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드럼 칠 줄 알아?"

 

  호비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실도피하듯 얼떨결에 발을 들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그웬은 생각과 다른 서먹한 분위기에 애를 먹었다. 막연하게 마일즈의 지구에서 만났던 다른 거미 친구들처럼 서로의 외로움과 고충을 이해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를 보는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시선은 뭔가 불편했다. 그웬도 딱히 스스럼 없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지만,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못 볼 꼴을 본 것마냥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걸 깨닫자 그웬도 뭔가 잘못 됐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네 이름이 주는 임팩트가 좀 있어서 말이야."

 

  라일라에게 들은 다른 우주의 수많은 '그웬 스테이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으나, 그웬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뛰게 억울한 일이었다. 지들은 죄다 피터 파커면서! 누가 누굴 보고 피할 상황인데, 지금?

  자신 내면의 소용돌이를 돌보기도 벅찬 마당에 넘쳐나는 피터 파커들의 정신적 고통까지 고려해줄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웬은 차라리 외톨이로 머무는 쪽을 택했다. 미겔은 당장 임무에 나서기엔 그가 너무 미숙하다며 쉽게 일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그웬은 제스의 지구에서 가끔 묵을 때 말고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주어진 임시숙소에서 최대한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홀로 방에만 있다 보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품안에서 눈을 감던 피터의 마지막 숨결. 포탈을 넘기 전 그를 보던 아버지의 눈빛. 아버지에게 애원하던 순간의 절망감. 머릿속을 뒤덮는 생각 속에서 잠들면 꿈에서마저 악몽이 괴롭혔다.

  드럼이라도 칠 수 있으면 나을 텐데. 도무지 안에만 있어선 안될 것 같아서 햇볕이라도 쬐기 위해 실내정원 분수가에 앉은 그웬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들겼다. 호비가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드럼 칠 줄 알아?"

  "뭐?"

  "드럼, 칠 줄 아냐고."

 

  강렬한 생김새의 - 이곳에 와서 천양각색의 수트 변주를 봐온 그웬 기준으로도 - 거미였다. 모히칸마냥 정수리를 따라 삐죽 솟은 파이크와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정신산만한 수트 무늬. 그리고 등에 멘 건...기타? 수트 위에 기타를 메고 있어?

 

  "응...밴드는 없지만."

 

  없다고 해야겠지? MJ도 이제는 그웬이 지긋지긋해졌을 테니까. 그웬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얼굴도 안 비친 지 한참이니 지금쯤 새 드러머를 구했을 터였다.

 

  "잘됐네. 딱 좋은 타이밍이야. 가자."

 

  타이밍? 뭐가? 하고 되묻기도 전에, 느닷없이 포털을 연 거미가 그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 얼떨결에 손을 붙잡자마자 열린 포털 속으로 웹슈터를 쏘더니 그대로 그웬과 함께 몸을 던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슬슬 익숙해져 가는 강렬한 속도감을 품에 안고 포탈 밖으로 쏘아져 나가자, 그곳은 무채색의 낯선 도시였다. 그웬을 데려온 거미와 똑 닮은, 흑백 신문을 얼기설기 오려 붙인 것 같은 낡고 음울한 도시.

 

  "그런 색으로는 좀 눈에 띌 테니까 일단 대충 걸쳐. 좀 크긴 할 텐데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이 선 곳은 희미한 네온사인 불빛이 전부인 어두침침한 골목길이었고, 거미는 여긴 어딘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슥슥 걸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스포츠백에서 후드집업을 꺼내 던졌다.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살피다가 옷을 받아든 그웬이 그제야 말할 기회를 포착했다.

 

  "잠깐만, 너 누구야? 여긴 무슨 지구고?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데?"

 

  가방에서 꺼낸 데님재킷과 청바지로 갈아입고 마스크를 벗은 거미가 그웬을 돌아봤다. 마스크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 건가 싶게 풍성한 레게머리가 퐁 튀어나오는 모양에 그웬은 잠깐 벙쪄서 또 말을 잃었다. 몇 갠지 셀 수도 없는 피어싱에도 묻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 나이는 그웬보다 한두 살 많을 듯 보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법 무서워 보일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웬을 보는 눈빛은 묘하게 따듯했다.

 

  "호비 브라운. 스파이더 펑크라고도 부르는데 선호하는 건 이름 쪽이고. 여기는 지구...뭐더라, 138이던가. 일단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주섬주섬 후드를 걸치고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호비를 따라가며 그웬은 이 상황에 화를 내야할지 당황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이렇게? 스파이더맨으로 위장한 빌런 같은 건 아니겠지, 설마? 스파이더 센스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거니 하며 호비가 안내하는 낡은 철문을 따라 들어서자, 그웬도 익히 아는 쿵쿵거리는 앰프의 울림이 느껴졌다. 공연장이잖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호비! 공연 30분 전인데 이제 오는 게 어딨어?!"

