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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준비 됐어?" 펠리세가 외쳤다. 그 회색 감시자의 목소리는 그의 황갈색 그리폰이 상승기류를 따라 빙글빙글 날아오르는 바람에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준비 됐어!" 이세야는 마주 소리쳤다. 그는 바람에 날려 들어온 머리칼을 입에서 뱉어낸 뒤 레바스에게 펠리세 뒤를 따라 날도록 신호했다. 도시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재가 겨울 바람에 불규칙하게 팔랑거리다가 눈송이와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이루며 뺨 위를 스쳐갔다.

  하늘을 나는 감시자와 그리폰들 아래 성벽과 불타는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인 호스버그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바리케이드 너머 투석기와 노포의 사정거리 언저리에선 폭풍우 치는 바닷물결 같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몰아치다가 밀려나곤 했다.

  7년에 거친 공성전은 거의 소진 상태였다. 회색 감시자의 지도 하에 안더펠스인들은 수 년간 주기적으로 어둠의 피조물들을 몰아냈고, 때때로는 환상에 불과한 평화가 몇 달씩 이어질만큼 무리를 흐트러놓기도 했다. 하지만 대재앙은 언제나 새로운 공포를 이끌고 돌아왔고, 조금씩 뒤로 밀려난 안더펠스인들은 안전을 찾아 성벽과 무기와 역청 바른 나무로 쌓은 불타는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물러났다.

  회색 감시자가 아니었다면 그 도시는 애저녁에 무너졌을 터였다. 물론 때때로 주어지는 몇 달의 휴식은 호스버그의 농부들이 도시 근처의 메마른 땅에서 부족한 수확이나마 거두고, 사냥꾼들이 숲에서 겨우 살아남은 깡마르고 겁에 질린 사슴따위를 잡아올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도시를 온전히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호스버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감시자와 그들의 그리폰들이 덜 곤궁한 이웃 도시에서 물자를 지원받아 가져다준 덕분이었다.

  지금 이세야가 맡은 임무도 그런 보급 임무 중 하나였다. 안티바 시티 출신 마법사 칼린이 레바스의 승객용 안장 뒷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디스는 아마 개러헬과 함께 도시 다른 편에 있을 것이었다. 지난 수 년간 네 사람은 수없이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잃어왔지만 운이 따른 건지 능력 덕인지 그들만큼은 어떻게든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들은 오늘 호스버그 서쪽 편에 구호물자가 떨어질 수 있도록 어둠의 피조물들을 바리케이드 동쪽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맡았다.

  당연하게도, 유인을 담당하는 쪽이 물자 전달 팀보다 훨씬 위험도가 높았다. 익히 알려진 바, 어둠의 피조물에게는 전략이라는 것을 짤만한 복잡한 사고 능력이 없었다. 이세야는 대재앙과 싸우는 지난 몇 년 간 딱 두 번 높은 지능을 보이는 것 같은 에미서리를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감시자들은 그런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신속하게 우선적으로 처리하곤 했다.

  악마의 군주가 직접 지휘하는 게 아닌 이상, 마땅히 이끌어줄 능력있는 지휘관이 없는 대부분의 어둠의 피조물은 맹렬하게 달려드는 짐승 떼나 다름 없었다. 놈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약간 낮게 비행하면서 화염구를 한두 개 던져주거나 화살 한 무더기를 날리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유인에서 살아 도망치는 것, 어려운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고도를 높였다간 어둠의 피조물들이 금방 흥미를 잃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너무 낮게 날았다간 오우거가 던진 바위에 맞아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젠록이나 헐록 따위가 조악한 검은 활로 쏘아댄 눈먼 화살에 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둠의 피조물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불길 근처에서 낮게 나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위험했다. 연기나 불빛은 그리폰의 시야를 흐려놓을 수 있었고, 불길이 만들어낸 뜨거운 공기의 소용돌이는 비행을 흐트러뜨려 강제로 바닥에 내리게 만들 수도 있었기에 - 그리고 동료들과 동떨어진 곳에 착륙한다는 건 그 자체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굳건하게 버텨낼 수만 있다면 제법 규모 있는 부대를 무너뜨리고 수성중인 호스버그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도박을 걸어볼만 했다.

