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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어둠의 피조물들이 이용하는 지하대로의 출입구를 발견했어." 이세야는 레바스를 호스버그 성 마당에 착륙시키며 말했다. "간밤에 있던 전투에서 낙오된 놈 하나를 뒤따라 갔었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우리 마법사들만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려 봉쇄시킬 수 있을만큼 작은 크기였어."

  "우리가 어둠의 피조물들의 증원군을 차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개러헬이 물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목욕으로 젖은 금발 머리가 짙은 빛을 띠었고 옷차림 역시 전투용 갑옷 대신 잠자리에 적합할 것 같은 부드러운 로브 차림이었다. 이세야는 아마디스 역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인간 여성은 그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개러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그가 뭐라 간섭할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딱히 법을 어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절이니 뭔지 하는 얘기는 대재앙 앞에선 말할 가치도 없었으니.

  "바로 그거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는 레바스의 가슴줄을 풀어준 뒤 눌린 자국이 남은 그리폰의 부드러운 검은 털을 다시 정돈했다. 뒤따라 내린 칼린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내주었다.

  "언제 작전에 들어갈 생각이지?" 아마디스가 물었다.

  "빠를수록 좋아. 내일, 아니면 모레라도." 이세야는 두 개의 안장을 연달아 끌어내린 뒤 성의 하인들이 가져가 관리하고 닦아놓을 수 있도록 한구석에 쌓았다. "그 입구는 그다지 견고해보이지 않았어. 어둠의 피조물들은 그런 걸 신경쓰지 않으니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기껏해야 길잃고 헤매는 무리 몇 놈 정도일 거야."

  "그러길 바라는 거겠지."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의 손은 방금 전까지도 이세야 눈에 보이지 않던 허리춤의 단검자루 위에 얹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떼자 단검은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이세야는 질문하면서도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7년 간 못 알아냈으면 앞으로도 모르고 살겠지. 그는 하릴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맞아. 내 바람은 그래. 혹시라도 숫자가 너무 많다 싶으면 그냥 작전을 포기하고 돌아와서 다른 날 다시 시도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다고 놈들이 거길 강화하거나 수비를 세울 건 아니잖아. 특별히 눈에 띄는 표시 같은 것도 없었어. 오늘 밤까진 그곳의 존재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까."

  "좋은 시도였어." 개러헬이 말했다. 그는 허리를 두른 아마디스의 팔을 푼 뒤 함께 불빛어린 마당을 가로질러 그들의 숙소로 향했다. "그럼 내일 한 번 날아가 보기로 하자. 만약 방어가 그리 두텁지 않다면 무너뜨리는 것도 시도해보고. 아니면 그냥 돌아오면 되고. 작전에 필요한 마법사가 몇 명 정도 될 것 같아?"

  이세야는 어깨를 으쓱하곤 칼린에게 묻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셋? 아니면 넷 정도? 큰 구멍은 아니었고, 그리 안정된 구조처럼 보이지도 않았어. 그냥 대지 위로 난 틈새처럼 보이는 정도고 - 고대 드워프 통로도 아닌 것 같아. 솔직히, 시간만 충분하면 마법사 한 명으로도 충분할 거야. 문제는 시간이 충분하진 않을 거라는 거지. 근처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우리를 발견하고 득달같이 몰려들 테니까. 그러니...최대한 빠르고 간단하게 끝내기 위해, 세 명은 넘었으면 좋겠어."

  "나도 동의하네." 칼린도 동의했다. 후드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린 뒤라 그 목소리는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아마디스와 개러헬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내일이야." 엘프가 말했다. "마법사 셋. 두 사람에다가 에라카스가 끼면 될 것 같은데, 그가 펠리세랑 떨어지기만 해준다면."

