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9:41 용의 시대

 

  "혈마법사를 본 적 있어요?" 발리야가 물었다. 그렇게 소심한 어조로 물어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다소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에 템플러들이 함께하는 걸 받아들이려는 수 개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호스버그에서의 묵은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비록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는 레이마스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다소 음울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그 여성은 진정성 있는 겸손함과 친절함을 갖추고 있었다. 호스버그의 템플러들이 전부 그와 같았다면, 탑에서 보낸 유년기가 그렇게 공포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발리야는 종종 생각했다.

  다른 템플러들과는 그런 유대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들도 자기네끼리 뭉쳐 다녔으니 말이다. 기사단장 디귀어는 몇 주 전 입단의식을 치르다 사망했고, 그 후로 발리야는 남아있는 템플러들을 이전보다 덜 마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마스와는 아침 티타임에서 계속 마주쳤고, 와이스하웁트 내 접근이 허용된 구역을 함께 걷기도 하며, 발리야에겐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둘은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이가 됐다.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 가깝다고 할만한 사이라고 할까, 이렇게 그를 괴롭히는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을만큼은 편안한 사이가 된 것이다.

  레이마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요새의 작달만한 사과나무 아래, 앞마당의 엉성한 돌벽을 따라 사냥할만한 벌레가 있나 폴짝거리며 뛰는 갈색 작은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날개와 목 둘레에 검은 반점 무늬를 가졌고, 배 부분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었다.

  와이스하웁트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종류 중 하나로, 물 저장소에서 빗물을 훔쳐마시고 높은 탑의 돌틈에 둥지를 트는 녀석이었다. 발리야 역시 종종 그 작은 새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고, 저들처럼 자유를 누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기도 했지만, 기실 그 새들조차도 자신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였다. 그들 또한 이 요새에 매여있는 몸이 아닌가.

  새는 뭔가에 놀랐는지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레이마스가 천천히 발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템플러들의 도착 후 몇 달 간 길어진 머리칼 위로 햇빛이 비쳐들며 넓게 퍼진 회색빛이 눈에 잘 띄었다. "물론이지요."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대부분은, 겁에 질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이마스는 굳은살 박힌 엄지로 비어있는 찻잔 가장자리를 쓸었다. 길죽한 얼굴은 언제나 슬픔이 배어있는 인상이었으나,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좀 더 깊은 비탄이 묻어났다. "하지만 템플러에게 발각된 혈마법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어요."

  "나쁜 사람들이었나요? 제 말은...그들 전부가 악한 사람들이었나요?"

  인간 여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텐데, 저는 그 답을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좀 더 깔끔한 대답, 더 명확한 대답이라면, 그들이 금지된 말레피카룸에 손을 댔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왜였을까요?" 발리야는 좀 더 치고 나갔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중요해야겠지요." 레이마스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요. 어떤 건 제법 설득력이 있을 거고, 어떤 건 헛소리에 불과할 거예요. 어떤 것들은 제가 감히 믿고싶을 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구분할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언제나 진실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그들 자신의 지각과 희망과 공포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정직하다 한들 - 혈마법사라는 게 당신들한테나 그 자신들한테 그럴 수 있긴 할까요? -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영계 안에서의 허상 정도로만 '진실'일 것입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곤 단 한 가지, 그들이 말레피카룸을 범했다는 것. 템플러로선, 그걸로 끝인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회색 감시자들도 혈마법을 써왔어요." 발리야가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긴 했으나, 사실상 다른 감시자가 엿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는 수 세기 전에 비하면 굉장히 쇠락해 있었다. 수많은 홀과 마당은 - 그들이 있는 이곳을 비롯해 - 과거의 유물이자 현재의 빈 공터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마스는 또다시 대답을 미뤘다. 사과나무의 옹이진 나뭇가지에 마지막까지 매달려있던 마른 갈색잎이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졌다. 템플러의 얼굴 위로 회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나부꼈다. 그는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원치 않는 기억을 밀어내듯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챈트리는 우리에게 인간의 자만심과 야망이 어둠의 피조물을 만들어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바람이 멎은 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했다. "마지스터들이 혈마법을 이용해 영계를 침범하고 황금 도시를 약탈했고, 그들의 어리석은 짓의 대가로 테다스 전체가 파멸하고 말았다고. 혈마법이 바로 회색 감시자들이 목숨 바쳐 막으려 하는 그 악을 창조했다고. 그 저주받은 무기를 놈들과 맞서 싸우는데 똑같이 이용한다는 게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군요, 아무래도."

