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서 하루를 보내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돌아가자, 신기하리만치 이전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의 위치도, 상황도,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음에도, 바다 위를 부유하는 부표 같던 그웬의 발에 무게가 실렸다. 호비는 공연 기회가 있으면 또 연락하겠는 말과 함께, 언제든 그웬이 원한다면 다시 와도 좋다는 암시를 남겼다. 갈 수 없는 곳들과 있고 싶지 않은 곳들 사이에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런 그웬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제시카 드류였다.

 

  "호비네 지구에 다녀왔다면서?"

 

  안부를 묻듯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그웬은 순간 긴장했다. 혹시 안 되는 거였나? 미겔이 싫어하려나? 제스한테라도 미리 말을 했어야 했나? 물론 호비에게 거의 납치당하듯 끌려간 상황을 고려하면 미리 허락을 구할 틈은 없었겠지만, 뒤늦게야 걱정과 후회가 스물스물 올라오려는 찰나, 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골칫덩이 녀석, 평소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웬일이래? 오죽 신기했으면 별의 별 거미들이 다 그 얘기만 하던데. 재밌었어?"

  "어...네. 공연에 드러머가 급히 필요했다더라고요. 반정부주의 공연인 줄은 모르고 갔지만..."

 

  제시카는 그웬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호비 브라운이? 드러머 대타를 찾겠다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그웬이야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양한 거미들 개개인을 잘 알 리가 없었으나, 본부 주축 멤버로 오래 묵은 제시카는 이게 그렇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굳이 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젊은 친구들이 우정을 쌓겠다는데...

 

  "모처럼 안면을 튼 거미도 생겼겠다, 이제 슬슬 임무에 나서도 되겠는데? 단순한 임무 중에 페어로 맡길 만한 게 있나 한 번 찾아볼게."

 

  뭘 시키려 해도 저 내키는 대로만 구는, 스파이더캣보다도 말을 안 듣는 스파이더-펑크를 다룰 목줄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예상에, 제시카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뭐라 속단할 단계는 아니겠지만,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

 

  제시카의 말대로, 그웬은 새 임무를 몇 번 받게 됐다. 빌런이 휩쓸고 간 현장 뒷정리라든가, 변칙점 흔적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단순한 임무부터 시작해, 자기 차원을 방어하는 거미인간들의 사이드킥 역할로 업그레이드 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비는 함께 배정 받은 첫 임무에만 얼굴을 비치더니, 임무가 간단하다 싶을 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비가 오지 않는다며 라일라에게 연락하자 라일라는 '걘 원래 그래. 깍두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혼자 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개 그웬 혼자서도 해결 가능한 수준의 일이었지만, 간혹 상황이 예상대로 안 풀린다 싶을 때면 호비는 귀신 같이 알고 도와주러 왔다. 스파이더 센스가 이런 식으로도 작용을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웬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걸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 날은 단둘이서 임무에 나선 날이었다.

 

  "너는 그...막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날 보질 않네?"

 

  언젠가 호비가 썼던 표현을 인용한 질문에, 호비는 눈썹을 비죽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막 제압한 지구-1988 출신의 라이노를 통제 포드에 가둬놓고 천장에 구멍이 난 교회 건물 꼭대기의 앙상한 철골 끝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씹는 중이었다.

 

  "그웬 스테이시, 네 우주에서도 죽었다며. 엄청 전설적인 드러머였다던데. 팬이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그건?"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의 호비는 맨얼굴일 때보다 오히려 표정이 다채로웠다. 눈구멍이 비대칭적으로 쭉 늘어난 것이 그웬의 질문을 영 탐탁치 않아 하는 듯 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린 걸까? 그웬은 지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제긴 했다.

 

  "리리가 알려줬어. 내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면서. 친척 아니냐더라. 사진 보니까 꼭 닮진 않았지만. 이름도 비슷하잖아, 마침. 그웬디라니, 너도 센스가 참."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펑크 드러머였으며, 그야말로 무대의 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리리가 보여준 옛 공연 영상 속엔 음악 취향만 다를 뿐 그웬이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뮤지션이 그 안에 있었다. 듣자하니 호비처럼 노골적인 반체제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아나키스트 세력에 상징적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죽은 걸까. 호비는 그 자리에 있었을까? 그웬이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머릿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웬의 생각을 끊어낸 건 호비의 대답이었다.

 

  "이름을 그대로 대면 너무 티나서 그런 거긴 한데, 그거랑은 별개지. 애초에 너와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웬디."

 

  단호한 대답. 호비는 입부분만 끌어올렸던 마스크를 쭉 잡아당겨 벗어버렸다. 진지한 두 눈이 그웬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도 알고서 드럼 치냐고 물어본 거 아냐?"

