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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지하대로 입구는 대지 위에 난 도끼 자국 같은 불규칙한 형태의 틈새였다. 오래 전 있던 지진에 의해 형성된 균열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가 대재앙에 의해 고요가 깨지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통로로 탈바꿈한 듯 보였다.

  허나 한낮에 찾은 그곳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안더펠스는 그 자체로도 황량한 땅이었지만, 대재앙의 손길 하엔 가장 튼튼한 토착종들조차 견뎌내기 힘들었다. 말라빠진 초목 아래 갈색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흩날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엔 참새 한 마리조차 앉아있지 않았다. 오전부터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미약하게 새어든 햇빛은 다행히 어둠의 피조물들을 땅속에 붙들어두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작은 대열의 선두에서 날던 이세야가 레바스에게 하강 신호를 보냈고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은 그리폰은 깔끔하게 작은 원을 그리며 내려가 대지의 균열 근처 언덕 위로 착륙했다. 잠시 뒤 그 주위로 일행들 역시 내려앉았다.

  그리폰에서 뛰어내린 이세야가 균열 근처로 다가갔다. 균열 주위의 대지는 메말라 바스라질 듯 보였다. 발 밑에서 부서진 자갈들이 땅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골짜기 아래에선 어둠의 피조물들의 차갑고 이질적인 악취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균열의 안쪽 부분은 오랫 동안 닦지 않은 찻잔처럼 기묘하게 얼룩져 있었다. 변색된 흔적 탓에 균열의 깊이나 그 안의 굴곡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세야는 지팡이 끝에 작은 빛의 구체를 생성해 틈새를 비춰가며 좀 더 윤곽을 살피길 원했지만...그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게 얼룩진 바위 때문에 눈이 아려왔다.

  어쨌든 붕괴시키기 어려워 보이진 않았고, 중요한 건 그 부분이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 칼린과 다나로,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리스메까지 - 함께 하도록 손짓했다.

  마법사들이 균열 주위로 모여드는 사이 조락과 펠리세는 활을 점검했고 드워프 형제 퉁크와 뭉크는 에일 병을 나눠 마시며 요란스럽게 입을 헹구곤 버려진 토끼굴 위에 뱉어냈다. 이세야는 그 드워프들이 이 붕괴작전에 좀 더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에일로 입을 헹구는데 더 집중한 듯 보였다. 요란한 목울림과 펠리세의 부루퉁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 궁수의 우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듯 했고, 아마 그 드워프들은 호스버그 상공 어딘가에 아침을 쏟아놓고 온 듯 했다. 이세야는 도시가 비어있었길 바랄 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싶어?" 무너진 언덕 바닥에 모두 모여서자 리스메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세 마법사 중 가장 키가 큰 리스메는 의도적으로 꾸며낸 불안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발과 물감, 분장도구를 이용해 잔뜩 과장된 비인간적인 외형을 꾸며내곤 했다. 때때로 그는 남성 모습이었다. 혹은 여성 모습일 때도 있었다. 이세야는 이미 수 년간 그 옆에서 싸워왔지만 여전히 그가 어느 쪽인지, 혹은 양쪽인 건지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 마법사는 옷을 갈아입듯이 간단하게 성별을 바꿔댔고, 어쩐지 공연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대 공연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이세야가 들은 바에 따르면 리스메는 마탑에서 생활하는 동안 적지 않은 핍박을 받았었고, 회색 감시자가 된 후 보이기 시작한 이 별난 변장 습관은 당시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려던 습관에 색이 입혀진 것이라고 했다. 존재의 부정에서 살아남은 뒤, 그는 온힘을 다해 존재를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오늘 리스메는 여성의 모습이었고, 머리에 두른 낡은 바다 그물은 소금과 햇빛에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창백한 느낌의 청록색 눈은 그물 끝자락에 매달린 유리구슬과 같은 빛깔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유백색의 생선 비늘이 뺨과 눈썹 위를 장식하고 있었고, 분장 아래 창백한 피부 덕에 그는 초현실적인 꿈속의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두 눈에 담긴 강렬함만은 꿈 같은 느낌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리스메는 어둠의 피조물을 증오했다. 그의 불타는 증오는 이세야가 7년 넘게 대재앙과 싸워오며 만난 어떤 사람들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그의 증오는 레바스의 그것과 비슷했다. 분별없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맹금류의 난폭한 영혼 같은 증오.

