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der Man:Across the Universe'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3.08.13 Intimacy (4) 4
  2. 2023.07.24 Intimacy (3)
  3. 2023.07.16 Intimacy (2)
  4. 2023.07.15 Collateral
  5. 2023.07.09 Intimacy (1)

*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 머무는 생활은 점차 익숙해졌다. 제 집 같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주 놀러가 묵는 친구집 같은 느낌? 첫날 썼던 그웬의 칫솔에는 이제 호비가 준 홀로그램 거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호비는 마치 길고양이를 챙기듯 그웬을 방치하며 돌봤다. 언제 온다간다 말도 없이 들락거리는 그웬을 위해 여분의 침대시트를 늘상 갖춰두고, 냉장고에는 언제나 보관기간이 긴 간편식 종류가 두어 개 들어 있었다. 소파에서 자겠다는 강력한 요청을 몇 번 거절당하고 난 뒤로는 호비의 흔적이 밴 침대에서 자는 데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웬은 호비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쉽게 정할 수 없었다. 피터 이후로, 그웬이 마음을 터놓고 친구가 됐던 건 마일즈가 유일했다. 허나 마일즈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고, 위기와 모험을 넘나드는 사이에 싹튼 감정이 그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에게 느낀 동질감이었을지, 우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는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대로 지구-1610에 머물며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웬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쉽게 담을 쌓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 대신 한 번 담을 허물고 나면 한도 없이 자신을 내주는 성격이라는 것도. 그런 그에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딱 편안할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곁을 내주는 호비의 존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웬에겐 굳이 자세히 물어 그들의 관계를 정립할 용기가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기꺼이 이 느슨한 줄다리기가 주는 안정감을 즐기기로 했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비의 밴드와 깜짝 객원 공연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좁아터진 호비의 보트에 밴드멤버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하게 뒷풀이를 하고, 다음 곡과 게릴라 콘서트를 벌일 장소를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도 그웬은 호비와 한참을 더 떠들다 잠자리에 들었다. 갓 구운 토스트의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일어나 샤워부터 마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말리던 그웬은 문득 수건으로 몇 번 두들기는 걸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길어진 머리를 인지했다.
 
  "여기도 미용실 같은 게 있나?"
 
  질문을 던지고 나니 꽤 바보 같은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머리 자르는 곳이 없을 리가. 욕실 문 너머로 소파 앞에 토스트 접시를 내려놓던 호비가 슬쩍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머리 자르게?"
  "아니, 옆머리가 제법 길어져서..."
 
  흘러내린 윗머리를 손으로 살짝 들추어 보이자 이제는 언더컷이라 부르기 애매한 길이가 된 애매한 옆머리가 드러났다. 문 사이로 빼꼼 들여다본 호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은 젖은 수건을 목 뒤에 두르고 걸어나와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호비는 그웬이 나올 시간에 딱 맞춰서 마시기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준비하는 재주가 있었다. 과연 영국인이라 이건가.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는 그웬에게 호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가 밀어줄까?"
  "어?"
  "클리퍼는 케빈한테 빌려오면 돼. 근처에 바버샵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긴 한데, 걔보단 내가 잘하거든."
 
  정작 본인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한 게 언젠지 짐작도 가지 않는 꼴을 하고서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여차하면 제시카네 집에 가서 클리퍼를 빌릴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지만, 그웬은 다소 미심쩍어 하는 얼굴로 고민했다. 밑져야 본전이고 실패해도 머리는 다시 자라는 거니까. 안될 것도 없지, 뭐.
 
  마침 바쁜 일정도 없었다. 최근 그웬은 아무 지구에서든 간단하게 할 만한 알바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서 숙식을 제공한다곤 해도 자잘한 생활비가 안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친구들의 선의에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식당 접시닦이 알바든 바쁜 주말 저녁 배달 알바든 - 스파이더우먼이 배달해준 피자를 드셔보세요! -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그날그날 먹고 사는 건 처음에만 좀 힘들었지 금방 적응이 됐다. 본부 임무 짬짬이 알바하랴 호비네 밴드와 공연 준비하랴 제법 바쁘게 지내던 중,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 싶어서 아무 계획 없이 호비의 보트에서 뒹굴거리겠다고 마음 먹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욕실 거울 앞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은 그웬 뒤에서 호비가 부산스럽게 도구를 늘어놓았다. 케빈이라는 친구한테 함께 빌린 건지 염색약이 덕지덕지 묻고 끄트머리가 헤진 미용가운을 그웬의 목 둘레에 두르고, 클리퍼에 남은 이전 사용자의 흔적을 작은 붓으로 털어내고, 클리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원을 잠깐 켜보는 일련의 과정을 그웬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많이 해봤나 봐?"
  "어어. 여긴 뭐든 자급자족하는 녀석들 뿐이니까. 너 같은 얇은 금발은 별로 만져본 적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 라니 남의 머리를 두고 제법 불안한 말을 한다. 아무렴, 미숙하다 한들 우리 아빠만 할까. 그웬은 엉망진창이었던 조지 스테이시의 클리퍼 실력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머리는 또 자라는 거니까.
 
  기타리스트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이 그웬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헤집었다. 밀면 안되는 부분을 따로 틀어올리면 좋을 테지만 당연하게도 호비의 집에 집게 따위는 없었다. 좀 더 머리가 길어지면 머리끈으로 묶어둘 수라도 있을 텐데. 조용한 가운데 딸깍 하고 전원 켜는 소리, 이어서 위이잉 하는 익숙한 클리퍼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그웬의 뒤통수를 집중해서 노려보느라 따로 눈을 마주쳐 오지 않았다. 정말 익숙해 보이네. 그 무심한 얼굴에 되레 그웬 자신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한다."
  "...응."
 
