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Age/Last Flight'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20.04.28 LF - 챕터 25 3
  2. 2020.04.27 LF - 챕터 24
  3. 2020.04.27 LF - 챕터 23
  4. 2020.04.26 LF - 챕터 22
  5. 2020.04.26 LF - 챕터 21 2
  6. 2020.04.26 LF - 챕터 20
  7. 2020.04.26 LF - 챕터 19
  8. 2020.04.26 LF - 챕터 18
  9. 2020.04.26 LF - 챕터 17
  10. 2020.04.26 LF - 챕터 16

LF - 챕터 25

2020. 4. 2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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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 - 챕터 24

2020. 4. 27.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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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5:24 숭고의 시대

 

  그의 장례식은 영웅의 장례식이었다.

  테다스의 그 어느 엘프도 개러헬,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만큼 웅장한 의식 속에 잠든 이는 없을 것이다. 황량한 테다스의 겨울 대지를 가로질러 왕과 황제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려 줄을 이었고, 혹자는 왕자나 마지스터를 대신 보내기도 했다. 제단을 위한 향료와 귀한 나무들도 쏟아져 들어왔다. 마침내 당일, 맑고 청량한 차가운 스탁헤이븐의 야외에는 세상의 내노라 하는 명사들 전부가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표시하려 모여든 든 보였다.

  그들은 그의 시신을 닦아, 눈처럼 하얀 아마포로 감싸 제단 위에 눕혀놓았다. 마도사와 템플러, 회색 감시자, 개러헬의 전우들 모두 엄숙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돌의 사생아들과 주인없는 자들, 무너진 탑의 일원들 역시 그들을 추방한 다른 모든 이들과 동등하게 자리했다. 물론 루비 드레이크 역시 은빛 갑옷을 입고 애도의 검은 면포를 두른 아마디스와 함께 자리했다.

  굽은꼬리는 제단 위 주인의 발치에 몸을 말고 누워있었다. 털을 고르게 빗고 얼룩무늬 섞인 하얀 날개로 심한 상처를 덮어서 가려놓아, 녀석은 그저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털이 무성한 왼쪽 굽은 귀가 곧게 위로 뻗어있어, 다시 들을 일 없는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값비싼 향유와 단 향의 약재가 마른 장작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죽은 영웅을 위한 웅장한 흑요석 제단 아래, 악마의 군주의 뿔 중 가장 큰 한 쌍이 전리품 삼아 놓여있었다. 이세야는 그것들이 장작에 불을 붙이기 전 치워졌다가 개러헬의 무기와 갑옷과 함께 와이스하웁트로 보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감시자들은 동생을 위한 기념관을 만들 것이다. 용기와 희생과 그의 이름 위에 붙일 그 모든 가치들을 기리는 성소로.

  로브를 걸친 성가대가 제단 주위로 둘러서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회색 머리의 챈트리 주교가 푸른 연기가 나는 향로를 기울이며 성구를 읊었다. 이세야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보고 있지 않았고, 귀로 들으면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홀로 애도하는 중이었다. 이 날 모인 이들이 아무리 예를 다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들, 테다스는 지금 슬픔이 아닌 기쁨과 환희를 누리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가 죽었다. 네 번째 대재앙이 끝났다. 긴 악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앞엔 평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동생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아마디스조차도, 눈물을 뒤로 한 채 앞으로 전진해야 할 자신의 책무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스탁헤이븐과 루비 드레이크가 그를 필요로 했고, 그의 그리폰 스모크는 굽은꼬리와의 사이에서 생긴 알을 배고 있었다. 그의 앞날에는 광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세야에겐 그렇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의 죽음은 그 엘프의 육체를 잠식하는 타락을 늦추는데 조금도 도움되지 않았다. 마지막 머리 한 올까지도 다 빠져버렸고, 오염의 회색 얼룩은 머리통을 뒤덮었다. 머릿 속을 채우던 광기의 속삭임은 훨씬 미약하고 흐려져, 다급한 외침 같던 예전에 비하면 먼 꿈결에서 들리는 웅얼거림 같았지만...여전히 그곳에서, 조용한 순간이면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머지 않아 그는 콜링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는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그 생각은, 이제는 차라리 반갑기까지 했다. 형용할 수 없이 무거웠던 그 짐을 내려놓고, 마침내 쉴 기회가 오는 것이다.

  멀지 않았어. 이세야는 성화 봉송자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과, 붉은 불꽃이 동생을 감싸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멀지 않았어.

 

* * *

 

  한 달이 지나자, 그 안식의 약속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멀어졌다.

  이세야는 그 자신의 유령과의 싸움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길 그 무엇보다도 원했으나, 지금 그는 레바스를 타고 와이스하웁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폰 때문이었다. 대재앙이 끝난 뒤, 녀석들은 기묘하게 굴고 있었고, 감시자들 중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상현상은 헤인 요새에서 머물던 녀석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 수석 감시자는 이세야를 안더펠스로 불러들였다. 콜링을 위해 떠나기 전, 그 엘프가 그리폰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길 바라며.

  이세야는 자신이 달리 도와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문제가 뭐였던 간에, 헤인 요새의 개체들로부터 이미 널리 퍼져나간지 오래였다. 게다가 레바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그리폰들은 이제 타락이 급속도로 진행된 그를 회색감시자보다는 어둠의 피조물에 가깝게 여겨 경계하는 편이었다.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었고, 사실 그 영광스런 야수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에, 그는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와이스하웁트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한 때 그리폰이었던 것들의 음울한 모사품이었다.

  둥지는 거의 비어있었다. 어느 정도는 잔인했던 지난 몇 년 간의 손실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회색 감시자들이 여전히 테다스 전역에 흩어져, 갓 피어오르는 평화의 시기 앞에 각 국가와 새 협정을 맺으러 다니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와이스하웁트의 산 둥지가 이렇게 많이 비어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둥지지기에게 들은 그 이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놈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남자가 설명했다. 그는 둔세인이란 이름의, 작달막하고 옹골진 체구와 그을린 갈색 피부를 가진 사내였고, 얼굴엔 곰보자국과 미소 위를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있었지만, 성품만은 유순한 편이었다. 그는 젊은 신병 시절, 배고픈 그리폰의 부리에 왼손 손가락 세 개와 엄지의 일부를 잃고도 손으로 직접 먹이를 줘가며 그 녀석을 회복시켰다고 했다. 삽십 년도 더 된 그 사고 이후로도, 이 날개달린 피조물을 향한 그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 했다. 둔세인은 일평생을 와이스하웁트의 그리폰을 돌보며 살아왔고, 이세야는 그의 얼굴이 이토록 슬퍼보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세야는 물었다. 엘프는 후드를 이마까지 눌러쓰고 검푸른색 스카프로 얼굴 아래쪽을 가리고 있었다. 흉물을 가리려하는 나병 환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실이 오히려 더 끔찍했고, 그는 오랜 친구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이세야는 마지막 품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따라오십시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세야를 데리고 관리가 안된 계단을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은빛 겨울서리가 덧씌워졌다. 발 아래 사락사락 밟히는 눈을 딛고 높은 성벽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자, 그리폰들이 식사를 하는 마당 아래 감시자들이 염소나 양을 던져놓는 돌로 된 넓은 그릇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염소나 산양은 들어있지 않은데도, 연회색 돌바닥 위에 갓 흘린 듯한 김이 올라오는 선혈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하얗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뜬 이세야는, 한 마리 그리폰이 마당 주위로 뱅뱅 돌며 다른 한 마리를 쫓는 모습에 둘이 놀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 다른 한 마리의 피가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싸우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둔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무력한 태도로 답했다. "숫놈들이야 때때로 발정기가 온 암놈이 근처에 있을 때 싸운다곤 하지만, 최근 몇 주간 둥지엔 암놈이라곤 없었습니다. 새끼를 근처에 둔 어미들도 때때로 싸우곤 하지만, 그 역시 없던지가 꽤 됐고요. 허기 때문에 싸운다기엔 음식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놈들은 보통 이곳이 공동구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놈들이 서로와 싸워대고, 그 정도도 매일같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상대로 싸우는데 그쳤는데, 한 2주 전부턴 사람들까지 공격하더군요. 부상이나 사나움 때문에 잠재워야 한 개체가 열둘은 되는 것 같습니다."

  등 뒤를 쓸어내리는 차가운 손가락처럼, 어떤 불안감이 이세야의 머릿 속을 스쳤다. "한 녀석만 관찰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녀석을 원하십니까?"

  "누구든 괜찮습니다." 그는 잠깐 멈췄다가, 생각을 다시 했다. "아니, 잠시만요. 저들이 전부 싸우고 있는 거라면...헤인 요새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녀석이 좋겠군요. 부탁합니다."

  "이쪽으로." 둔세인은 그를 데리고 담 안쪽의 둥지와 밀짚으로 덮인 복도를 지나, 남쪽으로 창이 뚫린 와이스하웁트의 아프거나, 다치거나, 나이 든 개체들을 모아두는 요양 둥지로 데려갔다. 회색 감시자들은 새끼들 역시 이곳에 모아두었지만, 지금 그 둥지들엔 낡은 얼룩과 거미줄만이 무성했다.

  "터스크는 우리 그리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녀석입니다." 둔세인은 작은 나무문 앞에 멈춰서서 설명했다. 이세야는 눈높이에 뚫려있는 창구멍을 통해 다른 둥지와 비슷하게 생긴 내부를 확인했다. 물양동이, 밀짚과 산양가죽을 깐 작은 둥우리, 그리고 산맥 방향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햇살이 그대로 내리쬐는 넓다란 바위 하나.

  아주 늙은 그리폰 한 마리가 그 돌 위에 누워 햇살 아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녀석은 늙어서 발과 꼬리뭉치 끄트머리의 털빛이 눈처럼 하얗게 세었고, 부리주변과 머리 뒤쪽의 깃털도 마찬가지였다. 터스크는 날개가 너덜너덜했고, 꼬리 역시 비루먹어 볼품 없었다. 놈은 귀가 아예 먹었거나, 거의 안 들리는 듯 했다. 이세야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던 녀석이, 조심스레 옆구리에 닿은 그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쉰 울음을 내질렀다. 백내장으로 탁한 녀석의 두 눈은 이 가엾은 짐승이 안전히 날 수나 있을지, 혹은 날 수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웠다.

  놈은 단순히 늙은 게 아니라, 아파보였다. 콧구멍 주위와 부리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맥박은 지나치게 빠른 와중에도 그륵거리는 숨소리는 한없이 느렸다.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잔기침이 섞여나왔다.

  무엇보다 거슬린 점은 짧게 깎인 네 다리 안쪽의 털과 깃털 위, 핥은 흔적인지 농포가 여기저기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부풀어오른 속살 표면이 꺼림칙하게 반들거렸고, 가까이 다가선 이세야는 늙은 그리폰의 피부 아래로 보랏빛 잉크처럼 얼룩이 번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의 피부 같았다. 마치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터스크?" 그는 작게 속삭였지만, 늙은 그리폰은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둔세인에게 등을 돌린 채로, 이세야는 손가락 끝을 찔러 피 한 방울을 내고 터스크의 발에도 똑같이 했다. 이 노쇠한 녀석이 배식장에서 싸우던 두 그리폰만한 분노를 품고 있을 거라 믿기는 힘들었지만...어느 쪽이든 그의 주문이면 진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영계의 자락을 붙들고 피와 마법의 흐름을 따라 터스크의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거친 붉은색 증오가 그를 맞이했다. 늙은 그리폰의 정신은 핏빛 분노의 바다 같았고, 그저 너무 늙고 쇠약해 행동으로 그 증오를 뿜어내지 못했을 뿐, 터스크의 머릿 속을 요동치는 감정에선 할 수만 있다면 모두를 죽여버리고 말았을 거라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감시자들과, 모든 그리폰들과, 마침내는 그 자신마저도. 놈은 근육을 따라 맥박치는 이형의 질병이 자신의 뼛속까지 파고든 걸 느끼고 있었고 - 감시자들에게도, 다른 그리폰에게도, 그가 파괴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느꼈다. 진저리쳐지는 혐오감이 놈을 소진시켰다.

  이세야는 충격에 빠져 물러났다. 그는 단연코 한 번도 터스크의 정신을 건드린 적이 없었고, 녀석을 입단식에 밀어넣어 악마의 군주의 피를 마시게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분노는 때까치나 그가 변형시킨 그 어떤 놈들보다도 격렬했다. 그리고, 비록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지만, 터스크가 품은 증오와 타락은 그가 다른 녀석들에게 걸었던 마법에 연결돼 있었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터스크의 정신에 드리운 분노의 붉은 장막에 묻혀 뚜렷히 구분하기는 힘들지언정, 그 그림자나 윤곽은 분명 그의 작업물이었다. 오염된 곰이 헐록으로부터 유래되어도 헐록과는 다른 것처럼, 변화하고 성장하여 다르고 새로운 모양이 되어 있긴 해도...그 기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물론, 그가 그리폰들의 정신을 왜곡시킬 때, 입단식을 마치 병처럼 생각하도록 하게 했지만, 그래서 놈들이 기침과 재채기로 피를 뱉어내긴 했지만...그렇다고 그가 심은 것이 실제 병인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놈들이 변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속임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정말 그랬을까?

  너는 혈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칼린이 그에게 기초적인 내용조차 제대로 가르치기 전, 그는 냅다 그리폰들의 입단식을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라 한들 과연 얼마나 더 잘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형태만 빌려온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실제로 병을 불러일으켰다 한들 누가 알 일인가?

  혈마법은 근본적으로 금지된 영역이었기에, 얼마 안되는 익힌 자들조차도 무지의 안개를 뚫어가며 개척하는 기술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직 대의를 위해 그 협곡을 침범한 것이라 생각했지만...동화 속의 멍청이들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다소 끔찍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어설픈 시도가 예기치 않은 재앙을 불러들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확신이 필요했다. 터스크에게서 물러나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지운 이세야는 복도에서 기다리는 둔세인에게 돌아갔다. "이 그리폰이 스탁헤이븐이나 아예슬레이그에 간 적이 있습니까? 그 어떤 전장에라도?"

  둥지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터스크는 그 어떤 전장에서도 싸운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 놈은 대재앙 전부터 이미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안전하게 날 수가 없었습니다. 안도랄이 눈을 뜨기 전부터도 이 녀석은 와이스하웁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래까지 버티고 있던 것만 해도 이미 놀라운 일이예요."

  이세야는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리폰들과 접촉한 적은 있고요?"

  "아주 잠깐씩, 놈들이 돌아왔을 때만요. 터스크는 가끔 요양중인 녀석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잘 못 보는 탓에 다른 녀석들을 거슬리게 하기 일쑤인데다, 이제는 누구랑 싸우게 둘만한 나이가 아니다보니. 다른 놈들이 재채기를 자꾸 하는 것도 걱정됐고요. 수석 감시자께선 별 일 아니라고 하셨지만, 터스크만한 나이에는 아무래도 조심해야죠. 아무튼, 이 녀석은 몇 년 간 따로 고립돼 있었습니다."

  "몇 년 정도입니까?"

  둔세인은 생각에 잠겨 미간을 찌푸렸다. "스탁헤이븐 전부터니까 - 5:21, 아니면 5:22 초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쯤 다른 녀석들과 마지막으로 같이 뒀던 것 같아요."

  2년. 어쩌면 3년 정도. 이세야의 머릿 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둔세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리고 터스크가 제한된 노출과 수 년에 걸친 잠복기를 거쳐 이렇게 된 거라면...그리고 그의 증상이 어떤 병,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면, 퍼질 시간은 충분히 길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엘프는 대답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셨습니까?" 둔세인은 말문이 막힌 그의 얼굴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동료들과 상의해볼게요. 지금으로선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 제가 뭘 어떻게 해야할까요?"

  "해야할 일을 하세요." 그는 흰색 부리의 늙은 그리폰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 * *

 

  세 달 뒤, 이세야는 수석 감시자가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제불능의 난폭함"을 보이는 그리폰을 전부 잠재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재앙 시기에 참전했던 녀석들 중 기침이나 재채기로 피를 토하는 녀석들 역시 전부 사살하라는.

  안티바에 있던 이세야에게 그 소식은 심장에 꽂히는 단검처럼 닥쳤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그리폰들을 소리 소문 없이 죽여왔으니, 공식 명령이 내려온 것은 그저 다른 국가들에게도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분노의 전염병이 와이스하웁트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문제로 수석 감시자의 도움을 요청해왔다는 뜻이었다.

  도움은 오지 않을 것이다. 회색 감시자들이 가진 해결책은 죽음 뿐이다. 수석 감시자의 명령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이세야는 여전히 어쩌다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그의 탓임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을 잠식해가는 선홍색 질병은 그가 대재앙 때 전투용 개체들에게 걸었던 의식과 연결돼 있었지만...이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게 정말 질병이라면, 피를 뿜어대는 것이 전파원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실제 질병이 아니었다. 아니면 맞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그가 그저 만들어냈을 뿐인 것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을 찾는 그의 임무는 와이스하웁트부터 시작됐다. 테다스에서 그리폰에 관한 기록을 가장 제대로 남겨놓은 이들은 회색 감시자들 뿐이었고, 그들은 그 어느곳보다 방대한 마법 서적 역시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대로, 둔세인과 다른 감시자들이 이미 답을 찾아 이것저것 들쑤셔 봤음에도 특별한 소득이 없었듯, 이세야 스스로 뒤진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이스하웁트에서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자, 이세야는 자유동맹으로 향했다. 그가 둔세인에게 했던 말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자신과 칼린 외에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혈마법사를 한 명도 알지 못했다. 회색 감시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나섰던 얼마 안되는 이들은 전장에서 모두 죽었고, 많은 이들이 말레피카룸에 손댄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을 내던졌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책이든 비밀 일기장이든, 혹은 암호로 쓰인 두루마리든 - 답을 줄만한 어떤 거라도, 하다못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제시해줄만한 것이라도 있을 것이다.

  혹여 그런 단서가 어딘가 있었다한들, 이세야는 스탁헤이븐에서 그걸 찾을 순 없었다. 커크월도, 탄터베일이나 오스트윅, 앤스버그도 아니었다. 컴버랜드의 피에 젖은 진흙이나 바다에 둘러싸인 와이컴의 잿더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티빈터 제국이었다. 티빈터의 마지스터들이 혈마법에 제법 관대하고, 심지어 반기기까지 한다는 점은 테다스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소문은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혈마법사이고, 그만한 규모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티빈터만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피를 갈구하는 마지스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세야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었지만, 티빈터 국경에서 접한 냉담한 반응에 생각이 바뀔 뻔 했다. 물론, 회색 감시자는 테다스의 구원자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물론, 그들도 동생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티빈터는 이세야에게 줄 수 있는 특권은 그저 그 땅에 들어서서 즉시 노예시장에 팔려가지 않는 것까지임을 분명히 했다. 공공 도서관에서조차 그를 노골적으로 꺼렸고, 마탑의 마법 서적 역시 허가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 이상으로 말을 이어가려는 마법사도 없었고, 그마저도 냉랭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뇌물로도 그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고, 비밀스런 지식을 공유하자 해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단호하고 확고한 거절만이 있을 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는 결국 포기했다. 10년 전이라면, 하다못해 5년 전 정도만 됐어도 이세야는 티빈터의 침묵을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고, 차가운 예절로 된 그 벽에 머리를 박아대며 어느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덤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럴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병든 그리폰에 대한 보고서가 매일 새로이 들어오고, 하루하루 죽음이 쌓여가고, 밤마다 꿈에서 콜링이 들려오는 지금에는. 티빈터의 완고함을 저주하며, 이세야는 비참의 제국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다음이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칼린은 안티바로 돌아가, 산산조각난 국가의 영광을 재건하는 고향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륙지역에는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 잔당과 오염된 짐승들이 떠돌았고, 음식은 부족하고 오가는 길도 무사히 남아있지 않았다. 악령과 안식을 찾지 못한 시체들은 피에 젖은 전장을 맴돌았다. 나라를 떠난 이들 대부분은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굳이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안티바 시티나 리알토만 근교 도시들은 영원히 비워 두기엔 너무 입지가 좋은 지대였고, 몇몇 담대한 이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고된 작업에 착수했다. 칼린은 개러헬의 장례식이 끝나마자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 날 이후 이세야는 그와 만나거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특별히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었고, 그저 두 사람 다 그 엘프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예감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슬픔과 죄책감이 싸워대는 지금, 그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상대가 달리 없었다. 칼린은 분명 혈마법의 문을 열려는 그에게 경고를 던진 이였지만, 동시에 그에게 그 열쇠를 쥐어준 이기도 했다.

  스스로 짊어진 자기혐오의 짐을 떠넘기려는 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고, 테다스 어디에든 이세야가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었더라면, 그는 칼린에게 그가 품은 회한을 함께 떠안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는 안티바 시티로 날아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칼린은 해안가에서 장력마법과 화염주문으로 항구의 잔해를 정리중이었다. 안티바의 부는 항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으니, 해상 무역을 다시 여는 것이야 말로 망가진 나라의 재산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그 사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회색빛 도는 수염을 길렀지만, 이세야는 금방 그를 알아봤다. 갈매기 무리가 자신들의 아침을 망쳐놓은 마법사에게 날개를 펄럭이며 깩깩거렸다. 안티바에서 투덜거리는 새떼 따위의 순수한 광경을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이세야는 미소지었다. 그는 칼린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정리하는 걸 기다렸다가 자욱한 먼지를 뚫고 다가갔다. "아직도 뭘 부숴대고 있어? 그쯤 했으면 지겨워졌을 줄 알았는데."

  "이세야!" 나이 든 마법사의 얼굴에 즉각 진심어린 미소가 떠올랐고...걱정어린 기색이 그 위에 섞여 있었다. 겨울의 막바지라, 얼굴을 두른 겹겹의 천이나 두 손을 싸맨 장갑을 추위 때문이라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칼린은 이세야가 그렇게 많은 옷가지를 두르고 있는 이유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방문 차. 잠깐 시간 돼?"

  "물론이지." 칼린이 지팡이로 가리킨 멀지 않은 건물은 다른 곳보단 좀 더 방음이 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새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창문 위로 못박혀 있어 늦겨울의 찬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단 것인지 푸른 생선에 왕관을 씌워놓은 그림의 단순한 간판이 문 위에 걸려있었다. "푸른지느러미 대왕. 평소 식사하는 곳이야. 요리사 실력이 다른데보다 낫고, 요샌 물고기들이 돌아오고 있어서 더 괜찮지. 보통 땐 에일을 제공하고, 와인도 가끔씩 들어와."

  "개인 객실은?"

