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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 용의 시대
와이스 하웁트.
부러진 이빨의 거대한 상아빛 언덕을 등진 먼 요새의 풍경이 드러나자 발리야는 경이에 차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은색 술장식이 달린 깃발이 탑 위에서 펄럭였고, 거리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발리야는 그 문양이 푸른 바탕에 새겨진 강철 같은 회색 그리폰임을 알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두터운 나무와 강철로 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제니비티 수도사는 그의 일지에 그 문이 말 세 마리가 나란히 열을 지어 지나갈 수 있을만큼 넓다고 기록했으나, 발리야가 선 위치에선 와이스하웁트의 돌벽 아래 고작 손톱만한 크기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지난 몇 주 간 그는 이 곳을 꿈꿔 왔다. 회색감시자의 오래된 성채, 수 세기에 걸친 영웅들의 마지마 휴식처, 대재앙의 공포에 맞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그리고 이제는 그의 집이 될 곳.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 섞인 설렘으로 몸이 떨려왔다.
함께 온 동료들의 표정엔 그런 흥분 같은 건 드러나 있지 않았다. 대신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두려움만은 그 위에 떠올라 있었다.
발리야와 함께 온 이들은 총 네 명이었다 - 한 번에 징집하기엔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들었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 사이로 회색빛이 희끗 비치는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 외엔 전부 열여섯에서 열아홉 남짓의 또래였다. 그들이 전부 마법사라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감시자들은 테다스의 각각의 마탑에서 한 명씩만 징집하곤 했다.
하지만 전통은 무너졌다. 무참히.
커크월에서부터 시작되어 올레이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된 움직임을 따라, 테다스의 마법사들은 모든 곳에서 사냥당하고 배척받았다.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템플러 기사단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어쩌다, 왜 그렇게 됐는지 발리야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련생에 불과했기에 누구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고, 들리는 소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으리만치 혼란스러웠다.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거라곤 와이스하웁트가, 회색 감시자가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테다스의 다른 모든 곳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마탑 전체가 파괴된 곳도 있다고 들었다. 탑이 통째로 무너졌고 모든 마법사와 수련생들이 - 어린아이들조차 - 오직 마법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죄로 살해당했다고. 어떤 탑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안도랄의 손길을 점령한 마법사 군대에 합류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곳의 이야기였다. 이곳은 아니다. 안더펠스의 이들은 모두 세상를 진짜로 위협하는 게 뭔지 기억하고 있었고, 서로 싸우면서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지 않았다. 소문이 처음 탑에 닿았을 때, 선임 마도사는 와이스하웁트로 빠르게 연락을 취했고 며칠 안에 감시자들의 답장을 받았다. 회색 감시자에 합류하고자 하는 마법사는 누구든 환영이라고. 어떤 템플러도 그런 마법사들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 감시자의 징집의 권한은 불가침 영역이었기에, 피난처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자의 초대를 수락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회색 감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고난의 삶과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으니. 그들은 분명 고귀하고 오래된 집단이었고, 테다스 어디서든 바드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했지만...누구도, 진정으로 영웅적인 이들이나 진정으로 절박한 이들 외에는 어떤 그 누구도,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발리야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템플러와 싸우다 죽고 싶진 않다는 것과, 마탑보다도 더 확실하게 엘프에게 인간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곳은 회색 감시자 뿐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테다스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되는 소지품을 챙긴 뒤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를 비롯한 한 줌의 젊은 마법사들과 함께 와이스하웁트로 함께 가겠다고 선언했다. 회색 감시자가 되거나, 그러기 위해 죽겠다고.
그리고 이곳, 부러진 이빨의 그림자 아래에 선 그는 다른 이들의 얼굴에 드러난 후회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감정은 두려움만큼이나 뚜렷하게 티가 났다. 템플러들은 광신도였지만, 적어도 사람이긴 했다. 그들은 설득할 수도 있었고 감언이설로 꾀거나 협박할 수도, 뇌물을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로는 그 모든 게 소용 없었다. 그저 거친 삶과, 확실한 죽음만이 있었다.
