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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자네들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예." 이세야는 지친 얼굴로 천 번쯤 반복한 것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우리는 왕족들을 잃었습니다. 악마의 군주가 허공에서 그들을 날려버렸습니다."

  그 역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화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모두들 분노에 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티바 왕족 전부를 잃고, 감시자 사령관 투랍마저 잃은 것은 회색 감시자의 전력과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예정대로 와이컴에 집결했다. 오스티버, 페나달 및 그들의 담당을 실은 배는 바다 너머에 머물렀지만 그리폰 기수들이 그들과 두 번의 접촉을 가졌고, 현재까지는 안전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안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확실했다. 대재앙은 바람 맞은 들불처럼 안티바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직 마땅한 저항군을 제대로 형성한 나라도 없었고, 자유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뿔뿔이 분열된 상태였다. 각각의 도시 국가는 그들의 생존보다도 독립된 자치권을 붙들고 있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둠의 피조물이 문 앞에 당도한 마당에, 그들은 안티바가 그러했듯 현실부정에 빠져 있었다.

  와이컴의 거리를 장악한 분위기는 여전히 불신과 확신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매일 시민들이 조잡하게 만든 무기로 급조된 민병대를 꾸려 훈련하는 모습이나, 흙 또는 갓 베어낸 나무로 보루를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동이 트기 무섭게 작업에 나서 깜박이는 횃불 빛에 의지해 늦은 밤까지 일했으나, 감시자들의 눈에 그 모든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해 보였다. 그들의 성벽은 어둠의 피조물에 대비해 지어진 게 아니었고, 그들의 가상한 용기에 비해 기술이나 숫자는 턱없이 뒤떨어졌다. 그들이 진짜로 해야하는 건, 이세야는 생각했다. 바닷가 섬쪽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뒤 병사들을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보내는 거지.

  하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와이컴은 어촌이었다. 그들의 배는 해안 정도만 오가게 만들어졌다. 넓은 바다의 깊은 수심이나 풍랑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 안되는 무역선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설사 자유동맹인들이 그들의 조각배에 도박을 건다 해도, 모두를 안전하게 나를만한 숫자는 되지 못했다.

  육로를 통해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향하는 것도 그리 나을 바 없어 보였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안티바 남쪽을 점령하는 바람에 와이컴 시민들은 어느 쪽이든 대도시로 가려면 대재앙을 똑바로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빠른 말을 탄다면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피해 그 여정을 이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 걸어가거나 기껏해야 노새 또는 소가 모는 수레를 타는 게 전부일 사람들이라면 느려터진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겐 버티고 맞서 싸우는 것 외엔 아무런 선택지도 남지 않았고, 승리할 가능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스티버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보다 이 도시가 무너지는 게 빠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세나스테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감시자 사령관은 누가 봐도 패배에 익숙치 않아 보였다. 20년 간의 회색 감시자 생활로 다져진 오만한 금발의 전사에게선 앞을 가로막는 무엇이든 순수한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은 엄격함이 묻어났고 - 여지껏 그런 방식으로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듯 보였다.

  하지만 대재앙은 그에게 달갑지 않은 실패의 맛을 느끼게 하고는, 그 위에 얼마쯤 더 얹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안티바 왕족들을 잃은 것이나 두 명의 훌륭한 회색 감시자와 그들의 그리폰을 잃은 것보다도 세나스테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투랍과 덴디도 빠져나오지 못한 곳에서 자네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그가 물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와이컴의 민병대 대장의 사무실을 사용 중이었다. 지난 임무에서 모은 깃발과 훈장들이 가장자리가 습기로 살짝 말린 못으로 고정된 낡은 지도들과 나란히 벽을 메우고 있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세나스테의 시선은 지도 위에 고정돼 있었지만 이세야는 감시자 사령관이 집중해서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제 능력 덕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요." 엘프는 대답했다.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를 꾀어내 자신들을 쫓게 했습니다. 저는 -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그리폰, 레바스가 - 약간 주의를 돌려놓긴 했지만 그 둘이 거의 다 했다고 봐야죠. 악마의 군주는 그...원래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둠의 에너지로 된 폭풍 같은 걸로, 저희를 허공에서 끌어내려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마법도 그런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영계와 전혀 이어져 있지 않았어요. 저희 전부 죽을 뻔 했는데, 개러헬의 동행이었던 마법사 칼린이,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발 같은 마법을 사용해서 저희를 풀어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 날의 주역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세나스테는 젊은 엘프에게 몸을 돌렸다. 사무실 높은 곳에 달린 창을 통해 비쳐든 햇살에 백색에 가까운 그의 짧은 머리가 빛났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쳐지며 엄격한 자세가 약간 풀어졌다. "악마의 군주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건 '아무 것도 안 한 게' 아니네. 자네의 첫 전투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상황을 벗어났군. 스탁헤이븐의 아마디스 바엘과 칼린 데발리스테는 귀중한 동맹이네. 자네의 개입 덕에 동행들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던 세 명의 회색 감시자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감시자 사령관은 결정을 숙고하는 것마냥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확답하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나와 함께 스탁헤이븐으로 돌아갈 걸세. 자네들 모두. 다만 자네와 남동생은, 도시의 방어를 구축한 뒤 안더펠스로 향해야 하네."

