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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 용의 시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와이스하웁트에 도착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그들이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발리야는 감시자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아침마다 웅장한 도서관으로 이동해 조사를 이어갔고, 저녁에는 먼지 쌓인 강당에 모여 어둠의 피조물과 싸우는 법에 대해 배웠지만, 정작 회색 감시자가 되는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듣지 못했다. 다른 탑 출신의 탈주 마법사 몇 명이 발리야 및 그 동료들과 같은 이유로 피난처를 찾아 요새를 찾아왔으나 그들 역시 호스버그 출신들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안심되는 일이긴 했다. 다섯 번째 대재앙이 끝난 지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테다스의 역사 전체를 훑어봐도, 새로운 대재앙이 100년 안에 일어난 적은 없었다. 비록 발리야가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사명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곤 해도, 살아생전 대재앙을 볼 일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입장에서 어둠의 피조물의 광기와 오염을 굳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약 회색 감시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평범한 부랑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전우가 아닌 부랑자에 불과한 그들을, 챈트리가 찾으러 온다면 감시자들은 과연 얼마나 열성적으로 보호해줄까?

  그 불안정함이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어느 날 아침,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 그는 캐로넬이 낮의 열기가 찾아들기 전까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작은 뒷뜰로 찾아갔다. 뜰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녹색과 하얀색의 바닥돌이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빛이 바랬음에도 소담하고 단순한 형태의 기하학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의 작은 분수는 물을 뿜으며 청색 그늘 아래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그리 오래 갈 풍경은 아니었다. 안더펠스의 여름은 짧지만 무자비했고, 한낮의 열기는 이 뒷뜰의 축복받은 여유를 금세 불태워버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짧은 몇 시간이라 해도 충분히 축복 같았다.

  발리야가 굳이 가져온 질문을 던져 그 분위기를 깨놓지 않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는 이 평온을 가장한 환상만큼이나 대답이 절실했다.

  "우리는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 거죠?" 그가 물었다.

  캐로넬이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기까진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가 그 질문에 반가웠는지 성가시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읽던 페이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놓고, 그는 금발머리를 뒤로 흔들어 넘긴 뒤 평온하게 질문했다. "날 어떻게 찾았지?"

  발리야 가방에서 접혀있는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그는 그 편지 안에 진한 라일락 향 만큼이나 진한 내용이 들어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리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소년적 욕망을 무모하게 밀어붙이려 한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선 퍽 인상적이었다.

  편지를 건네주며 그는 대답했다. "당신이 오고가는 모습을 신경쓰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 편지를 전해주기로 약속하고 나서 당신의 온 일정표를 얻어냈죠."

  한숨을 내쉬는 금발의 엘프는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받아든 편지를 책표지 사이에 꽂아넣고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라일락향이 그로부터 풍겨왔다. "정말 끈질긴 친구군. 어리기도 하고. 너희 전부 그렇지만."

  "그게 우리가 입단식을 거치지 않고 있는 이유인가요?"

  "그 중 하나라고 해두지. 다른 하나는 너희가 지금 한창 쓸모 있어서기도 하고. 너희들 중 절반 정도가 악마의 군주의 피에 목이 메어 죽어버리기라도 했다간, 그 따분한 옛날 편지나 지도 따위를 내가 직접 들여다봐야 할 텐데 - 얼마나 끔찍한 전망인지." 캐로넬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대체 왜 그렇게 입단식을 거치고 싶은 거야? 내 이기심은 제쳐두고라도,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데. 그 과정에서 죽는 이들도 많고. 지금은 대재앙 중도 아니고, 너희는 이미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잖아. 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발리야는 뒷뜰에 놓인 건너편 벤치에서 자갈 섞인 먼지를 털어낸 뒤 위에 앉았다.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벤치의 감촉은 차갑고 거칠었고, 그 전에 앉았을 수많은 회색 감시자들의 흔적으로 살짝 패여있었다. 그들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건 유령의 발자국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와이스하웁트의 역사가 그의 위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 느낌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역사는 그를 구속할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안전한 건지 모르겠어서 급한 거예요."

  캐로넬의 눈빛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아침 그늘 속에 그 눈이 더 파랗게 보인다고,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대체 누가 너희를 위협하길래?"

  발리야는 유쾌하지 않은 태도로 으쓱해 보였다. "호스버그에서 우릴 위협하던 그치들이죠. 템플러. 챈트리. 이단마법사를 무서워하는 모든 사람들. 얼굴에 데일리시 문양이 없는 걸 보면 당신도 나처럼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 아녜요. 그렇다면 우리를 자신들과 같은 족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알겠죠."

