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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실제로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아라벨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에 불과했다.

  전설적인 데일리시 걸작품에 비하자면, 그것은 땅딸막하고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고기잡이용 조각배에 이것저것 덧댄 뒤 어설프게 수레바퀴를 달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감시자들은 주민들이 구해온 부품들을 그러모아 조립한 그 배를 가지고 잡초가 무성한 옛 양떼 목초지 위로 움직여보는 연습을 했다.

  그들이 시도하려는 게 뭔지 이해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개러헬의 노력에 동참하도록 선임 감시자두 명을 지원해줬다. 감시자 사령관은 그토록 하잘것 없어 보이는 작전에 그리 대단한 인력을 투입하려 하진 않았으나,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어떻게든 구해낼 수 있을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도 않았다. 둘의 차이는 두 명의 마법사를 지원한 데서 드러났다.

  두 마법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럭저럭 성공이라 할만한 것을 이뤄냈다. 그 아라벨은 비록 데일리시들 것처럼 부드럽게 숲 사이로 떠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듯 마력장을 조절하여 그 배를 일정한 높이 위에 안정적으로 떠있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맨 처음 그는 주문의 위력을 오판하는 바람에 처음 만든 아라벨을 10 피트 높이에서 날려버려 산산조각 냈었다.

  하지만 새로 만든 쪽은 좀 더 튼튼했고, 이세야의 계산도 좀 더 정밀해진 덕에, 3일 째에 그들은 다소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빠른 속도로 자유동맹을 뚫고 갈만한 이동수단을 만들어냈다.

  그의 능력으로는 그 배를 공중에 가만히 띄워두는 게 한계였다. 마법으로는 배를 띄울 수는 있어도 비행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끌고갈 수 있게 안장을 단 그리폰이라면, 그 아라벨은 훌륭하게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리폰의 속도에 맞춰 날아갈 수 있었다.

  "이제 딱 백 대만 더 있으면 되겠네." 개러헬이 한 때는 목초지 울타리를 지지하고 있었을 닳아빠진 돌기둥에 몸을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간신히 착지시킨 수제 아라벨이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감추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이끌 백 마리의 그리폰과, 그걸 띄울 백 명의 마법사도 말이지." 아마디스가 덧붙였다. 그는 무신경한 태도로 잔디 사이의 데이지 꽃 한 송이를 뽑아선 손가락 사이로 돌돌 말다가 목초지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이렇게 단순한 걸 여지껏 아무도 생각한 적 없다는 게 놀랍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런 생각이 괜찮아 보이려면 적어도 대재앙이 코앞에 닥쳐올 정도는 돼야지." 개러헬이 말을 받았다. "설사 그 지경이 돼도, 나는 주민들 중 기꺼이 저기에 올라탈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즐거워 보여서 나도 참 기쁘다만." 이세야는 다시 아라벨을 떠올렸다가 지상으로 착지시키며 웅얼거렸다. 부양과 착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배를 부숴먹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바퀴에 거의 충격이 가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내심 만족했다. "둘 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면, 가서 그 백 대의 아라벨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있기만 하다면야,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구해낼 수 있을 거라고."

  "세나스테도 이미 명령을 내렸어." 아마디스가 말했다. 카나리아를 입에 문 고양이라 해도 그보다 만족스런 웃음을 짓지는 못할 듯 보였다. "한 시간 전에 공식적으로 하달된 명령이지. 회색 감시자들은 와이컴 주민들을 공중부양 아라벨로 대피시킬 것이고 - 이거 은근 발음이 어려운데? - 스무 대의 배가 완성되면 짐을 싣는대로 출발할 거라고. 우리 셋과 너희의 두 그리폰이 첫 번째 무리를 스탁헤이븐으로 인도할 거야."

  이세야는 고기잡이 배 "아라벨"에서 물러나 바람에 흩날린 머릿결을 정리한 뒤 목초지를 가로질러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수레의 요란한 움직임에 놀라 덤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새들이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재잘거림과 지저귐이 풀밭을 따라 걷는 그의 뒤를 노래가락처럼 뒤따랐다. "또 판돈을 나눠걸고 있나보네."

  "당연히 그러겠지." 개러헬이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도 걸어보긴 하겠다잖아. 우리한테도 기회가 주어진 거야, 이세야. 우리가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어."

  일부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내 말하진 않았다. 동생의 눈에서 반짝이는 흥분과 전율을 굳이 꺼트리고 싶진 않았다. 희망찬 태도는 개러헬의 가장 훌륭한 재능이었고, 자유동맹인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절실한 것 중 하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라벨 스무 대라고?" 그가 말했다. "망치질을 슬슬 시작해야겠네."

