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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다나로가 물어왔다. 나직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이라곤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말하는 도중 무의식적으로 부상 입은 다리를 덮은 거친 재질의 담요 귀퉁이를 구겨쥐었다. 그 천자락은 지난 며칠간 초조한 손길에 시달린 흔적으로 때가 타 구겨져 있었다.

  하루이틀 정도 뒤면 그는 호스버그 의무실 밖으로 나설 수 있을 터였다. 치유사들은 이미 거의 모든 상처를 치료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그저 다리의 상처로부터 독이 더 번지지 않는지 이따금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마법사에게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 때까치의 상태였다.

  "나는 내 그리폰이 날 구하느라 죽는 걸 원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를 이대로...구울이 되게 둘 수는 없어."

  "그러지 않을 거야." 이세야는 약속했다. 다나로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가서 마음이 아파왔다. 모든 기수들은 방랑자의 경우처럼, 전투 중 자신의 그리폰이 쓰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끔찍할 지언정 적어도 빠른 과정이긴 했다. 고통에 시달리며 느리게 구울이 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만큼 끔찍했다.

  "퍼렐든에 자라나는 야생화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다나로는 입을 열었다가, 미처 생각을 끝내지도 못한 채 씁쓸하게 말을 줄였다. "어린애들용 이야기일 뿐이겠지. 너무 절박해서 멍청해졌나봐, 나도 참, 애들 얘기 속에서 희망을 찾다니. 설사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 한들, 지금 와서 뭐? 대재앙이 시작된지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꽃이 있어봤자 이미 뿌리까지 싹싹 뽑힌지 오래겠지. 차라리 저 창문으로 요정 대모님이 날아들어 반짝이는 지팡이를 휘둘러 그를 구해주길 바라고 말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이세야가 말했다. 침대 옆에 선 그는 확신 없는 눈으로 다나로를 내려다봤다. "네가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설마 입단 의식을?" 다나로는 그 단어를 내뱉으며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억눌렀다. 그는 큼직한 엄지손가락으로 콧잔등에 난 사마귀 문질렀다. "그런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리폰에겐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아. 그 시도만으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난장판이었어서 지난 50년 간 아무도 그럴 생각조차 안한 거라고. 그리고 설사 그 실험이 성공적이었어도...이미 타락으로 죽어가는 그리폰에겐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럴지도 모르지." 이세야는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것 뿐이야. 최초의 의식은 지금의 때까치 같은 운명을 앞둔 사람들로부터 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됐던 거였어. 이제 와서 더 잃을 게 뭐 있어?"

  "많지, 사실." 다나로는 미소 지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끌어올렸으나 결과적으론 찡그리는 모양새가 됐다. 그는 사마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담요 위로 떨구곤 천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때까치. 너. 어쩌면 다른 친구들까지도. 그리폰들에게 입단 의식을 시도했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들었던 거 너도 기억하잖아."

  "물론." 그런 시도가 마지막으로 있던 건 50년도 전의 일이었지만, 감시자들은 여전히 그 때의 교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마바리를 대상으로 한 입단 의식은 인간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죽는 놈도 있었고, 살아남는 녀석들은 회색 감시자들과 비슷한 면역력과 적응력을 획득했다. 충분히 오랫동안 살아남기만 한다면 아마 녀석들도 콜링을 겪었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은 개가 있었단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개들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짧았고, 전투견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리폰은,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야수는 입단 의식 도중 통제할 수 없는 맹렬한 분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공격성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만 위험에 빠트린 게 아니라, 그 자신마저 목표로 삼았다. 그리폰이 품은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증오는 스스로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타락에게까지 향했고, 그 고귀한 생물은 혐오감에 몸부림치며 스스로의 육신을 찢어댔다. 초기의 실험에서 발생했던 그 끔찍한 비극은 회색감시자들에게 감히 같은 일을 다시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감시자들은 혈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칼린이 그에게 가르친 내용들 속에 그리폰에게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이게 하는 열쇠가 숨어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만 있다면, 아주 약간만 뒤틀어놓을 수 있다면...완전한 속박이 아니더라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정도라면...어쩌면 그 맹목적인 증오를 뒤덮고 타락과 공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확률 낮은 도박이었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감히 고려조차 하지 않을만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게 때까치를 죽음이나 구울화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면? 물론, 당연히, 그런 결말보단 명백히 나은 선택지이고 말고. 그리폰의 충성심이 그런 끔찍한 운명으로 보답받는 건 어느 쪽에게든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다나로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탐색하듯 그를 훑어봤다. 투박한 농부같은 인상을 가진 그 마법사는 정직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듬직한 친구였고, 그 얼굴 위에 서린 서글픈 희망을 감출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세야가 자신의 사랑하는 그리폰을 구할 수 있다고 믿길 바랐지만, 사실 믿고 있진 않았다. 그다지.

