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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스탁헤이븐 이후로, 이세야의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유동맹에서의 전투는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동맹군과 신병들은 이름을 기억에 새길 새도 없이 빠르게 왔다가 사라졌다. 열병으로 죽은 이도,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잠식당해 죽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이나 화살에 쓰러져갔다.  콜링을 듣고 응답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소수에 - 아주 극소수에 - 불과했다. 회색 감시자와 그 동맹군은 착실히 자유동맹을 수복하고 있었지만, 마을과 마을, 도시와 촌락을 되찾는 그 여정에는 걸음마다 피가 배어 있었다.

  아마디스는 그들이 이겨가고 있다고 했고, 개러헬도 그렇게 말했다.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유동맹을 되찾아봤자 그들은 올레이와 안더펠스를 잃는 중이고, 어쩌면 티빈터 제국도 무너지고 있는 중일 거라고.

  이세야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승리란 게 뭔지 잊은지 오래였다.

  그들은 말라붙은 강둗과 죽은 숲을 지나, 말라빠진 풀쪼가리 뿐인 황량한 평야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끝없는 모래바람이 저주받은 대지 위를 휩쓸며 시야를 가렸고, 하늘에는 결코 내리지 않을 비의 약속을 품은 구름이 멍든 색으로 부풀어 있었다.

  지원군이 찾아들었다. 일부는 음식이나 잠들 수 있을 정도의 안전한 거처를 얻고자 찾아든 피난민들이었다. 자비로운 영주, 야심찬 지도자, 혹은 대재앙의 영향을 덜 받은 영주들이 자신의 영역만은 지켜내기 위해 보낸 군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추방자 출신이었다.

  개러헬은 생각지 못한 이들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추방당하거나 무계급층이었던 드워프들은 쪼개진 산맥 모양의 깃발 아래, 스스로를 돌의 사생아들이라 부르며 언젠가 그들의 유골이 오자마로 돌아가, 돌의 이름 아래 묻히길 바라며 하나로 모였다. 티빈터 제국에서 주인을 죽이고 대재앙으로 도망쳐나온 엘프들은 주인없는 자들이라 스스로를 칭했고, 무기만 쥐어주면 누구와든 싸우겠다며 충성을 표해왔다. 마지막으로, 템플러들의 추적을 피해 회색 감시자들 편으로 모여든 이단 마법사들의 모임이 무너진 탑이란 이름을 가졌다.

  그들의 충성심은 특정한 국가나 대재앙을 무찌르겠단 희망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러헬 개인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세야는 동생 옆을 지키며 그가 부리는 마법에 조용히 놀랄 따름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아주 단순하고도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엘프였고, 이름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고, 가난하고 더러운 보호구역 출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호스버그를 구해내고, 커크월과 컴버랜드 사람들을 도우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맹군을 하나로 모아 스탁헤이븐의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낸 영웅이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자신의 공이었다고, 이세야는 생각했다. 따지고 든다면. 그 영광을 이용해 많은 걸 할 수 있는 건 개러헬 쪽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공을 동생에게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서서히 닥치는 죽음으로 그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을 때라면.

  그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 싸우기엔 적이 너무 많았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헐록, 젠록, 오우거를 상대로 싸웠다. 죽어가는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강도질과 식인을 행하는 굶주린 인간들과도 싸웠다. 오염에 물든 곰이나 거미, 끔찍한 몰골의 구울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이세야의 기억 속에는 이 모든 게 하나로 뒤엉켰고,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 펼쳐진 뼈의 융단에 하나씩 더해질 뿐이었다.