발리야는 발을 내딛었고, 와이스하웁트 정문으로 향하는 길고 가파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그들은 늦은 오후 무렵 와이스하웁트로 이어지는 길 위에 들어섰으나 정문에 도달한 건 이미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였다. 에일파스는 도중 두 번이나 물을 마시며 쉬자고 청했다. 끝없는 나선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탑에서의 삶 덕에 선임 마도사는 나이에 비해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러진 이빨로 향하는 길과 비교할 만한 건 마탑에 존재하지 않았다.
천 피트는 될 법한 수직 거리가 와이스하웁트의 정문을 황량한 대지와 구분짓고 있었다. 그곳까지 이르는 적어도 3마일을 될 법한 돌길 위로는 경사면을 내기 너무 가파른 부분마다 오래된 돌계단이 구불길을 이루고 있었다. 수 세기에 걸쳐 회색 감시자들의 발길 아래 오목하게 닳아진 계단 위로 마법사들의 로브자락이 스칠 때마다 뼛가루 같은 먼지가 흩날렸다.
가는 도중 길이 넓어진 대목 두 군데에 고행길에 작은 휴식을 취하도록 좁다란 벤치들을 새겨놓은 걸 제외하면 그 여정에는 어떤 안락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리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궁병을 위한 좁은 틈새가 예리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햇살 아래 이 길을 따라 오르는 자는 누구든 화살에 맞기도 전에 이미 열기나 바람에 지쳐 나가떨어졌을 테니까. 서늘한 여명빛 아래에서도 그 길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마침내, 발리야의 두 다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그를 자비롭게 산 아래로 내던지려 할 때 쯤 마지막 계단에 도달했다. 일행의 머리 위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쳐왔다. 아래로는 황량한 안더펠스의 대지가 회색과 붉은색의 그림자 속에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성벽 아래 움푹한 그림자 정도로만 겨우 보이는 작은 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선임 마도사는 지팡이로 그 문을 두들겼고, 잠시 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회색 튜닉과 바지를 입은 무뚝뚝한 인상의 여자가 안쪽에 서 있었다. 낡고 헤진 소매 사이로 대장장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이 드러났다. 입술 위를 가르는 오랜 상처가 앞니 바로 앞에서 하얀 흉터를 이루며 아물어 있었고, 그 이빨들은 은으로 이루어져 별빛 아래 반짝였다. 징 박힌 전투망치가 낡은 허리띠에 매여 있었다.
"호스버그의 마법사들이오?" 그가 물었다. 발리야는 그게 어디 억양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퍼렐던일지도. 그는 퍼렐던 사람들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는 피로에 지친 상태였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들어오시오. 방으로 안내하겠소. 원한다면 씻을 물과 음식을 주겠소. 오늘 밤은 일단 쉬시오. 다음 일정은 아침에 얘기하기로 합시다."
"물론이지요." 선임 마도사가 대답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호스버그 마탑의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입니다...아니, 였다고 해야겠군요. 아직도 그렇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으니. 이쪽은 발리야, 베리트, 파딘, 세카입니다. 젋은 친구들이지만 다들 훌륭한 친구들입니다. 당신들에게 힘을 보태고자 이곳에 왔고요."
"술웨라고 하오." 은니를 가진 여자가 대답했다. "당신들의 재능은 훌륭하게 쓰일 것이오." 그는 요새로 다시 들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일파스는 지팡이를 내리고 작게 중얼거렸고, 끝에 달린 보석이 미약하게 빛을 발했다.
에일파스의 빛나는 지팡이가 만들어낸 부드러운 불빛과 그를 뒤따르는 다소 부족한 학생들의 마법을 앞 에 둔 채, 호스버그의 마법사들은 와이스하웁트로 들어섰다.
