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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회색 감시자들은 동틀 무렵 집결했다. 이세야의 지친 눈으로 봐도 장엄한 풍경이었다. 윤을 낸 갑옷 위로 회색과 청색의 단복을 걸친 채, 하늘로 치켜든 창 끝에는 눈처럼 하얀 비단 깃발을 나부끼며 행진하는  50명의 그리폰 기수들. 빛을 가리는 폭풍구름의 방해를 뚫고 새벽빛을 받은 흉갑과 어깨갑주가 장밋빛으로 반짝였다. 기수의 흥분을 감지했는지 가슴줄을 맨 그리폰들도 콧바람을 내뿜으며 의기양양해 했다. 입단식을 거친 녀석들조차도 평소보다 누그러진 태도였다. 여상스런 기침마저 기대감에 찬 쇳소리에 불과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적의 피를 상상하는 양 피거품이 인 부리를 핥는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

  선두에선 개러헬이 짙은 청색의 망토를 두르고 번쩍이는 백금으로 회색 감시자의 그리폰 문장을 새긴 둥근 방패를 든 찬란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그는 중장 갑옷 대신 단순한 투구와 완갑을, 흉갑대신 무두질한 가죽을 둘러 다른 감시자들에 비해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축제에서 행렬이라도 하는 것 마냥 끄트머리가 하얗고 텁수룩한 꼬리를 병사들을 향해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 묘한 생김새의 그리폰은 끝없는 대재앙의 전장을 거치고도 천성을 잃지 않은 듯 했다. 납작하게 접힌 왼쪽 귀가 전장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펄럭였다.

  이세야는 후방에 위치했다. 두건을 푹 눌러쓴 그는 얼룩덜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위로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맨 상태였다. 비행 중 바람에 두건이 벗겨지더라도 아무도 그의 타락의 상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안장 아래 레바스는 잔뜩 짜증난 채,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려하면 귀를 바짝 세웠다가 납작하게 눕히곤 했다. 많은 그리폰이 동요한 것처럼 보였고, 이세야는 기수들의 긴장이 고삐를 타고 그들에게 얼마나 전해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회색 감시자들은 표정을 절제하고 있었지만, 많은 수가 두려움을 품고 있을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타락한 그리폰들은 그렇지 않았다. 놈들의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건 끓는 듯한 분노와 적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고픈 열망 뿐이었다. 이세야는 그 분노가 행동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놈들을 강철같이 붙들고 있었다. 그가 맡은 게 여덟, 칼린이 맡은 게 네 마리였다. 다른 두 명의 혈마법사가 그 사이 여섯 마리의 그리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입단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 그 죄는 다른 누구에게도 짊어지게 할 수 없는, 이세야만의 것이었다 - 그는 타락한 개체를 다루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그들은 구름낀 보랏빛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대재앙으로 멍든 대지로부터 높이 날아오르자, 폭풍구름이 병든 땅을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멀리 안티바 깊숙히, 멸망한 도시가 있는 해안가까지 물러난 상태라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세야가 본 것이라곤 그들이 거쳐온 황량한 흔적 뿐이었다. 아래로 스쳐가는 불에 탄 농장과 무너진 벽은 이름없는 마을의 묘석이나 다름없었다. 죽은 대지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이따금 느리게 흐르며 넓은 둑 사이로 회색빛으로 뭉쳐졌다가 비죽 솟은 바위 사이로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 순간, 아예슬레이그의 사체를 타고오르는 검은 구더기 같은 어둠의 피조물들이 나타났다. 이 정도 높이에선 이세야도 비죽 솟은 오우거의 뿔 외엔 세세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조차도 분별가지 않는 덩어리 속에 유달리 큰 뭉치로만 보였으니.

  그 정도면 조준하기엔 충분했다. 그리폰 부대의 선두에서, 개러헬이 선명한 진홍빛 비단 깃발을 꺼내들어었다. 그의 신호에 맞춰 기수들이 강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갔다.

  화살의 범위 바로 위에서 하강을 멈춘 부대는, 진지를 떠나기 전 개러헬이 나눠준 가방 꺼내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십여 개의 묵직한 진흙 공이 허공을 가르며 어둠의 피조물들 머리 위로 회색빛 우박처럼 쏟아졌다. 도시의 자갈 바닥에 부딪힌 공들은 폭발을 일으켰고, 드워프제 스카이버너가 독구름과 산성 안개를 내뿜으로 대지를 파열시켰다. 빈 상점과 민가들이 무너지며 서까래와 기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일제 사격이었지만, 회색 감시자들이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은 아니었다. 개러헬이 한 번, 이세야와 전술을 논하던 중 그 폭탄들이 얼마나 비싼지 언급한 적이 있었다 - 아주 짧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저만한 폭탄 가격이면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금박에 싸인 루비를 뿌려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비는 이만한 파괴를 일으킬 수 없었다. 분노에 차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의 비명소리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회색 감시자들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놈들을 조종하는 악마의 군주는 아무리 지독하리만치 영악할지언정, 테다스의 정치나 경제구조까지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용을 닮은 어둠의 피조물도, 그의 졸개들도 감시자들이 그러한 공격을 열 번, 스무 번, 천 번씩 반복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에겐 공중의 그리폰과 맞서 싸울 방법이 아무 것도 없었다...악마의 군주 그 자신이 오지 않는 한.