  앞 쪽에서 펠리세의 그리폰이 암갈색 날개를 접고 들쭉날쭉하게 솟아있는 어둠의 피조물 무리 쪽으로 하강했다. 놈들은 자철석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엉성한 검날을 공중에다 휘둘러대며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젠록과 헐록들의 행동은 마치 그렇게 하다보면 어떻게든 펠리세와 그의 그리폰 사이 40 피트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리폰은 30 피트 떨어진 높이에서 고도를 유지하며 놈들 위를 스치고 날아가 불타는 바리케이드와 요새로부터 무리를 끌어냈다. 펠리세와 동승한 회색 감시자 조락이 쏟아내린 하얀 깃이 달린 화살무더기는 울부짖는 헐록들로부터 새로운 경지의 분노를 일으켰다. 죽은 눈을 한 괴물들은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의 육신을 찢어발기기도 했으나, 대부분 감시자들을 쫓아 달려왔다.

  "우리도 가자." 이세야는 칼린에게 말한 뒤 레바스에게 펠리세를 따르도록 신호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마법사가 끄덕이는 게 눈에 들어왔고, 하강하는 그의 정신은 오직 어둠의 피조물에게 쏠려있었다.

  레바스가 최대한 낮게 날며 무리 위로 미끌어지자 가까워진 거리에 놈들의 차갑고 거친 타락의 냄새가 이세야에게 풍겨왔고, 곧이어 칼린이 뒤편에서 울부짖는 무리를 향해 영혼 화살을 날려보냈다. 워낙 뭉쳐있어서 위력이 강한 주문을 쓴다면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화염구나 폭풍우 마법을 썼다간 놈들이 흩어질 터였고, 놈들이 서로를 타고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되도록 한 무리를 이루게 두는 편이 나았다.

  앞쪽에선 세 번째 그리폰 팀이 아래로 향하며 펠리세와 이세야가 뒤따르도록 경로를 뚫고 있었다. 그리폰이 어둠의 피조물 위를 지나갈 때 위에 있던 기수가 괴성을 내지르는 헐록들 위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뒤집어 털어냈다. 유리병들이 챙그랑거리며 줄줄이 쏟아져내렸고, 어슴프레한 불빛 아래 독에 물든 싸락눈처럼 반짝거렸다.

  병 안에는 불투명한 우윳빛 액체가 담겨져있었고, 어둠의 피조물 무리 사이에서 깨진 유리병 사이로 액체가 기화하자 탁하고 두터운 안개가 피어올랐다. 연금술이 빚어낸 안개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지러워하며 비틀거렸다. 커다란 뿔이 달린 오우거조차도 안개에 휩싸이자 고통에 찬 울음을 내질렀다. 헐록과 젠록 무리가 비틀거리며 서로에게 부딪히고 속이 뒤집히는 지 신음을 내뱉는 모습에 회색 감시자들은 준비한 마법과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락, 펠리세, 그리고 유리병이 담긴 주머니를 털어낸 다른 궁수까지 모두들 가진 화살이란 화살은 전부 동원했고, 어둠의 피조물 위로 화살비가 단죄하듯 쏟아졌다. 바늘꽂이 모양이 된 오우거 한 마리가 바닥에 쓰러지며 헐록 두 마리를 깔아뭉갰다. 죽은 오우거 밑에서 비져나온 팔다리가 퍼덕거리며 버둥대는 모습이 꼭 죽어가는 거미 같았다.

  쓰러진 오우거 옆에서 주문을 외기 위해 입을 연 헐록 에미서리의 목구멍으로 한 감시자가 쏜 화살이 꽂혀들며 그 기형적인 혀를 뒤에 선 헐록의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에미서리는 화살에 꽂힌 채 끔찍한 휘파람처럼 들리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자 이내 조용해졌다.

  다른 어둠의 피조물들은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그 안에서 죽어갔다. 즉사하지 않은 놈들 역시 쓰러진 몸 위로 밟고 지나가는 동족들의 발길 아래 금세 형체를 알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이세야는 쉿쉿거리는 비명소리로부터 귀를 닫았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이길 때나 죽을 때나 똑같은 소리를 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에는 불쾌하게 들리는 으르렁거림과 그륵거리는 소리의 불협화음일 뿐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칼린은 이미 자신을 온전히 영계에 열어젖힌 상태였다. 그 마법사를 휘감은 에너지의 소용돌이 아우라가 어찌나 강력했는지 일반 사람의 눈에도 그 반짝임이 보일 정도였다. 아마 위협을 감지할만한 상황이었다면 어둠의 피조물조차도 그 위력에 압도됐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거나 무리를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세 번째 감시자 마법사가 변두리 쪽으로 날려보내는 화염구에 맞아 기괴하게 뒤틀린 몸이 불타는 사이 괴로워하는 것 뿐이었다. 칼린의 주위로 전류가 형성되며 그 마법사의 머리칼이 쭈볏 치솟았다. 곧이어 사이로 춤추듯 일렁이던 불꽃이 영계와의 강력한 연결을 따라 광채를 뿜어대며 채찍처럼 내리꽂혔다.

