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Age/Last Flight'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20.04.26 LF - 챕터 15
  2. 2020.04.26 LF - 챕터 14
  3. 2020.04.26 LF - 챕터 13
  4. 2020.04.26 LF - 챕터 12
  5. 2020.04.26 LF - 챕터 11
  6. 2020.04.26 LF - 챕터 10
  7. 2020.04.26 LF - 챕터 9
  8. 2020.04.26 LF - 챕터 8
  9. 2020.04.26 LF - 챕터 7
  10. 2020.04.26 LF - 챕터 6

15

 

9:41 용의 시대

 

  "혈마법사를 본 적 있어요?" 발리야가 물었다. 그렇게 소심한 어조로 물어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다소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에 템플러들이 함께하는 걸 받아들이려는 수 개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호스버그에서의 묵은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비록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는 레이마스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다소 음울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그 여성은 진정성 있는 겸손함과 친절함을 갖추고 있었다. 호스버그의 템플러들이 전부 그와 같았다면, 탑에서 보낸 유년기가 그렇게 공포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발리야는 종종 생각했다.

  다른 템플러들과는 그런 유대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들도 자기네끼리 뭉쳐 다녔으니 말이다. 기사단장 디귀어는 몇 주 전 입단의식을 치르다 사망했고, 그 후로 발리야는 남아있는 템플러들을 이전보다 덜 마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마스와는 아침 티타임에서 계속 마주쳤고, 와이스하웁트 내 접근이 허용된 구역을 함께 걷기도 하며, 발리야에겐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둘은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이가 됐다.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 가깝다고 할만한 사이라고 할까, 이렇게 그를 괴롭히는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을만큼은 편안한 사이가 된 것이다.

  레이마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요새의 작달만한 사과나무 아래, 앞마당의 엉성한 돌벽을 따라 사냥할만한 벌레가 있나 폴짝거리며 뛰는 갈색 작은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날개와 목 둘레에 검은 반점 무늬를 가졌고, 배 부분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었다.

  와이스하웁트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종류 중 하나로, 물 저장소에서 빗물을 훔쳐마시고 높은 탑의 돌틈에 둥지를 트는 녀석이었다. 발리야 역시 종종 그 작은 새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고, 저들처럼 자유를 누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기도 했지만, 기실 그 새들조차도 자신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였다. 그들 또한 이 요새에 매여있는 몸이 아닌가.

  새는 뭔가에 놀랐는지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레이마스가 천천히 발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템플러들의 도착 후 몇 달 간 길어진 머리칼 위로 햇빛이 비쳐들며 넓게 퍼진 회색빛이 눈에 잘 띄었다. "물론이지요."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대부분은, 겁에 질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이마스는 굳은살 박힌 엄지로 비어있는 찻잔 가장자리를 쓸었다. 길죽한 얼굴은 언제나 슬픔이 배어있는 인상이었으나,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좀 더 깊은 비탄이 묻어났다. "하지만 템플러에게 발각된 혈마법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어요."

  "나쁜 사람들이었나요? 제 말은...그들 전부가 악한 사람들이었나요?"

  인간 여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텐데, 저는 그 답을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좀 더 깔끔한 대답, 더 명확한 대답이라면, 그들이 금지된 말레피카룸에 손을 댔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왜였을까요?" 발리야는 좀 더 치고 나갔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중요해야겠지요." 레이마스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요. 어떤 건 제법 설득력이 있을 거고, 어떤 건 헛소리에 불과할 거예요. 어떤 것들은 제가 감히 믿고싶을 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구분할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언제나 진실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그들 자신의 지각과 희망과 공포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정직하다 한들 - 혈마법사라는 게 당신들한테나 그 자신들한테 그럴 수 있긴 할까요? -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영계 안에서의 허상 정도로만 '진실'일 것입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곤 단 한 가지, 그들이 말레피카룸을 범했다는 것. 템플러로선, 그걸로 끝인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회색 감시자들도 혈마법을 써왔어요." 발리야가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긴 했으나, 사실상 다른 감시자가 엿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는 수 세기 전에 비하면 굉장히 쇠락해 있었다. 수많은 홀과 마당은 - 그들이 있는 이곳을 비롯해 - 과거의 유물이자 현재의 빈 공터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마스는 또다시 대답을 미뤘다. 사과나무의 옹이진 나뭇가지에 마지막까지 매달려있던 마른 갈색잎이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졌다. 템플러의 얼굴 위로 회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나부꼈다. 그는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원치 않는 기억을 밀어내듯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챈트리는 우리에게 인간의 자만심과 야망이 어둠의 피조물을 만들어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바람이 멎은 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했다. "마지스터들이 혈마법을 이용해 영계를 침범하고 황금 도시를 약탈했고, 그들의 어리석은 짓의 대가로 테다스 전체가 파멸하고 말았다고. 혈마법이 바로 회색 감시자들이 목숨 바쳐 막으려 하는 그 악을 창조했다고. 그 저주받은 무기를 놈들과 맞서 싸우는데 똑같이 이용한다는 게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군요, 아무래도."

  "하지만 그들은 오염 또한 이용하잖아요." 발리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여 놈들과 맞서 싸워요. 도구로 이용한다고요."

  "사용자를 파괴하고 마는 도구겠죠." 레이마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혈마법이든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든, 파괴를 동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디귀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세요?" 발리야가 물었다. 일전에 예의를 갖춘 애도 인사를 전했을 때 이후로 기사단장의 죽음에 대해 레이마스와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니 어색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럴지도요. 그 의식은 나약함을 허용하는 종류가 아닐 테고, 디귀어 님은 결코 나약한 분은 아니었지만 템플러 기사단을 떠나기로 결정한 후로 꾸준히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의문이 그 분을 오염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을지도요. 그 부식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인한 의지가 필요할 테니까요."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발리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소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됐지만, 레이마스 자신도 같은 질문을 떠올린 적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닐 수 있겠는가? 젊은 마법사들 역시 두려운 상상에 시달리다 밤중에 깨어나 늦도록 침대 너머로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내가 시험을 치르긴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마스의 핏기 없는 얇은 입술이 고심하듯 일그러졌다. "수석 감시자는 디귀어 님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전까진 입단의식을 진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도 괜찮은 일이지요. 제가 오늘 그 잔을 받는다면, 저 역시 기사단장님 뒤를 따를 것 같으니까요."

  "왜죠?"

  "저 역시 제 자신만의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이들은 오래 된 영웅적인 집단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맞서 싸우는 악은...저는 제 삶을 회색 감시자의 사명에 바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템플러가 된 이유라면 잘 압니다. 저는 마탑의 벽 안에서 양쪽 사람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뭘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제 사명을 다하는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해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숙명적인 패배를 받아들이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제 동기는 순수하지도 확고하지도 않기에, 제가 그 독배를 마신다면 디귀어 님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회색 감시자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발리야가 작게 속삭였다. "제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제 생각에...영웅이 되려면 저보다는 훨씬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번엔 레이마스 쪽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가요?"

  발리야는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일기장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그는 불안한 듯 무릎 위에 얹은 손등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이미 끝까지 읽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이세야의 일기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감시자들이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 물론 네 번째 대재앙의 유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기야 했지만,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원한 것 같은 내용은 없어 보였다 - 나중에 이세야의 혈마법에 대한 고백과, 그걸로 뭘 했는지에 대해 읽은 뒤로는 충격에 빠져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 개러헬에게 혈마법사인 누나가 있었다니. 이세야는 회색 감시자였고, 혈마법사였다.

  그가 엘프였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야 했지만, 분명 중요할 터였다.

  개러헬의 이야기는 테다스 누구나 아는 영광스러운 전설이었고, 그의 위대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엘프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고 떠들든, 그들이 얼마나 경멸을 담아 "뾰족귀"를 음해하건 간에, 누구도 자신들의 터전, 혈통이 이어질 수 있게 기꺼이 스스로를 악마의 군주 안도랄 앞에 내던진 그의 희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세야의 고백이 밝혀진다면 그 빛나는 명예는 퇴색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이 벼랑 끝에서, 잿물이라도 삼킨 듯한 씁쓸함과 함께, 발리야는 자신이 동족들의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의 일기장이죠?" 레이마스가 물었다. 정중한 어투과 조심스러운 눈길은, 발리야가 대답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감시자 중 한 명이예요." 발리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도무지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 당시의 감시자였어요. 그는 혈마법사였고,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죠...하지만 대단한 일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혈마법사에 대해 물어본 거예요 - 그 힘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한지. 만약 템플러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준다면, 제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덜해질까봐.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죠...그리고 그가 남긴 이 유산도...복원할 가치가 있을 수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갈색 작은 새가 다시 사과나무로 돌아와 옹이진 마디 위를 종종 뛰어갔다. 어쩌면 아까와 다른 녀석일지도. 발리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관찰해놓고도, 그는 아직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저는 더 이상 템플러가 아닙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어찌나 작게 말했는지 거의 속삭이는 듯 했지만, 정적을 깬 목소리에 발리야는 화들짝 놀랐다. "말레피카룸의 존재에 호들갑을 떠는 건 더 이상 제 임무가 아니지요." 그의 지친 것 같은, 어두운 색의 눈 안에는 발리야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희망, 혹은 체념...아니면 일말의 두려움일지도?

  "무슨 뜻이죠?" 엘프가 물었다.

  "이제 저도 그 회색 지대를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입니다." 레이마스가 답했다. "그러니 어쩌면, 혈마법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요. 그 감시자가 남긴 유산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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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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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5:19 숭고의 시대

 

  "놈들이 오고 있어." 리스메는 놋쇠 망원경을 얹은 왼쪽눈을 찡그린 채 모두에게 알렸다. "스카이버너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양성의 마법사는 아직도 분홍빛으로 생생하게 남은 지하대로에서의 상처를 특유의 축제 같은 분장에 잘 녹여낸 듯 보였다. 오늘 그는 남성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맞춰 긴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막 아물고 있는 분홍빛 상처 주위에서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콧수염 사이로 얼굴 왼쪽면을 따라 한줄기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얼마나 돼보여?" 이세야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그에게 작은 무리의 마법사와 궁수로 이뤄진 그리폰 부대를 맡겼다. 그의 지휘 하에 있는 감시자들은 전부 노련한 숙련자들이었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 중요하지만, 큰 역할은 아니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예상보다 큰 규모로 몰려온다면 그들의 작전은 성공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의 임무는 호스버그의 남쪽, 라텐플루스 강줄기를 따라 보이는 어둠의 피조물을 전부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동맹군들은 거의 개러헬의 지휘 하에 도시의 북서쪽으로 집결했고, 그곳으로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집중될 예정이었다.

  남쪽 전방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지만...그 텅빈 모습은 전부 위장에 불과했다. 초대라도 하는 양 넓게 펼쳐진 벌판은 후방에서의 기습을 꾀하는 어둠의 피조물 군대를 제법 끌어모았고, 이제 감시자들이 해야하는 일은 화살이나 검보다는 함정이나 주문으로 놈들을 해치우는 일이었다.

  "대충...200마리, 아니면 250 정도." 리스메는 잠시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그는 망원경을 내리고 어깨 너머로 이세야를 돌아봤다.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리는 머리칼이 검은 비단 휘장처럼 그를 휘감았다. "거의 헐록들이고, 쉬릭도 몇 마리 있어. 오우거는 세 마리야."

  "악마의 군주는 없고?" 이세야가 물었다.

  "없어." 리스메의 대답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가 안더펠스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믿을만한 정보는 6일 가량 전 안티바시티의 폐허 근처에서 목격된 일이었다.

  안심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오늘의 전투에 악마의 군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놈이 나타난다면 대재앙을 끝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몰살당할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기에. 7년의 길고 긴 포위 공격에 시달린 탓에, 호스버그의 수비병력은 그런 거대한 적을 마주할만한 상태가 못 됐다.

  리스메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접근 중인 어둠의 피조물들을 관찰했다. 이세야의 눈에는 지평선 위에 한줄기 검은 선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재앙의 가뭄 속에 옛날 보다 20~30 야드는 더 얕아진 라텐플루스 강줄기가 앞장 선 무리의 들쭉날쭉한 대열 뒤로 일렁이며 반짝였다.

  그리고 놈들의 전방에, 감시자들이 그리폰과 함께 매복중인 지점과의 중간 정도 되는 곳에 스카이버너가 준비돼 있었다.

  드워프들이 지하대로 안에서 어둠의 피조물에 맞서기 위해 고안해낸 함정을 변형시킨 스카이버너는, 기본적으로 커다란 자기 항아리 안에 쇳조각이나 망가진 갑옷, 뾰족한 돌덩이 따위의 파편 같은 걸 가득 채워 파묻은 모양새였다. 각각의 항아리 중앙에는 룬 문자를 리륨으로 새겨둔 특별한 돌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드워프들은 적당한 자극만 가해지면 제대로 폭발할 거라고 동생에게 다짐했다. 비록 다소 부정확하고 때때로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그 리륨 룬은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확실한 타격을 입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죽은이들의 무기 주위로 묘비처럼 쌓아올린 돌무더기는 올레이식 전통이나 일부 티빈터 제국의 풍습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테다스를 지배하는 국가 중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가진 곳은 별로 없었고 - 악마나 악한 영들이 그 유골을 차지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으니 - 그들은 대부분 시체를 불태운 후 유품인 무기를 묘비로 삼곤 했다.

  하지만 안더펠스의 삶은 충분히 가혹했고, 죽은 이를 위해 남겨두기에 무기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인간들의 풍습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바위더미 사이에 꽂힌 귀중한 미늘창과 죽창의 흔적에 좀 더 의심을 품었을 터였다.

  하지만 개러헬은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그런 섬세함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놈들이 희생자로부터 성한 무기를 챙길 기회를 지나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헐록이나 젠록들에게는 세공 기술이라 할만한 게 없었다. 그들은 구울들이 조악하게 만들어내는 도구에 의지해야했고, 구울들은 그리 능숙한 대장장이라고 알려져 있진 않았다. 즉, 그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네 개의 돌무덤을 발견하면 신나서 무기를 차지하러 달려들 것이고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 죽창과 미늘창, 쇠를 덧댄 지팡이 더미에 손을 대는 순간, 놈들은 죽는 것이다. 무기더미 바닥 주위로 깔린 철망덫이 숨겨진 스카이버너와 연결돼 있었다. 리륨 룬 문자가 발현되기까진 짧은 간격이 있었고 - 운이 따른다면, 그 사이 더 많은 어둠의 피조물이 함정 안에 들어온 뒤에 - 스카이버너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치러줄 것이었다.

  이세야는 그 광경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불꽃놀이를 좋아했고, 이 드워프제 폭탄은 분명 훌륭한 품질을 선보일 것이었다. 이 물건은 동맹을 끌어모으기 위한 개러헬의 끝없는 노력의 성과로 고작 몇 달 전에야 받은 것이라 아직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드워프들은 전사들을 직접 보내는 건 꺼려했으나, 광부 계급의 두 자매와 다양한 재료가 담긴 짐마차 몇 대를 감시자들에게 보내왔다.

  "거의 다 왔다." 리스메가 속삭였다. "준비해."

  이세야는 끄덕이곤 다른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리스메도 뒤따라 와 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망원경으로 어둠의 피조물들의 위치를 계속 추적했다.

  작전에 참여한 회색 감시자는 고작 스물세 명이었고, 열두 마리의 그리폰이 동행했다. 그들은 호스버스의 광부들이 마른 호수 형태로 파놓은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골짜기엔 라텐플루스 강이 흘렀겠지만, 대재앙이 계속되는 사이 수위가 점차 낮아져 골짜기 바닥에는 끈적한 진흙만 남아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엔 모기들이 번창하기 딱 적당한 정도의 습도만 남아 대기 중인 회색 감시자들을 괴롭게 했다.

  구름떼 같은 모기들을 휘저어 쳐낸 이세야는 레바스의 안장에 올라탔다. 칼린은 이미 승객용 안장에 자리잡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 역시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모두들 두 사람씩 태우고 있었지만, 다나로의 때까치만은 입단의식 이후로 몹시 예민해진 터라 자신의 주인 이외에는 누구도 태우려 하지 않았다.

  때까치는 다른 그리폰들과 거리를 두고 어쩐지 풀죽은 듯한 모습으로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세야가 의식을 행한 후 회복한 듯 보였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어쩐지 앙심을 품은 것만 같았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난 그는 성미가 사나워졌고, 다른 그리폰들 역시 녀석에게 적대감을 보였다. 다른 그리폰과 위험할 정도로 싸운 것만 해도 두 번이었고, 마굿간지기 소년은 저녁 식사용 염소를 갖다주고 조금 오래 머물렀단 이유만으로 팔에 흉한 상처를 얻기도 했다. 오직 다나로만이 그의 증오에 찬 눈빛이나 패악을 겪지 않은 채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때까치에게 두 번째 승객을 태우지 말자는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세야는 오늘 일이 무탈하게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 멀리 북쪽에서는 신호용 북과 찢어지는 나팔 소리가 진군을 알려왔다. 호스버그의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주저하듯 고개를 돌리는 몇몇 놈들은 라텐플루스 여울을 건너야 할지 전장으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놈들은 무기 더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우거들이 가장 먼저 전진했고, 자신들이 쓰기엔 턱없이 작은 포상품을 향해 달려들며 작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이리저리 집어 던졌다. 뾰족한 주둥이의 쉬릭들은 오우거의 발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달리며 덩치 큰 놈들을 앞지르려 노력했다.

  놈들이 항아리에 닿았을 때, 어둠의 피조물들은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은 놈들에게 유리하게 불고 있지 않았지만, 이세야는 긴장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의 능력은 예측불가였고, 때때로 놈들은 감시자들이 입단의식으로 획득해 놈들을 감지하는데 쓰는 것과 똑같은 동질성으로 회색 감시자들을 느끼곤 했다.

  혹여 놈들이 골짜기에 숨어있는 감시자들을 알아차렸는지는 기색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오우거들이 항아리로 몸을 숙였고, 쉿쉿거리는 쇳소리를 내는 쉬릭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놈들의 두툼하고 마디진 커다란 손과 바늘처럼 날카로운 비쩍 마른 손이 죽창과 지팡이를 붙잡았고, 함정과 연결된 무기들을 끄집어내 의기양양한 괴성을 지르며 들어올렸다. 느리게 도착한 헐록과 젠록들이 뒤를 이었고, 놈들은 부러운 듯 으르렁대고 툴툴거리며 쉿쉿거리는 쉬릭들에게 작은 무기 쪼가리라도 뺏으려 엎치락뒤치락 했다. 춤추듯 둥글게 둘러싼 녀석들의 무리가 포상품을 다투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그리고 대지가 그들의 발밑에서 폭발했다.

  태양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청록색의 불꽃덩어리 네 개가 흙더미를 이십여 피트 높이로 솟구쳐 올렸다. 이백 야드도 넘게 떨어진 곳에 대기하던 회색 감시자들에게도 압력의 여파가 몰아쳐 이세야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숨이 턱 막히게 했다. 마법 불꽃이 가장 가까이 있던 어둠의 피조물을 불태우며 눈 깜짝할 사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잿더미로 만들어놨다. 바위와 하얗게 달아오른 금속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어둠의 피조물들을 조각조각 베어내고 찢어냈다. 폭발 가까이 있던 놈들은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스카이버너의 위력은 이세야가 본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었다. 회색 감시자들을 향해 치솟은 바람은 살육의 흔적을 담아 끈적하고 무거운 냄새를 풍겼고, 언저리에선 태운 리륨의 매캐한 향이 감돌았다.

  "가자." 그는 동료들에게 명했고, 레바스에게 비행 신호를 보냈다.

  거센 날개짓과 함께 회색 감시자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의 임무는 혼란에 빠진 부상당한 어둠의 피조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가혹하리만큼 깔끔한 작업이었다. 화염구가 비틀거리는 헐록무리를 꿰뚫었고, 돌덩이가 죽어가는 오우거 위로 쏟아졌다. 얼음폭풍과 서리화살이 젠록의 검은피를 얼렸고, 쉬릭의 가느다란 뼈를 바스라뜨렸다. 무너진 대지가 리스메가 일으킨 지진과 이세야의 장력주문을 따라 흔들렸다. 난전 사이로 꽂혀드는 궁수들의 화살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강으로 유인할 생각이었으나, 그리폰 부대가 두 번 스쳐간 뒤엔 유인할 잔당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드워프들의 스카이버너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위력을 선보였고, 그들의 소박한 매복작전은 완벽한 학살극으로 마무리됐다.

  본격적인 전투는 좀 더 까다로울 듯 보였고, 이세야는 때까치가 이미 자기 앞쪽의 적들에게 달려드는 중인 걸 발견하자 즉시 감시자들을 가다듬어 공격에 나서게 했다. 

  다나로는 안장 위를 딛고 일어서서 있는 힘을 다해 고삐를 추스르고 있었지만, 완전히 격노한 그리폰을 멈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때까치의 분노는 이세야가 본 그 어느 것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그 그리폰은 한 무리의 무장한 오우거 떼를 향해 날아들었다. 인간과 드워프로 이뤄진 한 쌍의 회색 감시자가 놈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둘 다 어둠의 피조물의, 그리고 대부분은 그 자신들의 것일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오우거 무리에 시야가 가려 이세야는 아주 잠깐 밖에 그들을 볼 수 없었지만, 두 감시자가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때까치의 주의를 끈 게 그 감시자들의 위태로운 상태인지, 단순히 오우거가 가장 커다란 타겟이기 때문인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었든 간에, 그 그리폰은 저돌적으로 내리 꽂혔고, 가장 덩치가 큰 오우거의 뒤쪽에서 웅크린 발톱으로 목을 덮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머리가 전방으로 확 꺾였고, 그 거대한 괴수는 선 채로 즉사했다.

  다른 오우거 두 마리가 그리폰을 붙들었다. 한 놈이 때까치의 왼쪽 날개를 붙잡아 흉포하게 비틀었다. 이세야는 그 그리폰이 오우거의 손에 붙들려 고꾸라지는 것까지 보고 때까치도 그 기수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고, 레바스는 다시 전장 위를 훑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레바스가 다시 그쪽으로 향했을 때 그는 그 그리폰이 죽어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때까치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여전히 날고 있었다. 부상입은 날개는 휘저을 때마다 망가진 연처럼 퍼득거렸으나, 마법의 힘이든 아드레날린 덕이든 단순히 맹렬한 의지 덕이든 간에, 때까치는 여전히 공중을 날고 있었다. 다나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등에 매달린 채, 주문을 외울만한 여유가 주어질 때마다 반쯤 마무리한 주문을 오우거들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세야의 등 뒤에서 칼린이 숨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엘프는 자백하듯 대답했다. "나는 그저 그를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에서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내가 의도했던 건 아니라고. 나도 저게 뭔지 모르겠어."

  방향을 돌린 뒤, 이세야는 오른팔을 들어 다른 감시자들에게 신호했다. "비행 부대! 공격!"

  명령이 그의 입술 끝을 채 떠나기도 전에, 레바스는 이미 아래로 뛰어들고 있었다. 때까치와 달리, 레바스나 다른 그리폰들은 훈련받은 전술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전장을 주의깊게 훑으며 빠르게 요리조리 몸을 틀어 어둠의 피조물이 날리는 주문이나 검은 화살을 피해가며 그들의 기수가 준비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 보조했다.

