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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이세야가 생애 두 번째로 그리폰 등에 올라탄 날, 그는 전쟁에 참여하러 떠나야 했다.

  그도 동생 개러헬도, 어떻게 봐도 준비가 된 상태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배멀미 하는 개구리보다도 시퍼래 보이는군, 상관이 그들을 그렇게 묘사했지만 그리 틀린 구석이 없었다.

  두 사람이 회색 감시자가 된 지는 이제 겨우 1년이었고, 그리폰 기병대 붉은 날개에 배속받은건 고작해야 네 달 전의 일이였다. 여전히 그들은 그리폰의 날개에 가려지는 범위를 흉내내기 위해 말안장 위에 거대한 나무판을 덧대고 타는 훈련 중이었다. 딱 한 번, 뒷편 안장에 끈으로 몸을 고정한 뒤 숙련된 감시자가 고삐를 잡은 상태에서 날아본 것이 개러헬과 이세야가 경험한 비행의 전부였고 - 그마저도 이 젋은 엘프들이 어지럼증이나 고소공포증 같은 애로사항을 겪는지, 괜히 쓸데 없는 훈련을 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시험에 불과했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였다면 그들은 아직 앞으로 1년 간은 공중전 구경도 못 해봤어야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재앙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네 달 전, 어둠의 피조물들이 새로이 깨어난 고대 신의 부름에 응답하며 깨어나 북쪽에서부터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고대 드워프의 지하대로를 통해 이동했고 깊은 땅 속에서부터 분출하듯 밀려나왔다. 그 갑작스런 기습에 테다스의 많은 나라들은 어둠의 피조물 군대을 상대로 적절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가장 처음으로 공격받은 안티바는 밀려드는 괴물 같은 군대에게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잃어나갔다. 흩어져 있는 영지 주둔군이나 외딴 지역의 마을 같은 건 어둠의 피조물에겐 방해거리도 되지 못했다. 무너진 성벽이 놈들의 발 아래 짓밟혔고, 사람들은 학살당하거나 지하대로로 끌려가 더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우아한 다리들과 조각품들로 유명한 강변 도시 셀레니는 나흘만에 포위공격에 무너졌다. 이후 수 주간 강물이 시체에 오염돼갔다. 안티바 시티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둥둥 떠내려오는 시체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부패해 부풀어오른 시체처럼 그들의 공포감도 커져만 갔다.

  이런 환란 속에서 젊은 감시자들의 훈련을 마칠 시간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매서운 바람에 찡그린 얼굴로 선임 감시자의 등 뒤에 꼭 매달려 안티바 시티로 날아간 이세야는 수도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티바 시티는 아른거리는 푸른 해안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셀레니의 폐허까지 이어지는 강자락을 따라 풍성한 녹색 목초지와 과수원이 도시 반경 10마일 가량을 두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 비옥한 땅의 경계에서, 대재앙이 안티바를 삼키고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을 따라 흐르는 오염이 그들의 발자국 아래 땅을 물들여 나갔다.

  하늘에서 1,000 야드나 떨어진 높이에서도 이세야는 놈들이 지나간 대지가 황량하게 메마르고 뒤틀린 걸 볼 수 있었다. 그 위에 펼쳐진 하늘 역시 음울한 검은 구름으로 흐려져 있었다. 대지가 스스로 흐르는 물을 빨아들여 없애버린 것처럼 메마른 계곡을 따라 낮게 흐르는 개울가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감시병처럼 늘어서 있었다. 농작지에는 녹색이라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썩고 시든 낟알들이 말라 비틀어진 회색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간혹 보이는 동물들은 까마귀 아니면 독수리였고, 깃털 하나 없이 피딱지 진 뒤틀린 그들의 몸은 어둠의 피조물 시체를 뜯어 먹으며 옮아온 대재앙의 오염 때문에 쪼그라들어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는 그저 검은 갑옷더미와 넝마 같은 깃발 덩어리처럼 보였다. 이세야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비록 어둠의 피조물들은 날지 못하지만 - 악마의 군주는 날 수 있었지만 놈은 아직 별로 목격되지 않고 있었다  - 놈들의 화살과 주문은 공중에 닿을 수 있었기에, 그리폰들은 그들을 피해 높은 고도로 날고 있었다. 에미서리와 오우거를 둘러싼 헐록이며 젠록 무리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이세야는 내심 그 사실에 안도했다.