  "날 그 정도로 그리워한 줄은 몰랐는데." 칼린의 농담기 서린 눈빛은 그가 마주 웃어주지 않자 금세 잦아들었다. 가려진 얼굴 위에서 어색하게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던 칼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고마워." 그는 칼린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내부는 따뜻한 식사를 즐기는 어부 몇몇과 여관 주인에게 들고온 상품을 팔려는 구렛나룻 무성한 행상인까지 있어 제법 소란스러웠다. 가구는 짝이 맞지 않는 잡동사니 모음이었지만, 제대로 손본 티가 났다. 이세야에겐 그 모양이 마치 안티바의 회복을 약속하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칼린이 들어서자 여관주인과 행상인이 익숙한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객실로 올라가는 그들에게 달리 말을 붙이진 않았다. 아마도 마법사의 손님에 대한 불문율을 익힌 듯 했다.

  위층에 도착하자, 칼린은 문을 닫고 열쇠를 근처 탁자 위에 떨궜다. "그럼, 무슨 일로 이렇게 비밀스러운 거지?"

  이세야에겐 대답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혈마법 때문에."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 겨우 붙들고 있던 의지가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가까운 벽에 미끄러지듯 주저 앉아 까끌거리는 석고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칼린을 직접 보면서 말하는 것보단 그 편이 쉬울 것 같아, 두 눈을 감았다. "내가 그리폰들에게 한 일, 그 입단식이...다른 녀석들에게 퍼지고 있어. 놈들 전부가 병들어가고 있어. 대재앙의 질병이랑도 비슷하지만, 퍼지는 방식이 달라. 아마 공기를 통해서일 거야. 아니면 피. 어느 쪽이든, 그게 녀석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어.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어. 혹시라도 도와줄 방법이 있나 해서 온 거야."

  오랫 동안, 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이세야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때까지도 나이 든 마법사는 아무 말이 없었고, 마침내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없다고?"

  "도와줄 방법이 없어. 혹시 가능하다 한들, 내가 그럴지 모르겠지만 -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도와줄 수 없어."

  "왜지?" 이세야가 물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반가움은 금세 잦아들었고, 낡은 공허함이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한 한 걸음이겠구나 하는 막연한 느낌이.

  "챈트리의 비둘라스 수사의 저서에 따르면, 마법은 그 고유의 법칙과 논리가 있고, 각각의 주문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지. 그는 가설에서, 혈마법의 위험성이란 그 존재가 악령을 품고 태어나기에, 그 대가 역시 감춰져 있다는 데 있다고 했어."

  "비둘라스 수사는 마법사가 아니었어." 이세야가 반박했다. "나도 그 글은 읽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그 자는 일생 한 번도 주문을 써본 적이 없잖아. 그는 마도사가 아니라 신학생이었지. 그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적 없는 세상의 법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지어낸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 간, 나는 그 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어. 그래, 어쩌면 그건 그저 추측일 뿐이고, 그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하지만 어쩌면 맞는 것일 수도 있어. 어쩌면 그 생각, 혈마법의 진짜 위험은 그것이 희생에서 능력을 끌어내기 때문도, 탐욕스럽고 야심찬 이들을 유혹에 빠트려 주문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도록 하게 하기 때문도 아니라는 그의 생각에, 진실이 담겨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위험성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몰이해 때문에 우리의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일지도.

  네 말이 맞다면, 그리폰들이 우리가 대재앙 때 했던 일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라면 - 그리고 이것조차 그저 '가정'일 뿐이야, 이세야, 너는 아직 그게 정말 원인인지조차 모르고, 알 수도 없을 거야 - 그런거라면, 대의를 위한 우리의 시도가 이 일을 이끌어낸 거야. 우리가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고, 실제 대가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추측일 뿐이야 - 하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다시 혈마법에 손을 대서 이걸 낫게 하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내 시도가 이 세상에 더 안좋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어?" 칼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혈마법을 다시는 쓰지 않을 거야. 마탑은 대재앙 때 회색 감시자들에게 조력한 혈마법사들을 눈감아주고 있지만, 그 인내심은 내가 말레피카로 알려지는 순간 끝날 거야. 난 대재앙이 끝난 뒤로 피의 힘을 빌린 적이 없고, 누구도 날 의심할 이유는 없지...하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날 눈여겨 보고 있어. 그래서 널 도울 수가 없어. 하지만 설사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한들, 그렇게 할 것 같진 않아.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순간이 닥칠 때까지 혈마법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나는 다시는 그 눈먼 도박에 손대고 싶지 않아."

  그는 이세야의 눈에 담긴 고통스런 눈빛에 말을 멈추었다. "미안해-."

  이세야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다 자신의 망토에 넘어질 뻔 했다. 그에게 물어본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 전부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데, 이세야가 그에게 자신의 슬픔을 나눠지려 오다니. "아니, 괜찮아. 당신이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나는 도와줄 수 없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말한 건 혈마법이 네가 생각한 것보다 큰 대가를 요구할 거라는 거였어. 하지만 그게 꼭 아무 희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 뜻이야. 난 이미 모든 곳을 뒤져봤어. 와이스하웁트, 자유동맹, 심지어 티빈터 제국까지도. 그 어디에도 답이 없어.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어." 열쇠는 문 옆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여관주인이 어딘가에서 작은 조각품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점토로 빚은 통통하고 동그란 배를 가진 익살스러운 드래곤 형상의. 열쇠고리가 그 통통한 주둥이에 걸려 있었다. 이세야가 그걸 잡아채자, 드래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각은 깨어지며 형태없는 사기 파편으로 흩어졌다. 조각들을 넘어 열쇠를 문에 꽂은 이세야는, 칼린이 문을 잠근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칼린을 돌아봤다. 그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칼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쓰지 마. 내가 치울게."

  "그게 아니라, 여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칼린은 다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몸을 숙여 드래곤의 파편들을 바닥에서 줍기 시작했다. "어쨌든, 네가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야? 너는 언제나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어. 공중을 나는 캐러반, 도피처 건설...그리고, 그리폰들의 입단식까지도. 그 모든 주문들은 너만의 창작품이고, 너는 그걸로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한 일들을 해냈어."

  이세야는 한 손을 문고리에 짚은 채, 주의깊은 태도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너한테 말한 건 왜 내가 널 도와줄 수 없는지 뿐이야. 하지만 내 이유가 너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지. 날 가로막는 한계가 너까지 막을 필요는 없어. 이전에도 아니었는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나는 분명 혈마법의 위험과 함정에 대해 너에게 경고했지만 - 악마의 군주가 목줄기를 노리고 있는 순간에 가능한 한 최대한 말이야 - 한 번도 너를 막은 적은 없었어. 다른 마법사들에게 답을 찾으려 하지마. 책이나 두루마리, 악령도 아닐 거야. 네 안을 들여다 봐. 네가 이걸 만들었어. 너 말고 그 누가 이걸 되돌릴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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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북스 : https://books.google.nl/books/about/Dragon_Age_Last_Flight.html?id=PbpZAwAAQBAJ&redir_es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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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회색 감시자들은 동틀 무렵 집결했다. 이세야의 지친 눈으로 봐도 장엄한 풍경이었다. 윤을 낸 갑옷 위로 회색과 청색의 단복을 걸친 채, 하늘로 치켜든 창 끝에는 눈처럼 하얀 비단 깃발을 나부끼며 행진하는  50명의 그리폰 기수들. 빛을 가리는 폭풍구름의 방해를 뚫고 새벽빛을 받은 흉갑과 어깨갑주가 장밋빛으로 반짝였다. 기수의 흥분을 감지했는지 가슴줄을 맨 그리폰들도 콧바람을 내뿜으며 의기양양해 했다. 입단식을 거친 녀석들조차도 평소보다 누그러진 태도였다. 여상스런 기침마저 기대감에 찬 쇳소리에 불과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적의 피를 상상하는 양 피거품이 인 부리를 핥는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

  선두에선 개러헬이 짙은 청색의 망토를 두르고 번쩍이는 백금으로 회색 감시자의 그리폰 문장을 새긴 둥근 방패를 든 찬란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그는 중장 갑옷 대신 단순한 투구와 완갑을, 흉갑대신 무두질한 가죽을 둘러 다른 감시자들에 비해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축제에서 행렬이라도 하는 것 마냥 끄트머리가 하얗고 텁수룩한 꼬리를 병사들을 향해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 묘한 생김새의 그리폰은 끝없는 대재앙의 전장을 거치고도 천성을 잃지 않은 듯 했다. 납작하게 접힌 왼쪽 귀가 전장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펄럭였다.

  이세야는 후방에 위치했다. 두건을 푹 눌러쓴 그는 얼룩덜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위로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맨 상태였다. 비행 중 바람에 두건이 벗겨지더라도 아무도 그의 타락의 상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안장 아래 레바스는 잔뜩 짜증난 채,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려하면 귀를 바짝 세웠다가 납작하게 눕히곤 했다. 많은 그리폰이 동요한 것처럼 보였고, 이세야는 기수들의 긴장이 고삐를 타고 그들에게 얼마나 전해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회색 감시자들은 표정을 절제하고 있었지만, 많은 수가 두려움을 품고 있을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타락한 그리폰들은 그렇지 않았다. 놈들의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건 끓는 듯한 분노와 적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고픈 열망 뿐이었다. 이세야는 그 분노가 행동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놈들을 강철같이 붙들고 있었다. 그가 맡은 게 여덟, 칼린이 맡은 게 네 마리였다. 다른 두 명의 혈마법사가 그 사이 여섯 마리의 그리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입단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 그 죄는 다른 누구에게도 짊어지게 할 수 없는, 이세야만의 것이었다 - 그는 타락한 개체를 다루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그들은 구름낀 보랏빛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대재앙으로 멍든 대지로부터 높이 날아오르자, 폭풍구름이 병든 땅을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멀리 안티바 깊숙히, 멸망한 도시가 있는 해안가까지 물러난 상태라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세야가 본 것이라곤 그들이 거쳐온 황량한 흔적 뿐이었다. 아래로 스쳐가는 불에 탄 농장과 무너진 벽은 이름없는 마을의 묘석이나 다름없었다. 죽은 대지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이따금 느리게 흐르며 넓은 둑 사이로 회색빛으로 뭉쳐졌다가 비죽 솟은 바위 사이로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 순간, 아예슬레이그의 사체를 타고오르는 검은 구더기 같은 어둠의 피조물들이 나타났다. 이 정도 높이에선 이세야도 비죽 솟은 오우거의 뿔 외엔 세세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조차도 분별가지 않는 덩어리 속에 유달리 큰 뭉치로만 보였으니.

  그 정도면 조준하기엔 충분했다. 그리폰 부대의 선두에서, 개러헬이 선명한 진홍빛 비단 깃발을 꺼내들어었다. 그의 신호에 맞춰 기수들이 강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갔다.

  화살의 범위 바로 위에서 하강을 멈춘 부대는, 진지를 떠나기 전 개러헬이 나눠준 가방 꺼내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십여 개의 묵직한 진흙 공이 허공을 가르며 어둠의 피조물들 머리 위로 회색빛 우박처럼 쏟아졌다. 도시의 자갈 바닥에 부딪힌 공들은 폭발을 일으켰고, 드워프제 스카이버너가 독구름과 산성 안개를 내뿜으로 대지를 파열시켰다. 빈 상점과 민가들이 무너지며 서까래와 기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일제 사격이었지만, 회색 감시자들이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은 아니었다. 개러헬이 한 번, 이세야와 전술을 논하던 중 그 폭탄들이 얼마나 비싼지 언급한 적이 있었다 - 아주 짧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저만한 폭탄 가격이면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금박에 싸인 루비를 뿌려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비는 이만한 파괴를 일으킬 수 없었다. 분노에 차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의 비명소리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회색 감시자들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놈들을 조종하는 악마의 군주는 아무리 지독하리만치 영악할지언정, 테다스의 정치나 경제구조까지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용을 닮은 어둠의 피조물도, 그의 졸개들도 감시자들이 그러한 공격을 열 번, 스무 번, 천 번씩 반복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에겐 공중의 그리폰과 맞서 싸울 방법이 아무 것도 없었다...악마의 군주 그 자신이 오지 않는 한.

  개러헬은 놈들이 그리할 거라는 데 걸었다. 어둠의 피조물 측에서 회색 감시자들의 포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그 뿐이었으니.

  붉은 깃발이 다시 올라갔고, 감시자들은 앞선 공격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재 사이를 뚫고 강하하여 두 번째 포격을 가했다. 다시 한 번 대지가 독에 물든 불꽃과 함께 폭발했고, 죽어가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울부짖음이 허공을 채웠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몇 채 안남은 민가의 창문으로 탁한 녹색 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놈들의 울부짖음이 좀 다르게 들리는 걸 감시자들은 느낄 수 있고, 공포보단 승리감 어린 그 소리에,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도전에 응해왔다는 걸 안장을 돌리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예슬레이그의 지옥을 뚫고 솟아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악몽에 육신을 입힌 듯한 형상이었다. 그들의 폭탄에서 피어오른 독안개가 놈의 너덜너덜한 검은 비늘 위로 미끄러졌고, 맹독의 망토를 형성하듯 놈의 갑주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세야가 악마의 군주를 본 건 안티바 시티가 무너진 후로 세 번째였고, 놈은 볼 때마다 이전보다 커지고 끔찍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대재앙 자체가 놈에게 힘을 주는지도, 아니면 그저 타락에 병든 그의 상상일 뿐인지도 몰랐다...하지만 악마의 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어닥쳤고, 이어 얼음장 같이 차갑게 영혼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기수의 인도를 잃은 녀석들과, 굳어버린 마법사의 통제에서 잠깐이나마 풀려난 그리폰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혼란 속에 우왕좌왕했고, 당초 계획했던 것처럼 매복 지역으로 후퇴하는 대신 소중한 몇 초의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오직 굽은꼬리의 하얗고 구부러진 꼬리를 따른 몇 마리만이 동맹군이 숨어있는 지점으로 달아났다. 나머지는 혼란에 붙들리고 말았고 -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치명적인 잠깐이었다.

  이세야가 도무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르게, 악마의 군주는 이미 그들 위에 와있었다. 놈의 날개짓에 레바스가 옆으로 밀려났고, 놈은 그들을 지나쳐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감시자들에게 향했다. 검은 그리폰은 분노에 차 울부짖으며 중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둘을 지나친 악마의 군주가 뼈로 된 거대한 턱을 벌리자, 놈의 목구멍 안에 사악한 빛무리가 맺히며 타락한 드래곤의 뿔과 턱 주위 부러진 뼈 경계에 역광을 드리웠다. 그 뒤는 레바스의 비틀거림 때문에 이세야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잠시 뒤 그들이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라곤 칠흑같은 죽음의 암흑을 둘러싸고 휘몰아치는 보랏빛 불꽃과, 들려오는 포효소리 뿐이었다.

  악마의 군주의 불길은 흐트러진 회색 감시자 편대를 뭉텅 베어냈다. 그리폰과 그 기수들은 화톳불 위로 던져진 낙엽처럼 튀어 올랐다. 이세야는 그들의 피부가 일그러지는 것을, 검은 구멍 같은 입이 벌어지는 걸 보았고, 그들이 부푼 구름 아래 기다리고 있을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빙글빙글 떨어져 내리는 것도 보았다.

  마법사 중 한 명은 떨어지는 도중 변화했다. 피부를 뚫고 나온 불길이 흘러내리며 영계에 대한 통제력을 놓쳐버린 - 혹은 굴복해버린 - 그의 육체를 타락의 괴물로 변화시켰다. 이세야는 폭풍 사이로 떨어지는 그 여자의 끔찍한 몰골과 비인간적인 분노로 뒤틀린 얼굴을 아주 잠깐 밖에 볼 수 없었고, 이내 그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눈 앞에서, 불타고 남은 로브자락이 기이할 정도로 느릿하게 휘날렸다.

  그리고 재 섞인 구름 사이로, 그리폰들이 방금 떨어진 타락의 괴물보다도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전부 돌아온 건 아니었다. 대다수라 할 수도 없었다. 추락한 마법사가 통제하고 있던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 중 두 마리만이 돌아왔고, 놈들에겐 이제 복수를 추구하는 걸 막아줄 고삐가 없었다. 이세야는 숨조차 멎은 채 바람 사이로 그들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놈들의 안장은 비뚤게 기울어졌고, 가슴줄을 맨 은색 띠는 악마의 군주의 부식성 숨결에 숯처럼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녹아내린 깃털은 끈끈한 검은 피로 - 그들 자신의,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뒤틀어진 피로 - 뒤덮여 있었고, 이세야는 너덜너덜해진 날개 사이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웅웅거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한 놈은 얼굴을 직격당했는지 두개골 반쪽이 으스러져 그대로 뼈와 검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구름 사이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더 보고 싶지 않을만큼은 봤다고 생각했다.

  그 그리폰들은 불가능을 뚫고, 살아있었다. 그들은 불가능을 뚫고, 날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불가능을 뚫고, 공격에 나섰다.

  악마의 군주는 놈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타락한 드래곤은 불타는 두 눈을 개러헬과 나머지 기수들에게 고정한 채, 대열을 회복하고 매복 지역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그리폰들이 놈의 노출된 복부로 한 쌍의 쇠뇌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그 충격에 한 쪽으로 밀려난 악마의 군주는 공중에서 거의 떨어질 뻔 했다. 피와 검은 비늘이 상처로부터 떨어져내려, 구름 사이를 뚫고 떨어지며 쉿쉿 소리를 냈다.

  그리폰 중 한 마리는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진 듯 했다. 이세야는 녀석의 시체가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봤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복부 아래쪽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잡아 뜯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움켜쥐고 뜯어냈다. 드래곤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몸 전체를 이리저리 흔들어대 그리폰을 떼어내려 했으나, 놈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둘은 몸부림치며 검푸른 구름막을 뚫고 가까운 만 근처까지 떨어져 내려가, 이내 이세야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레바스는 계속해서 날아가 개러헬과 나머지를 따라잡았다. 넓게 펼쳐진 검은 날개가 폭풍을 뚫고 빠르게 날아 남아있는 감시자들과 거리를 좁혔다.

  "어떻게 된 거야?" 개러헬은 목소리가 들릴 거리까지 가까워진 이세야에게 소리쳤다. 그와 다른 비행 부대는 악마의 군주를 갑작스레 붙든 게 무엇인지 보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저 그들이 추적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이 되돌아왔어!" 이세야가 소리쳐 대답했다. "타락한 놈들이. 그리고 공격했어.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가 아직도 싸우고 있나봐."

  "혼자서?" 개러헬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바람을 뚫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악마의 군주와 혼자 대적하고 있다고?"

  "그래." 하지만 이세야의 대답과 동시에, 악마의 군주의 뿔달린 머리가 등 뒤의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드래곤은 격류를 가로지르는 전함처럼, 날개짓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차없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다른 그리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놈이 남긴 상처가 악마의 군주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섬뜩한 느낌이 이세야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마법? 판단은 짧았고, 이내 보랏빛과 검은빛의 힘의 소용돌이가 감시자들 한가운데 생겨났다.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굽은꼬리였다. 얼룩덜룩한 흰색 그리폰은 날개를 접고 그대로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도 똑같이 따라하려 했으나, 나이와 부상이 늙은 그리폰의 반사를 늦췄고, 충분히 빠르게 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그리폰들은 양쪽으로 갈라서려 했다. 위로 타고 오르려는 무익한 시도를 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은 회오리 속에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갔고, 그 안에서 뒤엉켜 서로 부딪혔다. 레바스의 고삐에 절박하게 매달린 이세야는 귀를 찢어놓는 바람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뼈 부딪히는 소리와 갑옷의 마찰음에 움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깃털과 피와 살점이 섞인 회오리 속에서 그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천둥같은 불협화음으로 머릿 속을 울려오는 영계의 악령들의 속삭임조차 그를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의 공포와 고통에 찬 비명을 잠재워주진 못했다.

  악마의 군주는 방향을 잃은 감시자들에게 타락의 불꽃을 날리고 또 날렸다. 이세야의 눈꺼풀 위로 번쩍이는 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서늘함이 그를 휘감아 와 영혼까지 전율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공중에서 버티려 발버둥치는 레바스의 위에서, 악마의 군주를 이렇게나 가까이 둔 채,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혈관 안에서 요동치는 와중에, 영계의 악령들은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 하는 이런 순간에까지 혈마법에 매인 그리폰들을 붙들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놓아버렸다. 붙들려 있던 그리폰 중 세 마리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팽팽히 당겨져있던 빛줄기가 끊어지는 것처럼, 이세야의 머릿 속에서 마법이 무너지며 끝없는 어둠 속에 반짝임이 잠시 맴돌았다. 나머지는 아직 그가 붙들고 있었다.

  풀려난 그리폰들은 불길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에게 몸을 내던졌다. 한 마리는 보랏빛 불길에 휩싸여 날개짓을 할 때마다 불타는 깃털이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한 순간 회오리바람이 레바스의 왼쪽날개를 붙들어 그를 바깥으로 내던졌고, 이세야의 시야에서 악마의 군주가 사라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순간,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깃털들이 텅 빈 허공을 맴돌았다. 가느다란 햇살이 은총처럼 고요를 비추었다. 얼어붙은, 영원 같은 한 순간, 이세야는 스물네 명의 감시자가 있던 자리에서 느릿하게 춤추는 깃털과 햇살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곧이어 다시 악마의 군주가 시야에 들어왔고, 분명 죽었어야 할 순간을 한참 지난 한 쌍의 타락한 그리폰들이 놈과 얽혀 싸우고 있었다. 가시와 비늘과 그을린 깃털과 털로 된 덩어리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놈들은 공중에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간헐적으로 붉고 검은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귀찮은 적을 해치우려는 악마의 군주의 불길과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고대신을 향해 쉴새없이 마법을 쏘아대는 회색 감시자들의 주문이 허공을 갈랐다.

  드래곤의 뒷발톱이 타락한 그리폰의 복부를 꿰뚫었지만, 그 작은 야수는 악마의 군주의 발톱이 놈의 갈비를 쪼개고 안장이 닿는 두터운 가죽을 찢어놓는 순간에도 죽음이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미친듯이 싸워나갔다. 빈 안장이 내팽겨쳐 나갔고,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구부러진 부리로 드래곤의 몸통을 찢어갈겼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머리를 노렸다. 강철빛 그리폰은 드래곤의 이빨이나 죽음의 불길에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의 두 눈에 발톱을 박아넣고 놈의 주둥이를 깊게 긁어놓았다. 공중으로 쏟아져내리는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피에 젖은 한쪽 눈을 가늘 게 뜬 고대신이 강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래곤의 들숨에 그리폰의 깃털이 앞으로 확 일어섰다.

  놈이 숨을 내쉬고난 자리에, 그리폰은 화염의 벽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영계의 악령들이 이세야의 머릿속에서 복수를 외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러 놈들을 잠재웠다. 시야가 한 순간 흐릿했지만, 악령들은 투덜거리며 잠잠해졌다.

  잠시 뒤, 다른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마저 드래곤의 발톱 아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떨어졌다. 놈들에게 벗어난 악마의 군주가 환희의 포효를 하며 발톱에 긁힌 머리를 치켜들고 도망치는 회색 감시자들을 뒤쫓으려 했을 땐 - 그들은 이미 공격태세를 갖춘 뒤였다.