  "시도는 해봐." 그가 말했다.

  "그럴게." 이세야는 대답했고, 동생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개러헬은 성의 군사작전실에서 아마디스를 비롯한 십여 명의 사람들과 회의중이었다. 상급 회색 감시자와 군 사령관, 그리고 안더펠스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이끄는 용병 대장들. 이세야가 알기로 지금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지원병력이 끊긴 기회를 이용해 호스버그의 포위 공격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안더펠스 왕국군의 여성사령관인 우바샤 역시 자리하고 있었고, 남편이었던 헤놀트 국왕이 2년 전 오우거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서지며 짧은 재위기간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호스버그의 통치자로 군림 중인 섭정왕비 마리웬 역시 여느 때처럼 끝없이 툴툴거리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빛내고 있었다. 헤놀트에겐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지만, 국왕 그리바우드는 자신의 유아방을 통치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은, 그리 놀랍지 않게도, 기꺼이 섭정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세야가 왕성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마리웬 왕비의 통치에 대한 가장 불경한 내용은, 대재앙 덕에 안더펠스의 궁극적인 권력이 마리웬 왕비가 아닌 여성사령관 우바샤에게 가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 왕비는 마주치는 잘생긴 용병들마다 경박하게 유혹하는 태도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지만, 우바샤는 쉴 새 없이 묵묵한 태도로 일하며 필요한 일을 하나씩 해냈다.

  지도가 놓인 탁자 끝, 아마디스와 개러헬을 둘러싼 작은 무리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우바샤였다. 가까이 다가간 이세야는 지도 위의 표식들이 이동한 걸 볼 수 있었다. 우윳빛 대리석 조각들은 감시자, 마법사, 그리폰 외에도 호스버그를 둘러싼 용병대 무리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린애들 놀이에 이용되는 흑백의 돌조각들은 안더펠스 왕국군을 표시했다. 그리고 개러헬의 유별난 명령에 따라 왕궁 하인들이 모아온 말린 바퀴벌레 시체더미가 어둠의 피조물을 표시했다.

  그들은 라텐플루스 강 평야가 전장으로 가장 적합한 이유와,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들을 그 함정으로 끌어들일지에 대해 논쟁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악마의 군주가 이끌 때조차도 통상적인 군대가 싸우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급로를 지키거나 병력손실을 줄이는 일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으니. 놈들은 모든 걸 쏟아붓는 맹렬함으로 일반적인 인간이나 드워프 사령관이라면 경계하며 물러설 상황에조차 오로지 전진하곤 했다.

  물론,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떨 땐 악마의 군주가 교묘하게 자신의 군대를 파괴의 문턱에서 끌어내 적들에게 전략을 그대로 되돌려 줄 때도 있었다. 그 예측불가능함 탓에 작전을 짜는 건 언제나 크나큰 도전을 요했다

  하지만 그 몫의 도전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이세야는 탁자를 지나 개러헬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해."

  개러헬은 초조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지금?"

