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12 숭고의 시대
안티바 시티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우렁차고 길게 울리는 그 소리는 구리종 안에 천둥을 가둔 것만 같았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울림이었다.
이세야가 계단을 다시 올라 그리폰들이 기다리는 성벽 위에 다다랐을 때, 발 아래 펼쳐진 도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찬란한 주홍빛이 챈트리 성당 창에 반사됐다. 거리는 마치 붉은빛 금빛 강처럼 보였다.
석양 때문이 아니었다. 안티바 시티는 불타고 있었다. 두터운 연기가 질식시킬 듯 묵직하게 거리를 메웠다. 성벽을 타고 울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비탄 섞인 메시지를 전하는 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적들이 공격해온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오고 말았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의 판단은 틀렸다. 안티바 시티는 며칠조차 버티지 못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이미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세야의 눈에 건물들 사이로 움직이는 거대한 뿔의 오우거와, 그 발치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쉬릭 무리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며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덴디가 계단 위로 올라서며 이세야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폰에 올라타. 움직이라고."
젊은 엘프는 멍하게 끄덕였다. 그는 레바스의 등 위에 올라 아마디스에게 손을 뻗어 올라타는 걸 도왔다. 인간 여성은 여지껏 이세야가 그래왔던 것처럼 두 번째 안장에 자신의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세야는 고삐를 쥐었고, 검은 깃털로 덮인 목에 몸을 숙여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단어를 속삭였다. "날아."
레바스는 왕궁의 돌바닥에 발톱을 박아넣으며 근육을 수축시켰고, 넓다란 검은 날개를 강하게 두 번 펄럭인 것만으로 공중으로 도약했다. 바람이 이세야의 얼굴 위로 몰아쳤고,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세상이 발 아래로 멀어져가자 순수한 환희가 차오르며 대재앙에 대한 공포조차 일순간 잊혀졌다. 그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안티바 시티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흥분은 찾아든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거리와 연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볼 수 없다는 게 차라리 고맙게 느껴졌지만, 이세야는 인형처럼 보이는 실루엣으로나마 놀이라도 즐기듯 창문을 통해 사람들을 끄집어내 불길 속으로 던지는 오우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체계적인 방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혼란 속에서 강이나 성벽 밖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작은 형상 하나가 까맣게 몰려든 어둠의 피조물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 그들은 대개 혼자이거나 작은 무리였고 금세 파도에 휩쓸린 나뭇가지 마냥 사라졌다.
대재앙을 막겠다고 맹세한 회색 감시자들이,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니. 그 부당함에 이세야는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아마디스가 뒤에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엘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에게 동승이 있다는 걸 잠깐 잊고 있던 것이다. "살아남아. 복수는 그 다음이니까."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로 무슨 복수를 한다는 거지? 놈들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놈들에게 가책을 느끼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죽여버리면 되지." 아마디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세야는 주춤했다. 그는 동행을 돌아봤고, 무표정하게 학살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을 확인했다. 아마디스의 얼굴 위로 움직이는 거라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이세야가 물었다. "평범한 안티바 레이디로 보이진 않아. 그 검들을 다루는 솜씨만 봐도."
아마디스가 웃었다. "안티바 레이디들을 별로 안 만나봤나 보네. 어떤 이들은 까마귀단으로부터 뜨개질 수업을 듣기도 하는걸. 굳이 말하자면, 틀린 지적은 아니야. 난 안티바 출신이 아니니까. 나는 스탁헤이븐 사람이야. 여기엔 친구나 좀 만들고 구혼자라도 얻어오라고 보내졌지. 둘째 딸이라면 응당 자기 살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니까."
"스탁헤이븐의 레이디들은 다 사람을 죽일 줄 알아?"
"몇몇은." 아마디스의 미소는 차가운 검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뛰어나기도 하지. 대재앙에는 꽤 쓸모있을 거야, 안 그래?"
이세야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단단하게 땋아올렸던 머리가 그리폰의 빠른 비행속도에 휩쓸려 느슨해져 있었다.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의 긴 금갈색 머리는 눈앞으로 마구 휘날렸을 터였다. "죽여야할 어둠의 피조물이 너무 많아."
"꼭 그렇진 않지. 딱 하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악마의 군주, 그놈만 죽이면 대재앙은 무너지는 거니까."
아마디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이 그들의 눈앞에서 쪼개졌다. 창백한 보랏빛 번개가 회색 장막 위로 갈래갈래 내려꽃히며 구름을 갈라놓고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그 위로 떨궜다.
