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Age/Last Flight'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20.04.26 LF - 챕터 5
  2. 2020.04.26 LF - 챕터 4
  3. 2020.04.26 LF - 챕터 3
  4. 2020.04.26 LF - 챕터 2
  5. 2020.04.26 LF - 챕터 1

5

 

5:12 숭고의 시대

 

  안티바 시티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우렁차고 길게 울리는 그 소리는 구리종 안에 천둥을 가둔 것만 같았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울림이었다.

  이세야가 계단을 다시 올라 그리폰들이 기다리는 성벽 위에 다다랐을 때, 발 아래 펼쳐진 도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찬란한 주홍빛이 챈트리 성당 창에 반사됐다. 거리는 마치 붉은빛 금빛 강처럼 보였다.

  석양 때문이 아니었다. 안티바 시티는 불타고 있었다. 두터운 연기가 질식시킬 듯 묵직하게 거리를 메웠다. 성벽을 타고 울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비탄 섞인 메시지를 전하는 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적들이 공격해온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오고 말았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의 판단은 틀렸다. 안티바 시티는 며칠조차 버티지 못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이미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세야의 눈에 건물들 사이로 움직이는 거대한 뿔의 오우거와, 그 발치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쉬릭 무리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며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덴디가 계단 위로 올라서며 이세야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폰에 올라타. 움직이라고."

  젊은 엘프는 멍하게 끄덕였다. 그는 레바스의 등 위에 올라 아마디스에게 손을 뻗어 올라타는 걸 도왔다. 인간 여성은 여지껏 이세야가 그래왔던 것처럼 두 번째 안장에 자신의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세야는 고삐를 쥐었고, 검은 깃털로 덮인 목에 몸을 숙여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단어를 속삭였다. "날아."

  레바스는 왕궁의 돌바닥에 발톱을 박아넣으며 근육을 수축시켰고, 넓다란 검은 날개를 강하게 두 번 펄럭인 것만으로 공중으로 도약했다. 바람이 이세야의 얼굴 위로 몰아쳤고,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세상이 발 아래로 멀어져가자 순수한 환희가 차오르며 대재앙에 대한 공포조차 일순간 잊혀졌다. 그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안티바 시티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흥분은 찾아든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거리와 연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볼 수 없다는 게 차라리 고맙게 느껴졌지만, 이세야는 인형처럼 보이는 실루엣으로나마 놀이라도 즐기듯 창문을 통해 사람들을 끄집어내 불길 속으로 던지는 오우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체계적인 방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혼란 속에서 강이나 성벽 밖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작은 형상 하나가 까맣게 몰려든 어둠의 피조물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 그들은 대개 혼자이거나 작은 무리였고 금세 파도에 휩쓸린 나뭇가지 마냥 사라졌다.

  대재앙을 막겠다고 맹세한 회색 감시자들이,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니. 그 부당함에 이세야는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아마디스가 뒤에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엘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에게 동승이 있다는 걸 잠깐 잊고 있던 것이다. "살아남아. 복수는 그 다음이니까."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로 무슨 복수를 한다는 거지? 놈들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놈들에게 가책을 느끼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죽여버리면 되지." 아마디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세야는 주춤했다. 그는 동행을 돌아봤고, 무표정하게 학살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을 확인했다. 아마디스의 얼굴 위로 움직이는 거라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이세야가 물었다. "평범한 안티바 레이디로 보이진 않아. 그 검들을 다루는 솜씨만 봐도."

  아마디스가 웃었다. "안티바 레이디들을 별로 안 만나봤나 보네. 어떤 이들은 까마귀단으로부터 뜨개질 수업을 듣기도 하는걸. 굳이 말하자면, 틀린 지적은 아니야. 난 안티바 출신이 아니니까. 나는 스탁헤이븐 사람이야. 여기엔 친구나 좀 만들고 구혼자라도 얻어오라고 보내졌지. 둘째 딸이라면 응당 자기 살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니까."

  "스탁헤이븐의 레이디들은 다 사람을 죽일 줄 알아?"

  "몇몇은." 아마디스의 미소는 차가운 검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뛰어나기도 하지. 대재앙에는 꽤 쓸모있을 거야, 안 그래?"

  이세야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단단하게 땋아올렸던 머리가 그리폰의 빠른 비행속도에 휩쓸려 느슨해져 있었다.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의 긴 금갈색 머리는 눈앞으로 마구 휘날렸을 터였다. "죽여야할 어둠의 피조물이 너무 많아."

  "꼭 그렇진 않지. 딱 하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악마의 군주, 그놈만 죽이면 대재앙은 무너지는 거니까."

  아마디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이 그들의 눈앞에서 쪼개졌다. 창백한 보랏빛 번개가 회색 장막 위로 갈래갈래 내려꽃히며 구름을 갈라놓고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그 위로 떨궜다.

  그리고 폭풍 한 가운데로 악마의 군주가 날아올랐다. 넝마같은 날개는 거대했고, 몸체 위로는 굽이치듯 돌기가 솟아 있었다. 두 눈 안에서 부정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생김새는 드래곤과 흡사해 보였지만 어떤 드래곤도 그렇게 끔찍한 것을 속 안에 담고 있진 않았다. 암흑이 그 주위에서 이글거렸고, 암흑 자체가 그것의 영혼이었다.

  그것은 쏘아올린 화살처럼 중력을 아무렇지 않게 거스르며 하늘 높이 치솟아 대열의 앞쪽에 있는 그리폰을 노렸다. 놈의 아가리 사이로 보라색 암흑이 뿜어져 나왔고, 끔찍하리만치 날카로워보이는 들쭉날쭉한 이빨이 아주 짧게 모습을 비쳤다.

  그리고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들은 새까만 눈송이마냥 빙글빙글 회전하며 하늘에서 곤두박칠 쳤다. 이세야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추락하는 저 작은 점들이 휴블과 덴디를 비롯한 안티바의 왕비와 그 부친, 삼촌, 혹은 누군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리폰 검은발톱와 스카이악스, 최고의 그리폰 두 마리도 함께라는 것을.

  씁쓸한 충격에 혀 안쪽이 얼얼했다. 분명 투랍과 다른 이들이 경고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투라고 할만한 것조차 없이 말이다. 그는 그들의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우리를 따라온다."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활짝 날개를 뻗은 악마의 군주는 요동치는 하늘에서 폭풍을 뚫고 빠르게 몸을 돌려 나머지 감시자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뒷편에서는 층층이 쌓인 적란운 사이로 번개가 지그재그로 번쩍였다.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이세야는 안장 위에 꼼짝 없이 굳어 있었다. 그 때 그의 눈에 개러헬이 요격을 위해 경로를 바꾸는 게 들어왔다. 미친 거 아냐?

  그가 고른 하얀 얼룩무늬 그리폰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빨랐다. 굽은꼬리는 날개를 몸에 바싹 닿도록 접고 다리를 웅크린 채로 강하하는 독수리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가 감시자들을 덮치기 전에 놈에게 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 움직이는 둘의 각도와 궤도를 살핀 이세야는, 동생이 어떻게든 그렇게 해낼 것만 같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눈 깜짝할 새 휴블과 덴디를 부숴버린 놈에게, 아직 젠록 한 마리조차 죽여본 적 없는 개러헬이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군주조차도 그에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놈의 펄럭이는 날개가 돛처럼 바람을 끌어모아 활짝 펼쳐진 순간,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놈에게 충돌했다. 악마의 군주의 하체가 앞으로 휘청였고, 놈은 뒷발 발톱으로 공중에서 갈퀴질하며 울퉁불퉁한 꼬리를 휘둘러 개러헬을 후려치려 했다.

  그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이세야는 그 순간 동생의 전략을 깨달았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다른 이들이 날아서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놈을 교란시키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리폰은 그 시도가 거의 가능해보이게 할만큼 빨랐다.

  그 "거의"는 물론 그 둘을 죽게 할 테지만.

  일렁이는 보랏빛 광채가 밤하늘을 갈랐다. 악마의 군주가 그 번쩍거리는 오염을 개러헬에게 뿜어낸 거이다. 하지만 그리폰은 공중에 그대로 머물렀고, 그 찬란한 어둠이 스쳐간 경계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개러헬이나 그의 그리폰은 덴디와 휴블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악마의 군주가 쏟아내는 치명적인 공격이 미치는 범위를 계산해낸 것마냥, 딱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은, 눈먼 행운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그들에게 호의적이든가.

  이세야는 발꿈치로 레바스의 옆구리를 툭 쳐서 그리폰에게 그들을 향해 비스듬히 접근하라고 신호했다. 그 거대한 야수는 망설이는 듯 했지만 - 그는 레바스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까지의 찰나의 머뭇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 이내 앞으로 몸을 날려 개러헬의 반대쪽, 악마의 군주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세야에겐 다행스럽게도, 다른 이들은 누구도 그들의 멍청함에 함께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카이야와 타이야, 안더펠스 원주민 사내는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져 대재앙의 검은 구름 너머로 도망쳤다. 몇 분만 더 주어진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몇 분만. 2분, 3분 정도. 어쩌면 4분까지도. 그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그게 최대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레바스를 돌진시켰다.

  2,000 피트 정도의 거리가 되자 악마의 군주를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비인간적이고 압도적인 그 냄새는 대지 아래 차갑고 죽은 영역의 냄새였다. 썩은 이빨에서 나는 입냄새나 오염된 강물 바닥의 진흙 냄새 같기도 했다. 완전한 오염의 냄새.

  그리고 그 오염의 메아리가 이세야의 정신 끄트머리를 간질거렸다. 악마의 군주의 기묘하고 유혹적인 노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아주 미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감질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걸 원한다는 건 콜링의 신호기도 했고, 기실 그가 그걸 원한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그 소리는 차단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도 두렵고, 너무나도 낯선 기분으로, 그는 이 모든게 시험의 일부가 될 거라는 걸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고삐를 느슨하게 놓아버리고, 레바스가 자신의 경로를 고르게 내버려뒀다.

  무모하고 멍청한 도박이었다. 이세야는 자신의 새 그리폰에게 몇 년은 함께 움직여온 숙련자들이나 기대할 수 있는 호흡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가진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레바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폰은 강력한 검은 날개로 전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의 상승작용을 붙들고 위로 치솟았다. 이세야는 그 열기 속에 섞인 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악마의 군주 뿐이었다.

  놈에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1,000피트. 500피트. 이윽고 녀석의 그림자 속에 들어섰다. 넝마 같은 두 날개가 레바스의 머리 위로 절벽처럼 드리워졌다. 이세야는 이제 드래곤의 가죽과 그 안의 오염이 결정을 이룬 것 같은 붉은 피가 묻어있는 등의 돌기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

  100피트. 위험구역 안이다. 놈이 머리를 돌려 입을 벌리기만 해도 숨결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놈은 그들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탈출 중인 살아남은 감시자들로부터 놈을 떼어놓기 위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흰 얼룩무늬 그리폰과 그 기수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안장 위에서 자세를 다시 바로 잡은 이세야는 지팡이를 쥐고 영계와 접촉했다. 이세야는 레바스가 날렵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직전, 가까스로 마력을 끌어내 악마의 군주에게 어설프게 뭉쳐진 연보라빛 에너지를 쏘아보낼 수 있었다. 그 영혼화살은 드래곤의 단단한 돌기 위를 적중했고, 접시만한 크기의 비늘 위로 번쩍이고 쉿쉿거리며 퍼져나갔지만 악마의 군주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뒤 레바스가 공격했을 땐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 그리폰은 악마의 군주 옆구리에 발톱을 박아 두 주먹은 될 법한 비늘과 피부 돌기를 뜯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그리폰 옆으로 비구름도 없는 하늘에 진득하고 차가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은 영혼을 찢어놓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날개를 몸에 바짝 붙여 접은 레바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강하했다. 그리폰과 함께하는 이세야는 내장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 안쪽까지 공황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옆에서는 아마디스가 비명을 질렀다.

  악마의 군주의 꼬리는 그들의 머리 바로 위를 쓸고 지나갔고, 얼마나 아슬했는지 이세야의 머리칼 몇 가닥이 그 돌기 부분에 잘려나간 것 같았다. 거대한 머리가 뒤를 돌아봤고,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아궁이 같은 한쪽 눈이 그들을 바라봤다. 파괴적인 숨결이 그들을 노리기엔 각도가 좀 모자라 보였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드래곤은 굽은꼬리를 쫓던 걸 놔두고 그들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레바스는 요리조리 자세를 바꿔가며 맹렬하게 날개짓했고, 이따금 드래곤의 옆구리를 발톱으로 움켜쥐어 악마의 군주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쓰기도 하며 장단을 맞췄다 . 그 거대한 생물은 그 부피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방해물이 되었다. 그리폰이 그 근처에 붙어 제대로 이용하기만 하면 그들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2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다른 감시자들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이세야는 그들이 폭풍을 뚫고 안전한 곳에 다다랐으리라 생각했다. 개러헬 역시 도망칠 기회가 생겼을 테지...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속도 때문에 귀를 납작하게 접고서 암회색 구름을 돌아 방향을 틀었다.