  "지진을 일으키는 게 가장 쉬울 것 같은데, 안 그래?" 이세야가 말했다. "언덕 꼭대기를 무너뜨려 덮어버리는 거야."

  "아니면 빠트리는 걸수도 있지, 이 구멍이 보기보다 깊다면 말이야." 리스메는 몸을 기울여 구멍 안쪽을 살펴봤다. 뺨 위의 유백색 비늘 구슬이 영계 너머의 눈물방울처럼 반짝였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주춤했다. "아냐. 고민할 시간 없어. 당장 무너뜨리자. 놈들이 왔어."

  "갑자기 무슨-." 이세야가 입을 열었지만, 곧이어 헐록의 발자국소리와 가래 끓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오는 소리였고, 속도가 제법 빨랐다. 지하동굴 안에서 반사되는 소리로는 유추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서른에서 백여 마리 가량의 헐록과 젠록 무리인 것 같았고, 귀를 찢는 쉬릭의 새된 소리로 미루어 그 지독한 암살자 놈들 역시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너뜨려." 그가 지시했다.

  비늘장식을 두른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인 뒤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들 중 대지 원소마법을 이용해 통제된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그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그 자신만의 파괴전략이 있었다. 이세야는 지팡이에 마력을 집중시켜 영계의 거친 에너지를 염력 파동으로 바꾼 뒤 리스메의 지진이 일으킬 타격을 증폭시켰다. 그의 주위로 다른 이들 역시 보조마법을 빚어내자 영혼이 바짝 긴장하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리스메의 두 눈이 번개가 내려치는 밤하늘처럼 하얗게 빛났다. 언덕이 발밑에서 진동했고, 골짜기 위로 눈에 보일만큼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세야는 시야 언저리로 햇빛에 반짝이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눈알을 언뜻 본 것 같았고, 그는 동료 마법사가 만들어낸 지진의 반향을 때리도록 작게 마력을 뭉쳐 조준했다. 대지 위로 더 넓고 빠르게 균열이 벌어져갔고, 발밑으로 바닥이 요동치며 꺼져내렸다. 자갈과 모래 섞인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이세야는 터져나오는 재채기를 억누르며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비벼 닦았다. 흐릿한 시야로 골짜기 안쪽으로부터 화산이 분출하듯 붉은 빛이 터져나오는 게 보였다. 어딘지 모를 저 아래에서 올라온 빛이었고, 그들 중 누구의 주문도 아니었다.

  "놈들 중에 에미서리가-." 그는 흙먼지 사이로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덩이와 바윗덩이가 언덕 비탈에서 터져나왔다. 달궈진 돌덩이가 감시자 무리를 덮치며 욕설과 비명이 들려왔다.

  시야를 뒤덮는 돌더미와 연기가 허공을 메우기 전부터 땅바닥은 이미 발 아래로 조금씩 꺼지고 있었다. 리스메의 추측이 맞았다. 지하대로로 이어지는 이 골짜기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고, 언덕은 그 위를 뒤덮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야는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꼬리뼈를 따라 통증이 타고 올라왔고, 그는 아마 뼈가 부러졌을 거라 생각했다. 대지는 고삐풀린 종마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무너진 땅 속에서, 손들이 튀어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괴물 같은 손들은 손톱이 깨지는 것도 아랑곳않고 탐욕스럽게 흙더미를 파헤쳤다. 어떤 손은 손가락이 세 개 뿐이었고, 여섯 개나 일곱 개인 것도 있었다. 비에 불어터진 지렁이마냥 부드럽고 창백한 형태도, 울퉁불퉁하게 굳은살로 굴곡진 형태도 있었다. 긁힌 피부에 난 생채기 위로 배어나온 검은 피가 먼지로 하얗게 뒤덮였다. 놈들의 공통점이라곤 오로지 그 피 뿐이었다.

