서는 둘 사이도 다시 좀 서먹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자취하는 동안 고양이들을 전부 다 챙기지 못한 게 참 미안하다. 류하랑 딸기는 엄마랑 지냈는데, 우리 엄마는 고양이들을 예뻐는 해도 돌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화장실도 항상 더러운 편이었고, 장모종이지만 딸기 털은 항상 좀 뭉쳐있었다.

  옛날 기억은 사진으로 볼 때 말고는 사실 많이 떠오르는 건 없다. 항상 새로운 기억이 옛날 기억을 덮어쓰다보니 당장 딸기를 떠올리면 최근 일 위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내가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집을 얻어 나오면서 요씨랑 같이 네 마리와 함께 살고, 류하가 떠나고, 남은 세 마리를 들고 비행기를 타고 넘어오고...그 사이 딸기는 여전히 해맑고 망충한 우리집 막내였지만, 중간에 원인불명의 신경증상으로 MRI도 찍고, 이후로 조금씩 끝없이 뱅뱅 도는 서클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크게 병치레 하는 일 없이, 이 정도면 무탈하게 잘 지내온 것 같다.

  네덜란드에 와서 다시 신경증상을 보이고 어지러움으로 구토를 계속 하는 바람에 스테로이드를 먹이기 시작했다. 추가로 뇌 검사를 한다 해봤자 크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서 증상 억제용으로 1년 반정도 먹였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예전만큼 장난감에 반응하는 일도 줄었고 잠이 늘었지만, 그래도 다른 두 마리에 비해선 제일 활발했다. 뱅뱅 돌기는 해도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녔고, 여전히 이상한 곳을 찾아 서랍 뒤, 창틀 난간 등 좋아하는 자리를 바꿔가며 잠을 잤다. 뱅뱅 도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화장실에 들어가 출구를 못찾고 뫠애앵 거리는 걸 종종 구하러 가야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배도 너무 빵빵해지고, 다시 구토를 시작하는 바람에 약을 다른 종류로 바꾼지 한 달 정도만에, 딸기는 밥을 안 먹기 시작했다. 안락사를 택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초음파 상으로 관찰 된 림프종으로 의심되는 덩어리 때문이었다. 고양이 림프종은 악성 종양 중에서도 유달리 답이 없는 종류고, 이미 비장에도 전이된 것 같아 보인다는 말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먹인 스테로이드 덕에 종양 성장이 좀 더뎠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았을까. 고르릉거리며 자는 와중에도 종종 꼬리를 퍼덕이던 게 사실 만성 통증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원래 이별하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나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을까. 이제는 아프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 더 일찍 덜 아프게 해줄 수 있던 게 아닐까.

  슬픔은 생각보다 한 번에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다. 파도처럼, 물결치며 밀려들었다가 멀어져간다. 보내고 온 다음 날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쉬며 평소처럼 할 일을 하다가 울고, 다시 대청소를 마치고, 다시 울고, 웹툰을 보면서 조금 웃다가 또 울고. 엉엉 소리내어 우는 언니를 보고 놀라 달려오는 가하 때문에 다시 좀 웃고. 그리고 다시 출근해서는 평소처럼 일하다가, 어쩐지 허기지고 텅 빈 느낌에 초콜릿 따위를 계속 주워먹었다.

  집은 넓고, 내 시야에 꼭 세 마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법은 없었는데도, 집에서 가하랑 보리를 보고 있으면 매 순간 매 초 딸기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 텅 빈 소파를 보며 저 방 너머 침대에라도 있어야 할 딸기를 떠올린다. 혹은 서랍 뒤일 수도, 변기뚜껑 위일 수도.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어딜 봐도 뼈아프게 와닿는다. 이 느낌은 슬픔보다는 부당함에 가깝다. 어떻게 우리 집에 고양이가 둘 밖에 없을 수가 있지? 왜 둘이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뭔가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 이상한 평행 세계에라도 떨어진 느낌. 이게 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려면 아직은 흘릴 눈물이 더 남은 것 같다.