  오랜 포위공격과 다가올 전투로 인한 긴장감이 그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었고, 그건 아마디스나 우바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예전보다 야윈 모습이었고, 눈매와 입가는 피로로 주름져 있었다. 우바샤의 밝은 갈색 머리는 씻지 못해 탁한빛을 띠었고, 아마디스의 옷은 입고 잔 흔적으로 구깃구깃 했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그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 손은 곱고 부드러웠다. 호스버그의 포위공격을 무너뜨리기 하루 전 날인 지금, 작전실에 선 그의 손은 전장에서 얻은 상처와 에미서리의 주문이 남긴 흉터로 가득했다. "지금."

  "좀 기다리면 안될까? 지금 좀 바빠서."

  "너한테 하라는 게 아냐. 병만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개러헬은 여전히 망설였지만, 어느 새 성가심보다는 호기심이 그 녹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여지껏 한번도 누굴 감시자로 징집하려 한 적 없었잖아."

  "한번도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병 내놔, 개러헬. 지금은 다른 신경쓸 일이 훨씬 많잖아."

  "좋아." 그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철제 고리 하나를 풀어냈다. 열쇠 하나가 달려있는 고리였다. 탁한 회색으로 변색된 작은 은제 열쇠였고, 기껏해야 보석함 정도에나 맞을만큼 작은 크기였다. "내 방 책상 서랍 안에 상자가 있어. 다 쓰면 다시 돌려놔."

  "당연하지." 열쇠를 받은 이세야는 아마디스와 우바샤에게 살짝 고개숙여 양해를 구하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기 직전, 왕비 마리웬이 그를 붙들었다. 왕비는 분을 바른 부드러운 손으로 이세야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고, 가지런한 손톱은 새로 칠한 듯 윤기가 돌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엘프를 붙들어 세우기엔 나비 위로 꽂히는 쇠침만큼 강력할 따름이었다.

  "동생 얘기를 좀 듣고 싶네만." 왕비 마리웬은 청보라빛 눈을 크게 뜨고 음모라도 꾸미듯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콜을 바른 긴 속눈썹 위로 눈꺼풀 위에 바른 진주가루가 반짝였다. 장미향과 늦여름의 여름자두향이 물결치는 검은 머리 위를 맴돌다가 깊이 파인 푸른빛 벨벳 드레스 위로 흩어졌다.

  7년에 걸친 포위 공격이 왕비에겐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에, 이세야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는 불쾌감을 감추려 했으나, 그리 많은 노력을 들이진 않았다. "제 동생이요? 이미 몇 년간 봐오지 않으셨습니까. 뭘 알고싶으신지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왕비는 순진무구한 양 달콤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던 건 동생에게 내 얘길 좀 해달라는 거였네. 전투 사령관께선 어찌나 바쁘신지 나한테 잠시 내줄만한 시간도 없는 것 같더군. 물론 이해하는 바이네. 바깥의 지저분한 일들 때문에 퍽 바쁘시겠지. 하지만 조만간 포위 공격도 끝난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그러길 바라고 있죠." 이세야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왕비에게 잡힌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그대들 모두 놀라우리만치 용감하니까. 그리고 전투 사령관 개러헬은 그 사이에서도 어찌나 늠름하고 용맹하신지. 아주 드문 남성이야.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네."

  "개러헬이 무척 영광스러워 할 것입니다."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알 수 있나." 마리웬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나 역시 이러한 뜻을 그분께 전하고 싶었네만, 말했듯이 워낙 바쁜 분이어서 말이야. 하지만 포위 공격이 무너지고 나면 이 또한 달라질 거라 나는 믿고 싶네.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고, 우바샤가 좀 더 평범한 업무를 돌보게 될 때 쯤엔...어쩌면 그분도 왕비의 존경을 즐기는 사치를 누릴 때가 오지 않겠는가."