* * *
새벽이 되자 술웨가 돌아와 선임 마도사 에일파스를 데리고 개별 면담을 위해 사라졌다. 어디로 향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분 뒤, 잘생긴 젊은 엘프 한 명이 문을 두들겼다. 그는 감시자의 푸른색과 회색으로 된 의상을 뻐기듯이 가볍게 걸치고 있었지만 술웨의 군율 잡힌 딱딱함에 비하자면 훨씬 덜 부담스러운 느낌이었고, 나이 또한 그들과 다섯 살 이상 차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진한 꿀색 머리칼이 물결치듯 그의 어깨를 뒤덮었다. 입가의 느긋한 미소 또한 따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들고 온 뚜껑 덮인 커다란 바구니에선 감질나게 하는 갓 구운 빵냄새가 슬그머니 풍겨왔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열여섯의 베리트가 간이 침대에서 앉아있던 자세를 똑바로 곧추세우며 블라우스를 슬쩍 끌어내렸다. 그 엘프 감시자는 입가에 슬쩍 걸린 미소 외엔 전혀 눈치챈 기색이 없었다. 그는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어린 마법사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와이스하웁트에 온 걸 환영해." 그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베리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발리야는 졸지에 그의 인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내 이름은 캐로넬이야. 너희의 기초 평가와 초반 훈련을 담당할 예정이지. 그리고, 아침 식사도." 그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편하게 들어. 빵이랑 염소 치즈야. 좀 심심한 맛이지만 나쁘진 않지. 그렇게 사치 부릴 여유는 없어서."
"고마워요." 누군가는 대답을 해야 했기에, 발리야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캐로넬은 지나치게 잘생긴 편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는 빠르게 일어나서 빵 한 덩어리를 집어 들고 바구니를 세카에게 건넸다. "평가라니 어떤 걸요?"
혹여 캐로넬이 홍조를 눈치챘다 한들 그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친근한 태도로 선임 마도사의 빈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그는 모두에게 시선을 향했다. "호스버그에서 너희가 뭘 배웠는지. 너희가 어둠의 피조물과 감시자에 대해, 테다스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마법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나,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 혹은 우리에게 쓸모 있을만한 기술을 알고 있는지."
"꽤 많은 내용인데요." 발리야는 입 안에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삼키는 게 쉽진 않았지만, 입 안이 마른 이유로 댈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캐로넬은 짖궃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뭐, 좀 있다고 해야겠지. 많지는 않을 수도. 우선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하겠어.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뭘 알지? 혹시 맞서 싸워본 적 있는 사람?"
"저요." 세카가 대답했다. 그는 매사에 진지한 성격의 자그마한 소년이었고, 곧은 검은 머리와 커다란 눈 때문에 열여섯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탑에 가기 전, 헐록 무리가 우리 농장을 덮쳤어요. 화살과 쇠스랑만 가지고는 그놈들을 막아낼 수 없었고, 그래서 제가 불태웠죠. 그게 제 마법이 발현된 순간이었어요."
발리야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동료를 돌아봤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고, 그가 그런 일을 겪고 살아남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세카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직 정식 마법사조차 아니었다. 진입의식을 겪은 적이 없으니, 그는 아직 수련생 신분인 셈이었다.
혹은 겪을 필요가 없는 쪽일지도. 그들은 이제 전부 이단 마법사인 셈이니 앞으로 영영 진입의식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직 탑의 마법사들만이 그 끔찍한 의식을 견뎌야 했는데, 더 이상 마탑이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세카야말로 그들 중 가장 노련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캐로넬은 그 이야기에 제법 감명받은 듯 보였다. 그 엘프 감시자는 뚜렷한 존중을 품고 세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다른 이들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은?"