  "감시자들이여! 감시자들이여, 내게로 오라!" 개러헬이 외치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던지 좀 된 것 같았다. 나머지 비행 부대는 그의 뒷편에서 이미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악령들에게 정신이 팔린 이세야는 그 부름도, 등뒤에서 미친듯이 재촉하는 칼린의 신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레바스를 부대로 이끌려 했으나, 제대로 자리를 잡기엔 너무 늦은 뒤였다. 그는 오십여 미터 거리에서 나머지 동료들이 뱀 형상의 숙적을 향해 달려드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강철과 태양에 빛나는 은색의 물결로, 감시자들이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의 활이 폭우처럼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들의 지팡이가 영계의 빛줄기를 뿜어댔다. 구름조차 그들의 진격에 길을 터주는 것 같았고, 빛나는 태양 아래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생각보다 많이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의 아래턱뼈 한 쪽이 통째로 뜯겨나가 선홍색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른쪽 눈꺼풀은 그리폰의 발톱에 찢겨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몸통 부분에 난 상처에서 비늘 아래 속살과 이어진 근육이 반짝였고 피부는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악마의 군주는 쉽게 질 기세가 아니었고, 놈은 아예슬레이그를 가로지르는 감시자들의 진격에 대항해 불길을 쏟아냈다. 진형의 왼쪽 선두를 맡은 그리폰들이 비명과 연기와 함께 회색 나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이세야가 붙들고 있던 몇 마리가 떨어지며 이세야의 주문에 걸린 부하가 한순간 가벼워졌다.

  남은 감시자들은 불길 주위로 선회하여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전 같은 깔끔한 대열은 아니었다. 그들은 널찍히 흩어졌고, 그리폰 한 마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놈의 주의를 흐트러놓으려는 듯 했다. 이세야가 우려할만한 일이라곤 그리폰들이 서로의 경로를 방해하는 일이었지만 - 하늘에 남아있는 기수는 열다섯 남짓, 혹은 그보다도 적어보였고, 동생은 아마 이 정도 숫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리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세 마리의 그리폰이 혼란통에 추락했다. 한 마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숨결에 휩쓸렸고, 다른 한 마리는 얼음 작살에 스치는 바람에 날개가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으며, 마지막 녀석은 이미 회색빛 혜성처럼 하늘 낮은 편으로 떨어진 모습을 이세야가 포착했을 뿐이었다. 놈은 무너진 성당 위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나머지는 하늘 위에 남아 싸워나갔다.

  악마의 군주는 마치 파리떼를 잡는 개처럼 그들을 상대했다. 놈이 하얀 가슴털을 가진 그리폰을 향해 몸을 돌려 그 작은 짐승의 꼬리에서 깃털 한웅큼을 물어 뜯었다. 그 공격으로 드래곤에겐 사각이 생겨났고 한 궁수가 어마어마한 운이든 혹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술 덕이든,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그가 날린 궁수의 창이 악마의 군주의 왼쪽 날개 갈퀴를 꿰뚫고 오른쪽 날개의 관절부분에 깊이 박혔고, 두 날개는 폭풍우에 휩쓸린 돛처럼 무너졌다.

  부상입은 날개 방향으로 회전하며 악마의 군주가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칼린이 옆을 지나쳐가는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레바스 역시 매캐한 연기를 뚫고 놈을 쫓아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야를 가리는 구름을 지나 떨어지는 놈을 쫓아갔고, 아래로 도시의 무너진 성벽을 지나, 만을 내려다보는 까맣게 그을린 공터에 홀로 선 교회탑의 뼈대만 남은 돌담에 다다랐다. 연기와 바다 안개가 탑의 바닥과 근처의 묘지를 둘러싼 장식 울타리 난간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검은 그리폰이 상처입은 악마의 군주를 쫓아 하늘을 가로지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승리감을 느끼기엔 너무 놀라 있었다. 이게 정말로 끝인 걸까?

  그래 보였다. 정말로 거의 그래 보였다. 환희의 고함과 함께 영혼 화살과 감시자들의 회색 깃 화살이 추락하는 드래곤에게 날아들었다. 악마의 군주는 성한 날개 쪽을 접고 탑을 향해 떨어지는 속도를 가속했다. 승리가 코앞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감시자들이 그 뒤를 따라 강하했다.

  연기 아래에서, 시위를 튕기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검은 촉의 석궁 화살이 이세야의 오른편에 있던 감시자의 목을 꿰뚫었다. 남자는 안장에서 뒤로 펄쩍 날아 옆으로 쓰러졌고, 갑옷 앞쪽으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왔다. 이어 석궁 화살 두 개가 그가 탄 그리폰의 노출된 복부를 꿰뚫었고, 하나는 이세야의 왼쪽 종아리 뒤에 꽂혔다.

  그 충격이 그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연기과 스물거리는 안개 사이로 이세야는 앞쪽의 버려진 민가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젠록, 헐록, 깡마른 쉬릭들. 놈들은 빗물 이랑 사이, 풍파에 닳은 가고일 석상 사이에 웅크리고 숨어, 삭아빠진 지붕 사이 틈새로 엿보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감시자들의 전술을 그대로 이용했다. 놈은 날개 부러진 시늉을 하는 어미새처럼 교묘하게 그들을 낚아 매복의 늪에 그들을 빠트렸다.

  레바스가 공포와 분노로 울부짖으며 날아올랐고, 그 주위의 나머지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피해를 겪은 뒤였다. 개러헬을 따라 악마의 군주의 함정으로 달려든 그리폰들 중 여덟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여덟 마리의 그리폰, 열 명 남짓한 기수들 - 너무 적은,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엔 너무나도 적은 수였다. 이세야가 수를 세는 도중에도 치명상을 입은 그리폰 한 마리가 연기와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미친 녀석들을 풀어놔." 칼린이 등뒤에서 말했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굳어진 목소리였지만, 혼돈 속에서도 그의 제안은 침착하게 들려왔다.

  이세야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영계의 또 다른 악령이 아닌 그의 오랜 친구임을 깨닫는데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 얘기인지 깨닫는 데에도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로도 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두 마리로는 상처까지 입혔다. 셋이나 넷이라면 끝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러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입단식을 치른 그리폰은 네 마리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살아남아 돌아간다 해도, 회색 감시자들은 한동안 이만한 규모의 공격을 다시 시도할 수 없을 터였다. 혹은 다시는 불가능 할지도.

  이세야는 주문을 풀어놓았다. 영계 너머 악령들의 속삭임이 잦아들었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남은 고요한 머릿 속과...그리폰들의 울부짖음 속에 남겨졌다.

  그것은 영계 악령들의 장난질이 아니었다. 그 울부짖음만은 진짜였다. 엘프의 귀를 찢어놓는 날선 맹노와 복수에 대한 갈망은 - 마침내 마음껏 날뛸 자유를 얻었다.

  마법의 고삐에서 풀려난 그리폰들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어둠의 피조물의 화살은 놈들에겐 성가신 방해거리에 불과했다. 등에 탄 기수들이 금방 죽어나갔지만, 이세야가 얼굴을 찡그리는 와중에도 그리폰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사격을 뚫고, 안장에 시체를 태운 채, 신을 모독하듯 웅크리고 선 악마의 군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날개의 드래곤은 단순히 부상입은 척만을 했던 것 아닌 듯 했지만, 여전히 어설프게나마 날 수 있었다. 교회탑을 떠나 날아오르는 놈을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들이 뒤쫓았고, 그들은 리알토만의 납회색 물 위를 지나 동쪽으로, 늘어서 있는 버려진 배들 위로 날아갔다. 돛대들이 잎사귀 없는 나무숲처럼 물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악마의 군주는 그 숲으로 도망치기로 한 듯 보였다.

  놈은 반쯤 가라앉은 갤리온선의 위로 뻗은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지상에서든 바다에서든 공격이 닿지 못할 위치였고, 공중에서 노려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위치였다. 예측불가의 형태로 뻗어있는 배들의 돛과 돛대가 움직이는 협곡을 형성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 안개가 충돌의 위험을 더 높여주었고, 설사 공격자가 그 길을 뚫고 놈한테 다다른다 한들, 악마의 군주의 불길에 그대로 노출되는 격이었다.

  불가능해보였지만, 그들에게 남은 기회라곤 이것 뿐이었다.

  "진입할 거야." 이세야는 칼린에게 말했다. "방어막을 준비해줘." 그는 자신의 붉은 깃발을 들어 나머지 기수들에게 자신이 공격을 주도할 것임을 알렸다. 다른 이들이 등뒤로 늘어서자, 그는 레바스를 전진시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검은 그리폰이 스스로 경로를 뚫고 나가게 내버려두고, 다시 영계와 자신을 연결했다. 마법이 손아귀 안을 채웠고, 그는 장력마법을 빚어내 리알토 만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어둠의 피조물 궁수들에게 쏘아보냈다. 헐록과 젠록이 사정거리 안에 들자 이세야는 놈들의 희멀건 죽은 얼굴에 주문을 날려댔다.

  장력장이 젠록과 가고일들을 아예슬레이그의 무너진 지붕에서 쓸어냈다. 불길은 날아드는 헐록의 화살을 허공에서 태워버리고 놈들의 활시위를 오그라트렸다. 뒤를 따르는 그리폰 기수들도 어둠의 피조물을 향해 화염구와 얼음폭풍, 두개골을 깨놓는 돌덩이를 날려댔다. 빈 집 처마에 매달려있던 고드름이 증발하며 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증기 덕에 궁수들로부터 몸을 가릴 수 있었지만, 더 강력한 방패가 될 수 있는 건 장력장 쪽이었다. 이세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칼린이 그들 주위를 둘러싼 반짝이는 푸른색 얇은 구체를 형성했다. 안개를 뚫고 날아든 몇 안되는 화살은 마법 방어막에 부딪혀 부러졌고, 궁수들이 쏟아지는 주문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새 화살을 장전할 쯤이면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놈들을 지나친 뒤였다.

  삐걱거리는 뱃무덤이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바스는 뛰어들 순간을 최대한 기다렸다가, 몸을 뒤틀며 삭구 사이로 파고들어 출렁이는 돛대와 얼어붙어 축 늘어진 돛 사이로 길을 뚫었다. 늘어진 밧줄들이 채찍처럼 날아들어 칼린의 방어막에 부딪혔다. 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삐걱거림이 울려퍼졌고, 금방이라도 돛대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이세야의 솜털이 곤두섰다. 뒤에선 어둠의 피조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나무와 철을 때리는 차가운 바닷물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레바스가 뒤엉킨 밧줄과 돛으로 된 마지막 아치를 빠져나와 악마의 군주의 보루에 도달하자 그 소리 위에 분노한 그리폰들의 울부짖음이 더해졌다. 물에 젖은 뱃머리 끄트머리에 웅크린 거대한 검은 드래곤은 머리 주위를 맴도는 두 마리 그리폰을 향해 보랏빛 불길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난파선들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나무파편더미로 변해있었다. 수면에는 쪼개진 나무파편이 둥둥 떠다녔다.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부러진 날개는 수장된 세 번째 그리폰의 흔적이었다. 네 번째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제대로 역할을 다한 듯 보였다. 악마의 군주가 움직일 때마가 비늘 위에 난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렸고, 놈의 오른쪽 앞발은 따개비가 붙은 뱃머리 아래쪽에 무기력하게 늘어져있었다. 놈의 양날개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가시돋친 등 뒤로 부러져 접혀있는 두 날개는 그 자신의 등가시에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세야가 봐온 모습 중 처음으로, 그 고대신은 죽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를 마침내 집어삼켰고, 녀석이 얼어붙은 닻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자 연기와 반짝이는 얼음조각이 흩날렸다. 마지막 녀석은 귀를 찢는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악마의 군주의 목 뒤로 뛰어올랐다.

  이제 다른 이들도 안개를 지나쳐 들어왔다. 그들은 난파선의 안개숲에서 튀어나온 육을 지닌 유령처럼 보였다. 굽은꼬리 위의 개러헬과 굴뚝새라는 이름의 검은 귀 그리폰에 타고 있는 에델리스라는 젊은 여자 드워프...그 뿐이었다. 남은 건 그들 뿐이었다. 영광스럽던 회색 감시자의 행렬은 전부 사라져, 아예슬레이그의 잿더미 위 어딘가, 혹은 리알토 만의 회색 바닷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었다.

  칼린의 장력마법이 바늘에 찔린 공기방울처럼 톡 터졌다. "끝내버리자." 그가 말했다.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나온 푸른빛이 악마의 군주를 맞추자 연쇄적인 번개가 터져나왔고 - 그가 다시 공격을 날리려할 때, 개러헬이 그에게 소리쳤다.

  "안돼! 감시자가 - 반드시 회색 감시자가 악마의 군주를 죽여야만 해!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거야!"

  "곧 죽을 녀석처럼 보이진 않는데." 칼린은 웅얼거리면서도 지팡이를 당겨 맺혀있던 마법을 잠재웠다. 그 역시 여기 걸린 중요성을 다른 이들만큼 잘 알고 있었다. 회색 감시자가 아닌 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경우, 악마의 군주의 정수는 가장 가까운 어둠의 피조물의 육체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고대신은 다시 태어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새 육체를 가지게 된다. 회색 감시자의 검이 아니고선 그 존재에게 진정한 죽음을 가할 수 없었고 - 그 대가로 그 회색 감시자의 생명을 바쳐야 했다.

  즉 그 역할은 에델리스나 개러헬, 혹은 이세야의 몫이란 뜻이었다.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저 드워프는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이세야는 바로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용맹하고, 다른 이들이 쓰러져나가는 사이 살아남을만큼 운이 좋기도 했지만 - 그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젊어, 신록의 여름 같았다. 그는 제 1 기수도 아닌 제 2 기수로 이 전장에 참여했고, 인간이 앉아있던 게 분명한 피로 얼룩진 납 안장 위에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 에델리스는 이런 전장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만큼 그의 그리폰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듯 했다.

  혹여 가지고 있다 한들...눈앞에서 수많은 죽음의 행렬을 마주한 탓에 그 드워프는 얼음처럼 굳어있었고, 화살을 날리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 화살마다 형편없이 빗나갔다. 혹여 눈먼 화살이 악마의 군주를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세야는 창조주가 그렇게까지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남은 것은 개러헬이나 그 자신 뿐이었다. 그 깨달음은, 달콤쌉싸름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그러쥐고 레바스에게 마지막 돌격을 준비시키려 했으나 - 동생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추었다.

  "너무 좁아." 개러헬이 외쳤다. "서로 부딪힐 지도 몰라. 나 혼자 들어가야 해."

  "하지만-."

  "그래야만 해." 그는 이미 이세야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고, 삭구 옆에 선 둘의 그리폰끼리 날개가 맞닿아 있었다. 하얀색과 까만색, 그리고 까만색과 하얀색이.

  개러헬은 어깨 너머로 미소지어 보였다. 아예슬레이그 어드메에서 투구를 잃어버렸는지, 그의 금발머리가 안개낀 바람결에 느슨하게 흩날렸다.

  "아마디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고, 내 무기는 감시자들에게 전해줘."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세야 누나, 자신에게 좀 더 친절해져."

  이어 굽은꼬리가 얼룩무늬 하얀 날개를 펄럭였고, 그 엘프와 그리폰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단단한 돛대 위에 웅크리게 했다. 그리폰의 목깃이 곤두섰다. 그 역시 전투에 나서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전투는, 다른 배의 삭구 위에 자리잡은 에델리스와 렌의 것이 아닌 것만큼,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의 군주의 사정거리 밖이었고, 그들 자신의 무기 역시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남은 역할은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라, 엘프는 기도했다. 물결에 삐걱거리는 난파선의 소음은 그 자신의 심장소리만큼도 크게 들리지 않았다.

  개러헬이 도착한 순간, 악마의 군주는 마침내 마지막 그리폰의 목을 부러뜨려 그 몸뚱이를 뒤집힌 갈레온선의 선체 위에 내동댕이쳤다. 피와 비늘 붙은 찢어진 살점이 드래곤의 주둥이 아래로 젖은 사자 갈기처럼 늘어졌다. 난도질 당한 등가시 사이로 드러난 뼈는 흰색이 아닌 칠흑같은 검은빛이었다.

  놈은 개러헬이 다가서자 고개를 들었다. 고대신의 눈 안에서 악의가 바람 맞은 불씨처럼 일렁였다. 놈의 길죽한 검은 이빨 사이로 보랏빛 불길이 맺혔다.

  굽은꼬리는 앞서 미친 그리폰들이 그러했듯, 피할 생각이라곤 없이 직선으로 빠르게 내려꽂혔다. 그리고 앞선 상대에게 그러했듯, 악마의 군주는 몰아치는 화염의 숨결을 날개달린 도전자에게 내뿜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 굽은꼬리는 하늘에서 돌덩이처럼 뚝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악마의 군주의 숨결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히던 녀석이 한 순간 가라졌다.

  그리고 놈은 곧바로 다시 소금 안개를 뚫고 치솟아 악마의 군주의 오른 편, 거의 먼 것이나 다름없는 다친 눈 쪽에 나타났다. 녀석은 날고 있지 않았다. 날만한 공간은 없었다. 굽은꼬리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갈레온선의 선체를 타고 올라 발톱을 나무와 등껍질 위에 박아넣었다. 잽싼 움직임으로, 녀석은 악마의 군주가 미처 보기도 전에 놈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도전적인 그리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달려들었고 - 굽은꼬리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검은 이빨이 그리폰의 줄무늬 어린 하얀 털 위에 박혔다. 악마의 군주는 쥐를 잡은 사냥개처럼 놈의 목을 물고 흔든 뒤 내팽겨쳤다. 소리없이, 굽은꼬리는 부유물 가득한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그리폰의 희생은 목적을 달성했다. 개러헬은 안장에 서서 악마의 군주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가, 놈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 뛰어 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등가시에 매달린 채로, 엘프는 드래곤의 이마 위로 기어올랐다. 놈은 그를 떨구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댔지만, 개러헬은 단단히 붙들고 버텼다. 한 발 한 발, 그는 놈의 뿔 사이 파인 곳을 지나쳐, 타락한 그리폰이 상처 내놓은 악마의 군주의 목 뒤편 틈새에 도달했다. 고대신의 거친 비늘 사이에 버티고 선 채, 개러헬은 그의 단검을 놈의 등가시 뒤로 치켜들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두개골 아래쪽을 향해 내리꽂았다.

  번개라도 지난 듯한 짧은 고요가 맴돌았다. 이세야는 동생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든, 미처 읽어낼 수 없었다. 그의 뺨 위에 묻은 핏방울이 안도감을 선사했고, 금색 머리카락 한 올이 그 위에 걸려 있었다. 머리 위에선 대재앙의 폭풍이 무너지며, 혹은 그저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오염이라곤 모르는 햇빛이 챈트리 대성당을 비추는 황금빛처럼 떠있는 배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의 죽음이 일으킨 충격의 여파가 그들을 덮쳤다. 나무 파편이 갈갈이 쪼개지고, 두꺼운 돛이 넝마처럼 찢어졌다. 밧줄과 삭구에서 얼음비가 쏟아졌다. 그 충격파에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납작하게 붙인 채로 숨을 멈추었다. 안장에 몸을 꼭 맞대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다로 날려갔을 터였다.

  그 순간은 리알토 만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휘저어 놓을 것처럼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지만...결국 모든 게 끝나, 레바스는 악마의 군주가 수장된 무덤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치솟았고, 태양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야는 죽은 고대신의 거대한 시체에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동생의 작은 육신이 반짝이는 걸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되찾은 세상의 해변에서 마침내 휴식을 맞이했다.

  끝났다. 그들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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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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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5:24 숭고의 시대

 

  스탁헤이븐 이후로, 이세야의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유동맹에서의 전투는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동맹군과 신병들은 이름을 기억에 새길 새도 없이 빠르게 왔다가 사라졌다. 열병으로 죽은 이도,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잠식당해 죽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이나 화살에 쓰러져갔다.  콜링을 듣고 응답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소수에 - 아주 극소수에 - 불과했다. 회색 감시자와 그 동맹군은 착실히 자유동맹을 수복하고 있었지만, 마을과 마을, 도시와 촌락을 되찾는 그 여정에는 걸음마다 피가 배어 있었다.

  아마디스는 그들이 이겨가고 있다고 했고, 개러헬도 그렇게 말했다.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유동맹을 되찾아봤자 그들은 올레이와 안더펠스를 잃는 중이고, 어쩌면 티빈터 제국도 무너지고 있는 중일 거라고.

  이세야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승리란 게 뭔지 잊은지 오래였다.

  그들은 말라붙은 강둗과 죽은 숲을 지나, 말라빠진 풀쪼가리 뿐인 황량한 평야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끝없는 모래바람이 저주받은 대지 위를 휩쓸며 시야를 가렸고, 하늘에는 결코 내리지 않을 비의 약속을 품은 구름이 멍든 색으로 부풀어 있었다.

  지원군이 찾아들었다. 일부는 음식이나 잠들 수 있을 정도의 안전한 거처를 얻고자 찾아든 피난민들이었다. 자비로운 영주, 야심찬 지도자, 혹은 대재앙의 영향을 덜 받은 영주들이 자신의 영역만은 지켜내기 위해 보낸 군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추방자 출신이었다.

  개러헬은 생각지 못한 이들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추방당하거나 무계급층이었던 드워프들은 쪼개진 산맥 모양의 깃발 아래, 스스로를 돌의 사생아들이라 부르며 언젠가 그들의 유골이 오자마로 돌아가, 돌의 이름 아래 묻히길 바라며 하나로 모였다. 티빈터 제국에서 주인을 죽이고 대재앙으로 도망쳐나온 엘프들은 주인없는 자들이라 스스로를 칭했고, 무기만 쥐어주면 누구와든 싸우겠다며 충성을 표해왔다. 마지막으로, 템플러들의 추적을 피해 회색 감시자들 편으로 모여든 이단 마법사들의 모임이 무너진 탑이란 이름을 가졌다.

  그들의 충성심은 특정한 국가나 대재앙을 무찌르겠단 희망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러헬 개인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세야는 동생 옆을 지키며 그가 부리는 마법에 조용히 놀랄 따름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아주 단순하고도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엘프였고, 이름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고, 가난하고 더러운 보호구역 출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호스버그를 구해내고, 커크월과 컴버랜드 사람들을 도우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맹군을 하나로 모아 스탁헤이븐의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낸 영웅이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자신의 공이었다고, 이세야는 생각했다. 따지고 든다면. 그 영광을 이용해 많은 걸 할 수 있는 건 개러헬 쪽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공을 동생에게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서서히 닥치는 죽음으로 그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을 때라면.