  소규모의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젠록 어쌔신 무리에게 당하는 중인 걸 발견한 이세야는 레바스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붉은 드래곤 깃발 아래 남녀 가리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고 있었으나, 젠록 쪽이 다소 우세해 보였다. 놈들의 혈관을 흐르는 기묘한 마법 덕에, 그 단단한 어둠의 피조물은 그림자 사이로 안티바 까마귀단 못지 않게 은밀하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놈들은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그들을 마주하려 돌아설 때마다 사라져서는 측면에서 나타나 재빠르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법의 힘이라면 그 불리함을 극복할 수도 있을 터였다. 레바스가 젠록과 용병 무리 위로 스쳐가는 찰나, 이세야는 철저하게 계산된 초자연적인 냉기폭풍을 전장의 외곽을 따라 흘려보냈다. 뒤를 이어 칼린 역시 이차적인 서리 쐐기를 사이사이 박아넣어 이세야의 마법에 중첩되어 미처 붙들지 못한 적들까지 붙들어냈다.

  두 사람의 연쇄 마법은 대부분의 어쌔신을 잡아냈고 - 일부 루비 드레이크 일원이 포함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지만 - 놈들을 얇은 유리막 같은 얼음틀에 봉쇄해 버렸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던 놈들은 그 안에서 즉사하며 분홍빛 얼음고치를 만들었다. 나머지는 무력하게 묶여있던 치명적인 몇 초 사이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남아있던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장 곳곳에서 다른 그리폰 기수들 역시, 난장판 속에서 자잘한 충돌지역에 뛰어들어 아군을 돕기 위해 힘을 보태가며 비슷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법에 의해 피어오른 곳곳의 불길에서 연기와 재가 날아들어 눈과 코를 찔러댔지만, 모두들 고통에 아랑곳 않고 싸워나갔다. 감시자 보병들이 퇴각할 수 있게 엄호 화살을 쏘아댔고, 불꽃과 돌무더기를 날려 헐록과 젠록 무리를 밀어내 아군이 재편성할 수 있게 했으며, 오우거나 주문을 쏟아내는 에미서리를 교란시키기 위해 반짝이는 환영을 자아내어 지상의 병력이 그 혼란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넝마조각 같은, 마치 진짜 마법사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양 지나치게 큰 로브자락을 걸친 헐록 에미서리가 검은 불꽃을 내뿜어 그리폰 한 마리를 가격했다. 그 그리폰은 거칠게 나부끼는 와중에 중심을 잡으려 몸부림쳤으나, 오우거가 던진 바윗덩이가 그 전에 녀석을 격추시켰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두 감시자도 함께 떨어졌고,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달려들어 그 죽어가는 짐승을 발톱과 톱날같은 칼날로 찢어놓기도 전에 이미 그 밑에 깔려 죽은 뒤였다. 놈들의 야만적인 학살에 붉은 피가 안개처럼 흩뿌렸다.

  이세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어떻게 막아볼 수 있었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역시도 위험에 처해 있었으니. 석궁을 장전한 젠록 무리가 레바스를 공격하고 있었고, 그와 칼린이 날려대는 화염수가 궁수와 화살들을 불태우곤 있었으나 그리폰이 그 맹렬한 기세를 뚫고 나가기엔 너무 위험이 컸다.

  화살 하나가 이세야의 팔을 빗겨갔다. 이어 갑옷을 두른 안장 앞쪽으로 화살 두 발이 더 빗겨갔다. 엘프는 최대한 엄폐할 수 있게 몸을 웅크린 채로 레바스에게 퇴각 신호를 보냈고, 화염마법으로 최대한 시간을 벌려 했다.

  자잘한 자상과 석궁 화살에 맞은 채로, 검은 그리폰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젠록의 화살이 그를 뒤쫓았으나 놈들의 무기로는 수백 피트 위의 레바스를 맞출만한 능력도 정확함도 부족했다.

  그들은 뭔가를 하기엔 너무 멀지만 상황을 내려다볼 수 있을만한 높이에서 전장 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이세야를 놀라게 한 것은 때까치가 여전히 땅 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온통 피범벅이 된 모습 덕에 처음엔 바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다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광기에 찬 그리폰으로부터 도망쳤든가, 아마 이미 죽은 거겠지.

  어느 쪽이든, 때까치가 그 사실을 알기는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그리폰은 광란의 전투에 빠져있었다. 그는 오우거 하나를 발로 차 헐록 무리 위로 넘어뜨렸고, 그 돌진력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그 자신도 넘어졌다가 그대로 오우거 위로 올라타 온 발톱을 이용해 놈을 찢어대며 목줄기를 부리로 물어뜯었다.

  그 맹렬한 공세 탓에 그 자신은 헐록의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작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자세를 바로 잡고는 그에게 달려들어 찔러대고 베어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까치는 용케 대다수의 공격을 피해낸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디를 공격할지 미리 알기라도 하는 것마냥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 그러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았고, 때까치는 놈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 적어도 그가 어떻게 여지껏 살아남았는지는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의 힘과 속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돼 있었다. 그는 보지도 않고 헐록의 검으로부터 뒷다리를 당겨 피했고, 이어 - 여전히 보지도 않은 채, 이세야가 감히 눈으로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속도로 - 같은 다리를 기괴한 각도로 내뻗어 그 헐록의 내장이 다 드러나게 배를 갈라 대지 위에 흩뿌렸다.

  칼린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세야는 그저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연기를 뚫고 소리를 질러댄 탓에 건조해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나도 몰라. 아주 오래된 감시자들이 저럴 수 있단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아. 너무 오래 버티다보면, 거의 콜링을 듣기 직전 쯤이 되면, 어떤 이들은 어둠의 피조물과 너무 가까워져서 놈들의 생각이 메아리처럼 들린대. 그리 오래가진 않지만. 그건 아무래도 끝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때까치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군, 분명히." 칼린은 잠시 말을 멈췄고, 비록 그가 등 뒤에 앉아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이 혈마법사와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덕에 그가 지금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고심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해, 그냥." 그가 속삭였다.

  "네가 한 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가 원한 건 그저 때까치가 살아남는 것 뿐이었다. 저렇게 날개 달린 파괴의 화신이 되길 바란 게 아니라.

  "하지만 다른 이들이 원할만한 것이지." 그는 마침내 비틀거리기 시작한 때까치를 가리켰다. 그 그리폰의 회색 날개는 붉고 검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개깃에선 움직일 때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몸통 여기저기엔 동상과 자상이 가득했다. 부러진 화살이 목덜미에 하나, 오른 앞발에 하나씩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고, 그를 둥글게 둘러싼 시체의 산은 열마다 각각 다섯 구는 넘어 보였다.

  전방에서는 놋쇠나팔 소리가 아군의 승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들이 이겼다. 어둠의 피조물 부대가 무너졌고, 저 멀리 어딘가 있을 악마의 군주가 이 전투에 흥미를 잃고 패잔병들의 통솔에 손을 놓은 탓에 혼란에 빠진 졸개들이 우왕좌왕 했다. 헐록과 쉬릭 무리는 죽은 동족의 시체를 넘어 이리저리 흩어졌다. 도망치기엔 너무 크고 느린 오우거들은 마저 싸우며 최대한 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감시자와 동맹군 사이에서 환호성이 들려왔고, 그들은 충전된 사기로 무장한 채 패잔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내 그들의 승리는 추격전으로 바뀌었고, 어둠의 피조물들은 라텐플루스 강으로 쫓겨나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세야는 그 환호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쓰러진 때까치를 내려다봤다. 그들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악마의 군주가 살아있는 한, 그 어떤 승리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늘 호스버그가 해방됐다 해도, 한 주, 한 달, 혹은 일 년 안에 어둠의 피조물에게 다시 함락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칼린이 옳았다. 이세야는 감히 인정하고 싶지 않음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이 지금보다 더 맹렬해지길 원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리폰 기수들은 원하지 않겠지만 - 그 짐승들을 친구나 신뢰하는 파트너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 동물을 그저 전략적으로 소모할 수 있는 전쟁의 도구로만 여기는 이들, 스카이버너나 투석기와 다를 바 없이 여기는 이들이라면 어떤 비용이 들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이건 내 주문이었어." 그는 큰 소리로, 칼린과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들은 전장 위 높은 상공에 떠 있었고, 바람에 실려 피냄새와 연기가 풍겨왔지만 다소 옅게 느껴졌다. 레바스의 털에서 풍기는 사향이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직 나만의 것일 거야. 누구도 이 비밀을 알지 못해. 그리고 나는 다시는 이걸 쓰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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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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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다나로가 물어왔다. 나직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이라곤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말하는 도중 무의식적으로 부상 입은 다리를 덮은 거친 재질의 담요 귀퉁이를 구겨쥐었다. 그 천자락은 지난 며칠간 초조한 손길에 시달린 흔적으로 때가 타 구겨져 있었다.

  하루이틀 정도 뒤면 그는 호스버그 의무실 밖으로 나설 수 있을 터였다. 치유사들은 이미 거의 모든 상처를 치료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그저 다리의 상처로부터 독이 더 번지지 않는지 이따금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마법사에게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 때까치의 상태였다.

  "나는 내 그리폰이 날 구하느라 죽는 걸 원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를 이대로...구울이 되게 둘 수는 없어."

  "그러지 않을 거야." 이세야는 약속했다. 다나로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가서 마음이 아파왔다. 모든 기수들은 방랑자의 경우처럼, 전투 중 자신의 그리폰이 쓰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끔찍할 지언정 적어도 빠른 과정이긴 했다. 고통에 시달리며 느리게 구울이 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만큼 끔찍했다.

  "퍼렐든에 자라나는 야생화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다나로는 입을 열었다가, 미처 생각을 끝내지도 못한 채 씁쓸하게 말을 줄였다. "어린애들용 이야기일 뿐이겠지. 너무 절박해서 멍청해졌나봐, 나도 참, 애들 얘기 속에서 희망을 찾다니. 설사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 한들, 지금 와서 뭐? 대재앙이 시작된지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꽃이 있어봤자 이미 뿌리까지 싹싹 뽑힌지 오래겠지. 차라리 저 창문으로 요정 대모님이 날아들어 반짝이는 지팡이를 휘둘러 그를 구해주길 바라고 말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이세야가 말했다. 침대 옆에 선 그는 확신 없는 눈으로 다나로를 내려다봤다. "네가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설마 입단 의식을?" 다나로는 그 단어를 내뱉으며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억눌렀다. 그는 큼직한 엄지손가락으로 콧잔등에 난 사마귀 문질렀다. "그런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리폰에겐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아. 그 시도만으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난장판이었어서 지난 50년 간 아무도 그럴 생각조차 안한 거라고. 그리고 설사 그 실험이 성공적이었어도...이미 타락으로 죽어가는 그리폰에겐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럴지도 모르지." 이세야는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것 뿐이야. 최초의 의식은 지금의 때까치 같은 운명을 앞둔 사람들로부터 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됐던 거였어. 이제 와서 더 잃을 게 뭐 있어?"

  "많지, 사실." 다나로는 미소 지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끌어올렸으나 결과적으론 찡그리는 모양새가 됐다. 그는 사마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담요 위로 떨구곤 천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때까치. 너. 어쩌면 다른 친구들까지도. 그리폰들에게 입단 의식을 시도했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들었던 거 너도 기억하잖아."

  "물론." 그런 시도가 마지막으로 있던 건 50년도 전의 일이었지만, 감시자들은 여전히 그 때의 교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마바리를 대상으로 한 입단 의식은 인간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죽는 놈도 있었고, 살아남는 녀석들은 회색 감시자들과 비슷한 면역력과 적응력을 획득했다. 충분히 오랫동안 살아남기만 한다면 아마 녀석들도 콜링을 겪었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은 개가 있었단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개들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짧았고, 전투견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리폰은,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야수는 입단 의식 도중 통제할 수 없는 맹렬한 분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공격성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만 위험에 빠트린 게 아니라, 그 자신마저 목표로 삼았다. 그리폰이 품은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증오는 스스로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타락에게까지 향했고, 그 고귀한 생물은 혐오감에 몸부림치며 스스로의 육신을 찢어댔다. 초기의 실험에서 발생했던 그 끔찍한 비극은 회색감시자들에게 감히 같은 일을 다시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감시자들은 혈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칼린이 그에게 가르친 내용들 속에 그리폰에게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이게 하는 열쇠가 숨어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만 있다면, 아주 약간만 뒤틀어놓을 수 있다면...완전한 속박이 아니더라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정도라면...어쩌면 그 맹목적인 증오를 뒤덮고 타락과 공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확률 낮은 도박이었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감히 고려조차 하지 않을만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게 때까치를 죽음이나 구울화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면? 물론, 당연히, 그런 결말보단 명백히 나은 선택지이고 말고. 그리폰의 충성심이 그런 끔찍한 운명으로 보답받는 건 어느 쪽에게든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다나로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탐색하듯 그를 훑어봤다. 투박한 농부같은 인상을 가진 그 마법사는 정직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듬직한 친구였고, 그 얼굴 위에 서린 서글픈 희망을 감출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세야가 자신의 사랑하는 그리폰을 구할 수 있다고 믿길 바랐지만, 사실 믿고 있진 않았다. 그다지.

  "시도는 해봐." 그가 말했다.

  "그럴게." 이세야는 대답했고, 동생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개러헬은 성의 군사작전실에서 아마디스를 비롯한 십여 명의 사람들과 회의중이었다. 상급 회색 감시자와 군 사령관, 그리고 안더펠스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이끄는 용병 대장들. 이세야가 알기로 지금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지원병력이 끊긴 기회를 이용해 호스버그의 포위 공격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안더펠스 왕국군의 여성사령관인 우바샤 역시 자리하고 있었고, 남편이었던 헤놀트 국왕이 2년 전 오우거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서지며 짧은 재위기간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호스버그의 통치자로 군림 중인 섭정왕비 마리웬 역시 여느 때처럼 끝없이 툴툴거리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빛내고 있었다. 헤놀트에겐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지만, 국왕 그리바우드는 자신의 유아방을 통치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은, 그리 놀랍지 않게도, 기꺼이 섭정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세야가 왕성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마리웬 왕비의 통치에 대한 가장 불경한 내용은, 대재앙 덕에 안더펠스의 궁극적인 권력이 마리웬 왕비가 아닌 여성사령관 우바샤에게 가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 왕비는 마주치는 잘생긴 용병들마다 경박하게 유혹하는 태도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지만, 우바샤는 쉴 새 없이 묵묵한 태도로 일하며 필요한 일을 하나씩 해냈다.

  지도가 놓인 탁자 끝, 아마디스와 개러헬을 둘러싼 작은 무리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우바샤였다. 가까이 다가간 이세야는 지도 위의 표식들이 이동한 걸 볼 수 있었다. 우윳빛 대리석 조각들은 감시자, 마법사, 그리폰 외에도 호스버그를 둘러싼 용병대 무리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린애들 놀이에 이용되는 흑백의 돌조각들은 안더펠스 왕국군을 표시했다. 그리고 개러헬의 유별난 명령에 따라 왕궁 하인들이 모아온 말린 바퀴벌레 시체더미가 어둠의 피조물을 표시했다.

  그들은 라텐플루스 강 평야가 전장으로 가장 적합한 이유와,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들을 그 함정으로 끌어들일지에 대해 논쟁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악마의 군주가 이끌 때조차도 통상적인 군대가 싸우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급로를 지키거나 병력손실을 줄이는 일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으니. 놈들은 모든 걸 쏟아붓는 맹렬함으로 일반적인 인간이나 드워프 사령관이라면 경계하며 물러설 상황에조차 오로지 전진하곤 했다.

  물론,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떨 땐 악마의 군주가 교묘하게 자신의 군대를 파괴의 문턱에서 끌어내 적들에게 전략을 그대로 되돌려 줄 때도 있었다. 그 예측불가능함 탓에 작전을 짜는 건 언제나 크나큰 도전을 요했다

  하지만 그 몫의 도전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이세야는 탁자를 지나 개러헬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해."

  개러헬은 초조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지금?"

  오랜 포위공격과 다가올 전투로 인한 긴장감이 그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었고, 그건 아마디스나 우바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예전보다 야윈 모습이었고, 눈매와 입가는 피로로 주름져 있었다. 우바샤의 밝은 갈색 머리는 씻지 못해 탁한빛을 띠었고, 아마디스의 옷은 입고 잔 흔적으로 구깃구깃 했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그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 손은 곱고 부드러웠다. 호스버그의 포위공격을 무너뜨리기 하루 전 날인 지금, 작전실에 선 그의 손은 전장에서 얻은 상처와 에미서리의 주문이 남긴 흉터로 가득했다. "지금."

  "좀 기다리면 안될까? 지금 좀 바빠서."

  "너한테 하라는 게 아냐. 병만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개러헬은 여전히 망설였지만, 어느 새 성가심보다는 호기심이 그 녹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여지껏 한번도 누굴 감시자로 징집하려 한 적 없었잖아."

  "한번도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병 내놔, 개러헬. 지금은 다른 신경쓸 일이 훨씬 많잖아."

  "좋아." 그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철제 고리 하나를 풀어냈다. 열쇠 하나가 달려있는 고리였다. 탁한 회색으로 변색된 작은 은제 열쇠였고, 기껏해야 보석함 정도에나 맞을만큼 작은 크기였다. "내 방 책상 서랍 안에 상자가 있어. 다 쓰면 다시 돌려놔."

  "당연하지." 열쇠를 받은 이세야는 아마디스와 우바샤에게 살짝 고개숙여 양해를 구하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기 직전, 왕비 마리웬이 그를 붙들었다. 왕비는 분을 바른 부드러운 손으로 이세야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고, 가지런한 손톱은 새로 칠한 듯 윤기가 돌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엘프를 붙들어 세우기엔 나비 위로 꽂히는 쇠침만큼 강력할 따름이었다.

  "동생 얘기를 좀 듣고 싶네만." 왕비 마리웬은 청보라빛 눈을 크게 뜨고 음모라도 꾸미듯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콜을 바른 긴 속눈썹 위로 눈꺼풀 위에 바른 진주가루가 반짝였다. 장미향과 늦여름의 여름자두향이 물결치는 검은 머리 위를 맴돌다가 깊이 파인 푸른빛 벨벳 드레스 위로 흩어졌다.

  7년에 걸친 포위 공격이 왕비에겐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에, 이세야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는 불쾌감을 감추려 했으나, 그리 많은 노력을 들이진 않았다. "제 동생이요? 이미 몇 년간 봐오지 않으셨습니까. 뭘 알고싶으신지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왕비는 순진무구한 양 달콤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던 건 동생에게 내 얘길 좀 해달라는 거였네. 전투 사령관께선 어찌나 바쁘신지 나한테 잠시 내줄만한 시간도 없는 것 같더군. 물론 이해하는 바이네. 바깥의 지저분한 일들 때문에 퍽 바쁘시겠지. 하지만 조만간 포위 공격도 끝난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그러길 바라고 있죠." 이세야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왕비에게 잡힌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그대들 모두 놀라우리만치 용감하니까. 그리고 전투 사령관 개러헬은 그 사이에서도 어찌나 늠름하고 용맹하신지. 아주 드문 남성이야.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네."

  "개러헬이 무척 영광스러워 할 것입니다."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알 수 있나." 마리웬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나 역시 이러한 뜻을 그분께 전하고 싶었네만, 말했듯이 워낙 바쁜 분이어서 말이야. 하지만 포위 공격이 무너지고 나면 이 또한 달라질 거라 나는 믿고 싶네.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고, 우바샤가 좀 더 평범한 업무를 돌보게 될 때 쯤엔...어쩌면 그분도 왕비의 존경을 즐기는 사치를 누릴 때가 오지 않겠는가."

  이세야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더펠스의 차후 협력 여부를 인질 삼아 요구해오는 왕비의 제안에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며 - 그리고 아마디스는 어떨지 역시 궁금해하며 - 대답했다.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왕비 마리웬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수줍은 양 속눈썹을 팔랑이곤 돌아섰다. "안더펠스인들은 그대들의 수고에 매우 감사할 걸세."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이세야는 대답했다. 대화를 살짝 엿들은 상급 감시자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교환한 뒤, 그는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자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당장 마주할 과제는 위험스럽고 유쾌하지 않을 테지만, 왕비의 옹졸한 욕망을 마주하는 것에 비하면 천 배는 나았다. 엘프는 긴 한숨을 내쉰 뒤 개러헬의 개인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젊은 회색 감시자 하나가 동생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긴 했으나 긴장된 얼굴이었다. 젊은 청년은 이세야가 복도를 지나 시야에 잡히자 의식적으로 자세를 곧추세웠다. "충성."

  "그렇게 각잡고 서있을 필요 없네." 그는 엉성한 경례에 답하며 손짓했다. 이 젊은 감시자의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지만, 입단의식을 거친 지 한 달도 안된 신입이라는 건 떠올랐다. 다른 많은 안더펠스인들처럼, 그 역시 자원 입단자였다. "동생 방에 좀 챙길 게 있어서 온 거야."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이세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한 것 뿐이네."

  "아." 청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의 기대감과 끔찍한 기억의 불쾌감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새로 징집되는 겁니까?"

  "아마." 그는 청년을 지나쳐 개러헬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담긴 서랍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러헬의 방은 지극히 검소한 모양새였다. 책상 위에 놓인 몇 장의 전투지도와 편지뭉치, 씻는 용도의 물그릇, 정돈 안 된 침대 정도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 수 년 간 온 성을 채우고도 남을 작전 전리품을 모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동생의 방을 장식한 기념품이라곤 굽은꼬리의 빠진 날개깃을 모으는 작은 단지 하나 뿐이었고 그나마도 보통은 화살 끝에 다는데 사용되곤 했다. 침대 옆에는 아마디스의 수면용 로브와 양모 슬리퍼 한 쌍이 놓여있었고, 그의 향수에서 남은 잔향이 갑옷 윤활제와 가죽냄새 사이에 섞여 은은하게 맴돌았다.

  잠긴 서랍은 책상 왼쪽 아래편 서랍이었다. 이세야는 열쇠를 넣고 돌려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탁한 회색 금속으로 테를 두른 검은 나무상자가 놓여있었다. 어떤 인장이나 경고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극단적으로 단순한 모양새 자체가 이미 어떤 느낌을 풍겼다. 이세야는 그 안에 살아있는 전갈이라도 담겨있는 것마냥 신중한 손길로 상자를 꺼냈다.

  물론 그 안의 실제 내용물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뚜껑을 열었다.

  빛바랜 은잔과 리륨 가루가 담긴 주머니, 그리고 탁한 회색빛의 작은 유리병 세 개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반쯤 헤어져 안을 채운 뻣뻣한 말총꾸러미가 살짝 삐져나온 낡은 벨벳 쿠션이 상자의 내용물을 받치고 있었다. 두 개의 병에는 칙칙한 검은빛 액체가 가득 차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거의 비어 보였다. 병의 바닥에 고작해야 몇 방울 정도 남아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세야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다. 입단 의식엔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

  그는 상자를 닫아 망토 안에 챙긴 뒤, 개러헬의 서랍을 다시 잠갔다. 문 밖을 지키던 젊은 감시자 청년은 방을 나서는 그에게 다시 경례했다. "충성."

  "수고하게." 그는 청년을 따라 절도있게 인사했다. 딱히 규정으로 정해진 방식 같은 건 아니었다.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회색 감시자는 의전을 신경쓰는 집단은 아니었고, 전장에선 특히나 더 그랬다. 하지만 저 청년이 그런 규율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한다면, 이세야는 얼마든지 따라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달랠 방법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창조주가 당장 그 방법을 내줄 것 같진 않았고, 개러헬의 방 문지기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인 그는 왕궁을 벗어나 때까치가 머물고 있는 요양용 우리로 향했다.