  이세야는 레바스의 고삐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폰은 닥쳐올 폭풍으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인도할 것이다. 짐승의 목을 가볍게 두들겨 조종을 맡기겠다는 신호를 보낸 뒤, 엘프는 스스로를 영계와 접촉하여 주문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겨울 공기가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안더펠스의 부드러운 눈송이가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결정을 이루며 짤랑거리는 작은 종 모양으로 가죽장갑 위를 훑어내렸다. 주위로 몰아치는 회오리 바람에 레바스 역시 이리저리 휩쓸렸다. 그리폰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기에 최대한 움직임을 조절하며 버텼지만, 이세야는 가장 위험한 고비가 곧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래 위치한 어둠의 피조물 위로 주문을 쏟아냈다. 웅웅거리는 눈폭풍이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휩쓸었다. 초자연적인 냉기가 처음 쓸고 지나간 자리 아래 부상 입은 헐록의 피가 까끌거리는 검은 얼음덩이로 얼어붙었고 젠록의 관절 마디가 수액으로 가득찬 나무처럼 터지는 가운데,  칼린이 겨울 폭풍 위로 자신의 주문을 이끌었다.

  전류가 소용돌이치며 어둠의 피조물들을 휩쓸었고, 번쩍이는 아치형 하얀 빛무리가 땅 위로 퍼져나가며 놈들을 베어냈다. 이세야는 번개에 마비된 헐록 무리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고, 화살집 꼴이 된 놈들이 눈보라 속에 비정상적인 형태로 몸을 치켜세우고 굳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류가 흩어지자 시체가 된 놈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쓰러졌다.

  레바스를 자신의 기수가 주문으로 불러낸 폭풍을 이겨내고 그들을 지나쳐 높이 높이 치솟아 전장을 뒤로 했다. 이세야는 그제야 다시 숨을 내쉬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풀어줬다. 칼린이 영계와의 연결을 끊자 그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아우라도 사라졌다.

  완벽한 작전이었다. 한 명의 기수도 잃지 않았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공격은 충분히 어둠의 피조물 군대에 타격을 입혔고, 지금쯤 도시 저 편에서는 토라덴 국왕의 병사들이 보급받은 소금, 육포, 보릿자루를 주워다가 호스버그의 기뻐하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을 터였다.

  온전한 승리였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몇 주, 혹은 며칠 안에라도, 그들이 이 밤에 죽인 어둠의 피조물의 두 배가 다시 자리를 메꿀 것이다. 악마의 군주의 부대는 끝이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넣고 몰살시키는 감시자들의 전술은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들을 끌어내 죽음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그건 전부 놈들은 도무지 실패에서 배울 줄 모르고 배울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병사들을 공급해냈다.

  대재앙은 악마의 군주가 쓰러지지 않는 한 이어진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다. 놈이 살아있는 한, 어둠의 피조물은 계속해서 올 것이다.

  "놈들이 여기 올 수 없지 않는 한." 이세야는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칼린이 되물었다.

  이세야는 안장에서 살짝 몸을 돌려 어깨 너머로 중년의 마법사를 돌아봤다. 마법의 기운이 사라진 칼린의 머리칼은 다시 평소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멀리서 일렁이는 호스버그의 불빛 아래 그 머리칼은 원래의 흑갈색보다는 검정색에 가깝게 보였다. 어둠 속에 가린 회색 눈은 눈구멍 위로 드리운 깊은 그림자 속에서 잠깐씩 반짝였다.

  "어둠의 피조물 말이야." 그가 대답했다. "오늘은 잘 해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잖아. 수천을 죽인다 해도 아무 차이도 없다고. 언제나 더 몰려올 거니까. 악마의 군주가 쓰러지기 전까진 계속해서 더 오겠지."

  "그래서?"

  "우리가 그 증원군을 끊어버리면 어떨까? 놈들이 호스버그까지 이동해오는 지하대로가 어디 있든 간에 그걸 막아버린다면? 그 다음에 도시 근처의 어둠의 피조물을 전멸시킨다면, 좀 다를 수도 있어. 그러면 이 수성전도 끝날 수 있어."