  그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 싸우기엔 적이 너무 많았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헐록, 젠록, 오우거를 상대로 싸웠다. 죽어가는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강도질과 식인을 행하는 굶주린 인간들과도 싸웠다. 오염에 물든 곰이나 거미, 끔찍한 몰골의 구울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이세야의 기억 속에는 이 모든 게 하나로 뒤엉켰고,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 펼쳐진 뼈의 융단에 하나씩 더해질 뿐이었다.

  이세야가 적의 얼굴을 잊어가는 건 비단 단조로운 살육의 나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락은 매일 아침 조금씩 그의 기억에 안개를 드리워갔다. 한 때는 매일의 생각을 샅샅이 기록한 연대기였던 그의 일기는 몇 주씩, 혹은 몇 달씩 방치되곤 했다. 그는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재앙의 현실과 악몽 속의 공포를 분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때때로 그는 어디로 향하던 중인지, 누구와 싸우던 건지도 잊곤 했다. 그리고 그 엘프는 마침내 선임 감시자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혼란스런 표정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역시 밤마다 점점 강해지는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동료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 비록 그들 모두 언젠가 콜링에 응답해야 할 날이 온다곤 하지만, 그 날이 오길 기다리기엔 대재앙을 상대로 한 전쟁이 눈앞에 놓여 있었으니.

  레바스만이 그를 맨정신으로 붙들어주는 시금석이었다. 그 검은 그리폰 역시 나이가 들고 있었고, 부상의 흔적과 누적된 피로가 눈에 띄게 티가 났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1, 2년 전 쯤 이미 은퇴했을 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감시자든 그리폰이든 그 누구도 대재앙 아래 쉰다는 건 불가능했고, 이세야에겐 그가 필요했다. 그리폰마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바스는 변형을 거치지 않은 채였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녀석들이 전부 거치는 동안에도.

  분명 처음에는 헤인 요새의 몇몇 그리폰에게만 입단식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버랜드와 커크월을 비롯한 자유동맹 도시의 대피작전에서 변형된 그리폰들을 끌어올린 그 힘과 맹렬한 분노를 보고 말았다.

  그 후,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꾸준히, 끊임없이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입단식을 거친 개체보다는 전성기의 그리폰이 더 강하다는 걸 회색 감시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대재앙이 오래 지속된 탓에 많은 개체가 쇠약해져 있었다. 많은 수가 늙고, 영양이 부족했고, 부상을 입었거나 오랜 활동으로 지쳐 나가 떨어졌다. 그런 그리폰들에게라면, 혈마법에 의한 강화된 속도와 힘은 그들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잃는 것도, 혹은 의식 후 나타나는 피 섞인 기침의 거슬림을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전투 사령관들이, 때론 수석 감시자가 직접, 입단식을 거쳐 계속해서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리폰을 하나둘씩 보내왔다. 그리고 타락에 물든 동료를 견디지 못한 그리폰끼리 서로 물어뜯지 않게 하려면 한 마리의 그리폰 당 서너 마리의 다른 개체가 함께 변형을 겪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기수가 거부하지 않는 한 명령대로 입단식을 거행했다. 처음에는 그도 거부했으나, 매번 결정을 번복하도록 상부의 명령이 내려왔기에 그도 마침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더 이상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계속 거부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 인한 절망이 그 자신의 타락을 가속시켰고, 어쩌면 혈마법 역시 거기에 한 몫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러헬과 그가 스탁헤이븐의 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동생에 비해 20년은 더 오래 감시자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뭘 신경써야 하는지도, 왜 그래야하는지도 잊고 말았다. 끝없는 대재앙의 진창 속에서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겪고 또 겪으며, 이제는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폰이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지든 타락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거친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 혈마법 위에 또 다시 혈마법을 더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모든 감시자들은 그와 비슷한 희생을 이미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파멸할 운명이었다.

  때때로 자신의 그리폰이 변하는 걸 거부하는 감시자들도 있었고, 그럴 때면 이세야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애초에 그가 이걸 거부했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어둠의 피조물의 부식이 침습한 그의 정신은 이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단 한 가지 - 매일 밤 기도처럼 스스로에게 읊조리는 그것은 - 이 모든 게 대재앙을 끝내기 위한 대가라는 것이었다. 자유동맹에서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내는 것.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끝내는 것. 어마어마한 대가이지만, 그래도...그것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가 대가를 치른다면, 악몽도 끝날 것이다. 언젠가.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고 검푸른빛 오염이 혈류를 타고 멍처럼 전신에 번지는 가운데, 그는 그 희망 하나에 매달렸다.

  그걸로 충분했지만, 결국 그걸로 충분치 않은 순간이 오고 말았다.

  "끝낼 기회가 왔소." 자신의 막사 안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와 아마디스는 몇 안되는 숙련된 감시자와 군사령관들을 소규모 회의에 불러모았다. 그의 보좌관이 화로마다 단내가 풍기는 장작을 채우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세야는 그 향내가 천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디스는 소소한 사치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뭐였는지 일깨울 것들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차치하고, 어쨌든 이 막사는 개러헬의 것인 동시에 그의 것이기도 했다.

  "기회라고." 아마디스는 호화로운 양가죽이 깔린 접이식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그 용병 대장의 움직임을 따라 털가죽 위로 나부꼈고, 그는 몸을 기울여 보좌관이 가져다준 향이 가미된 와인 잔을 집어들었다. "우리가 결단력 있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말이야. 우린 어둠의 피조물들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고, 놈들도 그걸 알 거야.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승리를 거머쥘 기회인 거지."

  "무슨 계획인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최근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은 으레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부피가 큰 회색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 부식의 증거를 감추고 있었지만, 목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속에서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말할 때면 단어마저 왜곡돼 들렸다. 그 자신에게도 거슬리는 일이라 점점 덜 입을 열게 된 탓에, 이렇게 가끔 입을 열면 유달리 반응이 날카로웠다. 최근에 들어온 용병 대장과 올레이 슈발리에 두 사람이 그가 안 보는 줄 알고 미신적인 손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개러헬은 완벽하게 침착해 보였다. "안티바를 치는 것." 그는 대답했다. "우린 놈에게 위협이 될만큼 가까워졌소. 우리는 악마의 군주의 영역 한복판에서 놈을 상대할 것이오."

  "그대가 장갑을 던지면 그 짐승이 응대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올레이 슈발리에가 코웃음쳤다. 그는 회색 감시자들의 낡고 흠집 투성이인 갑옷에 비해 한층 위엄 있는 외관을 하고, 그에 걸맞게 스스로를 엄청 중요한 인물인 양 굴었다. 그가 입은 갑옷은 섬세한 무늬의 금박이 덧입혀진 빛나는 강철 재질이었. 어깨 갑주 위의 장미 문양 은 세공은 어찌나 광을 냈던지 꽃잎 하나하나가 거울처럼 빛났다. "놈에게 모욕당할 명예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세야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올리려 하니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몬...몽...몽포트,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헤인 요새에 있던 자였다. 그가 떠나기 직전쯤 도착했을 것이다. 침침한 기억이었지만, 용감한 이였던 것 같다. 혼신을 다해 그래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오." 개러헬이 대답했다. "명예보단 자존심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여주긴 할 것이오. 우리가 코앞에 전쟁을 들이댄다면, 악마의 군주는 응대할 것이오."

  "왜 아니겠어?" 아마디스가 동의했다. "이미 참아 넘기기엔 너무 많이 얻어맞았는걸. 분명, 놈은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우릴 무너뜨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야." 그는 차고 있는 팔찌에 달린 장식물을 달그락거렸다. 그가 죽인 백 번째 오우거의 송곳니를 가죽끈을 꼬아 매단 것이었다. 그 이빨이 손에 든 술잔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쨍 소리를 냈다. 챙그랑, 챙그랑, 핏빛 음료가 담긴 컵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가 그곳에 다다르면, 그대들 모두 함께 진군하는 것이오." 개러헬이 말을 이었다. "그리폰 기수들이 진격을 이끌 것이오. 다른 이들은 악마의 군주를 이끌어낼만큼 안티바 깊숙히 들어갈 수 없으니. 하지만 그대들의 지원이 필요하오."

  "내가 가겠소." 몽포트가 즉시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서 부드럽게 예를 취했다. "기갑 부대를 이끌고 지원하는 영광을 내게 맡겨주시오." 그의 갑옷이 막사의 불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몇몇 회색 감시자가 그의 등 뒤에서 재밌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개러헬은 그의 제안을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그대의 용기는 기억될 것이오."

  "루비 드레이크도 당연히 함께 할 거야." 아마디스가 말했다. 뒤이어, 다른 용병대들 역시 저마다 자신들의 용맹과 기술을 경쟁하듯 뽐내며 함께하겠다 나섰다. 개러헬은 왁자지껄한 그들의 과시를 담담한 얼굴로 새겨들은 뒤, 그가 필요한 이들을 추려냈다. 마법사, 궁수, 그리고 강철의 벽으로 그들을 둘러싸줄 돌의 사생아들. 그를 따르는 추방자들 거의 모두가 선택받았다.

  영웅이 돼야만 하는 이들이군, 이세야는 생각했다, 평화가 찾아와도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고.

  개러헬이 대부분의 회색 감시자들을 선택받지 못한 용병들과 함께 빼놓은 것 역시, 그에겐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남긴 이들은 대재앙 바깥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들이었다. 많은 이가 이세야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이미 콜링에 응해 떠났을 이들이었다.

  "우리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군요." 모두가 막사를 떠난 뒤 남은 감시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우울한 인상의 완고한 안더펠스 남자로,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바람에 센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통상적인 상흔이 뺨 위를 세로로 하얗게 가로질렀다. 이세야 기억에 따르면 레호르란 이름일텐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안더펠스인의 두 눈 위로 보랏빛 눈두덩이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회색 감시자들은 그게 피로에 지친 흔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동맹군들에겐 굳이 알리지 않겠지만, 감시자들은 그게 콜링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자신의 통제력을 잃게할만큼 진전된 상태일 것이다.

  "난 언제나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개러헬은 빚어낸 듯한 가벼움을 싣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승산이 낮은 것만은 사실일세. 걱정된다면, 뒤에 남아도 좋네."

  "싫습니다." 안더펠스인이 비웃듯 대답했다. "전장에서 뒤로 빠져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좋아, 그럼 정해진 거군." 엘프는 막사를 가로질러 간 뒤 접이식 책상 위에 놓인 전투지도 위에 손끝으로 선을 그었다. 그들의 진영으로부터 안티바 시티를 표시하는 성 그림까지 쭉 잇는 선이었다. "우리가 갈 경로이네. 적들의 머리 위를 바로 지나쳐서, 놈들이 우리가 가는 걸 알게 할 거야. 아마디스는 보병 부대를 이끌고 알바우드의 언덕까지 이끌고. 그 언덕이 어둠의 피조물들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들이 대기하는 사이 우리는 악마의 군주를 화살 사격 범위 안으로 유인하는 거야."

  "긴 비행이 되겠군요." 레호르가 개러헬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고 속도로 비행하기엔 너무 길 수도요."

  "그래서 가장 강한 그리폰들만 데려갈 생각이라네."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이세야가 물러나 서있는 그림자진 구석을 돌아봤다. "지치지 않을 녀석들로."

  레호르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회색 감시자들 역시 불편한 웅얼거림을 주고받았다. "우리더러 입단식을 거친 놈들을 타라는 겁니까?"

  "그대의 그리폰이 임무를 버틸만큼 강하고 빠른 게 아니라면, 그렇네."

  "놈들은 미쳤다고요." 레호르는 딱딱하게 말하며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그 안의 분노가 너무 커요. 어둠의 피조물 가까이 가면 놈들은 이성을 잃을 겁니다. 날뛰어서 적들에게 달려들고 나면 다시 붙들 수가 없어요. 악마의 군주와의 전투에 놈들을 타는 건...자살시도나 마찬가지입니다. 재앙이나 다름 없을 거예요."

  "그럴 것 같았다면 이런 작전을 짜지 않았겠지." 개러헬이 대답했다. "하지만 난 내 누이를 믿고, 이번 기회가 최선의 기회라고 믿네. 어쩌면 악마의 군주를 동맹군 근처까지 유인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놈이 우릴 따라오지 않는다면, 놈과 공중에서 맞붙어야 하네. 그렇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 있는 - 그리고 싸우려 할 그리폰들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들은 이세야를 돌아봤다. 눌러쓴 후드 안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움츠러들었다. 그를 보는 감시자들의 시선에는 의심과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들이 개러헬을 볼 때와 같은 희망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들에게 난 괴물이구나.

  탓하고 싶진 않았다. 한 때 엘프였던 그 자신은 이미 그 안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남아있지,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 위해 역할을 다 할 정도로는. 딱 한 번만 더 싸우면, 그러고나면 이 끝없는 비탄과 희생의 행군에 작별을 고할 수 있다. 딱 한 번, 그러고나면 그는 이 묵직한 영웅의 업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내가 놈들을 통제하겠소." 그는 대답했다.

 

* * *

 

  개러헬이 작전을 짜는 사이 막사엔 밤이 찾아들었다.

  모든 걸 마쳤을 땐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였고, 이세야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막사로 걸어서 돌아갔다. 주위에선 모닥불이 검푸른 어둠을 밝히며, 고독의 바다 한 가운데 빛과 온기의 섬처럼 빛나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말들이 푸릉거리는 소리와 병사들의 코고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마치 그 옛날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만큼이나 익숙하게 들려왔다.

  그의 막사는 조용했다. 레바스는 북적거리는 곳에서 자는 걸 싫어해 야영지에서 먼 곳에 스스로 둥지를 트는 편이었고, 이세야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부식이 혈류를 타고 그를 갉아먹는 지금이라면, 혼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거의 자각도 없이, 그는 자신의 막사를 지나,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여러 천막과 울타리, 꺼져가는 모닥불들을 지나쳐 익숙한 곳에 도달했다. 칼린의 막사는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재앙으로부터 그의 꿈을 지켜주는데 도움이 된다는, 선명한 녹색과 금색의 천으로 얼기설기 기워져 있었다. 수년 간 색이 많이 바래기도 했고, 밤의 어둠에 그 반짝임이 많이 묻히긴 했으나, 주위의 단조로운 원형 천막에 비하면 단연 눈에 띄었다.

  이세야는 멈춰섰다. 불빛이 꺼져있으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그냥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불은 켜져 있었다. 천막 귀퉁이로 금색 불빛이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비쳐보였다.

  후드를 뒤로 젖힌 뒤, 이세야는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천 위로 소리가 많이 묻혔음에도, 칼린이 대답했다. "들어와."

  "방해하려던 건 아니야." 이세야는 고개 숙여 들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칼린이 대답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추레한 몰골에 두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모습이었지만, 그는 지친 미소로 말가죽 베개를 이세야에게 내밀었다. 엘프는 그걸 바닥에 깐 뒤 막사 안을 밝히는 하나 뿐인 기름등 옆에 어색하게 자리잡았다.

  마법사의 무릎께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이세야가 손짓했다. "책 읽느라 안 잔 거야?"

  "잘 수가 없었어. 이 정도 겪어왔으면 전투 전에 푹 자는 게 중요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우러 날아갈 생각을 하니 어쩐지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더군." 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잠시 경건한 독서시간을 가져보면 좀 안정을 찾을 줄 알았지. 아니면 지루해서 잠들든가, 어느 쪽이든 간에."

  "성서를 읽었단 말이야? 당신답지 않네. 우리가 이미 기도에 매달릴만한 단계를 한참 지났다는 거,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랬지.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는 건 아니더라고."

  "아, 선물받은 거란 말이지?" 이세야는 새로 솟은 호기심으로 책을 다시 확인했다. "당신한테 기도서를 준 게 대체 누구야? 아무래도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인가 봐."

  "아, 아무래도 그렇지." 칼린은 책을 덮고서 침낭 뒤로 안 보이게 밀어넣었다.

  이세야는 그의 목소리에 감춰진 상처받은 기색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과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

  "알아. 정말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 말이 맞아. 그이는 날 잘 알지는 못하지."

  "누가 그 책을 준 거야?" 이세야가 물었다.

  "내 목표물이었던 자의 어미." 그가 대답했다. 이세야의 놀란 기색에, 칼린은 찡그린 웃음과 함께 담요로 뒤덮인 그의 여행용 가방에 몸을 기대었다. "본인은 모르는 일이지만. 아들이 암살된 것조차 몰랐을 거야. 그이는 그저 아들이 운 없게도 망가진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에 맞고 만 거라 생각했을 거고, 나는 그저 애도의 시기에 그를 도와준 정 많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왜 그랬어?"

  "그이가 내 어머니와 같은 향수를 썼으니까." 칼린은 그 작은 책을 다시 집어들고 표지를 내려다봤다. 금박을 입힌 제목이 불빛 아래 반짝였다. 이세야 역시 불빛에 스친 은빛을 눈에 담았으나, 제목을 읽어내진 못했다. "그분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얼굴이든, 이름이든. 내가 아주 어릴 때 떠났으니까. 기억나는 거라곤 그분이 쓰던 향수 뿐...그마저도 이름은 모르지만 말이야. 레몬 꽃처럼 단 향이긴 한데, 정확히 같진 않아. 꽤 오랫 동안 나는 그것조차 내 상상일 거라 생각했지만, 목표물을 따라가던 중에 그 향을 맡고 말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 어미에게 관심을 둘 리도 없었을 거야. 그이는 올레이의 귀족 여성이었고, 힘 깨나 있는 작자의 정부이자 그 아들의 어미였지만, 내 어미는 이름이 남을 만한 이도, 그렇게 힘이 있거나 부유한 이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어째선지 그 둘은 같은 향수를 썼고, 그리고 그 귀족여성이 마침 비슷한 연배였던 탓에, 내게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 짓을 하게 만든 거야. 물론 일은 제대로 마쳤어. 안티바 까마귀단은, 목표물이 그저 어쩌다 복잡한 상속의 굴레 안에 끼어있었다는 죄 밖에 없는 어린아이일지라도 계약을 반드시 완수하니까. 하지만 나는 일을 마치고도 예정보다 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고, 상중인 그 어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어. 그 후에도 우린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고. 몇 년 사이 좀 더 가까워졌지. 하지만 그이는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안티바가 무너진 뒤로 감시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 뿐."

  "그래서 당신한테 기도서를 보낸 거고?"

  칼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올레이에서 보냈더라고. 회색 감시자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갖다줬어. 그이가 창조주께 기도드리겠다더군, 나를 지켜달라고, 그리고 대재앙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달라고."

  이세야는 그 감상적인 태도에 코웃음 칠 수도 있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어린 표정에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창조주가 눈앞에 닥친 위험 앞에 누군가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은 진저리칠만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아들의 어미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 역시 끔찍한 일이었지만...그 모든 것은 어쩐지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그는 얼굴없는 모친의 유령과 어떻게든 이어지려는 칼린의 노력을 폄하할 수도, 잃은 자식을 어떻게든 대신하고자 하는 올레이 여자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둘 중 누구도 정말로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하지만 그 대체품에서나마 다른 종류의 사랑을 얻고 있었고 - 그게 아무리 불완전할 지언정, 이세야 자신이 가진 것보단 충분했다.

  "아직 그 사람은 살아있나보네, 어쨌든?" 엘프가 말했다.

  "그래. 대재앙이 아직 그이에게 닥치진 않았고, 적어도 강도 떼나 빈곤한 피난민들이 도시에 밀려드는 것 이상의 해를 끼치진 않은 모양이야." 칼린은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조주께, 부디 계속 그러하길."

  "그럴 거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는 까칠까칠한 갈색 베개를 옆으로 밀어놓고 문가로 돌아섰다. "고마워."

  "뭐가?"

  "내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일깨워줘서." 엘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밤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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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9:42 용의 시대

 

  "또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읽고 있는 거야?" 도서관을 나가던 중, 발리야는 책장에 등을 기대 앉은 세카를 보고 멈춰섰다. 소년의 무릎에는 금박을 입힌 거대한 책 한 권이 놓여있었고, 스무 걸음 거리에서도 종이 위로 무시무시한 쉬릭과 헐록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 세카는 순박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잖아, 안 그래?"

  "이런 시간에까진 아니지. 자정도 지났다고." 발리야는 지팡이를 슬쩍 들어보였다. 푸른 마노석이 내뿜는 빛과, 세카의 지팡이에 달린 월장석에서 나는 빛만이 도서관 안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고,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은 저녁 식사 후 쉬러 간 뒤였다. 어둠이 내린 조용한 복도에 남아있는 건 두 사람 뿐이었다. 감시자들은 해가 진 뒤 촛불 사용에 제한을 뒀다. 밀랍은 비싼 재료였기에, 마법사들은 응당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야 했다.

  발리야도 감시자들이 초를 아끼는 이유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했지만, 해가 진 후의 조용하고 어두운 도서관은 유달리 마음을 동요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한두 명의 마법사로 넓다란 방 전체를 밝히기란 턱없는 일이었고, 그들이 만든 작은 빛의 구는 메아리 같은 어둠 속에 길잃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뭐한다고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있는 거야? 여기 있으면 뭔가 불편하지 않아? 뭔가...빈 느낌 말이야. 게다가 저 상자 안의 뼈라든가, 벽에 걸린 무기들 하며, 악마의 군주의 뿔까지..."

  세카는 다시 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는 책장을 넘겨 끔찍하게 생긴 브루드마더와 징그럽게 꿈틀대는 알을 묘사해둔 장을 펼쳤다. 삽화를 그린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훌륭한 해부학적 지식과 기괴하게 뒤틀린 정신을 가진 자인 듯 했다. "그냥 도서관이지, 뭐."

  "꺼림칙하고 기이한 것들로 가득찬 도서관이지." 발리야가 웅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책을 읽고도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지 신기하단 말이야."

  어린 마법사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어쩐지 불편한 웃음이었다. "글쎄, 어느 정도는...소름끼치긴 하지, 그래. 밤이라면. 하지만 나를 잠 못들게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이 책들을 끝내지 못하고 잠든다는 것일 거야."

  "왜?" 발리야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이미 이세야의 일기를 읽는 것만 해도 충분히 그의 꿈을 어둡게 했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에 그 이상 공포스러운 기록을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최근 생각지 못했던 취향에 눈을 떠, 여가시간이면 궁정 낭만소설이나 개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읽곤 했다. 고전적인 안티바식 희극조차도 때론 너무 폭력적이라 그다지 즐길 수가 없었다.

  "이곳은 테다스의 가장 훌륭한 지식의 보고 중 하나야." 세카가 대답했다. 그는 펼쳐진 책장 위, 브루드마더의 부푼 몸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어둠의 피조물과 타락, 고대신에 관한 민간 전승, 이 모든 게. 여기선 손만 뻗으면 닿을 수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대재앙의 전쟁에 떠밀리지 않은 채, 평화로운 시기에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가 시간에 공부할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소수인 거야. 나는 어떻게 너희가 잠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전쟁이 없을 거라는 부분에 대해선 그리 확신하지 못하겠어." 발리야가 대답했다. "남쪽에서 불안한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오나본데, 점점 심해지나봐."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와이스하웁트 몫이 아니야. 회색 감시자는 언제나 중립이었어."