  그 그리폰은 자신의 우리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아프고 상처입은 그리폰이라 해도 그들은 좀처럼 우리 안에 머무는 일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약간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들은 언제나 넓은 상공을 누비며 시간을 보냈고, 낮동안에는 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은 채 날개를 펼치곤 대재앙에 가려진 햇살 아래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리곤 했다.

  하지만 때까치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이세야가 들어서는데도 고개조차 들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개 안쪽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 자신의 배설물 위로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바람에 털도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이렇게나 자신의 긍지를 내팽겨친 그리폰을 보는 건 이세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고귀한 짐승이었고, 창공의 주인이었으며,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경외감에 걸맞는 기품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그는 우리 바로 바깥의 짚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가져온 도구를 내려놓았다. 개러헬의 박스 외에도 작은 단검과 전날 사냥한 헐록의 피가 담긴 병 하나를 따로 챙겨왔다. 헐록의 피는 검붉은빛이었지만, 개러헬의 상자에 담긴 오래된 병 안의 내용물만큼 진하고 진득한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병 안에는 200년 전 사냥꾼의 몰락에서 쓰러진 세 번째 대재앙의 악마의 군주, 토스의 피가 담겨있었다.

  때까치는 이세야가 도구들을 앞에 늘어놓을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은제 술잔에 살짝 깔리게 푸른 리륨 가루를 부어넣고 그 위에 가루가 전부 녹을 때까지 헐록의 피를 채웠다. 섞인 내용물 위로 고대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 더해졌다. 차가운 검은 연기가 술잔에서 피어올랐고, 어둠의 피조물의 독특한 부식의 냄새가 끈끈하게 묻어났다.

  그 증기가 숨결에 와닿자 이세야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그 옛날 입단 의식의 악몽이 그를 휘감아와 그는 무릎 꿇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의식에서 동료 몇 명이 죽었던가, 목이 졸려서, 두려움으로, 들이마신 피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몸 안으로 침투하여 뼛속 깊이 파고드는 그 느낌...존재의 근본을 뒤틀어놓은 그 의식에서 그는 도무지 완전히 벗어났다고 느낄 수 없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입단 의식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 다르게 바꿔놓았고, 그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때까치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을 영계와 연결시킨 이세야는 실낱 같이 미약한 마법을 끌어내 술잔으로 흘려보냈다. 어두운 색의 액체는 잔 안에서 빠르게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소용돌이 치는 표현 위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들의 환영이 떠올랐다가 흐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마법을 활성화해둔 채 술잔을 옆으로 내려놨고, 단검을 손에 쥐고 때까치에게 다가갔다.

  그리폰은 그가 다가가 건드릴 때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회색빛 콧잔등은 움푹 파여있었고, 부드러운 가죽털 위로 깃털은 바짝 말라 빛깔을 잃은 채였다. 턱주가리를 따라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검붉은 얼룩은 부리 안쪽면까지 이어졌다. 두 눈 위로 검은 눈곱이 시야를 가릴만큼 엉겨 얇은 기름막을 두르고 있었다.

  때까치가 어둠의 피조물의 혈액을 삼킨 지는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염은 빠르게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세야가 앞발을 집어드는데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귀는 무기력하게 축 쳐져 있었고, 눈곱 낀 두 눈은 멍하니 엘프의 뒤편 벽을 향해 있었다.

  "다 널 구하려고 하는 일이야." 이세야는 넋이 나가 있는 그리폰에게 속삭였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딱히. 그 짐승들은 기묘하리만치 영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짐승이었고, 인간의 언어는 그들이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그 말을 했다. "네가 다나로를 구하느라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그리폰은 더러운 짚더미 위로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단검이 발가락 끝을 찔러 핏방울이 맺히는데도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때까치의 털가죽 위로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고, 이세야는 피로부터 마법을 끌어내 미완성이던 그의 주문을 마무리했다. 그는 칼린이 가르쳐준대로 피로 이어진 때까치의 마음과 자신의 의식을 연결했고, 그리폰의 날뛰는 사고를 자신에게 맞춰 조정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여, 그의 바람대로, 때까치는 부리를 열었다. 유리 같은 두 눈은 텅 비어있었지만, 그의 사고는 급격한 혼란 속에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하는 외침이 때까치의 머릿 속을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절박하고 무력하게 그의 침입에 저항하려 노력했다. 싫어!

  받아들여, 이세야는 다시 반복했고,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리폰의 정신을 강제로 장악했다.

  그는 술잔을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때까치의 부리 사이로 기울였고, 꼼짝 못하게 붙들린 그리폰에게 주문이 걸린 리륨과 혈액의 혼합물을 몇 모금에 걸쳐 전부 삼키도록 했다. 때까치의 혼란이 점차 커져갔고, 이세야는 그의 정신이 속박을 풀어낼까 두려워졌다. 그는 더 강하게 정신을 붙들었고, 그의 감정과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어 이윽고 그리폰의 정체성의 근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찾아낸 기억과 감정의 실타래를 잘라내고 다시 짜내어 겹겹이 새로 덧씌웠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때까치의 증오를 약화시키고, 타락을 삼킨 이후 생길 변화에 대한 혐오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원래의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용과 망각을 짜넣었고, 닥쳐올 변화에 대한 자각을 무디게 해 그리폰이 그 사실을 끔찍히 여기지 않도록 했다. 그는 기묘한 병증 위로 가면을 덧씌워 그리폰에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감기, 가벼운 기침에 불과하고 잠시 아픈 탓에 일시적으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거라고 믿게 했다.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었고, 칼린이 가르쳐준 것에 비해 훨씬 섬세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먹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잘 먹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그는 자신의 정신을 끌어내 때까치의 의식이 변환된 길로 접어들도록 놓아주었다.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 안의 짚더미 위에 무릎꿇고 있었고, 빈 술잔은 손 옆에 놓여있었다.

  때까치의 호흡은 규칙적이었고, 창백한 회색빛이던 콧잔등에 혈색이 돌아왔다 두 눈은 거의 감겨 있었으나 틈새로 보이는 밝은 호박색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검은 구름 역시 씻겨져 내려간 듯 했다.

  그는 다시 그 자신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 자신인지는,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묶고있던 혈마법을 풀자마자 그리폰은 곧장 얕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의 움직임이나 몸에 딱 붙여 접은 두 날개의 모양은 아무렇게나 무기력하게 널부러져 있던 때까치의 모습에 비하면 일반적인 그리폰의 수면 자세에 가까웠다. 콜록, 하고 감기에 걸린 것마냥 기침을 한 번 했지만, 이내 편안하게 긴장을 풀었다. 그는 그게 입단 의식이 성공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

  조용히, 이세야는 쓰러진 술잔을 집어 망토 끝으로 안쪽 면을 닦아낸 뒤 개러헬의 상자 안에 리륨 주머니와 함께 다시 돌려놨다. 이어 헐록의 피가 담겨있던 병도 집어들어 주머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단검에 남은 붉은 혈흔을 닦아낸 그는, 조심스럽게 요양용 우리를 벗어났다.

  그는 다나로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그는 이세야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 아까 그대로의 페이지에 머물러 있을 게 분명한 고대 역사책이 협탁 위에 놓여있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희망을 품은 눈으로 방에 들어서는 이세야를 올려다 봤다. "잘 됐어? 그를 구할 수 있었어?"

  "잘 모르겠어." 이세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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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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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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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19 숭고의 시대

 

  지하대로 입구는 대지 위에 난 도끼 자국 같은 불규칙한 형태의 틈새였다. 오래 전 있던 지진에 의해 형성된 균열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가 대재앙에 의해 고요가 깨지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통로로 탈바꿈한 듯 보였다.

  허나 한낮에 찾은 그곳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안더펠스는 그 자체로도 황량한 땅이었지만, 대재앙의 손길 하엔 가장 튼튼한 토착종들조차 견뎌내기 힘들었다. 말라빠진 초목 아래 갈색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흩날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엔 참새 한 마리조차 앉아있지 않았다. 오전부터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미약하게 새어든 햇빛은 다행히 어둠의 피조물들을 땅속에 붙들어두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작은 대열의 선두에서 날던 이세야가 레바스에게 하강 신호를 보냈고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은 그리폰은 깔끔하게 작은 원을 그리며 내려가 대지의 균열 근처 언덕 위로 착륙했다. 잠시 뒤 그 주위로 일행들 역시 내려앉았다.

  그리폰에서 뛰어내린 이세야가 균열 근처로 다가갔다. 균열 주위의 대지는 메말라 바스라질 듯 보였다. 발 밑에서 부서진 자갈들이 땅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골짜기 아래에선 어둠의 피조물들의 차갑고 이질적인 악취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균열의 안쪽 부분은 오랫 동안 닦지 않은 찻잔처럼 기묘하게 얼룩져 있었다. 변색된 흔적 탓에 균열의 깊이나 그 안의 굴곡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세야는 지팡이 끝에 작은 빛의 구체를 생성해 틈새를 비춰가며 좀 더 윤곽을 살피길 원했지만...그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게 얼룩진 바위 때문에 눈이 아려왔다.

  어쨌든 붕괴시키기 어려워 보이진 않았고, 중요한 건 그 부분이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 칼린과 다나로,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리스메까지 - 함께 하도록 손짓했다.

  마법사들이 균열 주위로 모여드는 사이 조락과 펠리세는 활을 점검했고 드워프 형제 퉁크와 뭉크는 에일 병을 나눠 마시며 요란스럽게 입을 헹구곤 버려진 토끼굴 위에 뱉어냈다. 이세야는 그 드워프들이 이 붕괴작전에 좀 더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에일로 입을 헹구는데 더 집중한 듯 보였다. 요란한 목울림과 펠리세의 부루퉁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 궁수의 우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듯 했고, 아마 그 드워프들은 호스버그 상공 어딘가에 아침을 쏟아놓고 온 듯 했다. 이세야는 도시가 비어있었길 바랄 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싶어?" 무너진 언덕 바닥에 모두 모여서자 리스메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세 마법사 중 가장 키가 큰 리스메는 의도적으로 꾸며낸 불안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발과 물감, 분장도구를 이용해 잔뜩 과장된 비인간적인 외형을 꾸며내곤 했다. 때때로 그는 남성 모습이었다. 혹은 여성 모습일 때도 있었다. 이세야는 이미 수 년간 그 옆에서 싸워왔지만 여전히 그가 어느 쪽인지, 혹은 양쪽인 건지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 마법사는 옷을 갈아입듯이 간단하게 성별을 바꿔댔고, 어쩐지 공연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대 공연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이세야가 들은 바에 따르면 리스메는 마탑에서 생활하는 동안 적지 않은 핍박을 받았었고, 회색 감시자가 된 후 보이기 시작한 이 별난 변장 습관은 당시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려던 습관에 색이 입혀진 것이라고 했다. 존재의 부정에서 살아남은 뒤, 그는 온힘을 다해 존재를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오늘 리스메는 여성의 모습이었고, 머리에 두른 낡은 바다 그물은 소금과 햇빛에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창백한 느낌의 청록색 눈은 그물 끝자락에 매달린 유리구슬과 같은 빛깔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유백색의 생선 비늘이 뺨과 눈썹 위를 장식하고 있었고, 분장 아래 창백한 피부 덕에 그는 초현실적인 꿈속의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두 눈에 담긴 강렬함만은 꿈 같은 느낌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리스메는 어둠의 피조물을 증오했다. 그의 불타는 증오는 이세야가 7년 넘게 대재앙과 싸워오며 만난 어떤 사람들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그의 증오는 레바스의 그것과 비슷했다. 분별없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맹금류의 난폭한 영혼 같은 증오.

  "지진을 일으키는 게 가장 쉬울 것 같은데, 안 그래?" 이세야가 말했다. "언덕 꼭대기를 무너뜨려 덮어버리는 거야."

  "아니면 빠트리는 걸수도 있지, 이 구멍이 보기보다 깊다면 말이야." 리스메는 몸을 기울여 구멍 안쪽을 살펴봤다. 뺨 위의 유백색 비늘 구슬이 영계 너머의 눈물방울처럼 반짝였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주춤했다. "아냐. 고민할 시간 없어. 당장 무너뜨리자. 놈들이 왔어."

  "갑자기 무슨-." 이세야가 입을 열었지만, 곧이어 헐록의 발자국소리와 가래 끓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오는 소리였고, 속도가 제법 빨랐다. 지하동굴 안에서 반사되는 소리로는 유추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서른에서 백여 마리 가량의 헐록과 젠록 무리인 것 같았고, 귀를 찢는 쉬릭의 새된 소리로 미루어 그 지독한 암살자 놈들 역시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너뜨려." 그가 지시했다.

  비늘장식을 두른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인 뒤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들 중 대지 원소마법을 이용해 통제된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그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그 자신만의 파괴전략이 있었다. 이세야는 지팡이에 마력을 집중시켜 영계의 거친 에너지를 염력 파동으로 바꾼 뒤 리스메의 지진이 일으킬 타격을 증폭시켰다. 그의 주위로 다른 이들 역시 보조마법을 빚어내자 영혼이 바짝 긴장하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리스메의 두 눈이 번개가 내려치는 밤하늘처럼 하얗게 빛났다. 언덕이 발밑에서 진동했고, 골짜기 위로 눈에 보일만큼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세야는 시야 언저리로 햇빛에 반짝이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눈알을 언뜻 본 것 같았고, 그는 동료 마법사가 만들어낸 지진의 반향을 때리도록 작게 마력을 뭉쳐 조준했다. 대지 위로 더 넓고 빠르게 균열이 벌어져갔고, 발밑으로 바닥이 요동치며 꺼져내렸다. 자갈과 모래 섞인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이세야는 터져나오는 재채기를 억누르며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비벼 닦았다. 흐릿한 시야로 골짜기 안쪽으로부터 화산이 분출하듯 붉은 빛이 터져나오는 게 보였다. 어딘지 모를 저 아래에서 올라온 빛이었고, 그들 중 누구의 주문도 아니었다.

  "놈들 중에 에미서리가-." 그는 흙먼지 사이로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덩이와 바윗덩이가 언덕 비탈에서 터져나왔다. 달궈진 돌덩이가 감시자 무리를 덮치며 욕설과 비명이 들려왔다.

  시야를 뒤덮는 돌더미와 연기가 허공을 메우기 전부터 땅바닥은 이미 발 아래로 조금씩 꺼지고 있었다. 리스메의 추측이 맞았다. 지하대로로 이어지는 이 골짜기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고, 언덕은 그 위를 뒤덮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야는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꼬리뼈를 따라 통증이 타고 올라왔고, 그는 아마 뼈가 부러졌을 거라 생각했다. 대지는 고삐풀린 종마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무너진 땅 속에서, 손들이 튀어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괴물 같은 손들은 손톱이 깨지는 것도 아랑곳않고 탐욕스럽게 흙더미를 파헤쳤다. 어떤 손은 손가락이 세 개 뿐이었고, 여섯 개나 일곱 개인 것도 있었다. 비에 불어터진 지렁이마냥 부드럽고 창백한 형태도, 울퉁불퉁하게 굳은살로 굴곡진 형태도 있었다. 긁힌 피부에 난 생채기 위로 배어나온 검은 피가 먼지로 하얗게 뒤덮였다. 놈들의 공통점이라곤 오로지 그 피 뿐이었다.

  그 피와, 차갑고 진득거리는 갈망 뿐.

  이세야의 피부를 할퀴며 그를 땅 속으로 끌어당기는 손들 사이로, 놈들의 얼굴이 악몽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마냥 무너진 흙더미를 뚫고 튀어나왔다. 헐록과 젠록, 그리고 혈관만 도드라진 두개골 양쪽으로 뾰족한 귀가 납작하게 붙은 앙상한 얼굴의 쉬릭들이 이빨 사이엔 흙더미를, 두 눈에는 증오를 품은 채 솟아올랐다. 놈들은 닥치는대로 물어뜯고 찢어댔고 이세야는 끝없이 요동치는 비협조적인 바닥을 박차고 벗어나기 위해 절박하게 발버둥쳤으나, 다른 회색 감시자들이라고 상황이 더 나아보이진 않았다.

  상당히 심각해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궁수 조락은 덤벼드는 적들의 손길 속에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왼편에 흩어진 흙더미와 돌무더기가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왔을 피가 호선을 그리며 흩뿌려져 있었다.

  죽은 궁수로부터 이십 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펠리세가 허벅지와 발목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발로 차내고 있었다. 그의 화살더미는 손에 닿지 않는 위치에 쓸모없이 흩어져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땅속에 파묻혀있어 팔만 튀어나와 있는 헐록 한 마리가 커다란 돌덩이로 그의 머리 주변을 미친듯이 내려찍어대고 있었다. 땅 속에 반쯤 묻힌 젠록의 머리통에 난 자국으로 봐선 아마 감시자인 줄 알고 착각하고 공격했던 것 같으나, 그 어둠의 피조물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맹렬한 기세로 피묻은 돌덩이를 땅 위에 내리찍어대고 있었고, 머지 않아 펠리세를 덮칠 것처럼 점차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리스메가 있는 방향에선 끝없이 화염폭풍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양성의 마법사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정확히 조준해서 화염마법을 퍼부어댔고, 마치 그 자신 역시 함께 불태울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가발을 장식하던 그물에는 녹색 불꽃이 맺혀있었고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탁한 빛의 유리구슬들은 전부 타버린 뒤였다. 불에 탄 피부는 빨갛거나 검게 그을려 있었고, 뺨과 눈썹을 장식하던 비늘이 하얗게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는 게 놀라워 보일만한 상태였고, 그 상태가 오래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세야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잡히지 않았고, 굳이 알고싶은 것도 아니었다. 리스메에게 영감을 얻은 그는 영계와 접촉해 에너지를 순수한 힘의 형태로 끌어내어 흙속으로 그를 끌고가려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조준했다.

  그 충격파는 먼지와 피, 부서진 돌무더기로 이뤄진 구름을 일으켰다. 이세야는 폭발을 미리 예상하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돌조각에 이마가 찢어지자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운 피가 피부를 타고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주문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멀리 밀어내버렸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소매로 눈가를 대충 닦아낸 이세야는 벌떡 일어나 흙더미를 미끄러져가며 발목을 붙들어오는 반쯤 파묻힌 어둠의 피조물들의 손들을 떨쳐내고 언덕 사면을 따라 달렸다. 흘러내린 피가 무자비하게 두 눈을 찔러왔지만 그는 연분홍빛 눈물을 대충 훔쳐내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리폰의 날개짓 소리에 그는 위를 올려다 봤다.

  그리폰들이 자신의 기수를 구하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나로의 검은 줄무늬를 가진 회색 그리폰 때까치가 사면을 타고 빠르게 강하했다. 이세야는 붕괴 후로 다나로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 마법사는 이미 전투 초반부에 쓰러져 땅속의 어둠의 피조물들의 덮쳐대는 손길에 뒤덮힌 지 오래였으나, 때까치는 공중에서 그를 포착해낸 듯 했다.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착륙해 쓰러진 자신의 기수를 둘러싼 어둠의 피조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댔고, 헐록과 젠록들이 땅속을 뚫고 나오는 족족 발톱과 부리를 써서 놈들을 찢어놨다.

  황갈색 몸체를 가진 펠리세의 방랑자가 그 위로 나타났고, 태양 아래 두 날개가 구릿빛과 은빛으로 번쩍였다. 급강하 하여 궁수 근처에 착륙한 그는 발길질로 먼지폭풍을 일으켰다. 방랑자는 혐오에 찬 앞발질로 돌덩이를 든 헐록의 팔뚝을 뜯어버렸고, 다른 발로는 펠리세의 허리를 붙든 뒤 거칠게 날개짓하여 떠오르려 했지만 -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지반은 그리폰이 박차고 날아오를만한 여건을 제공하지 않았다.

  바닥은 계속해서 요동치며 아래로 꺼져갔다. 이세야는 순식간에 땅밑이 한 뼘 가량 내려앉는 바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마냥 순식간에 발 아래로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돌멩이와 자갈들이 사이사이 이리저리 튀어댔다. 엘프에게 도달하지 못한 레바스가 무너지는 언덕 위를 빙빙 돌며 좌절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방랑자가 싸우고 있던 언덕은 부서진 멜론처럼 무너져버렸다. 한 가운데 난 구멍으로 비탈을 이룬 지반이 빠르게 빨려들어갔고, 그리폰 역시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갈 따름이었다. 방랑자는 미끄러지는 흙더미를 붙잡고 미친듯이 날개짓을 해댔으나 도무지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고, 무너진 대지에서 솟아나온 어둠의 피조물들이 지렁이 같은 징그러운 손을 뻗어 맞서싸우는 그를 찢어댔다. 놈들의 손톱이 그리폰의 밝은빛 털가죽을 파고들며 선명한 붉은피로 물들였다.

  때까치 쪽은 상황이 약간 나았다. 그는 축 늘어진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반쯤은 달리며, 반쯤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며 날아오를 순간을 재고 있었다. 그 자신은 상처가 별로 없어 보였으나 부리 주위로 어둠의 피조물의 피가 검은 수염처럼 얼룩져 있었다. 그 맹금은 언덕 너머로 이세야와 잠시 눈을 마주쳤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수 년의 시간을 함께 해오면서 그리폰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와 수용의 눈빛을 발견했다.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은 때까치를 죽일 것이다. 회색 감시자들이 그리폰을 훈련시킬 때 전투 중 절대 물어뜯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심지어는 전투에 나서기 전 쇠로 된 주둥이마개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한 피는 입으로 섭취할 경우 대상을 뒤틀어놓고 광기로 몰아넣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알려진 치료법도 없었고, 그 치명적인 결말을 피해갈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까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폰의 눈빛에 깃든 체념이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체념은 했으나, 그 안에 후회라곤 없었다. 때까치는 바람을 타고 날개짓해 하늘로 솟아올랐고,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호스버그를 향해 사라졌다.

  이세야는 자신의 염력마법으로 방랑자를 풀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잠시 망설였지만...이런 혼란과 난장판 속에서는 제대로 조준할 자신이 없었다. 그 그리폰은 너무 빠르게, 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펠리세는 시야에 잡히지조차 않았다. 방랑자의 어깨부분의 움직임을 봐선 아마 그 그리폰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것 같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혹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 위에선 레바스의 귀를 멎게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 젠록의 붙들어오는 손을 발로 차버린 뒤 그는 재앙에서 벗어났다. 레바스는 그의 위치를 확보하자마자 강하하여 그를 안장으로 이끌었다. 그 자신의 끓어넘치는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리폰은 결코 놈들과 맞붙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삭히며 쉿쉿거린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내려자보자 이세야의 눈에 상황이 더 뚜렷하게 들어왔다. 절망적이었던 지상에서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언덕의 붕괴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땅을 빨아들이던 구멍이 점차 메워져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흙더미를 파헤쳐 올라오는데 성공한 어둠의 피조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대지의 가차없는 압박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비록 안더펠스의 풍광을 요란스럽게 바꿔놓긴 했지만, 감시자들은 승리를 얻어냈다. 지하대로로 향하는 통로는 봉인됐다.