  목덜미 부근에 선뜩한 느낌과 함께 위잉거리는 날이 접촉해왔다. 호비는 머리를 틀어올린 왼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살짝 앞으로 밀며 클리퍼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날을 위로 밀어올렸다. 제법 자란 뒷머리가 바닥으로 사락거리며 떨어졌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집중한 눈을 훔쳐봤다. 연주에 심취해 있을 때 같은 표정이네. 그웬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집중해야 할 곳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처음 해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는 꽤 능숙하게 클리퍼를 다루었다. 어쩌면 그냥 손으로 다루는 건 뭐든 잘 하는 걸지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린 시간이 무색하게 클리퍼가 몇 번 위아래를 오가자 얼마 되지 않는 언더컷 부분이 금세 정돈됐다. 몇 번인가 멈추어 긴 머리 부분과의 경계를 확인하고 목 피부가 드러나는 끄트머리 부분에서 날길이를 바꿔 잔머리까지 꼼꼼하게 손질하는 데도 시계를 보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 했다. 그웬은 그 시간 내내 호비의 집중한 얼굴을 관찰했다.
 
  "잘하네. 익숙하다더니."
  "언더컷은 처음이긴 한데, 이 정도는 남자들은 대개 익숙하지."
 
  손질이라곤 영영 한 일 없는 것 같은 머리로 둘러대는 말이 뭔가 우스웠다.
 
  "잘하는 줄 알았으면 더 짧게 할걸 그랬나? 1mm로?"
  "3mm가 제일 보기 좋아. 금방 자란다 싶으면 자주 밀면 되니까."
 
  자기가 자주 밀어준다는 말인 걸까. 그웬은 흘러가듯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이 위잉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끝났어?"
  "아니, 경계 부분 아직 남았어. 지금부터는 움직이면 안 돼."
 
  별 말 아닌데도 그웬은 작게 심호흡 하고는 그대로 흡 하고 숨을 죽였다. 호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경계 부분은 자칫하면 멀쩡한 머리를 왕창 뜯어먹을 위험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아버지한테 처음 머리를 맡겼던 날의 경험으로.
 
  '여기는 좀 까다롭구나. 날을 옆으로 기울여 볼까?'
  '음, 미용사들은 그대로 하던데요, 보통.'
  '그 사람들은 전문가잖니. 잠깐, 움직이지 말고. 아, 이런...'
  '...'
 
  잡으면 그대로 붙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부친의 손이 허망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뭉치를 붙잡았다. 그웬은 처참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추었다. 원래 있던 언더컷 라인에서 눈에 띄게 삐죽 올라간 밀린 머리가 보였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부친이 그웬과 눈을 마주쳤다. 허공에서 위이잉 작동중인 클리퍼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꿨다.
 
  '...머리는...또 자라니까요.'
  '...미용실 비용이 얼마랬지?'

 
  미용사가 새로 설정된 언더컷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어준 뒤에도, 그웬은 부친에게 다시 머리를 맡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경계부를 다듬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그웬의 언더컷 라인이 2cm 정도 위로 올라간 건 사소한 부산물 같은 거였다. 둘 사이가 날로 서먹하고 어색해져 가는 사이에도 2주에 한 번, 일요일 저녁이면 그웬은 거울 너머로 집중한 얼굴의 부친이 클리퍼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긴 머리칼을 틀어올리는 호비의 왼손이 한층 단단하게 그웬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날을 바싹 붙이면서 본인도 몸을 기울여 머리 위로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나직하게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보이는 건 호비의 얼굴이 아닌 그의 풍성한 머리칼이었다. 망부석이라도 된 양 뻣뻣하게 굳은 그웬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클리퍼가 뒷머리에 닿았다. 시원시원하게 밀던 아까와 달리 여러 번에 나눠서 경계부를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클리퍼의 궤적에 그웬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머리 뒤의 감각에 집중했다. 머리를 붙든 호비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 특유의 체취, 스파이더 센스를 간질거리게 만드는 동질감 같은 게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미용사나 부친에게 머리를 맡길 땐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생판 남에게 등 뒤를 맡기는 느낌이 생경했다. 툭, 툭 하고 정교한 작업을 하듯 섬세하게 경계부를 정리하는 호비 역시 집중하느라 숨을 참는 것 같았다. 달칵, 하고 클리퍼 전원이 꺼지고, 얕게 숨을 내쉰 호비가 뒤로 물러났다. 그웬도 그제서야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클리퍼 대신 큼직한 브러쉬를 집어 든 호비가 그웬의 목덜미를 툭툭 털어냈다.
 
  "그거 미술용 붓 아냐?"
  "정확히는 페인트용 붓이지. 그래피티용. 걱정 마. 새 거야."
  "..."
 
  그는 귀퉁이에 금이 간 낡은 거울을 들어 그웬이 볼 수 있게 뒷모습을 비쳤다. 제법 깔끔하게 정돈된 민머리가 보였다. 그웬은 손을 들어 까끌거리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 뒤로 2주 뒤, 또 2주 뒤, 호비와 그웬 사이에 정기적인 약속이 생겼다. 그가 늘 호비의 지구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스의 우주, 혹은 본부에 있는 임시 숙소, 가끔은 마고와 함께 밤새 영화를 보다가 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라도 세수하고 나서 습관처럼 까끌한 뒤통수를 만지다 보면 슬슬 때가 됐구나, 하고 호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은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든다.