  이세야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더펠스의 차후 협력 여부를 인질 삼아 요구해오는 왕비의 제안에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며 - 그리고 아마디스는 어떨지 역시 궁금해하며 - 대답했다.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왕비 마리웬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수줍은 양 속눈썹을 팔랑이곤 돌아섰다. "안더펠스인들은 그대들의 수고에 매우 감사할 걸세."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이세야는 대답했다. 대화를 살짝 엿들은 상급 감시자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교환한 뒤, 그는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자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당장 마주할 과제는 위험스럽고 유쾌하지 않을 테지만, 왕비의 옹졸한 욕망을 마주하는 것에 비하면 천 배는 나았다. 엘프는 긴 한숨을 내쉰 뒤 개러헬의 개인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젊은 회색 감시자 하나가 동생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긴 했으나 긴장된 얼굴이었다. 젊은 청년은 이세야가 복도를 지나 시야에 잡히자 의식적으로 자세를 곧추세웠다. "충성."

  "그렇게 각잡고 서있을 필요 없네." 그는 엉성한 경례에 답하며 손짓했다. 이 젊은 감시자의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지만, 입단의식을 거친 지 한 달도 안된 신입이라는 건 떠올랐다. 다른 많은 안더펠스인들처럼, 그 역시 자원 입단자였다. "동생 방에 좀 챙길 게 있어서 온 거야."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이세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한 것 뿐이네."

  "아." 청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의 기대감과 끔찍한 기억의 불쾌감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새로 징집되는 겁니까?"

  "아마." 그는 청년을 지나쳐 개러헬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담긴 서랍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러헬의 방은 지극히 검소한 모양새였다. 책상 위에 놓인 몇 장의 전투지도와 편지뭉치, 씻는 용도의 물그릇, 정돈 안 된 침대 정도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 수 년 간 온 성을 채우고도 남을 작전 전리품을 모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동생의 방을 장식한 기념품이라곤 굽은꼬리의 빠진 날개깃을 모으는 작은 단지 하나 뿐이었고 그나마도 보통은 화살 끝에 다는데 사용되곤 했다. 침대 옆에는 아마디스의 수면용 로브와 양모 슬리퍼 한 쌍이 놓여있었고, 그의 향수에서 남은 잔향이 갑옷 윤활제와 가죽냄새 사이에 섞여 은은하게 맴돌았다.

  잠긴 서랍은 책상 왼쪽 아래편 서랍이었다. 이세야는 열쇠를 넣고 돌려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탁한 회색 금속으로 테를 두른 검은 나무상자가 놓여있었다. 어떤 인장이나 경고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극단적으로 단순한 모양새 자체가 이미 어떤 느낌을 풍겼다. 이세야는 그 안에 살아있는 전갈이라도 담겨있는 것마냥 신중한 손길로 상자를 꺼냈다.

  물론 그 안의 실제 내용물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뚜껑을 열었다.

  빛바랜 은잔과 리륨 가루가 담긴 주머니, 그리고 탁한 회색빛의 작은 유리병 세 개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반쯤 헤어져 안을 채운 뻣뻣한 말총꾸러미가 살짝 삐져나온 낡은 벨벳 쿠션이 상자의 내용물을 받치고 있었다. 두 개의 병에는 칙칙한 검은빛 액체가 가득 차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거의 비어 보였다. 병의 바닥에 고작해야 몇 방울 정도 남아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세야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다. 입단 의식엔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

  그는 상자를 닫아 망토 안에 챙긴 뒤, 개러헬의 서랍을 다시 잠갔다. 문 밖을 지키던 젊은 감시자 청년은 방을 나서는 그에게 다시 경례했다. "충성."

