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5:20 숭고의 시대

 

  호스버그의 전투가 끝난지 3일 뒤, 그리폰 기수들이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더 이상 나타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하고 돌아오자, 왕비 마리웬은 7년 간의 포위 공세를 벗어난 걸 기념하는 연회를 베풀겠다 선언했다.

  개인적으로, 이세야는 그들이 지속될 만한 어떤 성과를 이뤄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끔찍하게 이어지는 대재앙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싸워왔고, 감시자들이 어디 한 군데라도 수복해낸들, 대재앙은 이내 다시 닥쳐들어 모든 걸 삼켜버렸다. 시간이 또 지나면, 그들은 다시 한낱 연기처럼 흩어질 승리를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치곤 했다.

  동생과 아마디스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듯 했고, 다른 최전선에서 그리폰 기수가 가져온 첫 번째 전갈을 받은 날, 그들은 개러헬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올레이와 자유동맹 지역의 회색 감시자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악마의 군주는 더욱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마주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날로 공격성이 증가했고, 더 쉽게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갈에 따르자면 감시자들의 공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고, 이는 동맹군을 매우 고무시키는 소식이었지만 - 동시에 어둠의 피조물들을 격렬함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듯 했다.

  새 소식은 그렇게, 포위 지역 하나를 해방시키는 정도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자유를 누리던 호스버그에 한 줄기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리 마리웬 왕비가 이미 악마의 군주를 해치운 것마냥 군다한들, 사람들은 승리가 아직 먼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직면한 도전은 더 가혹해졌고,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

  자유동맹이 죽어가고 있었다.

  대재앙의 저주의 여파로 그들의 해안은 메마른 바윗더미 사이에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해초의 뼈대만 남았다. 바다 역시 탁한 회색빛으로 죽은지 오래였다. 물고기는 전부 떠나갔거나 죽어버렸고, 와이컴, 헤르시니아, 바스티온 같은 도시를 먹여살리던 홍합이니 굴이니 하는 것들도 껍데기만 남아 파도에 음산하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내륙지역의 황폐함은 바다처럼 가려줄 만한 것도 없어 훨씬 심각해 보였다. 벌목당한 숲에는 메말라 죽은 나무등치들이 비정상적인 곰팡이에 잠식당해 있었다. 한때는 비옥한 농경지였던 대지는 버석버석 갈라져 먼지만 쌓인 채 알곡 하나 없는 앙상한 보리 줄기만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대재앙의 구름 아래 태어난 아이들이나 가축들은 대개 작고 비실비실했고, 기형으로 태어나 병으로 죽기 일쑤였다. 운 좋게 덫이나 절박한 자유동맹 사냥꾼들의 화살에서 살아남은 새나 짐승들 역시 굶어 죽거나 오염에 굴복하고 말았다.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살아남아 구울이 된 놈들조차 죽은지 오래였다.

  어둠의 피조물이 휘두르는 칼 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궁핍이 테다스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폰 기수들, 연락이 닿는 영주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음울한 소식이 자유를 기념하는 호스버그 위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자유동맹으로 향해야 해." 개러헬이 말했다. "왕비께서 충분히 연회를 즐기게 두고, 필요한 예를 갖춘 다음, 부대를 이끌고 자유동맹으로 가자."

  그와 아마디스, 이세야는 방에 둘러 앉아 이미 천 번은 들여다봤을 커크월과 컴버랜드의 지도를 내려다봤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다음 날 있을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는 부엌 하인들의 투덜거림과 부산스런 소음 외에는 왕궁 전체가 고요했다. 야습해올지 모르는 어둠의 피조물을 경계하는 야경대의 끝없는 발소리도 없었다. 한밤중 경고를 알리는 나팔소리도 없었다.

  아마디스는 짙은 붉은색 와인을 잔에 채웠다. 마리웬 왕비는 감사의 의미로 마지막까지 보관해둔 와인 저장고를 열었고, 그 안엔 여전히 꽤 귀한 병들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개러헬의 유리병에 담긴 올레이 포도주는 이세야가 근 몇 년 간 마셔본 것 중 최고의 품질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갈 거라고 생각해?"

  개러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 소득 없는 논쟁을 이미 수 차례 반복한 뒤였고, 동생은 이세야가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낸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뭐 다른 선택지가 있나? 우리 중 누구에게든, 다른 선택지가 있어? 안더펠스의 어둠의 피조물 세력은 약화됐어. 현재 대재앙이 그 어디보다 심한 곳은 자유 동맹이야. 즉 악마의 군주가 거기 있는 거야. 우리가 가서 싸워야 할 곳도 거기란 뜻이고."