  "너는 회색 감시자가 아니잖아."

  "아직은 아니지." 두 사람의 지팡이가 얽혀 만들어내는 불빛 아래, 소년의 눈이 그를 마주봤다. 세카는 항상 나이에 비해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발리야보다 두 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발리야는 그가 항상 그들 누구보다도 성숙하고 현명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밤, 그의 얼굴에서 빛나는 확고함은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넌 정말로 감시자가 되고 싶구나." 그는 감탄하듯 말했다.

  "맞아." 세카가 대답했다. "회색 감시자는 테다스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마법사도 템플러도, 쿠나리도 엘프도 아닌, 그 모두를 위해. 동등하게. 그게...그게 나한테 중요한 거야, 발리야." 그 조숙한 확고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는 다시 반쯤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세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책으로 고개를 떨궈 민달팽이처럼 생긴 몬스터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에 함께하고 싶어. 이들이 자신들의 좋은 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들고 싶어."

  "감시자들이라고 언제나 좋은 일만을 해온 건 아니야." 발리야는 그렇게 말하며 도서관 벽에 걸린 으스스한 트로피들을 올려다 봤다. 전투 깃발, 전리품 무기, 오우거의 뿔...그 하나하나가 어찌보면 고난의 기록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세야의 기록이 그들이 내려온 미심쩍은 결정이나 감시자들이 치른 냉혹한 대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아닐 것이다. 네 번째 대재앙의 피묻은 시간동안, 테다스의 영웅들은 명백하게 영웅적이지 못한 결정 역시 내려왔다.

  "물론 아니겠지." 세카가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그 어떤 제국도, 어떤 신념도, 살아있는 존재의 그 어떤 노력도 결점이 없던 적은 없었어.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고, 그래서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성공에 가까웠다는 거야."

  "그럴지도." 발리야는 불확실한 태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노력하다가 장대하게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시도조차 안하는 것만한 실패가 있으려고."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건지 난 잘 모르겠어." 엘프는 어깨를 으쓱했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다시 문으로 향했다. 돌 아치 아래를 지나 떠나기 직전,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우리가 감시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할만한 걸 찾아야 한다고 네가 말했던 거, 기억해?"

  "응."

  "만약...만약 내가 그런 걸 찾았고, 다만 이게 그들이 가져도 될만한 건지 확신이 안 선다면 어떨 것 같아?"

  세카의 어두운 눈빛에 호기심이 스쳤지만, 그는 당연스레 묻고 싶을 질문을 잘 억눌렀다. 그 대신 그는 펼쳐진 책 위에 손가락을 모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왜 그렇게 느꼈냐고 묻고 싶을 거고, 혹시 그걸 맡을만한 더 나은 사람이 있을지, 아니면 그게 누가 가져도 될만한 물건이긴 한 건지 물어볼 것 같아."

  "그 질문들 중 어느 것도 답을 모르겠어." 발리야가 대답했다. "단지 그들이 애초부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만은 알아."

  "그럼 내 생각에 네가 해야하는 건, 그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은지 판단하는 거야."

  "그거라면 내가 알지." 발리야는 말했다. "아마도 말이야. 고마워."

 

* * *

 

  "붉은 신부의 무덤이 어딘지 알아요?" 발리야가 물었다.

  캐로넬은 땀에 젖은 웃옷을 벗던 도중 멈춰 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겨울의 초입, 차가운 공기 덕에 상쾌한 아침이었고, 훈련실의 열린 창문으로 새어든 산바람에 그의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는 한 시간 좀 넘게, 묵직한 감시자 훈련용 목검으로 천을 덧댄 훈련 인형을 두고 훈련하던 중이었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야?"

  "거길 찾아야 해요." 발리야는 불편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연장자 엘프가 의자에서 수건을 집어들고, 살얼음 언 물그릇에 끄트머리를 적신 뒤, 어깨의 땀을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당신이 한 번 가본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캐로넬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땀에 젖어 짙어보이는 머리칼에 한 줌 물을 적셔 쓸어넘긴 뒤, 손을 털어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린 뒤, 새 웃옷을 몸에 걸쳤다. "살면서 한 번이면 족할 실수기도 했지.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도 들었을 텐데. 왜 그런 짓을 다시 하려는 거지?"

  "딱히 다시 하겠다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거기에 뭔가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차가운 바람에 나무 창틀이 덜그럭거렸다. 눈앞의 엘프와 달리, 발리야는 조금 전 훈련실까지 걸어온 거 외에 딱히 격렬한 활동을 하지 않은 터였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토끼털로 된 망토는 감시자들의 두터운 양가죽 여우털 외투만큼 따듯하진 않았지만, 가진 거라곤 그것 뿐이었다.

  "굳이 거길 가는 위험을 감수할만큼 중요한 게 있다고? 거긴 기어다니는 시체들 뿐이라고, 문자 그대로 말이야."

  "나도 알아요."

  붉은 신부의 무덤이 항상 그런 이름이었던 건 아니다. 떠돌이 언덕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은 한 때 붉은 신부의 성소라 불렸었다. 가파른 협곡 사이 절벽마다 작은 동굴 여러개가 파여있고, 바람에 깎여나간 안드라스테의 형상이 입구 사이 절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안더펠스의 성모상이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도 있지만, 메르다인의 하얀 바위를 이용한 이쪽이 더 거대한 규모이긴 했다 - 하지만 안더펠스의 성모상이 여전히 테다스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찾는 성소인 반면, 붉은 신부에겐 더 이상 방문자가 없었다. 그곳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은, 와이스하웁트의 회색 감시자들에겐 단순한 소문 이상의 이야기였다.

  한 때, 붉은 신부를 둘러싼 동굴에 안더펠스의 황량한 평야에서 고립된 채 창조주의 진리를 명상하고자 한 무리의 금욕주의 수도사들이 자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 그물로 엮은 사다리를 설치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혹은 성소를 찾아온 순례자들이 베푼 구호물품을 받는 용도로 사용했다.

  축복의 시대 말기, 어둠의 피조물이 성소를 습격했고, 오랜 포위에 시달린 끝에 수도사들은 동굴 안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발리야는 최선을 다해 역사서를 뒤져봤지만 정확히 어떤 것들이 그들을 죽인 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는 이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들 중 한 명, 혹은 몇몇이 마법사였을 수도 있고 - 미신적이거나 우둔한 이들이 자신의 마법능력이 처음 발현된 후, 창조주의 보호를 갈구하며 고립된 신앙의 삶을 택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마법사가 실수로 악령을 불러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절박한 상황에서 어둠의 피조물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부러 불러냈을 수도. 역사는 그 부분을 밝혀주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 수도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끔찍한 갈증과 허기로 죽어갔을 거란 사실이었다. 수도사들이 불러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악령들은 죽어가는 그들에게 이끌려 나타났고, 한 때는 성소였던 곳에서 그들은 유해조차 곱게 잠들지 못했다.

  발리야가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리고 캐로넬이 한 무리의 감시자들과 함께 폭풍 속에 조난되어 그 절벽 부근에서 쉼터를 꾸려야 했다는 것도. 떠난 인원은 일곱 명이었지만, 돌아온 건 세 명 뿐이었다. 그들이 붉은 신부의 성소에 일어난 일의 전말을 알아낸 것도 그 때였다.

  "내 생각엔." 발리야가 말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마주칠 것들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고 간다면, 붉은 신부의 무덤도 반드시 극복하지 못할 곳만은 아닐 거예요."

  "넌 거기 없었잖아."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 '우리'라니 무슨 말이야?"

  "혼자 갈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회색 감시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 서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뻣뻣이 굳은 턱을 움직여 느리게 입을 열었다. "발리야. 내가 그 저주받은 곳에 대체 왜 다시 가겠어? 거기에 있는 거라곤 악령과 시체 뿐이야 - 내 친구들의 시체들도 포함해서."

  "나도 알아요."

  캐로넬은 벽을 박차고 나가 의자 위에 내려놨던 연습용 목검을 집어들었다. 목검을 다시 선반에 돌려놓는 동작엔 필요 이상으로 힘이 실려있었다. 분노와 자책감으로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진 채,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을 사냥하러 간 거였어. 수상한 활동이 보고된 바가 있었고, 오우거를 봤다는 말도 있었지. 단순히 정치적으로 까다로운 손님들을 맞이하는 동안 우리를 와이스하웁트에서 치워버리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수석 감시자는 그 소문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서 한 무리의 회색 감시자를 파견했어.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 갔어. 떠돌이 언덕에서 모래폭풍에 발이 붙들렸고. 우린 옛 수도사들의 동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도 알다시피,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정확히 거기서 뭘 본 거죠?"

  "잠들지 못한 망령들, 그 밖에 뭐가 있겠어? 독니를 가진 스켈레톤, 날카로운 손톱으로 공격해오는 넝마주이 시체들. 놈들 사이엔 유령도 섞여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많은 형제들이 죽어나갔지. 우린 마법에 걸려 잠들었고, 일어나서 무기를 쥐었을 땐 악령과 그 꼭두각시들이 이미 우릴 둘러싼 뒤였어. 즉시 후퇴했지만, 그래도 반이 넘는 수를 잃어야 했어."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들어간다면, 좀 상황이 나을 수 있어요."

  "가정에, 또 가정 뿐이군." 캐로넬의 금빛 섞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곱슬거리는 회갈색 양가죽 외투를 웃옷 위에 걸치고 목부분을 단단히 채운 뒤, 차가운 겨울 햇살과 바람을 들여오던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왜 거길 그렇게 가려는 거야? 거기그 엔 아무것도 없어, 발리야. 그저 뼈와 오래된 절망, 그리고 그 둘을 사로잡은 악령 뿐이야. 이제는 거기에 넷이 더 추가 됐겠지. 이유가 뭐든 간에, 그만한 가치가 있진 않을 거야."

  "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 엘프가 대답했다. "붉은 신부의 무덤에는 테다스의 역사를 바꿔놓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오, 이런, 그렇다면야 당장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오늘이라도 출발해야지. 하지만 네 계획엔 그게 뭔지 알려주는 건 포함돼있지 않을 테지?"

  발리야는 유감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와이스하웁트의 모든 회색 감시자들 중, 캐로넬만이 그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감시자들은 죽거나 입단식을 치르지도 않을지 모르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싫어서이든, 그저 자기들 일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든, 신병들에게 무심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지만...감시자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은 외부인들을 철저하게 배제했고, 이세야의 일기를 읽으며 그 연대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설프게나마 이해한 발리야로서도, 완전히 적응하긴 힘든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친구 사이였지만, 캐로넬의 충성심은 아마 감시자들에게 속해있을 것이다. 발리야가 같은 위치였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지도. 하지만 그는 회색 감시자들이 자신을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세야의 비밀을 파헤치러 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출발하면 알려줄게요." 발리야가 약속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떨림은 없었다. "와이스하웁트에 있는 동안엔 말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일단 여길 뜨고 나면 전부 말해줄 수 있고, 혹시 다 듣고 나서 그게 붉은 신부의 무덤까지 갈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같이 돌아오기로 해요. 그럼 나도 받아들일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이건 회색 감시자들한테만 비밀인 거구나, 나 말고."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마지막 창문까지 닫은 뒤, 마침내 발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말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고통스런 기억의 흔적이 깊은 곳에 배어있긴 했지만, 그는 평소의 자신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거의.

  "꼭 그렇다기보단." 발리야가 말했다. "적어도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 뿐이예요."

  "그 이유란 게 대체 뭘까?"

  "붉은 신부의 무덤으로 날 안내해줘요." 그는 다시 말했다. "그럼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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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5:20 숭고의 시대

 

  이세야는 개러헬이 떠나자마자 둥지로 향했다.

  눈물이 온통 시야를 덮는 바람에 익숙하던 세상이 녹아내려 일그러진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리륨가루와 악마의 군주의 피가 강철 사슬이라도 된 것 마냥 천근같이 묵직하게 그를 끌어내렸다. 그리폰들이 머무는 탑으로 올라가는 그의 귓가에 휴식중인 그리폰들이 기분좋게 고르릉거리며 간헐적으로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세야는 그 소음을 기꺼이 만끽해야 할지, 혹은 눈앞에 닥친 상실에 애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폰들이 입단식을 거치고나면, 이 생기어린 소음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만족스럽게 내뱉는 콧김, 웅얼거리는 잠꼬대, 뻐기듯이 부리를 딱딱거리는 소리 모두. 그들이 내는 소리라곤 분노와 혐오에 찬 으르렁거림, 혹은 피에 섞인 오염을 털어내려 부질없이 쥐어짜낸 기침 소리 뿐일 것이다. 휘파람 소리도, 고르릉거리는 울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재앙은 너무 많은 걸 앗아갔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감히 그가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목적인 것을. 전장에 나설 때면, 어떤 그리폰도 혹은 그 기수도 누구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온힘을 다해 어둠의 피조물과 싸웠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 역시 개의치 않았으며, 오직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대재앙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라왔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그가 그리폰들에게 하려는 것과 같은 희생을 전부 거친 이들이었다. 그 둘이 그렇게까지 다른 일일까?

  물론 달랐다.

  아무리 높은 지능을 가졌다곤 하나, 그리폰은 동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말을 할 수도, 그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그가 하려는 일이 가져올 영향 역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들도 분명 동의했을 것이란 식의 생각은 자기 위안을 위한 환상일 뿐 -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세야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는 그 의식을 강제로 진행했을 테니까. 자유동맹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결과로 회색 감시자들이 대재앙을 끝낼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헤인 요새의 그리폰 열 마리 정도는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

  둥지탑은 조용하고 탁 트여있었다. 헤인 공은 이 탑을 끝까지 완공하지 못했다. 덜 갖춰진 채로 하늘을 향해 탁 트여있던 덕에 감시자들은 이곳을 그리폰 몫으로 할당했다. 그렇게 뚫려있는 공간이었음에도 탑에선 짐승의 짙은 사향이 상처입은 녀석들을 치료하는데 쓰인 연고, 고약 냄새와 함께 풍겨왔다. 냄새에는 놈들의 식사였던 생고기의 피냄새, 그리고 숫놈들이 영역표시 용으로 담벼락 꼭대기에 뿌려놓은 코를 찌르는 소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폰은 제대로 돌보는 사람 없이는 제법 지저분한 생물체였다.

  그는 이 모든 걸 거치고 나서도 그들이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마법은 간단히 작동했다. 이세야는 내심 주문이 실패하길 - 자신의 마법 능력이 갑자기 사라져, 양심를 괴롭히는 이 끔찍한 선택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 영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적인 기운을 그의 손아귀에 불어넣었다. 그는 피와 리륨가루,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을 넓게 흩뿌렸고, 되도록 그리폰들의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놈들의 정신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녀석들이 눈치채고 저항하려 했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들은 그를 알고 믿고 있었기에, 때까치 때 그러했듯 하나둘 충격에 빠져 거세게 반발해 왔을 때엔 이미 모두 혈마법의 영역 안에 단단히 붙들린 뒤였다. 이세야는 그들의 반발을 무시하곤 가차없이 주문을 마무리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 역시 그리폰들과 함께 스스로의 행위에 울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지만...그 어떤 슬픔이나 분노도 그의 주문을 흐트러 놓진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 머리가 아팠고 두 다리도 저려왔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파왔다. 불안정한 자세를 버티려 거친 돌벽에 한 손을 기대어 선 엘프는 탑을 떠나기 위해 시야가 다시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이번에 사용한 리륨과 악마의 군주의 피의 양은 개러헬이 준 것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수석 감시자가 이세야에게 정확히 얼마나 필요할지 알지 못해 넉넉하게 보낸 것이리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열 마리의 그리폰이 이 변형된 의식을 거쳤다. 그는 레바스를 그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 너무 잔혹한 배신일 것이기에 - 리스메의 사냥꾼 역시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야가 탑을 내려가기 위해 계단으로 돌아선 순간, 그 양성의 마법사가 그림자 속에서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메가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행했구나." 키 큰 마법사가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같은 남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 그는 여성 차림이었고, 짙게 칠한 아이라인 덕에 도적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세야가 답했다.

  "사냥꾼은 빼놨어. 왜지?"

  "레바스를 빼놓은 것과 같은 이유야." 엘프는 대답했다. "그리폰의 입단식은 우리가 한 것과 달라. 이건 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끔찍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거야. 너도 호스버그에 있었잖아. 때까치를 봤잖아."

  리스메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발을 쓰지 않은 대신 민머리 위로 칠해둔 구릿빛 소용돌이 문양은 그림자 속에선 어둡게, 햇빛 아래선 하얗게 반짝였다. "봤지."

  "그럼 내가 왜 사냥꾼에게 그러고 싶지 않은지도 알겠네."

  "아니. 네가 왜 네 그리폰에게 그럴 수 없었는지는 알아. 하지만 왜 날 제외한 거지?"

  "네가 내 친구니까."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라면 사냥꾼이 자기 모습대로 네 곁에 있길 바랄 것 같으니까. 이 변형을 그를 죽이고 말 거야. 이번 자유동맹 구출 작전에서 살아남는다 한들 - 죽을 수도 있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은 우리한테 작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그리폰들에게 작용할 거야."

  "그를 강하게 만들기는 하는 거지?"

  "응. 일시적이지만. 그래."

  리스메가 그림자 속에서 나와 이세야가 변형시킨 마지막 그리폰을 관찰하러 걸어가는 동안, 그의 바짝 민 머리 위를 장식한 구리 문양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그리폰은 나이 든 암컷으로, 날개는 수많은 전투를 겪어 구부러지고 흉터 투성이에, 주둥이 부분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녀석이 헤인 요새로 보내진 이유는 나이와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전장에 나설 수 없기 떄문이었다.

  이세야의 주문은 녀석의 고통을 제거했고, 그 그리폰은 혈마법의 혼란이 가랁고 나자 마치 젊어진 것 마냥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젊은 시절 같은 모습은 아닐 터였다. 때까치와, 그리고 변형된 입단식을 거친 다른 그리폰들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움직임은 짧고 급작스러웠고, 잠깐씩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이상하게 멈칫거리며 느려지기도 했다. 녀석은 고개를 휘저으며 기침을 한 뒤 앞발로 부리를 긁어댔고, 주문에 암시한 대로 이제는 그저 감기라고 느껴질, 불쾌한 타락의 기운을 억지로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그리폰은 다시 강해졌다. 하얗게 센 털과 기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녀석은 강해졌고, 동시에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야수를 올려다 보던 리스메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우리에게 이 힘이 필요한 거지?"

  이세야는 거짓말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힘을 가지고도, 실패할지도 몰라. 없이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거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스메를 따라, 소용돌이 문양이 반짝였다. "그럼 사냥꾼에게도 해줘. 뭐가 필요하든, 뭐든 내어줄게. 너나 나나 우린 회색 감시자고, 난 내 감상주의 때문에 임무를 망치진 않을 거야."

 

* * *

 

  그들은 안개낀 회색 달빛 아래 헤인 요새를 떠났다. 여명이 동쪽 지평선에 미약한 사파이어 빛을 비추었고, 해가 뜰 때까진 두 시간 가량 남아있었다.

  이세야는 가장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에 커크월에 도착해서 떠나길 원했고, 그러려면 아직 어두울 때 출발해야만 했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대재앙이 일으키는 끝없는 폭풍구름의 가호을 받긴 해도 밤보단 낮에 더 약하고 소극적이었고,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만한 이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긴 했다. 혈마법와 분노로 강화된 그리폰들과 함께여도 이세야는 승산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다. 회색 감시자들은 포위에 둘러싸인 도시를 뚫고 들어가, 나올 때에는 도움이라곤 안되는 민간인들로 가득한 캐러반을 끌고 나와야 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챙겨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라벨 역시 손상되지 않게 지켜야만 했다 - 이후에도 다시 써야 하니까.

  이세야는 아라벨을 세 대씩 네 팀으로 나눠 각각 한 마리의 그리폰이 끌고 두 마리가 호위하도록 했다. 레바스와 사냥꾼은 가슴줄을 맨 쪽이었다. 이세야는 그 회색 그리폰과 리스메가 가진 연대감이 입단식 이후 생긴 긴장과 분노를 넘어 통제력을 잃지 않게 해줄 거라는데 승부를 걸었다.

  다른 둘은 그 자신이 직접 다루기로 했다. 특정한 기수도 없고 평범한 고삐조차 거부하는 광기에 찬 그 그리폰들을 자유의지대로 내버려두었다간 그대로 미쳐 날뛸 게 분명했다. 놈들은 가슴줄을 맨 채로도 잔뜩 날이 서서 가까이 오는 누구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 탓에 콧속이 다 헐어서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 녀석들의 육체가 타락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신호기도 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이성이라는 게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세야로선 그들을 장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지막 한 줄기 자유의지마저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 그리폰의 정신으로 파고들어, 붉은빛 혼돈으로 가득한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억눌린 분노가 옻나무 덩굴처럼 그의 정신으로 슬금슬금 스며들려 했으나, 그는 앞에 놓인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맞서 싸웠다.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

  칼린은 그 뒤에 앉아 장력마법으로 그들 몫의 수레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두 마리 그리폰을 장악한 채로 레바스를 이끄는 것까지가 이세야의 한계였고, 캐러반을 담당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는 칼린을 믿었고 - 만약 커크월 밖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혈마법사라면 변성된 그리폰들을 통제해 헤인 요새까지 끌고 갈 수 있을 터였다.

  "갈까?" 이세야가 물었다.

  짤막한 그의 말투에 칼린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그 역시 이세야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잠깐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레바스, 날아!"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세야는 장악된 그리폰들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리스메의 사냥꾼이 함께 날아올랐고, 다소 불안정한 대열이었지만 그리폰들은 그렇게 헤인 요새를 떠났다.

  내려가는 길은 덜컹거리고 삐걱대는 난장판이었다. 감시자들은 최대한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받친 고깔형 마법은 경로에 있는 있는 소나무 가지란 가지마다 잘게 잘라냈고, 그리폰들이 작은 협곡 위를 지날 면 바닥으로 쑥 꺼지곤 했다. 수레를 제대로 띄운 채 내려가기 위해 급격하게 방향을 왔다갔다 하는 일도 수 차례 벌어졌다. 겨우 나지막한 능선 부근에 다다랐을 즈음, 이세야는 이빨을 하도 딱딱 부딪힌 탓에 두개골 전체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악령들의 속삭임이 생각 주위에서 맴돌며 그를 장막 너머로 끌어들이려 들었다. 우릴 받아들여, 우리한테 저 그리폰들의 무게를 넘겨.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 없어. 우리에게 건네주고,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라고.