  이세야가 적의 얼굴을 잊어가는 건 비단 단조로운 살육의 나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락은 매일 아침 조금씩 그의 기억에 안개를 드리워갔다. 한 때는 매일의 생각을 샅샅이 기록한 연대기였던 그의 일기는 몇 주씩, 혹은 몇 달씩 방치되곤 했다. 그는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재앙의 현실과 악몽 속의 공포를 분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때때로 그는 어디로 향하던 중인지, 누구와 싸우던 건지도 잊곤 했다. 그리고 그 엘프는 마침내 선임 감시자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혼란스런 표정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역시 밤마다 점점 강해지는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동료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 비록 그들 모두 언젠가 콜링에 응답해야 할 날이 온다곤 하지만, 그 날이 오길 기다리기엔 대재앙을 상대로 한 전쟁이 눈앞에 놓여 있었으니.

  레바스만이 그를 맨정신으로 붙들어주는 시금석이었다. 그 검은 그리폰 역시 나이가 들고 있었고, 부상의 흔적과 누적된 피로가 눈에 띄게 티가 났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1, 2년 전 쯤 이미 은퇴했을 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감시자든 그리폰이든 그 누구도 대재앙 아래 쉰다는 건 불가능했고, 이세야에겐 그가 필요했다. 그리폰마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바스는 변형을 거치지 않은 채였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녀석들이 전부 거치는 동안에도.

  분명 처음에는 헤인 요새의 몇몇 그리폰에게만 입단식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버랜드와 커크월을 비롯한 자유동맹 도시의 대피작전에서 변형된 그리폰들을 끌어올린 그 힘과 맹렬한 분노를 보고 말았다.

  그 후,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꾸준히, 끊임없이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입단식을 거친 개체보다는 전성기의 그리폰이 더 강하다는 걸 회색 감시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대재앙이 오래 지속된 탓에 많은 개체가 쇠약해져 있었다. 많은 수가 늙고, 영양이 부족했고, 부상을 입었거나 오랜 활동으로 지쳐 나가 떨어졌다. 그런 그리폰들에게라면, 혈마법에 의한 강화된 속도와 힘은 그들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잃는 것도, 혹은 의식 후 나타나는 피 섞인 기침의 거슬림을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전투 사령관들이, 때론 수석 감시자가 직접, 입단식을 거쳐 계속해서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리폰을 하나둘씩 보내왔다. 그리고 타락에 물든 동료를 견디지 못한 그리폰끼리 서로 물어뜯지 않게 하려면 한 마리의 그리폰 당 서너 마리의 다른 개체가 함께 변형을 겪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기수가 거부하지 않는 한 명령대로 입단식을 거행했다. 처음에는 그도 거부했으나, 매번 결정을 번복하도록 상부의 명령이 내려왔기에 그도 마침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더 이상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계속 거부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 인한 절망이 그 자신의 타락을 가속시켰고, 어쩌면 혈마법 역시 거기에 한 몫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러헬과 그가 스탁헤이븐의 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동생에 비해 20년은 더 오래 감시자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뭘 신경써야 하는지도, 왜 그래야하는지도 잊고 말았다. 끝없는 대재앙의 진창 속에서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겪고 또 겪으며, 이제는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폰이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지든 타락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거친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 혈마법 위에 또 다시 혈마법을 더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모든 감시자들은 그와 비슷한 희생을 이미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파멸할 운명이었다.

  때때로 자신의 그리폰이 변하는 걸 거부하는 감시자들도 있었고, 그럴 때면 이세야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애초에 그가 이걸 거부했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어둠의 피조물의 부식이 침습한 그의 정신은 이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단 한 가지 - 매일 밤 기도처럼 스스로에게 읊조리는 그것은 - 이 모든 게 대재앙을 끝내기 위한 대가라는 것이었다. 자유동맹에서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내는 것.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끝내는 것. 어마어마한 대가이지만, 그래도...그것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가 대가를 치른다면, 악몽도 끝날 것이다. 언젠가.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고 검푸른빛 오염이 혈류를 타고 멍처럼 전신에 번지는 가운데, 그는 그 희망 하나에 매달렸다.

  그걸로 충분했지만, 결국 그걸로 충분치 않은 순간이 오고 말았다.