  "수고하게." 그는 청년을 따라 절도있게 인사했다. 딱히 규정으로 정해진 방식 같은 건 아니었다.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회색 감시자는 의전을 신경쓰는 집단은 아니었고, 전장에선 특히나 더 그랬다. 하지만 저 청년이 그런 규율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한다면, 이세야는 얼마든지 따라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달랠 방법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창조주가 당장 그 방법을 내줄 것 같진 않았고, 개러헬의 방 문지기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인 그는 왕궁을 벗어나 때까치가 머물고 있는 요양용 우리로 향했다.

  그 그리폰은 자신의 우리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아프고 상처입은 그리폰이라 해도 그들은 좀처럼 우리 안에 머무는 일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약간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들은 언제나 넓은 상공을 누비며 시간을 보냈고, 낮동안에는 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은 채 날개를 펼치곤 대재앙에 가려진 햇살 아래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리곤 했다.

  하지만 때까치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이세야가 들어서는데도 고개조차 들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개 안쪽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 자신의 배설물 위로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바람에 털도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이렇게나 자신의 긍지를 내팽겨친 그리폰을 보는 건 이세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고귀한 짐승이었고, 창공의 주인이었으며,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경외감에 걸맞는 기품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그는 우리 바로 바깥의 짚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가져온 도구를 내려놓았다. 개러헬의 박스 외에도 작은 단검과 전날 사냥한 헐록의 피가 담긴 병 하나를 따로 챙겨왔다. 헐록의 피는 검붉은빛이었지만, 개러헬의 상자에 담긴 오래된 병 안의 내용물만큼 진하고 진득한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병 안에는 200년 전 사냥꾼의 몰락에서 쓰러진 세 번째 대재앙의 악마의 군주, 토스의 피가 담겨있었다.

  때까치는 이세야가 도구들을 앞에 늘어놓을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은제 술잔에 살짝 깔리게 푸른 리륨 가루를 부어넣고 그 위에 가루가 전부 녹을 때까지 헐록의 피를 채웠다. 섞인 내용물 위로 고대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 더해졌다. 차가운 검은 연기가 술잔에서 피어올랐고, 어둠의 피조물의 독특한 부식의 냄새가 끈끈하게 묻어났다.

  그 증기가 숨결에 와닿자 이세야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그 옛날 입단 의식의 악몽이 그를 휘감아와 그는 무릎 꿇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의식에서 동료 몇 명이 죽었던가, 목이 졸려서, 두려움으로, 들이마신 피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몸 안으로 침투하여 뼛속 깊이 파고드는 그 느낌...존재의 근본을 뒤틀어놓은 그 의식에서 그는 도무지 완전히 벗어났다고 느낄 수 없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입단 의식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 다르게 바꿔놓았고, 그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때까치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을 영계와 연결시킨 이세야는 실낱 같이 미약한 마법을 끌어내 술잔으로 흘려보냈다. 어두운 색의 액체는 잔 안에서 빠르게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소용돌이 치는 표현 위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들의 환영이 떠올랐다가 흐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마법을 활성화해둔 채 술잔을 옆으로 내려놨고, 단검을 손에 쥐고 때까치에게 다가갔다.

  그리폰은 그가 다가가 건드릴 때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회색빛 콧잔등은 움푹 파여있었고, 부드러운 가죽털 위로 깃털은 바짝 말라 빛깔을 잃은 채였다. 턱주가리를 따라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검붉은 얼룩은 부리 안쪽면까지 이어졌다. 두 눈 위로 검은 눈곱이 시야를 가릴만큼 엉겨 얇은 기름막을 두르고 있었다.

  때까치가 어둠의 피조물의 혈액을 삼킨 지는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염은 빠르게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세야가 앞발을 집어드는데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귀는 무기력하게 축 쳐져 있었고, 눈곱 낀 두 눈은 멍하니 엘프의 뒤편 벽을 향해 있었다.