그리고 폭풍 한 가운데로 악마의 군주가 날아올랐다. 넝마같은 날개는 거대했고, 몸체 위로는 굽이치듯 돌기가 솟아 있었다. 두 눈 안에서 부정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생김새는 드래곤과 흡사해 보였지만 어떤 드래곤도 그렇게 끔찍한 것을 속 안에 담고 있진 않았다. 암흑이 그 주위에서 이글거렸고, 암흑 자체가 그것의 영혼이었다.
그것은 쏘아올린 화살처럼 중력을 아무렇지 않게 거스르며 하늘 높이 치솟아 대열의 앞쪽에 있는 그리폰을 노렸다. 놈의 아가리 사이로 보라색 암흑이 뿜어져 나왔고, 끔찍하리만치 날카로워보이는 들쭉날쭉한 이빨이 아주 짧게 모습을 비쳤다.
그리고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들은 새까만 눈송이마냥 빙글빙글 회전하며 하늘에서 곤두박칠 쳤다. 이세야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추락하는 저 작은 점들이 휴블과 덴디를 비롯한 안티바의 왕비와 그 부친, 삼촌, 혹은 누군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리폰 검은발톱와 스카이악스, 최고의 그리폰 두 마리도 함께라는 것을.
씁쓸한 충격에 혀 안쪽이 얼얼했다. 분명 투랍과 다른 이들이 경고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투라고 할만한 것조차 없이 말이다. 그는 그들의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우리를 따라온다."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활짝 날개를 뻗은 악마의 군주는 요동치는 하늘에서 폭풍을 뚫고 빠르게 몸을 돌려 나머지 감시자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뒷편에서는 층층이 쌓인 적란운 사이로 번개가 지그재그로 번쩍였다.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이세야는 안장 위에 꼼짝 없이 굳어 있었다. 그 때 그의 눈에 개러헬이 요격을 위해 경로를 바꾸는 게 들어왔다. 미친 거 아냐?
그가 고른 하얀 얼룩무늬 그리폰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빨랐다. 굽은꼬리는 날개를 몸에 바싹 닿도록 접고 다리를 웅크린 채로 강하하는 독수리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가 감시자들을 덮치기 전에 놈에게 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 움직이는 둘의 각도와 궤도를 살핀 이세야는, 동생이 어떻게든 그렇게 해낼 것만 같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눈 깜짝할 새 휴블과 덴디를 부숴버린 놈에게, 아직 젠록 한 마리조차 죽여본 적 없는 개러헬이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군주조차도 그에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놈의 펄럭이는 날개가 돛처럼 바람을 끌어모아 활짝 펼쳐진 순간,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놈에게 충돌했다. 악마의 군주의 하체가 앞으로 휘청였고, 놈은 뒷발 발톱으로 공중에서 갈퀴질하며 울퉁불퉁한 꼬리를 휘둘러 개러헬을 후려치려 했다.
그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이세야는 그 순간 동생의 전략을 깨달았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다른 이들이 날아서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놈을 교란시키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리폰은 그 시도가 거의 가능해보이게 할만큼 빨랐다.
그 "거의"는 물론 그 둘을 죽게 할 테지만.
일렁이는 보랏빛 광채가 밤하늘을 갈랐다. 악마의 군주가 그 번쩍거리는 오염을 개러헬에게 뿜어낸 거이다. 하지만 그리폰은 공중에 그대로 머물렀고, 그 찬란한 어둠이 스쳐간 경계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개러헬이나 그의 그리폰은 덴디와 휴블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악마의 군주가 쏟아내는 치명적인 공격이 미치는 범위를 계산해낸 것마냥, 딱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은, 눈먼 행운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그들에게 호의적이든가.
이세야는 발꿈치로 레바스의 옆구리를 툭 쳐서 그리폰에게 그들을 향해 비스듬히 접근하라고 신호했다. 그 거대한 야수는 망설이는 듯 했지만 - 그는 레바스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까지의 찰나의 머뭇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 이내 앞으로 몸을 날려 개러헬의 반대쪽, 악마의 군주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세야에겐 다행스럽게도, 다른 이들은 누구도 그들의 멍청함에 함께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카이야와 타이야, 안더펠스 원주민 사내는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져 대재앙의 검은 구름 너머로 도망쳤다. 몇 분만 더 주어진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몇 분만. 2분, 3분 정도. 어쩌면 4분까지도. 그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그게 최대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레바스를 돌진시켰다.
2,000 피트 정도의 거리가 되자 악마의 군주를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비인간적이고 압도적인 그 냄새는 대지 아래 차갑고 죽은 영역의 냄새였다. 썩은 이빨에서 나는 입냄새나 오염된 강물 바닥의 진흙 냄새 같기도 했다. 완전한 오염의 냄새.