발리야는 다른 이들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도 역사책에서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읽은 적 있었고, 그 끔찍한 괴물들과 맞서 싸운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엘프든 인간이든 안더펠스에서 헐록과 젠록, 아기를 잡아먹는 오우거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한 명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본 적이나, 전투에서 그 끔찍한 무리와 맞선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 배울 게 아주 많겠군." 캐로넬이 말했다. "너희가 감시자가 된다면,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당연하지만 테다스의 사람들을 어둠의 피조물 손아귀로부터 지켜내는 거야. 개인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법도 익혀야 하지. 놈들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해. 종류, 전술, 발생지와 능력 따위를." 엘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너희 모두 마법사니까,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봐도 되지?"
발리야는 동료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캐로넬은 만족스런 눈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아주 좋아. 그럼, 입단 의식을 거치기 전에, 밥값이나 할 겸 - 그리고 좀 쓸모있는 내용도 배울 겸 - 도서관으로 가자."
"밥값을 한다고요?" 세카가 물었다.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자신의 연구에 너희의 도움을 요청했어." 캐로넬이 대답했다. "영광스런 업무를 맡은 줄 알아. 눈치로 봐선 혈마법과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행정관이 입을 꾹 다물고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더라고. 뭐가 됐든 꽤 오래된 것일 거고. 어쨌든 너희 마법사들은 오래된 책 같은 거 엄청 좋아하잖아? 아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그 온갖...양피지 더미와. 먼지와 함께."
"혈마법이라고?" 세카의 속삭임이 작게 울려퍼졌고, 그의 불안한 시선이 발리야에게 닿았다.
발리야 역시 그 어린 소년이 말하지 않은 감정을 함께 느꼈다. 혈마법은 고통과 희생을 바탕으로 삼는 테다스 전역에서 기피되는 주술이었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정신과 육신을 조종하는데 사용되곤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둠의 피조물과 연관돼 있는 거라면...
발리야는 어둠의 피조물이 그런 마법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그들은 의지라곤 없는 괴물에 불과하다고 들었고, 혈마법을 쓰려면 고도의 지능이 필요했다.
"대충 그렇다는 거야." 캐로넬이 말했다. "너희가 찾아야 하는 건...감시자들이 이상하게 굴었던 기록 같은 거야. 명령을 무시했다든가, 자리를 무단이탈했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아니면 부자연스러운 어둠의 피조물 같은 거 -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놈들이라든가.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제각각 벌어진 일일 수도 있어. 둘 다 찾아야 해. 물론 목격한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암호화된 기록일 수도, 지나치게 과장돼 있거나 왜곡돼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떤 기록이든 간에 찾아만 낸다면 유용할 거야. 물론 일반적인 탈영과 그런 불가사의한 실종을 구분한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고, 그 중엔 전투 중에 몰살 당해 사라진 전초지도 있을 거야. 어떤 것들은 수 세기 전의 기록이라 읽기 난해한 언어로 기록돼 있을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도록 해."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발리야가 물었다.
"오늘부터."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일어서며 짙은 푸른색 튜닉에 주름이라도 잡힌 양 문질러냈다. "정확히는, 식사가 끝나는 대로."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발리야는 긴장된 흥분감으로 들뜬 채 가까스로 음식을 삼켰다. 분명 배가 고팠었는데, 빵도 치즈도 입 안에서 톱밥이라도 씹는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자 캐로넬은 그들을 이끌고 먼지 쌓인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오른편 돌벽을 따라 그리폰을 타고 갑주를 걸친 감시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도륙하는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왼편에 난 궁수들을 위한 들창을 통해 색 바랜 태피스트리 위로 간신히 햇빛이 비쳐들었다.
태피스트리 사이로 무기들도 장식돼 있었다. 아마도 어둠의 피조물 것인 듯 했다. 조잡한 검은 결정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무기들. 오래된 얼룩이 검날을 덮고 있었다. 아마도 피겠지.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거든가. 발리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는 오한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잘 봐둬야 해." 세카가 팔꿈치 근처에서 속삭였다. 소년의 눈은 움푹 패인 피투성이 방패에 꽂혀 있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봐 두고, 그놈들을 막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해야 해. 입단 의식, 콜링...그 모든 것들은 어둠의 피조물을 막아낼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거야.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이해할 때에야."