  개러헬은 놈들이 그리할 거라는 데 걸었다. 어둠의 피조물 측에서 회색 감시자들의 포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그 뿐이었으니.

  붉은 깃발이 다시 올라갔고, 감시자들은 앞선 공격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재 사이를 뚫고 강하하여 두 번째 포격을 가했다. 다시 한 번 대지가 독에 물든 불꽃과 함께 폭발했고, 죽어가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울부짖음이 허공을 채웠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몇 채 안남은 민가의 창문으로 탁한 녹색 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놈들의 울부짖음이 좀 다르게 들리는 걸 감시자들은 느낄 수 있고, 공포보단 승리감 어린 그 소리에,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도전에 응해왔다는 걸 안장을 돌리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예슬레이그의 지옥을 뚫고 솟아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악몽에 육신을 입힌 듯한 형상이었다. 그들의 폭탄에서 피어오른 독안개가 놈의 너덜너덜한 검은 비늘 위로 미끄러졌고, 맹독의 망토를 형성하듯 놈의 갑주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세야가 악마의 군주를 본 건 안티바 시티가 무너진 후로 세 번째였고, 놈은 볼 때마다 이전보다 커지고 끔찍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대재앙 자체가 놈에게 힘을 주는지도, 아니면 그저 타락에 병든 그의 상상일 뿐인지도 몰랐다...하지만 악마의 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어닥쳤고, 이어 얼음장 같이 차갑게 영혼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기수의 인도를 잃은 녀석들과, 굳어버린 마법사의 통제에서 잠깐이나마 풀려난 그리폰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혼란 속에 우왕좌왕했고, 당초 계획했던 것처럼 매복 지역으로 후퇴하는 대신 소중한 몇 초의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오직 굽은꼬리의 하얗고 구부러진 꼬리를 따른 몇 마리만이 동맹군이 숨어있는 지점으로 달아났다. 나머지는 혼란에 붙들리고 말았고 -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치명적인 잠깐이었다.

  이세야가 도무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르게, 악마의 군주는 이미 그들 위에 와있었다. 놈의 날개짓에 레바스가 옆으로 밀려났고, 놈은 그들을 지나쳐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감시자들에게 향했다. 검은 그리폰은 분노에 차 울부짖으며 중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둘을 지나친 악마의 군주가 뼈로 된 거대한 턱을 벌리자, 놈의 목구멍 안에 사악한 빛무리가 맺히며 타락한 드래곤의 뿔과 턱 주위 부러진 뼈 경계에 역광을 드리웠다. 그 뒤는 레바스의 비틀거림 때문에 이세야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잠시 뒤 그들이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라곤 칠흑같은 죽음의 암흑을 둘러싸고 휘몰아치는 보랏빛 불꽃과, 들려오는 포효소리 뿐이었다.

  악마의 군주의 불길은 흐트러진 회색 감시자 편대를 뭉텅 베어냈다. 그리폰과 그 기수들은 화톳불 위로 던져진 낙엽처럼 튀어 올랐다. 이세야는 그들의 피부가 일그러지는 것을, 검은 구멍 같은 입이 벌어지는 걸 보았고, 그들이 부푼 구름 아래 기다리고 있을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빙글빙글 떨어져 내리는 것도 보았다.

  마법사 중 한 명은 떨어지는 도중 변화했다. 피부를 뚫고 나온 불길이 흘러내리며 영계에 대한 통제력을 놓쳐버린 - 혹은 굴복해버린 - 그의 육체를 타락의 괴물로 변화시켰다. 이세야는 폭풍 사이로 떨어지는 그 여자의 끔찍한 몰골과 비인간적인 분노로 뒤틀린 얼굴을 아주 잠깐 밖에 볼 수 없었고, 이내 그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눈 앞에서, 불타고 남은 로브자락이 기이할 정도로 느릿하게 휘날렸다.