그리고 그 오염의 메아리가 이세야의 정신 끄트머리를 간질거렸다. 악마의 군주의 기묘하고 유혹적인 노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아주 미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감질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걸 원한다는 건 콜링의 신호기도 했고, 기실 그가 그걸 원한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그 소리는 차단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도 두렵고, 너무나도 낯선 기분으로, 그는 이 모든게 시험의 일부가 될 거라는 걸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고삐를 느슨하게 놓아버리고, 레바스가 자신의 경로를 고르게 내버려뒀다.
무모하고 멍청한 도박이었다. 이세야는 자신의 새 그리폰에게 몇 년은 함께 움직여온 숙련자들이나 기대할 수 있는 호흡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가진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레바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폰은 강력한 검은 날개로 전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의 상승작용을 붙들고 위로 치솟았다. 이세야는 그 열기 속에 섞인 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악마의 군주 뿐이었다.
놈에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1,000피트. 500피트. 이윽고 녀석의 그림자 속에 들어섰다. 넝마 같은 두 날개가 레바스의 머리 위로 절벽처럼 드리워졌다. 이세야는 이제 드래곤의 가죽과 그 안의 오염이 결정을 이룬 것 같은 붉은 피가 묻어있는 등의 돌기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
100피트. 위험구역 안이다. 놈이 머리를 돌려 입을 벌리기만 해도 숨결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놈은 그들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탈출 중인 살아남은 감시자들로부터 놈을 떼어놓기 위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흰 얼룩무늬 그리폰과 그 기수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안장 위에서 자세를 다시 바로 잡은 이세야는 지팡이를 쥐고 영계와 접촉했다. 이세야는 레바스가 날렵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직전, 가까스로 마력을 끌어내 악마의 군주에게 어설프게 뭉쳐진 연보라빛 에너지를 쏘아보낼 수 있었다. 그 영혼화살은 드래곤의 단단한 돌기 위를 적중했고, 접시만한 크기의 비늘 위로 번쩍이고 쉿쉿거리며 퍼져나갔지만 악마의 군주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뒤 레바스가 공격했을 땐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 그리폰은 악마의 군주 옆구리에 발톱을 박아 두 주먹은 될 법한 비늘과 피부 돌기를 뜯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그리폰 옆으로 비구름도 없는 하늘에 진득하고 차가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은 영혼을 찢어놓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날개를 몸에 바짝 붙여 접은 레바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강하했다. 그리폰과 함께하는 이세야는 내장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 안쪽까지 공황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옆에서는 아마디스가 비명을 질렀다.
악마의 군주의 꼬리는 그들의 머리 바로 위를 쓸고 지나갔고, 얼마나 아슬했는지 이세야의 머리칼 몇 가닥이 그 돌기 부분에 잘려나간 것 같았다. 거대한 머리가 뒤를 돌아봤고,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아궁이 같은 한쪽 눈이 그들을 바라봤다. 파괴적인 숨결이 그들을 노리기엔 각도가 좀 모자라 보였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드래곤은 굽은꼬리를 쫓던 걸 놔두고 그들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레바스는 요리조리 자세를 바꿔가며 맹렬하게 날개짓했고, 이따금 드래곤의 옆구리를 발톱으로 움켜쥐어 악마의 군주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쓰기도 하며 장단을 맞췄다 . 그 거대한 생물은 그 부피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방해물이 되었다. 그리폰이 그 근처에 붙어 제대로 이용하기만 하면 그들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2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다른 감시자들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이세야는 그들이 폭풍을 뚫고 안전한 곳에 다다랐으리라 생각했다. 개러헬 역시 도망칠 기회가 생겼을 테지...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속도 때문에 귀를 납작하게 접고서 암회색 구름을 돌아 방향을 틀었다.
마법의 사정거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개러헬의 동행인 칼린이 바다뱀이 휘감고 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영계로부터 불덩어리를 불러냈다. 불덩어리는 악마의 군주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사이 속도와 형태를 붙여갔다.
드래곤의 몸체에 많이 흡수되긴 했지만, 불덩어리가 부딪힌 충격에 레바스의 털이 바짝 섰고 열기가 그들을 휩쓸었다. 불길은 타락한 고대 신의 가죽을 그슬렸고, 이어 분노의 포효가 울렸다.