발리야는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오랜 무기들과 그 무기들이 쓰였을 끔찍한 전장을 그려낸 태피스트리를 잠깐동안 눈에 담았다. 곧바로 시선을 떨군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고, 캐로넬을 따라 긴 나선계단을 지나 와이스하웁트의 대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시선은 발끝에 고정돼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성당에 가까워보이는 장엄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아치형 창을 통해 연병장이 내려다 보였고 구름 사이로 비쳐든 햇빛이 이어지는 방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누런빛의 책더미와 봉인된 스크롤 뭉치를 품은 회색 석조 책장이 마법사들 앞에 끝도 없이 펼쳐졌다. 철제 샹들리에가 향초를 얹고 삐걱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밀랍과 향나무, 오래 된 재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벽에는 상징적인 그리폰과 옛 문장들, 그리고 장식용 식물들이 - 오렌지, 석류, 잘 익은 포도 따위의 - 화려하게 조각돼 있었다. 불모의 안더펠스에서 조각가가 그리워한 과일들이겠군, 발리야는 생각했다.
"네 번째 대재앙 때의 자료부터 시작하면 될 거야." 캐로넬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중앙 도서관 옆으로 이어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오랜 기록들은 대부분 우리보다도 연식이 오래 됐지. 너희들 중 옛 언어에 능통한 이가 있다면 기꺼이 보여주겠다만...아마 아닌 것 같으니 네 번째 대재앙을 다룬 연대기 정도로도 이미 충분히 벅찰 거야."
그는 아치형 통로 옆으로 비켜서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방 안의 책꽂이는 윗줄 절반 정도가 똑같은 가죽표지를 가진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용한 방에서 필사가들이 적어내렸을 법한 공식 기록처럼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회색 서책들 아래로는 거대한 철제 상자 몇 개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그 중 두 개가 열려 있었고, 안에는 크기 별로 정리한 것 외에 다른 분류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책더미, 종이뭉치, 양피지 조각들 따위의 자잘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상자 안에 있는 건 제일 기초적인 것들이야. 보고서 원본이나 전장에서 남은 쪽지, 감시자들과 병사들이 보냈던 편지들 같은 거. 우리가 찾고 있는 걸 발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이지." 아치벽에 기대 선 캐로넬이 말했다.
발리야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유리로 된 관 하나가 방의 한 가운데 하얀 대리석 연단 위에 놓여 있었다. 관의 머리 부근에서 나선을 이루며 천장까지 뻗어있는 한 쌍의 거대한 검은색 뿔은 끄트머리가 그림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오래된 관이었다. 벽과 뚜껑을 이루는 유리판들은 약간 착색되긴 했지만 오래된 유리에서 보일 수 있는 그 어떤 흠집이나 일그러짐도 없도록 공들여 다듬은 티가 났다. 관을 이루는 발리야의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유리면 하나하나는 그 어느 것도 흠집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반쯤 몽롱한 상태로, 그 젋은 엘프 마법사는 아치 통로를 지나 관을 향해 다가갔다. 격자무늬 놋쇠 틀 사이 유리 너머로 옅은 햇빛을 머금고 미약하게 반짝이는 실버라이트 중갑옷 한 벌이 보였다. 의장용 갑옷 같진 않았다. 감시자의 그리폰 문양이 흉갑 위에 새겨져 있었고, 투구와 견갑 위로도 단순한 양각무늬가 장식돼 있었지만, 딱 보기에도 사용감이 느껴지는 실전용 갑옷이었다. 가죽끈에는 땀 얼룩이 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손질한 사람이 누구였든 간에 패인 자국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속이 빈 완갑 한 쌍이 두 개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평범한 가죽 검집에 싸인 긴 단검과 양 끝에 회색과 흰색의 한 쌍의 깃털이 술장식처럼 달려있는 우아하고 정교한 장궁이었다. 세월에 침식당한 그 얼룩덜룩한 깃털을 보는 순간, 발리야는 깨달음과 함께 숨을 훅 들이켰다.