  마법의 사정거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개러헬의 동행인 칼린이 바다뱀이 휘감고 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영계로부터 불덩어리를 불러냈다. 불덩어리는 악마의 군주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사이 속도와 형태를 붙여갔다.

  드래곤의 몸체에 많이 흡수되긴 했지만, 불덩어리가 부딪힌 충격에 레바스의 털이 바짝 섰고 열기가 그들을 휩쓸었다. 불길은 타락한 고대 신의 가죽을 그슬렸고, 이어 분노의 포효가 울렸다.

  악마의 군주는 위로 치솟으며 길다란 몸을 뒤틀어 두 상대를 한꺼번에 시야에 확보하려 했으나 아무리 하늘에서 몸을 비틀어도 둘을 한 번에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레바스를 뒤에 둔 채로 굽은꼬리와 그 기수를 잡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 대신, 악마의 군주는 구름마저 삼키고 그리폰의 비행깃털이 날개 앞쪽으로 쏠리게 할만큼 강하게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소리지르며 악마의 군주가 빨아들이는 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 굽은꼬리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의 숨결이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보라빛 파동 에너지를 불러보려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놈이 숨을 내쉬었을 때, 이번에 나타난 것은 순수한 죽음의 소용돌이였다.

  악마의 군주가 내뱉은 것이 마법임은 물을 것도 없이 분명했으나, 이세야는 그런 종류의 마법을 한번도 본 적 없었다. 그 주문 안에서는 영계의 느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와 악몽의 영역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악마의 군주가 만든 것과 같은 것을 빚어낼 수 없었다.

  그 어둠의 소용돌이는 영과 육에 동시에 작용했다. 굶주린 바람은 그 아가리로 그들을 끌어당겼고, 동시에미지의 무언가가 그들의 생명력을 흐트러 놓았다. 악마의 군주의 소용돌이가 이세야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느껴졌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힘은 강해져갔다. 더 이상 가까워졌다간 그대로 으스러지겠지만 - 그러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을 게 분명했다.

  멈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레바스는 온힘을 다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지만 그 그리폰 역시 점차 굴복하고 있었다. 날개에서 깃털이 뽑혀나와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 치며 끌려들어갔다. 반짝이는 검은색 미늘은 하얗게 뼈대만 남았고, 선명한 분홍색 깃촉 역시 창백한 구멍만 남았다. 이세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며 자신의 두 손도 하얗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굽은꼬리가 그들과 똑같은 싸움을 버티다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칼린은 회백색 그리폰의 등에서 일어서려 애썼다. 그의 깃털 달린 후드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절박하게 지팡이를 잡고 버텨섰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허리에 매어둔 주머니가 빙글빙글 돌며 굽은꼬리의 커다란 비행깃과 하얀 솜털과 섞여 사라졌다. 하지만 마법사는 끝까지 버텨냈고,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선으로 이루어진 속박하는 감옥이 악마의 군주 주위에 생겨났다.

  그 마법은 고대신을 붙잡기엔 터무니없이 약했다. 악마의 군주가 붙들려 있던 시간은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 뿐이었다. 놈은 곧바로 빗물을 털어내듯 그 마법을 뿌리쳐냈다. 감옥의 형체가 흔들리더니 곧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마법은 칼린이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세야는 그가 쓴 마법이 뭔지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소용돌이에 다가갈수록 시야가 흐릿해졌다. 점차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쓸 수 없었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기도 전에 공기가 전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충격파는 느껴졌다. 칼린이 악마의 군주에게 날린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거의 흔적만 남아있던 그의 첫 번째 주문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진동이 퍼져나갔다. 그 충격에 두 그리폰은 소용돌이에서 떨어져나가 공중으로 하릴없이 빙글빙글 돌며 날려갔으나, 그 어떤 비행속도보다도 빠르게 악마의 군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세야의 머리가 마치 오우거로부터 얻어 맞은 것처럼 뒤로 꺾였다. 입 안에 피가 고여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유지했다. 힘겹게 피를 뱉어낸 그는 한 손으로는 안장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붙들었다. 허리를 붙든 아마디스의 두 팔이 철로 된 허리띠 같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옆으로, 위아래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했고 - 그리고 마침내, 어지러움 속에서, 헐떡이는 레바스가 수평으로 중심을 잡고 날았다.

  간신히, 그가 해낸 것이다. 그들은 처음 있던 곳보다 한참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땅까지의 거리는 고작 수백 피트에 불과해 보였다. 이세야는 그들이 거의 바닥에 충돌할 뻔 했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고, 대재앙을 따라다니는 폭풍구름이 별들을 가리는 바람에 어둠의 피조물 무리와 황폐화 된 대지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먼 곳에서도 안티바 시티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빛나는 성벽은 저주받은 성배처럼 보였다.

  그날 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창조주만이 알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탈출에 성공한 것 같았다.

  "내려가자." 이세야는 그리폰에게 말했다. 그날 밤 더 비행하기엔 그는 너무 피곤했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생존은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와이컴을 찾아가는 것 역시 그럴 것이다. 그는 창조주에게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기적을 바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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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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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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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그리폰은 신중하게 골라라." 투랍은 햇살이 내리쬐는 계단을 올라 날개달린 야수들이 자리 잡은 높은 성벽 위로 향하며 젊은 감시자들에게 조언했다. 그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개러헬, 이세야, 대머리 쌍둥이 자매 한 쌍, 이세야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문신투성이의 안더펠스 원주민 사내까지. 전부 자신의 안장 가방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궁에서 하룻밤도 더 보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수 년을 함께 할 파트너를 고르는 일이다. 너희는 함께 먹고, 함께 싸우고, 길고 외로운 보초를 함께 설 것이다. 네 생명과 네 동반자의 생명 모두 너와 그리폰 사이의 신뢰 관계에 달려있지. 함부로 대했다간,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적을 만드는 셈이다."

  "꼭 배우자 같네요." 개러헬이 드워프 뒤로 따라 걸으며 비꼬듯 대답했다.

  투랍은 안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노릇이지. 네 배우자가 너보다 여섯 배쯤 무겁고, 매 끼니마다 살아있는 염소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한 발로 네 뼈를 조각조각 부숴트릴 수 있다면 말이야."

  "제가 쿠나리를 꼬셔본 적은 있는데 말입니다." 엘프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감시자 사령관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붉은 수염의 드워프는 옆으로 비켜 서서 그들이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세야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고 두 자매 역시 길고 무더운 등반 끝에 빛나는 이마에서 땀을 훔쳐내는 와중에도 투랍은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리폰들 중 몇몇은 이제 막 훈련을 마친 참이다. 나머지는 대재앙 때문에 기수를 잃고 새 기수를 찾는 중이고." 드워프는 벽 위로 하나둘 올라오는 젊은 감시자들에게 말했다. "페나달과 다른 몇명이 이미 마지막 평가를 위해 시승을 마친 상태이다. 아마 이들이 너희 중 대부분과 잘 맞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특정한 짝을 권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마지막 선택은 너희와 너희의 그리폰 사이의 몫이다. 그러니 자, 서로 소개부터 하도록."

  이세야는 햇살 아래 눈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 위풍당당한 자태의 그리폰들을 확인했다. 성벽 위를 가로질러 다가가는 사이 묘하게 수줍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서 볼수록 그 야수들은 언제나 생각보다 더 크게 느껴졌고, 더 아름답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 검은색 암컷 하나가 다가오는 엘프에게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 그리폰의 눈은 보통보다 더 밝은 호박색이었다. 진하고 어두운 색의 깃털빛에 대비돼 그 눈은 마치 노란색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등 위에 옅게 퍼진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무늬는 가장자리로 갈수록 거칠고 듬성듬성해졌다. 그는 이세야가 본 그 무엇보다도 숨막히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는 흉터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살점과 깃털을 뜯어냈던 흔적인지 목 옆쪽으로 맨들맨들한 회색 피부가 물결치는 줄무늬 흉터를 이루고 있었다. 상처는 완전히 아문 것 같았지만, 이세야는 근처의 깃털들이 아직 짧은 것으로 미루어 그 상처가 최근에 생겼다가 마법으로 아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으로 상처가 아물었다면 그 깃털들은 온전한 길이로 자랐을 터였다.

  "이름이 뭐니?" 엘프는 그리폰의 가슴줄 앞쪽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 거대한 야수는 목줄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전투용 흉갑에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레바스." 그는 소리내어 읽었다. 엘프어였다. "자유."

  그리폰의 털에 뒤덮인 두 귀가 자신의 이름에 반응해 쫑긋 섰다. 그는 부리를 열어 작게 쉿소리를 냈고, 이어 거대한 머리를 이세야의 어깨 위에 얹었다. 야성적인 사향이 엘프의 코끝을 자극했고, 그리폰의 뺨 아래 흐르는 혈관과 골수의 맥박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무게에 이세야는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저는 찜 당한 것 같네요." 그는 옆을 지나치던 감시자 사령관 투랍에게 말했다.

  멈춰선 드워프의 수염난 얼굴 위로 생각하는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그가 동의했다. "레바스는 고작 몇 주 전에 자신의 기수를 잃었지. 그의 이름은 달시랄이었어. 데일리시 엘프였고. 혹시 그를 알았나?"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투랍의 질문은 그에게 미약한 짜증을 불러일으켰지만 - 모든 엘프들이 그저 엘프란 이유로 서로를 알아야 하나? -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의 질문은 진정성을 담고 있었고, 어쨌든 자신의 그리폰을 가지게 됐다는 흥분과 기쁨 앞에서 분노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훌륭한 감시자였네." 투랍이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낸 듯 보였다. "레바스의 상처는 오우거로부터 당한 것이네. 놈은 수직 하강하는 녀석을 잡아채 끌어내렸지. 거의 죽을 뻔 했어. 달시랄은 이 녀석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네. 만약 이 녀석이 다시 전장에 나선다면 큰 전력이 될 거야. 레바스는 가장 뛰어난 녀석 중 하나이니까."

  그는 성벽을 따라 다시 내려갔고, 그의 플레이트 메일이 햇빛에 불타는 듯 보였다. 이세야가 그리폰을 향해 다시 돌아서자, 그는 투랍이 말하는 걸 바라보느라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정말이니?" 그가 속삭였다. "너는 아직도 애도 중인 거야?"

  레바스는 다시 콧바람을 뿜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이세야를 짐승냄새가 나는 자신의 깃털 속에 파묻었다.

  개러헬은 40 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독특하게 생긴 수컷 그리폰의 목을 긁어주고 있었다. 그 녀석은 아직 덜 자란 듯 길다란 체구와, 남다른 색상을 지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회갈색 얼룩무늬인 몸체 위로 하얀색 반점이 배와 상체 부분에 흩뿌려진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그리폰은 회색빛 털을 가졌다. 완전한 하얀색이나 검은색 개체는 드물게 있었고, 복잡한 얼룩무늬는 더더욱 드물었다. 보통 그리폰은 색깔보다는 빠르기와 지능, 운동능력 같은 걸 따라 교배시켰지만 회색이 대부분이었다. 다른색깔은 열성인자기도 했고, 감시자들 사이에선 거의 볼 수 없었다.

  개러헬의 새 친구는 색깔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녀석의 귀 한 쪽은 다른 귀처럼 위로 솟아 뒤로 살짝 쳐진 형태가 아니라 앞으로 휘어져 있었다. 살짝 구부러진 꼬리는 덤불처럼 뭉쳐 일반적인 그리폰의 매끈한 사자 꼬리가 아닌 풍성한 여우 꼬리처럼 보였다.

  종합했을 때, 그 젊은 수컷은 매우 독특하게 생긴 그리폰이었다. 그리고 그는 개러헬이 목을 긁어주자 무려 고르릉거리고 있었다. 그 그리폰은 이마로 엘프의 가슴팍을 밀쳐 그의 동생이 뒤로 나자빠지게 했다..

  "완전 특이한 녀석이네." 이세야가 외쳤다.

  "당연하지." 개러헬은 가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뒤로 넘어졌다는 사실에조차 신나보였고, 곧바로 일어나 열정적으로 그 그리폰의 목을 긁어줬다. "이 녀석은 내 거야. 구제불능의 영웅들, 그게 바로 우리지."

  "그 녀석 이름은 있어?"

  "가슴판을 보자면 번개라는 것 같은데, 별로 어울리진 않는 것 같군. 어때, 넌?" 개러헬은 그리폰에게 물었다.

  거대한 짐승은 두 귀를 납작하게 하고 쉿소리를 냈고, 혀를 길게 내밀었다. 엘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걸 생각해 보자. 별난이, 라든가. 칠칠이? 아냐, 너무 뻔해. 울퉁부리? 흠, 아냐. 꼭 텁수룩이 늙은 해적 같잖아. 아! 알겠다. 굽은꼬리!"

  "굽은꼬리." 이세야가 따라했다. "네 전투 그리폰 이름을 굽은꼬리라고 하겠다는 거지."