  "안더펠스인들은 전투로 지쳐있어." 이세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고향이 남아있기는 한지 확인하고 싶을 거야. 그들은 농작물을 심고, 아이를 가지고, 그렇게 대재앙의 손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이들이 애써 무시하려 노력하는 방식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할 거야. 누구도 스탁헤이븐으로 진군한 뒤 어둠의 피조물에게 뒤통수를 맞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어." 개러헬이 다시 대답했다.

  "루비 드레이크에겐 있지." 아마디스가 와인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의 검은 눈은 차가웠고 계산으로 반짝였다. 언쟁까지는 아니라도, 거의 그 직전까지 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 수 있었다. "내 부하들은 종이에 적힌 '언젠가 미래에 주어질 황금' 따위의 약속에 기대 싸우는데 지쳤다고. 어둠의 피조물들은 포로의 몸값을 지불하지도 않고, 죽여봤자 챙길 전리품도 남기지 않으니, 아무리 싸워도 손에 떨어지는 게 없잖아. 다들 그 사실에 꽤 불만에 차 있거든."

  "당신이 다룰 수 있는 정도의 불만이겠지." 개러헬은 초조해 보였다. 그는 빈 와인잔을 내밀었지만, 아마디스는 무시했다. 끙 하는 투덜거림과 함께, 엘프는 직접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여태까진 잘 다뤄왔지." 검은머리의 여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젠 전투가 끝났잖아. 적어도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싸우게 하려면 종잇장보다는 묵직한 걸 내밀어야할 거야."

  "무슨 뜻이지?" 개러헬이 물었다.

  아마디스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잔에 담긴 진홍색 액체를 흔들었다. 잔 가장자리에 불투명하게 남은 자색 흔적이 차차 옅어졌다. "마리웬 왕비가 원하는 건 당신 뿐이지? 잔치에 와서 예를 표하고, 하룻밤 함께하는 것. 원하는 건 그 뿐이야.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떠나기 전 순간의 쾌락을 선사해주는 것."

  "그래." 엘프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는 유리병을 밀어놓고 의자로 돌아왔고, 물 마시듯 와인을 들이켰다. "비밀로 한 일도 아니었어. 그 제안을 받자마자 당신한테 바로 말했다고. 거절하겠다고도 했잖아."

  "그리고 난 당신이 수락해야 한다고 했지."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래야만 해." 그의 잔잔한 미소는 - 그 불같은 성정을 생각하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세야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엄청 저렴한 대가야, 정말로. 나는 왕관 하나 안 쓰고도 당신을 밤마다 취하는걸."

  "당신에겐 부대가 있잖아, 어쨌든."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와인을 비워버렸고, 잠시 갈망하듯 유리병을 바라보다가 빈 잔을 옆으로 치워놨다. "아마 그게 내가 당신이 거리낌없이 날 이용해먹도록 두는 이유일지도. 그저 당신의 루비 드레이크를 마음껏 이용하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디스가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이용하고 싶다면, 좀 더 괜찮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왕좌를 훔친 창부 따위보다 낮은 대가에 날 팔 수는 없어."

  개러헬이 짝 하고 두 손을 마주쳤다. "아,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는군. 훌륭해! 원하는 게 뭐지?"

  "그리폰 한 마리." 아마디스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아주 잠깐, 개러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커다래진 눈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확 기울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리폰을?" 그는 마치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당신은 그 녀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는 이미 십년 가까이 그리폰과 그 기수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왔어." 아마디스는 신랄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충분히 가까웠단 말이지. 그 사이에서 내가 배운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좋아,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당신은 회색 감시자가 아닌걸."

  "나도 알아." 그가 대답했다. "그래서 더 원하는 거야. 와이스하웁트 밖에서 감시자가 아니면서 그리폰을 가진 건 오직 나 뿐이겠지. 그건 어마어마한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 될 거야. 그 정도라면 루비 드레이크가 자유동맹까지 따라가게 할만한 가치가 있을 거고, 얼마 간은 더 많은 약속들로 그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야. 그리폰은 당신의 신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녀석들이 다른 용병대 놈들에게 으스댈 자랑거리가 될 거고, 혹시 자기네도 그리폰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따라올 놈들도 생길 테지."