  "드러머 구하러 간댔잖아. 구해왔어."

  "뭐, 진짜? 잘했어! 네가 최고야!"

 

  짧게 깎은 머리를 하늘색으로 탈색한 그웬 또래의 청년은 화내려던 기세를 금세 수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웬을 바라봤다.

 

  "친구, 이름이 뭐야? 시간 얼마 없는데 호흡만 잠깐 맞춰볼래? 셋팅은 다 돼있어!"

  "어, 난..."

  "그웬디. 이쪽은 그웬디야. 가자, 곧 시작이야."

 

  그완다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웬디... 그웬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비를 돌아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 해보이더니 그웬의 등뒤를 툭툭 밀었다. 공연? 지금? 여기서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휩쓸린 것은 여상스럽게 그를 이끄는 호비의 태도였을까, 아니면 간만에 접한 공연장의 두근거리는 울림 탓이었을까. 그 뒤는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합을 맞춰보기 위해 셋리스트를 빠르게 훑고, 속사포처럼 밴드 멤버들을 하나씩 소개 받고, 공연 시간이라는 외침에 부리나케 자리를 잡고 긴장할 새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멤버들은 급하게 합류한 그웬의 흐름에 쉽게 맞춰줄 만큼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다. 호비는 무대에 서기 전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야말로 스파이더 펑크, 라는 걸까. 대체 뭐하는 우주길래 스파이더맨이 수트 차림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건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고요해진 공연장 한가운데, 미뤄놨던 긴장감이 한 순간 몰려드는 느낌에 그웬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때, 재밌었지?"

 

  그새 다시 마스크를 벗은 호비가 그웬에게 다가왔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무대 위의 그는 쉴 새 없이 날뛰며 환호를 유도하고 보컬과 함께 마이크도 잡고 -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다 - 열정적으로 공연을 주도했다. 그래놓고는 공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상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그웬에게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다. 그웬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냅다 자신을 끌고 온 이 배짱 좋은 거미의 독단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대체 뭐야? 누가 공연 30분 전에 처음 보는 드러머를 데려와서 무대에 세워? 내 실력이 어떨 줄 알고?"

  "잘했으니 됐지? 펑크는 원래 그런 거야. 네가 잘 못했으면...뭐 토마토나 몇 개 맞고 말았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웬이 제대로 못했을 거란 가정은 전혀 안하는 듯한 얼굴에 그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그웬은 간만에 드럼스틱을 잡고 난 뒤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한동안 복잡했던 머리도 드럼을 치는 동안 한결 정리됐는지, 정말 오랜만에 잡념 없이 머리가 맑았다.

 

  "공연 대타 구하려고 본부에 왔던 거야?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어, 뭐. 나는 거기 잘 안 가니까. 어쩌다 타이밍이 맞았나 보네."

 

  값어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공연장 밖으로 나서자 어느 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호비의 우주는, 그가 사는 동네는 그웬의 우주와 참 달랐다. 많은 게 낡아 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을 것 같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우주에 와본 건 이걸로 네 번째인가. 마일즈, 미겔, 제스의 우주, 그리고 이곳, 지구-138. 임무 없이 다른 우주에 가 있으면 캐논의 위험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미겔에게 듣긴 했으나 그웬은 모처럼 방문한 다른 우주가 신기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꼭 미겔을 닮은 차갑고 낯선 누에바 요크에는...

 

  "늦은 김에 묵고 가. 돌아가 봤자 재밌는 일도 없잖아. 불쌍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한 피터 뭐시기들만 드글거리는 곳에."

 

  꼭 그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호비는 툭 하고 별스럽지 않은 제안을 던졌다. 질색하는 호비의 표정에 그웬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냅다 이렇게 초대하는 거야? 재워줄 곳은 있고?"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닌데, 묵어가는 애들이 넘쳐나서 손님 맞을 구색은 갖춰놨거든. 급하게 갈 이유도 따로 없잖아?"

 

  분명 오늘 처음 만난 건데도, 호비는 그웬을 익히 안다는 양 말을 던졌다. 섣부른 오지랖에 불쾌감이 들 법도 했으나, 그웬은 어쩐지 누그러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이런 기분으로 그런 곳에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난데 없이 나타나 엉겁결에 기분전환을 시켜준 호비란 거미한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기에.

  그것이 그웬 스테이시와 호비 브라운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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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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