  "얘도 이 쪽이 더 마음에 드나봐. 안 그래?" 개러헬은 그렇게 속삭이며 그리폰의 턱 아래를 긁었다.

  이세야는 혀를 깨물었다. 세상에는 그의 남동생이 자신의 그리폰에게 고상치 못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보다 중대한 문제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 테다스에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리폰이 단 한 마리만 있다면, 분명 저 녀석이어야만 했다. 어쨌든 저 가여운 야수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몇 분 안에 나머지 감시자들도 자신의 그리폰을 고르거나, 그리폰에게 선택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방을 싣고, 안장을 얹은 뒤 고삐길이를 손에 맞게 조정했다. 이세야는 누구도 남겨지거나, 마음에 안 차는 녀석과 짝을 이루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개러헬은 무리 중 유일하게 독특한 녀석을 골랐고, 다른 이들은 자신과 비슷하게 동반자를 고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우리는 너희를 함께 훈련시켰을 것이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그들이 모두 짝을 이루자 입을 열었다. "가볍게 와이스하웁트 주변을 도는 것부터 저공비행 표적 훈련, 낙하와 착륙 훈련 같은 걸. 점진적이고 체계화된 훈련이었겠지. 수 개월에 걸친. 하지만 우리에게 수 개월은 없다. 지금은 대재앙 중이고,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너희는 약간이나마 훈련을 받았고, 나는 너희가 전장에 나설 수 있을 정도라고 믿고 있지만, 너희는 싸울 필요 없다. 알아들었나? 어둠의 피조물과 마주하지 말고, 전선을 지킬 필요도 없다. 공중으로 높이 날아서, 안티바 시티 밖으로 동행을 가능한 한 빠르게 데리고 나가라. 질문은?"

  이세야는 나머지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알기만 했다면 묻고 싶은 게 많았겠지만, 그러기엔 질문이 너무나 많았고, 모든 게 너무 빨랐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투랍은 진지하게 그들을 바라봤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알현실로 돌아가자. 상급 감시자들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레바스의 안장에서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세야는 이제 막 그의 그리폰을 만났고,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부서질듯한 유대감을 끊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한 그리폰 기수가 됐다는 흥분감과 팽팽하게 맞섰고, 그는 아마 그게 감시자 사령관의 의도한 바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들이 마주할 운명으로부터 이렇게 효과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법은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운명을 마주하러 가야했고, 그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레바스에서 내려 그리폰의 흉터 있는 목 부분을 작별인사 삼아 토닥인 뒤 감시자 사령관을 따라 왕궁의 서늘한 그늘 속으로 향했다.

  젊은 감시자들이 내려가는 사이 홀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벽 가득한 장미덩굴은 긴 낮동안 햇빛을 받고 석양에 맞춰 시들기 시작해 부드럽게 흔들리며 정원 안을 백단향으로 채웠다. 가시덤불 사이로 몸을 숨기는 노란 가슴깃의 작은 새들과 바람에 살랑이는 꽃송이의 움직임 외에 이세야의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경비대도 정원사도 전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친 것 같았다.

  "소문이 퍼졌나 보네." 개러헬이 말했다. 평상시 띠우고 있던 가벼운 미소는 간 데 없었고, 두 손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 한 쌍의 검은색 손잡이에 얹혀 있었다. "만약 이들이 공포로 날뛴다면..."

  이세야는 등 뒤에 맨 지팡이를 풀어냈다. 룬이 박힌 금속 위로 마법이 웅웅거렸다. 그는 그 금속에서 영계와 이어지는 진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기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그 형태없는 에너지는 불이 될 수도 있고, 번개, 얼음, 혹은 순수한 힘의 파동이 되어 지팡이 끝에서 뻗어나갈 것이었다.

  그 힘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크든 간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겨눈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세야는 지팡이를 꼭 쥔 채 동생과 함께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빈 홀을 따라 걸었다. "전투가 벌어질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개러헬이 대답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자신들의 통치자가 그들을 배신했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그렇게 느꼈고, 그 결과 폭동이 뒤따랐다. 이세야는 청동으로 된 새끼용 조각상 앞에서 첫 희생자를 발견했다. 동상의 활짝 펼친 날개 덕에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동상을 돌아서자 죽은 여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상의 눈을 장식한 루비만큼이나 붉은 피가 희생자의 하얀 리넨 드레스를 물들였다. 소매를 두른 금박 장식이 여자의 귀족 신분을 짐작하게 했고, 어쩌면 왕족일 수도 있어 보였다. 방어의 흔적 없이 깔끔한 상처로 미루어 눈치 채기도 전에 당한 듯 했다. 얼굴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세야는 부디 그 과정이 짧았길 바랐다.

  "아마 더 있을 거야." 개러헬은 우울하게 중얼거렸고, 죽은 여자를 지나 빠르게 걸어갔다. 잠시 뒤 이세야의 귀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영계에서 끌어낸 마법이 웅웅거리며 현실로 구현되는 소리.

  알현실 쪽이다. 모두의 머릿 속에 동시에 깨달음이 스쳐갔다. 그들은 전부 달리기 시작했다.

  안더펠스인이 그들 중 제일 빨랐고, 엘프들을 지나쳐 알현실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안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뒤집은 협탁을 엄폐물로 삼은 휴블과 덴디가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경비대의 시체가 덴디의 마법과 휴블의 검에 불에 타고 언 채로 조각 나 눈앞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배는 됨직한 인원이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피를 요구하는 그들의 분노가 벽을 메아리쳤다.

  시체들 사이에 국왕 엘라우디오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의 호위병 중 하나에게 당한 듯 했다. 안티바 왕궁 친위대의 굽어진 칼날이 왕의 가슴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고, 금빛 검날은 검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왕비는 아직 살아 있었다. 겁에 질린 몇 안 남은 귀족들과 함께 왕좌 뒤에 몸을 웅크리고서. 회색 감시자들이 가로 막고 있어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지만, 한 눈에 봐도 휴블과 덴디는 지쳐 있었다.

  "그 비겁자들을 포기해라!" 폭동을 일으킨 경비대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린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릴 배신한 저 뻔뻔한 새끼들을 원할 뿐이다!"

  "넘겨줄 수 없다." 덴디가 사납게 받아쳤다. "우리의 의무는 이들을 데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지팡이에서 서리바람이 몰아쳐 마주 선 두 명의 병사를 얼려버렸다. 세 번째 병사는 초자연적인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으나 혈관에서 터져나온 얼어붙은 피가 붉은색 얼음파편으로 흩어지자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몇몇 병사들은 문이 열리자 몸을 돌렸다. 개러헬은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는 문신을 한 안더펠스 남자와 몇 달은 연습한 것처럼 나란히 함께 싸웠다. 안더펠스인은 거대한 날이 달린 전투용 곤봉을 휘둘러 적들을 밀쳐냈고, 엘프가 재빠르게 파고 들어 중심을 잃은 상대의 틈새를 찔렀다.

  그 뒤에서 이세야는 영계로부터 재빠르게 마법을 끌어내 영혼 에너지가 형태를 채 갖추기도 전에 보랏빛 이글거리는 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보냈다. 조급하게 쏟아낸 공격은 적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비대는 쏟아지는 공격에 뒤로 비틀거렸고 나머지 감시자들이 그들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공포도 죄책감도 사람들을 해친다는데 대한 거리낌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 순간 느껴진 거라곤 마주한 적을 모두 파괴하겠다는 광기어린 열망 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정리됐다. 두 무리의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 갇힌 경비대는 금세 무너졌다. 마지막 몇 사람은 항복하려 시도했지만 덴디는 간청이 끝나기도 전에 얼음조각으로 그들을 끝내버렸다.

  안더펠스인의 가슴팍과 팔뚝에 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상은 자칫 위험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지 않은 듯 했다. 개러헬은 눈썹 부위에 작게 긁힌 상처를 얻었고 철퇴에 빗맞은 갈비뼈에는 벌써 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의 도움이 필요할만한 심각한 부상은 아닌 듯 보였고, 감시자 기준에선 다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데리고 탈출해." 덴디가 모여있는 귀족 생존자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장."

  "국왕은 어쩝니까?" 카이야가 초조하게 질문했다. 대머리 소년은 이세야와 마찬가지로 급박한 전투가 끝나고나자 자신이 벌여놓은 살육의 현장을 직시하며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어둠의 피조물 손에 죽은 거야." 덴디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국민들의 손에 죽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대재앙이 안티바 시티를 덮치지만 않았더라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어둠의 피조물이 국왕 엘라우디오의 죽음의 원인인 거야, 비록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지라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네." 왕비가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창백한 뺨 위로 혈색이 일부 돌아와 있었다. "전혀 사실이 아니야."

  "폐하의 백성들이 사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진실입니다. 나중에라도 논쟁하고 싶다면 환영입니다만, 그럴만한 사치가 주어지면 좋겠군요." 덴디가 말했다. 그는 기운차게 귀족들을 앞으로 이끌어 하나씩 젊은 그리폰 기수 손에 넘겼다. 휴블은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이세야는 난무하는 칭호와 고귀함 넘치는 가문명을 거의 기억할 수 없었다.

  그의 담당은 단단한 체구의 무예가처럼 보이는 30대 여성이었다. 깔끔하게 자른 윤기나는 검은 머리는 귀족자제보다는 군인에 어울려 보였다. 이름은 아마디스라고 했다. 이세야는 가문명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디스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죽은 경비대원의 시체에서 무기를 훔쳐내는 건 놓치지 않았다. 금실로 된 술이 달린 사브르와 세 개의 휘어진 단검을 챙긴 인간 여성이 짧은 검들을 허리춤에 채우고 가볍게 정돈하는 모습은 한두 번 훔쳐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개러헬의 승객은 칼린이라고 했다. 그는 키가 큰 중년의 사내로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었다. 깃털 달린 후드가 그의 얼굴을 감췄다. 이세야가 받은 인상이라곤 뾰족하게 튀어나온 턱과 흑갈색 수염 사이로 보인 창백하고 얇은 입술 뿐이었다. 그가 맨 지팡이는 벼락 맞은 나뭇가지로 만든 것처럼 보였고 구리로 된 바다뱀이 줄기를 휘감고 있었다. 정교한 세공 뿐 아니라 그 지팡이의 생김새 전부에서 힘이 느껴졌지만 이세야는 그가 전투 중에 무언가를 하는 건 보지 못했다.

  이세야는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그저 왕이 눈 앞에서 죽는 걸 보고서도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이겠지.

  카이야와 타이야는 마지막 두 귀족을 넘겨받았다. 안더펠스인은 국왕이 죽는 바람에 한 자리가 남아 따로 담당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하얀 머리쓰개를 단단히 두른 땅딸막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손에 두른 창조주의 불타는 태양이 원 안에 그려진 금색 펜던트를 절대 놓지 않았다. 이세야는 다른 한 쪽이 그의 딸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 젊고 날씬했지만 동그란 뺨이 비슷한 인상이었다.

  "좋아." 덴디는 마지막 귀족을 소개하고 감시자와 짝 지어준 뒤 말했다. "가라. 와이컴을 목표로 하는 걸 잊지 말고. 혹여 누가 뒤쳐지더라도 기다리지 마라. 너희의 의무는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거야. 오직 그 뿐이다. 너희에게 그리폰이 주어지 이유도 그 뿐이고. 이제 가서 수행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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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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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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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다음 날 아침,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감시자들을 쌍으로 짝지어 하늘을 돌며 가능한 탈출로가 있는지, 안티바 시티가 혹시라도 방어에 나설만한 요충지가 있는지, 어둠의 피조물 군대의 규모는 어떤지 정찰하도록 보냈다. 안티바인들은 이미 가장 좋은 지도와 염소치기 목동이나 사냥꾼들로부터 도시 주변의 숨겨진 길 따위의 정보를 수집해뒀으나, 투랍은 하늘에서 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어둠의 피조물의 동향을 살피길 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마지막 발악인 셈이라고 이세야는 이해했다. 운이 좋아봐야 염소들이 다니던 길로 안티바인 백 명 정도 빼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마저도 그들이 대피하는 사이 충분히 어둠의 피조물 무리의 주의를 돌려놓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왕과 왕비가 빠르게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정도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두 손으로 휴블의 허리를 붙든 채 그리폰이 날아오르길 기다리는 사이 점점 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메워갔다. 검은발톱이 근육을 수축하며 박차오르자 발 아래 대지가 거친 바다처럼 물결쳤고, 그의 두 날개가 주위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이세야는 반쯤은 먼지를 피하기 위해, 반쯤은 반사적으로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리폰의 마법 같은 비행에 압도되지 않기란 정말로,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내 공중을 날고 있었고, 나선을 그리며 왕궁 위로 올라 안뜰이 금박 섞인 자그마한 녹색 타일 정도로 보일 때까지, 성벽을 지키고 선 경비대원들이 꾸물대는 갈색 개미떼처럼 보일 때까지 높이, 더 높이 상승했다. 피난민들의 천막은 성벽 너머로 회갈색 덩어리처럼 보였고, 부두는 청명한 녹색 바다를 따라 하얀 술장식처럼 삐죽이 솟아 있었다.

