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5:20 숭고의 시대

 

  그 자신에게 매우 놀랍게도, 이세야는 헤인 요새를 쓸모있게 복구하는 이 임무를 제법 즐기고 있었다.

  물론 거기엔 생각보다 진행이 매끄럽다는 점이 큰 몫을 했다. 빔마르크의 숲은 이전에 와이컴에서 스탁헤이븐으로 사람들을 날랐던 것보다 크고 매끄러운 유선형의 배를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해봤던 일이라 배의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세야와 칼린이 이에 대해 오고사에게 설명했고, 그 드워프는 빠르게 구조를 보완해 더 무거운 중량을 싣고도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갈 수 있을만한 새 형태를 고안해냈다.

  이세야는 아래로 내려가 피난민 캐러반을 이끌고 돌아오는 매 작전마다 동행했다. 헤인 요새의 작전 사령관으로서 그 캐러반들은 전부 그의 책임이었다. 어쨌든 수레를 끄는데엔 레바스가 필요했고, 그 자신 또한 보호 병력으로서 한 몫을 했다. 도시 근방에선 어둠의 피조물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 이세야는 외진 곳에 있는 촌락과 마을을 위주로 작전에 나섰기 때문에 언제나 정찰병이나 낙오병, 혹은 구울이나 대재앙에 물든 야수들이 출몰했다. 작은 접전조차 없이 끝나는 작전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한 위협은 으레 그러하듯 무서운 동시에 고무적이기도 했다. 의외였던 점은 천천히 요새를 재건하는 과정 역시 그를 고무시킨다는 점이었다.

  성 주위를 따라 걸으며 마을에서 새로 기와를 얹은 지붕이나 갓 잘라서 땔감용으로 말리는 중인 나무더미, 가지런히 손질된 수풀과 어린 소나무 숲 따위를 확인하는 건 제법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계절이 늦어 제 때 수확할만한 작물이 한정돼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농부들은 당근과 양배추, 완두콩을 심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닭들이 민가 주위를 서성이며 벌레를 쪼아먹었고, 축 쳐진 귀의 토끼들은 우리 안에서 잔반 야채를 주워 먹으며 살을 찌웠다.

  자유동맹 도시들의 혼돈과 황폐에 비교하자면 가히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이세야는 하루에 한 시간 쯤 마을의 발전상황을 확인하러 순회하고 나면 그의 진짜 업무로 되돌아 갔다.

  높다란 헤인 요새의 성벽 너머에서, 그와 오고사는 산을 파내고 있었다. 인접한 산의 한 쪽 면에 자그마한 자연동굴이 있어, 그곳을 시작점 삼아 도피처를 깎아내는 중이었다. 이세야와 칼린,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이 오고사의 지시에 따라 정밀하게 통제된 장력마법으로 돌을 깎아내 동굴 밖으로 빼내고, 새로 개선된 아라벨에 잔해를 싣고 마법으로 날랐다. 큰 바위들은 벽을 쌓고 담장을 짓는데 이용됐고, 작은 돌멩이들은 새로 확장된 마을의 자갈길을 까는데 이용됐다. 마법으로 깎아낸 굴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나면 오고사와 다른 드워프들이 손수 안쪽면을 단단하게 다듬었다.

  동맹군 전력이 점차 무너져 간다는 자세한 소식을 원동력 삼아 그들은 빠른 속도로 작업을 진행했다. 매일같이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듯 했다.

  자유동맹 전역에서 회색 감시자와 동맹군은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탄터베일과 커크월, 그리고 스탁헤이븐 상공에 나타나 도시를 검은 불길로 무너뜨렸다. 대재앙의 황폐는 내륙 지방을 휩쓸고 난 자리엔 얼마 안 남아있던 은둔자들과 저항세력 무리를 구울로 만들었다. 식인을 일삼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어쩌면 그 안에는 궁지에 몰린 농민들도 섞여 있을 터였다.

  전방에서 멀리 떨어진 헤인 요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하는 것 뿐이었기에 - 그들은 비와 안개를 뚫고, 잠을 쪼개가며 열심히 일했다. 때때로 부상을 입은 회색 감시자나 상처입은 그리폰이 회복을 위해 찾아들 때도 있었고, 이세야는 그들마저도 회복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작업에 참여하도록 투입했다.

  두 달 사이, 작은 도시 인구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만한 동굴 여러 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여전히 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이지." 오고사가 말했다.