  "안더펠스로요?" 이세야는 멍하니 되물었다.

  "와이컴은 버틸 수 없네. 방어시설도 너무 열악하고 대재앙이 이미 너무 가까워졌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군대를 일으킨다 한들 - 불가능하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들이 해안을 따라 쏟아지기 전에 도착하도록 하려면 지칠 때까지 행군시켜야 할 것이고, 지친 병사는 죽은 병사나 다름없지." 세나스테는 가까운 지도 위로 굳은살 박힌 손을 쓸었다. "대재앙은 리베인도 덮칠 거야. 그 반도는 이미 본토와 너무 단절돼 있어.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쪽으로 향한다면 도저히 지켜낼 방법이 없겠지. 최대한 배와 그리폰 기수들을 보내서 구할만큼 구하려 시도는 해보겠지만, 그 나라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 없네. 하지만 스탁헤이븐과 커크월은, 어떻게 버텨낼 지지선을 만들 수 있을 수도 있어. 대재앙을 막아낼 시간이나, 군대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그의 연한색 푸른눈은 매처럼 냉정하게 이세야를 마주 봤다. "뜻을 함께 할 동맹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올레이나 티빈터 제국이 더 강력할 텐데." 이세야가 말했다. 반박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었다. "왜 안더펠스인 겁니까?"

  "그렇지."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동의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만하기도 하고. 자네나 개러헬은 지위도 고귀한 태생도 지니고 있지 않네. 심지어 엘프기까지 하지. 둘 중 어느 제국에 보내든 간에 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안더펠스에서는, 개인의 성취야말로 한낱 이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악마의 군주와 맞붙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네. 그러니 자네들이 가야하는 거고. 그들을 모으는 건 결코 쉽지도, 빠르지도 않을 거야. 안더펠스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대부분 작은 마을이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어. 도시라고 부를 만한 규모는 거의 찾을 수 없고.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데다가 대지는 그리 살만한 환경이 못 되지. 그리폰 기수만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유일한 수단이야."

  "그리고 제가 그 그리폰 기수가 돼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세야가 물었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 안장에 맞는 굳은살이 박히지조차 않은 신입이었다. 회색 감시자용 망토를 두르는 느낌 역시 어색하게 느껴졌고. 안더펠스의 주민들을 끌어내 어둠의 피조물과 맞서 싸우라고 할 그런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나스테는 매우 진지했다. "그들 중 하나가 되라는 거지. 그렇네. 자네와 남동생, 그리고 아마 다른 이들 중에서라면 칼린 정도일까. 그들은 분명 자네의 영웅적인 면모에 모여들 걸세."

  "그렇지 않는다면요?"

  감시자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음벽 같던 태도가 풀어졌고, 그는 벽에 걸린 지도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렇게 될 거야. 자네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세야는 그 말이 나가라는 신호임을 명백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무력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바깥에서는 파란 하늘 위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리본 같은 하얀 구름을 두른 눈부신 장관에는 바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대재앙에 따라붙는 끝없는 폭풍은 시야 끄트머리에서 겨우 보랏빛 멍처럼 흔적을 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만큼은 묵직하게 마을을 뒤덮었다. 수십개의 요리용 화덕에서 나는 연기 사이에는 끓는 역청냄새가 배어 있었다. 와이컴 사람들은 가축이란 가축은 모두 도축해서 염장하거나 훈제하여 요성을 대비했다. 줄지은 소와 염소 고기 옆에는 생선 꼬치가 나란히 열을 이뤘다. 해가 진 지 오래였으나 사람들은 준비에 여념 없었고, 방어벽 건설 중인 인부들을 위해 밝힌 불 위로 고기를 굽느라 바빠 보였다.