  전날보다도 배의 숫자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다들 대피하고 있는 걸까요?" 이세야가 물었다.

  휴블은 고개를 저었고, 검은발톱이 바람의 흐름을 따라 해안 쪽으로 방향을 튼 뒤 대답했다. "국왕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들 중 기다릴 수 없는 자들도 많았지. 그들은 알현이 끝나고 감시자들이 도시를 지켜주지 않을 거란 소식을 듣자마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밤 사이 몰래 탈출한 배가 거의 열두 척은 될 거야. 왕궁 경비대가 그 선장들 중 하나를 체포해서 오늘 아침에 목을 매달았지만, 그 정도로 이 물결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목이 매달리는 게 어둠의 피조물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아마 없겠지." 휴블이 대답했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그는 검은발톱의 오른쪽으로 고삐를 잡아당겨 그리폰에게 오른편 아래로 하강하도록 신호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 적어도 그 왕족 분들을 겁먹게 할만한 뭔가라도 찾을 수 있겠지."

  그리폰은 구름 위에 머물며 회색 하늘을 보호막으로 삼은 채 안티바 시티를 둘러싼 산록의 대지를 날아 어둠의 피조물 군대에게 향했다. 그리고 검은발톱은 조심스럽게, 구름뭉치를 헤치고 나아가 정교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아래로 펼쳐진 어둠의 피조물 군대는 썩어빠진 육체들이 너덜너덜한 깃발 주위에 모여들어 옹이진 카페트처럼 보였다. 놈들은 누더기 같은 갑옷과 형편없는 모양새의 이가 빠진 무기를 걸치고 있었다.

  거리 때문에 이세야는 그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덩치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종류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젠록들은 작은 덩치를 웅크리고 네 발 달린 거미 마냥 낮은 자세로 허둥지둥 움직였다. 젠록 무리 옆에는 근육이 불거진 커다란 키의 헐록들이 마치 산맥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똑바로 곧추 선 자세는 사람과도 비슷했지만, 헐록의 코 없는 허여멀건한 얼굴을 인간과 헷갈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죽은 눈과 오염에 얼룩진 피부, 물고기 배마냥 볼록한 뺨 위의 검붉은 피딱지 같은 모습은 이런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그들 사이로 탑처럼 비죽 솟아있는 오우거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 멍자국 같은 피부색의 뿔 달린 야수. 하나하나가 도끼날 만한 크기의 검은색 손톱은 그 못지 않게 위협적이었다. 와이스하웁트에서 이세야가 배운 바에 따르면, 오우거는 비행중인 그리폰을 위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어둠의 피조물 중 하나였다. 멀리서도 가공할만한 정확도와 뼈를 으깨놓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바위를 던져대는 그 능력은 공중에 있는 그리폰과 기수에게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안티바 시티 바깥을 장악한 무리에는 놈들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세야는 곧 이어 오우거의 수가 적어보인 것이 전체 무리에 비해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수천의 어둠의 피조물 사이에서 적어도 오십 마리의 오우거를 볼 수 있었고 - 그 말은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들이 그리폰 숫자의 두 배나 되는 오우거를 맞닥뜨릴 것이란 뜻이었다. 헐록과 젠록을 제쳐두더라도 이미 불가능한 숫자싸움이었다.

  그리고 헐록과 젠록을 제쳐두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최소 몇 마리나 되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대재앙은 그에게 일반적인 군대와 비교해서 재볼만한 어떤 단서도 제시하지 않았다. 어둠의 피조물에겐 따라 다니는 대장장이들이나 하인들이 없었으니까. 보급용 수레나 취사용 모닥불, 하다못해 변소조차 없었다.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존재들이었으니.

  젊은 엘프는 떨리는 시선을 돌렸다. "우린 싸울 수 없어요."

  "그렇지." 휴블은 검은발톱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그는 몸을 숙여 그리폰에게 명령을 속삭였고, 그들은 다시 폭풍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 "안티바인들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윗분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는 봤다고 믿고 싶군."

  그리고 그리폰이 대재앙을 품은 구름 속을 헤치고 날아오르는 순간, 이세야의 마음 속으로 기묘한 음률이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그것은 결코 실재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 흥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결코 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선율이 아니기도 했다. 그 가락은 그가 들어본 그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아름다웠다. 가슴 저리게 하는 천상의 울림이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느낌의 환희로 그를 끌어당겼고 - 그 느낌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검은발톱의 삐익 하는 새된 소리가 이세야를 최면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난폭하게 머리를 휘젓는 그리폰의 움직임에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휴블은 고삐를 놓칠 뻔 했다. 선임 감시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고삐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이세야는 비록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뻣뻣하게 안장에 앉은 자세로 미루어 그가 자신과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의 대담함에 약간 주저하면서, 그는 눈앞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겼다.

  휴블은 욕설과 함께 안장에서 펄쩍 뛰며 깨어났다. 곧바로 고삐를 느슨하게 푼 그는 검은발톱이 긴장을 풀도록 내버려뒀고, 폭풍구름 사이로 다시 상승하는 사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이세야를 향해 반쯤 몸을 돌렸다. "고맙네."

  "방금 그건 뭐였죠?" 동요한 채로 엘프가 물었다.

  휴블은 구름이 그들과 어둠의 피조물 무리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을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악마의 군주."

  이세야는 안장 뒤로 몸을 기대며 고정띠가 자신을 자리에 단단히 붙들어 매주는데 감사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신음소리 같은 작은 탄식은 금세 바람에 휩쓸려 갔다. 다리도 척추도 젤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재앙이니 당연히 악마의 군주가 함께 할 테지. 악마의 군주가 대재앙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 저 어둠의 피조물 무리 어딘가에 그 타락한 고대신이 실제로 자리하고 있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이 하늘과 검은발톱의 날개 뿐이라는 사실은 그를 두렵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조만간 악마의 군주가 이 아름답고 불운한 항구도시에 가져올 헤아릴 수 없는 파괴가 아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안티바 시티로 돌아오는 동안 이세야는 검은발톱의 등 뒤에 조용히 앉아 어둠의 피조물의 끔찍함과 그 달콤한 노래의 부조화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오염 때문이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막사에서 왕궁 하인들이 저녁을 날라오는 걸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이 그렇게 설명했다. 이세야는 간신히 이 압도적인 인상의 드워프에게 말을 걸 용기를 짜낼 수 있었고, 생각보다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뻣뻣한 붉은 수염과 흠집 투성이의 회색 플레이트 메일 아래, 감시자 사령관은 부하들을 신경쓰는 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노병이든 갓 들어온 신입이든 모두에게 들릴만큼 크게 울렸고, 아무래도 후자를 향한 것임은 분명했다. "오염은 우리가 어둠의 피조물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타락이 옮는 걸 막아주지만,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도 하지. 악마의 군주의 부름은 그들을 향한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듣게 될 콜링과도 같은 노래일 거고, 오염이 너희의 육체를 깊이 파고들 수록 더 강해질 테지. 만약 너무 오래 버티려 들다간 결국 거부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너희의 의무는 아직 선택할 수 있을 때 콜링에 응답하는 것이고."

  "우리가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들을수록 더 빨라지기도 합니까?" 이세야가 물었다.

  투랍이 어깨를 으쓱하자 강철과 실버라이트가 철그렁거렸다. "그럴 수도. 사람마다 오는 속도가 다르니까."

  "뭐, 참 기대되는 일이긴 하군요." 개러헬은 응원이라도 하는 양 자신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팡 내리쳤다. "그리고 오, 드디어 저녁이 나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식욕이 막 땡기는 걸요."

  이세야는 동생의 농담에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하인이 끌고 온 수레에서 나무그릇 하나를 집어 빵과 스튜를 채웠다. 음식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꿀 케이크이든 발효된 돼지 똥이든, 그에겐 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회색 감시자로 선택받았을 때 무척 자랑스러웠다. 감시자들이 최고만을 뽑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장 예리한 궁수, 가장 능숙한 마법사, 가장 뛰어난 전술가. 그에겐 노예나 다름없는 인간 도시에서의 엘프의 삶을 벗어나 도약하고, 동생과 함께 동등한 전장에서 자신의 기개를 펼칠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물론 그도 콜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회색 감시자에 대해 아는 이들은 감시자 입단식에서 받아들인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이 언젠가 그들을 광기와 죽음으로 이끌고 만다는 걸 알고 있었다. 30년 정도, 혹은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다지만 궁극적으로는 살아남는다 해도 모두에게 닥쳐올 운명이었다. 그 때가 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선택지는 지하대로로 향해서 마지막까지 어둠의 피조물을 하나라도 더 많이 죽이는 자살 임무 뿐이었다. 그것이 콜링 - 그 전에 죽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이었고 - 감시자들을 그림자처럼 두르고 있는 암울한 예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겐 항상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었다. 낭만적이고, 비극적이며, 이야기 속 영웅들에게 닥치는 결말 같은. 이세야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불꽃을 꺼트릴 무언가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 군대와 악마의 군주의 노랫소리는 그 안온함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맛을 느끼지 못하며 먹고, 생각 없이 마신 뒤, 본인이 뭘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빈 그릇을 하인의 손수레 위에 내려놓았다.

  식사 후,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휴블을 비롯한 몇명의 상급 감시자와 함께 국왕 내외와의 두 번째 알현을 위해 사라졌다. 나머지는 카드놀이나 주사위놀이 따위로 시간을 보냈고, 천박한 농담이나 안티바 시티에 오기까지의 허무맹랑하게 과장된 무용담을 주고 받았다.

  이세야는 무리에 끼지 않았고 귀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개러헬이 떠들썩하게 허풍을 늘어놓으며 청중들의 요란한 웃음을 자아내는 건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은 동료들의 불쾌한 기분을 돌리고 본인의 주의 역시 돌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겐 없는 능력이었다. 그는 그저 앉아서 감시자 사령관이 일행과 함께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들의 음울한 표정은 일이 잘 안 풀렸음을 알려주었다.

  "왕비는 여전히 싸우길 원한다." 투랍은 거친 저음으로 그들에게 결과를 전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보니 안티바 시티엔 달리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몸이 성한 선장들은 전부 안전한 해안을 찾아 떠나갔고, 몸이 성하지 않은 이들은 이미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상태이지. 그들이 어제 움직이기만 했더라도, 국왕과 왕비는 질서있게 대피하도록 행동할 수 있었겠지만...이제 눈 앞의 상황은, 왕궁의 식솔들조차 실어나를 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감시자들은 이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때 개러헬이 그의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누가 봐도 명백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투랍은 우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붉은 수염을 땋아둔 황동고리가 서로 부딪히며 짤랑였다. 우리에겐 세 척의 배와 충직한 선장 몇 명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걸 이용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대피시킬 것이다. 마법사, 궁수, 템플러 - 대재앙에 맞서 싸울만한 능력과 힘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그리고 정치적인 연줄을 가진 사람들도요." 흉터가 있는 여성 감시자 하나가 비꼬듯이 말했다. 등 뒤에 매인 검은색 지팡이로 미루어 마법사인 것 같았지만 이세야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투랍이 끄덕였다. 몇몇 감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갑옷 두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들 역시 병력에 포함된다. 그들 중엔 우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군대를 가진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보급원이 될 영토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겐 식량과 말, 무기, 물자가 필요할 것이다. 상인들과 귀족들은 그것들을 제공해줄 거고. 그걸로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이들은 어둠의 피조물 앞에 남겨지겠죠." 여성 감시자는 코웃음을 쳤다. "이래선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투랍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곤 터덜터덜 걸어가 중단된 카드놀이의 흔적 속에서 에일 잔 하나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보단 나아보이겠지. 창조주의 자비여, 덴디, 이건 대재앙이네. 나라고 이 결정을 좋아할 것 같나? 저 멍청한 왕족들이 하루 더 빈둥거린 덕분에 우리가 지킬 수 있었을 수백의 사람들이 죽게 생겼어. 심지어 최악은 그게 아니네. 우리는 그 왕족들을 직접 데리고 갈 거야. 나머지 대피인원은 배로 가겠지만, 국왕 엘라우디오와 왕비, 그리고 몇 명의 선택받은 보좌관들은 그리폰을 타고 안티바 시티를 탈출하게 될 걸세."

  흉터 투성이의 마법사, 덴디가 뒤로 주춤 물러서자 지팡이가 벽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누가 데려가는 겁니까?"

  "자네와 휴블이네, 사실. 검은발톱과 스크리악스는 우리 그리폰 중 가장 강하고 빠른 녀석들이니까. 공중에서 생길 수 있는 어떤 위험에서도 벗어날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오스티버, 페나달,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은 배로 갈 걸세. 그들의 재능은 수상전이 벌어질 때 더 유용할 테니.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가서 선장과 그 승객들이 이 거래의 명예를 확실히 지키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남은 그리폰을 타도록 해라. 전원이 한 명씩 데리고 탄다 - 단 한 명만."