  분명 승리처럼 느껴져야만 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지도. 하지만 피에 젖은 방랑자의 유해를 내려다보며, 이제는 영광의 흔적만 남은 조각난 털가죽과 깃털을 내려다보며, 가슴 속을 묵직하게 채운 공허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후회는 지금 감당할만한 사치가 아니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칼린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뒤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탈출 중인 리스메를 방해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용케 그 자살행위에 가깝던 불꽃연쇄폭발에서 살아남은 데서 그치지 않고 비틀거릴지언정 전장을 벗어날만한 기운을 끌어낸 듯 했다. 왼발은 쓸모없이 질질 끌려 걸음마다 패인 자국을 남겼고, 그을린 로브자락 역시 걸을 때마다 재가 되어 길 위로 흩어졌다. 그는 살아있는 존재보다는 악마에 사로잡힌 시체에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었고, 그의 그리폰이 그를 발견하곤 기쁨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흉터 투성이의 하얀 부리를 가진 사냥꾼이라는 야수였고, 개러헬의 굽은꼬리 다음으로 가장 빠른 그리폰 중 하나였다. 나이 탓에 속도가 좀 느려졌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을 향해 날개를 접고 하강하는 그의 움직임에선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힘겹게 비틀거리던 리스메는 사냥꾼이 미처 그에게 닿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화염구를 날려 마지막 어둠의 피조물을 처리한 칼린이 황급히 달려갔고, 지팡이 끝 수정구에서 치유마법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창백한 푸른빛 에너지가 양성의 마법사에게 닿아 퍼져나갔고, 피가 흐르던 화상부위가 약간이나마 아물며 거친 숨결도 조금 잠잠해졌다. 그가 둥글게 몸을 만 채 기운을 회복하는 사이 그의 그리폰이 가까이 내려섰다. 칼린을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접근한 사냥꾼은 한쪽 날개를 펼쳐 상처입은 그의 기수와 마법사 간에 거리를 띄웠다. 이세야는 걱정스런 얼굴로 레바스에게 낮게 날도록 신호했다.

  "드워프들이," 리스메는 부상을 입은 왼쪽 다리를 들어 어색한 동작으로 사냥꾼의 안장에 올라서며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들이 아직 저기 있어."

  "내가 남아있을게." 이세야가 말했다. 그는 퉁크와 뭉크가 서 있는 방향을 내려다봤다. 그 드워프들은 닥쳐올 어떤 위협에든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어 보였지만 이제는 위협이 될 어둠의 피조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응당 지켰어야 하는 수호자들은 도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였다. "날 수 있겠어?"

  "응." 리스메가 대답했다. 그는 사냥꾼의 고삐를 느슨하게 속목에 감은 뒤 안장의 앞가림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은 그는 고통으로 떨리는 한숨을 크게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까맣게 타버린 가발의 그물장식에 마지막까지 달려있던 구슬들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날 수 있어. 더 이상 싸울 일만 없다면."

  "좋아. 호스버그로 돌아가. 개러헬에게 드워프들을 태워갈 한 쌍의 기수와, 입구가 완전히 막혔다는 걸 확인할 정찰팀을 보내라고 전해. 어쨌든...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놈들의 증원군을 끊어놨어. 이제 포위공격을 무너뜨릴 때야."

  리스메는 부서질 것만 같은 지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전할게." 대답과 함께, 그는 사냥꾼에게 날아오르도록 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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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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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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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어둠의 피조물들이 이용하는 지하대로의 출입구를 발견했어." 이세야는 레바스를 호스버그 성 마당에 착륙시키며 말했다. "간밤에 있던 전투에서 낙오된 놈 하나를 뒤따라 갔었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우리 마법사들만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려 봉쇄시킬 수 있을만큼 작은 크기였어."

  "우리가 어둠의 피조물들의 증원군을 차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개러헬이 물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목욕으로 젖은 금발 머리가 짙은 빛을 띠었고 옷차림 역시 전투용 갑옷 대신 잠자리에 적합할 것 같은 부드러운 로브 차림이었다. 이세야는 아마디스 역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인간 여성은 그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개러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그가 뭐라 간섭할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딱히 법을 어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절이니 뭔지 하는 얘기는 대재앙 앞에선 말할 가치도 없었으니.

  "바로 그거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는 레바스의 가슴줄을 풀어준 뒤 눌린 자국이 남은 그리폰의 부드러운 검은 털을 다시 정돈했다. 뒤따라 내린 칼린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내주었다.

  "언제 작전에 들어갈 생각이지?" 아마디스가 물었다.

  "빠를수록 좋아. 내일, 아니면 모레라도." 이세야는 두 개의 안장을 연달아 끌어내린 뒤 성의 하인들이 가져가 관리하고 닦아놓을 수 있도록 한구석에 쌓았다. "그 입구는 그다지 견고해보이지 않았어. 어둠의 피조물들은 그런 걸 신경쓰지 않으니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기껏해야 길잃고 헤매는 무리 몇 놈 정도일 거야."

  "그러길 바라는 거겠지."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의 손은 방금 전까지도 이세야 눈에 보이지 않던 허리춤의 단검자루 위에 얹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떼자 단검은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이세야는 질문하면서도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7년 간 못 알아냈으면 앞으로도 모르고 살겠지. 그는 하릴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맞아. 내 바람은 그래. 혹시라도 숫자가 너무 많다 싶으면 그냥 작전을 포기하고 돌아와서 다른 날 다시 시도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다고 놈들이 거길 강화하거나 수비를 세울 건 아니잖아. 특별히 눈에 띄는 표시 같은 것도 없었어. 오늘 밤까진 그곳의 존재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까."

  "좋은 시도였어." 개러헬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두른 아마디스의 팔을 푼 뒤 함께 불빛어린 마당을 가로질러 그들의 숙소로 향했다. "그럼 내일 한 번 날아가 보기로 하자. 만약 방어가 그리 두텁지 않다면 무너뜨리는 것도 시도해보고. 아니면 그냥 돌아오면 되고. 작전에 필요한 마법사가 몇 명 정도 될 것 같아?"

  이세야는 어깨를 으쓱하곤 칼린에게 묻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셋? 아니면 넷 정도? 큰 구멍은 아니었고, 그리 안정된 구조처럼 보이지도 않았어. 그냥 대지 위로 난 틈새처럼 보이는 정도고 - 고대 드워프 통로도 아닌 것 같아. 솔직히, 시간만 충분하면 마법사 한 명으로도 충분할 거야. 문제는 시간이 충분하진 않을 거라는 거지. 근처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우리를 발견하고 득달같이 몰려들 테니까. 그러니...최대한 빠르고 간단하게 끝내기 위해, 세 명은 넘었으면 좋겠어."

  "나도 동의하네." 칼린도 동의했다. 후드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린 뒤라 그 목소리는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아마디스와 개러헬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내일이야." 엘프가 말했다. "마법사 셋. 두 사람에다가 에라카스가 끼면 될 것 같은데, 그가 펠리세랑 떨어지기만 해준다면."

  "내일 아침에 여기서 봐." 이세야가 말했다. 그의 남동생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마디스와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늦은 시각이었고, 마당에는 그들 뿐이었다. 성의 하인들조차 이세야의 안장을 닦기 위해 가져간 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간 뒤였다. 횃불이 밝혀진 성벽을 따라 순찰을 돌며 어둠의 피조물의 습격을 경계하는 감시병들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칼린은 젠록을 사로잡는 주문을 사용한 뒤 어딘지 가라앉은 느낌이었고, 이세야는 그가 돌아오자마자 숙소로 돌아갈 거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그는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난 뒤까지 남아있었다. 그는 아직 레바스에게 먹이를 주고 날개깃을 빗질해줘야 했지만, 그 혈마법사가 머물러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자러 안 가?" 그는 물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고작 몇 발짝 거리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너는 왜 혈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지?"

  "유용할 것 같으니까." 엘프는 기름먹인 천으로 그리폰의 비행깃털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대재앙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할 거야. 당신은 왜 배웠지?"

  "나는 이단마법사였으니까." 칼린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두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그가 저 먼 어딘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라기보다는 과거의 망령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단마법사였고,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살아남았으니, 내가 보기엔 효과적인 것 같네. 누구한테 배웠어? 까마귀단에서였나?"

  "아니." 칼린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가 체중을 싣고 기댄 지팡이를 천천히 돌릴 때마다 머리 부분의 수정이 성벽의 횃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악마로부터였어."

  5년 전이었다면, 그의 발언은 이세야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했을 터였다. 지금의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재앙의 공포는 스승으로 배웠던 해묵은 경고마저 대수롭지 않아 보이게 희석시켜 놓았다. 브루드마더로 끌려가는 여성의 비명을 처음으로 들었던 기억, 그는 그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악마와 천 번이라도 흥정할 수 있을 테니까...비록 수년 간 그런 충동을 조절하도록 훈련해왔다지만 지금도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찾았는데?"

  "계약을 이행하던 중의 일이었어. 이단 혈마법사 하나가 안티바로 도망쳐 왔지. 템플러들은 감히 그 놈을 덮칠 수 없었고, 까마귀단을 고용해서 자기네 일을 대신하려 했어. 우리는 트레비소에서 꽃장사로 위장하고 있던 그 놈을 찾아냈어. 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지만...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지." 칼린은 잠시 침묵했다. 이어서 그는 한숨과 함께 마당의 우물 옆에 놓인 낮은 돌담에 걸터 앉으며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지쳐서 굳어진 얼굴 위로 피로가 묻어나는 입가의 주름이 불빛 아래 더 선명해 보였다. "그 놈을 잡았을 때, 우린 왜 그 템플러가 굳이 잽싸게 우리한테 일을 넘겼는지 알 수 있었지. 그는 안티바 까마귀단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어. 그 자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길 두려워했던 거야."

  "타락의 괴물이었나?" 이세야가 물었다. 그는 악마에게 굴복해 사로잡힌 마법사들이 어떻게 되는지 본 적 있었다. 그들은 악몽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 육체는 괴기하게 녹아내려 기분나쁜 꿈 속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형체가 된다. 정신 또한 흩어져 사로잡은 악마에게 지배되거나 -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었지만 -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대재앙 중에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마법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밖의 힘을 추구하다가 어리석은 방식으로 영계와 접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는 마법사란 위험한 존재였다. 훈련되지 않은 능력으로 자신이나 가족들을 어둠의 피조물로부터 보호하려는 맹목적인 열망이야말로 대재앙 속에서는 타락의 괴물의 근원지나 다름없었다.

  노련한 마법사들 역시, 끝없는 전투로 인한 긴장과 수면부족 탓에 이런 위험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택하기도 했다. 더 이상 지원군이나 구조대를 기대할 수 없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순간, 악마를 육체에 받아들여 놈들에게 마지막 광포한 일격을 가하고 사그라진 감시자 마법사들의 이야기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강력한 타락의 괴물이라면 죽기 전까지 수십 마리의 어둠의 피조물을 쓰러트릴 수 있었으니.

  이세야 역시 이미 오래 전 언젠가 자신이 브루드마더로 끌려갈 상황이 닥친다면 차라리 타락의 괴물이 되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공포 속에서 죽는 편이 그 채로 사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랬지." 칼린이 말했다. "그리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어. 겉모습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으니, 일단 우리가 봤을 땐 말이야. 아마 악마에게 사로잡히기 전의 그 자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다른 느낌을 받았겠지만. 물론 우리로선 알 길이 없었지. 처음으로 이상신호를 느낀 건 그 놈이 독을 바른 단검을 모기라도 쳐내듯 털어냈을 때였어. 그리고 그 놈이 공격해왔고...순식간에 매복팀 중에서 살아서 서 있는 건 그 놈과 나 뿐이었지."

  이세야는 레바스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기름먹인 천으로 나머지 비행깃을 닦기 시작했다. 또한 날개에 상처는 없는지 역시 확인했다. 그리폰은 용맹함과 고집스러움 탓에 때때로 기수에게 통증이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곤 했지만, 일차깃털이 부러지는 것 같은 사소한 손상도 전장에선 재앙으로 번질 수 있었다. "어쩌다 그 악마가 당신한테 마법을 전수한 거지? 당신을 그냥 죽이지 않고?"

  칼린의 입술이 비뚜름한 미소를 띠며 올라갔다. "까마귀단의 명성이 어쨌든 헛것은 아니거든. 그 놈이 우리를 거의 몰살시킨 건 사실이지만 우리 역시 그 대가를 피로 치렀어. 전투가 끝나갈 무렵 그 놈은 거의 죽음을 앞둔 상태였고, 반면 나는 그럭저럭 멀쩡했거든. 금방이라도 놈을 죽여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 놈을 붙들고 있던 악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악마가 거래를 제안해온 거로군?"

  "그래. 죽어가는 껍데기를 치료해주는 대신 혈마법을 전수해주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당신은 받아들였고?" 그는 레바스의 날개를 놓아주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리폰의 꼬리 깃털을 마저 확인했다. 이세야는 어느새 회색빛이 된 손질용 헝겊을 뒤집어 깨끗한 면이 드러나게 했다.

  "그랬지." 칼린은 스스로의 고백이 지긋지긋한 것 같기도 했고, 어딘지 후련해 보이지도 했다. "나는 지식을 주겠다는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자를 치료했어. 아주 약간만. 그리고 바로 그 심장에 단검을 꽂아넣었지. 까마귀단은 계약을 어기는 법이 없으니까. 악마하고도, 고객하고도 말이야."

  "그렇게 혈마법사가 된 거군." 이세야는 레바스의 넓다란 등판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엄청 속성 학습이었을 것 같네."

  칼린은 웃음기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렴. 사실 가르침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어. 악마가 내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누군가의 기억을 쏟아부은 거나 다름 없었거든. 내가 가본 적 없는 영계의 구역이 내 기억 속에 있었고, 배운 적 없는 주문을 외울 수 있게 됐어. 그 지식은 그냥 거기에 있게 된 거야...그리고 오늘까지 한 번도 말한 적도 없었고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것처럼 굴어왔지만, 그 악마의 비전은 한 번도 날 떠난 적이 없었어."

  이세야는 그리폰의 몸단장을 마쳤다. 그는 더러워진 손질용 천을 대충 던져둔 뒤 레바스의 어깨를 두들겨 그 야수에게 밤의 자유를 찾아 날아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알아들은 것처럼 쉿 소리를 낸 레바스는 두 감시자들로부터 물러나 날아올랐고, 안더펠스의 달빛 아래 말라 비틀어진 먹잇감이라도 찾길 바라며 사냥을 떠났다.

  그리폰의 비행이 남긴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이세야는 입주변의 먼지를 슥 닦아내고 칼린을 돌아봤다. "당신이 직접 배운 적 없는 걸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지?"

  "같이 헤쳐나가 봐야할 문제지, 그건." 나이 든 마법사가 대답했다. "어쨌든 나는 기술을 알고 있는 거니까. 내 자신의 기억보다도 훨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세야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이걸 원하는 건가? 이건 말레피카룸이라고.."

  "이건 무기일 뿐이야." 이세야는 눈 하나 깜빡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건 무기이고, 우린 대재앙과 싸우고 있어. 내가 이걸 원하는 건 당연한 거야. 속박의 힘만으로도 이미 강력한 도구이겠지만...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혈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많을 거야."

  "사실이기도 하고," 칼린이 말했다. "아주 많이 있지."

  "나한테 뭘 가르쳐줄 수 있지?"

  "모든 것을." 그가 답했다.

 

* * *

 

 아침은 이세야가 미처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와버렸다. 그는 지난 밤을 통째로 혈마법의 비밀을 파헤치며 보냈고, 새 날이 밝을 무렵엔 피로감 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칼린 역시 들뜸과 기진맥진 사이의 어드메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홀로 비밀을 지고 살아왔다. 누군가와 그것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짐을 던 듯 보였고, 새로운 능력이 가져다줄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세야의 열정이 그 자신이 혈마법에 대해 품고있던 껄끄러움을 완화시켜준 것 같았다. 이세야에 비하면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그는 오래 전 그가 덤벼들었던 무모한 도박의 효용을 찾았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이 깨어나 하루를 맞이할 무렵에도, 그 효용이란 건 그다지 뚜렷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첫 번째 하인이 여명빛을 맞으며 물을 긷고 아침 준비에 쓰일 장작을 챙기러 나올 때쯤 그들의 실험을 멈추었다.

  이세야는 주문을 증폭시키기 위해 스스로 냈던 자상 위로 가벼운 회복마법을 걸었다. 그들의 실험은 흔적도 없이 감춰졌고, 그는 칼린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감시자들에게 합류했다.

  "그래서, 오늘이 호스버그를 향한 포위공격을 무너뜨리러 가는 날이라고?" 펠리세는 포리지 죽과 건포도를 국자로 퍼담으며 나란히 선 이세야에게 질문했다.

  이세야는 붉은 머리의 궁수에게 눈썹을 슬쩍 들어보였다. "개러헬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펠리세는 쾌활하게 대꾸하고는 손에 든 국자를 엘프에게 건넸다. "네 동생이 그렇게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아니잖아."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에 두는 것도 잘 못하는 편이고." 이세야는 심드렁한 손길로 진득한 귀리죽 한국자를 접시에 퍼담았다. "포위공격을 무너뜨리러 가는 게 아냐. 잘 쳐줘 봐야 그러기 위한 험난하고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 수준에 불과할걸."

  펠리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태까지보단 나은 거네. 누가 작전을 이끌 거야?"

  "개러헬이지, 당연히. 그렇게 신이 나 있으니, 이끌기도 잘 할 거야." 그는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그는 실제로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가 지난 봄에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감시자 사령관 같이 고정된 지위는 아니었다. 그저 특수한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직함이었지만, 그 덕에 그는 관할 구역에 보내진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의 남동생은 대재앙과 싸워온 수 년 간 자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그의 그리폰 역시 어둠의 피조물 무리의 약점을 파악하고 파고드는 신묘한 능력으로 그를 보조했고. 둘의 조합은 감시자들이 지닌 가장 뛰어난 팀 중 하나를 이루었다.

  그리고 7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가장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끼워달라고 조르러 가야할 상대도 그 친구란 말이군." 펠리세가 말했다. 한 손에 접시를 가볍게 받쳐든 그는 피로에 찌든 눈의 병사들과 회색 감시자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 개러헬에게 향했다. 이세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하게 우린 차를 컵에 담아 그 뒤를 따랐다.

  칼린은 이미 동생과 아마디스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과 다른 회색 감시자 두 명은 엉성하게 그려진 지도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섰다. 사슴뿔로 만든 소금통 하나가 가운데 세워져 있었고, 메마른 건포도 몇 개가 왼편으로 삼각형 비슷한 형태를 이루며 늘어서 있었다.

  "전투지도야?" 이세야는 손에 든 컵으로 소금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개러헬은 팔을 뒤로 젖혀 그가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공간을 확보했다. "이 정도면 정확해 보여?"

  "아침 식사로 만든 지도로선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는 포리지 그릇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예상보다 훨씬 끔찍한 맛이었다. 단순히 쓴 정도가 아니라 강한 떫은 맛이 혀를 마비시켰다.

  어쨌든 잠을 깨우는 데엔 효과적이었고, 애초에 그러려고 마신 거였다. 한잠도 못 잔 다음 날이니, 조금이라도 정신을 맑게 해줄만한 거라면 뭐든 환영이었다. 이세야는 신맛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시며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작전 지도까지 필요하겠어? 말했듯이 따로 지키고 선 어둠의 피조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대단한 저항을 마주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개러헬이 끄덕였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충분히 대비하는 게 좋겠지."

  "그게 호스버그의 방어를 느슨히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동의하겠어.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누가 알고? 우리가 그리폰을 전부 끌고 나간다면 아무리 어둠의 피조물이라도 기회를 알아챌걸."

  "전부 끌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의 남동생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네 마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네 마리 그리폰에 기수 여덟 명이면 이미 큰 전력이지만 우리 임무를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큰 것도 아니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지하대로 입구 쪽에서 합류한 뒤, 목표를 무너뜨리고 호스버그로 돌아오는 거야. 마법사 네 명과 궁수 두 명이 공중을 담당하고 지상전을 대비해 전사 둘을 보내겠어. 이 정도면 합리적이지?"

  "제법."

  "좋아. 칼린, 당신은 이세야와 함께 가. 펠리세, 우선 다나로랑 조락, 리스메, 그리고...오...퉁크랑 뭉크도 데려가."

  붉은 머리 궁수가 주춤했다. "그 드워프들? 그 둘은 하늘만 올라가면 멀미하잖아. 지난 번에 우리 방랑자 날개에다 토해놓은 거 닦느라 며칠이나 걸렸는데. 가슴줄에는 아직도 얼룩이 남아있다고."

  "그렇긴 하지." 개러헬은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그 둘만큼 든든한 방벽은 없잖아. 그 두 형제만으로도 호스버그 성문을 며칠은 지킬 수 있을걸. 게다가, 우리 중 그들만큼 지하대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들이라면 우리가 놓칠 수도 있는 땅 위의 흔적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을 태워달라는 부탁을 그렇게 자주 한 것도 아니잖아, 펠리세. 이번만 좀 부탁해."

  궁수는 짜증스럽게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좋아. 난 가서 다나로를 찾아볼게. 부디 그 드워프들이 아직 아침식사를 덜 마쳤길 바라야겠군. 뱃속에 든 게 적을수록 치울 것도 적을 테니까 말이야."

  "지당한 말씀이야."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리곤 이세야가 손도 안 댄 포리지 그릇을 그를 향해 슬쩍 밀었다. "반대로 우리 누님께선 좀 뭘 채워넣으셔야겠어. 지난 밤에 잠을 자긴 한 거야?"

  "별로 못 잤지."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가져갔다. 식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그는 찐득거리는 귀리죽을 어떻게든 우겨넣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래야지. 다 먹으면 마당으로 나와. 낮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으면 좋겠어. 해가 저물면 어둠의 피조물들이 다시 몰려들지도 몰라."

  "예예, 알겠습니다, 전투 사령관님." 포리지가 묻은 숟가락을 경례하듯 들어보이는 이세야의 동작에 아마디스가 옆에서 코웃음 쳤다. "너는 같이 안 가?"

  "나는 못 가지." 개러헬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누나 말마따나 나는 전투 사령관이잖아? 원한다고 아무 전투에나 튀어나가 어둠의 피조물들을 때려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우리가 정말 이 포위를 깨부수는 날이 온다면 선봉에 나서겠지만...이런 소규모 작전에는, 뭐, 누나가 대장이라고."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의 남동생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두 눈 위로 언뜻 슬픈 기색이 비쳤다. "나는 알아, 누나. 누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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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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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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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5:19 숭고의 시대

 

  "준비 됐어?" 펠리세가 외쳤다. 그 회색 감시자의 목소리는 그의 황갈색 그리폰이 상승기류를 따라 빙글빙글 날아오르는 바람에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준비 됐어!" 이세야는 마주 소리쳤다. 그는 바람에 날려 들어온 머리칼을 입에서 뱉어낸 뒤 레바스에게 펠리세 뒤를 따라 날도록 신호했다. 도시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재가 겨울 바람에 불규칙하게 팔랑거리다가 눈송이와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이루며 뺨 위를 스쳐갔다.

  하늘을 나는 감시자와 그리폰들 아래 성벽과 불타는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인 호스버그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바리케이드 너머 투석기와 노포의 사정거리 언저리에선 폭풍우 치는 바닷물결 같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몰아치다가 밀려나곤 했다.

