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

etc. 2020. 11. 8. 18:19

2004. 06. ~ 2017. 01. 15

  처음 류하를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옆 반에 새끼 고양이를 데려온 아이가 있다고 왁자지껄 했던 날이었어. 당시에만 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많이 없었고, 내 또래 친구들 중에 고양이를 키우는 건 나 혼자였을 때였지. 가하조차도 그 때는 채 한 살이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옆 반의 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아이였지만, 길에서 새끼 고양이를 주웠다며 수건에 싸와서는 반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이 사람 저 사람 쓰다듬게 놔뒀어. 생후 한달 반, 두 달 정도 됐을까, 어린 그 애는 야옹거리며 활기차고 깨발랄한 모습으로 17살 여자애들의 지나친 관심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양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비전문가가 - 그저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 내 나이에 가질 법한 도덕적 우월함을 품고 - 그렇게 어린 고양이를 함부로 다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나는 꽤 내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할 건지, 키울 생각인지 물어봤고, 그 아인 부모님 반대로 집에서 키우진 못할 것 같다며, 키울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 무턱대고 키우고 싶다고 나설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나는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있다며, 내가 잘 돌봐서 입양보내 주겠다고 그 앨 데리고 왔어.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지, 그 애가 무슨 병을 가지고 가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가하는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 외의 고양이에 맹렬한 적대감을 보였지.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한 일이야. 우리집 고양이들은 한번도 다른 고양이에게 호의적인 적이 없었는데. 사실 너무 옛날 일이고, 일기나 사진, 블로그 포스팅으로 남겨둔 거 외에 그 때 내가 어떤 생각으로 류하를 돌봤는 지는 기억나지 않아. 류하라는 이름은 편하게 가하랑 돌림자로 '하'자를 뒤에 붙이자고 생각하다가 나름 멋들어지게 - 물론 중2병이 한창 남아있을 때니까 - 지은 이름이었고, 류하를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바닥에서 냥줍한 아이에게 미하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하'자 돌림 고양이 셋이 잠시 집에 함께 있었어. 그 때 사진을 많이 찍어둘 걸 그랬나 싶은데, 후진 폰카메라로 찍은 것 밖에 없던 것 같고, 그마저도 미하 사진은 있는데 류하사진은 없네. 속상해라. 류하는 우리집에 오래 머물진 않았어.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오빠 친구한테 입양 보냈는데, 이것도 지금 생각하자니 무책임한 입양이었겠구나 싶어. 아마 자취하면서 키웠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쓰는 이제야 드는걸. 류하는 그렇게 입양을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어. 그 친구분 어머님이 알러지가 있어서 - 혹은 생겨서 - 더이상 키울 수 없다고 했는데, 자취하다 돌아가서 못 키우게 된 걸까, 아님 애초에 반대를 무릅쓰고 부득부득 우겨서 키우다 못 이겨낸 걸까 좀 궁금하네.

  입양 보내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던 류하는, 대부분의 아깽이가 그러하듯 꿩강하게 장난감을 쫓아 날아다니던, 어디에 눕혀놔도 금방 고르릉 거리며 잠들던, 사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같은 건 전혀 모르는 평범한 아깽이였는데, 1년만에 돌아온 류하는 중성화를 마친 토실토실한 - 그래봤자 4kg였지만 - 뚱냥이가 돼있었고, 말할 수 없을만큼 겁쟁이가 돼있었어. 이것 역시 궁금하단 말이야. 이전 집에서 괴롭혔던 걸까, 아니면 그냥 성품이 원래 소심했던 걸까? 내가 조금만 큰 소리로 말하거나, 옆에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거나, 예기치 못하게 빠르게 손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바빴고, 처음 오는 손님들은 류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갈 때가 많았어. 침대 밑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당시 집에는 가하, 보리, 딸기 세 마리가 이미 함께 살고 있었고, 가하와 보리까지는 내가 키우기로 마음 먹고 데려왔던 아이들이었지만 엄마의 고집으로 딸기를 키우게 된 것만 해도 이미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던 나는 류하를 다른 집으로 보내고 싶어했어. 어떤 면에선 류하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 나는 가하와 보리를 내 고양이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긴 했지만 딸기만 해도 그리 정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류하가 안쓰럽고 짠했던만큼, 새 주인을 찾아서 그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양이가 되길 바랐거든. 블로그며 카페에 입양글을 올리긴 했지만, 한 살이 넘은 코숏 삼색 고양이가 입양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게 미적미적 시간은 가고 어느 샌가 류하는 우리집 고양이 중 한 마리로 자리 잡았어.