 

* * *

 

  공교롭게도, 개러헬은 망치질에 끔찍히도 재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훌륭한 목수에게 요구되는 신중함과 인내심 같은 자질은 그 엘프 궁수의 대척점에 있는 요소였다. 아마디스가 투덜대며 말하길, 개러헬은 화살로 쏴버리거나, 꼬여내거나, 외설적인 이야기로 꾸며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면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자유동맹 여성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나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이 지적한 대로,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주민들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빠져 있기라도 했다. 대신 그는 자유동맹의 수많은 귀족 친구, 친척들이나 알고 지내는 용병대 대장들, 혹은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이라면 누구에게든 편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종종 개러헬에게 그리폰을 타고 편지를 전하고 오라며 내보내 새벽부터 황혼까지 와이컴 바깥으로 나돌게 했다.

  결국 아마디스가 동생에게 사람들 이름으로 빽빽한 명단과 편지로 가득찬 가방 하나를 안겨주는 모습을 본 이세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개러헬을 전령으로 이용하는 데 짜증 안 내?"

  "당연히 안 내지." 아마디스는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는 검은머리를 찰랑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쟤를 이보다 더 잘 써먹을 방법이 또 있겠어? 쟤는 마법도 쓸 줄 모르고, 톱질이라곤 끔찍하게 못한다는 걸 너도 봤잖아. 괜히 아라벨 만드는 걸 도우라고 뒀다간 분명 그 고기잡이 배를 땅 속으로 묻어버릴 방법을 찾아내고 말걸. 하지만 그 웃기게 생긴 그리폰의 특출나게 빠른 속도로 먼 테다스 구석까지 날아가는 건, 걔가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리고 걔의 매력을 뽐내서 귀족 나으리들과 가차없는 암살자들을 우리에게 동참하게 할 수도 있고. 루비 드레이크의 귀족 대장 아가씨가 서명한 개인 서신을 그리폰에 탄 회색 감시자로부터 전달받는다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큰 특권으로 여겨질지 짐작이 가? 제대로 오래 살아남기만 한다면, 대대손손 손주들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라고. 자기 친구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떵떵거리며 말할거리이기도 하지. 떵떵거리는데 관심이 없는 작자들에게는, 하다못해 우리가 어떤 무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환기시켜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간에, 감히 그 앞에 대고 도움을 거절하기는 매우 힘들 거라는 뜻이야."

  "결국 정치질이라는 거군." 이세야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게 바로 아마디스가 이렇게 개인 책상이 딸린 사무실이며 종이더미 뿐 아니라, 와이컴의 거위깃털이 몽땅 화살 만드는데 징발된 마당에 깃펜까지 제공받은 이유였다. 그 꼿꼿한 실용주의자 세나스테가 아무리 스탁헤이븐의 통치자와 연줄이 있다곤 해도 고작 손님 한 명에게 이 정도로 신경을 쓰는 게 묘하다고 생각은 했지만...결국 이 또한 감시자 사령관의 또 다른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결국 정치질이지." 아마디스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너도 빨리 이 게임에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전쟁이란 건 결국 칼질과 정치질 놀음인 거고, 우리는 이겨야 하니까."

  "나는 마법 쪽이 나아서." 이세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인간 여자가 편지에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두고 나왔다.

  적어도 그 편지들은 효과가 있었다. 개러헬은 매일 같이 더 많은 지원 약속과 원조하겠다는 서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엘 공작은 와이컴의 난민들이 스탁헤이븐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거란 전언을 보내왔고, 아마디스가 자신의 사촌이 하는 약속은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긴 했지만 충분히 승리감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그냥 적어도, 이 사람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기만 한다면, 그 승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고기잡이 배와 수레바퀴를 가져다가 아라벨을 만들어댔지만 - 혹은 당나귀 수레나 썰매 같은 것까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가져다 썼다 - 대재앙이 닥치기 전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서른 대나 만들면 다행일 것 같았다.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닥쳤을 때, 도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이 첫 번째 무리를 데리고 와이컴을 탈출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마치 무언가에라도 홀린 것처럼 움직였고, 유리 사과 주점에서 술에 취한 이세야가 제안을 던진 후로 딱 일주일 뒤, 그들은 와이컴에서의 첫 번째 탈주를 시도할 수 있을만큼 아라벨을 만들어냈다.