  높은 고도에선 공기도 희박하고 추워서 그리폰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부대를 지나친 뒤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세야는 안티바를 가로지르는 내내 사람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다. 죽었거나, 도망쳤거나, 숨어 있겠지. 대신 안티바 시티 성벽 밖으로 수백여 개의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넝마를 걸친 피난민들은 수레와 엉성하게 만든 은신처에 몸을 의지한 채 구할 수 있는 것 무엇이든 먹어가며 절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심한 악취가 풍겼다. 수도는 대재앙의 소식이 닿자마자 성문을 걸어잠근 지 오래였지만 그들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이렇게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는 동료의 등에 기대 속삭였다.

  그리폰의 날개짓 소리와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목소리가 들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임 감시자는 용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휴블이었고, 이세야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헐록과 젠록에 맞서 싸워온 지긋한 나이의 숙련된 전사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그리폰 검은발톱의 등 위에서 와이스하웁트 근처를 정찰하며 보냈다. 쉽게 동요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안장에서 그를 돌아보는 표정만큼은 심각했다.

  "그래, 이대로 둘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시 그리폰을 이끄는 일로 주의를 돌렸다.

  몇 분 뒤 그들은 안티바 시티 상공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바람에 느슨해져 휘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붙든 채로, 이세야는 고개를 쭉 뻗어 검은발톱의 펄럭이는 날개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안티바 시티의 영광스런 위용에 대해선 책에서 읽은 적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항구도시의 풍경은 듣던대로 빛나는 보석 같았다. 대재앙은 아직 수도까지 미치지 않았다. 녹색 바다빛 터키석 바닥이 중앙대로의 하얀 대리석과 대비를 이루는 바다의 대로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황금 광장의 넓은 길목을 장식한 금박 입힌 십여 개의 조각은 이글대는 태양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그리고 숨막히는 위용을 굳건히 지키며 선 왕궁의 길다란 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저무는 해와 나란히 길게 뻗어 있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한 배는 이세야가 생각한 것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다. 왕실 전함이 몇 척, 그리고 안티바의 황금용이 새겨진 작은 배들이 보였지만 상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세야는 그들이 터무니 없는 금액의 승선료를 지불할 수 있는 승객들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태운 뒤 안전한 해안을 찾아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작은 어선들조차 자취를 감춘 듯 했다.

  뿐만 아니라 테라스가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에는 외부인의 흔적도 거의 없었다. 시장엔 인적이 드물었고, 노점상은 텅 비어있었다. 아직 대문까지 위험이 닥친 건 아니었지만, 안티바 사람들은 일찌감치 집안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다가올 폭풍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어 그들은 왕궁 외벽을 넘어 하강했고, 높은 돌벽에 가로막혀 이세야는 더 이상 도시의 풍경을 볼 수 없었다.

  궁성의 안뜰은 먼지폭풍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왕궁에 배치받은 이십여 마리의 그리폰들과 같은 수의 회색 감시자들이 도착하며 발생한 난장판과 소음은 궁의 하인들을 압도했다. 그리폰들은 특히나 까다로웠다. 그 거대한 야수들은 영역생물이었고, 가장 온순할 때조차도 성미가 급한 편인 마당에 오랜 비행을 거쳐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몇 마리는 외벽을 향해 날아올라 날개를 부딪히며 가까이 접근하는 누구에게든 괴성을 질러댔다.

  안티바인들은 그리폰들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감시자들에게 빵과 와인을 가져다 날랐고, 이세야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저 생물들과 몇 달을 가까이 지내며 빗질도 해주고 먹이를 먹이며 그 변덕스런 성미에 적응하려 했으나, 아직도 저 날개달린 맹수들에게 종종 위협을 느끼곤 했다.