  투랍은 그들 모두에게 시선을 돌렸고, 덥수룩한 붉은 눈썹 아래 그 눈빛은 엄격했다. "무리하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려다 그리폰의 기동성과 인내심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한다. 너희의 첫 번째 사명은 왕족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알겠나?"

  이세야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건 너무 생각없는 일이었다.

  "좋다." 투랍은 에일을 마저 들이켰다. "이제 너희를 그리폰들에게 데려가겠다. 빠르게 맞는 녀석을 찾도록. 아침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두 시간 안에 전부 떠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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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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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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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12 숭고의 시대

 

  이세야가 생애 두 번째로 그리폰 등에 올라탄 날, 그는 전쟁에 참여하러 떠나야 했다.

  그도 동생 개러헬도, 어떻게 봐도 준비가 된 상태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배멀미 하는 개구리보다도 시퍼래 보이는군, 상관이 그들을 그렇게 묘사했지만 그리 틀린 구석이 없었다.

  두 사람이 회색 감시자가 된 지는 이제 겨우 1년이었고, 그리폰 기병대 붉은 날개에 배속받은건 고작해야 네 달 전의 일이였다. 여전히 그들은 그리폰의 날개에 가려지는 범위를 흉내내기 위해 말안장 위에 거대한 나무판을 덧대고 타는 훈련 중이었다. 딱 한 번, 뒷편 안장에 끈으로 몸을 고정한 뒤 숙련된 감시자가 고삐를 잡은 상태에서 날아본 것이 개러헬과 이세야가 경험한 비행의 전부였고 - 그마저도 이 젋은 엘프들이 어지럼증이나 고소공포증 같은 애로사항을 겪는지, 괜히 쓸데 없는 훈련을 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시험에 불과했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였다면 그들은 아직 앞으로 1년 간은 공중전 구경도 못 해봤어야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재앙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네 달 전, 어둠의 피조물들이 새로이 깨어난 고대 신의 부름에 응답하며 깨어나 북쪽에서부터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고대 드워프의 지하대로를 통해 이동했고 깊은 땅 속에서부터 분출하듯 밀려나왔다. 그 갑작스런 기습에 테다스의 많은 나라들은 어둠의 피조물 군대을 상대로 적절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가장 처음으로 공격받은 안티바는 밀려드는 괴물 같은 군대에게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잃어나갔다. 흩어져 있는 영지 주둔군이나 외딴 지역의 마을 같은 건 어둠의 피조물에겐 방해거리도 되지 못했다. 무너진 성벽이 놈들의 발 아래 짓밟혔고, 사람들은 학살당하거나 지하대로로 끌려가 더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우아한 다리들과 조각품들로 유명한 강변 도시 셀레니는 나흘만에 포위공격에 무너졌다. 이후 수 주간 강물이 시체에 오염돼갔다. 안티바 시티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둥둥 떠내려오는 시체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부패해 부풀어오른 시체처럼 그들의 공포감도 커져만 갔다.

  이런 환란 속에서 젊은 감시자들의 훈련을 마칠 시간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매서운 바람에 찡그린 얼굴로 선임 감시자의 등 뒤에 꼭 매달려 안티바 시티로 날아간 이세야는 수도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티바 시티는 아른거리는 푸른 해안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셀레니의 폐허까지 이어지는 강자락을 따라 풍성한 녹색 목초지와 과수원이 도시 반경 10마일 가량을 두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 비옥한 땅의 경계에서, 대재앙이 안티바를 삼키고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을 따라 흐르는 오염이 그들의 발자국 아래 땅을 물들여 나갔다.

  하늘에서 1,000 야드나 떨어진 높이에서도 이세야는 놈들이 지나간 대지가 황량하게 메마르고 뒤틀린 걸 볼 수 있었다. 그 위에 펼쳐진 하늘 역시 음울한 검은 구름으로 흐려져 있었다. 대지가 스스로 흐르는 물을 빨아들여 없애버린 것처럼 메마른 계곡을 따라 낮게 흐르는 개울가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감시병처럼 늘어서 있었다. 농작지에는 녹색이라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썩고 시든 낟알들이 말라 비틀어진 회색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간혹 보이는 동물들은 까마귀 아니면 독수리였고, 깃털 하나 없이 피딱지 진 뒤틀린 그들의 몸은 어둠의 피조물 시체를 뜯어 먹으며 옮아온 대재앙의 오염 때문에 쪼그라들어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는 그저 검은 갑옷더미와 넝마 같은 깃발 덩어리처럼 보였다. 이세야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비록 어둠의 피조물들은 날지 못하지만 - 악마의 군주는 날 수 있었지만 놈은 아직 별로 목격되지 않고 있었다  - 놈들의 화살과 주문은 공중에 닿을 수 있었기에, 그리폰들은 그들을 피해 높은 고도로 날고 있었다. 에미서리와 오우거를 둘러싼 헐록이며 젠록 무리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이세야는 내심 그 사실에 안도했다.

  높은 고도에선 공기도 희박하고 추워서 그리폰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부대를 지나친 뒤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세야는 안티바를 가로지르는 내내 사람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다. 죽었거나, 도망쳤거나, 숨어 있겠지. 대신 안티바 시티 성벽 밖으로 수백여 개의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넝마를 걸친 피난민들은 수레와 엉성하게 만든 은신처에 몸을 의지한 채 구할 수 있는 것 무엇이든 먹어가며 절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심한 악취가 풍겼다. 수도는 대재앙의 소식이 닿자마자 성문을 걸어잠근 지 오래였지만 그들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이렇게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는 동료의 등에 기대 속삭였다.

  그리폰의 날개짓 소리와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목소리가 들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임 감시자는 용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휴블이었고, 이세야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헐록과 젠록에 맞서 싸워온 지긋한 나이의 숙련된 전사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그리폰 검은발톱의 등 위에서 와이스하웁트 근처를 정찰하며 보냈다. 쉽게 동요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안장에서 그를 돌아보는 표정만큼은 심각했다.

  "그래, 이대로 둘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시 그리폰을 이끄는 일로 주의를 돌렸다.

  몇 분 뒤 그들은 안티바 시티 상공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바람에 느슨해져 휘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붙든 채로, 이세야는 고개를 쭉 뻗어 검은발톱의 펄럭이는 날개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안티바 시티의 영광스런 위용에 대해선 책에서 읽은 적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항구도시의 풍경은 듣던대로 빛나는 보석 같았다. 대재앙은 아직 수도까지 미치지 않았다. 녹색 바다빛 터키석 바닥이 중앙대로의 하얀 대리석과 대비를 이루는 바다의 대로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황금 광장의 넓은 길목을 장식한 금박 입힌 십여 개의 조각은 이글대는 태양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그리고 숨막히는 위용을 굳건히 지키며 선 왕궁의 길다란 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저무는 해와 나란히 길게 뻗어 있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한 배는 이세야가 생각한 것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다. 왕실 전함이 몇 척, 그리고 안티바의 황금용이 새겨진 작은 배들이 보였지만 상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세야는 그들이 터무니 없는 금액의 승선료를 지불할 수 있는 승객들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태운 뒤 안전한 해안을 찾아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작은 어선들조차 자취를 감춘 듯 했다.

  뿐만 아니라 테라스가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에는 외부인의 흔적도 거의 없었다. 시장엔 인적이 드물었고, 노점상은 텅 비어있었다. 아직 대문까지 위험이 닥친 건 아니었지만, 안티바 사람들은 일찌감치 집안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다가올 폭풍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어 그들은 왕궁 외벽을 넘어 하강했고, 높은 돌벽에 가로막혀 이세야는 더 이상 도시의 풍경을 볼 수 없었다.

  궁성의 안뜰은 먼지폭풍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왕궁에 배치받은 이십여 마리의 그리폰들과 같은 수의 회색 감시자들이 도착하며 발생한 난장판과 소음은 궁의 하인들을 압도했다. 그리폰들은 특히나 까다로웠다. 그 거대한 야수들은 영역생물이었고, 가장 온순할 때조차도 성미가 급한 편인 마당에 오랜 비행을 거쳐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몇 마리는 외벽을 향해 날아올라 날개를 부딪히며 가까이 접근하는 누구에게든 괴성을 질러댔다.

  안티바인들은 그리폰들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감시자들에게 빵과 와인을 가져다 날랐고, 이세야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저 생물들과 몇 달을 가까이 지내며 빗질도 해주고 먹이를 먹이며 그 변덕스런 성미에 적응하려 했으나, 아직도 저 날개달린 맹수들에게 종종 위협을 느끼곤 했다.

  다 자란 그리폰의 몸길이는 부리에서 꼬리까지 12피트를 넘었고, 날개 폭은 그보다도 넓었다. 수컷은 보통 1,000파운드 이상의 무게를 가졌고, 암컷이라 해도 그보다 약간 덜 나가는 정도였다. 부리짓 한 번이면 거대한 사슴의 허벅지뼈 정도는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었고, 그 발톱에 걸리면 판금갑옷도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회색 감시자들이 보통 그 야수들이 거친 환경에서 오래 사람을 태우고 버틸 수 있도록 그리폰 기병으로 체구가 작고 가벼운 사람을 고르는 편이라곤 하지만, 건강한 그리폰은 보통 중무장한 남성 두 명을 태우고 싸울 수 있는 생물이었다. 그들은 공포라곤 모르는 격렬한 맹수였고, 야생의 아름다움과 불 같은 성미를 가졌다.

  이세야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의 힘과 우아함, 특유의 사향 섞인 체취를 사랑했다. 그들의 반짝이는 금색 눈이 빗질에 기분좋게 반쯤 감기는 모습이나, 털을 타고 울리는 그르렁거림을 사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거침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과, 오직 선택받은 기수만이 함께 나누는 비행의 축복을 사랑했다.

  그리폰은 언제나 선택할 줄 알았다. 누구도 그 거대한 야수가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태울 수는 없었다. 그리폰은 싫어하는 주인에게 노예처럼 속박되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산줄기에 들이박을 생물이었다. 그들은 결코 복속되지 않았고,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리폰은 그들에게 동등한 파트너이거나, 적이 될 뿐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그리폰 기병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그토록 긴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세야는 안티바인들이 그 거대한 날개달린 손님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걸 책하지 않았다. 그리폰은 결코 개나 말과는 달랐고, 올레이 귀족들이 보석줄을 매어 데리고 다닌다는 사냥용 얼룩무늬 고양이와도 달랐다. 그들은 자존심도 강하고 질투할 줄 아는 야성적인 생물이었고 현명한 이들은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회색 감시자 또한 이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하인들을 도와 그리폰을 위한 목욕통과 물을 날랐고, 상급 감시자 한 명을 골라 그 맹수들을 지켜보도록 한 뒤 열을 지어 궁으로 향했다. 그리폰들은 나중에 따로 먹이를 줄 예정이었다. 이렇게 밀집된 상태에서 고기를 먹였다간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이세야는 죄없는 하인들이 그들을 잘못 건드리지 않길 바랐으나, 오늘 밤 그는 그리폰 감시 담당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동생과 함께 궁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개러헬은 걸어가며 금발머리에 앉은 먼지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마 그리폰 용 식수를 슬쩍 해다가 얼굴을 씻은 듯 보였다. 이세야는 웃음을 억눌렀다. 그의 남동생은 지나치게 허영을 부리는 편이었지만...적어도, 근거 없는 허영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엘프들은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아름다운 편이라고들 하지만, 그 기준으로도 개러헬은 특별히 빼어났다. 높은 광대뼈, 빛나는 녹색눈, 아가씨들의 - 그리고 적지 않은 사내들의 - 무릎에서 힘을 빠지게 하는 그 미소. 그는 자신에 비해 훨씬 출중한 외모를 가졌고, 솔직히 이세야는 그 사실이 반가웠다. 테다스의 엘프 여성에게 미모는 독을 품은 축복이었으니.

  물론 오늘 개러헬은 미소를 띠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안티바 시티의 분위기를 음울하다고 한다면, 왕궁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이나 다름 없었다.

  휴블은 왕궁의 수비용 외벽과 장식용 내벽을 지나 그들을 이끌었다. 하인들은 회색 감시자들이 지나가면 벽에 납작 몸을 붙이고는 깜빡이는 두 눈에 두려움 섞인 희망을 품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왕궁 수비대원들은 안티바의 황금용을 자랑스럽게 두른 의장용 갑옷을 걸치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인 뒤 문 양쪽에 절도있게 버티고 섰다.

  휴블은 빠른 속도로 그들을 이끌었지만, 알현실까지 가는 길은 마치 영원히 걸리는 느낌이었다. 이세야는 언제나 와이스하웁트가 세상에서 제일 큰 요새라고 생각해 왔으나, 안티바 왕궁도 만만치 않은 듯 했다.