  "글쎄, 어쩌면." 개러헬은 의자에서 넘어질 뻔 하며 흐트러진 셔츠 매무새를 정리했다.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그게 내 조건이야. 그리폰 한 마리. 짝을 지을 수 있는 암컷으로."

  "번식장까지 시작할 생각이야?" 엘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지도." 아마디스는 마시던 와인을 끝마치고 잔을 내려놓은 뒤, 무릎 위로 손을 깍지 껴 모았다. "당신도 내가 필요할걸. 지금 남아있는 그리폰이 얼마나 되지? 수천 마리 남짓? 그 중 절반 가량은 전투에 동원되었고. 대재앙이 끝나기 전에 많은 수를 잃게 될 거야. 남은 녀석들 중에 번식하지 못할만큼 늙은 놈들이 얼마나 될까? 너무 허약한 놈들은? 대재앙 기간동안 태어난 탓에 병으로 죽거나 기형으로 자랄 놈들은? 그 규모를 다시 복구하려면 분명 도움이 필요해질 거야, 개러헬. 나라면 할 수 있어. 스탁헤이븐 외곽, 아니면 그리폰들 기호에만 맞는다면 빔마르크 산맥도 괜찮겠지. 그 쪽에도 우리 가문의 영토가 있어. 어쨌든 당신은 번식장이 필요해질 거야."

  느릿하게, 개러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당연히 내 말이 맞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향하던 아마디스가 어깨 너머로 미소를 던졌다. "내가 어떤 그리폰을 가질지는 나중에 정하자고. 당신은 일단 단잠을 자두는 게 좋지 않겠어? 왕비한테 예쁘게 보이려면 말이야."

 

* * *

 

  그는 그렇게 했다.

  개러헬은 그의 눈동자 색을 더 깊어보이게 하고 그의 금발을 한층 빛나 보이게 할, 녹색과 금색의 비단 더블릿과 바지를 빼입고 눈부신 모습으로 마리웬 왕비의 잔치에 나타났다. 벨벳 재질의 반망토 위를 두른 회색빛 테두리의 담비 모피는 언뜻 귀족들이나 할법한 고급 흰담비 재질처럼 보였으나, 누구도 그 무도함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만 고급스러웠다. 다만 모피의 희미한 줄무늬를 제외하곤, 그의 복식에 회색빛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았으니까.

  일련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이세야는 왕비가 준비한 연회장의 화려한 촛불장식 아래, 개러헬이 단연코 눈에 띄게 수려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마리웬 왕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모여있는 귀족이며 용병들 모두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쟤가 잘생기긴 했지, 이세야는 손에 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게 정말 소용이 있기는 할지는 의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약속이란 원하던 욕구를 채우고나면 으레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폐하." 개러헬은 중앙에 자리한 왕비와 측근 귀부인들 앞에 멈추어 예를 갖추었다. 이세야는 그 자리에 없었고, 아마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색 감시자들의 자리는 왕비의 오른편으로, 칼린, 리스메, 그리고 전투에서 활약했던 몇몇 마법사와 감시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디스는 왕비의 왼편에 그의 부관들을 비롯한 용병 대장들과 함께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는 여타 귀족여성들 같은 화려한 드레스 대신, 갑옷처럼 황동 징이 박힌 검붉은색 가죽 누비 재킷을 입는 걸 택했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은 그들이 안티바 시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듯하게 잘려 그의 턱선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는 마리웬 왕비의 궁중에 모인 그 어떤 여성들과도 달라보였고, 개러헬이 그걸 분명히 인지하게 하려는 듯 했다.

  개러헬을 그를 인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는 그걸 능숙하게 감춰냈다. 예를 갖추고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완벽한 헌신만이 빛나고 있었으니.

  "회색 감시자 전투 사령관 개러헬이여." 마리웬 왕비는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휘황찬란하게 눈부셨고, 이 방 안에서 대재앙이나 오랜 포위 공세에 영향 받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듯 보였다. 청보라색 눈동자는 교묘한 눈화장과 분칠로 더욱 깊어 보였고, 진한 보라색 드레스는 어깨를 드러내 크림색 피부를 한껏 드러냈다. 주위의 귀족들은 7년의 고난 사이 여위고 단단해진 몸 위로 유행에 10년은 뒤쳐진 듯한 좀먹은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으나, 왕비의 아름다움에선 흠결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대가 우리 곁에 함께 해서 정말 영광이네." 그는 말했다. "온 안더펠스가 호스버그의 길고 가혹한 포위 공세를 무너뜨린 그대의 영웅적 행위에 감사하고 있다네. 이 보잘 것 없는 연회나마 그 감사의 일부로 받아주길 바라네."