  열여덟 대의 아라벨은 두 줄로 연결돼 있었다.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던 건 열아홉 대였으나, 한 대는 이세야가 내구도를 확인한다고 목초지에 거칠게 착륙시키는 과정에서 망가지고 말았다.

  250여 명의 주민들이 그 안에 혼잡하게 올라타 있었고, 이들을 이끌고 자유동맹을 빠르게 가로지른다는 건 너무나도 허황되게 느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어린 아이들과 굳센 얼굴로 그들을 꼭 끌어안은 부모들 사이로 얇은 나무 상자 안에 식량, 옷, 귀중품 따위가 쌓여있었다. 잡동사니를 실을만한 자리가 부족했기에 사람들은 가진 옷 중에 가장 귀한 것들을 걸쳐입었고, 축제마냥 화려한 모양새가 이 모든 상황에 기괴함을 더했다. 배 옆면에 달린 엉성한 나무 닭장 안에 갇힌 닭들과 오리들이 불만에 차 요동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꽥꽥거리는 쇳소리와 이따금 흩날리는 깃털 역시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일조했다.

  행렬의 선두에 자리잡은 건 굽은꼬리와 레바스였고, 둘은 각각 아홉 대의 아라벨과 연결돼 있었다.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그리폰들에 맞춰 새로운 안장을 고안해냈고, 가죽끈 옆으로 매달린 빛나는 은제 메달이 안개낀 여명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아무리 그리폰이 강력한 생물이라 해도 이만한 무게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 실제로 마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이 있어도 그렇지 않을까, 이세야는 쓸데없는 불안감을 단호하게 옆으로 밀어냈다. 로브 소맷자락을 손목과 팔꿈치 부근에서 동여맨 그는 머리칼을 고정한 머리띠도 단단히 묶은 뒤 나란히 앞장 선 다른 감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를 옆에 둔 개러헬이 자리에서 자신의 그리폰을 다독이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굽은꼬리를 조종하긴 할 테지만 아라벨들을 띄우는 건 마법사의 일이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면 승객 한 명을 더 태울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그 일을 자처했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그는 다른 아라벨 쪽으로 외쳤다. "준비 됐어?"

  "준비 됐어!" 개러헬이 대답했다. 이세야에 비해 훨씬 쾌활한 태도였다.

  "준비 됐소." 다른 마법사의 대답은 좀 더 엄숙하게 들렸다.

  이세야는 왼쪽 손목에 레바스의 고삐를 감은 뒤 두 손으로 스태프를 단단히 붙들었다. 영계로 자신을 연결하자 영적인 에너지가 스태프를 매개 삼아 흘러들며 그를 채우는 게 느껴졌다. 생각의 가장자리로 영과 악마들의 속삭임이 영혼을 울리는 마법 사이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는 그 속삭임을 떨쳐내고 마법을 그러모았다. 지난 며칠 간 수차례 연습한대로, 이세야는 넓은 바닥을 가진 부드러운 고깔 모양을 그려냈다. 그것은 구름 같은 방석 형태로 펼쳐진 모양이었다. 그 무형의 평평한 바닥은 전체 대열을 받쳐줄 수 있을만큼 넓었고 주문의 위력을 넓게 퍼뜨려서 아라벨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보호했다. 안정적으로 주문을 형성하자, 다소 버겁긴 해도 주문을 따라 흘러드는 힘의 파동을 유지하는 건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바스를 불렀다. "날아." 그리폰은 이세야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무게를 이끌고 갈 수 있게 해줄 거란 신뢰를 품은 채 검은 날개를 피며 박차올랐고, 엘프는 고깔 형태의 마법장을 땅으로 향해 보냈다.

  아라벨들이 그리폰 뒤에서 요동치며 나무와 밧줄, 금속으로 된 거대한 애벌레마냥 허공을 향해 꿈틀댔다. 이세야의 뒤로 헉 하는 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뒤 굽은꼬리가 옆으로 나란히 두 번째 행렬을 이끌고 뒤따랐다. 아라벨끼리 연결한 밧줄과 사슬이 위험하게 삐걱댔지만 마법사들의 부유 마법이그것들을 단단히 붙들어 놨다.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들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더 이상 무게에 시달리지 않게 된 그리폰들은 안장을 단 채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부유 중인 고기잡이 배들과 잔뜩 흥분하고 겁에 질린 승객들을 이끌었다.