악마의 군주는 위로 치솟으며 길다란 몸을 뒤틀어 두 상대를 한꺼번에 시야에 확보하려 했으나 아무리 하늘에서 몸을 비틀어도 둘을 한 번에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레바스를 뒤에 둔 채로 굽은꼬리와 그 기수를 잡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 대신, 악마의 군주는 구름마저 삼키고 그리폰의 비행깃털이 날개 앞쪽으로 쏠리게 할만큼 강하게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소리지르며 악마의 군주가 빨아들이는 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 굽은꼬리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의 숨결이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보라빛 파동 에너지를 불러보려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놈이 숨을 내쉬었을 때, 이번에 나타난 것은 순수한 죽음의 소용돌이였다.
악마의 군주가 내뱉은 것이 마법임은 물을 것도 없이 분명했으나, 이세야는 그런 종류의 마법을 한번도 본 적 없었다. 그 주문 안에서는 영계의 느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와 악몽의 영역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악마의 군주가 만든 것과 같은 것을 빚어낼 수 없었다.
그 어둠의 소용돌이는 영과 육에 동시에 작용했다. 굶주린 바람은 그 아가리로 그들을 끌어당겼고, 동시에미지의 무언가가 그들의 생명력을 흐트러 놓았다. 악마의 군주의 소용돌이가 이세야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느껴졌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힘은 강해져갔다. 더 이상 가까워졌다간 그대로 으스러지겠지만 - 그러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을 게 분명했다.
멈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레바스는 온힘을 다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지만 그 그리폰 역시 점차 굴복하고 있었다. 날개에서 깃털이 뽑혀나와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 치며 끌려들어갔다. 반짝이는 검은색 미늘은 하얗게 뼈대만 남았고, 선명한 분홍색 깃촉 역시 창백한 구멍만 남았다. 이세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며 자신의 두 손도 하얗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굽은꼬리가 그들과 똑같은 싸움을 버티다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칼린은 회백색 그리폰의 등에서 일어서려 애썼다. 그의 깃털 달린 후드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절박하게 지팡이를 잡고 버텨섰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허리에 매어둔 주머니가 빙글빙글 돌며 굽은꼬리의 커다란 비행깃과 하얀 솜털과 섞여 사라졌다. 하지만 마법사는 끝까지 버텨냈고,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선으로 이루어진 속박하는 감옥이 악마의 군주 주위에 생겨났다.
그 마법은 고대신을 붙잡기엔 터무니없이 약했다. 악마의 군주가 붙들려 있던 시간은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 뿐이었다. 놈은 곧바로 빗물을 털어내듯 그 마법을 뿌리쳐냈다. 감옥의 형체가 흔들리더니 곧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마법은 칼린이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세야는 그가 쓴 마법이 뭔지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소용돌이에 다가갈수록 시야가 흐릿해졌다. 점차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쓸 수 없었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기도 전에 공기가 전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충격파는 느껴졌다. 칼린이 악마의 군주에게 날린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거의 흔적만 남아있던 그의 첫 번째 주문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진동이 퍼져나갔다. 그 충격에 두 그리폰은 소용돌이에서 떨어져나가 공중으로 하릴없이 빙글빙글 돌며 날려갔으나, 그 어떤 비행속도보다도 빠르게 악마의 군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세야의 머리가 마치 오우거로부터 얻어 맞은 것처럼 뒤로 꺾였다. 입 안에 피가 고여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유지했다. 힘겹게 피를 뱉어낸 그는 한 손으로는 안장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붙들었다. 허리를 붙든 아마디스의 두 팔이 철로 된 허리띠 같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옆으로, 위아래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했고 - 그리고 마침내, 어지러움 속에서, 헐떡이는 레바스가 수평으로 중심을 잡고 날았다.
간신히, 그가 해낸 것이다. 그들은 처음 있던 곳보다 한참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땅까지의 거리는 고작 수백 피트에 불과해 보였다. 이세야는 그들이 거의 바닥에 충돌할 뻔 했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고, 대재앙을 따라다니는 폭풍구름이 별들을 가리는 바람에 어둠의 피조물 무리와 황폐화 된 대지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먼 곳에서도 안티바 시티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빛나는 성벽은 저주받은 성배처럼 보였다.
그날 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창조주만이 알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탈출에 성공한 것 같았다.
"내려가자." 이세야는 그리폰에게 말했다. 그날 밤 더 비행하기엔 그는 너무 피곤했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생존은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와이컴을 찾아가는 것 역시 그럴 것이다. 그는 창조주에게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기적을 바랄 생각은 없었다.
==
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7 (0) | 2020.04.26 |
---|---|
LF - 챕터 6 (0) | 2020.04.26 |
LF - 챕터 4 (0) | 2020.04.26 |
LF - 챕터 3 (0) | 2020.04.26 |
LF - 챕터 2 (0) | 2020.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