  7년에 거친 공성전은 거의 소진 상태였다. 회색 감시자의 지도 하에 안더펠스인들은 수 년간 주기적으로 어둠의 피조물들을 몰아냈고, 때때로는 환상에 불과한 평화가 몇 달씩 이어질만큼 무리를 흐트러놓기도 했다. 하지만 대재앙은 언제나 새로운 공포를 이끌고 돌아왔고, 조금씩 뒤로 밀려난 안더펠스인들은 안전을 찾아 성벽과 무기와 역청 바른 나무로 쌓은 불타는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물러났다.

  회색 감시자가 아니었다면 그 도시는 애저녁에 무너졌을 터였다. 물론 때때로 주어지는 몇 달의 휴식은 호스버그의 농부들이 도시 근처의 메마른 땅에서 부족한 수확이나마 거두고, 사냥꾼들이 숲에서 겨우 살아남은 깡마르고 겁에 질린 사슴따위를 잡아올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도시를 온전히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호스버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감시자와 그들의 그리폰들이 덜 곤궁한 이웃 도시에서 물자를 지원받아 가져다준 덕분이었다.

  지금 이세야가 맡은 임무도 그런 보급 임무 중 하나였다. 안티바 시티 출신 마법사 칼린이 레바스의 승객용 안장 뒷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디스는 아마 개러헬과 함께 도시 다른 편에 있을 것이었다. 지난 수 년간 네 사람은 수없이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잃어왔지만 운이 따른 건지 능력 덕인지 그들만큼은 어떻게든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들은 오늘 호스버그 서쪽 편에 구호물자가 떨어질 수 있도록 어둠의 피조물들을 바리케이드 동쪽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맡았다.

  당연하게도, 유인을 담당하는 쪽이 물자 전달 팀보다 훨씬 위험도가 높았다. 익히 알려진 바, 어둠의 피조물에게는 전략이라는 것을 짤만한 복잡한 사고 능력이 없었다. 이세야는 대재앙과 싸우는 지난 몇 년 간 딱 두 번 높은 지능을 보이는 것 같은 에미서리를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감시자들은 그런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신속하게 우선적으로 처리하곤 했다.

  악마의 군주가 직접 지휘하는 게 아닌 이상, 마땅히 이끌어줄 능력있는 지휘관이 없는 대부분의 어둠의 피조물은 맹렬하게 달려드는 짐승 떼나 다름 없었다. 놈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약간 낮게 비행하면서 화염구를 한두 개 던져주거나 화살 한 무더기를 날리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유인에서 살아 도망치는 것, 어려운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고도를 높였다간 어둠의 피조물들이 금방 흥미를 잃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너무 낮게 날았다간 오우거가 던진 바위에 맞아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젠록이나 헐록 따위가 조악한 검은 활로 쏘아댄 눈먼 화살에 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둠의 피조물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불길 근처에서 낮게 나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위험했다. 연기나 불빛은 그리폰의 시야를 흐려놓을 수 있었고, 불길이 만들어낸 뜨거운 공기의 소용돌이는 비행을 흐트러뜨려 강제로 바닥에 내리게 만들 수도 있었기에 - 그리고 동료들과 동떨어진 곳에 착륙한다는 건 그 자체로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굳건하게 버텨낼 수만 있다면 제법 규모 있는 부대를 무너뜨리고 수성중인 호스버그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도박을 걸어볼만 했다.

  앞 쪽에서 펠리세의 그리폰이 암갈색 날개를 접고 들쭉날쭉하게 솟아있는 어둠의 피조물 무리 쪽으로 하강했다. 놈들은 자철석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엉성한 검날을 공중에다 휘둘러대며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젠록과 헐록들의 행동은 마치 그렇게 하다보면 어떻게든 펠리세와 그의 그리폰 사이 40 피트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리폰은 30 피트 떨어진 높이에서 고도를 유지하며 놈들 위를 스치고 날아가 불타는 바리케이드와 요새로부터 무리를 끌어냈다. 펠리세와 동승한 회색 감시자 조락이 쏟아내린 하얀 깃이 달린 화살무더기는 울부짖는 헐록들로부터 새로운 경지의 분노를 일으켰다. 죽은 눈을 한 괴물들은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의 육신을 찢어발기기도 했으나, 대부분 감시자들을 쫓아 달려왔다.

  "우리도 가자." 이세야는 칼린에게 말한 뒤 레바스에게 펠리세를 따르도록 신호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마법사가 끄덕이는 게 눈에 들어왔고, 하강하는 그의 정신은 오직 어둠의 피조물에게 쏠려있었다.

  레바스가 최대한 낮게 날며 무리 위로 미끌어지자 가까워진 거리에 놈들의 차갑고 거친 타락의 냄새가 이세야에게 풍겨왔고, 곧이어 칼린이 뒤편에서 울부짖는 무리를 향해 영혼 화살을 날려보냈다. 워낙 뭉쳐있어서 위력이 강한 주문을 쓴다면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화염구나 폭풍우 마법을 썼다간 놈들이 흩어질 터였고, 놈들이 서로를 타고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되도록 한 무리를 이루게 두는 편이 나았다.

  앞쪽에선 세 번째 그리폰 팀이 아래로 향하며 펠리세와 이세야가 뒤따르도록 경로를 뚫고 있었다. 그리폰이 어둠의 피조물 위를 지나갈 때 위에 있던 기수가 괴성을 내지르는 헐록들 위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뒤집어 털어냈다. 유리병들이 챙그랑거리며 줄줄이 쏟아져내렸고, 어슴프레한 불빛 아래 독에 물든 싸락눈처럼 반짝거렸다.

  병 안에는 불투명한 우윳빛 액체가 담겨져있었고, 어둠의 피조물 무리 사이에서 깨진 유리병 사이로 액체가 기화하자 탁하고 두터운 안개가 피어올랐다. 연금술이 빚어낸 안개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지러워하며 비틀거렸다. 커다란 뿔이 달린 오우거조차도 안개에 휩싸이자 고통에 찬 울음을 내질렀다. 헐록과 젠록 무리가 비틀거리며 서로에게 부딪히고 속이 뒤집히는 지 신음을 내뱉는 모습에 회색 감시자들은 준비한 마법과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락, 펠리세, 그리고 유리병이 담긴 주머니를 털어낸 다른 궁수까지 모두들 가진 화살이란 화살은 전부 동원했고, 어둠의 피조물 위로 화살비가 단죄하듯 쏟아졌다. 바늘꽂이 모양이 된 오우거 한 마리가 바닥에 쓰러지며 헐록 두 마리를 깔아뭉갰다. 죽은 오우거 밑에서 비져나온 팔다리가 퍼덕거리며 버둥대는 모습이 꼭 죽어가는 거미 같았다.

  쓰러진 오우거 옆에서 주문을 외기 위해 입을 연 헐록 에미서리의 목구멍으로 한 감시자가 쏜 화살이 꽂혀들며 그 기형적인 혀를 뒤에 선 헐록의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에미서리는 화살에 꽂힌 채 끔찍한 휘파람처럼 들리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자 이내 조용해졌다.

  다른 어둠의 피조물들은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그 안에서 죽어갔다. 즉사하지 않은 놈들 역시 쓰러진 몸 위로 밟고 지나가는 동족들의 발길 아래 금세 형체를 알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이세야는 쉿쉿거리는 비명소리로부터 귀를 닫았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이길 때나 죽을 때나 똑같은 소리를 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에는 불쾌하게 들리는 으르렁거림과 그륵거리는 소리의 불협화음일 뿐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칼린은 이미 자신을 온전히 영계에 열어젖힌 상태였다. 그 마법사를 휘감은 에너지의 소용돌이 아우라가 어찌나 강력했는지 일반 사람의 눈에도 그 반짝임이 보일 정도였다. 아마 위협을 감지할만한 상황이었다면 어둠의 피조물조차도 그 위력에 압도됐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거나 무리를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세 번째 감시자 마법사가 변두리 쪽으로 날려보내는 화염구에 맞아 기괴하게 뒤틀린 몸이 불타는 사이 괴로워하는 것 뿐이었다. 칼린의 주위로 전류가 형성되며 그 마법사의 머리칼이 쭈볏 치솟았다. 곧이어 사이로 춤추듯 일렁이던 불꽃이 영계와의 강력한 연결을 따라 광채를 뿜어대며 채찍처럼 내리꽂혔다.

  이세야는 레바스의 고삐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폰은 닥쳐올 폭풍으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인도할 것이다. 짐승의 목을 가볍게 두들겨 조종을 맡기겠다는 신호를 보낸 뒤, 엘프는 스스로를 영계와 접촉하여 주문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겨울 공기가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안더펠스의 부드러운 눈송이가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결정을 이루며 짤랑거리는 작은 종 모양으로 가죽장갑 위를 훑어내렸다. 주위로 몰아치는 회오리 바람에 레바스 역시 이리저리 휩쓸렸다. 그리폰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기에 최대한 움직임을 조절하며 버텼지만, 이세야는 가장 위험한 고비가 곧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래 위치한 어둠의 피조물 위로 주문을 쏟아냈다. 웅웅거리는 눈폭풍이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휩쓸었다. 초자연적인 냉기가 처음 쓸고 지나간 자리 아래 부상 입은 헐록의 피가 까끌거리는 검은 얼음덩이로 얼어붙었고 젠록의 관절 마디가 수액으로 가득찬 나무처럼 터지는 가운데,  칼린이 겨울 폭풍 위로 자신의 주문을 이끌었다.

  전류가 소용돌이치며 어둠의 피조물들을 휩쓸었고, 번쩍이는 아치형 하얀 빛무리가 땅 위로 퍼져나가며 놈들을 베어냈다. 이세야는 번개에 마비된 헐록 무리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고, 화살집 꼴이 된 놈들이 눈보라 속에 비정상적인 형태로 몸을 치켜세우고 굳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류가 흩어지자 시체가 된 놈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쓰러졌다.

  레바스를 자신의 기수가 주문으로 불러낸 폭풍을 이겨내고 그들을 지나쳐 높이 높이 치솟아 전장을 뒤로 했다. 이세야는 그제야 다시 숨을 내쉬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풀어줬다. 칼린이 영계와의 연결을 끊자 그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아우라도 사라졌다.

  완벽한 작전이었다. 한 명의 기수도 잃지 않았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공격은 충분히 어둠의 피조물 군대에 타격을 입혔고, 지금쯤 도시 저 편에서는 토라덴 국왕의 병사들이 보급받은 소금, 육포, 보릿자루를 주워다가 호스버그의 기뻐하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을 터였다.

  온전한 승리였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몇 주, 혹은 며칠 안에라도, 그들이 이 밤에 죽인 어둠의 피조물의 두 배가 다시 자리를 메꿀 것이다. 악마의 군주의 부대는 끝이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넣고 몰살시키는 감시자들의 전술은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들을 끌어내 죽음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그건 전부 놈들은 도무지 실패에서 배울 줄 모르고 배울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병사들을 공급해냈다.

  대재앙은 악마의 군주가 쓰러지지 않는 한 이어진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었다. 놈이 살아있는 한, 어둠의 피조물은 계속해서 올 것이다.

  "놈들이 여기 올 수 없지 않는 한." 이세야는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칼린이 되물었다.

  이세야는 안장에서 살짝 몸을 돌려 어깨 너머로 중년의 마법사를 돌아봤다. 마법의 기운이 사라진 칼린의 머리칼은 다시 평소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멀리서 일렁이는 호스버그의 불빛 아래 그 머리칼은 원래의 흑갈색보다는 검정색에 가깝게 보였다. 어둠 속에 가린 회색 눈은 눈구멍 위로 드리운 깊은 그림자 속에서 잠깐씩 반짝였다.

  "어둠의 피조물 말이야." 그가 대답했다. "오늘은 잘 해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잖아. 수천을 죽인다 해도 아무 차이도 없다고. 언제나 더 몰려올 거니까. 악마의 군주가 쓰러지기 전까진 계속해서 더 오겠지."

  "그래서?"

  "우리가 그 증원군을 끊어버리면 어떨까? 놈들이 호스버그까지 이동해오는 지하대로가 어디 있든 간에 그걸 막아버린다면? 그 다음에 도시 근처의 어둠의 피조물을 전멸시킨다면, 좀 다를 수도 있어. 그러면 이 수성전도 끝날 수 있어."

  칼린은 회의적인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하겠다고? 지하대로 입구는 수없이 많아. 오래된 드워프 통로 뿐 아니라 땅에 있는 틈새나 지진, 침식으로 생긴 균열 같은 것도, 혹은 어둠의 피조물들이 직접 파낸 곳도 있겠지. 누구도 어둠의 피조물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하고, 설사 놈들이 어딜 이용하는지 알아낸다 해도 고작 한 군데를 막아봤자 놈들은 다른 곳을 이용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이세야가 받아쳤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아무도 시도해보진 않았잖아.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해버리기만 했지. 내 말은,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자는 거야. 우리가 해야하는 거라곤 이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디를 통해 지하로 돌아가는지 추적하는 것 뿐이라고."

  "그걸 어떻게 하자고 할 건데? 누구도 그런 임무를 맡아 추적자로 나서려 하지 않을 거야. 혹여 우리가 헐록 한 마리를 무리에서 구별지을 수 있다 한들, 그리고 그 헐록이 어찌어찌 지하대로로 되돌아 간다 쳐도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쩌면 여름의 태양 아래서 낮시간동안 그렇게 행동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겨울에는 거의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 어쨌든 그 추적자가 길에 들어서는 순간 금방 발각되어 갈기갈기 찢어질 거야."

  "나는 추적자를 이용하자고 한 적 없어." 이세야가 말했다. "난 당신 힘을 이용할 거니까."

  "나를? 흥미로운 생각이군." 칼린은 가짜웃음임이 명백히 드러나게 입꼬리를 위로 당겨올렸다. "내가 무슨 수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은 혈마법사잖아." 이세야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들은 허공 위에 있었고, 겨울 공기에 그의 말은 쉽게 흩어졌지만, 칼린은 입모양으로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호스버그의 불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대재앙에 따라붙은 폭풍구름 사이로 달빛조차 미약했으나 이세야는 어둠에 가까운 시야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추궁이었다. 혈마법 - 말레피카룸이라 불리는 - 주술은 고대로부터 테다스 전역에서 금지된 영역이었다. 그저 익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중죄였고, 처벌 또한 단순히 사형으로 그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세야는 칼린과 어깨를 맞대고 싸워온 지 수년 째였다.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재앙의 도가니 속에서 다져진 둘 사이의 신뢰가 있었기에, 그는 이세야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 비밀을 진즉 밝힐 수 있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너무나 작게 되묻는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자칫 들리지 않을 뻔 했다.

  "나 역시 마법사잖아, 칼린. 난 당신이 영계와 접촉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는 걸 볼 수 있다고." 실제로 그 모습을 본 건 몇 번 안되었고, 대개 절박한 곤경 속에서 이미 여기저기 상처입은 상태일 때였기에 피를 매개로 마법을 쓰는 게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법도 했지만...그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의 마법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이세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겠어? 놈들 중 하나의...안으로 어떻게든 침투해서, 지하대로까지 뒤를 밟는다는 게?"

  그는 잠시 뜸을 들였지만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언제 실행하길 원하지?"

  "지금. 바로 오늘 밤에. 우리가 뭘 하는지 아무도 볼 수 없을 때. 사람들에겐 오늘 전투에서 부상입은 놈 하나가 괴상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추적해서 지하대로까지 따라갔다고 설명하면 돼."

  "어둠의 피조물 하나가 필요해."

  "구해올게." 이세야는 레바스의 고삐를 다시 붙잡았다. 털로 덮인 귓가로 몸을 기울인 그는 속도를 내기 위해 체중을 앞으로 실으며 속삭였다. "사냥하자."

  쉿쉿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리폰은 기꺼이 북쪽을 향했고, 천을 오가는 바늘처럼 구름 사이로 이리저리 헤치며 고도를 낮췄다. 그는 고개 숙여 대재앙으로 황폐해진 대지 위에서 어둠의 피조물의 간헐적인 음직임이 있는지 추적했다.

  그리폰의 시력은 탑승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이세야는 날개를 빠르게 퍼덕이며 속도를 높이는 레바스의 움직임에 그가 먹잇감을 포착했다는 걸 감지했다. 몇 초 뒤 그는 날개를 접으며 부드럽게, 눈에 잡히지 않을만큼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작은 규모의 젠록 무리가 그리폰의 날개 그림자 아래 이리저리 흩어졌지만 이미 도망치긴 늦은 뒤였다. 레바스는 발톱을 둥글게 말고 가장 후미에 있는 젠록 무리를 덮쳤고, 놈들의 목을 부러뜨려 단숨에 즉사시켰다. 쓰러진 젠록들의 파들거리는 손이 떨어진 검에 채 닿기도 전에 그 그리폰은 이미 다음 놈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본능을 지녔고 철저한 훈련을 거쳐왔다. 레바스는 젠록들을 습격할 때 절대 부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둠의 피조물의 혈액은 타락에 면역이 없는 모든 생물체에게 치명적인 독이었고, 회색 감시자들은 입단의식을 거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지만 그리폰들까지 그렇진 못했다. 그리폰이 어둠의 피조물을 물어뜯었다간 고통 속에 죽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레바스의 발톱은 충분히 쓸만했고, 1분도 채 안 돼서 그는 그들이 마주친 일곱 마리 젠록 중 여섯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하나 남은 녀석은 이세야가 은은한 마력 구체 속에 속박해둔 놈이었다. 그의 주문 덕에놈은 레바스의 발톱으로부터 무사히 보호받으며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주문의 유백색 결계 너머로 끔찍하게 생긴 누런빛 눈알이 혼란스런 빛을 띄고 그를 올려다 봤다.

  "이제 쉬어." 엘프는 레바스에게 속삭인 뒤 고삐를 여전히 붙든 채 안장에서 내려섰다. 그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 야수를 갇혀있는 젠록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붙들린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증오와 짜증으로 끽끽거리며 아주 잠시 저항하던 그리폰은 이세야가 고삐를 놓지 않자 툴툴거리며 기세를 꺾고 그의 인도를 따랐다.

  레바스가 어둠의 피조물에게 곧장 달려들지 않을 만한 거리를 확보한 이세야는 칼린을 돌아봤다. "이 정도면 되겠어?"

  "좋아." 마법사는 단검을 든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바닥 위로 얕은 자상을 냈고, 붙들려 있는 젠록의 발 한 치 앞에 핏방울을 떨궜다. 그 생물체의 흉측하고 밋밋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지만, 이세야는 어쩐지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허세 부리듯 나섰던 조금 전과 달리 눈 앞에서 직접 혈마법이 벌어지는 걸 보는 건 어딘가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닥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바늘로 찌른 거품방울처럼 마력장이 흩어졌다. 젠록은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레바스는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당장 달려들고 싶어했지만 이세야의 웅얼거리는 명령에 자신을 억제했다. 그리폰의 분노에 찬 앞발톱이 바위 투성이 흙바닥을 움푹 패이게 그러쥐었다. 목구멍 안에서부터 짜증섞인 울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를 지켰다.

  칼린은 어둠의 피조물이 움직이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젠록은 그대로 굳어섰고, 의문에 찬 으르렁거림이 입술 없는 입가를 따라 새어나왔다. 이어 놈은 물기어린 노란 눈을 감았다가 불쾌한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퍼드득 흔든 뒤, 그들에게 등을 돌려 바위 투성이 황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놈은 지하대로로 돌아갈 거야." 인간이 말했다. "지금 따라가면 놈들이 이용하는 입구를 찾을 수 있어."

  "완벽하군." 이세야는 안장에 다시 올라탄 뒤 장갑낀 손을 내밀어 칼린을 끌어올렸다. 그는 레바스에게 다시 날아오르도록 신호했고, 그리폰은 기꺼이 명령을 따랐다. "어느 쪽이야?"

  "지금은 일단 북쪽."

  그들은 금세 홀로 동떨어진 젠록을 따라잡았다.  일반적인 놈들의 특성에 반하여 한 가지 목적만을 품고 황량한 대지를 따라 움직이는 걸음은 재빨랐지만 하늘에서 날아오는 추적자를 따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레바스는 느릿한 속도로 어둠의 피조물 머리 위로 원을 그리며 날았다. 이렇게 느린 속도의 목표를 따라가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목표를 쫒으며 비행한 지도 잠시, 칼린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내 비밀을 지켜줄 셈인가?"

  "당연하지." 이세야는 젠록을 눈으로 쫓으며 대답했다. 수 년간 대재앙과 맞서 싸워왔지만,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감시자의 의지 아래 온전히 속박된 어둠의 피조물이라니. 그는 등 뒤의 마법사를 향해 돌아봤다. "난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주길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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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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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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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 용의 시대

 

  "그리폰들은 어떻게 된 거죠?" 발리야가 물었다.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데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엄밀히 따지자면 늙은이는 아니었지만, 쉽게 그렇게 보일만한 인상이었다. 점잖은 태도도 그랬고, 반쯤 벗겨진 머리로 종종 생각에 잠긴 듯 꿈꾸는 표정을 짓기 때문이기도 했다. 캐로넬은 간혹 방문객들이 행정관을 평온화된 자로 착각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발리야는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든 어쨌든 간에 정말 그랬을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회색 감시자 행정관은 분명 그들의 몽롱한 태도를 닮아 있었다.

  그가 눈을 꿈뻑이며 돌어봤다. "그리폰?"

  "네 번째 대재앙 이후에 말이에요. 그들은 전부 사라졌잖아요."

  "그랬지." 행정관이 서가를 따라 걷자 그림자와 어슴프레한 회색빛이 그의 위를 번갈아 스쳤다. 발리야는 느린 걸음으로 그를 따라 걸으며 행정관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담은 가방을 고쳐멨다. 대부분의 서신은 수석 감시자에게 온 것이었지만 적어도 요 몇 년간 와이스하웁트로 오는 일반적인 서신을 관리하는 건 행정관의 일이었다. 수석 감시자의 관심은 좀 더 중요한 일에 쏠려 있었으니.

  신병들은 매일 번갈아가며 행정관을 보조하는 업무를 맡았다. 원래대로라면 막 입단식을 거친 신입 회색 감시자에게 주어질 일이었으나, 호스버그 마법사들 역시 그 임무를 할당받았다.

  발리야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가볍게 일하는 하루를 보장하는 업무이기도 했고, 머릿 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온갖 질문들을 쏟아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행정관의 온화한 성품 덕에 그들의 계급차는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대등한 기분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데요?"

  "모두 죽었지."

  "하지만 어떻게요?"

  행정관은 회색빛 눈썹을 치켜올렸다. 유달리 길게 자란 눈썹이 속눈썹에 닿을 듯 늘어져 있었다. "자네들 모두 네 번째 대재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텐데."

  발리야는 그의 말이 질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다지 질문처럼 들리진 않았고,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지난 한 달간 그가 바로 자신의 작업을 돕기 위해 도서관을 들쑤시고 다닌 걸 모를 리도 없을 테지만, 그저 사실을 지적하려 그렇게 말한 것 같진 않았다. "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회색 갈기 같은 숱없는 머리가 로브 어깨자락을 쓸었다. "그러니 전장에서 우리에게 그만한 영광을 선사했던 그 짐승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어째서 그들로 인해 이룰 수 있던 마법 같은 기적이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건지."

  "예."