  그들은 산 속 깊은 곳, 마법사들이 부서놓은 돌무더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작은 틈새를 따라 햇빛과 맑은 공기가 새어들어왔다. 오고사는 감시자들에게 환기용 틈새 주위로 작은 구덩이를 여럿 파놓도록 했고, 그 안에 흙과 비료를 채워 나중에 피난민들이 햇빛을 이용해 작물이나 혹은 빛이 부족해도 버섯 정도는 키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직은 구덩이 안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세야는 그 잠재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감당할만한 물을 대체 어디서 구하지?" 엘프는 질문을 소리내어 말했다. 빔마르크 산 꼭대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로 지금의 소규모 인원까지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인구가 두 배로 들어나면 그 물줄기마저 고갈될 것이고 - 이 피난처는 지금의 스무 배는 되는 인원을 위해 설계중인 곳이었다.

  "와이스하웁트에선 빗물을 모으지." 오고사가 제안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산맥은 이 시기에 비가 거의 오지 않고, 다음 여름에 올 폭풍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머지 않아 비는 눈이 될 거고, 그러고나면..." 그는 생각에 잠겨 말끝을 흐렸다.

  "뭔데?"

  "그러고나면 정상에 그대로 머물겠지." 엘프는 말을 맺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바로 그거야. 산에서 물을 채굴하는 거야."

  오고사는 한 걸음 물러나서 키 큰 동료를 향해 고개를 젖혔고, 흥미가 가긴 하나 다소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정상까지 날아가서, 동굴을 파는 것처럼 얼음덩이를 캐내고, 자갈을 나를 때처럼 수레에 싣고 돌아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세야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기대만큼 빠르지도 않을 거고, 영구적인 해결책도 되지 못해. 공격이라도 받아서 그리폰들을 데리고 방어하러 나가면 그대로 물 공급이 끊기는 거잖아. 내가 생각한 건, 충분한 물을 한꺼번에 저장하는 거야, 가능하다면 한 백 년은 갈만한 양으로."

  "무슨 방법을 생각한 거지?"

  "도피처에 저수지를 만드는 거야. 네가 설치한 경작용 구덩이 같이, 대신 수천 배 크기로. 그리고 눈덮힌 정상까지 이어지는 굴을 판 다음, 화염주문과 장력주문으로 눈사태를 일으켜서 눈더미가 호수로 바로 쏟아지게 하는 거지. 그 정도면 도피처 인원 전체를 수 년 간 먹여살릴 수 있을 거야."

  "좋은 계획이야." 오고사가 대답했다. "딱 하나만 빼고."

  "뭐지?"

  "통로를 만드는 걸 먼저 하는 게 낫겠어." 드워프가 대답했다. "그 편이 거대한 호수 바닥에서 잔해를 하나하나 퍼내는 것보다 작업이 깔끔할 거야. 그것만 빼면...정신나간 계획이긴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해보자고."

 

* * *

 

  그로부터 3주 뒤, 지금 이세야는 눈에 덮인 거대한 푸른빛 빙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판 굴은 백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 까만 점처럼 보였고, 여기서 일으킨 눈사태가 그 목구멍에 쏙 들어갈 거라 생각하기엔 너무 작고 멀어 보였다. 눈밭 위에 여기저기 꽂힌 녹색 깃발은 오고사가 깨진 얼음을 인도할 통로로 표시해둔 것이었다.

  그는 가슴과 허리를 밧줄로 단단히 고정해둔 상태였다. 밧줄의 다른 끝은 레바스에게 연결되어, 이세야의 계산이 잘못돼 눈사태에 휩쓸려 내려갈만한 위험이 닥칠 경우 그 검은 그리폰이 그를 끌어올릴 예정이었다. 그리폰은 엘프보다 위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 뾰족한 바위 꼭대기에 자리잡았으니 마법의 사정거리 밖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산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칼린과 리스메는 도피처 아래에서 화염주문으로 얼음을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세야는 얼어붙은 협곡으로 원조하러 오겠다는 다른 마법사들의 제안 역시 거절했다. 오고사의 계산만 정확하다면 그 자신의 주문만으로도 빙벽의 틈을 뚫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준할 수 있을 터였다. 얼어붙은 빔마르크 산맥 꼭대기의 극히 일부만 깎아내는 걸로도 그들의 도피처에 물을 공급하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얼음을 내려보냈다간 힘들게 깎아놓은 동굴에 홍수를 일으킬 위험마저 있었다.

  그는 드워프의 계산이 정확하길 기도했다. 잠시 뒤면 알게 되리라.

  이세야는 매섭게 몰아치는 얼음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빛바랜 금발 머리칼을 입에서 뱉어낸 뒤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언덕 아래 굴 입구를 노려봤다.

  이어 그는 영계와 접촉하여 지팡이로 순수한 힘의 뭉치 한 타래를 이끌어냈다. 그 뭉치는 그의 의지를 따라 파이프로 녹인 유리를 부는 것마냥 가늘고 길게 늘어났다. 마침내 그 뭉치가 충분히 정제된 순간, 이세야는 가장 먼 곳에 꽃힌 오고사의 녹색 깃발을 향해 힘의 창을 조준하여 날려보냈다.