  "충분히 너그러우신 제안입니다, 폐하." 개러헬이 대답했다. "저는 그저 험난한 시국에 모두가 그러하듯 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대의 의무는 다른 이들모다 무겁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저 혼자 짊어지기 힘들만큼이요. 저희 감시자들만으로도 그렇고요. 회색 감시자들은 어둠의 피조물에 맞서 싸운 안더펠스인들의 용기와 용맹함에 큰 빚을 진 셈입니다." 그는 세 개의 높은 단상을 차지한 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희가 자유 동맹으로 진군하기 위해선 그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대재앙을 끝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한다면, 악마의 군주에게 멸망을,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고향에 안전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의 연설에 침묵이 뒤따랐다. 곧이어 용병 대장들이 술잔을 나무 테이블 위에 부딪히며 감시자들의 약속에 환호했다. 그 환호는 병사들에게로 이어졌고, 마침내 왕비의 측근들 역시 다소 열정이 부족한 태도로 합류했다.

  "우리 안더펠스는 우리의 몫을 다할 것이오." 마리웬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그 머리를 장식한 섬세한 황금 왕관이 연회장 횃불 아래 몰려든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에게 가장 맹렬한 적수였소. 우리 이웃 자유 동맹이 현재 얼마나 곤궁에 빠져있는지는 모두 알 것이오. 악마의 군주에게 마지막 한 방을 먹이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휴식이란 없을 것이고 -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이 바로 그 선두를 차지할 것이오." 그는 두 손을 마주 포개고 개러헬을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감시자들이여, 우리가 쟁취한 승리를 함께 기념합시다."

  엘프는 승락의 뜻으로 다시 예를 갖춘 뒤, 영광스런 왕비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원하던 것 - 군사 원조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을 - 얻어냈고, 이세야는 동생의 자세에서 미묘한 만족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오늘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왕비는 호스버그의 사령관과 장교들 앞에서 약속했다.

  "제대로 지켜야 할텐데." 이세야는 술잔을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칼린이 작게 코웃음쳤다. "의심스러운가?"

  "난 언제나 의심이 많아." 엘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나머진 개러헬한테 달렸다고. 그리고 이걸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는 건 걔 뿐이지."

  "그는 대재앙을 끝내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야, 안 그래?"

  "당신이라면 안 그러겠어?"

  하인들이 연회의 첫 요리를 들여오고 있었고, 칼린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포위 공세에 오랫동안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하인들은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만찬을 준비해냈다 : 비둘기 파이, 브랜디에 졸인 건사과 소스를 부은 사슴 고기, 꿀과 잘게 다진 대추야자를 얹은 빵까지. 성의 저장고에 얼마 안 남은 사치를 총 동원해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운반해온 여덟 코스의 만찬은, 이세야가 살면서 먹어 본 가장 호화스러운 식사였다.

  마침내, 시중인들과 와인 운반인들이 자리를 무르고 궁정 음유시인이 첫 번째 노래를 마쳤을 무렵 - 개러헬의 영웅성과 안더펠스인들의 용맹함을 칭송하기 위해 조잡하게 지어낸 듯한 가사였고, 이세야의 귀엔 유치하기 그지 없었으나 점차 취해가는 병사들이나 용병들은 신나게 구절을 따라불렀다 - 칼린이 몸을 기울였다.

  "아니." 그 혈마법사가 대답했다. "나라면 어떤 일들은 결코 하지 않을 거야."

  "오? 예를 들면?"

  칼린은 비둘기 파이를 포크로 쿡 찍었지만, 바로 입으로 가져가진 않았다. 요리사들이 급하게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느라 깃털 뽑는 걸 놓쳤는지, 작은 깃털 하나가 파이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푹 젖어 뿌리 부분이 구부러진 채 진득한 파이 내용물 사이에 파묻힌 모양새가, 어쩐지 불쾌한 메아리처럼 마음 속을 울렸다.

  "너라면 아마 그 답을 알텐데."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파이에서 깃털을 끄집어냈다. "아니면 곧 알게 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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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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