 

'Spider Man:Across the Uni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timacy (3)  (0) 2023.07.24
Intimacy (2)  (0) 2023.07.16
Collateral  (0) 2023.07.15
Intimacy (1)  (0) 2023.07.09
Posted by 깜장캣
,

*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서 하루를 보내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돌아가자, 신기하리만치 이전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의 위치도, 상황도,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음에도, 바다 위를 부유하는 부표 같던 그웬의 발에 무게가 실렸다. 호비는 공연 기회가 있으면 또 연락하겠는 말과 함께, 언제든 그웬이 원한다면 다시 와도 좋다는 암시를 남겼다. 갈 수 없는 곳들과 있고 싶지 않은 곳들 사이에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런 그웬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제시카 드류였다.

 

  "호비네 지구에 다녀왔다면서?"

 

  안부를 묻듯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그웬은 순간 긴장했다. 혹시 안 되는 거였나? 미겔이 싫어하려나? 제스한테라도 미리 말을 했어야 했나? 물론 호비에게 거의 납치당하듯 끌려간 상황을 고려하면 미리 허락을 구할 틈은 없었겠지만, 뒤늦게야 걱정과 후회가 스물스물 올라오려는 찰나, 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골칫덩이 녀석, 평소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웬일이래? 오죽 신기했으면 별의 별 거미들이 다 그 얘기만 하던데. 재밌었어?"

  "어...네. 공연에 드러머가 급히 필요했다더라고요. 반정부주의 공연인 줄은 모르고 갔지만..."

 

  제시카는 그웬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호비 브라운이? 드러머 대타를 찾겠다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그웬이야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양한 거미들 개개인을 잘 알 리가 없었으나, 본부 주축 멤버로 오래 묵은 제시카는 이게 그렇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굳이 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젊은 친구들이 우정을 쌓겠다는데...

 

  "모처럼 안면을 튼 거미도 생겼겠다, 이제 슬슬 임무에 나서도 되겠는데? 단순한 임무 중에 페어로 맡길 만한 게 있나 한 번 찾아볼게."

 

  뭘 시키려 해도 저 내키는 대로만 구는, 스파이더캣보다도 말을 안 듣는 스파이더-펑크를 다룰 목줄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예상에, 제시카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뭐라 속단할 단계는 아니겠지만,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

 

  제시카의 말대로, 그웬은 새 임무를 몇 번 받게 됐다. 빌런이 휩쓸고 간 현장 뒷정리라든가, 변칙점 흔적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단순한 임무부터 시작해, 자기 차원을 방어하는 거미인간들의 사이드킥 역할로 업그레이드 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비는 함께 배정 받은 첫 임무에만 얼굴을 비치더니, 임무가 간단하다 싶을 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비가 오지 않는다며 라일라에게 연락하자 라일라는 '걘 원래 그래. 깍두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혼자 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개 그웬 혼자서도 해결 가능한 수준의 일이었지만, 간혹 상황이 예상대로 안 풀린다 싶을 때면 호비는 귀신 같이 알고 도와주러 왔다. 스파이더 센스가 이런 식으로도 작용을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웬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걸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 날은 단둘이서 임무에 나선 날이었다.

 

  "너는 그...막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날 보질 않네?"

 

  언젠가 호비가 썼던 표현을 인용한 질문에, 호비는 눈썹을 비죽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막 제압한 지구-1988 출신의 라이노를 통제 포드에 가둬놓고 천장에 구멍이 난 교회 건물 꼭대기의 앙상한 철골 끝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씹는 중이었다.

 

  "그웬 스테이시, 네 우주에서도 죽었다며. 엄청 전설적인 드러머였다던데. 팬이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그건?"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의 호비는 맨얼굴일 때보다 오히려 표정이 다채로웠다. 눈구멍이 비대칭적으로 쭉 늘어난 것이 그웬의 질문을 영 탐탁치 않아 하는 듯 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린 걸까? 그웬은 지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제긴 했다.

 

  "리리가 알려줬어. 내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면서. 친척 아니냐더라. 사진 보니까 꼭 닮진 않았지만. 이름도 비슷하잖아, 마침. 그웬디라니, 너도 센스가 참."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펑크 드러머였으며, 그야말로 무대의 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리리가 보여준 옛 공연 영상 속엔 음악 취향만 다를 뿐 그웬이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뮤지션이 그 안에 있었다. 듣자하니 호비처럼 노골적인 반체제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아나키스트 세력에 상징적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죽은 걸까. 호비는 그 자리에 있었을까? 그웬이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머릿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웬의 생각을 끊어낸 건 호비의 대답이었다.

 

  "이름을 그대로 대면 너무 티나서 그런 거긴 한데, 그거랑은 별개지. 애초에 너와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웬디."

 

  단호한 대답. 호비는 입부분만 끌어올렸던 마스크를 쭉 잡아당겨 벗어버렸다. 진지한 두 눈이 그웬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도 알고서 드럼 치냐고 물어본 거 아냐?"

 

  그웬은 사실 호비가 그날 처음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거미들 사이의 다중우주적 상호작용이 빚어낸 우연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호비를 알면 알수록 그가 고작 드러머 대타를 구하겠다고 본부에 냅다 발을 들였을 리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음험하게 그웬 몰래 그를 관찰했을 거란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그건 뭐... 확률적인 문제지. 캐논 이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들은 잘 안 달라지니까."

 

  확률이라. 어쨌든 자신은 '그' 그웬 스테이시긴 하다는 거지. 그웬은 다른 우주의 그웬 스테이시들이 어떤 인물인지 딱히 알려 하지 않았다.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쌓여있는 시체 더미를 들춰 보는 느낌이라 꺼림칙하다고 해야할까.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가 제대로 확인한 첫 번째 그웬 스테이시였다. 적어도 그웬이 좋아할 수 있는 버젼의 모습인 건 참 다행이었다.