  행정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미소로 그의 얼굴이 주름졌다. "모두들 그걸 궁금해하지. 나도 그랬고. 하지만 그리폰들은 사라졌단다, 얘야. 그들은 대재앙 속에서 죽고 말았어. 너무 많은 수를 전투에서 잃는 바람에 더 이상 개체수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단다. 점차 약해져갔고. 결국 알 속에서 부화하지 못하는 새끼들이 많아지는 바람에, 그렇게 끝나고 만 거지. 어마어마한 희생이었어. 어마어마한 비탄과."

  어마어마한 거짓말이기도 하고, 발리야는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에겐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었다. 특별히 그런 느낌이 묻어나지도 않았고, 대재앙의 끝무렵에 그리폰이 멸종한 건 엄연히 사실이기도 했으니. 한 해 한 해 전쟁이 이어질수록 그리폰들이 번식하고 둥지를 튼다고 알려진 안더펠스의 대지 또한 황폐해져 갔을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대재앙 중에 모두 죽어버렸을지도.

  하지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비집고 나오는 한 줄기 의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행정관은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쉰 뒤 사무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안은 질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종이뭉치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두터운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아마도 방문객을 위한 보조 의자 같은 게 놓여 있던 것 같지만 그 또한 책상보다 높이 쌓인 종이뭉치에 파묻혀 있었다. 그저 나무로 조각한 등받이만이 종이더미 사이로 빼꼼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행정관은 느릿하게 움직여 서재 안에 유일한 사무용 의자에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오래된 가죽의자는 옆면이 튿어져 있었고, 바닥과 등받이 부분은 나이 든 감시자의 자세에 맞춰 움푹 패여 있었다. 행정관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발리야에게 손짓했다. "오늘은 어떤 편지가 도착했누?"

  "아..." 발리야는 허둥대며 가방을 내려놓고 두루마리와 봉투들을 뒤적였다. "이건 비질 요새에서 온 겁니다. 하나는 데너림에서 왔는데 죄송하지만 이게 백작의 인장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자마랑, 스탁헤이븐에서도..."

  "남쪽에서 온 건? 올레이라든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는 남은 뭉치에서 인장과 봉인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엔 없어 보이네요, 적어도 제가 알아볼만한 건요. 혹시 제가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음." 행정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감은 눈으로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자네가 맞을 거야. 그냥 이 주책맞은 늙은이가 왜 감시자 사령관 클라렐이 요새는 연락을 안 하나 궁금해하던 참이라 그래...그냥 당장 필요한 게 없어서일 텐데 말이야. 사람들이란 필요한 게 있을 때나 연락을 하지 잘 지낼 때는 감감무소식인 법이거든. 혹은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도 그렇겠지만. 어느 쪽이든, 대수로울 건 없지. 비질 요새에선 뭐라고 하누?"

  발리야는 밀랍 인장을 손톱으로 벗겨낸 뒤 접혀있던 봉투를 펼쳤다. 그는 처음 몇 줄을 눈으로 흝은 뒤 고개를 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던졌다. 행정관의 말이 맞았다. "새 감시자 사령관께서 최근에 있던...어, 악령에 씌인 나무와의 전투에 대한 보충을 위해 리륨과 무기, 갑옷 몇 구를 공손하게 요청해왔습니다. 불에 탔다고 하는군요. 자세한 내역은 여기 적혀있습니다."

  "그러셨겠지." 행정관은 코웃음쳤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리고 데너림의 수상쩍은 백작에게서 온 편지는?"

  그 또한 원조 요청의 내용이었다. 백작부인이 술병을 가지러 저장고에 내려갔다가 젠록 한 마리를 본 것 같다고 주장했고, 백작은 분명 그의 와인저장고에서 이어진 지하대로에서 침입했을 어둠의 피조물을 해치우기 위해 회색 감시자 한 무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목격 당시 백작이나 백작부인이 얼마나 취해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나머지 편지들은 그보단 덜 사소했지만 어쨌든 내용만큼은 이것저것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마법사와 템플러 양쪽 진영 모두 자신들 편에서 싸워달라 요청해왔고, 템플러도 마법사도 모두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 안더펠스 쪽 정찰요원들은 어둠의 피조물을 목격했다는 소식과 그들의 활동이 특정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는 보고를 전해왔다. 드워프들도 지하대로의 어둠의 피조물 활동에 대해 비슷한 소식을 전해왔고, 그와 함께 최근에 콜링에 응하러 향했던 감시자들의 도착과 출발, 죽음에 - 추정이든 확인된 것이든 - 대한 소식을 보내왔다.

  발리야가 오자마로부터 온 이름들을 전부 읽었을 때에야 행정관은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됐네." 그는 서재를 나가도 된다는 뜻으로 손짓했다. "충분해. 가보게나. 다른 할 일도 있지 않나. 나머지 편지는 두고 가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뒤, 젊은 엘프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과 함께 조사에 합류하기 위해 개러헬의 기록이 모아진 작은 방으로 향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는지 동료들은 이미 점심을 먹으러 간 후였다. 도서관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곤 그 여자 템플러, 레이마스 뿐이었고 그는 책상 위에 덮여진 책 하나를 올려둔 채 홀로 앉아있었다.

  발리야는 그 여자가 덮힌 책을 보며 뭘 하고 있든 간에 기꺼이 내버려두고 떠나고 싶었지만, 레이마스가 조용한 도서관 안을 가로질러 그를 불렀다. "거기. 발리야였죠."

  엘프는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어쩔 수가 없었다. 호스버스 마탑에서 수 년간 생활한 덕에 그 반사작용은 이미 각인돼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의식적익 노력으로 긴장을 풀고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지워낸 그는 겨우 그 중년 여성을 향해 돌아섰다. "네?"

  "이 쪽에 잠시 앉았다 가지 않겠습니까?"

  발리야는 다시 굳어졌다. 굳이 그 말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여긴 마탑이 아니다. 템플러는 와이스하웁트에서 어떤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랜 습관 같은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왜죠?"

  "얘기 좀 하자고요. 정말 얘기만요." 사색으로 그늘진 주름이 습관처럼 배어있는 여자의 길고 야윈 얼굴 위로, 어색한 느낌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와중에도 진솔하게 느껴지는 요청에, 발리야는 머뭇거리며 책상 맞은 편 의자로 다가갔다. 바로 맞은 편 자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거리를 두고 싶었으니. 맞은 편 하나 옆 자리 의자에 발리야는 골라 앉았다. "뭐에 대해서요?"

  "당신은 우리를 믿지 않는군요." 레이마스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리며 읽지 않은 책의 표지를 덮었다. 커다란 손은 굵은 손가락과 굳은살 박힌 손바닥 덕에 남자 손처럼 보였다. 손등 위의 오래된 흉터가 군데군데 하얀색, 보라색 선을 이루며 그물 같은 모양을 그렸다. 군인의 손이었다. 템플러의 손. "당신네 마법사들 중 우리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지만...당신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를 경계하는 것 같군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마스의 눈빛 너머로, 오랫동안 묵혀둔 낡은 상처 같은 게 흔들렸다. "우리는 이곳에 당신들을 잡으러 온 게 아닙니다. 템플러들이 전부 마법사들을 짓밟는 걸 즐기기 위해 그 길을 택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데요?" 발리야는 짜증을 감추지 않지 않고 맞받아쳤다. 일부러 소리나게 의자를 밀쳐내며 일어나자 돌바닥 긁히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

  "온 종일 탑 안에서 두렴과 좌절감에 빠진 마법사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로 결심할만한 더 나은 이유가 있긴 한가요?"

  "있기도 하죠. 저는 그랬으니까요." 템플러는 올이 가는 흑갈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시선을 내려 자신이 읽고 있지 않던 책 위로 떨구었다. 발리야는 그게 기도서라는 걸 깨달았다. 설교와 창조주께 바치는 찬송집. 책등의 뻣뻣함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책을 읽은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았다. "제가 기사단에 들어간 건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 참 고결한 마음씨로군요. 왜인지도 여쭤봐드릴까요?"

  "그러고 싶으시다면요. 저희 아버지는 마법사였습니다. 그리 대단한 능력은 없던 것 같지만요. 그분은 수련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데 최선을 다하며 사셨습니다. 자식들 중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죠. 과연 어머니께는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마 어머니는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 주변에선 종종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으니까요. 닭이 품고 있던 달걀들이 밤 사이 얼어붙은 일이 있었죠. 횃불이 푸른색, 혹은 녹색으로 불타오르기도 했고, 이따금 그 불꽃 안에서 작은 얼굴이 보이거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바깥 사람들에게 해선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구든 혹시 아는 이가 있었다면 - 물론 몇 명은 분명 알고 있었겠지만 - 그들 역시 우리의 비밀을 지켜줬습니다."

  "그리고는요?" 발리야가 느끼던 짜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대신 묵직한 예감이 그 자리를 메꿨다. 그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었고, 동시에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기도 했다.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은 언제나 훈련받지 않은 마법사들이 어떤 식으로 악마에게 홀려 타락의 괴물이 되는지 경고하는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레이마스의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비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굳이 달가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결국 말을 해버렸고, 템플러들이 찾아왔습니다." 레이마스가 말했다. "누가 그랬는지, 어떻게 알게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요. 제 아버지는 그리 강인한 분이 못 되었습니다. 용기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분이었죠. 템플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주머니 가득 돌멩이를 채워넣고 호수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엄지손가락끼리 단단히 얽혀있었고, 손가락 마디가 억누른 감정 덕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윽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펴서 책표지 위에 내려놓은 뒤, 손가락 사이에 놓인 제목을 내려다 봤다. "저는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한동안은요. 저는 템플러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들이 차갑고 오만한 태도로 제 어머니를 심문한 일이나, 저와 형제들이 무슨 전염병 보균자라도 되는 양 마법 능력이 있는지 캐물어댄 일에 증오심을 느꼈죠. 수 년 간 저는 그 분노과 증오를 품고 살았습니다. 마주치는 누구에게든 싸움을 걸어대며, 화풀이 할 곳을 찾아가며 살아갔습니다. 언제부터 그게 달라졌는지, 왜였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느 날, 저는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다른 사람들이 저희 아버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고, 그러려면 그 안에서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게 진실되게 성직자의 길을 걸을 만한 신앙심은 없었습니다. 창조주에 대해선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마법사들을 지킬 수 있는 건 템플러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는 건- 제대로 임무에 충실하기만 한다면요. 그리고 저는 그럴 생각이었고요."

  "그래서 떠나온 건가요?" 발리야는 나직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떠나온 겁니다." 레이마스는 마침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이 든 여인의 유리 같은 두 눈이 반짝였다. 눈물 때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발리야는 알 수 없었다. 도서관의 희미한 회색빛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으니. "기사단이 그들의 본질에서 벗어났으니까요."

  "제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뭐죠? 뭘 원하는 겁니까? 당신네 기사단에 대한 용서? 아니면 아버지 일에 대한?"

  레이마스는 짧게 웃어보였다. 그는 소매로 눈가를 훔쳐 거기 있었을지 모를 뭔가를 닦아냈고, 어느 새 다시 평소의 감성적이고 사색적인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만약 그래도 된다고 허락 해주신다면 굳이 거절하진 않겠지만, 그런 이유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그럼 뭐죠?"

  "템플러 기사단은 자신의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분명 다시 바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지금은 아닐 거고, 제가 그렇게 만들 수도 없겠죠." 레이마스는 설교집을 옆으로 밀어 두 사람 사이를 비워냈다. "하지만 회색 감시자는 여전히 시대를 아우르는 영웅입니다. 우리는 둘 다 이곳에 와버렸고, 이들과 합류하길 원하고 있죠. 제가 당신에게 이야기 나누자고 한 건 당신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당신이 화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저 밖의 무너져가는 세상으로부터 피난처가 필요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사명을 찾고 있고, 믿을 수 있는 동지를 찾고 있죠. 제가 말하고 싶던 건 그 뿐입니다."

  "그래요." 발리야는 그렇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는 앉았던 의자를 다시 책상 안으로 밀어넣었다. "충분히 말하신 것 같군요."

  "잘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레이마스가 물었다.

  발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템플러를 읽힌 적 없는 기도문과 함께 남겨둔 채, 개러헬의 기록이 모여있는 방으로 돌아갔고, 읽고 있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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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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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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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실제로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아라벨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에 불과했다.

  전설적인 데일리시 걸작품에 비하자면, 그것은 땅딸막하고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고기잡이용 조각배에 이것저것 덧댄 뒤 어설프게 수레바퀴를 달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감시자들은 주민들이 구해온 부품들을 그러모아 조립한 그 배를 가지고 잡초가 무성한 옛 양떼 목초지 위로 움직여보는 연습을 했다.

  그들이 시도하려는 게 뭔지 이해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개러헬의 노력에 동참하도록 선임 감시자두 명을 지원해줬다. 감시자 사령관은 그토록 하잘것 없어 보이는 작전에 그리 대단한 인력을 투입하려 하진 않았으나,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어떻게든 구해낼 수 있을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도 않았다. 둘의 차이는 두 명의 마법사를 지원한 데서 드러났다.

  두 마법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럭저럭 성공이라 할만한 것을 이뤄냈다. 그 아라벨은 비록 데일리시들 것처럼 부드럽게 숲 사이로 떠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듯 마력장을 조절하여 그 배를 일정한 높이 위에 안정적으로 떠있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맨 처음 그는 주문의 위력을 오판하는 바람에 처음 만든 아라벨을 10 피트 높이에서 날려버려 산산조각 냈었다.

  하지만 새로 만든 쪽은 좀 더 튼튼했고, 이세야의 계산도 좀 더 정밀해진 덕에, 3일 째에 그들은 다소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빠른 속도로 자유동맹을 뚫고 갈만한 이동수단을 만들어냈다.

  그의 능력으로는 그 배를 공중에 가만히 띄워두는 게 한계였다. 마법으로는 배를 띄울 수는 있어도 비행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끌고갈 수 있게 안장을 단 그리폰이라면, 그 아라벨은 훌륭하게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리폰의 속도에 맞춰 날아갈 수 있었다.

  "이제 딱 백 대만 더 있으면 되겠네." 개러헬이 한 때는 목초지 울타리를 지지하고 있었을 닳아빠진 돌기둥에 몸을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간신히 착지시킨 수제 아라벨이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감추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이끌 백 마리의 그리폰과, 그걸 띄울 백 명의 마법사도 말이지." 아마디스가 덧붙였다. 그는 무신경한 태도로 잔디 사이의 데이지 꽃 한 송이를 뽑아선 손가락 사이로 돌돌 말다가 목초지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이렇게 단순한 걸 여지껏 아무도 생각한 적 없다는 게 놀랍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런 생각이 괜찮아 보이려면 적어도 대재앙이 코앞에 닥쳐올 정도는 돼야지." 개러헬이 말을 받았다. "설사 그 지경이 돼도, 나는 주민들 중 기꺼이 저기에 올라탈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즐거워 보여서 나도 참 기쁘다만." 이세야는 다시 아라벨을 떠올렸다가 지상으로 착지시키며 웅얼거렸다. 부양과 착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배를 부숴먹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바퀴에 거의 충격이 가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내심 만족했다. "둘 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면, 가서 그 백 대의 아라벨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있기만 하다면야,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구해낼 수 있을 거라고."

  "세나스테도 이미 명령을 내렸어." 아마디스가 말했다. 카나리아를 입에 문 고양이라 해도 그보다 만족스런 웃음을 짓지는 못할 듯 보였다. "한 시간 전에 공식적으로 하달된 명령이지. 회색 감시자들은 와이컴 주민들을 공중부양 아라벨로 대피시킬 것이고 - 이거 은근 발음이 어려운데? - 스무 대의 배가 완성되면 짐을 싣는대로 출발할 거라고. 우리 셋과 너희의 두 그리폰이 첫 번째 무리를 스탁헤이븐으로 인도할 거야."

  이세야는 고기잡이 배 "아라벨"에서 물러나 바람에 흩날린 머릿결을 정리한 뒤 목초지를 가로질러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수레의 요란한 움직임에 놀라 덤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새들이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재잘거림과 지저귐이 풀밭을 따라 걷는 그의 뒤를 노래가락처럼 뒤따랐다. "또 판돈을 나눠걸고 있나보네."

  "당연히 그러겠지." 개러헬이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도 걸어보긴 하겠다잖아. 우리한테도 기회가 주어진 거야, 이세야. 우리가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어."

  일부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내 말하진 않았다. 동생의 눈에서 반짝이는 흥분과 전율을 굳이 꺼트리고 싶진 않았다. 희망찬 태도는 개러헬의 가장 훌륭한 재능이었고, 자유동맹인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절실한 것 중 하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라벨 스무 대라고?" 그가 말했다. "망치질을 슬슬 시작해야겠네."

 

* * *

 

  공교롭게도, 개러헬은 망치질에 끔찍히도 재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훌륭한 목수에게 요구되는 신중함과 인내심 같은 자질은 그 엘프 궁수의 대척점에 있는 요소였다. 아마디스가 투덜대며 말하길, 개러헬은 화살로 쏴버리거나, 꼬여내거나, 외설적인 이야기로 꾸며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면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자유동맹 여성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나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이 지적한 대로,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주민들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빠져 있기라도 했다. 대신 그는 자유동맹의 수많은 귀족 친구, 친척들이나 알고 지내는 용병대 대장들, 혹은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이라면 누구에게든 편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종종 개러헬에게 그리폰을 타고 편지를 전하고 오라며 내보내 새벽부터 황혼까지 와이컴 바깥으로 나돌게 했다.

  결국 아마디스가 동생에게 사람들 이름으로 빽빽한 명단과 편지로 가득찬 가방 하나를 안겨주는 모습을 본 이세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개러헬을 전령으로 이용하는 데 짜증 안 내?"

  "당연히 안 내지." 아마디스는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는 검은머리를 찰랑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쟤를 이보다 더 잘 써먹을 방법이 또 있겠어? 쟤는 마법도 쓸 줄 모르고, 톱질이라곤 끔찍하게 못한다는 걸 너도 봤잖아. 괜히 아라벨 만드는 걸 도우라고 뒀다간 분명 그 고기잡이 배를 땅 속으로 묻어버릴 방법을 찾아내고 말걸. 하지만 그 웃기게 생긴 그리폰의 특출나게 빠른 속도로 먼 테다스 구석까지 날아가는 건, 걔가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리고 걔의 매력을 뽐내서 귀족 나으리들과 가차없는 암살자들을 우리에게 동참하게 할 수도 있고. 루비 드레이크의 귀족 대장 아가씨가 서명한 개인 서신을 그리폰에 탄 회색 감시자로부터 전달받는다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큰 특권으로 여겨질지 짐작이 가? 제대로 오래 살아남기만 한다면, 대대손손 손주들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라고. 자기 친구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떵떵거리며 말할거리이기도 하지. 떵떵거리는데 관심이 없는 작자들에게는, 하다못해 우리가 어떤 무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환기시켜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간에, 감히 그 앞에 대고 도움을 거절하기는 매우 힘들 거라는 뜻이야."

  "결국 정치질이라는 거군." 이세야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게 바로 아마디스가 이렇게 개인 책상이 딸린 사무실이며 종이더미 뿐 아니라, 와이컴의 거위깃털이 몽땅 화살 만드는데 징발된 마당에 깃펜까지 제공받은 이유였다. 그 꼿꼿한 실용주의자 세나스테가 아무리 스탁헤이븐의 통치자와 연줄이 있다곤 해도 고작 손님 한 명에게 이 정도로 신경을 쓰는 게 묘하다고 생각은 했지만...결국 이 또한 감시자 사령관의 또 다른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결국 정치질이지." 아마디스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너도 빨리 이 게임에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전쟁이란 건 결국 칼질과 정치질 놀음인 거고, 우리는 이겨야 하니까."

  "나는 마법 쪽이 나아서." 이세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인간 여자가 편지에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두고 나왔다.

  적어도 그 편지들은 효과가 있었다. 개러헬은 매일 같이 더 많은 지원 약속과 원조하겠다는 서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엘 공작은 와이컴의 난민들이 스탁헤이븐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거란 전언을 보내왔고, 아마디스가 자신의 사촌이 하는 약속은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긴 했지만 충분히 승리감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그냥 적어도, 이 사람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기만 한다면, 그 승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고기잡이 배와 수레바퀴를 가져다가 아라벨을 만들어댔지만 - 혹은 당나귀 수레나 썰매 같은 것까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가져다 썼다 - 대재앙이 닥치기 전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서른 대나 만들면 다행일 것 같았다.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닥쳤을 때, 도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이 첫 번째 무리를 데리고 와이컴을 탈출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마치 무언가에라도 홀린 것처럼 움직였고, 유리 사과 주점에서 술에 취한 이세야가 제안을 던진 후로 딱 일주일 뒤, 그들은 와이컴에서의 첫 번째 탈주를 시도할 수 있을만큼 아라벨을 만들어냈다.

  열여덟 대의 아라벨은 두 줄로 연결돼 있었다.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던 건 열아홉 대였으나, 한 대는 이세야가 내구도를 확인한다고 목초지에 거칠게 착륙시키는 과정에서 망가지고 말았다.

  250여 명의 주민들이 그 안에 혼잡하게 올라타 있었고, 이들을 이끌고 자유동맹을 빠르게 가로지른다는 건 너무나도 허황되게 느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어린 아이들과 굳센 얼굴로 그들을 꼭 끌어안은 부모들 사이로 얇은 나무 상자 안에 식량, 옷, 귀중품 따위가 쌓여있었다. 잡동사니를 실을만한 자리가 부족했기에 사람들은 가진 옷 중에 가장 귀한 것들을 걸쳐입었고, 축제마냥 화려한 모양새가 이 모든 상황에 기괴함을 더했다. 배 옆면에 달린 엉성한 나무 닭장 안에 갇힌 닭들과 오리들이 불만에 차 요동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꽥꽥거리는 쇳소리와 이따금 흩날리는 깃털 역시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일조했다.

  행렬의 선두에 자리잡은 건 굽은꼬리와 레바스였고, 둘은 각각 아홉 대의 아라벨과 연결돼 있었다.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그리폰들에 맞춰 새로운 안장을 고안해냈고, 가죽끈 옆으로 매달린 빛나는 은제 메달이 안개낀 여명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아무리 그리폰이 강력한 생물이라 해도 이만한 무게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 실제로 마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이 있어도 그렇지 않을까, 이세야는 쓸데없는 불안감을 단호하게 옆으로 밀어냈다. 로브 소맷자락을 손목과 팔꿈치 부근에서 동여맨 그는 머리칼을 고정한 머리띠도 단단히 묶은 뒤 나란히 앞장 선 다른 감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를 옆에 둔 개러헬이 자리에서 자신의 그리폰을 다독이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굽은꼬리를 조종하긴 할 테지만 아라벨들을 띄우는 건 마법사의 일이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면 승객 한 명을 더 태울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그 일을 자처했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그는 다른 아라벨 쪽으로 외쳤다. "준비 됐어?"

  "준비 됐어!" 개러헬이 대답했다. 이세야에 비해 훨씬 쾌활한 태도였다.

  "준비 됐소." 다른 마법사의 대답은 좀 더 엄숙하게 들렸다.