  참으로 용기있고, 가망 없는 노력이었다. 이세야는 도저히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도시의 하나뿐인 시장구역으로 향했다. 와이컴이 가진 네 개의 성문 중, 쌍두마차가 드나들만큼 큰 문은 하나 뿐이었다. 그 문 주위로 자그마한 시장 구역이 형성돼 있었고, 이세야가 향한 곳도 그곳이었다. 작은 술집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주민들로 가득 차 있을 테고, 이세야는 지금 같은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선술집은 문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유리 사과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았다.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터질 듯 가득했지만, 이세야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회색 감시자 문장을 보자마자 다시 마시던 음료와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엘프들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만 확실해지면 아무 문제도 없지, 이세야는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감시자든 하인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예상 범위에 있는 한 그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그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마 단순히 그가 감시자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유동맹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그들 종족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가 그들을 굳이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달갑지 않은 양심의 가책과 맞서 싸우며, 이세야는 바 쪽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터주며 회색 감시자에 대한 찬사나, 와이컴을 구하러 와줘서 고맙단 감사 따위를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와인으로."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별로 남은 게 없는 데다가, 남은 것들이라야 도저히 팔만한 품질이 못 됩니다. 감시자 분께 그런 걸 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남자는 자부심과 미안함이 섞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는 큰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제외하면 빼빼 마른 체구와 볕에 그을린 붉은 피부, 홍당무 같은 주황빛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얼굴과 머리색 중 어느 쪽이 더 밝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희도 도리라는 게 있어서요."

  "그럼 가진 건 뭔가?" 이세야가 물었다.

  "취향에 맞으신다면야, 드워프제 에일이 있습죠. 블랙워터 럼도 있고요. 겨울 사과주도 있지만 이것도 거의 남은 물량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시는 꼴을 봐서는 며칠 안에 침이랑 곰팡내나는 신발끈으로 주조한 맥주를 팔게 생겼습니다."

  "사과주를 주게." 이세야가 말했다. 주인은 능숙하게 잔을 채웠고, 돈을 내려는 그를 만류했다.

  주점 저 편에서, 시끌벅적한 사이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야!"

  그는 내부를 둘러봤다. 사람들 사이에서 개러헬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용케 차지한 것이든, 일부러 대접받은 것이든 간에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이야와 타이야도 함께였고, 드워프제 에일을 삼키느라 코를 찡그린 아마디스 또한 눈에 들어왔다. 암청색 후드로 얼굴을 가린 칼린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맞붙을 때 잃어버린 깃털달린 후드를 다시 장만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이세야의 눈에 그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마법사는 머리 위로 덜렁거리는 깃털모자가 없으니 좀 더 품위있어 보였다.

  이세야는 사람들을 뚫고 사과주 잔을 품에 안은 채 그들에게 향했다. "온 지 얼마나 됐어?"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께서 명령을 하달한 후부터 쭉." 개러헬은 과장된 몸짓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흔들며 인사했다. 냄새를 보아하니 동생 역시 사과주를 마시고 있는 듯 했고, 온 지 꽤 된 것 같았다. "훌륭하게 취할만큼은 있었지. 이리 와 앉아."

  "나도 그래야겠네." 이세야는 끄덕였다. 타이야는 자매와 같은 의자로 옮겨 앉아 다가오는 엘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세나스테랑 얘기했어?"

  개러헬은 어찌할 도리가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했지. 명령에 대해서야 굳이 말할 것도 없고. 누나는?"

  "너랑 똑같아. 스탁헤이븐, 그리고 안더펠스."

  개러헬은 자신의 사과주를 비운 뒤 두 손가락으로 빈 잔을 밀어서 이미 쌓여있는 빈 잔의 숲에 더했다. "뭐, 적어도 우리 모두 같이 다닐 수는 있겠네."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마디스가 끼어 들었다.

  개러헬은 금색 눈썹을 슬쩍 들어보였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스탁헤이븐에 있는 게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던데."

  "감시자 사령관께선 병에 걸린 오우거와 달콤하고 끈적한 사랑을 나눌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디스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검고 긴 속눈썹을 살랑이며 대답했다. "나한테 명령을 내릴 위치는 아니지. 스탁헤이븐에서 내 도움을 받길 원한다면, 그 여자는 미소 뒤에 이를 악물 지언정 내가 원하는대로 가게 내버려 둬야할 거야."

  "왜 그분이 스탁헤이븐에서 당신 도움을 받으려 한다는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당신은 까마귀단 소속도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아마디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림자 진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는 칼린을 가리켰다. "안티바 까마귀단은 저 사람이지. 하늘에서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고. 나는 페드라스 바엘의 둘째 딸이고, 스탁헤이븐 공작의 사촌이야."

  "그리고 루비 드레이크의 수장이기도 하지." 개러헬이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쪽일 거고."