 

  그웬은 굳이 이렇게 물어서 자신이 어떤 답을 얻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호비는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의 흔적을 따라 자신을 찾은 걸까? 다른 스파이더맨처럼 그웬 스테이시의 연인은 아니었을지라도, 닮은 모습에서 뭔가 위안을 얻고 싶었다거나.

 

  "날 봤을 때... 기분 이상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가면을 벗은 호비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드라마틱한 표정변화가 있었다.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린 호비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웬디, 내가 미겔 오하라랑 닮았어?"

  "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맥락 없이 던져진 호비의 질문에 그웬이 대번에 정색했다. 호비는 샌드위치를 먹느라 입 위로 끌어올렸던 그웬의 마스크를 마저 쭉 끌어올려 벗겨버렸다. 그웬의 새파란 눈이 호비의 깊은 갈색눈을 마주봤다. 호비의 눈이 흥미로운 주제를 찾은 것마냥 즐겁게 반짝였다.

 

  "그렇지? 이놈의 다중우주니 뭐니 하는 거 말이야,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들을 자꾸 겹쳐 보려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가면 너나 나 같은 '별종' 몇몇을 빼면 반절이 피터 파커인데, 그놈들한테 너네 다 같은 사람 아니냐고 하면 그녀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소위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는 놈들의 하늘을 찌르는 자아를 깨달으면 너도 놀랄걸."

 

  그웬은 그 말에 본부에서 만난 수많은 피터 파커를 떠올렸다. 딱 한 번, 가면 아래 얼굴이 가려진 와중에도 지나치는 순간 강렬한 느낌이 온 적이 있었다. 이 애는 '그' 피터구나. 다른 피터들은 이따금 향수를 자극하긴 했어도 그웬의 피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 그웬은 그 가면 아래 있을 얼굴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그' 피터 파커는 그웬과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그웬을 잠깐 본 뒤, 알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갔다. 그뿐이었다. 어느 지구의 스파이더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웬은 감히 알아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는 취미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리 비슷한 캐논 이벤트를 공유하고 비슷한 특성을 공유해도 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중우주의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묶는다면, 너는 차라리 피터 파커에 가깝겠지. 혹은 나나 미겔 오하라에 가깝든가. 하지만 네 말대로, 그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지."

 

  호비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털었다. 그웬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겔 오하라와 호비 브라운이라. 두 사람은 같은 '스파이더맨'으로 묶는 것조차 모욕이라 할 만한 조합이긴 했다.

 

  "네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웬 스테이시일지언정, 너는 추락하지도, 스러지지도 않는, 스파이더우먼이잖아. 그건 오직 너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야. 누구도 그 위에 다른 걸 겹쳐놓을 수는 없어. 설사 너 자신일지라도."

 

  답지 않게 길게 열변을 토한 호비는, 자신의 대답에 그웬이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호비는 그웬의 머릿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추측할 정도로 그웬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가, 그의 섬세한 내면을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맞아. 나는 스파이더우먼, 그웬 스테이시이야. 단 '하나' 뿐인."

 

  단 하나 뿐인. 그 말은 참 외로운 동시에,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모르지, 또.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는 다중우주 중 어딘가에는 또 다른 그웬 스테이시가, 벤 삼촌이든 메이 숙모든 메리 제인이든 누군가 소중한 이를 잃고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우먼이 되는 우주가 있을지도. 허나 그런 것들이 '이' 그웬 스테이시를 퇴색시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어느 우주에서 추락하고 부서지고 목숨을 잃는 그웬 스테이시가 있어도 그가 결코 꺾이지 않는 것처럼.

 

  "호비."

  "응?"

  "고마워."

 

  똑바로 마주친 푸른 눈은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있지만 결코 눈물을 떨구진 않는다. 호비 앞에서 이 정도 모습을 보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변화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호비 브라운은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툭 하고 덮었다. 그의 드러머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Spider Man:Across the Uni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timacy (4)  (4) 2023.08.13
Intimacy (2)  (0) 2023.07.16
Collateral  (0) 2023.07.15
Intimacy (1)  (0) 2023.07.09
Posted by 깜장캣
,

*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라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웬은 난생 처음 보는 보트 하우스 앞에서야 깨달았다. 폭이 좁은 운하 사이에 빠듯하게 정박해둔 보트는 집으로 치면 침실에 부엌만 겨우 딸려 있을 정도 크기였지만, 외관에서 꼼꼼하게 관리해온 흔적이 느껴졌다.

 

  "여기에...산다고?"

  "정식 주소는 없지만, 나름 있을 건 다 있어. 맥주 마실래?"

 

  갑판 위에 훌쩍 뛰어 올라선 호비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엉거주춤 배 위에 올라서자, 호비는 문 옆에 쌓여있는 박스 틈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술한 보안이네,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안에 들어서자 딱히 누가 뭘 훔치러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스등에 불을 켜 안을 밝힌 호비는 입구에 그웬을 우두커니 세워둔 채 난장판인 거실을 가로질러 쪽문으로 사라졌다.

 

  무질서 속의 조화라고 해야할까. 거실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작은 공간은 한가운데 잡동사니에 잠식된 소파가, 한쪽 벽에는 LP 음반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그래피티에 뒤덮인 벽 위로는 공연 포스터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쪽문 너머가 부엌인 걸까. 큰 키에 맞지 않는 작은 문을 반쯤 허리 숙여 들어갔던 호비가 맥주병 두 개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가 들어오긴 하는 모양인지, 받아든 맥주병은 차가웠다. 호비는 소파 위의 잡동사니를 들어다가 한쪽 구석에 그대로 쌓아 놓고는 그웬에게 앉으라며 툭툭 손짓했다. 정작 자신은 주변에 쌓아둔 상자 하나를 간이의자 삼아 맞은 편에 자리 잡고서.