  칼린은 회의적인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하겠다고? 지하대로 입구는 수없이 많아. 오래된 드워프 통로 뿐 아니라 땅에 있는 틈새나 지진, 침식으로 생긴 균열 같은 것도, 혹은 어둠의 피조물들이 직접 파낸 곳도 있겠지. 누구도 어둠의 피조물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하고, 설사 놈들이 어딜 이용하는지 알아낸다 해도 고작 한 군데를 막아봤자 놈들은 다른 곳을 이용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이세야가 받아쳤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아무도 시도해보진 않았잖아.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해버리기만 했지. 내 말은,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자는 거야. 우리가 해야하는 거라곤 이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디를 통해 지하로 돌아가는지 추적하는 것 뿐이라고."

  "그걸 어떻게 하자고 할 건데? 누구도 그런 임무를 맡아 추적자로 나서려 하지 않을 거야. 혹여 우리가 헐록 한 마리를 무리에서 구별지을 수 있다 한들, 그리고 그 헐록이 어찌어찌 지하대로로 되돌아 간다 쳐도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쩌면 여름의 태양 아래서 낮시간동안 그렇게 행동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겨울에는 거의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 어쨌든 그 추적자가 길에 들어서는 순간 금방 발각되어 갈기갈기 찢어질 거야."

  "나는 추적자를 이용하자고 한 적 없어." 이세야가 말했다. "난 당신 힘을 이용할 거니까."

  "나를? 흥미로운 생각이군." 칼린은 가짜웃음임이 명백히 드러나게 입꼬리를 위로 당겨올렸다. "내가 무슨 수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은 혈마법사잖아." 이세야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들은 허공 위에 있었고, 겨울 공기에 그의 말은 쉽게 흩어졌지만, 칼린은 입모양으로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호스버그의 불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대재앙에 따라붙은 폭풍구름 사이로 달빛조차 미약했으나 이세야는 어둠에 가까운 시야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추궁이었다. 혈마법 - 말레피카룸이라 불리는 - 주술은 고대로부터 테다스 전역에서 금지된 영역이었다. 그저 익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중죄였고, 처벌 또한 단순히 사형으로 그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세야는 칼린과 어깨를 맞대고 싸워온 지 수년 째였다.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재앙의 도가니 속에서 다져진 둘 사이의 신뢰가 있었기에, 그는 이세야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 비밀을 진즉 밝힐 수 있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너무나 작게 되묻는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자칫 들리지 않을 뻔 했다.

  "나 역시 마법사잖아, 칼린. 난 당신이 영계와 접촉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는 걸 볼 수 있다고." 실제로 그 모습을 본 건 몇 번 안되었고, 대개 절박한 곤경 속에서 이미 여기저기 상처입은 상태일 때였기에 피를 매개로 마법을 쓰는 게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법도 했지만...그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의 마법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이세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겠어? 놈들 중 하나의...안으로 어떻게든 침투해서, 지하대로까지 뒤를 밟는다는 게?"

  그는 잠시 뜸을 들였지만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언제 실행하길 원하지?"

  "지금. 바로 오늘 밤에. 우리가 뭘 하는지 아무도 볼 수 없을 때. 사람들에겐 오늘 전투에서 부상입은 놈 하나가 괴상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추적해서 지하대로까지 따라갔다고 설명하면 돼."

  "어둠의 피조물 하나가 필요해."

  "구해올게." 이세야는 레바스의 고삐를 다시 붙잡았다. 털로 덮인 귓가로 몸을 기울인 그는 속도를 내기 위해 체중을 앞으로 실으며 속삭였다. "사냥하자."

  쉿쉿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리폰은 기꺼이 북쪽을 향했고, 천을 오가는 바늘처럼 구름 사이로 이리저리 헤치며 고도를 낮췄다. 그는 고개 숙여 대재앙으로 황폐해진 대지 위에서 어둠의 피조물의 간헐적인 음직임이 있는지 추적했다.

