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라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웬은 난생 처음 보는 보트 하우스 앞에서야 깨달았다. 폭이 좁은 운하 사이에 빠듯하게 정박해둔 보트는 집으로 치면 침실에 부엌만 겨우 딸려 있을 정도 크기였지만, 외관에서 꼼꼼하게 관리해온 흔적이 느껴졌다.

 

  "여기에...산다고?"

  "정식 주소는 없지만, 나름 있을 건 다 있어. 맥주 마실래?"

 

  갑판 위에 훌쩍 뛰어 올라선 호비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엉거주춤 배 위에 올라서자, 호비는 문 옆에 쌓여있는 박스 틈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술한 보안이네,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안에 들어서자 딱히 누가 뭘 훔치러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스등에 불을 켜 안을 밝힌 호비는 입구에 그웬을 우두커니 세워둔 채 난장판인 거실을 가로질러 쪽문으로 사라졌다.

 

  무질서 속의 조화라고 해야할까. 거실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작은 공간은 한가운데 잡동사니에 잠식된 소파가, 한쪽 벽에는 LP 음반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그래피티에 뒤덮인 벽 위로는 공연 포스터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쪽문 너머가 부엌인 걸까. 큰 키에 맞지 않는 작은 문을 반쯤 허리 숙여 들어갔던 호비가 맥주병 두 개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가 들어오긴 하는 모양인지, 받아든 맥주병은 차가웠다. 호비는 소파 위의 잡동사니를 들어다가 한쪽 구석에 그대로 쌓아 놓고는 그웬에게 앉으라며 툭툭 손짓했다. 정작 자신은 주변에 쌓아둔 상자 하나를 간이의자 삼아 맞은 편에 자리 잡고서.

 

  "여긴 어디야? 지구-138이랬지?"

 

  이제 와서 묻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신비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주였다. 제스나 마일즈의 지구는 그웬이나 마일즈의 지구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미겔의 누에바 요크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미래 도시였다면, 이곳은 시대 배경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음에도 흑백 필터를 두른 것 같은 감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홀로 핑크색, 회색, 파란색을 오가며 번쩍이는 호비가 더 도드라진다고 해야하나. 저것도 거미 능력 중 하나인 걸까?

 

  "여기는 영국, 독재자 오지 오스번의 감시 하에 모든 게 통제되는 거지 같은 나라지. 나는... 너도 익히 알 방사능 거미에게 물렸고, 이 지구의 하나뿐인 스파이더맨으로 파시스트 개새끼들하고 맞서 싸우는 중이고. 밴드 활동 역시 반체제활동의 일부야. 호비 브라운일 때는 그리 잘나가진 않았는데, 스파이더 펑크는 제법 효과가 좋더라고. 너도 여기선 가면을 쓰는 쪽이 맨얼굴로 다니는 것보다 위험하단 거지."

  "와, 초면에 나를 반정부 공연에 냅다 들이밀었다는 거네, 그럼?"

 

  영국 맥주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 반쯤 비우고 내려놓은 그웬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스파이더맨이 어디서든 정부와 사이가 좋은 일이 있긴 하냐만은, 상당히 위험한 곳에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포털을 열어 돌아갈 수 있다손 쳐도.

 

  "그래도 재밌었잖아? 이대로 우리 드러머 할래?"

 

  씩 웃는 얼굴이 묘하게 얄밉다. 겨우 한 번 공연 해놓고 뻔뻔하기는. 제법 느낌이 좋은 멤버들이긴 했다. 문제는 그웬이 아직 어딘가 발을 붙일 마음이 없다는 것 뿐. 애초에 남의 지구기도 하고.

 

  "재미는 있었어. 가끔 객원 공연 정도라면.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 정도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호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이한 사람이다. 어떻게 딱 그 순간에 그웬을 발견한 걸까. 일종의 스파이더 센스였을까? 호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웬은 지금쯤 본부의 어두침침한 개인 숙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으리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신세를 졌다고 해둘까.