  다 자란 그리폰의 몸길이는 부리에서 꼬리까지 12피트를 넘었고, 날개 폭은 그보다도 넓었다. 수컷은 보통 1,000파운드 이상의 무게를 가졌고, 암컷이라 해도 그보다 약간 덜 나가는 정도였다. 부리짓 한 번이면 거대한 사슴의 허벅지뼈 정도는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었고, 그 발톱에 걸리면 판금갑옷도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회색 감시자들이 보통 그 야수들이 거친 환경에서 오래 사람을 태우고 버틸 수 있도록 그리폰 기병으로 체구가 작고 가벼운 사람을 고르는 편이라곤 하지만, 건강한 그리폰은 보통 중무장한 남성 두 명을 태우고 싸울 수 있는 생물이었다. 그들은 공포라곤 모르는 격렬한 맹수였고, 야생의 아름다움과 불 같은 성미를 가졌다.

  이세야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의 힘과 우아함, 특유의 사향 섞인 체취를 사랑했다. 그들의 반짝이는 금색 눈이 빗질에 기분좋게 반쯤 감기는 모습이나, 털을 타고 울리는 그르렁거림을 사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거침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과, 오직 선택받은 기수만이 함께 나누는 비행의 축복을 사랑했다.

  그리폰은 언제나 선택할 줄 알았다. 누구도 그 거대한 야수가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태울 수는 없었다. 그리폰은 싫어하는 주인에게 노예처럼 속박되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산줄기에 들이박을 생물이었다. 그들은 결코 복속되지 않았고,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리폰은 그들에게 동등한 파트너이거나, 적이 될 뿐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그리폰 기병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그토록 긴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세야는 안티바인들이 그 거대한 날개달린 손님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걸 책하지 않았다. 그리폰은 결코 개나 말과는 달랐고, 올레이 귀족들이 보석줄을 매어 데리고 다닌다는 사냥용 얼룩무늬 고양이와도 달랐다. 그들은 자존심도 강하고 질투할 줄 아는 야성적인 생물이었고 현명한 이들은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회색 감시자 또한 이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하인들을 도와 그리폰을 위한 목욕통과 물을 날랐고, 상급 감시자 한 명을 골라 그 맹수들을 지켜보도록 한 뒤 열을 지어 궁으로 향했다. 그리폰들은 나중에 따로 먹이를 줄 예정이었다. 이렇게 밀집된 상태에서 고기를 먹였다간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이세야는 죄없는 하인들이 그들을 잘못 건드리지 않길 바랐으나, 오늘 밤 그는 그리폰 감시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동생과 함께 궁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개러헬은 걸어가며 금발머리에 앉은 먼지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마 그리폰 용 식수를 슬쩍 해다가 얼굴을 씻은 듯 보였다. 이세야는 웃음을 억눌렀다. 그의 남동생은 지나치게 허영을 부리는 편이었지만...적어도, 근거 없는 허영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엘프들은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아름다운 편이라고들 하지만, 그 기준으로도 개러헬은 특별히 빼어났다. 높은 광대뼈, 빛나는 녹색눈, 아가씨들의 - 그리고 적지 않은 사내들의 - 무릎에서 힘을 빠지게 하는 그 미소. 그는 자신에 비해 훨씬 출중한 외모를 가졌고, 솔직히 이세야는 그 사실이 반가웠다. 테다스의 엘프 여성에게 미모는 독을 품은 축복이었으니.

  물론 오늘 개러헬은 미소를 띠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안티바 시티의 분위기를 음울하다고 한다면, 왕궁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이나 다름 없었다.

  휴블은 왕궁의 수비용 외벽과 장식용 내벽을 지나 그들을 이끌었다. 하인들은 회색 감시자들이 지나가면 벽에 납작 몸을 붙이고는 깜빡이는 두 눈에 두려움 섞인 희망을 품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왕궁 수비대원들은 안티바의 황금용을 자랑스럽게 두른 의장용 갑옷을 걸치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인 뒤 문 양쪽에 절도있게 버티고 섰다.

  휴블은 빠른 속도로 그들을 이끌었지만, 알현실까지 가는 길은 마치 영원히 걸리는 느낌이었다. 이세야는 언제나 와이스하웁트가 세상에서 제일 큰 요새라고 생각해 왔으나, 안티바 왕궁도 만만치 않은 듯 했다.