  "내일 아침에 여기서 봐." 이세야가 말했다. 그의 남동생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마디스와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늦은 시각이었고, 마당에는 그들 뿐이었다. 성의 하인들조차 이세야의 안장을 닦기 위해 가져간 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간 뒤였다. 횃불이 밝혀진 성벽을 따라 순찰을 돌며 어둠의 피조물의 습격을 경계하는 감시병들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칼린은 젠록을 사로잡는 주문을 사용한 뒤 어딘지 가라앉은 느낌이었고, 이세야는 그가 돌아오자마자 숙소로 돌아갈 거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그는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난 뒤까지 남아있었다. 그는 아직 레바스에게 먹이를 주고 날개깃을 빗질해줘야 했지만, 그 혈마법사가 머물러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자러 안 가?" 그는 물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고작 몇 발짝 거리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너는 왜 혈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지?"

  "유용할 것 같으니까." 엘프는 기름먹인 천으로 그리폰의 비행깃털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대재앙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할 거야. 당신은 왜 배웠지?"

  "나는 이단마법사였으니까." 칼린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두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그가 저 먼 어딘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라기보다는 과거의 망령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단마법사였고,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살아남았으니, 내가 보기엔 효과적인 것 같네. 누구한테 배웠어? 까마귀단에서였나?"

  "아니." 칼린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가 체중을 싣고 기댄 지팡이를 천천히 돌릴 때마다 머리 부분의 수정이 성벽의 횃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악마로부터였어."

  5년 전이었다면, 그의 발언은 이세야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했을 터였다. 지금의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재앙의 공포는 스승으로 배웠던 해묵은 경고마저 대수롭지 않아 보이게 희석시켜 놓았다. 브루드마더로 끌려가는 여성의 비명을 처음으로 들었던 기억, 그는 그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악마와 천 번이라도 흥정할 수 있을 테니까...비록 수년 간 그런 충동을 조절하도록 훈련해왔다지만 지금도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찾았는데?"

  "계약을 이행하던 중의 일이었어. 이단 혈마법사 하나가 안티바로 도망쳐 왔지. 템플러들은 감히 그 놈을 덮칠 수 없었고, 까마귀단을 고용해서 자기네 일을 대신하려 했어. 우리는 트레비소에서 꽃장사로 위장하고 있던 그 놈을 찾아냈어. 쉬운 일일 거라 생각했지만...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지." 칼린은 잠시 침묵했다. 이어서 그는 한숨과 함께 마당의 우물 옆에 놓인 낮은 돌담에 걸터 앉으며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지쳐서 굳어진 얼굴 위로 피로가 묻어나는 입가의 주름이 불빛 아래 더 선명해 보였다. "그 놈을 잡았을 때, 우린 왜 그 템플러가 굳이 잽싸게 우리한테 일을 넘겼는지 알 수 있었지. 그는 안티바 까마귀단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어. 그 자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길 두려워했던 거야."

  "타락의 괴물이었나?" 이세야가 물었다. 그는 악마에게 굴복해 사로잡힌 마법사들이 어떻게 되는지 본 적 있었다. 그들은 악몽의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 육체는 괴기하게 녹아내려 기분나쁜 꿈 속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형체가 된다. 정신 또한 흩어져 사로잡은 악마에게 지배되거나 -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었지만 -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대재앙 중에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마법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밖의 힘을 추구하다가 어리석은 방식으로 영계와 접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는 마법사란 위험한 존재였다. 훈련되지 않은 능력으로 자신이나 가족들을 어둠의 피조물로부터 보호하려는 맹목적인 열망이야말로 대재앙 속에서는 타락의 괴물의 근원지나 다름없었다.

  노련한 마법사들 역시, 끝없는 전투로 인한 긴장과 수면부족 탓에 이런 위험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택하기도 했다. 더 이상 지원군이나 구조대를 기대할 수 없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순간, 악마를 육체에 받아들여 놈들에게 마지막 광포한 일격을 가하고 사그라진 감시자 마법사들의 이야기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강력한 타락의 괴물이라면 죽기 전까지 수십 마리의 어둠의 피조물을 쓰러트릴 수 있었으니.