  류하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덜 경계하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류하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먼저 쓰다듬거나 끌어안는 건 한없이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내가 관심 없는 척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의자 다리에 머리를 부비거나, 근처에 앉아 고르릉 거리곤 했으니까. 그리고 쓰다듬는 걸 경계하는 한편, 막상 붙잡아 두고 마구 쓰다듬거나 궁디팡팡을 해주면 금세 골골거리기 시작했지. 그렇게 사랑스럽기도 힘든데. 다른 고양이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와중에 딸기와 묘하게 사이가 좋기도 했어. 딸기가 어떻게 생각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류하는 딸기가 자기 새끼라도 되는 양 자주 붙잡고 그루밍도 해주고, 살갑게 붙어서 잘 때도 있었거든. 나중에 떨어져 사는 사이에 전부 리셋 돼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류하는 점차 내가 자길 예뻐하는 존재라는 걸 이해하게 된 것 같았어. 때때로 무릎 밑에 다가와 애옹 거리며 울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곤 했는데, 무릎에 올라오고 싶은 건가 싶어서 무릎을 톡톡 치며 '올라와도 돼'라고 대답하면, 마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부담스러워하는 눈으로 한참을 망설이며 울기만 했어. 대개는 그런 류하를 잔뜩 쓰다듬어주는 걸로 끝났는데, 어느 날인가는 정말 망설이다 말고 무릎으로 뛰어오르더라고.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그 순간의 감동만은 생생하게 기억나. 놀라서 도망갈까봐 큰 소리도 못내고 감격에 겨워하며 류하를 살살 쓰다듬는데 무릎 위에 서는게 어색한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몇초간 머무르다 내려갔어. 그 뒤로 다시 올라오게 되기까지는 몇번의 시도가 더 필요했고.

  무척 속상하게도, 내가 본과에 올라가면서 자취하러 나간 사이 류하와의 관계는 리셋이 됐어. 당시 나는 가하와 보리만 데리고 원룸으로 나갔었고, 집에는 엄마와 오빠만 살고 있었어. 두 사람 다 집에는 머리만 누이러 오는 타입의 삶을 살았으니까 - 함께 살 당시의 나도 비슷했지만 - 고양이들은 가족들과 밥주고 화장실 치워주고 물 갈아주는 것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지냈을 거야. 그나마 딸기는 원최 붙임성 있으니까 그 와중에도 쓰다듬도 많이 받고 했겠지만, 류하는 거의 침대 밑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두어달에 한번 집에 갈 때마다 점점 살이 쪄갔지. 오랜만에 갔더니 날 경계하느라 숨는 류하 때문에 엄청 섭섭했었어. 류하 입장에선 내가 자길 버렸다고 느꼈었을까? 그렇다면 역시 미안한데...어느 시점 쯤에, 이대로 뒀다간 류하가 너무 뚱뚱해질 것 같아서 류하도 데리고 자취방으로 왔어. 생각해보면 그 원룸에 고양이 셋이라니, 무모했지만 다행히 우리집 고양이들은 그리 파괴적이거나 활동적이진 않았어. 따로 다이어트 사료도 사서 먹이고, 낚싯대로 운동도 시켜가며 살을 빼보려 노력했는데 그닥 잘 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도 한 5kg 중반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싶네. 어느 순간 그렇게 살 빼는 걸 포기했던 기억이 나. 류하가 언제나 항상 배고파하는 태도로 내 눈치를 보는 게 너무 미안했거든. 다른 애들 밥이 남을까 기다리다가 내가 빼앗아 가거나 호통 치기 전에 한 알이라도 더 먹으려고 황급히 움직이는 태도가, 꼭 내가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느낌이었어. 어차피 짧게 사는 생인데 먹고 싶은만큼 먹게 두는 게 뭐가 나쁜가 싶었지. 아무튼 그렇게 새 환경에서 다시 낯을 가리고 소심해진 류하를 환경에 적응시키는데 또 한 반년쯤 걸렸을 거야.

  이렇게 쓰고 있자니 류하와의 시간은 끊임 없이 내가 -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 자길 해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이해시키는 과정의 반복이었던 것 같네. 그래도 대충 최근 3년 정도는, 류하가 낯도 꽤 안 가리고 여유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 어떨 땐 손님이 와서 경계할 일이 있으면 '아, 경계하기 귀찮은데 낯설잖아? 고민되네...'하는 태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곧잘 붙잡아놓고 배를 주무르거나 품에 안고 놔주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괴롭힐 때에도, 이전 같았으면 눈을 굴리면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었다면, 점차 적응해서 '아, 이것 참 곤란하네' 하는 얼굴로 1분쯤 견뎌주다가 슬슬 벗어나게 됐고 말이야.