  이세야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 역시 루비 드레이크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었고, 그 용병단의 새로운 수장이 자유동맹 출신의 젊은 귀족 여성이란 소문도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의 군대 규모는 천여 명의 보병과 삼백여 마리의 군마, 이백여 명의 궁수, 스무 명 가량의 훈련된 전투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도...그리고 그들의 막강함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는 챈트리의 템플러들이 그 이단마법사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드레이크를 우방으로 삼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만한 병력이라면 대재앙에 맞서 싸우는데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었다 - 유일한 대가라곤 그들 자신의 생존뿐인 전투에 그 용병들이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안티바 까마귀단이라고?" 타이야가 뒤늦게 칼린을 향해 눈을 깜박이며 질문했따.

  "그래." 그 마법사는 침착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드 아래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탁한 목소리의 짧은 대답이 그들을 침묵에 빠트렸다.

  "그렇구나." 타이야는 눈을 한 번 깜박이곤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댄 채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갈색 머리가 까끌까끌하게 두피를 덮고 있었다. "거기에 마법사도 있는 줄은 몰랐네. 대부분은 보통 그...뭐냐...있잖아. 암살자 같은 거인 줄 알았는데. 단도 같은 거 쓰고, 그러니까, 주문 말고 말이야. 당신은 그럼 무슨 일을 해?"

  "필요한 건 뭐든지." 칼린이 대답했다. 거친 목소리엔 씁쓸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이세야는 사과주를 비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은 탓에 그 탄산 음료는 곧장 머리를 울렸다. "필요한 건 뭐든지, 라고? 그럼 이 사람들을 와이컴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어?"

  후드 아래 깊은 곳에서 칼린의 두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잖나."

  타이야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 봤고, 옆에서 쌍둥이인 카이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안 될 건 뭐야? 마법으로 그렇게는 못해? 그 뭐냐...통로나, 그런 걸로?"

  "안 된다." 칼린의 대답은 건조하고 단호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이세야는 미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공연히 타이야를 바보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민망했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을 여기서 저기로 뿅 옮길 수는 없는 거거든."

  "다른 걸로 변신시키는 건?" 개러헬이 빈 잔 무더기 사이로 거나하게 취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 눈에는 익숙한, 성가신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생쥐나, 아니면...바퀴벌레 같은 거? 엄청 작은 걸로, 우리가 마을 전체를 함선이나 어선에 싣고 옮길 수 있을 만한 거 말이야."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그냥 애들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내용이야."

  칼린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후드가 젖혀지며 각이 진 그 마법사의 얼굴이 주점에 새어들어온 햇빛에 드러났다. "이야기일 뿐인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능력 밖이긴 하고. 황무지의 마녀들이라면 어떤 종류의 짐승으로든 변신할 수 있겠지. 원치 않는 상대를 변신시킬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하지만 나는 황무지의 마녀가 아니고, 너희들도 아니지."

  짜증 섞인 태도로 의자를 뒤로 젖히는 개러헬의 몸짓에 나무의자가 주점 벽에 부딪혔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아라벨." 이세야가 중얼거렸다.

  그의 남동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디스는 코웃음 쳤다. "아라벨이라니." 검은 머리의 자유 동맹 여인은 그 말을 따라 읊었다. "지상선박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데일리시들이 쓰는 것 같은? 커다란 수레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건 진짜야." 이세야가 말했다. "그리고 마법이 그것들을 숲 사이로 이끄는 거고. 우리는 사람들을 마법으로 다른 곳에 보내거나 생쥐로 변신시킬 수는 없지만, 마법을 쓰면 - 그리고 약간의 목공질을 곁들인다면 - 그들의 어선을 지상선박으로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제안이 테이블을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과 동료들을 파고드는 걸 지켜봤다. 어째선지,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개러헬은 흥미가 당기는 것 같았고, 아마디스는 회의적인 와중에, 쌍둥이는 그 참신한 발상에 순수하게 신이 나 보였다.

  칼린은 후드를 다시 온전히 눌러썼다. "아라벨에 마법을 걸 줄은 아나?"

  "몰라." 이세야는 인정했다. "나는 데일리시가 아니니까. 그들의 지식 또한 내겐 없지.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으니까, 우리 나름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진짜 아라벨만큼 튼튼하고 그럴싸하게 만들 필요도 없어.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삼켜버리기 전에 그들을 바다 건너나 강가로 옮겨줄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여전히 만만치 않은 목표야." 칼린은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새로운 마법을 고안해내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고는 있나?"

  "일주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최대니까." 그는 일어서며 자신의 빈 잔을 다른 잔 무더기에 더했다. "상황이 닥치면, 회색 감시자도 까마귀단과 같은 규칙을 따르지. 우리는 필요한 건 뭐든지 해. 우린 이걸 일주일 안에 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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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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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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