  마침내, 벽을 메운 붉은색과 노란색 장미들로 향기가 가득한 안뜰을 지나, 그들은 왕과 왕비가 기다리는 작은 홀에 들어섰다. 안티바 회색 감시자를 이끄는 붉은 수염의 드워프, 감시자 사령관 투랍을 비롯한 다른 스무 명의 안티바 감시자들이 이세야 눈에 고위 귀족처럼 보이는 고상한 차림새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 옆에 서 있었다.

  "휴블." 감시자 사령관이 퉁명스런 인사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는데 별 문제는 없었겠지, 아무쪼록?"

  "그다지요." 휴블이 대답했다. 그는 왕과 왕비에게 정식으로 예를 취했다. 국왕 내외 역시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엘라우디오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이세야의 추측으로. 그는 선한 인상이었지만 다소 소심한지 매번 움직일 때마다 망설임이 눈에 띄었다. 왕비 쥬바나는 조금 더 나이들어 보였다. 풍성한 갈색머리 사이로 회색빛이 넓게 번져있었고, 웃음주름이 부드럽게 얼굴 위로 선을 이루었다.

  이세야의 기억이 맞다면, 그들은 왕실에 아주 드문 사랑으로 맺어진 결합이었다. 왕비는 부유하고 명망 높은 상인 가의 여식이었지만, 안티바의 귀족 서열로 치자면 터무니없게 낮은 혈통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엘라우디오는 그를 선택했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국민들은 둘의 결합을 지지해왔다. 그 지지에 왕비 쥬바나가 성실한 예술의 후원가이며 지닌 부의 상당 부분을 수도를 아름답게 하는데 투자했다는 사실이 한 몫 했다는 건 의심할 바 없었다. 그 영향 덕에 안티바는 테다스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이제는 올레이의 여느 도시들이나 쇠락해가는 티빈터 제국과도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우리 도시를 지키기 위해 왔소?" 왕비 쥬바나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홀 안이 어찌나 조용했는지 청중들 사이로 울림이 퍼져나갔다. "안티바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우릴 구해주러 온 것이오?"

  그토록 고요하고 엄숙한 청원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회색 감시자들은 바로 그러기 위해 온 것이었다. 휴블과 투랍은 시선을 주고 받았고, 이어 인간 감시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왕비의 찌푸려진 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니라고? 이 도시가 무너지면 수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오. 조각도, 음악도, 예술도. 우리 도서관도. 우리의 모자이크도. 그 작품 하나하나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루는 지식들마저. 이토록 오랫동안 축적돼온 유산을 저버리라는 뜻은 아니겠지."

  "안티바 시티는 지켜낼 수 없습니다." 휴블은 침착한 어조로 대답하며 두 왕족에게 시선을 향했다. "극히 짧은 기간조차도요. 며칠, 혹은 운이 좋아봐야 몇주일 것입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준비할만한 경고조차 받지 못했으니까요. 어둠의 피조물들이 안티바를 너무 빠르게 찢어놓았습니다. 도시에는 충분한 음식도, 훈련받은 병사도,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갑옷도 없습니다. 바다가 어느 정도는 도움될 수 있겠으나, 어둠의 피조물들은 우리를 굶겨 죽이기 전에 이미 성벽을 타고 넘어올 것입니다."

  "우리 성벽은 견고하오." 국왕 엘루아디오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투랍은 퉁명한 드워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함을 품고 대답했다. 이세야는 그 드워프가 이 사람들을 제법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의 희망을 되도록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 몇주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그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오?" 왕비가 물었다. 부드러운 음률 같은 목소리는 그 안에 담긴 불신 탓에 미약하게 떨려왔다. "회색 감시자란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오? 모든 음유시인들이 그대들의 전설에 대해 노래했건만, 우리더러 첫 공격을 맞기도 전에 이 도시를 - 이 나라 전체를 - 포기하라고 권한단 말이오?"

  "그 도시라는 건, 내륙지역을 어둠의 피조물에게 점령당하고 바다를 등지고 있는 도시 말씀이군요." 휴블이 대답했다. 존중을 두른 채 굳어 있는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초조함과 분노가 그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 "지도 상에서 안티바 시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들에게는 지원군도 보급도 전해질 수 없습니다. 놈들의 군대가 이곳 성벽을 공격할 때 쯤엔 나라의 다른 모든 곳이 정복당한 다음일 것입니다.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공성 무기가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놈들은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우거는 젠록을 집어던져 성벽을 부수고 돌더미를 사람들에게 쏟아내겠지요. 그 젠록들이 살아남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충분한 수를 던져놓고 나면, 대재앙의 오염이 퍼져나갈 것이고, 그러면 안티바 시티는 끝나는 겁니다. 이 가정에는 악마의 군주는 들어 있지도 않지요. 만약 놈이 나타난다면 우리에겐 며칠조차 없습니다."

  국왕 부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세야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안티바 귀족 무리를 살폈다. 그들 역시 죽을만치 두려워하는 게 보였다. 그 역시 그들 못지 않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대재앙이 테다스를 덮친 지도 200년이 지났고, 헌터펠의 토스(역주 : 세 번째 대재앙의 고대 신)에 대한 전설도 어린아이 동화 속에 흐려진 지 오래였다.

  마침내 괴물들은 침대 밑에서 튀어나왔고, 놈들의 발톱은 듣던대로 날카로웠다.

  "제가 휴블에게 감시자 부대를 데려오라고 한 것은 적어도 사람들을 대피시킬 기회라도 잡기 위해서입니다." 투랍은 여전히 고집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배들이 리알토 만으로 사람들을 태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큰 섬들 몇 곳이 대피처가 돼줄 것입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헤엄도 칠 줄 모르고 배도 없으니, 그곳에서라면 두 분 폐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안전할 수 있을 겁니다."

  국왕 엘루아디오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삼 분의 일이라도 건지면 다행일 걸세."

  "버텨서 싸운다면 하나도 건질 수 없는 겁니다." 투랍이 말했다. "폐하, 여기 있는 감시자들은 폐하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러 온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먼저 그들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셔야만 합니다."

  "생각해 보겠네." 왕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소리없는 박수를 한 번 쳤고, 이는 곧 알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과 휴블은 국왕 내외에게 예를 취했다. 다른 감시자들과 함께 그 동작을 따라한 이세야는 홀을 나서는 사령관들을 뒤따랐다.

  "정말 우리더러 이 도시를 지켜달라는 거야?" 장미 정원을 다시 지나는 사이 개러헬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림 몇 개랑 분수 따위를 위해서?"

  꽃의 아름다움도 이세야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고, 피부를 스치는 햇빛도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성문 밖에 진을 친 사람들과 주어지지 않을 구원을 기다리는 그들의 절박한 희망에 대해, 그리고 마찬가지로 절박한 문 안쪽의 사람들을, 국왕 부부가 공성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불가능한 희망에 매달릴 경우 모든 걸 잃고 말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렇겠지." 그는 동생에게 마주 속삭였다. "사람들이 그렇잖아. 다들 희망을 원하지."

  "우리가 이미 희망을 가져왔잖아." 개러헬이 대답했다. "우리는 상황이 허용하는 가장 큰 희망을 가지고 온 거라고. 그런데 그보다 더 원하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이세야는 우울하게 고개를 저으며, 지금 자신이 느끼는 비탄을 말로 풀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원을 지나 상대적으로 서늘한 궁의 안쪽 뜰에 들어서자 몸이 떨려왔다. 햇빛은 그를 조금도 덥혀주지 않았고, 그늘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투랍은 그들은 경비병 초소 중 하나에 데려다 놓았다. 그곳은 감시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리돼 있었다. 대재앙이 문앞까지 닥쳐온 마당에도, 궁의 하인들은 깨끗한 담요를 깔고 벽에 말린 라벤더 뭉치를 걸어두었다.

  이세야는 그 작은 보랏빛 꽃에서 풍기는 톡 쏘는 달콤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아름다움이란 개념도 알지 못했고,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사소한 배려 따위에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죽이고 파괴하고 오염시킬 뿐,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 라벤더는 다시 자라지 않을 테지.

  그는 침대 한쪽에 묵직하게 몸을 얹고, 어떤 하인이 그를 위해 세탁하고 개어 놓았을 거칠거칠한 모직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아마 그들은 안티바를 구하러 온 감시자들에게 감사하며 가장 좋은 이불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구해야 해." 그는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작은 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한 말도 아니었고, 혹여 누군가 들었다 한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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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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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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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 용의 시대

 

  와이스 하웁트.

  부러진 이빨의 거대한 상아빛 언덕을 등진 먼 요새의 풍경이 드러나자 발리야는 경이에 차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은색 술장식이 달린 깃발이 탑 위에서 펄럭였고, 거리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발리야는 그 문양이 푸른 바탕에 새겨진 강철 같은 회색 그리폰임을 알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두터운 나무와 강철로 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제니비티 수도사는 그의 일지에 그 문이 말 세 마리가 나란히 열을 지어 지나갈 수 있을만큼 넓다고 기록했으나, 발리야가 선 위치에선 와이스하웁트의 돌벽 아래 고작 손톱만한 크기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지난 몇 주 간 그는 이 곳을 꿈꿔 왔다. 회색감시자의 오래된 성채, 수 세기에 걸친 영웅들의 마지마 휴식처,  대재앙의 공포에 맞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그리고 이제는 그의 집이 될 곳.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 섞인 설렘으로 몸이 떨려왔다.

  함께 온 동료들의 표정엔 그런 흥분 같은 건 드러나 있지 않았다. 대신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두려움만은 그 위에 떠올라 있었다.

  발리야와 함께 온 이들은 총 네 명이었다 - 한 번에 징집하기엔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들었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 사이로 회색빛이 희끗 비치는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 외엔 전부 열여섯에서 열아홉 남짓의 또래였다. 그들이 전부 마법사라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감시자들은 테다스의 각각의 마탑에서 한 명씩만 징집하곤 했다.

  하지만 전통은 무너졌다. 무참히.

  커크월에서부터 시작되어 올레이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된 움직임을 따라, 테다스의 마법사들은 모든 곳에서 사냥당하고 배척받았다.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템플러 기사단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어쩌다, 왜 그렇게 됐는지 발리야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련생에 불과했기에 누구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고, 들리는 소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으리만치 혼란스러웠다.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거라곤 와이스하웁트가, 회색 감시자가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테다스의 다른 모든 곳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마탑 전체가 파괴된 곳도 있다고 들었다. 탑이 통째로 무너졌고 모든 마법사와 수련생들이 - 어린아이들조차 - 오직 마법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죄로 살해당했다고. 어떤 탑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안도랄의 손길을 점령한 마법사 군대에 합류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곳의 이야기였다. 이곳은 아니다. 안더펠스의 이들은 모두 세상를 진짜로 위협하는 게 뭔지 기억하고 있었고, 서로 싸우면서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지 않았다. 소문이 처음 탑에 닿았을 때, 선임 마도사는 와이스하웁트로 빠르게 연락을 취했고 며칠 안에 감시자들의 답장을 받았다. 회색 감시자에 합류하고자 하는 마법사는 누구든 환영이라고. 어떤 템플러도 그런 마법사들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 감시자의 징집의 권한은 불가침 영역이었기에, 피난처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자의 초대를 수락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회색 감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고난의 삶과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으니. 그들은 분명 고귀하고 오래된 집단이었고, 테다스 어디서든 바드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했지만...누구도, 진정으로 영웅적인 이들이나 진정으로 절박한 이들 외에는 어떤 그 누구도,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발리야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템플러와 싸우다 죽고 싶진 않다는 것과, 마탑보다도 더 확실하게 엘프에게 인간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곳은 회색 감시자 뿐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테다스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되는 소지품을 챙긴 뒤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를 비롯한 한 줌의 젊은 마법사들과 함께 와이스하웁트로 함께 가겠다고 선언했다. 회색 감시자가 되거나, 그러기 위해 죽겠다고.

  그리고 이곳, 부러진 이빨의 그림자 아래에 선 그는 다른 이들의 얼굴에 드러난 후회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감정은 두려움만큼이나 뚜렷하게 티가 났다. 템플러들은 광신도였지만, 적어도 사람이긴 했다. 그들은 설득할 수도 있었고 감언이설로 꾀거나 협박할 수도, 뇌물을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로는 그 모든 게 소용 없었다. 그저 거친 삶과, 확실한 죽음만이 있었다.

  발리야는 발을 내딛었고, 와이스하웁트 정문으로 향하는 길고 가파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그들은 늦은 오후 무렵 와이스하웁트로 이어지는 길 위에 들어섰으나 정문에 도달한 건 이미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였다. 에일파스는 도중 두 번이나 물을 마시며 쉬자고 청했다. 끝없는 나선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탑에서의 삶 덕에 선임 마도사는 나이에 비해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러진 이빨로 향하는 길과 비교할 만한 건 마탑에 존재하지 않았다.