  "끝낼 기회가 왔소." 자신의 막사 안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와 아마디스는 몇 안되는 숙련된 감시자와 군사령관들을 소규모 회의에 불러모았다. 그의 보좌관이 화로마다 단내가 풍기는 장작을 채우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세야는 그 향내가 천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디스는 소소한 사치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뭐였는지 일깨울 것들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차치하고, 어쨌든 이 막사는 개러헬의 것인 동시에 그의 것이기도 했다.

  "기회라고." 아마디스는 호화로운 양가죽이 깔린 접이식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그 용병 대장의 움직임을 따라 털가죽 위로 나부꼈고, 그는 몸을 기울여 보좌관이 가져다준 향이 가미된 와인 잔을 집어들었다. "우리가 결단력 있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말이야. 우린 어둠의 피조물들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고, 놈들도 그걸 알 거야.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승리를 거머쥘 기회인 거지."

  "무슨 계획인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최근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은 으레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부피가 큰 회색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 부식의 증거를 감추고 있었지만, 목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속에서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말할 때면 단어마저 왜곡돼 들렸다. 그 자신에게도 거슬리는 일이라 점점 덜 입을 열게 된 탓에, 이렇게 가끔 입을 열면 유달리 반응이 날카로웠다. 최근에 들어온 용병 대장과 올레이 슈발리에 두 사람이 그가 안 보는 줄 알고 미신적인 손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개러헬은 완벽하게 침착해 보였다. "안티바를 치는 것." 그는 대답했다. "우린 놈에게 위협이 될만큼 가까워졌소. 우리는 악마의 군주의 영역 한복판에서 놈을 상대할 것이오."

  "그대가 장갑을 던지면 그 짐승이 응대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올레이 슈발리에가 코웃음쳤다. 그는 회색 감시자들의 낡고 흠집 투성이인 갑옷에 비해 한층 위엄 있는 외관을 하고, 그에 걸맞게 스스로를 엄청 중요한 인물인 양 굴었다. 그가 입은 갑옷은 섬세한 무늬의 금박이 덧입혀진 빛나는 강철 재질이었. 어깨 갑주 위의 장미 문양 은 세공은 어찌나 광을 냈던지 꽃잎 하나하나가 거울처럼 빛났다. "놈에게 모욕당할 명예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세야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올리려 하니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몬...몽...몽포트,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헤인 요새에 있던 자였다. 그가 떠나기 직전쯤 도착했을 것이다. 침침한 기억이었지만, 용감한 이였던 것 같다. 혼신을 다해 그래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오." 개러헬이 대답했다. "명예보단 자존심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여주긴 할 것이오. 우리가 코앞에 전쟁을 들이댄다면, 악마의 군주는 응대할 것이오."

  "왜 아니겠어?" 아마디스가 동의했다. "이미 참아 넘기기엔 너무 많이 얻어맞았는걸. 분명, 놈은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우릴 무너뜨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야." 그는 차고 있는 팔찌에 달린 장식물을 달그락거렸다. 그가 죽인 백 번째 오우거의 송곳니를 가죽끈을 꼬아 매단 것이었다. 그 이빨이 손에 든 술잔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쨍 소리를 냈다. 챙그랑, 챙그랑, 핏빛 음료가 담긴 컵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가 그곳에 다다르면, 그대들 모두 함께 진군하는 것이오." 개러헬이 말을 이었다. "그리폰 기수들이 진격을 이끌 것이오. 다른 이들은 악마의 군주를 이끌어낼만큼 안티바 깊숙히 들어갈 수 없으니. 하지만 그대들의 지원이 필요하오."

  "내가 가겠소." 몽포트가 즉시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서 부드럽게 예를 취했다. "기갑 부대를 이끌고 지원하는 영광을 내게 맡겨주시오." 그의 갑옷이 막사의 불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몇몇 회색 감시자가 그의 등 뒤에서 재밌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개러헬은 그의 제안을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그대의 용기는 기억될 것이오."