 

  "여긴 어디야? 지구-138이랬지?"

 

  이제 와서 묻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신비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주였다. 제스나 마일즈의 지구는 그웬이나 마일즈의 지구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미겔의 누에바 요크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미래 도시였다면, 이곳은 시대 배경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음에도 흑백 필터를 두른 것 같은 감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홀로 핑크색, 회색, 파란색을 오가며 번쩍이는 호비가 더 도드라진다고 해야하나. 저것도 거미 능력 중 하나인 걸까?

 

  "여기는 영국, 독재자 오지 오스번의 감시 하에 모든 게 통제되는 거지 같은 나라지. 나는... 너도 익히 알 방사능 거미에게 물렸고, 이 지구의 하나뿐인 스파이더맨으로 파시스트 개새끼들하고 맞서 싸우는 중이고. 밴드 활동 역시 반체제활동의 일부야. 호비 브라운일 때는 그리 잘나가진 않았는데, 스파이더 펑크는 제법 효과가 좋더라고. 너도 여기선 가면을 쓰는 쪽이 맨얼굴로 다니는 것보다 위험하단 거지."

  "와, 초면에 나를 반정부 공연에 냅다 들이밀었다는 거네, 그럼?"

 

  영국 맥주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 반쯤 비우고 내려놓은 그웬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스파이더맨이 어디서든 정부와 사이가 좋은 일이 있긴 하냐만은, 상당히 위험한 곳에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포털을 열어 돌아갈 수 있다손 쳐도.

 

  "그래도 재밌었잖아? 이대로 우리 드러머 할래?"

 

  씩 웃는 얼굴이 묘하게 얄밉다. 겨우 한 번 공연 해놓고 뻔뻔하기는. 제법 느낌이 좋은 멤버들이긴 했다. 문제는 그웬이 아직 어딘가 발을 붙일 마음이 없다는 것 뿐. 애초에 남의 지구기도 하고.

 

  "재미는 있었어. 가끔 객원 공연 정도라면.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 정도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호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이한 사람이다. 어떻게 딱 그 순간에 그웬을 발견한 걸까. 일종의 스파이더 센스였을까? 호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웬은 지금쯤 본부의 어두침침한 개인 숙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으리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신세를 졌다고 해둘까.

 

  무뚝뚝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호비는 일단 입을 열면 말이 많았다. 누가 스파이더맨 아니랄까봐. 그웬과 달리 그는 딱히 그웬에게 궁금한 게 없는지 사적인 질문이라곤 일절 던지지 않았다. 대신 대뜸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묻거나 처음 무대공연에 섰던 순간의 실수담 같은, 뮤지션끼리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펑크는 그웬에겐 다소 낯선 장르였지만 음악은 쉽게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맥주와 마른 육포를 곁들인 시덥잖은 수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어느 새 무거운 눈꺼풀로 꾸벅꾸벅 조는 그웬을 발견한 호비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자러 가, 그웬디. 욕실 거울 뒤에 새 칫솔 있으니까 꺼내 쓰고, 씻는 사이 침대 준비해둘게."

 

  그웬은 호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 여기 침실이라고 할 만한 방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기, 그 침대라는 게 말이야..."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는 그웬이 호비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초면의 또래 남성이고, 분위기에 휩쓸려 이렇게 오긴 했지만 뭔가 그 이상을 기대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웬의 의사를 거슬러 뭔가를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혹여라도...

 

  "난 여기서 잘 거야.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매트리스가 좀 꺼지긴 했는데 그래도 소파보단 나을걸."

  "어? 아냐, 내가 손님인데 그럴 순 없지. 내가 소파에서 잘게."

 

  신사다운 제안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웬은 손사래를 쳤다. 호비 말마따나 소파에서 자나 침대에서 자나 큰 차이는 없을 듯 싶지만, 주인을 내쫓고 침대를 차지하는 건 지나친 실례였다.

 

  "무대 땜빵해준 답례라고 생각해. 네가 뭐라든 난 여기 자리 잡았으니 알아서 해."

 

  호비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난 그웬을 슬쩍 밀어내고는 소파 위에 몸을 날려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웬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더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호비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공연 후의 아드레날린과 알콜의 혼합작용으로 그는 상당히 기분 좋게 나른한 상태였다. 지금 잠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웬은 소파에 드러누워 종이쪼가리 위에 뭔가를 끄적이는 호비를 내버려두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욕실문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작은 보트하우스에 걸맞게 모든 게 딱 최소한으로만 갖춰진 욕실이었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샤워부스,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것 같은 변기, 빛바랜 거울이 달린 찬장과 군데군데 이가 바진 세면대. 거울문을 열자 양치컵에 각양각색의 칫솔이 서너 개 꽂혀 있고, 구겨진 포장 안에 새 칫솔도 두어 개 담겨 있었다. 묵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칫솔을 구분하기 위해 스티커를 붙여두거나 매듭을 달아놓은 흔적도 있었다. 단골손님도 있다는 뜻이겠지.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은 그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호비의 침대는 그 큰 덩치를 구겨넣기엔 다소 빠듯할 것 같은 크기였지만 그웬에겐 딱 적당해 보였다. 손님용인지 다소 사용감은 있지만 새로 세탁한 티가 나는 시트와 담요가 깔려 있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박스티셔츠와 조거 팬츠 한 벌과 함께. 딱 몸을 눕힐 공간만 빼고는 거실만큼이나 난장판인 방이었다. 벽에 붙은 악보, 그래피티 아이디어가 그려진 낙서 스케치, 문고리에 걸어둔 외출용 재킷.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 그 방에서, 그웬은 자신이 일면식 없던 낯선 사람 집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 즉흥적인 모험이라.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자 의식적으로 미뤄뒀던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동안엔 미처 몰랐는데, 조요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배의 진동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여름 휴가지에서 정원 해먹에 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익숙치 않은 느낌에 멀미가 날 법도 했지만, 새로운 일을 겪고 난 흥분과 피로 때문인지 금세 잠이 쏟아졌다. 수마가 밀려드는 가운데, 살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변주한 건가? 귀엽네. 미소 띤 얼굴로 잠든 그웬에게, 아주 오랜만에 악몽 없는 깊은 잠이 찾아들었다.