  "하지만 그들은 오염 또한 이용하잖아요." 발리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여 놈들과 맞서 싸워요. 도구로 이용한다고요."

  "사용자를 파괴하고 마는 도구겠죠." 레이마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혈마법이든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든, 파괴를 동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디귀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세요?" 발리야가 물었다. 일전에 예의를 갖춘 애도 인사를 전했을 때 이후로 기사단장의 죽음에 대해 레이마스와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니 어색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럴지도요. 그 의식은 나약함을 허용하는 종류가 아닐 테고, 디귀어 님은 결코 나약한 분은 아니었지만 템플러 기사단을 떠나기로 결정한 후로 꾸준히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의문이 그 분을 오염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을지도요. 그 부식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인한 의지가 필요할 테니까요."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발리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소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됐지만, 레이마스 자신도 같은 질문을 떠올린 적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닐 수 있겠는가? 젊은 마법사들 역시 두려운 상상에 시달리다 밤중에 깨어나 늦도록 침대 너머로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내가 시험을 치르긴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마스의 핏기 없는 얇은 입술이 고심하듯 일그러졌다. "수석 감시자는 디귀어 님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전까진 입단의식을 진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도 괜찮은 일이지요. 제가 오늘 그 잔을 받는다면, 저 역시 기사단장님 뒤를 따를 것 같으니까요."

  "왜죠?"

  "저 역시 제 자신만의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이들은 오래 된 영웅적인 집단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맞서 싸우는 악은...저는 제 삶을 회색 감시자의 사명에 바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템플러가 된 이유라면 잘 압니다. 저는 마탑의 벽 안에서 양쪽 사람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뭘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제 사명을 다하는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해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숙명적인 패배를 받아들이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제 동기는 순수하지도 확고하지도 않기에, 제가 그 독배를 마신다면 디귀어 님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회색 감시자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발리야가 작게 속삭였다. "제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제 생각에...영웅이 되려면 저보다는 훨씬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번엔 레이마스 쪽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가요?"

  발리야는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일기장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그는 불안한 듯 무릎 위에 얹은 손등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이미 끝까지 읽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이세야의 일기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감시자들이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 물론 네 번째 대재앙의 유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기야 했지만,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원한 것 같은 내용은 없어 보였다 - 나중에 이세야의 혈마법에 대한 고백과, 그걸로 뭘 했는지에 대해 읽은 뒤로는 충격에 빠져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 개러헬에게 혈마법사인 누나가 있었다니. 이세야는 회색 감시자였고, 혈마법사였다.

  그가 엘프였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야 했지만, 분명 중요할 터였다.

  개러헬의 이야기는 테다스 누구나 아는 영광스러운 전설이었고, 그의 위대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엘프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고 떠들든, 그들이 얼마나 경멸을 담아 "뾰족귀"를 음해하건 간에, 누구도 자신들의 터전, 혈통이 이어질 수 있게 기꺼이 스스로를 악마의 군주 안도랄 앞에 내던진 그의 희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세야의 고백이 밝혀진다면 그 빛나는 명예는 퇴색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이 벼랑 끝에서, 잿물이라도 삼킨 듯한 씁쓸함과 함께, 발리야는 자신이 동족들의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의 일기장이죠?" 레이마스가 물었다. 정중한 어투과 조심스러운 눈길은, 발리야가 대답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감시자 중 한 명이예요." 발리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도무지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 당시의 감시자였어요. 그는 혈마법사였고,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죠...하지만 대단한 일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혈마법사에 대해 물어본 거예요 - 그 힘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한지. 만약 템플러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준다면, 제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덜해질까봐.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죠...그리고 그가 남긴 이 유산도...복원할 가치가 있을 수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갈색 작은 새가 다시 사과나무로 돌아와 옹이진 마디 위를 종종 뛰어갔다. 어쩌면 아까와 다른 녀석일지도. 발리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관찰해놓고도, 그는 아직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저는 더 이상 템플러가 아닙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어찌나 작게 말했는지 거의 속삭이는 듯 했지만, 정적을 깬 목소리에 발리야는 화들짝 놀랐다. "말레피카룸의 존재에 호들갑을 떠는 건 더 이상 제 임무가 아니지요." 그의 지친 것 같은, 어두운 색의 눈 안에는 발리야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희망, 혹은 체념...아니면 일말의 두려움일지도?

  "무슨 뜻이죠?" 엘프가 물었다.

  "이제 저도 그 회색 지대를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입니다." 레이마스가 답했다. "그러니 어쩌면, 혈마법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요. 그 감시자가 남긴 유산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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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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