  그 피와, 차갑고 진득거리는 갈망 뿐.

  이세야의 피부를 할퀴며 그를 땅 속으로 끌어당기는 손들 사이로, 놈들의 얼굴이 악몽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마냥 무너진 흙더미를 뚫고 튀어나왔다. 헐록과 젠록, 그리고 혈관만 도드라진 두개골 양쪽으로 뾰족한 귀가 납작하게 붙은 앙상한 얼굴의 쉬릭들이 이빨 사이엔 흙더미를, 두 눈에는 증오를 품은 채 솟아올랐다. 놈들은 닥치는대로 물어뜯고 찢어댔고 이세야는 끝없이 요동치는 비협조적인 바닥을 박차고 벗어나기 위해 절박하게 발버둥쳤으나, 다른 회색 감시자들이라고 상황이 더 나아보이진 않았다.

  상당히 심각해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궁수 조락은 덤벼드는 적들의 손길 속에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왼편에 흩어진 흙더미와 돌무더기가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왔을 피가 호선을 그리며 흩뿌려져 있었다.

  죽은 궁수로부터 이십 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펠리세가 허벅지와 발목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발로 차내고 있었다. 그의 화살더미는 손에 닿지 않는 위치에 쓸모없이 흩어져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땅속에 파묻혀있어 팔만 튀어나와 있는 헐록 한 마리가 커다란 돌덩이로 그의 머리 주변을 미친듯이 내려찍어대고 있었다. 땅 속에 반쯤 묻힌 젠록의 머리통에 난 자국으로 봐선 아마 감시자인 줄 알고 착각하고 공격했던 것 같으나, 그 어둠의 피조물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맹렬한 기세로 피묻은 돌덩이를 땅 위에 내리찍어대고 있었고, 머지 않아 펠리세를 덮칠 것처럼 점차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리스메가 있는 방향에선 끝없이 화염폭풍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양성의 마법사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정확히 조준해서 화염마법을 퍼부어댔고, 마치 그 자신 역시 함께 불태울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가발을 장식하던 그물에는 녹색 불꽃이 맺혀있었고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탁한 빛의 유리구슬들은 전부 타버린 뒤였다. 불에 탄 피부는 빨갛거나 검게 그을려 있었고, 뺨과 눈썹을 장식하던 비늘이 하얗게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는 게 놀라워 보일만한 상태였고, 그 상태가 오래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세야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잡히지 않았고, 굳이 알고싶은 것도 아니었다. 리스메에게 영감을 얻은 그는 영계와 접촉해 에너지를 순수한 힘의 형태로 끌어내어 흙속으로 그를 끌고가려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조준했다.

  그 충격파는 먼지와 피, 부서진 돌무더기로 이뤄진 구름을 일으켰다. 이세야는 폭발을 미리 예상하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돌조각에 이마가 찢어지자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운 피가 피부를 타고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주문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멀리 밀어내버렸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소매로 눈가를 대충 닦아낸 이세야는 벌떡 일어나 흙더미를 미끄러져가며 발목을 붙들어오는 반쯤 파묻힌 어둠의 피조물들의 손들을 떨쳐내고 언덕 사면을 따라 달렸다. 흘러내린 피가 무자비하게 두 눈을 찔러왔지만 그는 연분홍빛 눈물을 대충 훔쳐내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리폰의 날개짓 소리에 그는 위를 올려다 봤다.