개러헬의 것이야.
개러헬은 테다스에서 누구보다도 유명한 엘프 영웅이었다. 회색 감시자였던 그는 네 번째 대재앙을 막아낸 동맹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 그리고 그 스스로 악마의 군주 안도랄을 해치우고 어둠의 피조물 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였다.
엘프의 아이들은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개러헬은 그들의 심장에 특별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존재였다. 엘프로서, 그는 그들과 똑같은 종류의 모멸을 겪어낸 이였다. 추방자였고, 멸시당했고, 누구의 존중도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그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그의 오랜 적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냈다.
그는 단신으로 네 번째 대재앙을 막아내고 테다스를 구한 이였다.
발리야의 손길이 경애를 담고 관의 유리면 위를 살짝 스쳤다. 그는 감히 그것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개러헬의 제단에 얼룩이라도 남긴다면 크나큰 불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스침만으로도 어떤 전율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
다른 마법사들이 그의 뒤로 하나 둘 들어섰다. 그들 역시 그 관과 왕관처럼 둘러진 투박한 검은 뿔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스런 표정은 이내 그 유리관 안의 무기와 갑옷이 누구의 것인지 - 그리고 마치 비석처럼 두르고 선 뿔의 주인이 누구인지 - 조용한 깨달음과 함께 경이로 바뀌었다.
그 뒤편에서, 캐로넬이 미소지었다. "우린 모든 대재앙의 유물들을 여기 모아두니까. 여긴 그냥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야. 쓰러진 자들을 기리는 전당이기도 하지." 그는 아치벽에서 몸을 떼고 한 발 물러섰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도서관 안에는 언제나 감시자들이 있을 거고, 행정관의 사무실도 바로 근처에 있어. 저 뒤쪽 오른편에 오우거 뿔 진열장 뒤로 화장실도 있고. 난 저녁 먹을 때 다시 부르러 올게."
그는 그렇게 사라졌고, 네 사람은 서적들과 상자, 악마의 군주의 뿔과 함께 우두커니 남겨졌다.
"저거 진짜 개러헬 무기일까?" 파딘이 속삭였다. 그들 중 가장 나이도 많고 키가 큰 그는 곰보자국이 남은 뺨을 가진 어딘지 어설픈 구석이 있는 금발의 소년으로 조금이라도 덩치가 작아 보이고자 하는 부질없는 소망 덕에 늘 어깨를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지." 발리야가 대답했다. "감시자들이 가짜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어디부터 시작할까?" 세카가 질문했다. "공식 기록? 아니면 상자?"
발리야는 망설였다. 그는 네 번째 대재앙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개러헬의 영웅담은 익숙한 이야기였고, 악명 높은 호스버그의 공성 기간을 다룬 "쥐를 먹은 자의 비탄"이나 "다섯 아버지를 둔 고아" 같은 오랜 동요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병사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같은 건 미지의 영역이었다. 네 번째 대재앙은 십 년도 넘게 이어지지 않았던가? 어마어마하게 긴 전쟁이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어둠의 피조물의 행적을 찾기 위해, 의무를 저버리고 이탈한 감시자의 기록을 찾기 위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한단 말인가?
"전투지도부터 살펴보자." 그는 결정을 내렸다. "감시자들의 이동경로에서 뭔가 찾아낼지도 몰라. 그림 한 장이 천 마디 말보다 가치있다고들 하잖아?"
"어떻게 봐야하는지 네가 알고 있다면야." 베리트가 웅얼거렸다. 그 예쁘장한 금발머리는 캐로넬이 자신을 무시한 것에 아직도 뿔이 나 있는 듯 했다.