  천 피트는 될 법한 수직 거리가 와이스하웁트의 정문을 황량한 대지와 구분짓고 있었다. 그곳까지 이르는 적어도 3마일을 될 법한 돌길 위로는 경사면을 내기 너무 가파른 부분마다 오래된 돌계단이 구불길을 이루고 있었다. 수 세기에 걸쳐 회색 감시자들의 발길 아래 오목하게 닳아진 계단 위로 마법사들의 로브자락이 스칠 때마다 뼛가루 같은 먼지가 흩날렸다.

  가는 도중 길이 넓어진 대목 두 군데에 고행길에 작은 휴식을 취하도록 좁다란 벤치들을 새겨놓은 걸 제외하면 그 여정에는 어떤 안락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리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궁병을 위한 좁은 틈새가 예리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햇살 아래 이 길을 따라 오르는 자는 누구든 화살에 맞기도 전에 이미 열기나 바람에 지쳐 나가떨어졌을 테니까. 서늘한 여명빛 아래에서도 그 길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마침내, 발리야의 두 다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그를 자비롭게 산 아래로 내던지려 할 때 쯤 마지막 계단에 도달했다. 일행의 머리 위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쳐왔다. 아래로는 황량한 안더펠스의 대지가 회색과 붉은색의 그림자 속에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성벽 아래 움푹한 그림자 정도로만 겨우 보이는 작은 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선임 마도사는 지팡이로 그 문을 두들겼고, 잠시 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회색 튜닉과 바지를 입은 무뚝뚝한 인상의 여자가 안쪽에 서 있었다. 낡고 헤진 소매 사이로 대장장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이 드러났다. 입술 위를 가르는 오랜 상처가 앞니 바로 앞에서 하얀 흉터를 이루며 아물어 있었고, 그 이빨들은 은으로 이루어져 별빛 아래 반짝였다. 징 박힌 전투망치가 낡은 허리띠에 매여 있었다.

  "호스버그의 마법사들이오?" 그가 물었다. 발리야는 그게 어디 억양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퍼렐던일지도. 그는 퍼렐던 사람들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는 피로에 지친 상태였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들어오시오. 방으로 안내하겠소. 원한다면 씻을 물과 음식을 주겠소. 오늘 밤은 일단 쉬시오. 다음 일정은 아침에 얘기하기로 합시다."

  "물론이지요." 선임 마도사가 대답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호스버그 마탑의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입니다...아니, 였다고 해야겠군요. 아직도 그렇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으니. 이쪽은 발리야, 베리트, 파딘, 세카입니다. 젋은 친구들이지만 다들 훌륭한 친구들입니다. 당신들에게 힘을 보태고자 이곳에 왔고요."

  "술웨라고 하오." 은니를 가진 여자가 대답했다. "당신들의 재능은 훌륭하게 쓰일 것이오." 그는 요새로 다시 들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일파스는 지팡이를 내리고 작게 중얼거렸고, 끝에 달린 보석이 미약하게 빛을 발했다.

  에일파스의 빛나는 지팡이가 만들어낸 부드러운 불빛과 그를 뒤따르는 다소 부족한 학생들의 마법을 앞 에 둔 채, 호스버그의 마법사들은 와이스하웁트로 들어섰다.

 

* * *

 

  새벽이 되자 술웨가 돌아와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를 데리고 개별 면담을 위해 사라졌다. 어디로 향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분 뒤, 잘생긴 젊은 엘프 한 명이 문을 두들겼다. 그는 감시자의 푸른색과 회색으로 된 의상을 뻐기듯이 가볍게 걸치고 있었지만 술웨의 군율 잡힌 딱딱함에 비하자면 훨씬 덜 부담스러운 느낌이었고, 나이 또한 그들과 다섯 살 이상 차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진한 꿀색 머리칼이 물결치듯 그의 어깨를 뒤덮었다. 입가의 느긋한 미소 또한 따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들고 온 뚜껑 덮인 커다란 바구니에선 감질나게 하는 갓 구운 빵냄새가 슬그머니 풍겨왔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열여섯의 베리트가 간이 침대에서 앉아있던 자세를 똑바로 곧추세우며 블라우스를 슬쩍 끌어내렸다. 그 엘프 감시자는 입가에 슬쩍 걸린 미소 외엔 전혀 눈치챈 기색이 없었다. 그는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어린 마법사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와이스하웁트에 온 걸 환영해." 그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베리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발리야는 졸지에 그의 인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내 이름은 캐로넬이야. 너희의 기초 평가와 초반 훈련을 담당할 예정이지. 그리고, 아침 식사도." 그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편하게 들어. 빵이랑 염소 치즈야. 좀 심심한 맛이지만 나쁘진 않지. 그렇게 사치 부릴 여유는 없어서."

  "고마워요." 누군가는 대답을 해야 했기에, 발리야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캐로넬은 지나치게 잘생긴 편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는 빠르게 일어나서 빵 한 덩어리를 집어 들고 바구니를 세카에게 건넸다. "평가라니 어떤 걸요?"

  혹여 캐로넬이 홍조를 눈치챘다 한들 그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친근한 태도로 선임 마도사의 빈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그는 모두에게 시선을 향했다. "호스버그에서 너희가 뭘 배웠는지. 너희가 어둠의 피조물과 감시자에 대해, 테다스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마법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나,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 혹은 우리에게 쓸모 있을만한 기술을 알고 있는지."

  "꽤 많은 내용인데요." 발리야는 입 안에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삼키는 게 쉽진 않았지만, 입 안이 마른 이유로 댈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캐로넬은 짖궃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뭐, 좀 있다고 해야겠지. 많지는 않을 수도. 우선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하겠어.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뭘 알지? 혹시 맞서 싸워본 적 있는 사람?"

  "저요." 세카가 대답했다. 그는 매사에 진지한 성격의 자그마한 소년이었고, 곧은 검은 머리와 커다란 눈 때문에 열여섯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탑에 가기 전, 헐록 무리가 우리 농장을 덮쳤어요. 화살과 쇠스랑만 가지고는 그놈들을 막아낼 수 없었고, 그래서 제가 불태웠죠. 그게 제 마법이 발현된 순간이었어요."

  발리야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동료를 돌아봤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고, 그가 그런 일을 겪고 살아남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세카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직 정식 마법사조차 아니었다. 진입의식을 겪은 적이 없으니, 그는 아직 수련생 신분인 셈이었다.

  혹은 겪을 필요가 없는 쪽일지도. 그들은 이제 전부 이단 마법사인 셈이니 앞으로 영영 진입의식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직 탑의 마법사들만이 그 끔찍한 의식을 견뎌야 했는데, 더 이상 마탑이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세카야말로 그들 중 가장 노련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캐로넬은 그 이야기에 제법 감명받은 듯 보였다. 그 엘프 감시자는 뚜렷한 존중을 품고 세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다른 이들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은?"

  발리야는 다른 이들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도 역사책에서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읽은 적 있었고, 그 끔찍한 괴물들과 맞서 싸운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엘프든 인간이든 안더펠스에서 헐록과 젠록, 아기를 잡아먹는 오우거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한 명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본 적이나, 전투에서 그 끔찍한 무리와 맞선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 배울 게 아주 많겠군." 캐로넬이 말했다. "너희가 감시자가 된다면,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당연하지만 테다스의 사람들을 어둠의 피조물 손아귀로부터 지켜내는 거야. 개인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법도 익혀야 하지. 놈들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해. 종류, 전술, 발생지와 능력 따위를." 엘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너희 모두 마법사니까,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봐도 되지?"

  발리야는 동료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캐로넬은 만족스런 눈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아주 좋아. 그럼, 입단 의식을 거치기 전에, 밥값이나 할 겸 - 그리고 좀 쓸모있는 내용도 배울 겸 - 도서관으로 가자."

  "밥값을 한다고요?" 세카가 물었다.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자신의 연구에 너희의 도움을 요청했어." 캐로넬이 대답했다. "영광스런 업무를 맡은 줄 알아. 눈치로 봐선 혈마법과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행정관이 입을 꾹 다물고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더라고. 뭐가 됐든 꽤 오래된 것일 거고. 어쨌든 너희 마법사들은 오래된 책 같은 거 엄청 좋아하잖아? 아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그 온갖...양피지 더미와. 먼지와 함께."

  "혈마법이라고?" 세카의 속삭임이 작게 울려퍼졌고, 그의 불안한 시선이 발리야에게 닿았다.

  발리야 역시 그 어린 소년이 말하지 않은 감정을 함께 느꼈다. 혈마법은 고통과 희생을 바탕으로 삼는 테다스 전역에서 기피되는 주술이었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정신과 육신을 조종하는데 사용되곤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둠의 피조물과 연관돼 있는 거라면...

  발리야는 어둠의 피조물이 그런 마법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그들은 의지라곤 없는 괴물에 불과하다고 들었고, 혈마법을 쓰려면 고도의 지능이 필요했다.

  "대충 그렇다는 거야." 캐로넬이 말했다. "너희가 찾아야 하는 건...감시자들이 이상하게 굴었던 기록 같은 거야. 명령을 무시했다든가, 자리를 무단이탈했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아니면 부자연스러운 어둠의 피조물 같은 거 -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놈들이라든가.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제각각 벌어진 일일 수도 있어. 둘 다 찾아야 해. 물론 목격한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암호화된 기록일 수도, 지나치게 과장돼 있거나 왜곡돼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떤 기록이든 간에 찾아만 낸다면 유용할 거야. 물론 일반적인 탈영과 그런 불가사의한 실종을 구분한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고, 그 중엔 전투 중에 몰살 당해 사라진 전초지도 있을 거야. 어떤 것들은 수 세기 전의 기록이라 읽기 난해한 언어로 기록돼 있을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도록 해."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발리야가 물었다.

  "오늘부터."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일어서며 짙은 푸른색 튜닉에 주름이라도 잡힌 양 문질러냈다. "정확히는, 식사가 끝나는 대로."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발리야는 긴장된 흥분감으로 들뜬 채 가까스로 음식을 삼켰다. 분명 배가 고팠었는데, 빵도 치즈도 입 안에서 톱밥이라도 씹는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자 캐로넬은 그들을 이끌고 먼지 쌓인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오른편 돌벽을 따라 그리폰을 타고 갑주를 걸친 감시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도륙하는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왼편에 난 궁수들을 위한 들창을 통해 색 바랜 태피스트리 위로 간신히 햇빛이 비쳐들었다.

  태피스트리 사이로 무기들도 장식돼 있었다. 아마도 어둠의 피조물 것인 듯 했다. 조잡한 검은 결정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무기들. 오래된 얼룩이 검날을 덮고 있었다. 아마도 피겠지.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거든가. 발리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는 오한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잘 봐둬야 해." 세카가 팔꿈치 근처에서 속삭였다. 소년의 눈은 움푹 패인 피투성이 방패에 꽂혀 있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봐 두고, 그놈들을 막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해야 해. 입단 의식, 콜링...그 모든 것들은 어둠의 피조물을 막아낼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거야.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이해할 때에야."

  발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오랜 무기들과 그 무기들이 쓰였을 끔찍한 전장을 그려낸 태피스트리를 잠깐동안 눈에 담았다. 곧바로 시선을 떨군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고, 캐로넬을 따라 긴 나선계단을 지나 와이스하웁트의 대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시선은 발끝에 고정돼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성당에 가까워보이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아치형 창을 통해 연병장이 내려다 보였고 구름 사이로 비쳐든 햇빛이 이어지는 방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누런빛의 책더미와 봉인된 스크롤 뭉치를 품은 회색 석조 책장이 마법사들 앞에 끝도 없이 펼쳐졌다. 철제 샹들리에가 향초를 얹고 삐걱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밀랍과 향나무, 오래 된 재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벽에는 상징적인 그리폰과 옛 문장들, 그리고 장식용 식물들이 - 오렌지, 석류, 잘 익은 포도 따위의 - 화려하게 조각돼 있었다. 불모의 안더펠스에서 조각가가 그리워한 과일들이겠군, 발리야는 생각했다.

  "네 번째 대재앙 때의 자료부터 시작하면 될 거야." 캐로넬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중앙 도서관 옆으로 이어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오랜 기록들은 대부분 우리보다도 연식이 오래 됐지. 너희들 중 옛 언어에 능통한 이가 있다면 기꺼이 보여주겠다만...아마 아닌 것 같으니 네 번째 대재앙을 다룬 연대기 정도로도 이미 충분히 벅찰 거야."

  그는 아치형 통로 옆으로 비켜서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방 안의 책꽂이는 윗줄 절반 정도가 똑같은 가죽표지를 가진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용한 방에서 필사가들이 적어내렸을 법한 공식 기록처럼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회색 서책들 아래로는 거대한 철제 상자 몇 개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그 중 두 개가 열려 있었고, 안에는 크기 별로 정리한 것 외에 다른 분류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책더미, 종이뭉치, 양피지 조각들 따위의 자잘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상자 안에 있는 건 제일 기초적인 것들이야. 보고서 원본이나 전장에서 남은 쪽지, 감시자들과 병사들이 보냈던 편지들 같은 거. 우리가 찾고 있는 걸 발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이지." 아치벽에 기대 선 캐로넬이 말했다.