  그리고 재 섞인 구름 사이로, 그리폰들이 방금 떨어진 타락의 괴물보다도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전부 돌아온 건 아니었다. 대다수라 할 수도 없었다. 추락한 마법사가 통제하고 있던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 중 두 마리만이 돌아왔고, 놈들에겐 이제 복수를 추구하는 걸 막아줄 고삐가 없었다. 이세야는 숨조차 멎은 채 바람 사이로 그들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놈들의 안장은 비뚤게 기울어졌고, 가슴줄을 맨 은색 띠는 악마의 군주의 부식성 숨결에 숯처럼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녹아내린 깃털은 끈끈한 검은 피로 - 그들 자신의,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뒤틀어진 피로 - 뒤덮여 있었고, 이세야는 너덜너덜해진 날개 사이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웅웅거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한 놈은 얼굴을 직격당했는지 두개골 반쪽이 으스러져 그대로 뼈와 검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구름 사이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더 보고 싶지 않을만큼은 봤다고 생각했다.

  그 그리폰들은 불가능을 뚫고, 살아있었다. 그들은 불가능을 뚫고, 날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불가능을 뚫고, 공격에 나섰다.

  악마의 군주는 놈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타락한 드래곤은 불타는 두 눈을 개러헬과 나머지 기수들에게 고정한 채, 대열을 회복하고 매복 지역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그리폰들이 놈의 노출된 복부로 한 쌍의 쇠뇌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그 충격에 한 쪽으로 밀려난 악마의 군주는 공중에서 거의 떨어질 뻔 했다. 피와 검은 비늘이 상처로부터 떨어져내려, 구름 사이를 뚫고 떨어지며 쉿쉿 소리를 냈다.

  그리폰 중 한 마리는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진 듯 했다. 이세야는 녀석의 시체가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봤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복부 아래쪽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잡아 뜯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움켜쥐고 뜯어냈다. 드래곤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몸 전체를 이리저리 흔들어대 그리폰을 떼어내려 했으나, 놈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둘은 몸부림치며 검푸른 구름막을 뚫고 가까운 만 근처까지 떨어져 내려가, 이내 이세야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레바스는 계속해서 날아가 개러헬과 나머지를 따라잡았다. 넓게 펼쳐진 검은 날개가 폭풍을 뚫고 빠르게 날아 남아있는 감시자들과 거리를 좁혔다.

  "어떻게 된 거야?" 개러헬은 목소리가 들릴 거리까지 가까워진 이세야에게 소리쳤다. 그와 다른 비행 부대는 악마의 군주를 갑작스레 붙든 게 무엇인지 보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저 그들이 추적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이 되돌아왔어!" 이세야가 소리쳐 대답했다. "타락한 놈들이. 그리고 공격했어.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가 아직도 싸우고 있나봐."

  "혼자서?" 개러헬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바람을 뚫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악마의 군주와 혼자 대적하고 있다고?"

  "그래." 하지만 이세야의 대답과 동시에, 악마의 군주의 뿔달린 머리가 등 뒤의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드래곤은 격류를 가로지르는 전함처럼, 날개짓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차없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다른 그리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놈이 남긴 상처가 악마의 군주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섬뜩한 느낌이 이세야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마법? 판단은 짧았고, 이내 보랏빛과 검은빛의 힘의 소용돌이가 감시자들 한가운데 생겨났다.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굽은꼬리였다. 얼룩덜룩한 흰색 그리폰은 날개를 접고 그대로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도 똑같이 따라하려 했으나, 나이와 부상이 늙은 그리폰의 반사를 늦췄고, 충분히 빠르게 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그리폰들은 양쪽으로 갈라서려 했다. 위로 타고 오르려는 무익한 시도를 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은 회오리 속에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갔고, 그 안에서 뒤엉켜 서로 부딪혔다. 레바스의 고삐에 절박하게 매달린 이세야는 귀를 찢어놓는 바람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뼈 부딪히는 소리와 갑옷의 마찰음에 움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깃털과 피와 살점이 섞인 회오리 속에서 그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천둥같은 불협화음으로 머릿 속을 울려오는 영계의 악령들의 속삭임조차 그를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의 공포와 고통에 찬 비명을 잠재워주진 못했다.

  악마의 군주는 방향을 잃은 감시자들에게 타락의 불꽃을 날리고 또 날렸다. 이세야의 눈꺼풀 위로 번쩍이는 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서늘함이 그를 휘감아 와 영혼까지 전율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공중에서 버티려 발버둥치는 레바스의 위에서, 악마의 군주를 이렇게나 가까이 둔 채,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혈관 안에서 요동치는 와중에, 영계의 악령들은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 하는 이런 순간에까지 혈마법에 매인 그리폰들을 붙들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놓아버렸다. 붙들려 있던 그리폰 중 세 마리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팽팽히 당겨져있던 빛줄기가 끊어지는 것처럼, 이세야의 머릿 속에서 마법이 무너지며 끝없는 어둠 속에 반짝임이 잠시 맴돌았다. 나머지는 아직 그가 붙들고 있었다.