'Spider Man:Across the Uni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timacy (4)  (4) 2023.08.13
Intimacy (3)  (0) 2023.07.24
Collateral  (0) 2023.07.15
Intimacy (1)  (0) 2023.07.09
Posted by 깜장캣
,

* 스파이더 맨: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팬픽션

* 호비 브라운 x 그웬 스테이시 커플링

* 이전에 쓴 Intimacy와 아마도 이어질 내용

* 선동과 날조 가득

 

 
  한가한 오후였다. 간만에 햇살이 따사롭게 비쳐드는 오후, 살아있는 화분을 그러모아 얼마 없는 일광욕 기회를 즐기도록 보트 천장에 줄줄이 올려놓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부두에 매어 둔 배는 땅 위에 서 있는 것마냥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호비는 소파에 앉아 빈 악보지를 바닥에 늘어놓고는 기타를 튕기며 부지런히 작곡중이었고, 그웬은 그런 호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호비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하나를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펑크의 역사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웬은 흥미있는 부분만 가려 읽으며 성의 없이 페이지를 넘겨댔다. 실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사이 집중한 호비의 얼굴을 훔쳐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듯 했다. 호비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무릎을 벤 그웬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곡을 쓸 때의 호비는 무대 위에서와 비슷한 눈빛을 했다. 혹은 수트를 입고 적과 맞서 싸울 때 같은 눈을.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갖고 집요하게 끝을 향해 달리는 자의 눈빛. 그의 안에서는 이 모든 게 같은 행위이기 때문인 걸까? 그웬은 어느 새 책은 가슴 위에 엎어 놓고 호비의 얼굴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호비, 키스해도 돼?"

 

  다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호비는 그웬이 ‘밥 먹을까?’ 하는 질문을 한 것마냥 놀란 표정 하나 없이 그웬을 가만히 내려다 보더니, 아주 잠깐 틈을 두고는 짧게 대답했다.


  “안 돼.”

 

  그 짧은 간격은 뭘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지만 빈말은 아니었고, 호비가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그웬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진짜?”
  “응.”

 

  호비는 대답만 마치고 다시 기타와 악보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웬은 호비가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 봐라? 그웬의 손이 호비의 턱끝을 붙잡았고, 강하지 않은 손길로 살짝 당기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그웬을 다시 향했다.


  “호비, 날 좋아해?”
  “어.”

 

  잠시도 고민하지 않은 즉답. 그웬의 심장 속도가 빨라졌다. 언젠가 물어보려던 질문이긴 했다. 너는 왜 내게 잘해줘? 왜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모든 걸 해결해줘?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하게 굴어? 점점이 쌓인 질문은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수렴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넘치기 직전의 물잔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듯, 마음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럼, 키스는 왜 안 된다고 해?”

 

  호비의 눈빛은 참 읽기 어려웠다. 그웬이 아직 그를 잘 모르는 걸까. 혹은 그의 눈빛이 담은 감정이 늘 한결 같아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오직 그웬을 향해서만 유독 다정한 눈빛. 지금도 그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웬을 내려다 보고 있지만, 눈빛만은 언제나처럼 따듯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뭐든지 아는구나, 너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인지, 미안함인지, 당혹감인지. 그웬은 벌떡 몸을 일으켜 호비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내뱉은 말이 스스로를 찌르는 유리조각처럼 돌아와 가슴을 찔렀다. 어째서 여태까지 그 당연한 질문을 못했던가. 그것은 그웬이 그에게 돌려줄 대답이 없었기 때문인 것을.


  “그웬디.”

 

  등 뒤에서 호비가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웬디, 괜찮아. 날 봐.”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이 그웬을 달래듯 다독였다. 그웬이 꼿꼿하게 버티며 등돌리고 있을 기세이자, 작은 한숨과 함께 호비 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웬 앞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그웬과 눈높이를 맞춘 호비가 얼굴을 가린 그웬의 두 손을 붙잡았다.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운 제스쳐를 따라 그웬은 순순히 호비의 손에 잡힌 두 손을 스르륵 내렸고, 붉어진 눈시울로 호비를 마주 봤다.


  “미안해, 호비. 난…”
  “하지마, 그거.”
  “응?”
  “사과 할 일 아니잖아.”


  그웬은 호비의 표정에서 씁쓸함이나 아쉬움, 책망 같은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의 얼굴은 지극히도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네게.

 

  “있잖아, 호비. 내가 아까 말한 건…”
  “키스, 해도 돼?”
  “...뭐?”

 

  너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웬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얼빠진 반문을 흘렸다. 하지만 호비는 진지해 보였다. 그의 큼직한 손이 그웬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웬은 잠시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감았다. 호비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웬에게 닿아왔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입술 위를 달싹인 호비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네가, 안된다며?”
  “나는 안된다고 했고, 너는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다고 한 적 없는데, 나도.”
  “거기서 눈 감으면 괜찮다는 신호인 건 전우주 공통이야, 그웬디.”