  연장자 엘프의 미소는 조금 슬퍼보였다. 그들 종족 중 동족들과 함께 데일즈의 위태롭고, 그만큼 소중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데일리시 엘프들의 얼굴에 새겨진 야성적이고 독특한 문신은 그들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표식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구역에 사는 엘프들에겐 주어질 수 없는 기회기도 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잊혀지길 바라며 얼굴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다. 보호구역 엘프에게 주목을 끈다는 건 결코 안전한 일도, 현명한 일도 아니었으니. "알지." 잠시 말을 멈춘 캐로넬이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너는 감시자가 되고 싶어?"

  발리야는 초조하게 자신의 해진 소맷단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손가락 하나만큼 올을 풀어낸 상태였다. 그는 풀어진 올을 돌돌 말아 회색 실뭉치로 만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도전하듯이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당신은요?"

  "나도 몰라."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책을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빼내고 책을 완전히 덮어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그 땐 상황이 좀 달랐지. 완전 다른 세상이었어. 퍼렐든은 대재앙의 초기 단계에 있었거든."

  분수로 옮겨간 그의 시선은 퐁퐁 솟아나는 물줄기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무덤덤했다. "내가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란 추측은 맞았어. 그리고 대재앙의 그림자가 온 나라로 스며들고 있는 시점의 퍼렐든 보호구역이라면, 그리 좋은 거주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어. 음식은 부족했고. 케일런 왕이 오스트가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폭도들이 보호구역을 덮쳤어.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 일도 아니었지. 폭도들은 우리 부모님 가게를 불태웠어. 그분들은 구두장이였어. 소박했지만, 성실하게 장사하셨지. 우리가 가진 거라곤 그것 뿐이었어. 내가 회색 감시자가 된 건 세상을 대재앙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도,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 굳이 원한 게 있다면, 우리 가족들을 불태우려 했던 그 솀렌들이 똑같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었지. 가능하기만 했다면, 그놈들을 하나하나 악마의 군주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던진 뒤, 그렇게 해낸 자신을 행운아라 여겼을 거야."

  캐로넬의 목소리에 분노라곤 담겨있지 않았고, 이야기하는 그의 어조는 간단한 레시피와 재료를 읊는 것마냥 단조롭고 침착했다. 그 온화함 속에 감춰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던 발리야의 마음 깊은 곳이 울려왔다.

  "어쨌든 당신은 입단식을 거치기로 결정한 거잖아요." 그가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아,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어." 캐로넬은 벤치 옆에 검집 째 풀어서 기대놓은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손길은 자루 끝에 새겨진 그리폰문양 위에 머물렀다. "난 아직 여기 이렇게 살아있고, 세상도 멀쩡하게 남아있는걸. 대재앙은 내 희생을 요구하진 않더라고. 게다가 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젠록 몇 마리 말고는 별다른 전투조차 치르지 않았다고."

 서늘한 푸른 눈은 발리야에게 고정돼 있었고, 그리폰 문양 위에 머물던 엘프의 손길이 미끄러졌다. "내가 상처 하나 없이 대재앙에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20년 안에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날 끝장낼 거야. 운이 좋으면 30년 정도일 거고. 그렇지 않다면 훨씬 짧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내가 선택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 - 너희가 아직도 젋고, 당장 감시자가 돼야 할 급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내게도 그렇게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으면 해서야."

  "템플러들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리야가 물었다. 풀려난 올은 마침내 툭 끊어져 손가락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는 휙 던진 실뭉치가 모래색 돌바닥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당신들은 우리가 감시자가 아니어도 보호해줄까요? 정말로?"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캐로넬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미소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 미소는 조금 흐려졌지만. "그래. 너희는 여기서 다른 모든 사람들만큼이나 안전해. 그러기 위해 굳이 입단식을 거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다른 질문에 대해서라면, 글쎄, 수석 감시자 본인조차도 모르지 않을까. 그는 아마 챈트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뭐라고 하는지 기다려 보겠지. 그리고 챈트리와 템플러 사이의, 혹은 템플러 집단 내부의 균열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 들 거고. 또 마법사 반란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기다려 볼 거야. 그러고 나서야, 수석 감시자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거야. 그는 신중한 사람이거든."

  "그보다는 겁쟁이에 가깝겠죠." 발리야는 씁쓸하게 말했다.

  캐로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 문제는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거나 아예 손을 떼야 하는 놀이판인데, 우리 수석 감시자 분은 도저히 판에서 손을 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럴 바에야 그렇게 신중한 편이 낫지." 그는 일어서며 책과 검을 집어들었다. "충분히 빈둥댄 것 같군.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네겐 도서관에서 해야 할 임무가 있을 테지. 살아있어야 끝마칠 수 있는 임무 말이야."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템플러들이 나타났다.