  풀려난 그리폰들은 불길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에게 몸을 내던졌다. 한 마리는 보랏빛 불길에 휩싸여 날개짓을 할 때마다 불타는 깃털이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한 순간 회오리바람이 레바스의 왼쪽날개를 붙들어 그를 바깥으로 내던졌고, 이세야의 시야에서 악마의 군주가 사라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순간,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깃털들이 텅 빈 허공을 맴돌았다. 가느다란 햇살이 은총처럼 고요를 비추었다. 얼어붙은, 영원 같은 한 순간, 이세야는 스물네 명의 감시자가 있던 자리에서 느릿하게 춤추는 깃털과 햇살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곧이어 다시 악마의 군주가 시야에 들어왔고, 분명 죽었어야 할 순간을 한참 지난 한 쌍의 타락한 그리폰들이 놈과 얽혀 싸우고 있었다. 가시와 비늘과 그을린 깃털과 털로 된 덩어리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놈들은 공중에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간헐적으로 붉고 검은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귀찮은 적을 해치우려는 악마의 군주의 불길과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고대신을 향해 쉴새없이 마법을 쏘아대는 회색 감시자들의 주문이 허공을 갈랐다.

  드래곤의 뒷발톱이 타락한 그리폰의 복부를 꿰뚫었지만, 그 작은 야수는 악마의 군주의 발톱이 놈의 갈비를 쪼개고 안장이 닿는 두터운 가죽을 찢어놓는 순간에도 죽음이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미친듯이 싸워나갔다. 빈 안장이 내팽겨쳐 나갔고,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구부러진 부리로 드래곤의 몸통을 찢어갈겼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머리를 노렸다. 강철빛 그리폰은 드래곤의 이빨이나 죽음의 불길에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의 두 눈에 발톱을 박아넣고 놈의 주둥이를 깊게 긁어놓았다. 공중으로 쏟아져내리는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피에 젖은 한쪽 눈을 가늘 게 뜬 고대신이 강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래곤의 들숨에 그리폰의 깃털이 앞으로 확 일어섰다.

  놈이 숨을 내쉬고난 자리에, 그리폰은 화염의 벽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영계의 악령들이 이세야의 머릿속에서 복수를 외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러 놈들을 잠재웠다. 시야가 한 순간 흐릿했지만, 악령들은 투덜거리며 잠잠해졌다.

  잠시 뒤, 다른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마저 드래곤의 발톱 아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떨어졌다. 놈들에게 벗어난 악마의 군주가 환희의 포효를 하며 발톱에 긁힌 머리를 치켜들고 도망치는 회색 감시자들을 뒤쫓으려 했을 땐 - 그들은 이미 공격태세를 갖춘 뒤였다.

  "감시자들이여! 감시자들이여, 내게로 오라!" 개러헬이 외치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던지 좀 된 것 같았다. 나머지 비행 부대는 그의 뒷편에서 이미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악령들에게 정신이 팔린 이세야는 그 부름도, 등뒤에서 미친듯이 재촉하는 칼린의 신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레바스를 부대로 이끌려 했으나, 제대로 자리를 잡기엔 너무 늦은 뒤였다. 그는 오십여 미터 거리에서 나머지 동료들이 뱀 형상의 숙적을 향해 달려드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강철과 태양에 빛나는 은색의 물결로, 감시자들이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의 활이 폭우처럼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들의 지팡이가 영계의 빛줄기를 뿜어댔다. 구름조차 그들의 진격에 길을 터주는 것 같았고, 빛나는 태양 아래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생각보다 많이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의 아래턱뼈 한 쪽이 통째로 뜯겨나가 선홍색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른쪽 눈꺼풀은 그리폰의 발톱에 찢겨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몸통 부분에 난 상처에서 비늘 아래 속살과 이어진 근육이 반짝였고 피부는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악마의 군주는 쉽게 질 기세가 아니었고, 놈은 아예슬레이그를 가로지르는 감시자들의 진격에 대항해 불길을 쏟아냈다. 진형의 왼쪽 선두를 맡은 그리폰들이 비명과 연기와 함께 회색 나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이세야가 붙들고 있던 몇 마리가 떨어지며 이세야의 주문에 걸린 부하가 한순간 가벼워졌다.