 

  장난스레 씩 웃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도 마주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긴장돼 있던 마음이 한결 느슨하게 풀렸다. 동시에 굉장히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웬디, 난 네가 여기 묵고 있는 상황을 착취할 수 없어. 네 마음이 취약해진 틈새를 이용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네가 돌이켜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전히 한쪽 뺨을 붙든 손이 부드럽게 그웬의 얼굴을 쓸었다. 소중한 걸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 모른 척 했던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웬은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방금 키스한 건...나는 언제나 네게 키스하고 싶은데, 지금 정도는 너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고, 아마?”

 

  번지르르하게 잘 말하다 말고 마지막에 말끝을 살짝 흐리는 것이, 어째 그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서 그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느낀 다른 사람의 온기가, 그를 향해 온전히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그웬을 느슨하게 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안 해, 후회.”
  “다행이네.”
  “누가 혹시 널더러 날 착취한다고 하면, 내가 덮쳤다고 해.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아, 우리 그웬디의 명예를 위해 결코 그럴 수는 없지. 그러느니 내가 파렴치한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아.”

 

  극적인 톤으로 과장하는 호비의 태도에 그웬은 그의 어깨를 찰싹 아프게 때렸다. 하여튼 거미들은 말만 참 잘한다니까. 그 기세에 떠밀려 뒤로 털썩 주저 앉은 호비는 뭐가 또 웃긴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호비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웬이 재촉하듯 눈을 치켜떴지만, 그는 그저 하하,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듣지 못한 말이 궁금했지만, 어쩐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은 마주 미소지었다. 평화롭고 한가한 오후였다.

'Spider Man:Across the Uni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timacy (4)  (4) 2023.08.13
Intimacy (3)  (0) 2023.07.24
Intimacy (2)  (0) 2023.07.16
Intimacy (1)  (0) 2023.07.09
Posted by 깜장캣
,

*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드럼 칠 줄 알아?"

 

  호비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실도피하듯 얼떨결에 발을 들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그웬은 생각과 다른 서먹한 분위기에 애를 먹었다. 막연하게 마일즈의 지구에서 만났던 다른 거미 친구들처럼 서로의 외로움과 고충을 이해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를 보는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시선은 뭔가 불편했다. 그웬도 딱히 스스럼 없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지만,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못 볼 꼴을 본 것마냥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걸 깨닫자 그웬도 뭔가 잘못 됐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네 이름이 주는 임팩트가 좀 있어서 말이야."

 

  라일라에게 들은 다른 우주의 수많은 '그웬 스테이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으나, 그웬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뛰게 억울한 일이었다. 지들은 죄다 피터 파커면서! 누가 누굴 보고 피할 상황인데, 지금?

  자신 내면의 소용돌이를 돌보기도 벅찬 마당에 넘쳐나는 피터 파커들의 정신적 고통까지 고려해줄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웬은 차라리 외톨이로 머무는 쪽을 택했다. 미겔은 당장 임무에 나서기엔 그가 너무 미숙하다며 쉽게 일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그웬은 제스의 지구에서 가끔 묵을 때 말고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주어진 임시숙소에서 최대한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홀로 방에만 있다 보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품안에서 눈을 감던 피터의 마지막 숨결. 포탈을 넘기 전 그를 보던 아버지의 눈빛. 아버지에게 애원하던 순간의 절망감. 머릿속을 뒤덮는 생각 속에서 잠들면 꿈에서마저 악몽이 괴롭혔다.

  드럼이라도 칠 수 있으면 나을 텐데. 도무지 안에만 있어선 안될 것 같아서 햇볕이라도 쬐기 위해 실내정원 분수가에 앉은 그웬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들겼다. 호비가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드럼 칠 줄 알아?"

  "뭐?"

  "드럼, 칠 줄 아냐고."

 

  강렬한 생김새의 - 이곳에 와서 천양각색의 수트 변주를 봐온 그웬 기준으로도 - 거미였다. 모히칸마냥 정수리를 따라 삐죽 솟은 파이크와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정신산만한 수트 무늬. 그리고 등에 멘 건...기타? 수트 위에 기타를 메고 있어?

 

  "응...밴드는 없지만."

 

  없다고 해야겠지? MJ도 이제는 그웬이 지긋지긋해졌을 테니까. 그웬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얼굴도 안 비친 지 한참이니 지금쯤 새 드러머를 구했을 터였다.

 

  "잘됐네. 딱 좋은 타이밍이야. 가자."

 

  타이밍? 뭐가? 하고 되묻기도 전에, 느닷없이 포털을 연 거미가 그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 얼떨결에 손을 붙잡자마자 열린 포털 속으로 웹슈터를 쏘더니 그대로 그웬과 함께 몸을 던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슬슬 익숙해져 가는 강렬한 속도감을 품에 안고 포탈 밖으로 쏘아져 나가자, 그곳은 무채색의 낯선 도시였다. 그웬을 데려온 거미와 똑 닮은, 흑백 신문을 얼기설기 오려 붙인 것 같은 낡고 음울한 도시.

 

  "그런 색으로는 좀 눈에 띌 테니까 일단 대충 걸쳐. 좀 크긴 할 텐데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이 선 곳은 희미한 네온사인 불빛이 전부인 어두침침한 골목길이었고, 거미는 여긴 어딘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슥슥 걸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스포츠백에서 후드집업을 꺼내 던졌다.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살피다가 옷을 받아든 그웬이 그제야 말할 기회를 포착했다.

 

  "잠깐만, 너 누구야? 여긴 무슨 지구고?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데?"