  첫 만남부터 이별은 예정돼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반려동물이 자신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진 않는다. 이미 반평생을 함께 해 왔으니 '더 오래'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것도 안다. 항상 바람은 그 뿐이었다. 아프지 않게 있다가, 혹시 아프면 빨리 아프지 않게 보내줄 수 있기를.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이별은 바람직했다.  중요한 건 사랑한 기억 뿐이다. 딸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고양이였는지,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감정을 안고 가야한다. 딸기는 이제 없으니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고양이라 나 말고도 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영혼도, 저 너머나 무지개다리 건너 같은 것도 믿지 않아서, 이제는 그저 없을 뿐인 딸기가, 있는 동안에는 행복했으리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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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

etc. 2020. 11. 8. 18:19

2004. 06. ~ 2017. 01. 15

  처음 류하를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옆 반에 새끼 고양이를 데려온 아이가 있다고 왁자지껄 했던 날이었어. 당시에만 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많이 없었고, 내 또래 친구들 중에 고양이를 키우는 건 나 혼자였을 때였지. 가하조차도 그 때는 채 한 살이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옆 반의 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아이였지만, 길에서 새끼 고양이를 주웠다며 수건에 싸와서는 반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이 사람 저 사람 쓰다듬게 놔뒀어. 생후 한달 반, 두 달 정도 됐을까, 어린 그 애는 야옹거리며 활기차고 깨발랄한 모습으로 17살 여자애들의 지나친 관심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양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비전문가가 - 그저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 내 나이에 가질 법한 도덕적 우월함을 품고 - 그렇게 어린 고양이를 함부로 다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나는 꽤 내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할 건지, 키울 생각인지 물어봤고, 그 아인 부모님 반대로 집에서 키우진 못할 것 같다며, 키울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 무턱대고 키우고 싶다고 나설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나는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있다며, 내가 잘 돌봐서 입양보내 주겠다고 그 앨 데리고 왔어.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지, 그 애가 무슨 병을 가지고 가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가하는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 외의 고양이에 맹렬한 적대감을 보였지.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한 일이야. 우리집 고양이들은 한번도 다른 고양이에게 호의적인 적이 없었는데. 사실 너무 옛날 일이고, 일기나 사진, 블로그 포스팅으로 남겨둔 거 외에 그 때 내가 어떤 생각으로 류하를 돌봤는 지는 기억나지 않아. 류하라는 이름은 편하게 가하랑 돌림자로 '하'자를 뒤에 붙이자고 생각하다가 나름 멋들어지게 - 물론 중2병이 한창 남아있을 때니까 - 지은 이름이었고, 류하를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바닥에서 냥줍한 아이에게 미하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하'자 돌림 고양이 셋이 잠시 집에 함께 있었어. 그 때 사진을 많이 찍어둘 걸 그랬나 싶은데, 후진 폰카메라로 찍은 것 밖에 없던 것 같고, 그마저도 미하 사진은 있는데 류하사진은 없네. 속상해라. 류하는 우리집에 오래 머물진 않았어.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오빠 친구한테 입양 보냈는데, 이것도 지금 생각하자니 무책임한 입양이었겠구나 싶어. 아마 자취하면서 키웠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쓰는 이제야 드는걸. 류하는 그렇게 입양을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어. 그 친구분 어머님이 알러지가 있어서 - 혹은 생겨서 - 더이상 키울 수 없다고 했는데, 자취하다 돌아가서 못 키우게 된 걸까, 아님 애초에 반대를 무릅쓰고 부득부득 우겨서 키우다 못 이겨낸 걸까 좀 궁금하네.

  입양 보내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던 류하는, 대부분의 아깽이가 그러하듯 꿩강하게 장난감을 쫓아 날아다니던, 어디에 눕혀놔도 금방 고르릉 거리며 잠들던, 사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같은 건 전혀 모르는 평범한 아깽이였는데, 1년만에 돌아온 류하는 중성화를 마친 토실토실한 - 그래봤자 4kg였지만 - 뚱냥이가 돼있었고, 말할 수 없을만큼 겁쟁이가 돼있었어. 이것 역시 궁금하단 말이야. 이전 집에서 괴롭혔던 걸까, 아니면 그냥 성품이 원래 소심했던 걸까? 내가 조금만 큰 소리로 말하거나, 옆에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거나, 예기치 못하게 빠르게 손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바빴고, 처음 오는 손님들은 류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갈 때가 많았어. 침대 밑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당시 집에는 가하, 보리, 딸기 세 마리가 이미 함께 살고 있었고, 가하와 보리까지는 내가 키우기로 마음 먹고 데려왔던 아이들이었지만 엄마의 고집으로 딸기를 키우게 된 것만 해도 이미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던 나는 류하를 다른 집으로 보내고 싶어했어. 어떤 면에선 류하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 나는 가하와 보리를 내 고양이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긴 했지만 딸기만 해도 그리 정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류하가 안쓰럽고 짠했던만큼, 새 주인을 찾아서 그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양이가 되길 바랐거든. 블로그며 카페에 입양글을 올리긴 했지만, 한 살이 넘은 코숏 삼색 고양이가 입양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게 미적미적 시간은 가고 어느 샌가 류하는 우리집 고양이 중 한 마리로 자리 잡았어.