  그리폰들이 자신의 기수를 구하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나로의 검은 줄무늬를 가진 회색 그리폰 때까치가 사면을 타고 빠르게 강하했다. 이세야는 붕괴 후로 다나로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 마법사는 이미 전투 초반부에 쓰러져 땅속의 어둠의 피조물들의 덮쳐대는 손길에 뒤덮힌 지 오래였으나, 때까치는 공중에서 그를 포착해낸 듯 했다.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착륙해 쓰러진 자신의 기수를 둘러싼 어둠의 피조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댔고, 헐록과 젠록들이 땅속을 뚫고 나오는 족족 발톱과 부리를 써서 놈들을 찢어놨다.

  황갈색 몸체를 가진 펠리세의 방랑자가 그 위로 나타났고, 태양 아래 두 날개가 구릿빛과 은빛으로 번쩍였다. 급강하 하여 궁수 근처에 착륙한 그는 발길질로 먼지폭풍을 일으켰다. 방랑자는 혐오에 찬 앞발질로 돌덩이를 든 헐록의 팔뚝을 뜯어버렸고, 다른 발로는 펠리세의 허리를 붙든 뒤 거칠게 날개짓하여 떠오르려 했지만 -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지반은 그리폰이 박차고 날아오를만한 여건을 제공하지 않았다.

  바닥은 계속해서 요동치며 아래로 꺼져갔다. 이세야는 순식간에 땅밑이 한 뼘 가량 내려앉는 바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마냥 순식간에 발 아래로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돌멩이와 자갈들이 사이사이 이리저리 튀어댔다. 엘프에게 도달하지 못한 레바스가 무너지는 언덕 위를 빙빙 돌며 좌절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방랑자가 싸우고 있던 언덕은 부서진 멜론처럼 무너져버렸다. 한 가운데 난 구멍으로 비탈을 이룬 지반이 빠르게 빨려들어갔고, 그리폰 역시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갈 따름이었다. 방랑자는 미끄러지는 흙더미를 붙잡고 미친듯이 날개짓을 해댔으나 도무지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고, 무너진 대지에서 솟아나온 어둠의 피조물들이 지렁이 같은 징그러운 손을 뻗어 맞서싸우는 그를 찢어댔다. 놈들의 손톱이 그리폰의 밝은빛 털가죽을 파고들며 선명한 붉은피로 물들였다.

  때까치 쪽은 상황이 약간 나았다. 그는 축 늘어진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반쯤은 달리며, 반쯤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며 날아오를 순간을 재고 있었다. 그 자신은 상처가 별로 없어 보였으나 부리 주위로 어둠의 피조물의 피가 검은 수염처럼 얼룩져 있었다. 그 맹금은 언덕 너머로 이세야와 잠시 눈을 마주쳤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수 년의 시간을 함께 해오면서 그리폰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와 수용의 눈빛을 발견했다.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은 때까치를 죽일 것이다. 회색 감시자들이 그리폰을 훈련시킬 때 전투 중 절대 물어뜯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심지어는 전투에 나서기 전 쇠로 된 주둥이마개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한 피는 입으로 섭취할 경우 대상을 뒤틀어놓고 광기로 몰아넣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알려진 치료법도 없었고, 그 치명적인 결말을 피해갈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까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폰의 눈빛에 깃든 체념이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체념은 했으나, 그 안에 후회라곤 없었다. 때까치는 바람을 타고 날개짓해 하늘로 솟아올랐고,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호스버그를 향해 사라졌다.

  이세야는 자신의 염력마법으로 방랑자를 풀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잠시 망설였지만...이런 혼란과 난장판 속에서는 제대로 조준할 자신이 없었다. 그 그리폰은 너무 빠르게, 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펠리세는 시야에 잡히지조차 않았다. 방랑자의 어깨부분의 움직임을 봐선 아마 그 그리폰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것 같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혹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 위에선 레바스의 귀를 멎게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 젠록의 붙들어오는 손을 발로 차버린 뒤 그는 재앙에서 벗어났다. 레바스는 그의 위치를 확보하자마자 강하하여 그를 안장으로 이끌었다. 그 자신의 끓어넘치는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리폰은 결코 놈들과 맞붙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삭히며 쉿쉿거린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내려자보자 이세야의 눈에 상황이 더 뚜렷하게 들어왔다. 절망적이었던 지상에서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언덕의 붕괴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땅을 빨아들이던 구멍이 점차 메워져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흙더미를 파헤쳐 올라오는데 성공한 어둠의 피조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대지의 가차없는 압박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비록 안더펠스의 풍광을 요란스럽게 바꿔놓긴 했지만, 감시자들은 승리를 얻어냈다. 지하대로로 향하는 통로는 봉인됐다.