 

  가방에서 꺼낸 데님재킷과 청바지로 갈아입고 마스크를 벗은 거미가 그웬을 돌아봤다. 마스크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 건가 싶게 풍성한 레게머리가 퐁 튀어나오는 모양에 그웬은 잠깐 벙쪄서 또 말을 잃었다. 몇 갠지 셀 수도 없는 피어싱에도 묻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 나이는 그웬보다 한두 살 많을 듯 보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법 무서워 보일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웬을 보는 눈빛은 묘하게 따듯했다.

 

  "호비 브라운. 스파이더 펑크라고도 부르는데 선호하는 건 이름 쪽이고. 여기는 지구...뭐더라, 138이던가. 일단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주섬주섬 후드를 걸치고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호비를 따라가며 그웬은 이 상황에 화를 내야할지 당황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이렇게? 스파이더맨으로 위장한 빌런 같은 건 아니겠지, 설마? 스파이더 센스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거니 하며 호비가 안내하는 낡은 철문을 따라 들어서자, 그웬도 익히 아는 쿵쿵거리는 앰프의 울림이 느껴졌다. 공연장이잖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호비! 공연 30분 전인데 이제 오는 게 어딨어?!"

  "드러머 구하러 간댔잖아. 구해왔어."

  "뭐, 진짜? 잘했어! 네가 최고야!"

 

  짧게 깎은 머리를 하늘색으로 탈색한 그웬 또래의 청년은 화내려던 기세를 금세 수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웬을 바라봤다.

 

  "친구, 이름이 뭐야? 시간 얼마 없는데 호흡만 잠깐 맞춰볼래? 셋팅은 다 돼있어!"

  "어, 난..."

  "그웬디. 이쪽은 그웬디야. 가자, 곧 시작이야."

 

  그완다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웬디... 그웬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비를 돌아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 해보이더니 그웬의 등뒤를 툭툭 밀었다. 공연? 지금? 여기서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휩쓸린 것은 여상스럽게 그를 이끄는 호비의 태도였을까, 아니면 간만에 접한 공연장의 두근거리는 울림 탓이었을까. 그 뒤는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합을 맞춰보기 위해 셋리스트를 빠르게 훑고, 속사포처럼 밴드 멤버들을 하나씩 소개 받고, 공연 시간이라는 외침에 부리나케 자리를 잡고 긴장할 새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멤버들은 급하게 합류한 그웬의 흐름에 쉽게 맞춰줄 만큼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다. 호비는 무대에 서기 전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야말로 스파이더 펑크, 라는 걸까. 대체 뭐하는 우주길래 스파이더맨이 수트 차림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건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고요해진 공연장 한가운데, 미뤄놨던 긴장감이 한 순간 몰려드는 느낌에 그웬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때, 재밌었지?"

 

  그새 다시 마스크를 벗은 호비가 그웬에게 다가왔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무대 위의 그는 쉴 새 없이 날뛰며 환호를 유도하고 보컬과 함께 마이크도 잡고 -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다 - 열정적으로 공연을 주도했다. 그래놓고는 공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상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그웬에게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다. 그웬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냅다 자신을 끌고 온 이 배짱 좋은 거미의 독단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대체 뭐야? 누가 공연 30분 전에 처음 보는 드러머를 데려와서 무대에 세워? 내 실력이 어떨 줄 알고?"

  "잘했으니 됐지? 펑크는 원래 그런 거야. 네가 잘 못했으면...뭐 토마토나 몇 개 맞고 말았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웬이 제대로 못했을 거란 가정은 전혀 안하는 듯한 얼굴에 그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그웬은 간만에 드럼스틱을 잡고 난 뒤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한동안 복잡했던 머리도 드럼을 치는 동안 한결 정리됐는지, 정말 오랜만에 잡념 없이 머리가 맑았다.

 

  "공연 대타 구하려고 본부에 왔던 거야?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어, 뭐. 나는 거기 잘 안 가니까. 어쩌다 타이밍이 맞았나 보네."

 

  값어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공연장 밖으로 나서자 어느 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호비의 우주는, 그가 사는 동네는 그웬의 우주와 참 달랐다. 많은 게 낡아 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을 것 같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우주에 와본 건 이걸로 네 번째인가. 마일즈, 미겔, 제스의 우주, 그리고 이곳, 지구-138. 임무 없이 다른 우주에 가 있으면 캐논의 위험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미겔에게 듣긴 했으나 그웬은 모처럼 방문한 다른 우주가 신기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꼭 미겔을 닮은 차갑고 낯선 누에바 요크에는...

 

  "늦은 김에 묵고 가. 돌아가 봤자 재밌는 일도 없잖아. 불쌍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한 피터 뭐시기들만 드글거리는 곳에."

 

  꼭 그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호비는 툭 하고 별스럽지 않은 제안을 던졌다. 질색하는 호비의 표정에 그웬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냅다 이렇게 초대하는 거야? 재워줄 곳은 있고?"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닌데, 묵어가는 애들이 넘쳐나서 손님 맞을 구색은 갖춰놨거든. 급하게 갈 이유도 따로 없잖아?"

 

  분명 오늘 처음 만난 건데도, 호비는 그웬을 익히 안다는 양 말을 던졌다. 섣부른 오지랖에 불쾌감이 들 법도 했으나, 그웬은 어쩐지 누그러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이런 기분으로 그런 곳에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난데 없이 나타나 엉겁결에 기분전환을 시켜준 호비란 거미한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기에.

  그것이 그웬 스테이시와 호비 브라운의 첫만남이었다.

'Spider Man:Across the Univer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timacy (4)  (4) 2023.08.13
Intimacy (3)  (0) 2023.07.24
Intimacy (2)  (0) 2023.07.16
Collateral  (0) 2023.07.15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