딱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딘이 감시자들의 공식 전투지도가 담긴 거대한 책을 들고 왔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하나씩 넘겨나갔다. 굉장히 낡아 보이는 책이었지만, 세월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데다가 보호 주문이 걸려있는 덕에 강이나 숲을 표시한 색상은 갈회색 양피지 위에서 처음 그렸을 때처럼 선명했다.
거의 첫장부터 이미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지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 군대는 단순한 검은 기호로 표기돼 있어 그 위협적인 느낌이 오히려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진군하고 또 진군하여 왕국을 무너뜨리고, 마을과 촌락을 지도에서 지워가며 살육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발리야는 그 획일화된 기호만 가지고선 어떤 종류의 어둠의 피조물이 있던 건지, 어떤 식으로 정복해나간 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움직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아마 그들이 그 대군과 맞선 방식에는 어떤 양상 같은 게 보일 수도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과 달리 감시자들은 하나의 기호로만 표시 돼 있진 않았다. 그리폰들은 멋들어진 독수리 머리모양의 기호로, 어떤 곳에는 파란색으로 다른 곳에는 붉은색으로 표시 돼 있었다. 아마 두 명의 다른 사령관이 이끌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말머리 모양의 기병대 역시 색이 다양했고, 보병대는 창날 모양이었다. 창 아래 작은 깃발 모양이 그들이 감시자 소속이었는지 혹은 각국의 동맹군이었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역시 정황을 모르는 채 지도만 봐서는 어떤 양상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점차 같은 결론에 도달한 뒤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고, 그들은 상자를 열어보거나 기초 자료를 솎아내기 시작했다.
발리야는 고집스럽게 지도를 붙들고 머물렀다. 그는 포기하고 방향을 돌리기 전에 적어도 책을 끝까지 넘겨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떤 지도 한 장에서 구석에 적힌 주석 하나가 그의 눈길을 붙들었다. 슬쩍 봐서는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코앞에 둔, 얼마 안 가 파괴됐을 게 분명한 스탁헤이븐 바깥의 촌락과 마을을 표기한 다른 표시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굳이 주석을 달아둘 필요도 없을 만한.
하지만 엘프어로 "그리폰"을 의미하는 그 이름은, 아무래도 인간들의 마을 이름이라기엔 낯선 조합이었고, 그 아래 양피지 조각 위로 아주 미세한 먼지 같은 게 뒤덮여 있었다. 리륨. 아주 소량이었고, 굉장히 희석된 양이었지만, 마탑에서 수 년간 수련한 덕에 발리야는 리륨 가루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현세와 영계 사이에서 끊임 없이 일렁이는 그 청록색 빛은, 테다스에선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어깨 뒤를 흘끔 확인했다. 누구도 그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편지나 기록 따위를 파고드느라 정신없었다.
조심스럽게, 호기심을 품고, 발리야는 영계에서 소량의 마나를 끌어다가 마법을 덧씌운 채 지도를 다시 살폈다. 그의 지팡이가 미약한 푸른빛을 발했다. 누구든 그를 바라본다면 햇빛 속에 흘려보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누구도 그를 보지 않았고, 지도를 내려다 본 발리야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지도 위에는 리륨 섞인 잉크로 쓰인 엘프어 문장 한 구절이 창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라스보라 비란.
발리야는 단어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영계와의 연결을 풀어냈다. 그 단어는 이내 양피지 위에서 모습을 감췄으나 그의 머릿 속에선 확연하게 반짝였다. 라스보라 비란.
마치 편지글처럼 고풍스런 필기체로 쓰여있었지만 그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문장은 발리야가 아는 한 정확히 인간의 언어로 뜻을 옮길 수 없었지만, 어설프게나마 해석하자면 "잃어버린 사랑의 장소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데일리시와 보호구역 엘프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지는 얼마 안되는 훌륭한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고, 그 시는 한 번도 삶에서 겪어보지 못한 어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 달콤하지만 고통스러운 감각은 향수와도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씁쓸한 느낌으로, 향수를 느끼는 이는 자신이 잃은 즐거움을 떠올리는 반면 라스보라 비란을 느끼는 이는 스스로 영영 알지 못할 어떤 것을 갈망했다.