  그리폰들은 이렇게 낮게 비행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건 이세야도 마찬가지였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뒤로 납작 젖혀진 레바스의 귀와 뿜어져 나오는 콧김은 그 그리폰이 나무 꼭대기를 스쳐가는 느낌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이세야는 녀석이 자유롭게 높이 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아라벨을 띄우는 마력장의 고깔을 그보다 높이 떠올릴 수 없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더 높이 올라가면 마법은 흩어지고 말 테고, 그들은 전부 추락하고 말 것이다.

  "날 믿어." 그는 그리폰에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레바스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털에 덮인 한쪽 귀가 퍼드득 떨렸지만, 그저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그리폰은 고도를 유지한 채 곧게 나아가다가 높은 나무가 가로막으면 아라벨을 끌고 뛰어넘는 대신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동맹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바위지대와 황량한 숲 위를, 풀을 뜯는 양떼와 소떼가 수성을 위해 도축당하는 바람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목초지 위를 지나쳤다. 개울이나 강줄기는 이세야가 미처 눈에 담기도 전에 은빛 반짝임만 남기고 스쳐갔다.

  레바스는 평소처럼 빠르게 날고 있진 않았다. 굳이 치자면 그 그리폰은 긴 여정을 위해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땅에서 가깝게 날고 있자니 풍경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 시간이 지나자, 와이컴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 대열이 근처로 흐르는 미난터 강 지류 위를 지나자, 이세야의 고깔 마력장 아래로 물결이 움푹 파여 흘렀다. 흐르는 물 위로 주문을 유지하는 건 다소 까다로웠기에 - 예측불허의 소용돌이 물결 탓이었다 - 그 엘프는 빠르게 물줄기를 가로질러 그리폰을 이끌었고 레바스가 강둑을 따라 날도록 했다.

  북쪽으로, 안티바 시티가 있었을, 혹은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재앙의 검은 구름장막이 지평선 위로 그을린 연기처럼 얼룩져 있었다. 고맙게도, 대부분 나무에 가려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는 구역을 지날 때면 이세야는 금방 끓어오를 듯한 구름에 덮인 보랏빛 하늘과 구름 사이사이 소리없이 내리치는 번개가 선사하는 고통의 현신에 흘끗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새벽의 여명도, 빗줄기도 없었다. 지평선을 따라 폭풍의 그림자만이 드러워져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곳에 안스버그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상 20피트 높이에서 보이는 거라곤 보통 나무나 언덕 뿐이었다. 그들은 비쩍 마른 개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공허한 희망을 품고 짖어대는 텅빈 농장을 지나기도 했고, 비어있지 않은 어느 곳을 지날 때엔 거주민들이 나무창 사이로 던지는 의심스런 눈빛을 받기도 했다.

  오전부터 정오까지 차츰 떠오른 해는 거침없이 밤을 향해 저물어갔다. 아라벨은 딱 두 번 멈춰서 그리폰과 마법사들에게 짧은 휴식을 제공했고 승객들에게 잠시나마 요기를 하며 뻣뻣해진 팔다리를 풀어줄 시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두려움과 급박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마저도 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고, 이동이 다시 시작되면 그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스탁헤이븐의 성벽 뒤로 안전하게 숨길 원했다.

  그리고 붉은 황혼이 찾아들 무렵, 그 성벽이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굴곡진 산줄기를 따라 원형으로 둘러싼 회색 돌벽 위로 석양이 반짝임을 더했다. 북쪽으로는 미난터 강이 도시의 수로를 향해 몰아치는 소리가 바다의 거센 포효처럼 들렸다. 도시 자체의 모습은 녹색 언덕 위 넓은 대로에 둘러싸인 대리석 궁전의 영광스런 위용만이 아주 잠깐 시야를 스쳤으나, 무리가 다가감에 따라 성벽 너머로 금세 가려졌다.

  성벽 위 감시탑 쪽으로 걸린 깃발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성배를 둘러싼 세 마리의 검은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이세야가 보기엔 물고기 같았다. 어쨌든 그 뾰족뾰족한 가시와 소용돌이 무늬 속에서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체가 뭐든 간에, 그것은 사슬갑옷 위에 붉은 겉옷을 두르고 열을 이뤄 선 병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병사들 중 한 사람, 겉옷 아래 판금 갑옷을 걸치고 가슴팍에 금줄을 매단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가 닿을만한 거리가 되자 장갑 낀 손을 들어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스탁헤이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개러헬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피곤할 게 분명한데도 쾌활한 어조로 마주 소리쳤다. 엘프 감시자는 굽은꼬리를 이끌고 땅으로 내려섰고, 이세야와 다른 마법사는 내려앉는 그리폰들을 따라 아라벨을 하강시켰다. 안전하게 착륙하는데엔 5분 정도 소요됐다. 이 공중부양 아라벨이 제대로 먹힌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손상 없이 보존하는 건 매우 중요했다.