  그리폰의 시력은 탑승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이세야는 날개를 빠르게 퍼덕이며 속도를 높이는 레바스의 움직임에 그가 먹잇감을 포착했다는 걸 감지했다. 몇 초 뒤 그는 날개를 접으며 부드럽게, 눈에 잡히지 않을만큼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작은 규모의 젠록 무리가 그리폰의 날개 그림자 아래 이리저리 흩어졌지만 이미 도망치긴 늦은 뒤였다. 레바스는 발톱을 둥글게 말고 가장 후미에 있는 젠록 무리를 덮쳤고, 놈들의 목을 부러뜨려 단숨에 즉사시켰다. 쓰러진 젠록들의 파들거리는 손이 떨어진 검에 채 닿기도 전에 그 그리폰은 이미 다음 놈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본능을 지녔고 철저한 훈련을 거쳐왔다. 레바스는 젠록들을 습격할 때 절대 부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둠의 피조물의 혈액은 타락에 면역이 없는 모든 생물체에게 치명적인 독이었고, 회색 감시자들은 입단의식을 거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지만 그리폰들까지 그렇진 못했다. 그리폰이 어둠의 피조물을 물어뜯었다간 고통 속에 죽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레바스의 발톱은 충분히 쓸만했고, 1분도 채 안 돼서 그는 그들이 마주친 일곱 마리 젠록 중 여섯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하나 남은 녀석은 이세야가 은은한 마력 구체 속에 속박해둔 놈이었다. 그의 주문 덕에놈은 레바스의 발톱으로부터 무사히 보호받으며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주문의 유백색 결계 너머로 끔찍하게 생긴 누런빛 눈알이 혼란스런 빛을 띄고 그를 올려다 봤다.

  "이제 쉬어." 엘프는 레바스에게 속삭인 뒤 고삐를 여전히 붙든 채 안장에서 내려섰다. 그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 야수를 갇혀있는 젠록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붙들린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증오와 짜증으로 끽끽거리며 아주 잠시 저항하던 그리폰은 이세야가 고삐를 놓지 않자 툴툴거리며 기세를 꺾고 그의 인도를 따랐다.

  레바스가 어둠의 피조물에게 곧장 달려들지 않을 만한 거리를 확보한 이세야는 칼린을 돌아봤다. "이 정도면 되겠어?"

  "좋아." 마법사는 단검을 든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바닥 위로 얕은 자상을 냈고, 붙들려 있는 젠록의 발 한 치 앞에 핏방울을 떨궜다. 그 생물체의 흉측하고 밋밋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지만, 이세야는 어쩐지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허세 부리듯 나섰던 조금 전과 달리 눈 앞에서 직접 혈마법이 벌어지는 걸 보는 건 어딘가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닥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바늘로 찌른 거품방울처럼 마력장이 흩어졌다. 젠록은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레바스는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당장 달려들고 싶어했지만 이세야의 웅얼거리는 명령에 자신을 억제했다. 그리폰의 분노에 찬 앞발톱이 바위 투성이 흙바닥을 움푹 패이게 그러쥐었다. 목구멍 안에서부터 짜증섞인 울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를 지켰다.

  칼린은 어둠의 피조물이 움직이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젠록은 그대로 굳어섰고, 의문에 찬 으르렁거림이 입술 없는 입가를 따라 새어나왔다. 이어 놈은 물기어린 노란 눈을 감았다가 불쾌한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퍼드득 흔든 뒤, 그들에게 등을 돌려 바위 투성이 황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놈은 지하대로로 돌아갈 거야." 인간이 말했다. "지금 따라가면 놈들이 이용하는 입구를 찾을 수 있어."

  "완벽하군." 이세야는 안장에 다시 올라탄 뒤 장갑낀 손을 내밀어 칼린을 끌어올렸다. 그는 레바스에게 다시 날아오르도록 신호했고, 그리폰은 기꺼이 명령을 따랐다. "어느 쪽이야?"

  "지금은 일단 북쪽."

  그들은 금세 홀로 동떨어진 젠록을 따라잡았다.  일반적인 놈들의 특성에 반하여 한 가지 목적만을 품고 황량한 대지를 따라 움직이는 걸음은 재빨랐지만 하늘에서 날아오는 추적자를 따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레바스는 느릿한 속도로 어둠의 피조물 머리 위로 원을 그리며 날았다. 이렇게 느린 속도의 목표를 따라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목표를 쫒으며 비행한 지도 잠시, 칼린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내 비밀을 지켜줄 셈인가?"

  "당연하지." 이세야는 젠록을 눈으로 쫓으며 대답했다. 수 년간 대재앙과 맞서 싸워왔지만,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감시자의 의지 아래 온전히 속박된 어둠의 피조물이라니. 그는 등 뒤의 마법사를 향해 돌아봤다. "난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주길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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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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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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