  무리가 피워올린 먼지가 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다다랐다. 감시자들이 그들을 포착한 건 정오 무렵이었고, 오후 내내 이뤄진 부러진 이빨까지의 여정을 쭉 관찰할 수 있었다. 안더펠스를 가로지르는 붉은빛 먼지구름 사이로 무기에 반사된 빛이 간간이 새어나왔지만, 탑에 정찰용 망원경이 없었다면 와이스하웁트의 누구도 그들이 템플러라는 걸 알지 못했을 터였다.

  수가 많진 않았다.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다섯 명의 템플러가 한 무리의 당나귀를 이끌고 수레만한 무게의 강철을 두른 채 험난한 지형을 따라 묵묵히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발리야는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과 함께 요새의 궁수용 들창 사이로 그들을 관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이 치미는 걸 느꼈다. 망원경이 없어 먼지 사이로 템플러 각각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굳이 보고싶은 건 아니었다. 혹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는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편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안더펠스를 통과하는 그 여정이 휴대용 화덕 안에 몸을 욱여넣고 있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고난스러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 템플러들을 향해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동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지만 발리야는 궁수용 들창 옆에 몇 시간을 머무르며 템플러들이 황량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관찰했다. 마침내 부러진 이빨의 기저부에 도착한 그들이 와이스하웁트 정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을 땐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는 이세야의 일기장을 건성으로 넘겨가며 시간을 때우려 했으나 좀처럼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눈앞의 잉크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는 안정감을 찾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를 움켜쥐는 일이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잦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내,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와이스하웁트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대는 대화소리가 귀에 와닿았다. 질문, 대답, 특별한 말은 없었다.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템플러 대장이겠지, 발리야는 생각했다. 호기심과 공포가 반반 섞인 상태로, 그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정문으로 향했다.

  부러진 이빨 쪽으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그 템플러들을 붉게 물들인 건 석양이 아니었다. 갑옷 위를 두텁게 뒤덮은 흙먼지가 땀에 젖은 피부 위로 말라붙어 있었다. 지친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먼지투성이의 당나귀는 붉은 털의 품종마처럼 보여다.

  워낙 지쳐 있어 그다지 위압적인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발리야는 홀의 그림자 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템플러에 대한 공포심은 너무나도 뼛속 깊이 배어있었다. 그는 적대감과 경계 속에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고는 그 흉갑에 새겨진 타오르는 검 문양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과 템플러들 사이를 가리며 반원형으로 마주 선 회색 감시자들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쪽의 동지들로부터 소식은?" 술웨가 묻고 있었다.

  "없소." 대장 템플러가 대답했다. 앞서 들었던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땀에 젖은 흙먼지가 콧수염을 덮고 있어 원래 색을 구분할 수 없었고, 발리야의 방향에선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호스버그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의 상급 템플러라면 전부 알고 있었고, 저 자는 기억에 없는 자였다. 게다가 그의 억양은 어딘가 낯설었다.

  "우리가 들렀던 두 요새 모두 텅 비어있었소." 그는 말을 이었다. "완전히 버려져 있었지. 이유를 아는 사람도 없었소. 지역 주민들은 감시자들이 여분의 말이나 생필품 따위를 그들에게 팔았다고 했소.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서두르는 것 같았다고들 하더군. 하지만 왜 떠나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핸 일절 말하지 않았다고 했소. 그 근방에 어둠의 피조물이 출현한다는 소문도, 우리가 직접 마주친 놈들도 없었고."

  "탈영인 것 같소?" 술웨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 템플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그 동작을 따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흩날렸다. 그 모양이 횃불 덕에 붉은빛 후광처럼 보였다. "그들은 떠난다는 걸 숨기려하지 않았소. 어쨌든, 요새 하나 정도라면 탈영일 수도 있겠으나, 둘 다 그럴 리가?"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설득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숫자로는 얼마 되지 않는 감시자들이니." 흉터의 여성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리 믿지 않는 듯 했다.

  "그럴지도." 템플러가 어깨를 으쓱하자 철컹 소리와 함께 또다시 붉은 흙먼지가 일었다. "나로선 모를 일이오. 그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뿐. 두 번째 요새를 지난 뒤 우리는 제국대로를 따라 체뉴어로 향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기까지 왔소. 오는 길에 편지나 서신 몇 개를 받기도 했고. 짐 안에 있긴 하나 전부 징집자들의 가족이나 귀족들이 보낸 서신 뿐이오. 회색 감시자들로부터의 소식은 전혀 없소. 말했듯이, 오는 길에 마주친 이도 없고. 만약 있었다면 이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겠지."

  술웨는 고개를 끄덕인 뒤 캐로넬을 앞으로 불렀다. "서신을 가져와 주신 것에 감사하오. 내 동료가 당신들을 방으로 안내할 것이오. 우선 편히 쉬시길. 아침이 되면 당신네 탈주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합시다."