  다행히 아라벨은 부드럽게 미난터 강변을 따라 착지했고, 나무 삐걱대는 소리와 옆에 매달린 닭장에서 들려온 꽥꽥소리만이 잠시 이어졌다. 와이컴 난민들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비행 끝에 중심을 찾느라 다들 허둥거리는 가운데, 스탁헤이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음식과 물, 와인이 들려 있었다. "와이컴의 영웅들 만세!" 한 사람이 그렇게 외쳤고, 이내 군중들이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시자들! 회색 감시자들이여! 와이컴의 영웅들을 찬양하라!"

  "저 기세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이세야는 한숨 속에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은 어둠의 피조물로부터 거둔 승리로 스탁헤이븐도 흥이 나겠지만 - 고작해야 적들 손에서 와이컴 주민 한 줌을 구해낸 것에 불과한 승리일지라도 - 그들의 열기가 과연 이미 빠듯하게 들어 찬 도시에 수백의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유지될지 궁금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정말로?" 둥근 얼굴의 나이 든 여자가 불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이세야에게 질문했다. 푸른 공작새와 진홍빛 장미가 그려진 현란한 무늬의 비단 스카프가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싶었고, 그것은 직접 만들어 입은 것 같은 수수한 드레스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경비대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수성을 앞두고 군식구가 느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전쟁을 앞두고 추가 병력이라면 원할 테죠." 엘프는 대답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은 그 정도였다. 힘든 시기에 일손은 누구든 환영일 테니.

  여자는 스카프를 가슴팍에서 고정하고 있는 목각 브로치를 꼭 쥐었다. "나는 노인이지 군인이 아닌 걸요. 싸움 같은 건 할 수 없다고요."

  "이건 대재앙입니다." 이세야가 말했다. 냉혹한 날카로움이 그 목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그 둥글둥글한 여자가 그 대답에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피곤했다. "당신도 싸울 수 있고, 그래야 할 거예요. 이 아라벨에 올라탄 순간 당신은 결정을 내린 겁니다. 우리는 와이컴에서 모두를 데리고 나올 순 없었습니다. 전부를 구하기엔 배도 부족했고 그리폰도, 마법사도 부족했으니까요.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덕에 누군가는 죽겠죠. 그러니 당신은 싸울 겁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 노력과 더 용기있었을 누군가의 자리를 낭비해버린 당신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여자의 입이 충격으로 딱 벌어졌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웅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아라벨에서 짐을 풀고 있는 주민들 사이로 달려갔다. 잠시 뒤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굽은꼬리의 안장에서 마지막 고정끈을 풀어낸 뒤, 끝났다는 신호로 그리폰의 옆구리를 두들겨준 개러헬이 이세야에게 다가왔다. "그것 참...사람들을 복돋는 참신한 방법인데."

  "사람들을 복돋는 건 네가 해." 이세야는 동생에게 으르렁거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쟁 영웅은 너잖아.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 건 내가 하겠지만, 그 뒤는 내 알 바 아니야."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닌걸." 개러헬은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자고. 누나도 피곤한 거 알아. 자, 오늘 밤은 바엘 공작의 환대를 즐겨보자고. 오늘 뿐인 거 누나도 알잖아."

  "내일은 다시 와이컴으로 가야겠지, 나도 알아." 이세야는 지친 태도로 대답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와이컴 대문에 닥칠 때까지 최대한 많이 오갈 계획이었다. 하루 종일 대열을 이끌고 지지하며 이동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보기 전에는 제법 괜찮은 계획처럼 보였었다.

  "아냐. 카바로스랑 세 명의 스탁헤이븐 감시자들이 와이컴으로 아라벨을 이끌고 돌아갈 거야. 그 다음엔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그 자리를 대신할 거고, 다시 팀을 나눠서 아라벨을 가능한한 많이 오가게 하겠지. 하지만 누나랑 나는 와이컴으로 돌아가지도, 스탁헤이븐에 머물지도 않을 거야. 잊었나본데, 우린 안더펠스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고. 그러니 와인이나 실컷 마시고 흥에 취하라고. 오늘 밤만은 영웅으로서 즐기란 말이야. 내일 아침이면 다시 회색 감시자가 돼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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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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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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