  분명 승리처럼 느껴져야만 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지도. 하지만 피에 젖은 방랑자의 유해를 내려다보며, 이제는 영광의 흔적만 남은 조각난 털가죽과 깃털을 내려다보며, 가슴 속을 묵직하게 채운 공허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후회는 지금 감당할만한 사치가 아니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칼린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뒤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탈출 중인 리스메를 방해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용케 그 자살행위에 가깝던 불꽃연쇄폭발에서 살아남은 데서 그치지 않고 비틀거릴지언정 전장을 벗어날만한 기운을 끌어낸 듯 했다. 왼발은 쓸모없이 질질 끌려 걸음마다 패인 자국을 남겼고, 그을린 로브자락 역시 걸을 때마다 재가 되어 길 위로 흩어졌다. 그는 살아있는 존재보다는 악마에 사로잡힌 시체에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었고, 그의 그리폰이 그를 발견하곤 기쁨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흉터 투성이의 하얀 부리를 가진 사냥꾼이라는 야수였고, 개러헬의 굽은꼬리 다음으로 가장 빠른 그리폰 중 하나였다. 나이 탓에 속도가 좀 느려졌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을 향해 날개를 접고 하강하는 그의 움직임에선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힘겹게 비틀거리던 리스메는 사냥꾼이 미처 그에게 닿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화염구를 날려 마지막 어둠의 피조물을 처리한 칼린이 황급히 달려갔고, 지팡이 끝 수정구에서 치유마법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창백한 푸른빛 에너지가 양성의 마법사에게 닿아 퍼져나갔고, 피가 흐르던 화상부위가 약간이나마 아물며 거친 숨결도 조금 잠잠해졌다. 그가 둥글게 몸을 만 채 기운을 회복하는 사이 그의 그리폰이 가까이 내려섰다. 칼린을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접근한 사냥꾼은 한쪽 날개를 펼쳐 상처입은 그의 기수와 마법사 간에 거리를 띄웠다. 이세야는 걱정스런 얼굴로 레바스에게 낮게 날도록 신호했다.

  "드워프들이," 리스메는 부상을 입은 왼쪽 다리를 들어 어색한 동작으로 사냥꾼의 안장에 올라서며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들이 아직 저기 있어."

  "내가 남아있을게." 이세야가 말했다. 그는 퉁크와 뭉크가 서 있는 방향을 내려다봤다. 그 드워프들은 닥쳐올 어떤 위협에든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어 보였지만 이제는 위협이 될 어둠의 피조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응당 지켰어야 하는 수호자들은 도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였다. "날 수 있겠어?"

  "응." 리스메가 대답했다. 그는 사냥꾼의 고삐를 느슨하게 속목에 감은 뒤 안장의 앞가림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은 그는 고통으로 떨리는 한숨을 크게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까맣게 타버린 가발의 그물장식에 마지막까지 달려있던 구슬들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날 수 있어. 더 이상 싸울 일만 없다면."

  "좋아. 호스버그로 돌아가. 개러헬에게 드워프들을 태워갈 한 쌍의 기수와, 입구가 완전히 막혔다는 걸 확인할 정찰팀을 보내라고 전해. 어쨌든...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놈들의 증원군을 끊어놨어. 이제 포위공격을 무너뜨릴 때야."

  리스메는 부서질 것만 같은 지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전할게." 대답과 함께, 그는 사냥꾼에게 날아오르도록 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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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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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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