  남은 감시자들은 불길 주위로 선회하여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전 같은 깔끔한 대열은 아니었다. 그들은 널찍히 흩어졌고, 그리폰 한 마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놈의 주의를 흐트러놓으려는 듯 했다. 이세야가 우려할만한 일이라곤 그리폰들이 서로의 경로를 방해하는 일이었지만 - 하늘에 남아있는 기수는 열다섯 남짓, 혹은 그보다도 적어보였고, 동생은 아마 이 정도 숫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리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세 마리의 그리폰이 혼란통에 추락했다. 한 마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숨결에 휩쓸렸고, 다른 한 마리는 얼음 작살에 스치는 바람에 날개가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으며, 마지막 녀석은 이미 회색빛 혜성처럼 하늘 낮은 편으로 떨어진 모습을 이세야가 포착했을 뿐이었다. 놈은 무너진 성당 위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나머지는 하늘 위에 남아 싸워나갔다.

  악마의 군주는 마치 파리떼를 잡는 개처럼 그들을 상대했다. 놈이 하얀 가슴털을 가진 그리폰을 향해 몸을 돌려 그 작은 짐승의 꼬리에서 깃털 한웅큼을 물어 뜯었다. 그 공격으로 드래곤에겐 사각이 생겨났고 한 궁수가 어마어마한 운이든 혹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술 덕이든,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그가 날린 궁수의 창이 악마의 군주의 왼쪽 날개 갈퀴를 꿰뚫고 오른쪽 날개의 관절부분에 깊이 박혔고, 두 날개는 폭풍우에 휩쓸린 돛처럼 무너졌다.

  부상입은 날개 방향으로 회전하며 악마의 군주가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칼린이 옆을 지나쳐가는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레바스 역시 매캐한 연기를 뚫고 놈을 쫓아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야를 가리는 구름을 지나 떨어지는 놈을 쫓아갔고, 아래로 도시의 무너진 성벽을 지나, 만을 내려다보는 까맣게 그을린 공터에 홀로 선 교회탑의 뼈대만 남은 돌담에 다다랐다. 연기와 바다 안개가 탑의 바닥과 근처의 묘지를 둘러싼 장식 울타리 난간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검은 그리폰이 상처입은 악마의 군주를 쫓아 하늘을 가로지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승리감을 느끼기엔 너무 놀라 있었다. 이게 정말로 끝인 걸까?

  그래 보였다. 정말로 거의 그래 보였다. 환희의 고함과 함께 영혼 화살과 감시자들의 회색 깃 화살이 추락하는 드래곤에게 날아들었다. 악마의 군주는 성한 날개 쪽을 접고 탑을 향해 떨어지는 속도를 가속했다. 승리가 코앞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감시자들이 그 뒤를 따라 강하했다.

  연기 아래에서, 시위를 튕기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검은 촉의 석궁 화살이 이세야의 오른편에 있던 감시자의 목을 꿰뚫었다. 남자는 안장에서 뒤로 펄쩍 날아 옆으로 쓰러졌고, 갑옷 앞쪽으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왔다. 이어 석궁 화살 두 개가 그가 탄 그리폰의 노출된 복부를 꿰뚫었고, 하나는 이세야의 왼쪽 종아리 뒤에 꽂혔다.

  그 충격이 그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연기과 스물거리는 안개 사이로 이세야는 앞쪽의 버려진 민가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젠록, 헐록, 깡마른 쉬릭들. 놈들은 빗물 이랑 사이, 풍파에 닳은 가고일 석상 사이에 웅크리고 숨어, 삭아빠진 지붕 사이 틈새로 엿보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감시자들의 전술을 그대로 이용했다. 놈은 날개 부러진 시늉을 하는 어미새처럼 교묘하게 그들을 낚아 매복의 늪에 그들을 빠트렸다.

  레바스가 공포와 분노로 울부짖으며 날아올랐고, 그 주위의 나머지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피해를 겪은 뒤였다. 개러헬을 따라 악마의 군주의 함정으로 달려든 그리폰들 중 여덟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여덟 마리의 그리폰, 열 명 남짓한 기수들 - 너무 적은,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엔 너무나도 적은 수였다. 이세야가 수를 세는 도중에도 치명상을 입은 그리폰 한 마리가 연기와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미친 녀석들을 풀어놔." 칼린이 등뒤에서 말했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굳어진 목소리였지만, 혼돈 속에서도 그의 제안은 침착하게 들려왔다.

  이세야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영계의 또 다른 악령이 아닌 그의 오랜 친구임을 깨닫는데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 얘기인지 깨닫는 데에도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로도 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두 마리로는 상처까지 입혔다. 셋이나 넷이라면 끝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러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입단식을 치른 그리폰은 네 마리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살아남아 돌아간다 해도, 회색 감시자들은 한동안 이만한 규모의 공격을 다시 시도할 수 없을 터였다. 혹은 다시는 불가능 할지도.