  저들도 탈주자라고? 그 생각에 발리야의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템플러들이 호스버그 마법사들을 추적해 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온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체뉴어 남쪽의 어딘가에서 왔다면...거의 대륙 절반을 가로질렀단 뜻이었다. 지난 두 달간 그는 테다스 지도를 들여다 보며 지냈다. 그렇기에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지 알고 있었다. 채집이 어렵지 않고 기후가 따듯한 여름이라곤 하지만, 산책처럼 가볍게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마법사와 템플러 사이의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것일까?

  그랬다. 이후 몇 주에 걸쳐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그 템플러들은 셀레스틴 호수에서 멀지 않은 올레이 남부에서 왔다. 그들의 대장인 디귀어는 기사단장 계급이었다. 그는 커크월의 학살과 백색탑의 혼란에 대해 듣고 난 뒤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아 이 일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총 여뎗 명이었다고 했다. 두 명은 오는 길에 사망했고, 한 명은 중간에 탈영했다. 처음 발리야는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얼마 안 가 두 명의 죽음이나 탈영이 템플러들의 리륨 중독과 관련 있다는 걸 연결지을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이 도주할 때 빼돌렸던 양만으로는 와이스하웁트까지 오는데 충분치 않았으리라.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빈약한 소문들을 모아 추론해냈다. 결코 템플러들과 직접 얘기하진 않았다. 그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홀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문간에 몸을 숨겨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멍청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 그들에겐 그를 추궁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있다 해도 그럴 권리가 없었으니 -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오랜 습관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슴이 늑대 무리를 관찰하듯 그들을 지켜봤다. 라로스라는 드워프 템플러는 체중을 조절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 탓에 갑옷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꿀 케이크나 설탕에 절인 아몬드를 먹어댔다. 그들 중 유일한 여성인 레이마스는 시종일관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조금도 웃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온 벌레를 붙잡아 날씨나 시간에 아랑곳 않고 바깥에 풀어주는 그의 태도는 항상 점잖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난 디귀어는 이따금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연병장에서 대련을 하거나 자그마한 성소에서 열의 있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았고, 발리야나 다른 마법사들에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오직 기도할 뿐이었고, 하루가 다르게 걱정으로 주름이 깊어가고 체중은 감소했다.

  "그는 평화를 원해." 어느 아침, 도서관에 모인 호스버그 마법사들에게 세카가 말했다. 계절은 가을이 되어갔고, 안더펠스의 타는 듯한 더위도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낮 시간은 건조했고, 서늘한 기운이 정오 무렵까지 머물다가 쌀쌀한 밤을 경고하듯 녹아내렸다.

  "마법사와 템플러 간에 말이야?" 발리야가 물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와이스하웁트의 끔찍한 외풍을 막기 위해 빌린 회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었지만 몇 주 안에 더 두툼한 걸 마련해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도서관에 몇 시간 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건 온기를 유지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린 마법사는 고개를 젓고는 읽고 있던 닳아빠진 지도 위로 주의를 돌렸다. 방을 채운 자료의 절반 정도는 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지도나 일지, 피에 젖은 서신 따위가 새로 나타났다. 그렇게 작업한 결과, 그들은 수상쩍게 실종된 감시자의 흔 적 네 개와,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진 기괴한 어둠의 피조물의 흔적 하나, 그리고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한 번 확인할만 하다고 주석을 남긴 애매한 사건 두세 가지 정도를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 말이야." 세카가 말했다. "자신이 한 일이 옳다고 말해줄 창조주의 신호 같은 걸.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회색 감시자가 되더라도 의무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신호 같은 거겠지."

  발리야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회색 감시자가 되려 한다고?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그와 얘길 나눠 봤으니까." 세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커다랗고 까만 눈은 진지한 빛을 띄었다. "너도 템플러들과 이야기 나눠볼 수 있어, 알고 있겠지만."

  "너나 가능하겠지." 발리야가 웅얼거렸다. "나는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

  "시도나 해봐." 세카가 말했다. "머지 않아 그들은 우리와 등을 마주하고 싸우는 동료가 될지도 몰라. 우리가 운이 좋다면. 창조주가 디귀어에게 그가 원하는 계시를 내린다면, 그리고 수석 감시자가 이 갈등 속에서 결국 어느 쪽 편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발리야는 머뭇거렸다.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뜻은 그 분에게 달린 일이겠지. 우리가 어찌 할 여지가 없을 거야. 하지만 수석 감시자라면..." 세카는 보고 있던 지도의 끄트머리를 살짝 말아서 발리야에게 그 누런빛 양피지를 강조해 보였다. "우리가 유용한 걸 찾아내는 거야. 우리의 가치를 입증할 만한 걸. 회색 감시자들이 네 번째 대재앙에서 찾으려는 게 뭐든 간에 그 답을 찾아내자고. 혹시 뭐 건진 거 있어?"

  "아직은." 발리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찾아내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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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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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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