  깃대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귀를 멀게 할 것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아랫편의 빙벽이 갈래갈래 쪼개지며 점차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준비된 굴로 쏟아져내렸다. 부서진 얼음의 대부분은 온 산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곧바로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덩어리들이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 역시 오고사가 예측한 바였다. 이세야가 날린 두 번째 힘의 창에 얼음 덩어리들은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 시야를 가리는 얼음가루를 흩뿌리며 아래로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반짝이던 조각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는 다음 녹색 깃발을 확인하고 그 아랫부분을 향해 새로운 힘의 창을 날렸다.

  깃대가 폭발하며 매달려있던 깃발 역시 눈폭풍에 휩쓸린 나뭇잎마냥 펄럭이며 날아갔다. 마지막 얼음덩어리가 사라진 걸 확인하면 이세야는 다시 다음 깃발, 또 그 다음 깃발을 노렸다.

  전체 봉우리의 3분의 2 가량이 대략 3미터씩 높이가 깎여 내려갔을 때 쯤, 엘프는 얼음산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움직이는 걸 느끼며 앞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장력마법이 일으킨 반향, 그리고 지지할 얼음층이 사라지는 바람에 남아있던 얼음 봉우리들이 기반을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이세야의 머릿 속을 스친 바로 그 순간,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지고 미끄러졌다. 그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고, 아가리를 벌린 굴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호흡이 빨라졌다. 얼음자갈과 거친 눈더미가 시야를 가렸다. 태양은 번쩍이는 금빛으로 점멸하듯 시야에 잡혔다 사라졌다. 얼음덩이가 팔다리와 머리통을 세게 때려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두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한 순간, 거인의 주먹 같은 강력한 압력이 그의 상체를 꽉 붙들었고, 그는 순식간에 공중 위에 떠올라, 밧줄 끝에 매달려 하릴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레바스가 그를 구한 것이다.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 흥분으로 어질어질한 기쁨을 만끽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폰이 높이 날아오름에 따라 엘프의 옷가지에 붙어있던 눈이며 얼음 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먼 아래에서는 무너진 얼음 봉우리가 우르릉거리며 굴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세야는 바람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신중하게 조준한 장력마법으로 커다란 덩어리 몇 개를 마저 부숴 경과를 가속했다.

  끝났다. 도피처에 물이 생긴 것이다. 엘프는 긴장을 풀고 가슴줄과 도취감에 몸을 의지한 채, 흰색과 갈라진 푸른 선으로 반짝이는 산맥을 내려다봤다. 이어 뾰족하게 솟은 회색 바위 봉우리로, 그리고는 넓게 펼처진 이끼 밭으로, 마침내는 높이 솟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풍경이 바뀌어갔다.

  목울대가 금색빛인 와이번 한 마리가 달랑거리는 짐을 매달고 날아가는 레바스에게 도전하듯 큰소리로 울었다. 이세야는 혹여 그 와이번이 그를 노릴까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그 엘프를 잠재적 식량으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건지, 혹은 그리폰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법을 익힌 건지, 놈은 쫓아오지 않았다.

  반 시간 뒤, 그들은 헤인 요새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매달린 승객을 데리고 착륙하는 걸 크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하강에 맞춰 자신을 감쌀 구형 방어막을 준비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레바스는 자신의 기수를 매단 채 그대로 난간 위로 착륙했고, 준비한 방어막이 성벽에 부딪히며 튕겨져 나왔다. 보호막이 없었다면 그대로 곤죽이 됐을 뻔 했다.

  방어막이 성벽에 안정적으로 정지하자 이세야는 다소 안전해진 기분으로 주문을 해제했고, 가슴에 고정된 밧줄을 풀어낸 뒤 약간의 높이가 있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비행 중 냉기와 압력에 시달려 뻣뻣해진 팔을 주물렀다. 내일이면 밧줄로 묶었던 팔과 가슴팍에 멍이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오고사는 이미 마당에 나와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드워프의 붉은 머리 타래와 목에 건 구리 메달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기름 먹인 가죽 장화에도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임무가 성공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의 얼굴 위엔 이세야가 기대한 것 같은 흥분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엘프는 옷에서 마지막 눈송이를 털어내며 질문했다. "굴이 중간에 막혔어? 뭐가 잘못된 거야?"

  오고사는 고개를 저었다. "굴은 문제 없어. 리스메가 마지막 덩어리를 부숴서 호수에 쳐넣었고,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녹길 기다리기만 하면 돼. 양은 충분해. 오백 명이든 오천 명이든, 수석 감시자가 보내고 싶은만큼 보내도 말이야."

  "그럼 뭐가 문제야?"