  이세야는 주문을 풀어놓았다. 영계 너머 악령들의 속삭임이 잦아들었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남은 고요한 머릿 속과...그리폰들의 울부짖음 속에 남겨졌다.

  그것은 영계 악령들의 장난질이 아니었다. 그 울부짖음만은 진짜였다. 엘프의 귀를 찢어놓는 날선 맹노와 복수에 대한 갈망은 - 마침내 마음껏 날뛸 자유를 얻었다.

  마법의 고삐에서 풀려난 그리폰들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어둠의 피조물의 화살은 놈들에겐 성가신 방해거리에 불과했다. 등에 탄 기수들이 금방 죽어나갔지만, 이세야가 얼굴을 찡그리는 와중에도 그리폰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사격을 뚫고, 안장에 시체를 태운 채, 신을 모독하듯 웅크리고 선 악마의 군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날개의 드래곤은 단순히 부상입은 척만을 했던 것 아닌 듯 했지만, 여전히 어설프게나마 날 수 있었다. 교회탑을 떠나 날아오르는 놈을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들이 뒤쫓았고, 그들은 리알토만의 납회색 물 위를 지나 동쪽으로, 늘어서 있는 버려진 배들 위로 날아갔다. 돛대들이 잎사귀 없는 나무숲처럼 물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악마의 군주는 그 숲으로 도망치기로 한 듯 보였다.

  놈은 반쯤 가라앉은 갤리온선의 위로 뻗은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지상에서든 바다에서든 공격이 닿지 못할 위치였고, 공중에서 노려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위치였다. 예측불가의 형태로 뻗어있는 배들의 돛과 돛대가 움직이는 협곡을 형성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 안개가 충돌의 위험을 더 높여주었고, 설사 공격자가 그 길을 뚫고 놈한테 다다른다 한들, 악마의 군주의 불길에 그대로 노출되는 격이었다.

  불가능해보였지만, 그들에게 남은 기회라곤 이것 뿐이었다.

  "진입할 거야." 이세야는 칼린에게 말했다. "방어막을 준비해줘." 그는 자신의 붉은 깃발을 들어 나머지 기수들에게 자신이 공격을 주도할 것임을 알렸다. 다른 이들이 등뒤로 늘어서자, 그는 레바스를 전진시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검은 그리폰이 스스로 경로를 뚫고 나가게 내버려두고, 다시 영계와 자신을 연결했다. 마법이 손아귀 안을 채웠고, 그는 장력마법을 빚어내 리알토 만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어둠의 피조물 궁수들에게 쏘아보냈다. 헐록과 젠록이 사정거리 안에 들자 이세야는 놈들의 희멀건 죽은 얼굴에 주문을 날려댔다.

  장력장이 젠록과 가고일들을 아예슬레이그의 무너진 지붕에서 쓸어냈다. 불길은 날아드는 헐록의 화살을 허공에서 태워버리고 놈들의 활시위를 오그라트렸다. 뒤를 따르는 그리폰 기수들도 어둠의 피조물을 향해 화염구와 얼음폭풍, 두개골을 깨놓는 돌덩이를 날려댔다. 빈 집 처마에 매달려있던 고드름이 증발하며 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증기 덕에 궁수들로부터 몸을 가릴 수 있었지만, 더 강력한 방패가 될 수 있는 건 장력장 쪽이었다. 이세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칼린이 그들 주위를 둘러싼 반짝이는 푸른색 얇은 구체를 형성했다. 안개를 뚫고 날아든 몇 안되는 화살은 마법 방어막에 부딪혀 부러졌고, 궁수들이 쏟아지는 주문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새 화살을 장전할 쯤이면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놈들을 지나친 뒤였다.