  "루비 드레이크도 당연히 함께 할 거야." 아마디스가 말했다. 뒤이어, 다른 용병대들 역시 저마다 자신들의 용맹과 기술을 경쟁하듯 뽐내며 함께하겠다 나섰다. 개러헬은 왁자지껄한 그들의 과시를 담담한 얼굴로 새겨들은 뒤, 그가 필요한 이들을 추려냈다. 마법사, 궁수, 그리고 강철의 벽으로 그들을 둘러싸줄 돌의 사생아들. 그를 따르는 추방자들 거의 모두가 선택받았다.

  영웅이 돼야만 하는 이들이군, 이세야는 생각했다, 평화가 찾아와도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고.

  개러헬이 대부분의 회색 감시자들을 선택받지 못한 용병들과 함께 빼놓은 것 역시, 그에겐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남긴 이들은 대재앙 바깥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들이었다. 많은 이가 이세야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이미 콜링에 응해 떠났을 이들이었다.

  "우리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군요." 모두가 막사를 떠난 뒤 남은 감시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우울한 인상의 완고한 안더펠스 남자로,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바람에 센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통상적인 상흔이 뺨 위를 세로로 하얗게 가로질렀다. 이세야 기억에 따르면 레호르란 이름일텐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안더펠스인의 두 눈 위로 보랏빛 눈두덩이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회색 감시자들은 그게 피로에 지친 흔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동맹군들에겐 굳이 알리지 않겠지만, 감시자들은 그게 콜링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자신의 통제력을 잃게할만큼 진전된 상태일 것이다.

  "난 언제나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개러헬은 빚어낸 듯한 가벼움을 싣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승산이 낮은 것만은 사실일세. 걱정된다면, 뒤에 남아도 좋네."

  "싫습니다." 안더펠스인이 비웃듯 대답했다. "전장에서 뒤로 빠져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좋아, 그럼 정해진 거군." 엘프는 막사를 가로질러 간 뒤 접이식 책상 위에 놓인 전투지도 위에 손끝으로 선을 그었다. 그들의 진영으로부터 안티바 시티를 표시하는 성 그림까지 쭉 잇는 선이었다. "우리가 갈 경로이네. 적들의 머리 위를 바로 지나쳐서, 놈들이 우리가 가는 걸 알게 할 거야. 아마디스는 보병 부대를 이끌고 알바우드의 언덕까지 이끌고. 그 언덕이 어둠의 피조물들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들이 대기하는 사이 우리는 악마의 군주를 화살 사격 범위 안으로 유인하는 거야."

  "긴 비행이 되겠군요." 레호르가 개러헬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고 속도로 비행하기엔 너무 길 수도요."

  "그래서 가장 강한 그리폰들만 데려갈 생각이라네."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이세야가 물러나 서있는 그림자진 구석을 돌아봤다. "지치지 않을 녀석들로."

  레호르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회색 감시자들 역시 불편한 웅얼거림을 주고받았다. "우리더러 입단식을 거친 놈들을 타라는 겁니까?"

  "그대의 그리폰이 임무를 버틸만큼 강하고 빠른 게 아니라면, 그렇네."

  "놈들은 미쳤다고요." 레호르는 딱딱하게 말하며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그 안의 분노가 너무 커요. 어둠의 피조물 가까이 가면 놈들은 이성을 잃을 겁니다. 날뛰어서 적들에게 달려들고 나면 다시 붙들 수가 없어요. 악마의 군주와의 전투에 놈들을 타는 건...자살시도나 마찬가지입니다. 재앙이나 다름 없을 거예요."