  마침내, 벽을 메운 붉은색과 노란색 장미들로 향기가 가득한 안뜰을 지나, 그들은 왕과 왕비가 기다리는 작은 홀에 들어섰다. 안티바 회색 감시자를 이끄는 붉은 수염의 드워프, 감시자 사령관 투랍을 비롯한 다른 스무 명의 안티바 감시자들이 이세야 눈에 고위 귀족처럼 보이는 고상한 차림새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 옆에 서 있었다.

  "휴블." 감시자 사령관이 퉁명스런 인사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는데 별 문제는 없었겠지, 아무쪼록?"

  "그다지요." 휴블이 대답했다. 그는 왕과 왕비에게 정식으로 예를 취했다. 국왕 내외 역시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엘라우디오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이세야의 추측으로. 그는 선한 인상이었지만 다소 소심한지 매번 움직일 때마다 망설임이 눈에 띄었다. 왕비 쥬바나는 조금 더 나이들어 보였다. 풍성한 갈색머리 사이로 회색빛이 넓게 번져있었고, 웃음주름이 부드럽게 얼굴 위로 선을 이루었다.

  이세야의 기억이 맞다면, 그들은 왕실에 아주 드문 사랑으로 맺어진 결합이었다. 왕비는 부유하고 명망 높은 상인 가의 여식이었지만, 안티바의 귀족 서열로 치자면 터무니없게 낮은 혈통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엘라우디오는 그를 선택했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국민들은 둘의 결합을 지지해왔다. 그 지지에 왕비 쥬바나가 성실한 예술의 후원가이며 지닌 부의 상당 부분을 수도를 아름답게 하는데 투자했다는 사실이 한 몫 했다는 건 의심할 바 없었다. 그 영향 덕에 안티바는 테다스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이제는 올레이의 여느 도시들이나 쇠락해가는 티빈터 제국과도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우리 도시를 지키기 위해 왔소?" 왕비 쥬바나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홀 안이 어찌나 조용했는지 청중들 사이로 울림이 퍼져나갔다. "안티바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우릴 구해주러 온 것이오?"

  그토록 고요하고 엄숙한 청원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회색 감시자들은 바로 그러기 위해 온 것이었다. 휴블과 투랍은 시선을 주고 받았고, 이어 인간 감시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왕비의 찌푸려진 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니라고? 이 도시가 무너지면 수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오. 조각도, 음악도, 예술도. 우리 도서관도. 우리의 모자이크도. 그 작품 하나하나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루는 지식들마저. 이토록 오랫동안 축적돼온 유산을 저버리라는 뜻은 아니겠지."

  "안티바 시티는 지켜낼 수 없습니다." 휴블은 침착한 어조로 대답하며 두 왕족에게 시선을 향했다. "극히 짧은 기간조차도요. 며칠, 혹은 운이 좋아봐야 몇주일 것입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준비할만한 경고조차 받지 못했으니까요. 어둠의 피조물들이 안티바를 너무 빠르게 찢어놓았습니다. 도시에는 충분한 음식도, 훈련받은 병사도,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갑옷도 없습니다. 바다가 어느 정도는 도움될 수 있겠으나, 어둠의 피조물들은 우리를 굶겨 죽이기 전에 이미 성벽을 타고 넘어올 것입니다."

  "우리 성벽은 견고하오." 국왕 엘루아디오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투랍은 퉁명한 드워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함을 품고 대답했다. 이세야는 그 드워프가 이 사람들을 제법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의 희망을 되도록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 몇주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그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오?" 왕비가 물었다. 부드러운 음률 같은 목소리는 그 안에 담긴 불신 탓에 미약하게 떨려왔다. "회색 감시자란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오? 모든 음유시인들이 그대들의 전설에 대해 노래했건만, 우리더러 첫 공격을 맞기도 전에 이 도시를 - 이 나라 전체를 - 포기하라고 권한단 말이오?"

  "그 도시라는 건, 내륙지역을 어둠의 피조물에게 점령당하고 바다를 등지고 있는 도시 말씀이군요." 휴블이 대답했다. 존중을 두른 채 굳어 있는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초조함과 분노가 그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 "지도 상에서 안티바 시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들에게는 지원군도 보급도 전해질 수 없습니다. 놈들의 군대가 이곳 성벽을 공격할 때 쯤엔 나라의 다른 모든 곳이 정복당한 다음일 것입니다.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공성 무기가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놈들은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우거는 젠록을 집어던져 성벽을 부수고 돌더미를 사람들에게 쏟아내겠지요. 그 젠록들이 살아남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충분한 수를 던져놓고 나면, 대재앙의 오염이 퍼져나갈 것이고, 그러면 안티바 시티는 끝나는 겁니다. 이 가정에는 악마의 군주는 들어 있지도 않지요. 만약 놈이 나타난다면 우리에겐 며칠조차 없습니다."