  그는 언제나처럼 그들을 몰아냈으나, 그 목소리는 - 그가 영계에 닿아있는 한 -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아직 긴 하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산기슭에 다다르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동쪽 편의 구름을 뚫고 동이 트고 있었고, 장미빛 섞인 금색 빛깔은 뒷편에 드리운 대재앙의 폭풍과 대비되어 한층 강렬하게 빛났다. 골짜기마다 드리워진 은빛 안개가 하얀 산 꼭대기 아래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 아래로 펼쳐진 신록의 숲이 자유동맹에선 사라진 지 오래인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머리 뒤쪽에서 타락한 그리폰의 분노가 이글거리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이른 아침의 평화에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언덕 아래 편으로, 대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갔다. 반경 수 킬로미터 안의 나무들은 그저 죽은 채 버티고 선 꼬챙이에 불과했고, 주변의 초목이나 야생딸기 관목 여시 비쩍 말라 대재앙의 타락에 물든 곰 털타락처럼 가늘고 뻣뻣했다. 그들이 마주친 동물이라곤 종괴가 덕지덕지 붙은 사슴 한 무리 뿐이었고, 죽은 소 시체를 게걸스레 파먹던 녀석들은 감시자들이 지나가자 피묻은 주둥이를 쳐들고 송곳니 사이로 위협하는 쇳소리를 냈다.

  광기어린 사슴 무리와의 조우가 타락한 그리폰들의 분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들을 제어하려 애쓰다가 혀를 깨물었는지, 이세야의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된 맛이 났다. 어쩐지 더 진하고 차가운, 오염이 젤리처럼 굳어진 것 마냥 진득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을 뱉었다.

  피, 그저 피일 뿐이었다. 이세야는 공기에 노출된 선홍색 빛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잘못된 느낌만은 사슴 무리를 지나쳐 그리폰들의 분노가 불씨처럼 잠잠해진 뒤에도 한참을 입 안에 남아있었다. 머릿 속의 악령들은 겁에 질린 듯, 혹은 신난 듯 무어라 지껄여댔지만 그로선 어느 쪽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안의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이 점차 강해져가고 있었다. 숙명적인 확신이 들었다. 대재앙 시기에 피 안의 오염이 더 빠르게 퍼진다는 건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선 익히 알려진 소문이었다. 타락은 사람마다 다르게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해 당당하게 터놓고 말하는 이들이 워낙 드물어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이세야는 그 소문의 진실을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었고, 타락한 그리폰들을 다루는 혈마법 주문 하나하나가 그 속도를 더 가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런저런 상념을 머릿 속에서 털어내려 애썼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커크월이 빠르게 시야에서 가까워지고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그리폰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세야는 커크월의 돌벽 주위에 낮게 설치된 검은 화로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빛나는 모습은 첨정석(spinel)이 박힌 철제 왕관처럼 보였다. 워낙 먼 거리라 성벽 주위를 바삐 오가는 마법사들의 작은 형상은 삐죽 솟은 지팡이나 이따금 마법의 연쇄작용으로 화로로부터 치솟은 불길이 어둠의 피조물 위로 쏟아지는 모습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로 쏟아지는 불길은 놈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몇몇 멍청하거나 운 없이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이세야가 언뜻 보기에도 커크월의 포위공세를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공격은 고작해야 어둠의 피조물들을 성벽에서 몇백 미터 가량 후퇴시키는 게 다였고, 도시 주위로는 분명 수천의 젠록과 헐록들이 둘러싸고 있을 터였다. 커크월 주위의 검은 대지에는 남겨진 민가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얼마쯤 남아있었다 한들, 이미 불타 없어진 지 오래일 테니.

  하지만 그 화로의 모습만으로도 어쩐지 기운이 났다. 개러헬은 그들이 캐러반이 들어갈 길을 터주고, 빠져나올 기회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란 말을 했었다. 이제야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칼린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우릴 보면 앞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 거야. 우리가 놈들을 성벽쪽으로 빠르게 몰아넣기만 해도-"

  "저 화로가 놈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겠지." 이세야가 말을 맺었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가야 해. 개러헬의 말대로라면 마법사들이 불길의 방향을 제법 조절할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방향을 틀어서 들어가도 우릴 맞추지 않을 거라 믿을만큼 안전해보이진 않아."

  "그럼 그렇게 해. 방향을 정하는 건 너잖아." 나이 든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래, 말이야 참 쉽지." 이세야가 코웃음을 쳤다. "길을 뚫을 준비나 하라고." 그는 안장을 딛고 일어서서 비행경로를 앞쪽으로 하도록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커크월로! 기수들은 길을 뚫어라. 리스메,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빠르게 전진하라!"

  기수들은 오른 주먹을 들어 명령을 들었다는 표시를 하곤 아래로 급강하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 기세를 느끼고 화살과 물매를 준비해 회색 감시자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그들은 이미 화염 세례와 뼈를 부숴놓는 빙결마법을 퍼부었고, 놈들 사이에 아주 잠시동안 유지될 길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궁수들의 정확한 사격이 이탈하는 놈들을 마무리했다.

  이세야는 악령들의 끝없는 속삭임을 차단하려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도 장악중인 그리폰들의 정신을 조종해 동료들이 뚫어놓은 좁다란 경로로 그들을 전진시켰다. 그 길은 검은 바닷물을 노로 휘젓은 것마냥 아주 잠깐동안만 유지됐고, 어찌나 비좁았는지 그리폰의 날개깃 끄트머리에 얼어붙고 그을린 젠록 무리의 시체가 스치웠다. 하지만 그들은 직선으로 올곧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날아 엉성한 캐러반 더미를 이끌고 불벽에 둘러싸인 커크월의 안식처에 다다랐다.

  사냥꾼만 빼고.

  리스메는 타락한 그리폰을 탄 다른 기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시야에 들어선 순간부터 날뛰는 그리폰을 통제하느라 애썼고, 하필 그의 경로는 다른 이들보다 적들과 너무 가까웠다. 선두의 마법사와 궁수들은 최대한 고도를 높게 유지한 채 적들의 공격을 피했고, 길을 뚫기 위해 마법이나 화살을 퍼부을 때만 잠깐씩 하강했다. 이세야는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온통 분노에 찬 상태에서도 그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얄팍한 이성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오직 적들과 멀리 떨어진 거리 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은 캐러반에 묶여있어 리스메의 장력 고깔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밖에 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부짖은 헐록과 젠록 무리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놈들은 죽은 동료들로 생긴 경계선을 살짝 넘어 무기를 흔들며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에게 도전하듯 쉭쉭거렸고 - 사냥꾼은 그 부름을 지나치지 못했다.

  분노에 찬 울부짖음과 함께, 그 그리폰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에게 온몸을 내던졌고, 리스메는 안장을 딛고 서서 하릴없이 고삐를 잡아달길 뿐이었다. 마법사의 집중이 흐트러지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수레더미가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스물 남짓한 쉬릭과 헐록들이 나무 파편 밑에 깔렸고, 사냥꾼 역시 가슴줄에 딸려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몰려들었고, 어느새 이세야의 눈으로는 그 혼란통을 식별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칼린이 등뒤에서 날카롭게 말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해."

  이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이 위액이 역류하듯 목구멍 안을 가득 채워와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 전에, 그 둥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 바로 그가 한 일이 친구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말없이 레바스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검은 그리폰은 귀를 납작하게 접고 점차 멀어져가는 선두의 캐러반에 시선을 꼿꼿하게 고정한 채 앞으로 찌르듯 돌진했고. 어느덧 거의 성벽 아래에 다다랐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점차 양쪽에서 길을 좁혀왔지만, 레바스는 분노에 찬 사냥꾼의 울음과 리스메의 혼란에 찬 비명을 무시한 것처럼, 몰려드는 무리 역시 무시해버렸다. 헐록들이 도전하듯 측면에서 괴성을 질렀다. 칼린이 날린 빙결마법이 놈들을 순식간에 얼려버려 팽창한 뇌가 두개골을 터뜨리고 양 눈에선 검은 얼음조각이 터져나왔지만, 그 뒤의 놈들까지 조용히 시키진 못했다. 젠록들은 얼어붙은 동료들의 시체 뒤에서 그들의 조잡한 방패를 두들겨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으로 울부짖었다.

  그리폰에게 그 맹수의 천성을 억누르고 적들과 마주할 기회를 놓아버리는 일이란 굉장히 힘든 일임을 이세야도 알고 있었지만, 레바스는 해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지만, 그들은 커크월 안에 들어섰고, 성벽에서 쏟아진 불길이 좌절에 찬 헐록들을 저지해냈다.

  그리고 여지껏 벌어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난장판 속에서도, 이세야는 그의 그리폰이 보여준 의지력과 자율성에 자랑스러움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엘프는 레바스까지 이끌기엔 마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엔 그의 그리폰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줘야 했고, 레바스는 훌륭히 그걸 해냈다. 여전히 사냥꾼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고 영계의 사악한 악령들이 집중을 흐트러놓고 있었지만, 이세야는 기꺼이 그 사실을 감사하며 누렸다.

  그는 안장에서 몸을 내렸다. 다른 캐러반 담당들도 내려서며 어둠의 피조물들이 불길에 밀려 성벽에서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그들을 호위했던 감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방어벽을 넘어 성 안으로 착륙한 뒤, 작은 관문을 통과해 캐러반에 오를 민간인들을 모으러 갔을 터였다. 리스메의 캐러반이 통째로 무너진 탓에 자리가 부족해진 지금, 이세야는 그들이 누구를 뒤에 남길지 어떻게 결정할지 궁금했다. 헤인 요새의 전투 사령관인 이상 그 결정은 그의 몫일 테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결정을 내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앞쪽의 작은 관문이 열렸다. 지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이내 화염주문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눈을 깜빡였다. 아기 요람을 품에 안거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세야가 이미 커크월의 챔피언에게 어떤 물품도 실을만한 여유가 없을 거라고 말해둔 터였다. 헤인 요새에도 음식이나 옷가지 따위는 있었다.

  "타시오." 한 회색 감시자가 난민들에게 명한 뒤, 세 대의 캐러밴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명령을 따르는 자유동맹 시민들의 얼굴은 억누르지 못한 혼란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린아이들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세야는 그들을 무시했다. 주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엘프에겐 승객들을 동정할 여유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아라벨이 거의 채워지고 불길에 둘러싸인 성벽 너머로 비행 호위대가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상공을 맴도는 그리폰의 모습은 회색 감시자들이 커크월에서 이들을 데리고 나갈 준비가 됐다는 신호였다.

  "스카이버너를 준비하게." 그는 레바스의 안장에 다시 올라서며 옆에 있던 감시자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들이여, 캐러반을 띄워라."

  상공의 감시자들이 신호하자, 방어탑의 불길이 갈라지고 잠잠해졌다. 곧바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들었으나, 날아드는 장력 마법과 빙결 마법에 이내 뒤로 밀려났다. 마법사들의 주문을 따라 떠오른 캐러반은 그리폰들에 의해 - 장악된 두 마리와 자유의지를 가진 한 마리에 의해 -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다시 호위대가 일시적으로 뚫어놓는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세야가 신호하자 마지막 캐러반으로부터 등 뒤로 따라붙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활성화된 리륨 룬이 떨어져내렸다.

  드워프제 폭탄은 너무 불규칙적이고 폭발 잔해물이 공중으로 심하게 날려서 들어가는 길에 쓰기엔 안전하지가 않았다. 그리폰들이 폭발의 연기와 재 사이로 제대로 날기가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나오는 길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덕에 회색 감시자들은 떠나는 길 뒤로 푸른빛 죽음과 혼란을 마음껏 뿌려댔다. 리스메의 부서진 아라벨 더미가 폭발 중에 휩쓸려 들어가는 걸 본 이세야의 마음 속에 기쁨과 착잡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성공했네." 대재앙의 손길에서 멀어져 조용한 곳에 들어선 지 몇 분 정도 지나 칼린이 말했다. 그는 어쩐지 멍한 것 같았다. "성공했어. 이렇게 계속 하면 돼."

  "그럴지도."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 타락한 그리폰들의 통제를 놓아도 될 정도로 커크월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악을 풀어가며 그 난폭한 야수들이 혹시라도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지 신중히 관찰했고...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그리폰들은 시야에서 적들이 사라지고 나면 흥미를 잃었고, 그들의 고된 여정 덕에 녀석들의 분노는 무거운 피로감 아래 잠들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영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악령들의 속삭임도 마침내 가라앉았다.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기대었고, 그제서야 그의 로브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을 유지하며 커크월에서 캐러밴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탓에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럴지도라고?" 칼린이 반문했다.

  이세야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런다고 눈 뒤의 저릿한 느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단 나았다. "녀석들을 자기파괴로부터 막기 위해 내 장악이 필요한 거라면, 이렇게는 할 수 없어. 멀쩡한 그리폰들의 정신을 파고들어서 녀석들이 입단식을 치른 녀석들을 버텨내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면...아니, 그건 못해. 그렇게까진 못해, 칼린. 난 못 해."

  혈마법사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난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세야의 지쳐서 둔해진 머릿 속을 스치고 간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악령들이 바로 그렇게 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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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숭고의 시대

 

  그 자신에게 매우 놀랍게도, 이세야는 헤인 요새를 쓸모있게 복구하는 이 임무를 제법 즐기고 있었다.

  물론 거기엔 생각보다 진행이 매끄럽다는 점이 큰 몫을 했다. 빔마르크의 숲은 이전에 와이컴에서 스탁헤이븐으로 사람들을 날랐던 것보다 크고 매끄러운 유선형의 배를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해봤던 일이라 배의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세야와 칼린이 이에 대해 오고사에게 설명했고, 그 드워프는 빠르게 구조를 보완해 더 무거운 중량을 싣고도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갈 수 있을만한 새 형태를 고안해냈다.

  이세야는 아래로 내려가 피난민 캐러반을 이끌고 돌아오는 매 작전마다 동행했다. 헤인 요새의 작전 사령관으로서 그 캐러반들은 전부 그의 책임이었다. 어쨌든 수레를 끄는데엔 레바스가 필요했고, 그 자신 또한 보호 병력으로서 한 몫을 했다. 도시 근방에선 어둠의 피조물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 이세야는 외진 곳에 있는 촌락과 마을을 위주로 작전에 나섰기 때문에 언제나 정찰병이나 낙오병, 혹은 구울이나 대재앙에 물든 야수들이 출몰했다. 작은 접전조차 없이 끝나는 작전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한 위협은 으레 그러하듯 무서운 동시에 고무적이기도 했다. 의외였던 점은 천천히 요새를 재건하는 과정 역시 그를 고무시킨다는 점이었다.

  성 주위를 따라 걸으며 마을에서 새로 기와를 얹은 지붕이나 갓 잘라서 땔감용으로 말리는 중인 나무더미, 가지런히 손질된 수풀과 어린 소나무 숲 따위를 확인하는 건 제법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계절이 늦어 제 때 수확할만한 작물이 한정돼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농부들은 당근과 양배추, 완두콩을 심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닭들이 민가 주위를 서성이며 벌레를 쪼아먹었고, 축 쳐진 귀의 토끼들은 우리 안에서 잔반 야채를 주워 먹으며 살을 찌웠다.

  자유동맹 도시들의 혼돈과 황폐에 비교하자면 가히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이세야는 하루에 한 시간 쯤 마을의 발전상황을 확인하러 순회하고 나면 그의 진짜 업무로 되돌아 갔다.

  높다란 헤인 요새의 성벽 너머에서, 그와 오고사는 산을 파내고 있었다. 인접한 산의 한 쪽 면에 자그마한 자연동굴이 있어, 그곳을 시작점 삼아 도피처를 깎아내는 중이었다. 이세야와 칼린,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이 오고사의 지시에 따라 정밀하게 통제된 장력마법으로 돌을 깎아내 동굴 밖으로 빼내고, 새로 개선된 아라벨에 잔해를 싣고 마법으로 날랐다. 큰 바위들은 벽을 쌓고 담장을 짓는데 이용됐고, 작은 돌멩이들은 새로 확장된 마을의 자갈길을 까는데 이용됐다. 마법으로 깎아낸 굴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나면 오고사와 다른 드워프들이 손수 안쪽면을 단단하게 다듬었다.

  동맹군 전력이 점차 무너져 간다는 자세한 소식을 원동력 삼아 그들은 빠른 속도로 작업을 진행했다. 매일같이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듯 했다.

  자유동맹 전역에서 회색 감시자와 동맹군은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탄터베일과 커크월, 그리고 스탁헤이븐 상공에 나타나 도시를 검은 불길로 무너뜨렸다. 대재앙의 황폐는 내륙 지방을 휩쓸고 난 자리엔 얼마 안 남아있던 은둔자들과 저항세력 무리를 구울로 만들었다. 식인을 일삼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어쩌면 그 안에는 궁지에 몰린 농민들도 섞여 있을 터였다.

  전방에서 멀리 떨어진 헤인 요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하는 것 뿐이었기에 - 그들은 비와 안개를 뚫고, 잠을 쪼개가며 열심히 일했다. 때때로 부상을 입은 회색 감시자나 상처입은 그리폰이 회복을 위해 찾아들 때도 있었고, 이세야는 그들마저도 회복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작업에 참여하도록 투입했다.

  두 달 사이, 작은 도시 인구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만한 동굴 여러 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여전히 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이지." 오고사가 말했다.

  그들은 산 속 깊은 곳, 마법사들이 부서놓은 돌무더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작은 틈새를 따라 햇빛과 맑은 공기가 새어들어왔다. 오고사는 감시자들에게 환기용 틈새 주위로 작은 구덩이를 여럿 파놓도록 했고, 그 안에 흙과 비료를 채워 나중에 피난민들이 햇빛을 이용해 작물이나 혹은 빛이 부족해도 버섯 정도는 키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직은 구덩이 안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세야는 그 잠재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감당할만한 물을 대체 어디서 구하지?" 엘프는 질문을 소리내어 말했다. 빔마르크 산 꼭대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로 지금의 소규모 인원까지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인구가 두 배로 들어나면 그 물줄기마저 고갈될 것이고 - 이 피난처는 지금의 스무 배는 되는 인원을 위해 설계중인 곳이었다.

  "와이스하웁트에선 빗물을 모으지." 오고사가 제안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산맥은 이 시기에 비가 거의 오지 않고, 다음 여름에 올 폭풍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머지 않아 비는 눈이 될 거고, 그러고나면..." 그는 생각에 잠겨 말끝을 흐렸다.

  "뭔데?"

  "그러고나면 정상에 그대로 머물겠지." 엘프는 말을 맺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바로 그거야. 산에서 물을 채굴하는 거야."

  오고사는 한 걸음 물러나서 키 큰 동료를 향해 고개를 젖혔고, 흥미가 가긴 하나 다소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정상까지 날아가서, 동굴을 파는 것처럼 얼음덩이를 캐내고, 자갈을 나를 때처럼 수레에 싣고 돌아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세야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기대만큼 빠르지도 않을 거고, 영구적인 해결책도 되지 못해. 공격이라도 받아서 그리폰들을 데리고 방어하러 나가면 그대로 물 공급이 끊기는 거잖아. 내가 생각한 건, 충분한 물을 한꺼번에 저장하는 거야, 가능하다면 한 백 년은 갈만한 양으로."

  "무슨 방법을 생각한 거지?"

  "도피처에 저수지를 만드는 거야. 네가 설치한 경작용 구덩이 같이, 대신 수천 배 크기로. 그리고 눈덮힌 정상까지 이어지는 굴을 판 다음, 화염주문과 장력주문으로 눈사태를 일으켜서 눈더미가 호수로 바로 쏟아지게 하는 거지. 그 정도면 도피처 인원 전체를 수 년 간 먹여살릴 수 있을 거야."

  "좋은 계획이야." 오고사가 대답했다. "딱 하나만 빼고."

  "뭐지?"

  "통로를 만드는 걸 먼저 하는 게 낫겠어." 드워프가 대답했다. "그 편이 거대한 호수 바닥에서 잔해를 하나하나 퍼내는 것보다 작업이 깔끔할 거야. 그것만 빼면...정신나간 계획이긴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해보자고."

 

* * *

 

  그로부터 3주 뒤, 지금 이세야는 눈에 덮인 거대한 푸른빛 빙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판 굴은 백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 까만 점처럼 보였고, 여기서 일으킨 눈사태가 그 목구멍에 쏙 들어갈 거라 생각하기엔 너무 작고 멀어 보였다. 눈밭 위에 여기저기 꽂힌 녹색 깃발은 오고사가 깨진 얼음을 인도할 통로로 표시해둔 것이었다.

  그는 가슴과 허리를 밧줄로 단단히 고정해둔 상태였다. 밧줄의 다른 끝은 레바스에게 연결되어, 이세야의 계산이 잘못돼 눈사태에 휩쓸려 내려갈만한 위험이 닥칠 경우 그 검은 그리폰이 그를 끌어올릴 예정이었다. 그리폰은 엘프보다 위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 뾰족한 바위 꼭대기에 자리잡았으니 마법의 사정거리 밖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산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칼린과 리스메는 도피처 아래에서 화염주문으로 얼음을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세야는 얼어붙은 협곡으로 원조하러 오겠다는 다른 마법사들의 제안 역시 거절했다. 오고사의 계산만 정확하다면 그 자신의 주문만으로도 빙벽의 틈을 뚫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준할 수 있을 터였다. 얼어붙은 빔마르크 산맥 꼭대기의 극히 일부만 깎아내는 걸로도 그들의 도피처에 물을 공급하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얼음을 내려보냈다간 힘들게 깎아놓은 동굴에 홍수를 일으킬 위험마저 있었다.

  그는 드워프의 계산이 정확하길 기도했다. 잠시 뒤면 알게 되리라.

  이세야는 매섭게 몰아치는 얼음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빛바랜 금발 머리칼을 입에서 뱉어낸 뒤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언덕 아래 굴 입구를 노려봤다.

  이어 그는 영계와 접촉하여 지팡이로 순수한 힘의 뭉치 한 타래를 이끌어냈다. 그 뭉치는 그의 의지를 따라 파이프로 녹인 유리를 부는 것마냥 가늘고 길게 늘어났다. 마침내 그 뭉치가 충분히 정제된 순간, 이세야는 가장 먼 곳에 꽃힌 오고사의 녹색 깃발을 향해 힘의 창을 조준하여 날려보냈다.

  깃대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귀를 멀게 할 것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아랫편의 빙벽이 갈래갈래 쪼개지며 점차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준비된 굴로 쏟아져내렸다. 부서진 얼음의 대부분은 온 산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곧바로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덩어리들이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 역시 오고사가 예측한 바였다. 이세야가 날린 두 번째 힘의 창에 얼음 덩어리들은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 시야를 가리는 얼음가루를 흩뿌리며 아래로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반짝이던 조각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는 다음 녹색 깃발을 확인하고 그 아랫부분을 향해 새로운 힘의 창을 날렸다.

  깃대가 폭발하며 매달려있던 깃발 역시 눈폭풍에 휩쓸린 나뭇잎마냥 펄럭이며 날아갔다. 마지막 얼음덩어리가 사라진 걸 확인하면 이세야는 다시 다음 깃발, 또 그 다음 깃발을 노렸다.