  "그럴 것 같았다면 이런 작전을 짜지 않았겠지." 개러헬이 대답했다. "하지만 난 내 누이를 믿고, 이번 기회가 최선의 기회라고 믿네. 어쩌면 악마의 군주를 동맹군 근처까지 유인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놈이 우릴 따라오지 않는다면, 놈과 공중에서 맞붙어야 하네. 그렇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 있는 - 그리고 싸우려 할 그리폰들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들은 이세야를 돌아봤다. 눌러쓴 후드 안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움츠러들었다. 그를 보는 감시자들의 시선에는 의심과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들이 개러헬을 볼 때와 같은 희망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들에게 난 괴물이구나.

  탓하고 싶진 않았다. 한 때 엘프였던 그 자신은 이미 그 안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남아있지,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 위해 역할을 다 할 정도로는. 딱 한 번만 더 싸우면, 그러고나면 이 끝없는 비탄과 희생의 행군에 작별을 고할 수 있다. 딱 한 번, 그러고나면 그는 이 묵직한 영웅의 업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내가 놈들을 통제하겠소." 그는 대답했다.

 

* * *

 

  개러헬이 작전을 짜는 사이 막사엔 밤이 찾아들었다.

  모든 걸 마쳤을 땐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였고, 이세야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막사로 걸어서 돌아갔다. 주위에선 모닥불이 검푸른 어둠을 밝히며, 고독의 바다 한 가운데 빛과 온기의 섬처럼 빛나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말들이 푸릉거리는 소리와 병사들의 코고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마치 그 옛날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만큼이나 익숙하게 들려왔다.

  그의 막사는 조용했다. 레바스는 북적거리는 곳에서 자는 걸 싫어해 야영지에서 먼 곳에 스스로 둥지를 트는 편이었고, 이세야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부식이 혈류를 타고 그를 갉아먹는 지금이라면, 혼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거의 자각도 없이, 그는 자신의 막사를 지나,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여러 천막과 울타리, 꺼져가는 모닥불들을 지나쳐 익숙한 곳에 도달했다. 칼린의 막사는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재앙으로부터 그의 꿈을 지켜주는데 도움이 된다는, 선명한 녹색과 금색의 천으로 얼기설기 기워져 있었다. 수년 간 색이 많이 바래기도 했고, 밤의 어둠에 그 반짝임이 많이 묻히긴 했으나, 주위의 단조로운 원형 천막에 비하면 단연 눈에 띄었다.

  이세야는 멈춰섰다. 불빛이 꺼져있으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그냥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불은 켜져 있었다. 천막 귀퉁이로 금색 불빛이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비쳐보였다.

  후드를 뒤로 젖힌 뒤, 이세야는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천 위로 소리가 많이 묻혔음에도, 칼린이 대답했다. "들어와."

  "방해하려던 건 아니야." 이세야는 고개 숙여 들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칼린이 대답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추레한 몰골에 두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모습이었지만, 그는 지친 미소로 말가죽 베개를 이세야에게 내밀었다. 엘프는 그걸 바닥에 깐 뒤 막사 안을 밝히는 하나 뿐인 기름등 옆에 어색하게 자리잡았다.

  마법사의 무릎께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이세야가 손짓했다. "책 읽느라 안 잔 거야?"

  "잘 수가 없었어. 이 정도 겪어왔으면 전투 전에 푹 자는 게 중요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우러 날아갈 생각을 하니 어쩐지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더군." 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잠시 경건한 독서시간을 가져보면 좀 안정을 찾을 줄 알았지. 아니면 지루해서 잠들든가, 어느 쪽이든 간에."

  "성서를 읽었단 말이야? 당신답지 않네. 우리가 이미 기도에 매달릴만한 단계를 한참 지났다는 거,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랬지.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는 건 아니더라고."

  "아, 선물받은 거란 말이지?" 이세야는 새로 솟은 호기심으로 책을 다시 확인했다. "당신한테 기도서를 준 게 대체 누구야? 아무래도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인가 봐."

  "아, 아무래도 그렇지." 칼린은 책을 덮고서 침낭 뒤로 안 보이게 밀어넣었다.

  이세야는 그의 목소리에 감춰진 상처받은 기색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과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

  "알아. 정말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 말이 맞아. 그이는 날 잘 알지는 못하지."