 

  무뚝뚝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호비는 일단 입을 열면 말이 많았다. 누가 스파이더맨 아니랄까봐. 그웬과 달리 그는 딱히 그웬에게 궁금한 게 없는지 사적인 질문이라곤 일절 던지지 않았다. 대신 대뜸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묻거나 처음 무대공연에 섰던 순간의 실수담 같은, 뮤지션끼리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펑크는 그웬에겐 다소 낯선 장르였지만 음악은 쉽게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맥주와 마른 육포를 곁들인 시덥잖은 수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어느 새 무거운 눈꺼풀로 꾸벅꾸벅 조는 그웬을 발견한 호비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자러 가, 그웬디. 욕실 거울 뒤에 새 칫솔 있으니까 꺼내 쓰고, 씻는 사이 침대 준비해둘게."

 

  그웬은 호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 여기 침실이라고 할 만한 방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기, 그 침대라는 게 말이야..."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는 그웬이 호비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초면의 또래 남성이고, 분위기에 휩쓸려 이렇게 오긴 했지만 뭔가 그 이상을 기대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웬의 의사를 거슬러 뭔가를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혹여라도...

 

  "난 여기서 잘 거야.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매트리스가 좀 꺼지긴 했는데 그래도 소파보단 나을걸."

  "어? 아냐, 내가 손님인데 그럴 순 없지. 내가 소파에서 잘게."

 

  신사다운 제안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웬은 손사래를 쳤다. 호비 말마따나 소파에서 자나 침대에서 자나 큰 차이는 없을 듯 싶지만, 주인을 내쫓고 침대를 차지하는 건 지나친 실례였다.

 

  "무대 땜빵해준 답례라고 생각해. 네가 뭐라든 난 여기 자리 잡았으니 알아서 해."

 

  호비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난 그웬을 슬쩍 밀어내고는 소파 위에 몸을 날려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웬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더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호비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공연 후의 아드레날린과 알콜의 혼합작용으로 그는 상당히 기분 좋게 나른한 상태였다. 지금 잠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웬은 소파에 드러누워 종이쪼가리 위에 뭔가를 끄적이는 호비를 내버려두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욕실문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작은 보트하우스에 걸맞게 모든 게 딱 최소한으로만 갖춰진 욕실이었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샤워부스,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것 같은 변기, 빛바랜 거울이 달린 찬장과 군데군데 이가 바진 세면대. 거울문을 열자 양치컵에 각양각색의 칫솔이 서너 개 꽂혀 있고, 구겨진 포장 안에 새 칫솔도 두어 개 담겨 있었다. 묵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칫솔을 구분하기 위해 스티커를 붙여두거나 매듭을 달아놓은 흔적도 있었다. 단골손님도 있다는 뜻이겠지.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은 그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호비의 침대는 그 큰 덩치를 구겨넣기엔 다소 빠듯할 것 같은 크기였지만 그웬에겐 딱 적당해 보였다. 손님용인지 다소 사용감은 있지만 새로 세탁한 티가 나는 시트와 담요가 깔려 있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박스티셔츠와 조거 팬츠 한 벌과 함께. 딱 몸을 눕힐 공간만 빼고는 거실만큼이나 난장판인 방이었다. 벽에 붙은 악보, 그래피티 아이디어가 그려진 낙서 스케치, 문고리에 걸어둔 외출용 재킷.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 그 방에서, 그웬은 자신이 일면식 없던 낯선 사람 집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 즉흥적인 모험이라.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자 의식적으로 미뤄뒀던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동안엔 미처 몰랐는데, 조요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배의 진동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여름 휴가지에서 정원 해먹에 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익숙치 않은 느낌에 멀미가 날 법도 했지만, 새로운 일을 겪고 난 흥분과 피로 때문인지 금세 잠이 쏟아졌다. 수마가 밀려드는 가운데, 살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변주한 건가? 귀엽네. 미소 띤 얼굴로 잠든 그웬에게, 아주 오랜만에 악몽 없는 깊은 잠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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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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