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 머무는 생활은 점차 익숙해졌다. 제 집 같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주 놀러가 묵는 친구집 같은 느낌? 첫날 썼던 그웬의 칫솔에는 이제 호비가 준 홀로그램 거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호비는 마치 길고양이를 챙기듯 그웬을 방치하며 돌봤다. 언제 온다간다 말도 없이 들락거리는 그웬을 위해 여분의 침대시트를 늘상 갖춰두고, 냉장고에는 언제나 보관기간이 긴 간편식 종류가 두어 개 들어 있었다. 소파에서 자겠다는 강력한 요청을 몇 번 거절당하고 난 뒤로는 호비의 흔적이 밴 침대에서 자는 데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웬은 호비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쉽게 정할 수 없었다. 피터 이후로, 그웬이 마음을 터놓고 친구가 됐던 건 마일즈가 유일했다. 허나 마일즈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고, 위기와 모험을 넘나드는 사이에 싹튼 감정이 그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에게 느낀 동질감이었을지, 우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는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대로 지구-1610에 머물며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웬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쉽게 담을 쌓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 대신 한 번 담을 허물고 나면 한도 없이 자신을 내주는 성격이라는 것도. 그런 그에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딱 편안할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곁을 내주는 호비의 존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웬에겐 굳이 자세히 물어 그들의 관계를 정립할 용기가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기꺼이 이 느슨한 줄다리기가 주는 안정감을 즐기기로 했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비의 밴드와 깜짝 객원 공연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좁아터진 호비의 보트에 밴드멤버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하게 뒷풀이를 하고, 다음 곡과 게릴라 콘서트를 벌일 장소를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도 그웬은 호비와 한참을 더 떠들다 잠자리에 들었다. 갓 구운 토스트의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일어나 샤워부터 마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말리던 그웬은 문득 수건으로 몇 번 두들기는 걸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길어진 머리를 인지했다.
 
  "여기도 미용실 같은 게 있나?"
 
  질문을 던지고 나니 꽤 바보 같은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머리 자르는 곳이 없을 리가. 욕실 문 너머로 소파 앞에 토스트 접시를 내려놓던 호비가 슬쩍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머리 자르게?"
  "아니, 옆머리가 제법 길어져서..."
 
  흘러내린 윗머리를 손으로 살짝 들추어 보이자 이제는 언더컷이라 부르기 애매한 길이가 된 애매한 옆머리가 드러났다. 문 사이로 빼꼼 들여다본 호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은 젖은 수건을 목 뒤에 두르고 걸어나와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호비는 그웬이 나올 시간에 딱 맞춰서 마시기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준비하는 재주가 있었다. 과연 영국인이라 이건가.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는 그웬에게 호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가 밀어줄까?"
  "어?"
  "클리퍼는 케빈한테 빌려오면 돼. 근처에 바버샵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긴 한데, 걔보단 내가 잘하거든."
 
  정작 본인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한 게 언젠지 짐작도 가지 않는 꼴을 하고서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여차하면 제시카네 집에 가서 클리퍼를 빌릴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지만, 그웬은 다소 미심쩍어 하는 얼굴로 고민했다. 밑져야 본전이고 실패해도 머리는 다시 자라는 거니까. 안될 것도 없지, 뭐.
 
  마침 바쁜 일정도 없었다. 최근 그웬은 아무 지구에서든 간단하게 할 만한 알바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서 숙식을 제공한다곤 해도 자잘한 생활비가 안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친구들의 선의에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식당 접시닦이 알바든 바쁜 주말 저녁 배달 알바든 - 스파이더우먼이 배달해준 피자를 드셔보세요! -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그날그날 먹고 사는 건 처음에만 좀 힘들었지 금방 적응이 됐다. 본부 임무 짬짬이 알바하랴 호비네 밴드와 공연 준비하랴 제법 바쁘게 지내던 중,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 싶어서 아무 계획 없이 호비의 보트에서 뒹굴거리겠다고 마음 먹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욕실 거울 앞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은 그웬 뒤에서 호비가 부산스럽게 도구를 늘어놓았다. 케빈이라는 친구한테 함께 빌린 건지 염색약이 덕지덕지 묻고 끄트머리가 헤진 미용가운을 그웬의 목 둘레에 두르고, 클리퍼에 남은 이전 사용자의 흔적을 작은 붓으로 털어내고, 클리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원을 잠깐 켜보는 일련의 과정을 그웬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많이 해봤나 봐?"
  "어어. 여긴 뭐든 자급자족하는 녀석들 뿐이니까. 너 같은 얇은 금발은 별로 만져본 적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 라니 남의 머리를 두고 제법 불안한 말을 한다. 아무렴, 미숙하다 한들 우리 아빠만 할까. 그웬은 엉망진창이었던 조지 스테이시의 클리퍼 실력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머리는 또 자라는 거니까.
 
  기타리스트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이 그웬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헤집었다. 밀면 안되는 부분을 따로 틀어올리면 좋을 테지만 당연하게도 호비의 집에 집게 따위는 없었다. 좀 더 머리가 길어지면 머리끈으로 묶어둘 수라도 있을 텐데. 조용한 가운데 딸깍 하고 전원 켜는 소리, 이어서 위이잉 하는 익숙한 클리퍼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그웬의 뒤통수를 집중해서 노려보느라 따로 눈을 마주쳐 오지 않았다. 정말 익숙해 보이네. 그 무심한 얼굴에 되레 그웬 자신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한다."
  "...응."
 