  이세야는 왼쪽 손목에 레바스의 고삐를 감은 뒤 두 손으로 스태프를 단단히 붙들었다. 영계로 자신을 연결하자 영적인 에너지가 스태프를 매개 삼아 흘러들며 그를 채우는 게 느껴졌다. 생각의 가장자리로 영과 악마들의 속삭임이 영혼을 울리는 마법 사이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는 그 속삭임을 떨쳐내고 마법을 그러모았다. 지난 며칠 간 수차례 연습한대로, 이세야는 넓은 바닥을 가진 부드러운 고깔 모양을 그려냈다. 그것은 구름 같은 방석 형태로 펼쳐진 모양이었다. 그 무형의 평평한 바닥은 전체 대열을 받쳐줄 수 있을만큼 넓었고 주문의 위력을 넓게 퍼뜨려서 아라벨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보호했다. 안정적으로 주문을 형성하자, 다소 버겁긴 해도 주문을 따라 흘러드는 힘의 파동을 유지하는 건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바스를 불렀다. "날아." 그리폰은 이세야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무게를 이끌고 갈 수 있게 해줄 거란 신뢰를 품은 채 검은 날개를 피며 박차올랐고, 엘프는 고깔 형태의 마법장을 땅으로 향해 보냈다.

  아라벨들이 그리폰 뒤에서 요동치며 나무와 밧줄, 금속으로 된 거대한 애벌레마냥 허공을 향해 꿈틀댔다. 이세야의 뒤로 헉 하는 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뒤 굽은꼬리가 옆으로 나란히 두 번째 행렬을 이끌고 뒤따랐다. 아라벨끼리 연결한 밧줄과 사슬이 위험하게 삐걱댔지만 마법사들의 부유 마법이그것들을 단단히 붙들어 놨다.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들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더 이상 무게에 시달리지 않게 된 그리폰들은 안장을 단 채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부유 중인 고기잡이 배들과 잔뜩 흥분하고 겁에 질린 승객들을 이끌었다.

  그리폰들은 이렇게 낮게 비행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건 이세야도 마찬가지였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뒤로 납작 젖혀진 레바스의 귀와 뿜어져 나오는 콧김은 그 그리폰이 나무 꼭대기를 스쳐가는 느낌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이세야는 녀석이 자유롭게 높이 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아라벨을 띄우는 마력장의 고깔을 그보다 높이 떠올릴 수 없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더 높이 올라가면 마법은 흩어지고 말 테고, 그들은 전부 추락하고 말 것이다.

  "날 믿어." 그는 그리폰에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레바스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털에 덮인 한쪽 귀가 퍼드득 떨렸지만, 그저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그리폰은 고도를 유지한 채 곧게 나아가다가 높은 나무가 가로막으면 아라벨을 끌고 뛰어넘는 대신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동맹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바위지대와 황량한 숲 위를, 풀을 뜯는 양떼와 소떼가 수성을 위해 도축당하는 바람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목초지 위를 지나쳤다. 개울이나 강줄기는 이세야가 미처 눈에 담기도 전에 은빛 반짝임만 남기고 스쳐갔다.

  레바스는 평소처럼 빠르게 날고 있진 않았다. 굳이 치자면 그 그리폰은 긴 여정을 위해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땅에서 가깝게 날고 있자니 풍경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 시간이 지나자, 와이컴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 대열이 근처로 흐르는 미난터 강 지류 위를 지나자, 이세야의 고깔 마력장 아래로 물결이 움푹 파여 흘렀다. 흐르는 물 위로 주문을 유지하는 건 다소 까다로웠기에 - 예측불허의 소용돌이 물결 탓이었다 - 그 엘프는 빠르게 물줄기를 가로질러 그리폰을 이끌었고 레바스가 강둑을 따라 날도록 했다.

  북쪽으로, 안티바 시티가 있었을, 혹은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재앙의 검은 구름장막이 지평선 위로 그을린 연기처럼 얼룩져 있었다. 고맙게도, 대부분 나무에 가려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는 구역을 지날 때면 이세야는 금방 끓어오를 듯한 구름에 덮인 보랏빛 하늘과 구름 사이사이 소리없이 내리치는 번개가 선사하는 고통의 현신에 흘끗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새벽의 여명도, 빗줄기도 없었다. 지평선을 따라 폭풍의 그림자만이 드러워져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곳에 안스버그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상 20피트 높이에서 보이는 거라곤 보통 나무나 언덕 뿐이었다. 그들은 비쩍 마른 개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공허한 희망을 품고 짖어대는 텅빈 농장을 지나기도 했고, 비어있지 않은 어느 곳을 지날 때엔 거주민들이 나무창 사이로 던지는 의심스런 눈빛을 받기도 했다.

  오전부터 정오까지 차츰 떠오른 해는 거침없이 밤을 향해 저물어갔다. 아라벨은 딱 두 번 멈춰서 그리폰과 마법사들에게 짧은 휴식을 제공했고 승객들에게 잠시나마 요기를 하며 뻣뻣해진 팔다리를 풀어줄 시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두려움과 급박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마저도 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고, 이동이 다시 시작되면 그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스탁헤이븐의 성벽 뒤로 안전하게 숨길 원했다.

  그리고 붉은 황혼이 찾아들 무렵, 그 성벽이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굴곡진 산줄기를 따라 원형으로 둘러싼 회색 돌벽 위로 석양이 반짝임을 더했다. 북쪽으로는 미난터 강이 도시의 수로를 향해 몰아치는 소리가 바다의 거센 포효처럼 들렸다. 도시 자체의 모습은 녹색 언덕 위 넓은 대로에 둘러싸인 대리석 궁전의 영광스런 위용만이 아주 잠깐 시야를 스쳤으나, 무리가 다가감에 따라 성벽 너머로 금세 가려졌다.

  성벽 위 감시탑 쪽으로 걸린 깃발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성배를 둘러싼 세 마리의 검은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이세야가 보기엔 물고기 같았다. 어쨌든 그 뾰족뾰족한 가시와 소용돌이 무늬 속에서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체가 뭐든 간에, 그것은 사슬갑옷 위에 붉은 겉옷을 두르고 열을 이뤄 선 병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병사들 중 한 사람, 겉옷 아래 판금 갑옷을 걸치고 가슴팍에 금줄을 매단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가 닿을만한 거리가 되자 장갑 낀 손을 들어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스탁헤이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개러헬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피곤할 게 분명한데도 쾌활한 어조로 마주 소리쳤다. 엘프 감시자는 굽은꼬리를 이끌고 땅으로 내려섰고, 이세야와 다른 마법사는 내려앉는 그리폰들을 따라 아라벨을 하강시켰다. 안전하게 착륙하는데엔 5분 정도 소요됐다. 이 공중부양 아라벨이 제대로 먹힌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손상 없이 보존하는 건 매우 중요했다.

  다행히 아라벨은 부드럽게 미난터 강변을 따라 착지했고, 나무 삐걱대는 소리와 옆에 매달린 닭장에서 들려온 꽥꽥소리만이 잠시 이어졌다. 와이컴 난민들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비행 끝에 중심을 찾느라 다들 허둥거리는 가운데, 스탁헤이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음식과 물, 와인이 들려 있었다. "와이컴의 영웅들 만세!" 한 사람이 그렇게 외쳤고, 이내 군중들이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시자들! 회색 감시자들이여! 와이컴의 영웅들을 찬양하라!"

  "저 기세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이세야는 한숨 속에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은 어둠의 피조물로부터 거둔 승리로 스탁헤이븐도 흥이 나겠지만 - 고작해야 적들 손에서 와이컴 주민 한 줌을 구해낸 것에 불과한 승리일지라도 - 그들의 열기가 과연 이미 빠듯하게 들어 찬 도시에 수백의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유지될지 궁금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정말로?" 둥근 얼굴의 나이 든 여자가 불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이세야에게 질문했다. 푸른 공작새와 진홍빛 장미가 그려진 현란한 무늬의 비단 스카프가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싶었고, 그것은 직접 만들어 입은 것 같은 수수한 드레스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경비대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수성을 앞두고 군식구가 느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전쟁을 앞두고 추가 병력이라면 원할 테죠." 엘프는 대답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은 그 정도였다. 힘든 시기에 일손은 누구든 환영일 테니.

  여자는 스카프를 가슴팍에서 고정하고 있는 목각 브로치를 꼭 쥐었다. "나는 노인이지 군인이 아닌 걸요. 싸움 같은 건 할 수 없다고요."

  "이건 대재앙입니다." 이세야가 말했다. 냉혹한 날카로움이 그 목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그 둥글둥글한 여자가 그 대답에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피곤했다. "당신도 싸울 수 있고, 그래야 할 거예요. 이 아라벨에 올라탄 순간 당신은 결정을 내린 겁니다. 우리는 와이컴에서 모두를 데리고 나올 순 없었습니다. 전부를 구하기엔 배도 부족했고 그리폰도, 마법사도 부족했으니까요.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덕에 누군가는 죽겠죠. 그러니 당신은 싸울 겁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 노력과 더 용기있었을 누군가의 자리를 낭비해버린 당신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여자의 입이 충격으로 딱 벌어졌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웅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아라벨에서 짐을 풀고 있는 주민들 사이로 달려갔다. 잠시 뒤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굽은꼬리의 안장에서 마지막 고정끈을 풀어낸 뒤, 끝났다는 신호로 그리폰의 옆구리를 두들겨준 개러헬이 이세야에게 다가왔다. "그것 참...사람들을 복돋는 참신한 방법인데."

  "사람들을 복돋는 건 네가 해." 이세야는 동생에게 으르렁거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쟁 영웅은 너잖아.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 건 내가 하겠지만, 그 뒤는 내 알 바 아니야."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닌걸." 개러헬은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자고. 누나도 피곤한 거 알아. 자, 오늘 밤은 바엘 공작의 환대를 즐겨보자고. 오늘 뿐인 거 누나도 알잖아."

  "내일은 다시 와이컴으로 가야겠지, 나도 알아." 이세야는 지친 태도로 대답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와이컴 대문에 닥칠 때까지 최대한 많이 오갈 계획이었다. 하루 종일 대열을 이끌고 지지하며 이동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보기 전에는 제법 괜찮은 계획처럼 보였었다.

  "아냐. 카바로스랑 세 명의 스탁헤이븐 감시자들이 와이컴으로 아라벨을 이끌고 돌아갈 거야. 그 다음엔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그 자리를 대신할 거고, 다시 팀을 나눠서 아라벨을 가능한한 많이 오가게 하겠지. 하지만 누나랑 나는 와이컴으로 돌아가지도, 스탁헤이븐에 머물지도 않을 거야. 잊었나본데, 우린 안더펠스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고. 그러니 와인이나 실컷 마시고 흥에 취하라고. 오늘 밤만은 영웅으로서 즐기란 말이야. 내일 아침이면 다시 회색 감시자가 돼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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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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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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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자네들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예." 이세야는 지친 얼굴로 천 번쯤 반복한 것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우리는 왕족들을 잃었습니다. 악마의 군주가 허공에서 그들을 날려버렸습니다."

  그 역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화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모두들 분노에 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티바 왕족 전부를 잃고, 감시자 사령관 투랍마저 잃은 것은 회색 감시자의 전력과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예정대로 와이컴에 집결했다. 오스티버, 페나달 및 그들의 담당을 실은 배는 바다 너머에 머물렀지만 그리폰 기수들이 그들과 두 번의 접촉을 가졌고, 현재까지는 안전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안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확실했다. 대재앙은 바람 맞은 들불처럼 안티바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직 마땅한 저항군을 제대로 형성한 나라도 없었고, 자유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뿔뿔이 분열된 상태였다. 각각의 도시 국가는 그들의 생존보다도 독립된 자치권을 붙들고 있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둠의 피조물이 문 앞에 당도한 마당에, 그들은 안티바가 그러했듯 현실부정에 빠져 있었다.

  와이컴의 거리를 장악한 분위기는 여전히 불신과 확신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매일 시민들이 조잡하게 만든 무기로 급조된 민병대를 꾸려 훈련하는 모습이나, 흙 또는 갓 베어낸 나무로 보루를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동이 트기 무섭게 작업에 나서 깜박이는 횃불 빛에 의지해 늦은 밤까지 일했으나, 감시자들의 눈에 그 모든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해 보였다. 그들의 성벽은 어둠의 피조물에 대비해 지어진 게 아니었고, 그들의 가상한 용기에 비해 기술이나 숫자는 턱없이 뒤떨어졌다. 그들이 진짜로 해야하는 건, 이세야는 생각했다. 바닷가 섬쪽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뒤 병사들을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보내는 거지.

  하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와이컴은 어촌이었다. 그들의 배는 해안 정도만 오가게 만들어졌다. 넓은 바다의 깊은 수심이나 풍랑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 안되는 무역선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설사 자유동맹인들이 그들의 조각배에 도박을 건다 해도, 모두를 안전하게 나를만한 숫자는 되지 못했다.

  육로를 통해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향하는 것도 그리 나을 바 없어 보였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안티바 남쪽을 점령하는 바람에 와이컴 시민들은 어느 쪽이든 대도시로 가려면 대재앙을 똑바로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빠른 말을 탄다면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피해 그 여정을 이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 걸어가거나 기껏해야 노새 또는 소가 모는 수레를 타는 게 전부일 사람들이라면 느려터진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겐 버티고 맞서 싸우는 것 외엔 아무런 선택지도 남지 않았고, 승리할 가능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스티버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보다 이 도시가 무너지는 게 빠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세나스테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감시자 사령관은 누가 봐도 패배에 익숙치 않아 보였다. 20년 간의 회색 감시자 생활로 다져진 오만한 금발의 전사에게선 앞을 가로막는 무엇이든 순수한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은 엄격함이 묻어났고 - 여지껏 그런 방식으로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듯 보였다.

  하지만 대재앙은 그에게 달갑지 않은 실패의 맛을 느끼게 하고는, 그 위에 얼마쯤 더 얹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안티바 왕족들을 잃은 것이나 두 명의 훌륭한 회색 감시자와 그들의 그리폰을 잃은 것보다도 세나스테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투랍과 덴디도 빠져나오지 못한 곳에서 자네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그가 물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와이컴의 민병대 대장의 사무실을 사용 중이었다. 지난 임무에서 모은 깃발과 훈장들이 가장자리가 습기로 살짝 말린 못으로 고정된 낡은 지도들과 나란히 벽을 메우고 있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세나스테의 시선은 지도 위에 고정돼 있었지만 이세야는 감시자 사령관이 집중해서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제 능력 덕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요." 엘프는 대답했다.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를 꾀어내 자신들을 쫓게 했습니다. 저는 -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그리폰, 레바스가 - 약간 주의를 돌려놓긴 했지만 그 둘이 거의 다 했다고 봐야죠. 악마의 군주는 그...원래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둠의 에너지로 된 폭풍 같은 걸로, 저희를 허공에서 끌어내려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마법도 그런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영계와 전혀 이어져 있지 않았어요. 저희 전부 죽을 뻔 했는데, 개러헬의 동행이었던 마법사 칼린이,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발 같은 마법을 사용해서 저희를 풀어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 날의 주역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세나스테는 젊은 엘프에게 몸을 돌렸다. 사무실 높은 곳에 달린 창을 통해 비쳐든 햇살에 백색에 가까운 그의 짧은 머리가 빛났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쳐지며 엄격한 자세가 약간 풀어졌다. "악마의 군주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건 '아무 것도 안 한 게' 아니네. 자네의 첫 전투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상황을 벗어났군. 스탁헤이븐의 아마디스 바엘과 칼린 데발리스테는 귀중한 동맹이네. 자네의 개입 덕에 동행들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던 세 명의 회색 감시자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감시자 사령관은 결정을 숙고하는 것마냥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확답하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나와 함께 스탁헤이븐으로 돌아갈 걸세. 자네들 모두. 다만 자네와 남동생은, 도시의 방어를 구축한 뒤 안더펠스로 향해야 하네."

  "안더펠스로요?" 이세야는 멍하니 되물었다.

  "와이컴은 버틸 수 없네. 방어시설도 너무 열악하고 대재앙이 이미 너무 가까워졌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군대를 일으킨다 한들 - 불가능하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들이 해안을 따라 쏟아지기 전에 도착하도록 하려면 지칠 때까지 행군시켜야 할 것이고, 지친 병사는 죽은 병사나 다름없지." 세나스테는 가까운 지도 위로 굳은살 박힌 손을 쓸었다. "대재앙은 리베인도 덮칠 거야. 그 반도는 이미 본토와 너무 단절돼 있어.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쪽으로 향한다면 도저히 지켜낼 방법이 없겠지. 최대한 배와 그리폰 기수들을 보내서 구할만큼 구하려 시도는 해보겠지만, 그 나라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 없네. 하지만 스탁헤이븐과 커크월은, 어떻게 버텨낼 지지선을 만들 수 있을 수도 있어. 대재앙을 막아낼 시간이나, 군대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그의 연한색 푸른눈은 매처럼 냉정하게 이세야를 마주 봤다. "뜻을 함께 할 동맹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올레이나 티빈터 제국이 더 강력할 텐데." 이세야가 말했다. 반박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었다. "왜 안더펠스인 겁니까?"

  "그렇지."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동의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만하기도 하고. 자네나 개러헬은 지위도 고귀한 태생도 지니고 있지 않네. 심지어 엘프기까지 하지. 둘 중 어느 제국에 보내든 간에 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안더펠스에서는, 개인의 성취야말로 한낱 이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악마의 군주와 맞붙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네. 그러니 자네들이 가야하는 거고. 그들을 모으는 건 결코 쉽지도, 빠르지도 않을 거야. 안더펠스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대부분 작은 마을이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어. 도시라고 부를 만한 규모는 거의 찾을 수 없고.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데다가 대지는 그리 살만한 환경이 못 되지. 그리폰 기수만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유일한 수단이야."

  "그리고 제가 그 그리폰 기수가 돼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세야가 물었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 안장에 맞는 굳은살이 박히지조차 않은 신입이었다. 회색 감시자용 망토를 두르는 느낌 역시 어색하게 느껴졌고. 안더펠스의 주민들을 끌어내 어둠의 피조물과 맞서 싸우라고 할 그런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나스테는 매우 진지했다. "그들 중 하나가 되라는 거지. 그렇네. 자네와 남동생, 그리고 아마 다른 이들 중에서라면 칼린 정도일까. 그들은 분명 자네의 영웅적인 면모에 모여들 걸세."

  "그렇지 않는다면요?"

  감시자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음벽 같던 태도가 풀어졌고, 그는 벽에 걸린 지도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렇게 될 거야. 자네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세야는 그 말이 나가라는 신호임을 명백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무력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바깥에서는 파란 하늘 위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리본 같은 하얀 구름을 두른 눈부신 장관에는 바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대재앙에 따라붙는 끝없는 폭풍은 시야 끄트머리에서 겨우 보랏빛 멍처럼 흔적을 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만큼은 묵직하게 마을을 뒤덮었다. 수십개의 요리용 화덕에서 나는 연기 사이에는 끓는 역청냄새가 배어 있었다. 와이컴 사람들은 가축이란 가축은 모두 도축해서 염장하거나 훈제하여 요성을 대비했다. 줄지은 소와 염소 고기 옆에는 생선 꼬치가 나란히 열을 이뤘다. 해가 진 지 오래였으나 사람들은 준비에 여념 없었고, 방어벽 건설 중인 인부들을 위해 밝힌 불 위로 고기를 굽느라 바빠 보였다.

  참으로 용기있고, 가망 없는 노력이었다. 이세야는 도저히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도시의 하나뿐인 시장구역으로 향했다. 와이컴이 가진 네 개의 성문 중, 쌍두마차가 드나들만큼 큰 문은 하나 뿐이었다. 그 문 주위로 자그마한 시장 구역이 형성돼 있었고, 이세야가 향한 곳도 그곳이었다. 작은 술집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주민들로 가득 차 있을 테고, 이세야는 지금 같은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선술집은 문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유리 사과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았다.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터질 듯 가득했지만, 이세야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회색 감시자 문장을 보자마자 다시 마시던 음료와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엘프들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만 확실해지면 아무 문제도 없지, 이세야는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감시자든 하인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예상 범위에 있는 한 그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그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마 단순히 그가 감시자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유동맹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그들 종족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가 그들을 굳이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달갑지 않은 양심의 가책과 맞서 싸우며, 이세야는 바 쪽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터주며 회색 감시자에 대한 찬사나, 와이컴을 구하러 와줘서 고맙단 감사 따위를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와인으로."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별로 남은 게 없는 데다가, 남은 것들이라야 도저히 팔만한 품질이 못 됩니다. 감시자 분께 그런 걸 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남자는 자부심과 미안함이 섞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는 큰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제외하면 빼빼 마른 체구와 볕에 그을린 붉은 피부, 홍당무 같은 주황빛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얼굴과 머리색 중 어느 쪽이 더 밝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희도 도리라는 게 있어서요."

  "그럼 가진 건 뭔가?" 이세야가 물었다.

  "취향에 맞으신다면야, 드워프제 에일이 있습죠. 블랙워터 럼도 있고요. 겨울 사과주도 있지만 이것도 거의 남은 물량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시는 꼴을 봐서는 며칠 안에 침이랑 곰팡내나는 신발끈으로 주조한 맥주를 팔게 생겼습니다."

  "사과주를 주게." 이세야가 말했다. 주인은 능숙하게 잔을 채웠고, 돈을 내려는 그를 만류했다.

  주점 저 편에서, 시끌벅적한 사이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야!"

  그는 내부를 둘러봤다. 사람들 사이에서 개러헬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용케 차지한 것이든, 일부러 대접받은 것이든 간에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이야와 타이야도 함께였고, 드워프제 에일을 삼키느라 코를 찡그린 아마디스 또한 눈에 들어왔다. 암청색 후드로 얼굴을 가린 칼린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맞붙을 때 잃어버린 깃털달린 후드를 다시 장만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이세야의 눈에 그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마법사는 머리 위로 덜렁거리는 깃털모자가 없으니 좀 더 품위있어 보였다.

  이세야는 사람들을 뚫고 사과주 잔을 품에 안은 채 그들에게 향했다. "온 지 얼마나 됐어?"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께서 명령을 하달한 후부터 쭉." 개러헬은 과장된 몸짓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흔들며 인사했다. 냄새를 보아하니 동생 역시 사과주를 마시고 있는 듯 했고, 온 지 꽤 된 것 같았다. "훌륭하게 취할만큼은 있었지. 이리 와 앉아."

  "나도 그래야겠네." 이세야는 끄덕였다. 타이야는 자매와 같은 의자로 옮겨 앉아 다가오는 엘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세나스테랑 얘기했어?"

  개러헬은 어찌할 도리가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했지. 명령에 대해서야 굳이 말할 것도 없고. 누나는?"

  "너랑 똑같아. 스탁헤이븐, 그리고 안더펠스."

  개러헬은 자신의 사과주를 비운 뒤 두 손가락으로 빈 잔을 밀어서 이미 쌓여있는 빈 잔의 숲에 더했다. "뭐, 적어도 우리 모두 같이 다닐 수는 있겠네."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마디스가 끼어 들었다.

  개러헬은 금색 눈썹을 슬쩍 들어보였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스탁헤이븐에 있는 게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던데."

  "감시자 사령관께선 병에 걸린 오우거와 달콤하고 끈적한 사랑을 나눌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디스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검고 긴 속눈썹을 살랑이며 대답했다. "나한테 명령을 내릴 위치는 아니지. 스탁헤이븐에서 내 도움을 받길 원한다면, 그 여자는 미소 뒤에 이를 악물 지언정 내가 원하는대로 가게 내버려 둬야할 거야."

  "왜 그분이 스탁헤이븐에서 당신 도움을 받으려 한다는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당신은 까마귀단 소속도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아마디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림자 진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는 칼린을 가리켰다. "안티바 까마귀단은 저 사람이지. 하늘에서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고. 나는 페드라스 바엘의 둘째 딸이고, 스탁헤이븐 공작의 사촌이야."