  류하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덜 경계하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류하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먼저 쓰다듬거나 끌어안는 건 한없이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내가 관심 없는 척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의자 다리에 머리를 부비거나, 근처에 앉아 고르릉 거리곤 했으니까. 그리고 쓰다듬는 걸 경계하는 한편, 막상 붙잡아 두고 마구 쓰다듬거나 궁디팡팡을 해주면 금세 골골거리기 시작했지. 그렇게 사랑스럽기도 힘든데. 다른 고양이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와중에 딸기와 묘하게 사이가 좋기도 했어. 딸기가 어떻게 생각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류하는 딸기가 자기 새끼라도 되는 양 자주 붙잡고 그루밍도 해주고, 살갑게 붙어서 잘 때도 있었거든. 나중에 떨어져 사는 사이에 전부 리셋 돼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류하는 점차 내가 자길 예뻐하는 존재라는 걸 이해하게 된 것 같았어. 때때로 무릎 밑에 다가와 애옹 거리며 울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곤 했는데, 무릎에 올라오고 싶은 건가 싶어서 무릎을 톡톡 치며 '올라와도 돼'라고 대답하면, 마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부담스러워하는 눈으로 한참을 망설이며 울기만 했어. 대개는 그런 류하를 잔뜩 쓰다듬어주는 걸로 끝났는데, 어느 날인가는 정말 망설이다 말고 무릎으로 뛰어오르더라고.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그 순간의 감동만은 생생하게 기억나. 놀라서 도망갈까봐 큰 소리도 못내고 감격에 겨워하며 류하를 살살 쓰다듬는데 무릎 위에 서는게 어색한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몇초간 머무르다 내려갔어. 그 뒤로 다시 올라오게 되기까지는 몇번의 시도가 더 필요했고.

  무척 속상하게도, 내가 본과에 올라가면서 자취하러 나간 사이 류하와의 관계는 리셋이 됐어. 당시 나는 가하와 보리만 데리고 원룸으로 나갔었고, 집에는 엄마와 오빠만 살고 있었어. 두 사람 다 집에는 머리만 누이러 오는 타입의 삶을 살았으니까 - 함께 살 당시의 나도 비슷했지만 - 고양이들은 가족들과 밥주고 화장실 치워주고 물 갈아주는 것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지냈을 거야. 그나마 딸기는 원최 붙임성 있으니까 그 와중에도 쓰다듬도 많이 받고 했겠지만, 류하는 거의 침대 밑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두어달에 한번 집에 갈 때마다 점점 살이 쪄갔지. 오랜만에 갔더니 날 경계하느라 숨는 류하 때문에 엄청 섭섭했었어. 류하 입장에선 내가 자길 버렸다고 느꼈었을까? 그렇다면 역시 미안한데...어느 시점 쯤에, 이대로 뒀다간 류하가 너무 뚱뚱해질 것 같아서 류하도 데리고 자취방으로 왔어. 생각해보면 그 원룸에 고양이 셋이라니, 무모했지만 다행히 우리집 고양이들은 그리 파괴적이거나 활동적이진 않았어. 따로 다이어트 사료도 사서 먹이고, 낚싯대로 운동도 시켜가며 살을 빼보려 노력했는데 그닥 잘 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도 한 5kg 중반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싶네. 어느 순간 그렇게 살 빼는 걸 포기했던 기억이 나. 류하가 언제나 항상 배고파하는 태도로 내 눈치를 보는 게 너무 미안했거든. 다른 애들 밥이 남을까 기다리다가 내가 빼앗아 가거나 호통 치기 전에 한 알이라도 더 먹으려고 황급히 움직이는 태도가, 꼭 내가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느낌이었어. 어차피 짧게 사는 생인데 먹고 싶은만큼 먹게 두는 게 뭐가 나쁜가 싶었지. 아무튼 그렇게 새 환경에서 다시 낯을 가리고 소심해진 류하를 환경에 적응시키는데 또 한 반년쯤 걸렸을 거야.

  이렇게 쓰고 있자니 류하와의 시간은 끊임 없이 내가 -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 자길 해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이해시키는 과정의 반복이었던 것 같네. 그래도 대충 최근 3년 정도는, 류하가 낯도 꽤 안 가리고 여유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 어떨 땐 손님이 와서 경계할 일이 있으면 '아, 경계하기 귀찮은데 낯설잖아? 고민되네...'하는 태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곧잘 붙잡아놓고 배를 주무르거나 품에 안고 놔주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괴롭힐 때에도, 이전 같았으면 눈을 굴리면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었다면, 점차 적응해서 '아, 이것 참 곤란하네' 하는 얼굴로 1분쯤 견뎌주다가 슬슬 벗어나게 됐고 말이야.