  삐걱거리는 뱃무덤이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바스는 뛰어들 순간을 최대한 기다렸다가, 몸을 뒤틀며 삭구 사이로 파고들어 출렁이는 돛대와 얼어붙어 축 늘어진 돛 사이로 길을 뚫었다. 늘어진 밧줄들이 채찍처럼 날아들어 칼린의 방어막에 부딪혔다. 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삐걱거림이 울려퍼졌고, 금방이라도 돛대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이세야의 솜털이 곤두섰다. 뒤에선 어둠의 피조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나무와 철을 때리는 차가운 바닷물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레바스가 뒤엉킨 밧줄과 돛으로 된 마지막 아치를 빠져나와 악마의 군주의 보루에 도달하자 그 소리 위에 분노한 그리폰들의 울부짖음이 더해졌다. 물에 젖은 뱃머리 끄트머리에 웅크린 거대한 검은 드래곤은 머리 주위를 맴도는 두 마리 그리폰을 향해 보랏빛 불길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난파선들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나무파편더미로 변해있었다. 수면에는 쪼개진 나무파편이 둥둥 떠다녔다.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부러진 날개는 수장된 세 번째 그리폰의 흔적이었다. 네 번째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제대로 역할을 다한 듯 보였다. 악마의 군주가 움직일 때마가 비늘 위에 난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렸고, 놈의 오른쪽 앞발은 따개비가 붙은 뱃머리 아래쪽에 무기력하게 늘어져있었다. 놈의 양날개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가시돋친 등 뒤로 부러져 접혀있는 두 날개는 그 자신의 등가시에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세야가 봐온 모습 중 처음으로, 그 고대신은 죽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를 마침내 집어삼켰고, 녀석이 얼어붙은 닻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자 연기와 반짝이는 얼음조각이 흩날렸다. 마지막 녀석은 귀를 찢는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악마의 군주의 목 뒤로 뛰어올랐다.

  이제 다른 이들도 안개를 지나쳐 들어왔다. 그들은 난파선의 안개숲에서 튀어나온 육을 지닌 유령처럼 보였다. 굽은꼬리 위의 개러헬과 굴뚝새라는 이름의 검은 귀 그리폰에 타고 있는 에델리스라는 젊은 여자 드워프...그 뿐이었다. 남은 건 그들 뿐이었다. 영광스럽던 회색 감시자의 행렬은 전부 사라져, 아예슬레이그의 잿더미 위 어딘가, 혹은 리알토 만의 회색 바닷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었다.

  칼린의 장력마법이 바늘에 찔린 공기방울처럼 톡 터졌다. "끝내버리자." 그가 말했다.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나온 푸른빛이 악마의 군주를 맞추자 연쇄적인 번개가 터져나왔고 - 그가 다시 공격을 날리려할 때, 개러헬이 그에게 소리쳤다.

  "안돼! 감시자가 - 반드시 회색 감시자가 악마의 군주를 죽여야만 해!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거야!"

  "곧 죽을 녀석처럼 보이진 않는데." 칼린은 웅얼거리면서도 지팡이를 당겨 맺혀있던 마법을 잠재웠다. 그 역시 여기 걸린 중요성을 다른 이들만큼 잘 알고 있었다. 회색 감시자가 아닌 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경우, 악마의 군주의 정수는 가장 가까운 어둠의 피조물의 육체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고대신은 다시 태어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새 육체를 가지게 된다. 회색 감시자의 검이 아니고선 그 존재에게 진정한 죽음을 가할 수 없었고 - 그 대가로 그 회색 감시자의 생명을 바쳐야 했다.

  즉 그 역할은 에델리스나 개러헬, 혹은 이세야의 몫이란 뜻이었다.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저 드워프는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이세야는 바로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용맹하고, 다른 이들이 쓰러져나가는 사이 살아남을만큼 운이 좋기도 했지만 - 그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젊어, 신록의 여름 같았다. 그는 제 1 기수도 아닌 제 2 기수로 이 전장에 참여했고, 인간이 앉아있던 게 분명한 피로 얼룩진 납 안장 위에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 에델리스는 이런 전장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만큼 그의 그리폰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듯 했다.

  혹여 가지고 있다 한들...눈앞에서 수많은 죽음의 행렬을 마주한 탓에 그 드워프는 얼음처럼 굳어있었고, 화살을 날리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 화살마다 형편없이 빗나갔다. 혹여 눈먼 화살이 악마의 군주를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세야는 창조주가 그렇게까지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남은 것은 개러헬이나 그 자신 뿐이었다. 그 깨달음은, 달콤쌉싸름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그러쥐고 레바스에게 마지막 돌격을 준비시키려 했으나 - 동생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추었다.

  "너무 좁아." 개러헬이 외쳤다. "서로 부딪힐 지도 몰라. 나 혼자 들어가야 해."

  "하지만-."

  "그래야만 해." 그는 이미 이세야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고, 삭구 옆에 선 둘의 그리폰끼리 날개가 맞닿아 있었다. 하얀색과 까만색, 그리고 까만색과 하얀색이.

  개러헬은 어깨 너머로 미소지어 보였다. 아예슬레이그 어드메에서 투구를 잃어버렸는지, 그의 금발머리가 안개낀 바람결에 느슨하게 흩날렸다.

  "아마디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고, 내 무기는 감시자들에게 전해줘."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세야 누나, 자신에게 좀 더 친절해져."