  국왕 부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세야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안티바 귀족 무리를 살폈다. 그들 역시 죽을만치 두려워하는 게 보였다. 그 역시 그들 못지 않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대재앙이 테다스를 덮친 지도 200년이 지났고, 헌터펠의 토스(역주 : 세 번째 대재앙의 고대 신)에 대한 전설도 어린아이 동화 속에 흐려진 지 오래였다.

  마침내 괴물들은 침대 밑에서 튀어나왔고, 놈들의 발톱은 듣던대로 날카로웠다.

  "제가 휴블에게 감시자 부대를 데려오라고 한 것은 적어도 사람들을 대피시킬 기회라도 잡기 위해서입니다." 투랍은 여전히 고집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배들이 리알토 만으로 사람들을 태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큰 섬들 몇 곳이 대피처가 돼줄 것입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헤엄도 칠 줄 모르고 배도 없으니, 그곳에서라면 두 분 폐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안전할 수 있을 겁니다."

  국왕 엘루아디오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삼 분의 일이라도 건지면 다행일 걸세."

  "버텨서 싸운다면 하나도 건질 수 없는 겁니다." 투랍이 말했다. "폐하, 여기 있는 감시자들은 폐하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러 온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먼저 그들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셔야만 합니다."

  "생각해 보겠네." 왕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소리없는 박수를 한 번 쳤고, 이는 곧 알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과 휴블은 국왕 내외에게 예를 취했다. 다른 감시자들과 함께 그 동작을 따라한 이세야는 홀을 나서는 사령관들을 뒤따랐다.

  "정말 우리더러 이 도시를 지켜달라는 거야?" 장미 정원을 다시 지나는 사이 개러헬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림 몇 개랑 분수 따위를 위해서?"

  꽃의 아름다움도 이세야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고, 피부를 스치는 햇빛도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성문 밖에 진을 친 사람들과 주어지지 않을 구원을 기다리는 그들의 절박한 희망에 대해, 그리고 마찬가지로 절박한 문 안쪽의 사람들을, 국왕 부부가 공성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불가능한 희망에 매달릴 경우 모든 걸 잃고 말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렇겠지." 그는 동생에게 마주 속삭였다. "사람들이 그렇잖아. 다들 희망을 원하지."

  "우리가 이미 희망을 가져왔잖아." 개러헬이 대답했다. "우리는 상황이 허용하는 가장 큰 희망을 가지고 온 거라고. 그런데 그보다 더 원하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이세야는 우울하게 고개를 저으며, 지금 자신이 느끼는 비탄을 말로 풀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원을 지나 상대적으로 서늘한 궁의 안쪽 뜰에 들어서자 몸이 떨려왔다. 햇빛은 그를 조금도 덥혀주지 않았고, 그늘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투랍은 그들은 경비병 초소 중 하나에 데려다 놓았다. 그곳은 감시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리돼 있었다. 대재앙이 문앞까지 닥쳐온 마당에도, 궁의 하인들은 깨끗한 담요를 깔고 벽에 말린 라벤더 뭉치를 걸어두었다.

  이세야는 그 작은 보랏빛 꽃에서 풍기는 톡 쏘는 달콤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아름다움이란 개념도 알지 못했고,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사소한 배려 따위에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죽이고 파괴하고 오염시킬 뿐,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 라벤더는 다시 자라지 않을 테지.

  그는 침대 한쪽에 묵직하게 몸을 얹고, 어떤 하인이 그를 위해 세탁하고 개어 놓았을 거칠거칠한 모직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아마 그들은 안티바를 구하러 온 감시자들에게 감사하며 가장 좋은 이불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구해야 해." 그는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작은 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한 말도 아니었고, 혹여 누군가 들었다 한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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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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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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