"블랙베리 덩굴 아래에서, 나는 그것을 느낀다." 발리야는 작게 읊조렸다. 시의 첫 구절이었다. 익어가는 블랙베리의 진한 향내 속에서, 달콤쌉싸름한 향과 함께 오래 전 잃어버린 알라산의 향취를 기억하고 싶은 소망.
그 시는 그 자체로 라스보라 비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는 어떤 엘프도 그 시의 엘프어 원문을 아는 이가 없었다. 엘프들이 간직하고 있는 거라곤 단어 몇 조각과 이야기의 뼈대 뿐이었고,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그 시를 복원해냈다. 보호구역의 엘프들 중에는 그들 문명의 잃어버린 예술을 되새길 수 있을만큼 자신들의 역사나 언어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시의 원제조차 그들은 알지 못했다. "블랙베리 덩굴 아래서," 누구도 진짜 이름을 몰랐기에 그들은 그 시를 그렇게 불렀다.
아무래도 네 번째 대재앙을 다룬 전투지도에서 발견하기엔 이상한 문장이었다. 발리야는 그 리륨 메시지가 지도를 그릴 때 함께 새겨졌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시야에서 그 메시지를 감춘 주문은 분명히, 지도의 또렷한 색상을 보존하는 마법과 비슷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대체 누가 이런 시의 단편을 오직 마법사만이 찾을 수 있게, 그리고 오직 엘프만이 이해할 수 있게 숨겨둔단 말인가? 만약 이게 단순히 몽상적인 향수에 젖어 남긴 문장이 아니라면...
옆 방에 분명 블랙베리 덩굴 조각이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발리야는 확인하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중앙 도서관은 창문을 통해 안뜰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내려다보는 회색 머리의 감시자 한 명을 빼곤 텅 비어있었다. 발리야는 그를 피해 조용히 움직이며 벽에 새겨진 과일들을 확인했다.
그가 기억한 게 맞았다. 무화과, 석류, 오렌지...그리고 넓은 꽃잎을 가진 꽃송이가 꽃봉오리와 무성한 열매들 사이로 피어있는 블랙베리 덩굴 한 줄기. 그 덩굴은 두 개의 책장 사이에 걸린 횃대를 감싸고 내려가 벽에 붙은 회색 돌벤치로 이어졌다.
발리야는 횃대 아래를 살폈다.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벤치 아래, 아까와 비슷한 미약한 리륨 가루의 흔적이 벽돌 중 하나에 묻어있었다. 이번 것은 너무나도 미세한 흔적이라 발리야가 이미 영계와 닿아 있던 상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영계와 접촉하여 돌 위로 반짝이는 빛무리를 비췄다. 그의 마법이 닿자 리륨이 묻어 있던 벽돌조각이 부르르 떨리고서, 바깥 쪽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기대감 섞인 긴장 속에서, 발리야는 손 끝으로 벽돌을 잡고 양옆으로 살살 흔들어서 끄집어 냈다. 거의 다 빼냈을 쯤 그는 벽돌을 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고,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자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빠져나온 벽돌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 안에는 작고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표지에 핏자국과 헤진 흔적이 있었고, 습기에 책장이 휘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보존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발리야는 그 책을 꺼낸 뒤 벽돌을 다시 끼워넣고 아무 일도 없던 것마냥 벤치 위에 앉았다.
그는 무엇을 발견할지 짐작도 못한 채 책을 펼쳐들었다. 그 안은 빠르게 휘갈겨 쓴 것 같은, 여성적이지만 그다지 부드럽진 않은 필체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숭고의 시대 5:12, 글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생 개러헬과 나는 안티바 시티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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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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