  "다 널 구하려고 하는 일이야." 이세야는 넋이 나가 있는 그리폰에게 속삭였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딱히. 그 짐승들은 기묘하리만치 영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짐승이었고, 인간의 언어는 그들이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그 말을 했다. "네가 다나로를 구하느라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그리폰은 더러운 짚더미 위로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단검이 발가락 끝을 찔러 핏방울이 맺히는데도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때까치의 털가죽 위로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고, 이세야는 피로부터 마법을 끌어내 미완성이던 그의 주문을 마무리했다. 그는 칼린이 가르쳐준대로 피로 이어진 때까치의 마음과 자신의 의식을 연결했고, 그리폰의 날뛰는 사고를 자신에게 맞춰 조정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여, 그의 바람대로, 때까치는 부리를 열었다. 유리 같은 두 눈은 텅 비어있었지만, 그의 사고는 급격한 혼란 속에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하는 외침이 때까치의 머릿 속을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절박하고 무력하게 그의 침입에 저항하려 노력했다. 싫어!

  받아들여, 이세야는 다시 반복했고,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리폰의 정신을 강제로 장악했다.

  그는 술잔을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때까치의 부리 사이로 기울였고, 꼼짝 못하게 붙들린 그리폰에게 주문이 걸린 리륨과 혈액의 혼합물을 몇 모금에 걸쳐 전부 삼키도록 했다. 때까치의 혼란이 점차 커져갔고, 이세야는 그의 정신이 속박을 풀어낼까 두려워졌다. 그는 더 강하게 정신을 붙들었고, 그의 감정과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어 이윽고 그리폰의 정체성의 근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찾아낸 기억과 감정의 실타래를 잘라내고 다시 짜내어 겹겹이 새로 덧씌웠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때까치의 증오를 약화시키고, 타락을 삼킨 이후 생길 변화에 대한 혐오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원래의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용과 망각을 짜넣었고, 닥쳐올 변화에 대한 자각을 무디게 해 그리폰이 그 사실을 끔찍히 여기지 않도록 했다. 그는 기묘한 병증 위로 가면을 덧씌워 그리폰에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감기, 가벼운 기침에 불과하고 잠시 아픈 탓에 일시적으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거라고 믿게 했다.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었고, 칼린이 가르쳐준 것에 비해 훨씬 섬세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먹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잘 먹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그는 자신의 정신을 끌어내 때까치의 의식이 변환된 길로 접어들도록 놓아주었다.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 안의 짚더미 위에 무릎꿇고 있었고, 빈 술잔은 손 옆에 놓여있었다.

  때까치의 호흡은 규칙적이었고, 창백한 회색빛이던 콧잔등에 혈색이 돌아왔다 두 눈은 거의 감겨 있었으나 틈새로 보이는 밝은 호박색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검은 구름 역시 씻겨져 내려간 듯 했다.

  그는 다시 그 자신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 자신인지는,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묶고있던 혈마법을 풀자마자 그리폰은 곧장 얕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의 움직임이나 몸에 딱 붙여 접은 두 날개의 모양은 아무렇게나 무기력하게 널부러져 있던 때까치의 모습에 비하면 일반적인 그리폰의 수면 자세에 가까웠다. 콜록, 하고 감기에 걸린 것마냥 기침을 한 번 했지만, 이내 편안하게 긴장을 풀었다. 그는 그게 입단 의식이 성공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

  조용히, 이세야는 쓰러진 술잔을 집어 망토 끝으로 안쪽 면을 닦아낸 뒤 개러헬의 상자 안에 리륨 주머니와 함께 다시 돌려놨다. 이어 헐록의 피가 담겨있던 병도 집어들어 주머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단검에 남은 붉은 혈흔을 닦아낸 그는, 조심스럽게 요양용 우리를 벗어났다.

  그는 다나로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그는 이세야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 아까 그대로의 페이지에 머물러 있을 게 분명한 고대 역사책이 협탁 위에 놓여있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희망을 품은 눈으로 방에 들어서는 이세야를 올려다 봤다. "잘 됐어? 그를 구할 수 있었어?"

  "잘 모르겠어." 이세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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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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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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