  글을 쓰다보니 장장 12년을 함께 하고도, 류하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둔 게 너무 없어서 떠올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슬프네.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데, 그 애가 어떤 아이였는 지 좀 더 많이 적어둘 걸 그랬어. 지금 내가 가진 생생한 기억들은 최근 1년 사이의 기억이 대부분인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려질 거 아냐.

 

  많은 게 기억나. 요새 가하나 보리는 내가 불러도 영 들은 척도 안하고 귀 하나 까딱 안하는데, 류하는 내가 맨날 실없이 예뻐서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부르는 족족 귀라도 움찔 하거나 꼬박꼬박 돌아보곤 했어. '이리 와봐~'하고 손을 내밀면 아무 것도 없는 게 뻔한데도 와서 냄새라도 맡고 갔고. 혹시 먹을 게 있을까 기대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괜히 살 뺀다고 먹을 거 적게 주지 말고 많이 많이 먹게 해줄 걸 그랬어. 특히 마지막 주에 구토 하면서 식욕 없는 류하를 보면서 후회를 많이 한 것 같아.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먹고 싶어할 때 더 많이 줄 걸. 구토 증상이 나아지면 꼭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거 원없이 먹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애들이 밥 달라고 보채며 밥그릇 앞에서 패악을 부려도 한번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어. 하도 빨리 먹어버리니까 내가 항상 마지막 순서로 밥그릇을 채워줬고, 금세 그 순서에 적응했던 거지.

  류하는 사람을 물 줄도 몰랐어. 내가 눕혀놓고 배를 주물거리거나 못살게 굴면 장난치듯이 뒷발로 차며 앙 물 때가 있었는데, 가하나 보리에 비하면 이빨이 스치는 수준에 불과하게 물어놓고도 화들짝 놀라선 금세 이빨을 뗐어. 예전 집에서 혼났던 걸까 생각하면 짠해. 나는 마음껏 물어도 혼 안내는데. 그렇게 착한 모습이 좋아서 장난칠 때도 많았어.

  류하는 이름을 부르면 꼭 다가오기 전에 벽이나 의자 다리, 식탁 다리 같은 곳에 머리를 부볐어. 내 손에 와서 부벼주면 좋을텐데, 나랑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로 벽에다 뺨을 슥슥 부볐어. 애정표현이었다고 생각해, 역시. 때때로 정말 예쁨이 받고 싶은 건지 눈을 마주친 채 야옹 하고 울면서 다가올 때는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세게 꾹꾹 눌러서 쓰다듬어줬어. 류하는 세게 쓰다듬는 걸 좋아했으니까. 바닥에 엎어놓고 궁디팡팡 해주는 것도 엄청 좋아했는데 맨날 변태고양이라고 놀리면서 두들겨줬어.

  새 집에서 류하가 좋아하는 장소는 소파 위, 컴퓨터 책상 서랍 뒤쪽, 침대 발치였어. 밤에는 항상 침대 발치에서 자서 다리를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어. 가끔 엎드려있는 류하를 붙잡아다 내 얼굴가로 끌어와 꼭 끌어안으면 숨만 색색 쉬면서 도망 안 가고 1분쯤 기다려줬어. 딱히 그게 편한 것 같진 않았는데, 내 애정표현을 이해해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이러다 말겠지~ 하는 느긋한 태도에 가까웠달까. 풀어주면 바로 발치로 돌아가 그대로 잠들었어.

모든 순간이 너무 생생해. 눈 안에서 류하가 계속 머물어서 매 순간 보고 싶어. 나는 침대에 누워서 허전한 발치 때문에 울고, 소파에 앉아서 빈 옆자리 때문에 울고, 세 개 밖에 놓을 필요 없는 밥그릇 때문에 울고, 화장실을 치우며 감자랑 맛동산이 적어서 울어. 병원에 온 삼색이가 류하를 닮아서 울고, 사진을 보다가 쓰다듬고 싶어서 울고, 이 글을 쓰다가 또 보고싶어서 다시 울어.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그때마다 많이 울 거야. 어떤 면에서는 추억이 흐려지는 게 겁나기도 해. 덜 보고싶어질 거라는 게 속상하기도 해. 아직도 사실 실감이 안 나. 왜 류하가 내 곁에 없을까? 왜 우리 집에 고양이가 세 마리 밖에 없을까? 왜 더이상 류하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을까?

  내가 더 유능한 수의사였다면, 원장님만큼 많이 알았더라면, 그날 외출하지 말고 집에 있었더라면, 병원에 빨리 데려갔더라면, 흉수를 뽑자고 말했더라면, 부질없는 후회도 많이 들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게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넘치게, 충분히 많이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한 순간도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착하고 다정했어.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류하는 우리집에서 내 네번째 고양이로 살아서 행복했을 거야. 이제는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랑하는 류하.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많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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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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