  "그리고 루비 드레이크의 수장이기도 하지." 개러헬이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쪽일 거고."

  이세야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 역시 루비 드레이크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었고, 그 용병단의 새로운 수장이 자유동맹 출신의 젊은 귀족 여성이란 소문도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의 군대 규모는 천여 명의 보병과 삼백여 마리의 군마, 이백여 명의 궁수, 스무 명 가량의 훈련된 전투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도...그리고 그들의 막강함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는 챈트리의 템플러들이 그 이단마법사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드레이크를 우방으로 삼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만한 병력이라면 대재앙에 맞서 싸우는데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었다 - 유일한 대가라곤 그들 자신의 생존뿐인 전투에 그 용병들이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안티바 까마귀단이라고?" 타이야가 뒤늦게 칼린을 향해 눈을 깜박이며 질문했따.

  "그래." 그 마법사는 침착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드 아래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탁한 목소리의 짧은 대답이 그들을 침묵에 빠트렸다.

  "그렇구나." 타이야는 눈을 한 번 깜박이곤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댄 채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갈색 머리가 까끌까끌하게 두피를 덮고 있었다. "거기에 마법사도 있는 줄은 몰랐네. 대부분은 보통 그...뭐냐...있잖아. 암살자 같은 거인 줄 알았는데. 단도 같은 거 쓰고, 그러니까, 주문 말고 말이야. 당신은 그럼 무슨 일을 해?"

  "필요한 건 뭐든지." 칼린이 대답했다. 거친 목소리엔 씁쓸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이세야는 사과주를 비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은 탓에 그 탄산 음료는 곧장 머리를 울렸다. "필요한 건 뭐든지, 라고? 그럼 이 사람들을 와이컴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어?"

  후드 아래 깊은 곳에서 칼린의 두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잖나."

  타이야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 봤고, 옆에서 쌍둥이인 카이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안 될 건 뭐야? 마법으로 그렇게는 못해? 그 뭐냐...통로나, 그런 걸로?"

  "안 된다." 칼린의 대답은 건조하고 단호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이세야는 미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공연히 타이야를 바보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민망했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을 여기서 저기로 뿅 옮길 수는 없는 거거든."

  "다른 걸로 변신시키는 건?" 개러헬이 빈 잔 무더기 사이로 거나하게 취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 눈에는 익숙한, 성가신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생쥐나, 아니면...바퀴벌레 같은 거? 엄청 작은 걸로, 우리가 마을 전체를 함선이나 어선에 싣고 옮길 수 있을 만한 거 말이야."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그냥 애들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내용이야."

  칼린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후드가 젖혀지며 각이 진 그 마법사의 얼굴이 주점에 새어들어온 햇빛에 드러났다. "이야기일 뿐인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능력 밖이긴 하고. 황무지의 마녀들이라면 어떤 종류의 짐승으로든 변신할 수 있겠지. 원치 않는 상대를 변신시킬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하지만 나는 황무지의 마녀가 아니고, 너희들도 아니지."

  짜증 섞인 태도로 의자를 뒤로 젖히는 개러헬의 몸짓에 나무의자가 주점 벽에 부딪혔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아라벨." 이세야가 중얼거렸다.

  그의 남동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디스는 코웃음 쳤다. "아라벨이라니." 검은 머리의 자유 동맹 여인은 그 말을 따라 읊었다. "지상선박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데일리시들이 쓰는 것 같은? 커다란 수레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건 진짜야." 이세야가 말했다. "그리고 마법이 그것들을 숲 사이로 이끄는 거고. 우리는 사람들을 마법으로 다른 곳에 보내거나 생쥐로 변신시킬 수는 없지만, 마법을 쓰면 - 그리고 약간의 목공질을 곁들인다면 - 그들의 어선을 지상선박으로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제안이 테이블을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과 동료들을 파고드는 걸 지켜봤다. 어째선지,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개러헬은 흥미가 당기는 것 같았고, 아마디스는 회의적인 와중에, 쌍둥이는 그 참신한 발상에 순수하게 신이 나 보였다.

  칼린은 후드를 다시 온전히 눌러썼다. "아라벨에 마법을 걸 줄은 아나?"

  "몰라." 이세야는 인정했다. "나는 데일리시가 아니니까. 그들의 지식 또한 내겐 없지.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으니까, 우리 나름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진짜 아라벨만큼 튼튼하고 그럴싸하게 만들 필요도 없어.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삼켜버리기 전에 그들을 바다 건너나 강가로 옮겨줄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여전히 만만치 않은 목표야." 칼린은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새로운 마법을 고안해내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고는 있나?"

  "일주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최대니까." 그는 일어서며 자신의 빈 잔을 다른 잔 무더기에 더했다. "상황이 닥치면, 회색 감시자도 까마귀단과 같은 규칙을 따르지. 우리는 필요한 건 뭐든지 해. 우린 이걸 일주일 안에 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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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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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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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 용의 시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와이스하웁트에 도착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그들이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발리야는 감시자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아침마다 웅장한 도서관으로 이동해 조사를 이어갔고, 저녁에는 먼지 쌓인 강당에 모여 어둠의 피조물과 싸우는 법에 대해 배웠지만, 정작 회색 감시자가 되는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듣지 못했다. 다른 탑 출신의 탈주 마법사 몇 명이 발리야 및 그 동료들과 같은 이유로 피난처를 찾아 요새를 찾아왔으나 그들 역시 호스버그 출신들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안심되는 일이긴 했다. 다섯 번째 대재앙이 끝난 지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테다스의 역사 전체를 훑어봐도, 새로운 대재앙이 100년 안에 일어난 적은 없었다. 비록 발리야가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사명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곤 해도, 살아생전 대재앙을 볼 일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입장에서 어둠의 피조물의 광기와 오염을 굳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약 회색 감시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평범한 부랑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전우가 아닌 부랑자에 불과한 그들을, 챈트리가 찾으러 온다면 감시자들은 과연 얼마나 열성적으로 보호해줄까?

  그 불안정함이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어느 날 아침,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 그는 캐로넬이 낮의 열기가 찾아들기 전까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작은 뒷뜰로 찾아갔다. 뜰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녹색과 하얀색의 바닥돌이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빛이 바랬음에도 소담하고 단순한 형태의 기하학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의 작은 분수는 물을 뿜으며 청색 그늘 아래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그리 오래 갈 풍경은 아니었다. 안더펠스의 여름은 짧지만 무자비했고, 한낮의 열기는 이 뒷뜰의 축복받은 여유를 금세 불태워버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짧은 몇 시간이라 해도 충분히 축복 같았다.

  발리야가 굳이 가져온 질문을 던져 그 분위기를 깨놓지 않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는 이 평온을 가장한 환상만큼이나 대답이 절실했다.

  "우리는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 거죠?" 그가 물었다.

  캐로넬이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기까진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가 그 질문에 반가웠는지 성가시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읽던 페이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놓고, 그는 금발머리를 뒤로 흔들어 넘긴 뒤 평온하게 질문했다. "날 어떻게 찾았지?"

  발리야 가방에서 접혀있는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그는 그 편지 안에 진한 라일락 향 만큼이나 진한 내용이 들어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리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소년적 욕망을 무모하게 밀어붙이려 한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선 퍽 인상적이었다.

  편지를 건네주며 그는 대답했다. "당신이 오고가는 모습을 신경쓰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 편지를 전해주기로 약속하고 나서 당신의 온 일정표를 얻어냈죠."

  한숨을 내쉬는 금발의 엘프는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받아든 편지를 책표지 사이에 꽂아넣고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라일락향이 그로부터 풍겨왔다. "정말 끈질긴 친구군. 어리기도 하고. 너희 전부 그렇지만."

  "그게 우리가 입단식을 거치지 않고 있는 이유인가요?"

  "그 중 하나라고 해두지. 다른 하나는 너희가 지금 한창 쓸모 있어서기도 하고. 너희들 중 절반 정도가 악마의 군주의 피에 목이 메어 죽어버리기라도 했다간, 그 따분한 옛날 편지나 지도 따위를 내가 직접 들여다봐야 할 텐데 - 얼마나 끔찍한 전망인지." 캐로넬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대체 왜 그렇게 입단식을 거치고 싶은 거야? 내 이기심은 제쳐두고라도,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데. 그 과정에서 죽는 이들도 많고. 지금은 대재앙 중도 아니고, 너희는 이미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잖아. 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발리야는 뒷뜰에 놓인 건너편 벤치에서 자갈 섞인 먼지를 털어낸 뒤 위에 앉았다.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벤치의 감촉은 차갑고 거칠었고, 그 전에 앉았을 수많은 회색 감시자들의 흔적으로 살짝 패여있었다. 그들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건 유령의 발자국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와이스하웁트의 역사가 그의 위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 느낌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역사는 그를 구속할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안전한 건지 모르겠어서 급한 거예요."

  캐로넬의 눈빛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아침 그늘 속에 그 눈이 더 파랗게 보인다고,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대체 누가 너희를 위협하길래?"

  발리야는 유쾌하지 않은 태도로 으쓱해 보였다. "호스버그에서 우릴 위협하던 그치들이죠. 템플러. 챈트리. 이단마법사를 무서워하는 모든 사람들. 얼굴에 데일리시 문양이 없는 걸 보면 당신도 나처럼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 아녜요. 그렇다면 우리를 자신들과 같은 족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알겠죠."

  연장자 엘프의 미소는 조금 슬퍼보였다. 그들 종족 중 동족들과 함께 데일즈의 위태롭고, 그만큼 소중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데일리시 엘프들의 얼굴에 새겨진 야성적이고 독특한 문신은 그들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표식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구역에 사는 엘프들에겐 주어질 수 없는 기회기도 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잊혀지길 바라며 얼굴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다. 보호구역 엘프에게 주목을 끈다는 건 결코 안전한 일도, 현명한 일도 아니었으니. "알지." 잠시 말을 멈춘 캐로넬이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너는 감시자가 되고 싶어?"

  발리야는 초조하게 자신의 해진 소맷단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손가락 하나만큼 올을 풀어낸 상태였다. 그는 풀어진 올을 돌돌 말아 회색 실뭉치로 만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도전하듯이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당신은요?"

  "나도 몰라."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책을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빼내고 책을 완전히 덮어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그 땐 상황이 좀 달랐지. 완전 다른 세상이었어. 퍼렐든은 대재앙의 초기 단계에 있었거든."

  분수로 옮겨간 그의 시선은 퐁퐁 솟아나는 물줄기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무덤덤했다. "내가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란 추측은 맞았어. 그리고 대재앙의 그림자가 온 나라로 스며들고 있는 시점의 퍼렐든 보호구역이라면, 그리 좋은 거주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어. 음식은 부족했고. 케일런 왕이 오스트가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폭도들이 보호구역을 덮쳤어.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 일도 아니었지. 폭도들은 우리 부모님 가게를 불태웠어. 그분들은 구두장이였어. 소박했지만, 성실하게 장사하셨지. 우리가 가진 거라곤 그것 뿐이었어. 내가 회색 감시자가 된 건 세상을 대재앙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도,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 굳이 원한 게 있다면, 우리 가족들을 불태우려 했던 그 솀렌들이 똑같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었지. 가능하기만 했다면, 그놈들을 하나하나 악마의 군주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던진 뒤, 그렇게 해낸 자신을 행운아라 여겼을 거야."

  캐로넬의 목소리에 분노라곤 담겨있지 않았고, 이야기하는 그의 어조는 간단한 레시피와 재료를 읊는 것마냥 단조롭고 침착했다. 그 온화함 속에 감춰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던 발리야의 마음 깊은 곳이 울려왔다.

  "어쨌든 당신은 입단식을 거치기로 결정한 거잖아요." 그가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아,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어." 캐로넬은 벤치 옆에 검집 째 풀어서 기대놓은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손길은 자루 끝에 새겨진 그리폰문양 위에 머물렀다. "난 아직 여기 이렇게 살아있고, 세상도 멀쩡하게 남아있는걸. 대재앙은 내 희생을 요구하진 않더라고. 게다가 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젠록 몇 마리 말고는 별다른 전투조차 치르지 않았다고."

 서늘한 푸른 눈은 발리야에게 고정돼 있었고, 그리폰 문양 위에 머물던 엘프의 손길이 미끄러졌다. "내가 상처 하나 없이 대재앙에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20년 안에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날 끝장낼 거야. 운이 좋으면 30년 정도일 거고. 그렇지 않다면 훨씬 짧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내가 선택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 - 너희가 아직도 젋고, 당장 감시자가 돼야 할 급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내게도 그렇게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으면 해서야."

  "템플러들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리야가 물었다. 풀려난 올은 마침내 툭 끊어져 손가락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는 휙 던진 실뭉치가 모래색 돌바닥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당신들은 우리가 감시자가 아니어도 보호해줄까요? 정말로?"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캐로넬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미소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 미소는 조금 흐려졌지만. "그래. 너희는 여기서 다른 모든 사람들만큼이나 안전해. 그러기 위해 굳이 입단식을 거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다른 질문에 대해서라면, 글쎄, 수석 감시자 본인조차도 모르지 않을까. 그는 아마 챈트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뭐라고 하는지 기다려 보겠지. 그리고 챈트리와 템플러 사이의, 혹은 템플러 집단 내부의 균열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 들 거고. 또 마법사 반란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기다려 볼 거야. 그러고 나서야, 수석 감시자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거야. 그는 신중한 사람이거든."

  "그보다는 겁쟁이에 가깝겠죠." 발리야는 씁쓸하게 말했다.

  캐로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 문제는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거나 아예 손을 떼야 하는 놀이판인데, 우리 수석 감시자 분은 도저히 판에서 손을 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럴 바에야 그렇게 신중한 편이 낫지." 그는 일어서며 책과 검을 집어들었다. "충분히 빈둥댄 것 같군.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네겐 도서관에서 해야 할 임무가 있을 테지. 살아있어야 끝마칠 수 있는 임무 말이야."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템플러들이 나타났다.

  무리가 피워올린 먼지가 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다다랐다. 감시자들이 그들을 포착한 건 정오 무렵이었고, 오후 내내 이뤄진 부러진 이빨까지의 여정을 쭉 관찰할 수 있었다. 안더펠스를 가로지르는 붉은빛 먼지구름 사이로 무기에 반사된 빛이 간간이 새어나왔지만, 탑에 정찰용 망원경이 없었다면 와이스하웁트의 누구도 그들이 템플러라는 걸 알지 못했을 터였다.

  수가 많진 않았다.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다섯 명의 템플러가 한 무리의 당나귀를 이끌고 수레만한 무게의 강철을 두른 채 험난한 지형을 따라 묵묵히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발리야는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과 함께 요새의 궁수용 들창 사이로 그들을 관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이 치미는 걸 느꼈다. 망원경이 없어 먼지 사이로 템플러 각각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굳이 보고싶은 건 아니었다. 혹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는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편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안더펠스를 통과하는 그 여정이 휴대용 화덕 안에 몸을 욱여넣고 있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고난스러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 템플러들을 향해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동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지만 발리야는 궁수용 들창 옆에 몇 시간을 머무르며 템플러들이 황량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관찰했다. 마침내 부러진 이빨의 기저부에 도착한 그들이 와이스하웁트 정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을 땐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는 이세야의 일기장을 건성으로 넘겨가며 시간을 때우려 했으나 좀처럼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눈앞의 잉크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는 안정감을 찾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를 움켜쥐는 일이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잦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내,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와이스하웁트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대는 대화소리가 귀에 와닿았다. 질문, 대답, 특별한 말은 없었다.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템플러 대장이겠지, 발리야는 생각했다. 호기심과 공포가 반반 섞인 상태로, 그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정문으로 향했다.

  부러진 이빨 쪽으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그 템플러들을 붉게 물들인 건 석양이 아니었다. 갑옷 위를 두텁게 뒤덮은 흙먼지가 땀에 젖은 피부 위로 말라붙어 있었다. 지친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먼지투성이의 당나귀는 붉은 털의 품종마처럼 보여다.

  워낙 지쳐 있어 그다지 위압적인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발리야는 홀의 그림자 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템플러에 대한 공포심은 너무나도 뼛속 깊이 배어있었다. 그는 적대감과 경계 속에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고는 그 흉갑에 새겨진 타오르는 검 문양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과 템플러들 사이를 가리며 반원형으로 마주 선 회색 감시자들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쪽의 동지들로부터 소식은?" 술웨가 묻고 있었다.

  "없소." 대장 템플러가 대답했다. 앞서 들었던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땀에 젖은 흙먼지가 콧수염을 덮고 있어 원래 색을 구분할 수 없었고, 발리야의 방향에선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호스버그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의 상급 템플러라면 전부 알고 있었고, 저 자는 기억에 없는 자였다. 게다가 그의 억양은 어딘가 낯설었다.

  "우리가 들렀던 두 요새 모두 텅 비어있었소." 그는 말을 이었다. "완전히 버려져 있었지. 이유를 아는 사람도 없었소. 지역 주민들은 감시자들이 여분의 말이나 생필품 따위를 그들에게 팔았다고 했소.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서두르는 것 같았다고들 하더군. 하지만 왜 떠나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핸 일절 말하지 않았다고 했소. 그 근방에 어둠의 피조물이 출현한다는 소문도, 우리가 직접 마주친 놈들도 없었고."

  "탈영인 것 같소?" 술웨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 템플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그 동작을 따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흩날렸다. 그 모양이 횃불 덕에 붉은빛 후광처럼 보였다. "그들은 떠난다는 걸 숨기려하지 않았소. 어쨌든, 요새 하나 정도라면 탈영일 수도 있겠으나, 둘 다 그럴 리가?"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설득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숫자로는 얼마 되지 않는 감시자들이니." 흉터의 여성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리 믿지 않는 듯 했다.

  "그럴지도." 템플러가 어깨를 으쓱하자 철컹 소리와 함께 또다시 붉은 흙먼지가 일었다. "나로선 모를 일이오. 그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뿐. 두 번째 요새를 지난 뒤 우리는 제국대로를 따라 체뉴어로 향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기까지 왔소. 오는 길에 편지나 서신 몇 개를 받기도 했고. 짐 안에 있긴 하나 전부 징집자들의 가족이나 귀족들이 보낸 서신 뿐이오. 회색 감시자들로부터의 소식은 전혀 없소. 말했듯이, 오는 길에 마주친 이도 없고. 만약 있었다면 이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겠지."

  술웨는 고개를 끄덕인 뒤 캐로넬을 앞으로 불렀다. "서신을 가져와 주신 것에 감사하오. 내 동료가 당신들을 방으로 안내할 것이오. 우선 편히 쉬시길. 아침이 되면 당신네 탈주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합시다."

  저들도 탈주자라고? 그 생각에 발리야의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템플러들이 호스버그 마법사들을 추적해 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온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체뉴어 남쪽의 어딘가에서 왔다면...거의 대륙 절반을 가로질렀단 뜻이었다. 지난 두 달간 그는 테다스 지도를 들여다 보며 지냈다. 그렇기에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지 알고 있었다. 채집이 어렵지 않고 기후가 따듯한 여름이라곤 하지만, 산책처럼 가볍게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마법사와 템플러 사이의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것일까?

  그랬다. 이후 몇 주에 걸쳐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그 템플러들은 셀레스틴 호수에서 멀지 않은 올레이 남부에서 왔다. 그들의 대장인 디귀어는 기사단장 계급이었다. 그는 커크월의 학살과 백색탑의 혼란에 대해 듣고 난 뒤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아 이 일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총 여뎗 명이었다고 했다. 두 명은 오는 길에 사망했고, 한 명은 중간에 탈영했다. 처음 발리야는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얼마 안 가 두 명의 죽음이나 탈영이 템플러들의 리륨 중독과 관련 있다는 걸 연결지을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이 도주할 때 빼돌렸던 양만으로는 와이스하웁트까지 오는데 충분치 않았으리라.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빈약한 소문들을 모아 추론해냈다. 결코 템플러들과 직접 얘기하진 않았다. 그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홀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문간에 몸을 숨겨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멍청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 그들에겐 그를 추궁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있다 해도 그럴 권리가 없었으니 -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오랜 습관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슴이 늑대 무리를 관찰하듯 그들을 지켜봤다. 라로스라는 드워프 템플러는 체중을 조절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 탓에 갑옷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꿀 케이크나 설탕에 절인 아몬드를 먹어댔다. 그들 중 유일한 여성인 레이마스는 시종일관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조금도 웃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온 벌레를 붙잡아 날씨나 시간에 아랑곳 않고 바깥에 풀어주는 그의 태도는 항상 점잖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난 디귀어는 이따금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연병장에서 대련을 하거나 자그마한 성소에서 열의 있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았고, 발리야나 다른 마법사들에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오직 기도할 뿐이었고, 하루가 다르게 걱정으로 주름이 깊어가고 체중은 감소했다.

  "그는 평화를 원해." 어느 아침, 도서관에 모인 호스버그 마법사들에게 세카가 말했다. 계절은 가을이 되어갔고, 안더펠스의 타는 듯한 더위도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낮 시간은 건조했고, 서늘한 기운이 정오 무렵까지 머물다가 쌀쌀한 밤을 경고하듯 녹아내렸다.

  "마법사와 템플러 간에 말이야?" 발리야가 물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와이스하웁트의 끔찍한 외풍을 막기 위해 빌린 회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었지만 몇 주 안에 더 두툼한 걸 마련해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도서관에 몇 시간 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건 온기를 유지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린 마법사는 고개를 젓고는 읽고 있던 닳아빠진 지도 위로 주의를 돌렸다. 방을 채운 자료의 절반 정도는 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지도나 일지, 피에 젖은 서신 따위가 새로 나타났다. 그렇게 작업한 결과, 그들은 수상쩍게 실종된 감시자의 흔 적 네 개와,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진 기괴한 어둠의 피조물의 흔적 하나, 그리고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한 번 확인할만 하다고 주석을 남긴 애매한 사건 두세 가지 정도를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 말이야." 세카가 말했다. "자신이 한 일이 옳다고 말해줄 창조주의 신호 같은 걸.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회색 감시자가 되더라도 의무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신호 같은 거겠지."

  발리야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회색 감시자가 되려 한다고?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그와 얘길 나눠 봤으니까." 세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커다랗고 까만 눈은 진지한 빛을 띄었다. "너도 템플러들과 이야기 나눠볼 수 있어, 알고 있겠지만."

  "너나 가능하겠지." 발리야가 웅얼거렸다. "나는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

  "시도나 해봐." 세카가 말했다. "머지 않아 그들은 우리와 등을 마주하고 싸우는 동료가 될지도 몰라. 우리가 운이 좋다면. 창조주가 디귀어에게 그가 원하는 계시를 내린다면, 그리고 수석 감시자가 이 갈등 속에서 결국 어느 쪽 편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발리야는 머뭇거렸다.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뜻은 그 분에게 달린 일이겠지. 우리가 어찌 할 여지가 없을 거야. 하지만 수석 감시자라면..." 세카는 보고 있던 지도의 끄트머리를 살짝 말아서 발리야에게 그 누런빛 양피지를 강조해 보였다. "우리가 유용한 걸 찾아내는 거야. 우리의 가치를 입증할 만한 걸. 회색 감시자들이 네 번째 대재앙에서 찾으려는 게 뭐든 간에 그 답을 찾아내자고. 혹시 뭐 건진 거 있어?"

  "아직은." 발리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찾아내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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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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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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