  목덜미 부근에 선뜩한 느낌과 함께 위잉거리는 날이 접촉해왔다. 호비는 머리를 틀어올린 왼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살짝 앞으로 밀며 클리퍼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날을 위로 밀어올렸다. 제법 자란 뒷머리가 바닥으로 사락거리며 떨어졌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집중한 눈을 훔쳐봤다. 연주에 심취해 있을 때 같은 표정이네. 그웬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집중해야 할 곳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처음 해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는 꽤 능숙하게 클리퍼를 다루었다. 어쩌면 그냥 손으로 다루는 건 뭐든 잘 하는 걸지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린 시간이 무색하게 클리퍼가 몇 번 위아래를 오가자 얼마 되지 않는 언더컷 부분이 금세 정돈됐다. 몇 번인가 멈추어 긴 머리 부분과의 경계를 확인하고 목 피부가 드러나는 끄트머리 부분에서 날길이를 바꿔 잔머리까지 꼼꼼하게 손질하는 데도 시계를 보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 했다. 그웬은 그 시간 내내 호비의 집중한 얼굴을 관찰했다.
 
  "잘하네. 익숙하다더니."
  "언더컷은 처음이긴 한데, 이 정도는 남자들은 대개 익숙하지."
 
  손질이라곤 영영 한 일 없는 것 같은 머리로 둘러대는 말이 뭔가 우스웠다.
 
  "잘하는 줄 알았으면 더 짧게 할걸 그랬나? 1mm로?"
  "3mm가 제일 보기 좋아. 금방 자란다 싶으면 자주 밀면 되니까."
 
  자기가 자주 밀어준다는 말인 걸까. 그웬은 흘러가듯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이 위잉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끝났어?"
  "아니, 경계 부분 아직 남았어. 지금부터는 움직이면 안 돼."
 
  별 말 아닌데도 그웬은 작게 심호흡 하고는 그대로 흡 하고 숨을 죽였다. 호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경계 부분은 자칫하면 멀쩡한 머리를 왕창 뜯어먹을 위험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아버지한테 처음 머리를 맡겼던 날의 경험으로.
 
  '여기는 좀 까다롭구나. 날을 옆으로 기울여 볼까?'
  '음, 미용사들은 그대로 하던데요, 보통.'
  '그 사람들은 전문가잖니. 잠깐, 움직이지 말고. 아, 이런...'
  '...'
 
  잡으면 그대로 붙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부친의 손이 허망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뭉치를 붙잡았다. 그웬은 처참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추었다. 원래 있던 언더컷 라인에서 눈에 띄게 삐죽 올라간 밀린 머리가 보였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부친이 그웬과 눈을 마주쳤다. 허공에서 위이잉 작동중인 클리퍼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꿨다.
 
  '...머리는...또 자라니까요.'
  '...미용실 비용이 얼마랬지?'

 
  미용사가 새로 설정된 언더컷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어준 뒤에도, 그웬은 부친에게 다시 머리를 맡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경계부를 다듬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그웬의 언더컷 라인이 2cm 정도 위로 올라간 건 사소한 부산물 같은 거였다. 둘 사이가 날로 서먹하고 어색해져 가는 사이에도 2주에 한 번, 일요일 저녁이면 그웬은 거울 너머로 집중한 얼굴의 부친이 클리퍼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긴 머리칼을 틀어올리는 호비의 왼손이 한층 단단하게 그웬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날을 바싹 붙이면서 본인도 몸을 기울여 머리 위로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나직하게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보이는 건 호비의 얼굴이 아닌 그의 풍성한 머리칼이었다. 망부석이라도 된 양 뻣뻣하게 굳은 그웬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클리퍼가 뒷머리에 닿았다. 시원시원하게 밀던 아까와 달리 여러 번에 나눠서 경계부를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클리퍼의 궤적에 그웬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머리 뒤의 감각에 집중했다. 머리를 붙든 호비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 특유의 체취, 스파이더 센스를 간질거리게 만드는 동질감 같은 게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미용사나 부친에게 머리를 맡길 땐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생판 남에게 등 뒤를 맡기는 느낌이 생경했다. 툭, 툭 하고 정교한 작업을 하듯 섬세하게 경계부를 정리하는 호비 역시 집중하느라 숨을 참는 것 같았다. 달칵, 하고 클리퍼 전원이 꺼지고, 얕게 숨을 내쉰 호비가 뒤로 물러났다. 그웬도 그제서야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클리퍼 대신 큼직한 브러쉬를 집어 든 호비가 그웬의 목덜미를 툭툭 털어냈다.
 
  "그거 미술용 붓 아냐?"
  "정확히는 페인트용 붓이지. 그래피티용. 걱정 마. 새 거야."
  "..."
 
  그는 귀퉁이에 금이 간 낡은 거울을 들어 그웬이 볼 수 있게 뒷모습을 비쳤다. 제법 깔끔하게 정돈된 민머리가 보였다. 그웬은 손을 들어 까끌거리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 뒤로 2주 뒤, 또 2주 뒤, 호비와 그웬 사이에 정기적인 약속이 생겼다. 그가 늘 호비의 지구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스의 우주, 혹은 본부에 있는 임시 숙소, 가끔은 마고와 함께 밤새 영화를 보다가 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라도 세수하고 나서 습관처럼 까끌한 뒤통수를 만지다 보면 슬슬 때가 됐구나, 하고 호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은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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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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