  발리야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유리로 된 관 하나가 방의 한 가운데 하얀 대리석 연단 위에 놓여 있었다. 관의 머리 부근에서 나선을 이루며 천장까지 뻗어있는 한 쌍의 거대한 검은색 뿔은 끄트머리가 그림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오래된 관이었다. 벽과 뚜껑을 이루는 유리판들은 약간 착색되긴 했지만 오래된 유리에서 보일 수 있는 그 어떤 흠집이나 일그러짐도 없도록 공들여 다듬은 티가 났다. 관을 이루는 발리야의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유리면 하나하나는 그 어느 것도 흠집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반쯤 몽롱한 상태로, 그 젋은 엘프 마법사는 아치 통로를 지나 관을 향해 다가갔다. 격자무늬 놋쇠 틀 사이 유리 너머로 옅은 햇빛을 머금고 미약하게 반짝이는 실버라이트 중갑옷 한 벌이 보였다. 의장용 갑옷 같진 않았다. 감시자의 그리폰 문양이 흉갑 위에 새겨져 있었고, 투구와 견갑 위로도 단순한 양각무늬가 장식돼 있었지만, 딱 보기에도 사용감이 느껴지는 실전용 갑옷이었다. 가죽끈에는 땀 얼룩이 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손질한 사람이 누구였든 간에 패인 자국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속이 빈 완갑 한 쌍이 두 개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평범한 가죽 검집에 싸인 긴 단검과 양 끝에 회색과 흰색의 한 쌍의 깃털이 술장식처럼 달려있는 우아하고 정교한 장궁이었다. 세월에 침식당한 그 얼룩덜룩한 깃털을 보는 순간, 발리야는 깨달음과 함께 숨을 훅 들이켰다.

  개러헬의 것이야.

  개러헬은 테다스에서 누구보다도 유명한 엘프 영웅이었다. 회색 감시자였던 그는 네 번째 대재앙을 막아낸 동맹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 그리고 그 스스로 악마의 군주 안도랄을 해치우고 어둠의 피조물 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였다.

  엘프의 아이들은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개러헬은 그들의 심장에 특별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존재였다. 엘프로서, 그는 그들과 똑같은 종류의 모멸을 겪어낸 이였다. 추방자였고, 멸시당했고, 누구의 존중도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그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그의 오랜 적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냈다.

  그는 단신으로 네 번째 대재앙을 막아내고 테다스를 구한 이였다.

  발리야의 손길이 경애를 담고 관의 유리면 위를 살짝 스쳤다. 그는 감히 그것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개러헬의 제단에 얼룩이라도 남긴다면 크나큰 불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스침만으로도 어떤 전율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

  다른 마법사들이 그의 뒤로 하나 둘 들어섰다. 그들 역시 그 관과 왕관처럼 둘러진 투박한 검은 뿔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스런 표정은 이내 그 유리관 안의 무기와 갑옷이 누구의 것인지 - 그리고 마치 비석처럼 두르고 선 뿔의 주인이 누구인지 - 조용한 깨달음과 함께 경이로 바뀌었다.

  그 뒤편에서, 캐로넬이 미소지었다. "우린 모든 대재앙의 유물들을 여기 모아두니까. 여긴 그냥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야. 쓰러진 자들을 기리는 전당이기도 하지." 그는 아치벽에서 몸을 떼고 한 발 물러섰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도서관 안에는 언제나 감시자들이 있을 거고, 행정관의 사무실도 바로 근처에 있어. 저 뒤쪽 오른편에 오우거 뿔 진열장 뒤로 화장실도 있고. 난 저녁 먹을 때 다시 부르러 올게."

  그는 그렇게 사라졌고, 네 사람은 서적들과 상자, 악마의 군주의 뿔과 함께 우두커니 남겨졌다.

  "저거 진짜 개러헬 무기일까?" 파딘이 속삭였다. 그들 중 가장 나이도 많고 키가 큰 그는 곰보자국이 남은 뺨을 가진 어딘지 어설픈 구석이 있는 금발의 소년으로 조금이라도 덩치가 작아 보이고자 하는 부질없는 소망 덕에 늘 어깨를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지." 발리야가 대답했다. "감시자들이 가짜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어디부터 시작할까?" 세카가 질문했다. "공식 기록? 아니면 상자?"

  발리야는 망설였다. 그는 네 번째 대재앙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개러헬의 영웅담은 익숙한 이야기였고, 악명 높은 호스버그의 공성 기간을 다룬 "쥐를 먹은 자의 비탄"이나 "다섯 아버지를 둔 고아" 같은 오랜 동요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병사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같은 건 미지의 영역이었다. 네 번째 대재앙은 십 년도 넘게 이어지지 않았던가? 어마어마하게 긴 전쟁이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어둠의 피조물의 행적을 찾기 위해, 의무를 저버리고 이탈한 감시자의 기록을 찾기 위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한단 말인가?

  "전투지도부터 살펴보자." 그는 결정을 내렸다. "감시자들의 이동경로에서 뭔가 찾아낼지도 몰라. 그림 한 장이 천 마디 말보다 가치있다고들 하잖아?"

  "어떻게 봐야하는지 네가 알고 있다면야." 베리트가 웅얼거렸다. 그 예쁘장한 금발머리는 캐로넬이 자신을 무시한 것에 아직도 뿔이 나 있는 듯 했다.

  딱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딘이 감시자들의 공식 전투지도가 담긴 거대한 책을 들고 왔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하나씩 넘겨나갔다. 굉장히 낡아 보이는 책이었지만, 세월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데다가 보호 주문이 걸려있는 덕에 강이나 숲을 표시한 색상은 갈회색 양피지 위에서 처음 그렸을 때처럼 선명했다.

  거의 첫장부터 이미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지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 군대는 단순한 검은 기호로 표기돼 있어 그 위협적인 느낌이 오히려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진군하고 또 진군하여 왕국을 무너뜨리고, 마을과 촌락을 지도에서 지워가며 살육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발리야는 그 획일화된 기호만 가지고선 어떤 종류의 어둠의 피조물이 있던 건지, 어떤 식으로 정복해나간 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움직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아마 그들이 그 대군과 맞선 방식에는 어떤 양상 같은 게 보일 수도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과 달리 감시자들은 하나의 기호로만 표시 돼 있진 않았다. 그리폰들은 멋들어진 독수리 머리모양의 기호로, 어떤 곳에는 파란색으로 다른 곳에는 붉은색으로 표시 돼 있었다. 아마 두 명의 다른 사령관이 이끌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말머리 모양의 기병대 역시 색이 다양했고, 보병대는 창날 모양이었다. 창 아래 작은 깃발 모양이 그들이 감시자 소속이었는지 혹은 각국의 동맹군이었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역시 정황을 모르는 채 지도만 봐서는 어떤 양상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점차 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고, 그들은 상자를 열어보거나 기초 자료를 솎아내기 시작했다.

  발리야는 고집스럽게 지도를 붙들고 머물렀다. 그는 포기하고 방향을 돌리기 전에 적어도 책을 끝까지 넘겨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떤 지도 한 장에서 구석에 적힌 주석 하나가 그의 눈길을 붙들었다. 슬쩍 봐서는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코앞에 둔, 얼마 안 가 파괴됐을 게 분명한 스탁헤이븐 바깥의 촌락과 마을을 표기한 다른 표시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굳이 주석을 달아둘 필요도 없을 만한.

  하지만 엘프어로 "그리폰"을 의미하는 그 이름은, 아무래도 인간들의 마을 이름이라기엔 낯선 조합이었고, 그 아래 양피지 조각 위로 아주 미세한 먼지 같은 게 뒤덮여 있었다. 리륨. 아주 소량이었고, 굉장히 희석된 양이었지만, 마탑에서 수 년간 수련한 덕에 발리야는 리륨 가루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현세와 영계 사이에서 끊임 없이 일렁이는 그 청록색 빛은, 테다스에선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어깨 뒤를 흘끔 확인했다. 누구도 그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편지나 기록 따위를 파고드느라 정신없었다.

  조심스럽게, 호기심을 품고, 발리야는 영계에서 소량의 마나를 끌어다가 마법을 덧씌운 채 지도를 다시 살폈다. 그의 지팡이가 미약한 푸른빛을 발했다. 누구든 그를 바라본다면 햇빛 속에 흘려보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누구도 그를 보지 않았고, 지도를 내려다 본 발리야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지도 위에는 리륨 섞인 잉크로 쓰인 엘프어 문장 한 구절이 창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라스보라 비란.

  발리야는 단어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영계와의 연결을 풀어냈다. 그 단어는 이내 양피지 위에서 모습을 감췄으나 그의 머릿 속에선 확연하게 반짝였다. 라스보라 비란.

  마치 편지글처럼 고풍스런 필기체로 쓰여있었지만 그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문장은 발리야가 아는 한 정확히 인간의 언어로 뜻을 옮길 수 없었지만, 어설프게나마 해석하자면 "잃어버린 사랑의 장소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데일리시와 보호구역 엘프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지는 얼마 안되는 훌륭한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고, 그 시는 한 번도 삶에서 겪어보지 못한 어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 달콤하지만 고통스러운 감각은 향수와도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씁쓸한 느낌으로, 향수를 느끼는 이는 자신이 잃은 즐거움을 떠올리는 반면 라스보라 비란을 느끼는 이는 스스로 영영 알지 못할 어떤 것을 갈망했다.

  "블랙베리 덩굴 아래에서, 나는 그것을 느낀다." 발리야는 작게 읊조렸다. 시의 첫 구절이었다. 익어가는 블랙베리의 진한 향내 속에서, 달콤쌉싸름한 향과 함께 오래 전 잃어버린 알라산의 향취를 기억하고 싶은 소망.

  그 시는 그 자체로 라스보라 비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는 어떤 엘프도 그 시의 엘프어 원문을 아는 이가 없었다. 엘프들이 간직하고 있는 거라곤 단어 몇 조각과 이야기의 뼈대 뿐이었고,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그 시를 복원해냈다. 보호구역의 엘프들 중에는 그들 문명의 잃어버린 예술을 되새길 수 있을만큼 자신들의 역사나 언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시의 원제조차 그들은 알지 못했다. "블랙베리 덩굴 아래서," 누구도 진짜 이름을 몰랐기에 그들은 그 시를 그렇게 불렀다.

  아무래도 네 번째 대재앙을 다룬 전투지도에서 발견하기엔 이상한 문장이었다. 발리야는 그 리륨 메시지가 지도를 그릴 때 함께 새겨졌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시야에서 그 메시지를 감춘 주문은 분명히, 지도의 또렷한 색상을 보존하는 마법과 비슷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대체 누가 이런 시의 단편을 오직 마법사만이 찾을 수 있게, 그리고 오직 엘프만이 이해할 수 있게 숨겨둔단 말인가? 만약 이게 단순히 몽상적인 향수에 젖어 남긴 문장이 아니라면...

  옆 방에 분명 블랙베리 덩굴 조각이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발리야는 확인하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중앙 도서관은 창문을 통해 안뜰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내려다보는 회색 머리의 감시자 한 명을 빼곤 텅 비어있었다. 발리야는 그를 피해 조용히 움직이며 벽에 새겨진 과일들을 확인했다.

  그가 기억한 게 맞았다. 무화과, 석류, 오렌지...그리고 넓은 꽃잎을 가진 꽃송이가 꽃봉오리와 무성한 열매들 사이로 피어있는 블랙베리 덩굴 한 줄기. 그 덩굴은 두 개의 책장 사이에 걸린 횃대를 감싸고 내려가 벽에 붙은 회색 돌벤치로 이어졌다.

  발리야는 횃대 아래를 살폈다.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벤치 아래, 아까와 비슷한 미약한 리륨 가루의 흔적이 벽돌 중 하나에 묻어있었다. 이번 것은 너무나도 미세한 흔적이라 발리야가 이미 영계와 닿아 있던 상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영계와 접촉하여 돌 위로 반짝이는 빛무리를 비췄다. 그의 마법이 닿자 리륨이 묻어 있던 벽돌조각이 부르르 떨리고서, 바깥 쪽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기대감 섞인 긴장 속에서, 발리야는 손 끝으로 벽돌을 잡고 양옆으로 살살 흔들어서 끄집어 냈다. 거의 다 빼냈을 쯤 그는 벽돌을 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고,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자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빠져나온 벽돌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 안에는 작고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표지에 핏자국과 헤진 흔적이 있었고, 습기에 책장이 휘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보존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발리야는 그 책을 꺼낸 뒤 벽돌을 다시 끼워넣고 아무 일도 없던 것마냥 벤치 위에 앉았다.

  그는 무엇을 발견할지 짐작도 못한 채 책을 펼쳐들었다. 그 안은 빠르게 휘갈겨 쓴 것 같은, 여성적이지만 그다지 부드럽진 않은 필체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숭고의 시대 5:12, 글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생 개러헬과 나는 안티바 시티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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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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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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