 

  그웬은 사실 호비가 그날 처음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거미들 사이의 다중우주적 상호작용이 빚어낸 우연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호비를 알면 알수록 그가 고작 드러머 대타를 구하겠다고 본부에 냅다 발을 들였을 리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음험하게 그웬 몰래 그를 관찰했을 거란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그건 뭐... 확률적인 문제지. 캐논 이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들은 잘 안 달라지니까."

 

  확률이라. 어쨌든 자신은 '그' 그웬 스테이시긴 하다는 거지. 그웬은 다른 우주의 그웬 스테이시들이 어떤 인물인지 딱히 알려 하지 않았다.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쌓여있는 시체 더미를 들춰 보는 느낌이라 꺼림칙하다고 해야할까.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가 제대로 확인한 첫 번째 그웬 스테이시였다. 적어도 그웬이 좋아할 수 있는 버젼의 모습인 건 참 다행이었다.

 

  그웬은 굳이 이렇게 물어서 자신이 어떤 답을 얻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호비는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의 흔적을 따라 자신을 찾은 걸까? 다른 스파이더맨처럼 그웬 스테이시의 연인은 아니었을지라도, 닮은 모습에서 뭔가 위안을 얻고 싶었다거나.

 

  "날 봤을 때... 기분 이상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가면을 벗은 호비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드라마틱한 표정변화가 있었다.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린 호비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웬디, 내가 미겔 오하라랑 닮았어?"

  "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맥락 없이 던져진 호비의 질문에 그웬이 대번에 정색했다. 호비는 샌드위치를 먹느라 입 위로 끌어올렸던 그웬의 마스크를 마저 쭉 끌어올려 벗겨버렸다. 그웬의 새파란 눈이 호비의 깊은 갈색눈을 마주봤다. 호비의 눈이 흥미로운 주제를 찾은 것마냥 즐겁게 반짝였다.

 

  "그렇지? 이놈의 다중우주니 뭐니 하는 거 말이야,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들을 자꾸 겹쳐 보려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가면 너나 나 같은 '별종' 몇몇을 빼면 반절이 피터 파커인데, 그놈들한테 너네 다 같은 사람 아니냐고 하면 그녀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소위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는 놈들의 하늘을 찌르는 자아를 깨달으면 너도 놀랄걸."

 

  그웬은 그 말에 본부에서 만난 수많은 피터 파커를 떠올렸다. 딱 한 번, 가면 아래 얼굴이 가려진 와중에도 지나치는 순간 강렬한 느낌이 온 적이 있었다. 이 애는 '그' 피터구나. 다른 피터들은 이따금 향수를 자극하긴 했어도 그웬의 피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 그웬은 그 가면 아래 있을 얼굴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그' 피터 파커는 그웬과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그웬을 잠깐 본 뒤, 알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갔다. 그뿐이었다. 어느 지구의 스파이더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웬은 감히 알아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는 취미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리 비슷한 캐논 이벤트를 공유하고 비슷한 특성을 공유해도 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중우주의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묶는다면, 너는 차라리 피터 파커에 가깝겠지. 혹은 나나 미겔 오하라에 가깝든가. 하지만 네 말대로, 그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지."

 

  호비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털었다. 그웬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겔 오하라와 호비 브라운이라. 두 사람은 같은 '스파이더맨'으로 묶는 것조차 모욕이라 할 만한 조합이긴 했다.

 

  "네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웬 스테이시일지언정, 너는 추락하지도, 스러지지도 않는, 스파이더우먼이잖아. 그건 오직 너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야. 누구도 그 위에 다른 걸 겹쳐놓을 수는 없어. 설사 너 자신일지라도."

 

  답지 않게 길게 열변을 토한 호비는, 자신의 대답에 그웬이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호비는 그웬의 머릿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추측할 정도로 그웬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가, 그의 섬세한 내면을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맞아. 나는 스파이더우먼, 그웬 스테이시이야. 단 '하나' 뿐인."

 

  단 하나 뿐인. 그 말은 참 외로운 동시에,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모르지, 또.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는 다중우주 중 어딘가에는 또 다른 그웬 스테이시가, 벤 삼촌이든 메이 숙모든 메리 제인이든 누군가 소중한 이를 잃고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우먼이 되는 우주가 있을지도. 허나 그런 것들이 '이' 그웬 스테이시를 퇴색시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어느 우주에서 추락하고 부서지고 목숨을 잃는 그웬 스테이시가 있어도 그가 결코 꺾이지 않는 것처럼.

 

  "호비."

  "응?"

  "고마워."

 

  똑바로 마주친 푸른 눈은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있지만 결코 눈물을 떨구진 않는다. 호비 앞에서 이 정도 모습을 보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변화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호비 브라운은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툭 하고 덮었다. 그의 드러머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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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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