  글을 쓰다보니 장장 12년을 함께 하고도, 류하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둔 게 너무 없어서 떠올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슬프네.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데, 그 애가 어떤 아이였는 지 좀 더 많이 적어둘 걸 그랬어. 지금 내가 가진 생생한 기억들은 최근 1년 사이의 기억이 대부분인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려질 거 아냐.

 

  많은 게 기억나. 요새 가하나 보리는 내가 불러도 영 들은 척도 안하고 귀 하나 까딱 안하는데, 류하는 내가 맨날 실없이 예뻐서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부르는 족족 귀라도 움찔 하거나 꼬박꼬박 돌아보곤 했어. '이리 와봐~'하고 손을 내밀면 아무 것도 없는 게 뻔한데도 와서 냄새라도 맡고 갔고. 혹시 먹을 게 있을까 기대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괜히 살 뺀다고 먹을 거 적게 주지 말고 많이 많이 먹게 해줄 걸 그랬어. 특히 마지막 주에 구토 하면서 식욕 없는 류하를 보면서 후회를 많이 한 것 같아.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먹고 싶어할 때 더 많이 줄 걸. 구토 증상이 나아지면 꼭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거 원없이 먹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애들이 밥 달라고 보채며 밥그릇 앞에서 패악을 부려도 한번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어. 하도 빨리 먹어버리니까 내가 항상 마지막 순서로 밥그릇을 채워줬고, 금세 그 순서에 적응했던 거지.

  류하는 사람을 물 줄도 몰랐어. 내가 눕혀놓고 배를 주물거리거나 못살게 굴면 장난치듯이 뒷발로 차며 앙 물 때가 있었는데, 가하나 보리에 비하면 이빨이 스치는 수준에 불과하게 물어놓고도 화들짝 놀라선 금세 이빨을 뗐어. 예전 집에서 혼났던 걸까 생각하면 짠해. 나는 마음껏 물어도 혼 안내는데. 그렇게 착한 모습이 좋아서 장난칠 때도 많았어.

  류하는 이름을 부르면 꼭 다가오기 전에 벽이나 의자 다리, 식탁 다리 같은 곳에 머리를 부볐어. 내 손에 와서 부벼주면 좋을텐데, 나랑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로 벽에다 뺨을 슥슥 부볐어. 애정표현이었다고 생각해, 역시. 때때로 정말 예쁨이 받고 싶은 건지 눈을 마주친 채 야옹 하고 울면서 다가올 때는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세게 꾹꾹 눌러서 쓰다듬어줬어. 류하는 세게 쓰다듬는 걸 좋아했으니까. 바닥에 엎어놓고 궁디팡팡 해주는 것도 엄청 좋아했는데 맨날 변태고양이라고 놀리면서 두들겨줬어.

  새 집에서 류하가 좋아하는 장소는 소파 위, 컴퓨터 책상 서랍 뒤쪽, 침대 발치였어. 밤에는 항상 침대 발치에서 자서 다리를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어. 가끔 엎드려있는 류하를 붙잡아다 내 얼굴가로 끌어와 꼭 끌어안으면 숨만 색색 쉬면서 도망 안 가고 1분쯤 기다려줬어. 딱히 그게 편한 것 같진 않았는데, 내 애정표현을 이해해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이러다 말겠지~ 하는 느긋한 태도에 가까웠달까. 풀어주면 바로 발치로 돌아가 그대로 잠들었어.

모든 순간이 너무 생생해. 눈 안에서 류하가 계속 머물어서 매 순간 보고 싶어. 나는 침대에 누워서 허전한 발치 때문에 울고, 소파에 앉아서 빈 옆자리 때문에 울고, 세 개 밖에 놓을 필요 없는 밥그릇 때문에 울고, 화장실을 치우며 감자랑 맛동산이 적어서 울어. 병원에 온 삼색이가 류하를 닮아서 울고, 사진을 보다가 쓰다듬고 싶어서 울고, 이 글을 쓰다가 또 보고싶어서 다시 울어.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그때마다 많이 울 거야. 어떤 면에서는 추억이 흐려지는 게 겁나기도 해. 덜 보고싶어질 거라는 게 속상하기도 해. 아직도 사실 실감이 안 나. 왜 류하가 내 곁에 없을까? 왜 우리 집에 고양이가 세 마리 밖에 없을까? 왜 더이상 류하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을까?

  내가 더 유능한 수의사였다면, 원장님만큼 많이 알았더라면, 그날 외출하지 말고 집에 있었더라면, 병원에 빨리 데려갔더라면, 흉수를 뽑자고 말했더라면, 부질없는 후회도 많이 들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게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넘치게, 충분히 많이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한 순간도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착하고 다정했어.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류하는 우리집에서 내 네번째 고양이로 살아서 행복했을 거야. 이제는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랑하는 류하.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많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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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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