  전체 봉우리의 3분의 2 가량이 대략 3미터씩 높이가 깎여 내려갔을 때 쯤, 엘프는 얼음산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움직이는 걸 느끼며 앞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장력마법이 일으킨 반향, 그리고 지지할 얼음층이 사라지는 바람에 남아있던 얼음 봉우리들이 기반을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이세야의 머릿 속을 스친 바로 그 순간,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지고 미끄러졌다. 그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고, 아가리를 벌린 굴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호흡이 빨라졌다. 얼음자갈과 거친 눈더미가 시야를 가렸다. 태양은 번쩍이는 금빛으로 점멸하듯 시야에 잡혔다 사라졌다. 얼음덩이가 팔다리와 머리통을 세게 때려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두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한 순간, 거인의 주먹 같은 강력한 압력이 그의 상체를 꽉 붙들었고, 그는 순식간에 공중 위에 떠올라, 밧줄 끝에 매달려 하릴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레바스가 그를 구한 것이다.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 흥분으로 어질어질한 기쁨을 만끽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폰이 높이 날아오름에 따라 엘프의 옷가지에 붙어있던 눈이며 얼음 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먼 아래에서는 무너진 얼음 봉우리가 우르릉거리며 굴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세야는 바람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신중하게 조준한 장력마법으로 커다란 덩어리 몇 개를 마저 부숴 경과를 가속했다.

  끝났다. 도피처에 물이 생긴 것이다. 엘프는 긴장을 풀고 가슴줄과 도취감에 몸을 의지한 채, 흰색과 갈라진 푸른 선으로 반짝이는 산맥을 내려다봤다. 이어 뾰족하게 솟은 회색 바위 봉우리로, 그리고는 넓게 펼처진 이끼 밭으로, 마침내는 높이 솟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풍경이 바뀌어갔다.

  목울대가 금색빛인 와이번 한 마리가 달랑거리는 짐을 매달고 날아가는 레바스에게 도전하듯 큰소리로 울었다. 이세야는 혹여 그 와이번이 그를 노릴까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그 엘프를 잠재적 식량으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건지, 혹은 그리폰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법을 익힌 건지, 놈은 쫓아오지 않았다.

  반 시간 뒤, 그들은 헤인 요새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매달린 승객을 데리고 착륙하는 걸 크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하강에 맞춰 자신을 감쌀 구형 방어막을 준비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레바스는 자신의 기수를 매단 채 그대로 난간 위로 착륙했고, 준비한 방어막이 성벽에 부딪히며 튕겨져 나왔다. 보호막이 없었다면 그대로 곤죽이 됐을 뻔 했다.

  방어막이 성벽에 안정적으로 정지하자 이세야는 다소 안전해진 기분으로 주문을 해제했고, 가슴에 고정된 밧줄을 풀어낸 뒤 약간의 높이가 있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비행 중 냉기와 압력에 시달려 뻣뻣해진 팔을 주물렀다. 내일이면 밧줄로 묶었던 팔과 가슴팍에 멍이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오고사는 이미 마당에 나와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드워프의 붉은 머리 타래와 목에 건 구리 메달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기름 먹인 가죽 장화에도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임무가 성공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의 얼굴 위엔 이세야가 기대한 것 같은 흥분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엘프는 옷에서 마지막 눈송이를 털어내며 질문했다. "굴이 중간에 막혔어? 뭐가 잘못된 거야?"

  오고사는 고개를 저었다. "굴은 문제 없어. 리스메가 마지막 덩어리를 부숴서 호수에 쳐넣었고,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녹길 기다리기만 하면 돼. 양은 충분해. 오백 명이든 오천 명이든, 수석 감시자가 보내고 싶은만큼 보내도 말이야."

  "그럼 뭐가 문제야?"

  "수석 감시자는 바로 지금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야." 드워프는 길게 숨을 내쉬곤 부츠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차냈다. "안에 들어가봐. 네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

  "개러헬이? 전장을 떠나 여기에 와 있다고?" 날아오는 사이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으나, 지금은 빗질해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이세야는 헝클어진 금갈색 머리뭉치를 통째로 잡고 가죽끈으로 대충 둘러 묶었다. "급한 일이야?"

  "명백하게." 오고사가 대답했다. "작전실에 있을 거야."

  이세야는 서둘러 움직였다.

  동생은 혼자 있었고, 작고한 헤인 공 소유였던 곰팡이 슨 커크월 역사책을 눈으로 훑는 중이었다. 이세야가 들어서자 책을 내려놓은 그는, 옅은 미소로 누이를 반겼다. "누나. 얼굴 보니까 좋네."

  "개러헬." 마법사는 동생을 살짝 끌어안고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여윈 것 같았다. 부드러운 가죽과 모직 옷 너머로 뼈가 만져지는 듯 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거야?"

  "뭔들 안 급하겠어?" 개러헬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한눈에 봐도 희끗희끗한 빛깔이 전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자유동맹이 위기에 처해 있어. 악마의 군주는 각각의 주요 도시를 산발적으로 공격하며 마치 열세에 몰린 듯 가장해서 그들을 분산시켜 놨어. 그리고 놈이 가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누나, 착각이 아니라.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게 책략이라고 믿으려 하질 않아. 누구도 자신들의 무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병력을 깎아먹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야. 몇 달이 더 지나면, 그들이 마침내 우리의 지휘 아래 하나로 힘을 모으겠다고 결심해도 아무 의미도 없어질 거야.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할만큼의 병력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 이세야는 어쩐지 이미 그 답을 알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각 도시를 대피시켜야 해. 컴버랜드랑 커크월부터 노리는 게 낫겠지. 그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잃었고, 남은 인구 정도라면 헤인 요새에 전부 데려와도 괜찮을 거야.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주한 뒤라면, 지도자들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바로 지금이어야만 해. 하루가 다르게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무력을 갉아먹고 있어.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돼."

  "많은 병사들을 보내서 피난민들의 이주를 돕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크다는 뜻이겠네, 그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개러헬이 인상을 찡그렸다. "각 도시의 병사들이 나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러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여정 전부를 동행해주진 못할 거고, 나 역시 더 많은 회색 감시자들을 붙여줄 수가 없어. 대부분의 과정에서, 누나의 병사들은 그들만의 힘으로 사람들을 호위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미친 짓이야." 마침내 입을 연 이세야의 대답이었다. "여기엔 스물한 명의 감시자가 있고, 그 중 여섯은 전투에 나서기엔 부상이 너무 깊어. 그리고 고작해야 열 마리, 잘 해봐야 열두 마리의 그리폰만이 캐러반을 끌 수 있고, 그 중 반 정도만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태지. 나머지는 너무 흥분해서 날뛰다 다치고 말 거야. 그리고 피난민 중에는 이런 임무에 적합할만한 인원이라곤 없을 거잖아. 이건 불가능해, 개러헬. 날더러 도시를 대피시키라고 한다면, 좋아, 해볼게...하지만 적어도 이게 자살시도가 아니려면 충분한 병력이 필요해."

  "우리에겐 그게 없지." 동생은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누나한텐 있어."

  "아니, 없어.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한 거야?"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망토 안에서 거친 재질의 천 가방을 끄집어냈다. 더럽고 핏자국이 묻어있는 모양을 보아 전장에서 수습한 물품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개러헬은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두 번째 주머니를 꺼냈고, 이번 것은 부드러운 가죽재질에 마법사의 금빛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색과 금색 비단끈으로 된 매듭에 이세야는 그 내용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리륨 가루. 한 근은 될 법한 양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할 터였다.

  이어 그는 리륨 가루가 든 주머니 옆에, 끈끈해 보이는 검은 액체가 담긴 세공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가고일의 두상과 발톱을 새겨놓은 그 유리병은, 화려해보이는 장식으로 그 안의 내용물이 품고 있는 끔찍함을 - 그리고 그게 이 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끔찍함을 가리는 듯 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등 뒤의 벽에 부딪혔다. 그는 부딪힌 충격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니야, 안 돼, 안 된다고."

  "이것 밖에 방법이 없어." 동생이 말했다. 이세야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봐선, 그 역시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우리는 반드시 그 도시들을 대피시켜야 하고, 가장 최소한의, 기동성 있는 병력으로 진행해야 해. 여기엔 그리폰이 그리 많지 않고, 그 중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야. 하지만 누나가 때까치에게 했던 걸 다시 한다면, 그들은 열 배도 넘는 그리폰이 있는 것마냥 싸울 수 있고, 부상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자유동맹을 살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어, 이세야 누나.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두면서까지 누나의 비밀을 지킬 수는 없었어. 수석 감시자가 명령을 내렸어. 헤인 요새의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치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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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 - 챕터 15  (0)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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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숭고의 시대

 

  "병사들을 약속 받았어."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가 지쳐보이는 건 이세야에게 놀랍지 않았으나, 묘하게 들떠보이는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많이. 장비만 갖추면 바로 출발해도 될 거야. 2주나, 아니면 3주 정도. 빠를수록 좋겠지, 아무래도. 혹시라도 마음 바꿀만한 시간을 주진 말자고."

  "아마디스한테도 말했어?" 이세야가 물었다.

  "아니." 멋쩍어할 만큼의 양심은 있었기에, 개러헬는 일없이 이세야가 빌려쓰는 방 선반께를 서성였다. 포위 공세 전까지만 해도 그 선반은 안더펠스 왕실을 따라 수 세대에 걸쳐 내려온 성유물로 가득차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밀 포대와 바꿀 수 있는 건 어떤 잡동사니라 해도 전부 팔려나갔다. 금박을 입힌 기도서도, 드래곤 뼈로 된 안드라스테 조각상도, 지금쯤 어느 올레이 상인 저택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고, 선반에 남은 거라곤 회색 먼지에 뒤덮인 나무 조각품 따위 뿐이었다.

  텅 빈 선반에는 개러헬이 만지작거릴만한 게 딱히 보이지 않았고, 잠시 뒤에야 그는 누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두 손을 뒷짐지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한테 물어보지 마. 연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내 분야가 아니라고."

  "그래?"

  쿡쿡 찌르는 듯한 거슬림이 이세야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그 감각을 털어냈다. "응."

  "정말로?" 자기 코가 석자인 와중에도, 개러헬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칼린도 아니란 말야? 난 두 사람이 어쩌면-."

  "아냐."

  "상처받는 게 그렇게 두려워?"

  이세야는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이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 너도 봐왔잖아, 개러헬. 누가 그런 걸 원하겠어? 누가 필요나 하대? 굳이 그 위에 무게를 더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잃는 건 이미 충분히 괴롭지 않아? 난 이미 네 걱정이나, 레바스 걱정만으로도 충분해. 적어도 내 그리폰이 죽는다면, 아마 나도 함께 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 우리 둘 다 혼자 남을 필요 없을 테니. 하지만 이 이상 저 밖에 잃을까 걱정할 누군가를 늘릴 생각은 없어."

  "정말로 누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어떤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 없어?"

  나한텐 네가 있었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개러헬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 그들의 부모가 둘을 버리고 떠나 불확실한 인간 세상에 내던져졌을 땐 그의 보호자로, 그의 마법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돼 공포에 질렸을 땐 그의 인도자로, 차가운 마탑의 구속 안에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로. 그는 이세야와 함께 회색 감시자가 됐고, 혹은 이세야가 그와 함께 간 건지 - 어느 쪽이었는지 혹시 알았다한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결코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개러헬에겐 행복할 자격이 있었고, 그는 아마디스가 마음에 들었으니.

  하지만 그는 갈라서는 고통이 싫었다.

  "나한텐 내 그리폰이 있어." 이세야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동생에게 등을 돌렸다. "레바스가 내가 필요로하는 그 힘이야. 하지만 너는 좀 다르겠지, 그러니...아마디스를 둥지로 데려가. 그에게 그리폰을 고르게 해. 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 환상적인 순간을 겪고 나면, 용서할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제일 처음 제안한 건 그 사람이었다고." 개러헬이 투덜거렸다. "그 사람이 나한테 꼭 왕비한테 가야한다고 했단 말이야."

  "아무튼 간 건 너잖아."

  "물론 나도 알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긴장이 풀린 그 짧은 한 순간 이세야는 그의 남동생이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 볼 수 있었다. 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라면 그는 여전히 영웅적인 회색 감시자의 완벽한 표본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역시 야위고 지쳐 보였다. 그 눈썹과 입가를 따라 새겨진 주름은 훨씬 나이 많은 이에게나 보일 법한 것이었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러헬의 금발머리 사이로는 희끗희끗 새치가 보였다.

  "그를 둥지로 데려가." 이세야는 재차 말했지만, 이번엔 좀 더 누그러진 톤이었다. "하늘을 날고 나면, 분명히 용서할 거야. 그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고를 수 있을만큼 기수 없는 그리폰이 많이 남았던가?"

  "충분하고도 남지, 유감스럽게도. 너무 많이들 잃었으니까."

  "그럼 가서 우리의 비탄으로부터 약간의 기쁨을 발굴해 보라고." 이세야가 말했다.

 

* * *

 

  한 시간 뒤, 이세야는 하늘로 나가 그들이 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대장을 향해 환호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마디스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본래 계획은 지난 번 새로 구상한 혈마법 기술 변용이 어둠의 피조물에게 특별히 더 치명적일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용병들의 아우성 탓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피가 담긴 시약병이나 리륨 물약 따위가 그의 주의를 붙들어 놓을만한 건 아니긴 했다. 이미 충분히 주문 연구에 시달리긴 했으니. 화창한 햇살 아래 머리칼에 바람 좀 불어넣는 일은 그로서도 환영이었다.

  레바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그리폰은 주인이 들어서는 모습에 기쁜 울음을 내짖었고, 손길을 기다리며 귀를 납작하게 접었다. 이세야는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 쓰다듬는 와중, 레바스의 부리 및 납막 주변을 두르던 회색빛이 목을 따라 가슴께까지 하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그리폰 역시 늙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달콤쌉싸름한 감각이었다. 감시자들의 전투 그리폰은 대개 오래 살지 못했고,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그러했다. 레바스가 가장 끔찍한 전장에서 매해 살아남았다는 건 그의 힘과 의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는 여전히 강했고, 공중에선 빨랐으며, 전투에선 맹렬했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까? 어쩌면 이제 레바스를 은퇴시키고, 그가 오우거의 바위나 헐록의 화살에 맞아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와이스하웁트의 둥지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하는 걸지도.

  이세야는 눈을 감고 그리폰의 풍성한 검은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특유의 사향이 - 맹수의 거친 느낌과 스며든 햇살과 끼니에서 남은 피 냄새가 뒤섞여 콧 속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래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눈물로 이세야의 시야가 뿌얘졌다. 그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흘려보낸 뒤, 떨어지지 않게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마디스는 공중에서 상승 기류를 타고 선회하고 있었고, 개러헬과 굽은꼬리가 넓게 날개를 펴고 가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등에 탄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리폰이 누군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청회색 털과 날개를 두른 검은 띠 무늬가 특징적인 젊고, 작은 체구를 가진 녀석이었다. 초보 기수가 고삐를 잡았는데도 그 비행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녀석의 이름은 스모크였고, 원래 기수는 어둠의 피조물 어쌔신의 독 묻은 칼날에 한 달 전쯤 목숨을 잃었다. 젊은 그리폰은 그동안 연락병이 되어 전초지에서 전초지로, 어느 회색 감시자든 가리지 않고 태워 요새까지 데려오곤 했다.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을 거고, 전선에서 기수를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삶이었겠지만...유대감 있는 기수를 태우고 전장 한복판을 헤집는 것보다 연락병의 삶을 선호하는 그리폰은 거의 없었다. 이세야는 스모크가 아마디스를 택한 것도, 아마디스가 스모크를 택한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길 바라며, 그는 레바스를 이끌고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 짜릿함은 결코 퇴색하는 법이 없었다. 머리칼을 헤집는 바람, 폐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공기, 지상에서의 슬픔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창조주의 어떤 피조물도 이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는 불씨가 잦아드는 호스버그 전장 위를 지나, 하늘을 오염시키는 끈적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둠의 피조물 시체더미 위를 지나쳐 갔다. 이런 흉측한 꼴을 보러 나온 게 아니었다.

  전우들이 싸우고 죽어간 곳에서 멀어져 간 이세야는, 레바스를 이끌어 안더펠스의 바위 투성이 평원 위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라텐플루스 강이 녹색빛 드문드문 섞인 갈색 대지 위로 은사처럼 반짝였다. 이 정도 높이에서라면, 저 강이 강둑은 비록 낮을지라도 여전히 풍요로운 것처럼, 줄기를 따라 진흙 위로 줄지어선 나무들이 대재앙의 황폐와 미약한 태양빛 아래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것처럼 상상할 수도 있었다. 세상이 거의 - 정말로 거의 -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고 믿어버릴 수도.

  물론 현실은 아니었다. 전혀. 그들은 금방 다시 악취 풍기는 연기 위를 지나 호스버그로, 대재앙에게로, 끝이라곤 모르는 끔찍한 전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세야는 가능한 한 오래 그 환상을 소중히 하기로 했고, 그 추억을 품은 채 성으로 돌아왔다.

  개러헬과 아마디스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리폰들은 이미 안장도 벗고 빗질을 마친 후였다. 굽은꼬리가 자기 몫의 갓 잡은 염소고기 한 덩어리를 아부하듯 스모크 앞으로 밀어놓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의 기수들 마냥 그 푸른빛 암컷에게 호의를 품은 듯 했다.

  레바스가 그 모습에 흥 코웃음을 쳤고, 이세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그는 검은 그리폰으로부터 안장을 벗겨내 레바스가 자기 몫의 염소를 즐길 수 있게 풀어준 뒤 요새로 돌아갔다. 요새의 그림자가 묵직한 망토처럼 그의 어깨 위에 걸렸다.

  금빛으로 빛나던 오후의 환상을 품고 최대한 다른 사람이랑 접촉을 피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건만, 맘처럼 되지 않는 것은 그의 숙명이었다. 빵과 와인을 찾아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린이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소식 들었어?" 마법사가 물어왔다. "우리가 헤인 요새로 보내질 거라는 거."

  "헤인 요새?" 이세야는 부엌 바구니에서 곡물 박힌 롤빵을 빼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었다.

  "빔마르크 산맥에 있는 곳이야. 빔마르크 산맥 깊은 곳에. 한 때 헤인의 노버트 공이라는, 칠성장어 절임 애호가이자 자유동맹을 자신이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유명했던 작자의 소유였고, 지금은 박쥐소굴이나 다름 없을걸. 까마귀단이 그 작자를 죽인 후 두 세대에 걸쳐 비어있던 성이니까. 회색 감시자는 그곳을 전초기지로 삼고 우리를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지."

  이세야는 구운 닭요리 약간과 와인병 하나를 추가로 챙겼다. 반쯤 남은 시큼한 적색 와인은 좋은 시절이었다면 요리용으로조차 쓰이지 않았을 법한 것이었지만, 대재앙을 견디고 병에 담기기까지 살아남은 포도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 "왜지?"

  칼린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자유동맹이 이미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오늘 연락병 셋이 도착했는데, 셋 다 별로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진 않았어. 컴버랜드와 커크월이 상당히 위태로운가봐. 스탁헤이븐은 함락 직전이고. 힘을 모으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어느 쪽도 자기 국민들을 어둠의 피조물한테 넘길 생각은 없지. 개러헬은 네가 와이컴에서 썼던 방법을 제안했어. 수석 감시자는 산속 깊이 헤인 요새에 기지를 꾸려서 자유동맹 사람들이 피난올 수 있을만한 규모로 준비하길 원해."

  "개러헬이 우릴 거기 배정했어?" 만약 동생이 그랬다면 이세야는 잔뜩 쪼아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물러나 꼬리를 감출 생각이라곤 없었다.

  칼린은 고개를 저었다. "감시자 사령관 알시아나가 네 이름을 직접 지명했어. 헤인 요새가 대규모 피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준비돼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할 테고, 네 역장 마법이 남들이 해내기 힘든 일을 해내는 재주가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와이컴에서 피난민들을 옮긴 공중 아라벨 있지? 난민들의 도피처에 그게 필요할 것 같다고 해."

  "그게 작전명이야? 도피처라고? 불길하게 들리는 이름인데."

  "자유동맹은 이미 불길함 따위를 따질 것도 없이 궁지에 몰려있어." 칼린의 어조는 건조했다. "개러헬은 우리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어떻게든 원군을 끌어모을 생각인가봐. 이미 마리웬 왕비의 병력이 있고, 호스버그의 승리 덕에 다른 안더펠스인들도 합류하겠지. 그리폰을 선물한 덕에 루비 드레이크의 지원을 확보한 것 뿐만 아니라 대여섯 되는 용병단 수장들이 비슷한 꿈을 꾸면서 마음을 돌렸어. 사자 용병단 대장은 이미 오우거 머릿가죽을 벗겨서 자기 그리폰 안장에 깔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네 동생은 기적적인 인물이야, 이세야. 지금 누군가가 자유동맹을 구할 수 있다면, 오직 그 뿐이겠지. 그는 바로 올레이로 향해서 그 가면 쓴 늙다리들한테 뭐라도 지원을 얻어내볼 생각이야. 하지만 자유동맹의 힘도 분명히 필요할 거고, 그들이 자기 고향과 국민들을 지키느라 분산돼 있었서는-."

  "전부 잃고 만다는 거지. 그래, 나도 이해해."

  "좋아." 칼린은 와인병을 손짓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어? 혼자 다 마시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개러헬은 우리가 일몰 전에 떠나길 바라고 있어."

  이세야는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좁은 부엌창 사이로 푸른빛을 드리웠다. 오후 내내 레바스를 타고 날아다닌 덕에 예정된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칼린에게 병을 내밀었다. "아무쪼록. 이별의 한 잔일테니."

 

* * *

 

  헤인 요새는 그야말로 외딴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빔마르크 산맥의 서쪽 자락 끄트머리에 위치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토지는 상대적으로 대재앙의 황폐에 시달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울창한 녹색 숲이 무성했고, 가파른 바위 사이로 힘찬 물줄기가 따라 흘렀다. 근방에 서식하는 와이번 무리가 숲을 향해 하강하는 레바스를 향해 위협적인 높은 소리로 울어댔다. 야생과 싸워내 살아남은 거대한 야수들은 감히 다섯 그리폰과 열 명의 기수를 향해 도전할만한 담대함을 품고 있었다.

  그 밖에 대단한 건 없었다. 성의 영지는 오랫 동안 비어있던 듯 보였다. 잡초와 산딸기 덤불로 뒤덮인 들판에, 솔방울 투성이 목초지를 둘러싼 나무울타리는 전부 망가져 있었고, 집이란 집마다 박쥐와 여우에게 점거당해 있었다. 헤인 공의 영주민들은 아마 그가 반란을 선언하자마자 전부 그에게 등을 돌렸거나, 까마귀단이 그를 죽인 뒤 쫓겨난 모양이었다.