  "수석 감시자는 바로 지금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야." 드워프는 길게 숨을 내쉬곤 부츠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차냈다. "안에 들어가봐. 네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

  "개러헬이? 전장을 떠나 여기에 와 있다고?" 날아오는 사이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으나, 지금은 빗질해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이세야는 헝클어진 금갈색 머리뭉치를 통째로 잡고 가죽끈으로 대충 둘러 묶었다. "급한 일이야?"

  "명백하게." 오고사가 대답했다. "작전실에 있을 거야."

  이세야는 서둘러 움직였다.

  동생은 혼자 있었고, 작고한 헤인 공 소유였던 곰팡이 슨 커크월 역사책을 눈으로 훑는 중이었다. 이세야가 들어서자 책을 내려놓은 그는, 옅은 미소로 누이를 반겼다. "누나. 얼굴 보니까 좋네."

  "개러헬." 마법사는 동생을 살짝 끌어안고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여윈 것 같았다. 부드러운 가죽과 모직 옷 너머로 뼈가 만져지는 듯 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거야?"

  "뭔들 안 급하겠어?" 개러헬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한눈에 봐도 희끗희끗한 빛깔이 전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자유동맹이 위기에 처해 있어. 악마의 군주는 각각의 주요 도시를 산발적으로 공격하며 마치 열세에 몰린 듯 가장해서 그들을 분산시켜 놨어. 그리고 놈이 가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누나, 착각이 아니라.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게 책략이라고 믿으려 하질 않아. 누구도 자신들의 무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병력을 깎아먹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야. 몇 달이 더 지나면, 그들이 마침내 우리의 지휘 아래 하나로 힘을 모으겠다고 결심해도 아무 의미도 없어질 거야.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할만큼의 병력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 이세야는 어쩐지 이미 그 답을 알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각 도시를 대피시켜야 해. 컴버랜드랑 커크월부터 노리는 게 낫겠지. 그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잃었고, 남은 인구 정도라면 헤인 요새에 전부 데려와도 괜찮을 거야.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주한 뒤라면, 지도자들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바로 지금이어야만 해. 하루가 다르게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무력을 갉아먹고 있어.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돼."

  "많은 병사들을 보내서 피난민들의 이주를 돕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크다는 뜻이겠네, 그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개러헬이 인상을 찡그렸다. "각 도시의 병사들이 나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러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여정 전부를 동행해주진 못할 거고, 나 역시 더 많은 회색 감시자들을 붙여줄 수가 없어. 대부분의 과정에서, 누나의 병사들은 그들만의 힘으로 사람들을 호위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미친 짓이야." 마침내 입을 연 이세야의 대답이었다. "여기엔 스물한 명의 감시자가 있고, 그 중 여섯은 전투에 나서기엔 부상이 너무 깊어. 그리고 고작해야 열 마리, 잘 해봐야 열두 마리의 그리폰만이 캐러반을 끌 수 있고, 그 중 반 정도만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태지. 나머지는 너무 흥분해서 날뛰다 다치고 말 거야. 그리고 피난민 중에는 이런 임무에 적합할만한 인원이라곤 없을 거잖아. 이건 불가능해, 개러헬. 날더러 도시를 대피시키라고 한다면, 좋아, 해볼게...하지만 적어도 이게 자살시도가 아니려면 충분한 병력이 필요해."

  "우리에겐 그게 없지." 동생은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누나한텐 있어."

  "아니, 없어.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한 거야?"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망토 안에서 거친 재질의 천 가방을 끄집어냈다. 더럽고 핏자국이 묻어있는 모양을 보아 전장에서 수습한 물품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개러헬은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두 번째 주머니를 꺼냈고, 이번 것은 부드러운 가죽재질에 마법사의 금빛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색과 금색 비단끈으로 된 매듭에 이세야는 그 내용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리륨 가루. 한 근은 될 법한 양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할 터였다.

  이어 그는 리륨 가루가 든 주머니 옆에, 끈끈해 보이는 검은 액체가 담긴 세공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가고일의 두상과 발톱을 새겨놓은 그 유리병은, 화려해보이는 장식으로 그 안의 내용물이 품고 있는 끔찍함을 - 그리고 그게 이 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끔찍함을 가리는 듯 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등 뒤의 벽에 부딪혔다. 그는 부딪힌 충격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니야, 안 돼, 안 된다고."

  "이것 밖에 방법이 없어." 동생이 말했다. 이세야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봐선, 그 역시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우리는 반드시 그 도시들을 대피시켜야 하고, 가장 최소한의, 기동성 있는 병력으로 진행해야 해. 여기엔 그리폰이 그리 많지 않고, 그 중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야. 하지만 누나가 때까치에게 했던 걸 다시 한다면, 그들은 열 배도 넘는 그리폰이 있는 것마냥 싸울 수 있고, 부상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자유동맹을 살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어, 이세야 누나.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두면서까지 누나의 비밀을 지킬 수는 없었어. 수석 감시자가 명령을 내렸어. 헤인 요새의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치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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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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