  "누가 그 책을 준 거야?" 이세야가 물었다.

  "내 목표물이었던 자의 어미." 그가 대답했다. 이세야의 놀란 기색에, 칼린은 찡그린 웃음과 함께 담요로 뒤덮인 그의 여행용 가방에 몸을 기대었다. "본인은 모르는 일이지만. 아들이 암살된 것조차 몰랐을 거야. 그이는 그저 아들이 운 없게도 망가진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에 맞고 만 거라 생각했을 거고, 나는 그저 애도의 시기에 그를 도와준 정 많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왜 그랬어?"

  "그이가 내 어머니와 같은 향수를 썼으니까." 칼린은 그 작은 책을 다시 집어들고 표지를 내려다봤다. 금박을 입힌 제목이 불빛 아래 반짝였다. 이세야 역시 불빛에 스친 은빛을 눈에 담았으나, 제목을 읽어내진 못했다. "그분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얼굴이든, 이름이든. 내가 아주 어릴 때 떠났으니까. 기억나는 거라곤 그분이 쓰던 향수 뿐...그마저도 이름은 모르지만 말이야. 레몬 꽃처럼 단 향이긴 한데, 정확히 같진 않아. 꽤 오랫 동안 나는 그것조차 내 상상일 거라 생각했지만, 목표물을 따라가던 중에 그 향을 맡고 말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 어미에게 관심을 둘 리도 없었을 거야. 그이는 올레이의 귀족 여성이었고, 힘 깨나 있는 작자의 정부이자 그 아들의 어미였지만, 내 어미는 이름이 남을 만한 이도, 그렇게 힘이 있거나 부유한 이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어째선지 그 둘은 같은 향수를 썼고, 그리고 그 귀족여성이 마침 비슷한 연배였던 탓에, 내게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 짓을 하게 만든 거야. 물론 일은 제대로 마쳤어. 안티바 까마귀단은, 목표물이 그저 어쩌다 복잡한 상속의 굴레 안에 끼어있었다는 죄 밖에 없는 어린아이일지라도 계약을 반드시 완수하니까. 하지만 나는 일을 마치고도 예정보다 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고, 상중인 그 어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어. 그 후에도 우린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고. 몇 년 사이 좀 더 가까워졌지. 하지만 그이는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안티바가 무너진 뒤로 감시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 뿐."

  "그래서 당신한테 기도서를 보낸 거고?"

  칼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올레이에서 보냈더라고. 회색 감시자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갖다줬어. 그이가 창조주께 기도드리겠다더군, 나를 지켜달라고, 그리고 대재앙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달라고."

  이세야는 그 감상적인 태도에 코웃음 칠 수도 있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어린 표정에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창조주가 눈앞에 닥친 위험 앞에 누군가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은 진저리칠만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아들의 어미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 역시 끔찍한 일이었지만...그 모든 것은 어쩐지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그는 얼굴없는 모친의 유령과 어떻게든 이어지려는 칼린의 노력을 폄하할 수도, 잃은 자식을 어떻게든 대신하고자 하는 올레이 여자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둘 중 누구도 정말로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하지만 그 대체품에서나마 다른 종류의 사랑을 얻고 있었고 - 그게 아무리 불완전할 지언정, 이세야 자신이 가진 것보단 충분했다.

  "아직 그 사람은 살아있나보네, 어쨌든?" 엘프가 말했다.

  "그래. 대재앙이 아직 그이에게 닥치진 않았고, 적어도 강도 떼나 빈곤한 피난민들이 도시에 밀려드는 것 이상의 해를 끼치진 않은 모양이야." 칼린은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조주께, 부디 계속 그러하길."

  "그럴 거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는 까칠까칠한 갈색 베개를 옆으로 밀어놓고 문가로 돌아섰다. "고마워."

  "뭐가?"

  "내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일깨워줘서." 엘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밤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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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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