  "이걸 전부 재건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레바스를 성 안뜰로 하강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요새이긴 했다. 굳건해 보이는 돌벽이 높게 서 있었고, 솟아오른 첨탑이 멀리까지 시야를 뻗을 수 있게 했다. 헤인 요새가 공성 공격이 아닌 암살에 의해 함락당한 걸 생각하면, 긴 시간 방치돼 낡은 것 외에 방어 시설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쓸데없이 무성하게 자란 장식용 정원을 다듬고 정비해 모양새는 덜하지만 훨씬 실용적인 약초와 야채들로 대신해 놓았다. 마무리 덜 된 토끼우리랑 닭장 역시 작은 정원 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적어도 이번엔 충분한 재료라도 있겠네." 칼린이 대답했다. "나무도, 바위도, 깨끗한 물도, 목초지도 충분하지. 산기슭에서 사냥이나 채집도 가능할 거고. 요새 자체가 이미 충분히 굳건해 보여.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모든 게 훨씬 부족할 거야."

  "대신 할 일도 덜했겠지." 이세야가 말했다. "개러헬은 정말 이 곳이 자유동맹인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상당한 인원이긴 할 거야. 수천 명 정도?"

  "수천 명 정도라. 그 중 대부분이 비전투인원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 올 이유가 없을 테니. 대체 어디에 그들을 수용하란 거지? 큰 성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크진 않은걸."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레바스가 성벽 위로 착륙하며 총안 틈을 붙든 뒤 날개를 펄럭여 반동을 감속시켰다. 갑작스런 정지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두 기수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이세야는 안장에서 내려 성벽을 타고 내려왔다. 칼린이 목 뒤를 주무르며 따라 내려와 레바스를 째려봤으나, 녀석은 자랑스레 날개를 펼치고 뽐내듯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그리폰들이 마당으로 착륙하며 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모두가 내려서 마당으로 합류한 뒤, 이세야는 성의 방어시설을 점검했다. 이세야가 가진 정보가 정확하다면, 헤인 요새는 마지막 영주를 잃은 뒤 거의 30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다. 수십 년 간 손이 닿지 않은 것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상태란 점은 만족스러웠다.

  첨탑을 타고 올라 서자마자 부지런히 달려와 그를 반긴 문신 투성이의 얼굴은 그를 더욱 흡족하게 했다. 오자마 출신의 드워프 감시자 오고사는 고향에서 비계급층 소속이었다. 그 자신의 동족들이 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대한 덕에, 그는 대재앙이 닥쳐 회색 감시자들이 드워프들의 원조를 요청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동족들을 등질 수 있었다. 오자마의 큰 손실은 아군의 큰 소득이었다. 오고사는 영리하고 유능한, 지칠줄 모르는 전사였다.

  "이세야!"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햇살에 눈부셔 하는 두 마법사에게 소리질렀다. 그는 엘프를 번쩍 들어 숨막히게 껴안았다. "사람들이 네가 여기로 쫓겨났다고 했는데, 네 검은 새를 볼 때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 뭐야."

  "나도 반가워." 이세야가 숨막힌 틈새로 대답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숨을 골랐다. "난 네가 올레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고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랬지. 올레이 놈들은 비계급층 드워프한테 명령받는 걸 영 좋아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나 역시 굳이 그런 놈들을 돕겠다고 말씨름 하는 데엔 관심이 없고 말이야. 아무튼, 말 많은 슈발리에 한 놈의 가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나니까, 감시자 사령관도 거긴 내 적성이 아니다 싶은지 여기로 배정해 주더라고."

  "나한텐 잘 됐네." 이세야가 말했다. "그래서, 상황은 어때?"

  "대충 스물대여섯 되는 사람들이 있고." 오고사가 대답했다. "반은 회색 감시자고, 반은 농부랑 목수들이야. 둘 다인 사람들도 좀 있지, 물론. 다만...요새 주변을 손 보려면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할 거야. 많은 병사들, 많은 석공들, 많은 청소부들, 많은 요리사들, 뭐든 더 많이."

  "여기로 오는 피난민들 중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겠지. 필요사항을 저쪽에 전달하고, 이동수단 제작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네."

  오고사가 끄덕였다. 그의 밝은 붉은 머리는 수 갈래로 땋아내려 구멍 뚫린 구리 동전들로 끝이 매듭지어져 있었다. 그 드워프가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받아들인 체이신드 풍습이었다. 동족들에 대한 작은 반항의 표시기도 했고. "좋아. 성 자체는 상태가 괜찮아, 거의. 하지만 농토는 상태가 별로야.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할 테니까, 빨리 땅을 개간하고 파종할수록, 더 빨리 농작물을 비축할 수 있겠지. 농부들을 우선으로 해줘."

  "그럴게." 이세야는 태양빛을 뚫고 하얗게 빛나는 헤인 요새의 경계부를 바라봤다. "여기 몇 명이나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민간인들 말이야."

  "민간인?" 오고사는 이세야의 시선을 따라가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으로 식량이 풍족한 것도 아니고, 물 같은 경우엔 이백 명 남짓한 분량이 있어. 일단 그게 첫 번째 한계점이야."

  "그리고?"

  "두 번째 한계점은 물리적인 구조지. 이 성. 사람들이 직접 땅을 경작하고 마을을 꾸릴 생각만 있다면, 피난민을 어마든지 받아도 좋아. 빔마르크 산맥은 멀기도 하고 괴물들이 넘쳐나지만, 그 덕에 대재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지. 너도 오는 길에 이 땅이 자유동맹 그 어디보다도 비옥하다는 걸 봤을 거야."

  "그래, 나도 봤어."

  "그러니까, 마을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천 명, 이천 명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지, 순차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이 닥쳐든다면...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할 텐데, 이 성은 그만큼을 수용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세야가 물었다.

  드워프의 적갈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 질문을 기다렸지. 때마침 내가 해결책을 생각해놨단 말이야."

  "훌륭하네. 뭔데?"

  "단순해." 오고사가 대답했다. "그들을 산 안쪽에 수용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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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숭고의 시대

 

  호스버그의 전투가 끝난지 3일 뒤, 그리폰 기수들이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더 이상 나타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하고 돌아오자, 왕비 마리웬은 7년 간의 포위 공세를 벗어난 걸 기념하는 연회를 베풀겠다 선언했다.

  개인적으로, 이세야는 그들이 지속될 만한 어떤 성과를 이뤄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끔찍하게 이어지는 대재앙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싸워왔고, 감시자들이 어디 한 군데라도 수복해낸들, 대재앙은 이내 다시 닥쳐들어 모든 걸 삼켜버렸다. 시간이 또 지나면, 그들은 다시 한낱 연기처럼 흩어질 승리를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치곤 했다.

  동생과 아마디스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듯 했고, 다른 최전선에서 그리폰 기수가 가져온 첫 번째 전갈을 받은 날, 그들은 개러헬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올레이와 자유동맹 지역의 회색 감시자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악마의 군주는 더욱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마주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날로 공격성이 증가했고, 더 쉽게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갈에 따르자면 감시자들의 공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고, 이는 동맹군을 매우 고무시키는 소식이었지만 - 동시에 어둠의 피조물들을 격렬함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듯 했다.

  새 소식은 그렇게, 포위 지역 하나를 해방시키는 정도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자유를 누리던 호스버그에 한 줄기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리 마리웬 왕비가 이미 악마의 군주를 해치운 것마냥 군다한들, 사람들은 승리가 아직 먼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직면한 도전은 더 가혹해졌고,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

  자유동맹이 죽어가고 있었다.

  대재앙의 저주의 여파로 그들의 해안은 메마른 바윗더미 사이에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해초의 뼈대만 남았다. 바다 역시 탁한 회색빛으로 죽은지 오래였다. 물고기는 전부 떠나갔거나 죽어버렸고, 와이컴, 헤르시니아, 바스티온 같은 도시를 먹여살리던 홍합이니 굴이니 하는 것들도 껍데기만 남아 파도에 음산하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내륙지역의 황폐함은 바다처럼 가려줄 만한 것도 없어 훨씬 심각해 보였다. 벌목당한 숲에는 메말라 죽은 나무등치들이 비정상적인 곰팡이에 잠식당해 있었다. 한때는 비옥한 농경지였던 대지는 버석버석 갈라져 먼지만 쌓인 채 알곡 하나 없는 앙상한 보리 줄기만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대재앙의 구름 아래 태어난 아이들이나 가축들은 대개 작고 비실비실했고, 기형으로 태어나 병으로 죽기 일쑤였다. 운 좋게 덫이나 절박한 자유동맹 사냥꾼들의 화살에서 살아남은 새나 짐승들 역시 굶어 죽거나 오염에 굴복하고 말았다.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살아남아 구울이 된 놈들조차 죽은지 오래였다.

  어둠의 피조물이 휘두르는 칼 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궁핍이 테다스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폰 기수들, 연락이 닿는 영주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음울한 소식이 자유를 기념하는 호스버그 위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자유동맹으로 향해야 해." 개러헬이 말했다. "왕비께서 충분히 연회를 즐기게 두고, 필요한 예를 갖춘 다음, 부대를 이끌고 자유동맹으로 가자."

  그와 아마디스, 이세야는 방에 둘러 앉아 이미 천 번은 들여다봤을 커크월과 컴버랜드의 지도를 내려다봤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다음 날 있을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는 부엌 하인들의 투덜거림과 부산스런 소음 외에는 왕궁 전체가 고요했다. 야습해올지 모르는 어둠의 피조물을 경계하는 야경대의 끝없는 발소리도 없었다. 한밤중 경고를 알리는 나팔소리도 없었다.

  아마디스는 짙은 붉은색 와인을 잔에 채웠다. 마리웬 왕비는 감사의 의미로 마지막까지 보관해둔 와인 저장고를 열었고, 그 안엔 여전히 꽤 귀한 병들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개러헬의 유리병에 담긴 올레이 포도주는 이세야가 근 몇 년 간 마셔본 것 중 최고의 품질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갈 거라고 생각해?"

  개러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 소득 없는 논쟁을 이미 수 차례 반복한 뒤였고, 동생은 이세야가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낸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뭐 다른 선택지가 있나? 우리 중 누구에게든, 다른 선택지가 있어? 안더펠스의 어둠의 피조물 세력은 약화됐어. 현재 대재앙이 그 어디보다 심한 곳은 자유 동맹이야. 즉 악마의 군주가 거기 있는 거야. 우리가 가서 싸워야 할 곳도 거기란 뜻이고."

  "안더펠스인들은 전투로 지쳐있어." 이세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고향이 남아있기는 한지 확인하고 싶을 거야. 그들은 농작물을 심고, 아이를 가지고, 그렇게 대재앙의 손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이들이 애써 무시하려 노력하는 방식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할 거야. 누구도 스탁헤이븐으로 진군한 뒤 어둠의 피조물에게 뒤통수를 맞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어." 개러헬이 다시 대답했다.

  "루비 드레이크에겐 있지." 아마디스가 와인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의 검은 눈은 차가웠고 계산으로 반짝였다. 언쟁까지는 아니라도, 거의 그 직전까지 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 수 있었다. "내 부하들은 종이에 적힌 '언젠가 미래에 주어질 황금' 따위의 약속에 기대 싸우는데 지쳤다고. 어둠의 피조물들은 포로의 몸값을 지불하지도 않고, 죽여봤자 챙길 전리품도 남기지 않으니, 아무리 싸워도 손에 떨어지는 게 없잖아. 다들 그 사실에 꽤 불만에 차 있거든."

  "당신이 다룰 수 있는 정도의 불만이겠지." 개러헬은 초조해 보였다. 그는 빈 와인잔을 내밀었지만, 아마디스는 무시했다. 끙 하는 투덜거림과 함께, 엘프는 직접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여태까진 잘 다뤄왔지." 검은머리의 여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젠 전투가 끝났잖아. 적어도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싸우게 하려면 종잇장보다는 묵직한 걸 내밀어야할 거야."

  "무슨 뜻이지?" 개러헬이 물었다.

  아마디스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잔에 담긴 진홍색 액체를 흔들었다. 잔 가장자리에 불투명하게 남은 자색 흔적이 차차 옅어졌다. "마리웬 왕비가 원하는 건 당신 뿐이지? 잔치에 와서 예를 표하고, 하룻밤 함께하는 것. 원하는 건 그 뿐이야.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떠나기 전 순간의 쾌락을 선사해주는 것."

  "그래." 엘프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는 유리병을 밀어놓고 의자로 돌아왔고, 물 마시듯 와인을 들이켰다. "비밀로 한 일도 아니었어. 그 제안을 받자마자 당신한테 바로 말했다고. 거절하겠다고도 했잖아."

  "그리고 난 당신이 수락해야 한다고 했지."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래야만 해." 그의 잔잔한 미소는 - 그 불같은 성정을 생각하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세야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엄청 저렴한 대가야, 정말로. 나는 왕관 하나 안 쓰고도 당신을 밤마다 취하는걸."

  "당신에겐 부대가 있잖아, 어쨌든."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와인을 비워버렸고, 잠시 갈망하듯 유리병을 바라보다가 빈 잔을 옆으로 치워놨다. "아마 그게 내가 당신이 거리낌없이 날 이용해먹도록 두는 이유일지도. 그저 당신의 루비 드레이크를 마음껏 이용하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디스가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이용하고 싶다면, 좀 더 괜찮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왕좌를 훔친 창부 따위보다 낮은 대가에 날 팔 수는 없어."

  개러헬이 짝 하고 두 손을 마주쳤다. "아,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는군. 훌륭해! 원하는 게 뭐지?"

  "그리폰 한 마리." 아마디스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아주 잠깐, 개러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커다래진 눈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확 기울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리폰을?" 그는 마치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당신은 그 녀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는 이미 십년 가까이 그리폰과 그 기수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왔어." 아마디스는 신랄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충분히 가까웠단 말이지. 그 사이에서 내가 배운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좋아,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당신은 회색 감시자가 아닌걸."

  "나도 알아." 그가 대답했다. "그래서 더 원하는 거야. 와이스하웁트 밖에서 감시자가 아니면서 그리폰을 가진 건 오직 나 뿐이겠지. 그건 어마어마한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 될 거야. 그 정도라면 루비 드레이크가 자유동맹까지 따라가게 할만한 가치가 있을 거고, 얼마 간은 더 많은 약속들로 그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야. 그리폰은 당신의 신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녀석들이 다른 용병대 놈들에게 으스댈 자랑거리가 될 거고, 혹시 자기네도 그리폰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따라올 놈들도 생길 테지."

  "글쎄, 어쩌면." 개러헬은 의자에서 넘어질 뻔 하며 흐트러진 셔츠 매무새를 정리했다.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그게 내 조건이야. 그리폰 한 마리. 짝을 지을 수 있는 암컷으로."

  "번식장까지 시작할 생각이야?" 엘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지도." 아마디스는 마시던 와인을 끝마치고 잔을 내려놓은 뒤, 무릎 위로 손을 깍지 껴 모았다. "당신도 내가 필요할걸. 지금 남아있는 그리폰이 얼마나 되지? 수천 마리 남짓? 그 중 절반 가량은 전투에 동원되었고. 대재앙이 끝나기 전에 많은 수를 잃게 될 거야. 남은 녀석들 중에 번식하지 못할만큼 늙은 놈들이 얼마나 될까? 너무 허약한 놈들은? 대재앙 기간동안 태어난 탓에 병으로 죽거나 기형으로 자랄 놈들은? 그 규모를 다시 복구하려면 분명 도움이 필요해질 거야, 개러헬. 나라면 할 수 있어. 스탁헤이븐 외곽, 아니면 그리폰들 기호에만 맞는다면 빔마르크 산맥도 괜찮겠지. 그 쪽에도 우리 가문의 영토가 있어. 어쨌든 당신은 번식장이 필요해질 거야."

  느릿하게, 개러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당연히 내 말이 맞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향하던 아마디스가 어깨 너머로 미소를 던졌다. "내가 어떤 그리폰을 가질지는 나중에 정하자고. 당신은 일단 단잠을 자두는 게 좋지 않겠어? 왕비한테 예쁘게 보이려면 말이야."

 

* * *

 

  그는 그렇게 했다.

  개러헬은 그의 눈동자 색을 더 깊어보이게 하고 그의 금발을 한층 빛나 보이게 할, 녹색과 금색의 비단 더블릿과 바지를 빼입고 눈부신 모습으로 마리웬 왕비의 잔치에 나타났다. 벨벳 재질의 반망토 위를 두른 회색빛 테두리의 담비 모피는 언뜻 귀족들이나 할법한 고급 흰담비 재질처럼 보였으나, 누구도 그 무도함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만 고급스러웠다. 다만 모피의 희미한 줄무늬를 제외하곤, 그의 복식에 회색빛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았으니까.

  일련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이세야는 왕비가 준비한 연회장의 화려한 촛불장식 아래, 개러헬이 단연코 눈에 띄게 수려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마리웬 왕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모여있는 귀족이며 용병들 모두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쟤가 잘생기긴 했지, 이세야는 손에 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게 정말 소용이 있기는 할지는 의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약속이란 원하던 욕구를 채우고나면 으레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폐하." 개러헬은 중앙에 자리한 왕비와 측근 귀부인들 앞에 멈추어 예를 갖추었다. 이세야는 그 자리에 없었고, 아마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색 감시자들의 자리는 왕비의 오른편으로, 칼린, 리스메, 그리고 전투에서 활약했던 몇몇 마법사와 감시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디스는 왕비의 왼편에 그의 부관들을 비롯한 용병 대장들과 함께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는 여타 귀족여성들 같은 화려한 드레스 대신, 갑옷처럼 황동 징이 박힌 검붉은색 가죽 누비 재킷을 입는 걸 택했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은 그들이 안티바 시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듯하게 잘려 그의 턱선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는 마리웬 왕비의 궁중에 모인 그 어떤 여성들과도 달라보였고, 개러헬이 그걸 분명히 인지하게 하려는 듯 했다.

  개러헬을 그를 인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는 그걸 능숙하게 감춰냈다. 예를 갖추고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완벽한 헌신만이 빛나고 있었으니.

  "회색 감시자 전투 사령관 개러헬이여." 마리웬 왕비는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휘황찬란하게 눈부셨고, 이 방 안에서 대재앙이나 오랜 포위 공세에 영향 받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듯 보였다. 청보라색 눈동자는 교묘한 눈화장과 분칠로 더욱 깊어 보였고, 진한 보라색 드레스는 어깨를 드러내 크림색 피부를 한껏 드러냈다. 주위의 귀족들은 7년의 고난 사이 여위고 단단해진 몸 위로 유행에 10년은 뒤쳐진 듯한 좀먹은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으나, 왕비의 아름다움에선 흠결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대가 우리 곁에 함께 해서 정말 영광이네." 그는 말했다. "온 안더펠스가 호스버그의 길고 가혹한 포위 공세를 무너뜨린 그대의 영웅적 행위에 감사하고 있다네. 이 보잘 것 없는 연회나마 그 감사의 일부로 받아주길 바라네."

  "충분히 너그러우신 제안입니다, 폐하." 개러헬이 대답했다. "저는 그저 험난한 시국에 모두가 그러하듯 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대의 의무는 다른 이들모다 무겁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저 혼자 짊어지기 힘들만큼이요. 저희 감시자들만으로도 그렇고요. 회색 감시자들은 어둠의 피조물에 맞서 싸운 안더펠스인들의 용기와 용맹함에 큰 빚을 진 셈입니다." 그는 세 개의 높은 단상을 차지한 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희가 자유 동맹으로 진군하기 위해선 그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대재앙을 끝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한다면, 악마의 군주에게 멸망을,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고향에 안전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의 연설에 침묵이 뒤따랐다. 곧이어 용병 대장들이 술잔을 나무 테이블 위에 부딪히며 감시자들의 약속에 환호했다. 그 환호는 병사들에게로 이어졌고, 마침내 왕비의 측근들 역시 다소 열정이 부족한 태도로 합류했다.

  "우리 안더펠스는 우리의 몫을 다할 것이오." 마리웬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그 머리를 장식한 섬세한 황금 왕관이 연회장 횃불 아래 몰려든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에게 가장 맹렬한 적수였소. 우리 이웃 자유 동맹이 현재 얼마나 곤궁에 빠져있는지는 모두 알 것이오. 악마의 군주에게 마지막 한 방을 먹이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휴식이란 없을 것이고 -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이 바로 그 선두를 차지할 것이오." 그는 두 손을 마주 포개고 개러헬을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감시자들이여, 우리가 쟁취한 승리를 함께 기념합시다."

  엘프는 승락의 뜻으로 다시 예를 갖춘 뒤, 영광스런 왕비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원하던 것 - 군사 원조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을 - 얻어냈고, 이세야는 동생의 자세에서 미묘한 만족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오늘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왕비는 호스버그의 사령관과 장교들 앞에서 약속했다.

  "제대로 지켜야 할텐데." 이세야는 술잔을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칼린이 작게 코웃음쳤다. "의심스러운가?"

  "난 언제나 의심이 많아." 엘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나머진 개러헬한테 달렸다고. 그리고 이걸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는 건 걔 뿐이지."

  "그는 대재앙을 끝내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야, 안 그래?"

  "당신이라면 안 그러겠어?"

  하인들이 연회의 첫 요리를 들여오고 있었고, 칼린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포위 공세에 오랫동안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하인들은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만찬을 준비해냈다 : 비둘기 파이, 브랜디에 졸인 건사과 소스를 부은 사슴 고기, 꿀과 잘게 다진 대추야자를 얹은 빵까지. 성의 저장고에 얼마 안 남은 사치를 총 동원해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운반해온 여덟 코스의 만찬은, 이세야가 살면서 먹어 본 가장 호화스러운 식사였다.

  마침내, 시중인들과 와인 운반인들이 자리를 무르고 궁정 음유시인이 첫 번째 노래를 마쳤을 무렵 - 개러헬의 영웅성과 안더펠스인들의 용맹함을 칭송하기 위해 조잡하게 지어낸 듯한 가사였고, 이세야의 귀엔 유치하기 그지 없었으나 점차 취해가는 병사들이나 용병들은 신나게 구절을 따라불렀다 - 칼린이 몸을 기울였다.

  "아니." 그 혈마법사가 대답했다. "나라면 어떤 일들은 결코 하지 않을 거야."

  "오? 예를 들면?"

  칼린은 비둘기 파이를 포크로 쿡 찍었지만, 바로 입으로 가져가진 않았다. 요리사들이 급하게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느라 깃털 뽑는 걸 놓쳤는지, 작은 깃털 하나가 파이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푹 젖어 뿌리 부분이 구부러진 채 진득한 파이 내용물 사이에 파묻힌 모양새가, 어쩐지 불쾌한 메아리처럼 마음 속을 울렸다.

  "너라면 아마 그 답을 알텐데."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파이에서 깃털을 끄집어냈다. "아니면 곧 알게 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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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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