  이어 굽은꼬리가 얼룩무늬 하얀 날개를 펄럭였고, 그 엘프와 그리폰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단단한 돛대 위에 웅크리게 했다. 그리폰의 목깃이 곤두섰다. 그 역시 전투에 나서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전투는, 다른 배의 삭구 위에 자리잡은 에델리스와 렌의 것이 아닌 것만큼,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의 군주의 사정거리 밖이었고, 그들 자신의 무기 역시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남은 역할은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라, 엘프는 기도했다. 물결에 삐걱거리는 난파선의 소음은 그 자신의 심장소리만큼도 크게 들리지 않았다.

  개러헬이 도착한 순간, 악마의 군주는 마침내 마지막 그리폰의 목을 부러뜨려 그 몸뚱이를 뒤집힌 갈레온선의 선체 위에 내동댕이쳤다. 피와 비늘 붙은 찢어진 살점이 드래곤의 주둥이 아래로 젖은 사자 갈기처럼 늘어졌다. 난도질 당한 등가시 사이로 드러난 뼈는 흰색이 아닌 칠흑같은 검은빛이었다.

  놈은 개러헬이 다가서자 고개를 들었다. 고대신의 눈 안에서 악의가 바람 맞은 불씨처럼 일렁였다. 놈의 길죽한 검은 이빨 사이로 보랏빛 불길이 맺혔다.

  굽은꼬리는 앞서 미친 그리폰들이 그러했듯, 피할 생각이라곤 없이 직선으로 빠르게 내려꽂혔다. 그리고 앞선 상대에게 그러했듯, 악마의 군주는 몰아치는 화염의 숨결을 날개달린 도전자에게 내뿜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 굽은꼬리는 하늘에서 돌덩이처럼 뚝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악마의 군주의 숨결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히던 녀석이 한 순간 가라졌다.

  그리고 놈은 곧바로 다시 소금 안개를 뚫고 치솟아 악마의 군주의 오른 편, 거의 먼 것이나 다름없는 다친 눈 쪽에 나타났다. 녀석은 날고 있지 않았다. 날만한 공간은 없었다. 굽은꼬리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갈레온선의 선체를 타고 올라 발톱을 나무와 등껍질 위에 박아넣었다. 잽싼 움직임으로, 녀석은 악마의 군주가 미처 보기도 전에 놈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도전적인 그리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달려들었고 - 굽은꼬리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검은 이빨이 그리폰의 줄무늬 어린 하얀 털 위에 박혔다. 악마의 군주는 쥐를 잡은 사냥개처럼 놈의 목을 물고 흔든 뒤 내팽겨쳤다. 소리없이, 굽은꼬리는 부유물 가득한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그리폰의 희생은 목적을 달성했다. 개러헬은 안장에 서서 악마의 군주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가, 놈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 뛰어 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등가시에 매달린 채로, 엘프는 드래곤의 이마 위로 기어올랐다. 놈은 그를 떨구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댔지만, 개러헬은 단단히 붙들고 버텼다. 한 발 한 발, 그는 놈의 뿔 사이 파인 곳을 지나쳐, 타락한 그리폰이 상처 내놓은 악마의 군주의 목 뒤편 틈새에 도달했다. 고대신의 거친 비늘 사이에 버티고 선 채, 개러헬은 그의 단검을 놈의 등가시 뒤로 치켜들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두개골 아래쪽을 향해 내리꽂았다.

  번개라도 지난 듯한 짧은 고요가 맴돌았다. 이세야는 동생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든, 미처 읽어낼 수 없었다. 그의 뺨 위에 묻은 핏방울이 안도감을 선사했고, 금색 머리카락 한 올이 그 위에 걸려 있었다. 머리 위에선 대재앙의 폭풍이 무너지며, 혹은 그저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오염이라곤 모르는 햇빛이 챈트리 대성당을 비추는 황금빛처럼 떠있는 배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의 죽음이 일으킨 충격의 여파가 그들을 덮쳤다. 나무 파편이 갈갈이 쪼개지고, 두꺼운 돛이 넝마처럼 찢어졌다. 밧줄과 삭구에서 얼음비가 쏟아졌다. 그 충격파에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납작하게 붙인 채로 숨을 멈추었다. 안장에 몸을 꼭 맞대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다로 날려갔을 터였다.

  그 순간은 리알토 만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휘저어 놓을 것처럼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지만...결국 모든 게 끝나, 레바스는 악마의 군주가 수장된 무덤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치솟았고, 태양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야는 죽은 고대신의 거대한 시체에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동생의 작은 육신이 반짝이는 걸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되찾은 세상의 해변에서 마침내 휴식을 맞이했다.

  끝났다. 그들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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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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