  이세야 역시 이미 오래 전 언젠가 자신이 브루드마더로 끌려갈 상황이 닥친다면 차라리 타락의 괴물이 되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공포 속에서 죽는 편이 그 채로 사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랬지." 칼린이 말했다. "그리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어. 겉모습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으니, 일단 우리가 봤을 땐 말이야. 아마 악마에게 사로잡히기 전의 그 자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다른 느낌을 받았겠지만. 물론 우리로선 알 길이 없었지. 처음으로 이상신호를 느낀 건 그 놈이 독을 바른 단검을 모기라도 쳐내듯 털어냈을 때였어. 그리고 그 놈이 공격해왔고...순식간에 매복팀 중에서 살아서 서 있는 건 그 놈과 나 뿐이었지."

  이세야는 레바스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기름먹인 천으로 나머지 비행깃을 닦기 시작했다. 또한 날개에 상처는 없는지 역시 확인했다. 그리폰은 용맹함과 고집스러움 탓에 때때로 기수에게 통증이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곤 했지만, 일차깃털이 부러지는 것 같은 사소한 손상도 전장에선 재앙으로 번질 수 있었다. "어쩌다 그 악마가 당신한테 마법을 전수한 거지? 당신을 그냥 죽이지 않고?"

  칼린의 입술이 비뚜름한 미소를 띠며 올라갔다. "까마귀단의 명성이 어쨌든 헛것은 아니거든. 그 놈이 우리를 거의 몰살시킨 건 사실이지만 우리 역시 그 대가를 피로 치렀어. 전투가 끝나갈 무렵 그 놈은 거의 죽음을 앞둔 상태였고, 반면 나는 그럭저럭 멀쩡했거든. 금방이라도 놈을 죽여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 놈을 붙들고 있던 악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악마가 거래를 제안해온 거로군?"

  "그래. 죽어가는 껍데기를 치료해주는 대신 혈마법을 전수해주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당신은 받아들였고?" 그는 레바스의 날개를 놓아주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리폰의 꼬리 깃털을 마저 확인했다. 이세야는 어느새 회색빛이 된 손질용 헝겊을 뒤집어 깨끗한 면이 드러나게 했다.

  "그랬지." 칼린은 스스로의 고백이 지긋지긋한 것 같기도 했고, 어딘지 후련해 보이지도 했다. "나는 지식을 주겠다는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자를 치료했어. 아주 약간만. 그리고 바로 그 심장에 단검을 꽂아넣었지. 까마귀단은 계약을 어기는 법이 없으니까. 악마하고도, 고객하고도 말이야."

  "그렇게 혈마법사가 된 거군." 이세야는 레바스의 넓다란 등판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엄청 속성 학습이었을 것 같네."

  칼린은 웃음기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렴. 사실 가르침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어. 악마가 내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누군가의 기억을 쏟아부은 거나 다름 없었거든. 내가 가본 적 없는 영계의 구역이 내 기억 속에 있었고, 배운 적 없는 주문을 외울 수 있게 됐어. 그 지식은 그냥 거기에 있게 된 거야...그리고 오늘까지 한 번도 말한 적도 없었고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것처럼 굴어왔지만, 그 악마의 비전은 한 번도 날 떠난 적이 없었어."

  이세야는 그리폰의 몸단장을 마쳤다. 그는 더러워진 손질용 천을 대충 던져둔 뒤 레바스의 어깨를 두들겨 그 야수에게 밤의 자유를 찾아 날아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알아들은 것처럼 쉿 소리를 낸 레바스는 두 감시자들로부터 물러나 날아올랐고, 안더펠스의 달빛 아래 말라 비틀어진 먹잇감이라도 찾길 바라며 사냥을 떠났다.

  그리폰의 비행이 남긴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이세야는 입주변의 먼지를 슥 닦아내고 칼린을 돌아봤다. "당신이 직접 배운 적 없는 걸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지?"

  "같이 헤쳐나가 봐야할 문제지, 그건." 나이 든 마법사가 대답했다. "어쨌든 나는 기술을 알고 있는 거니까. 내 자신의 기억보다도 훨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세야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이걸 원하는 건가? 이건 말레피카룸이라고.."

  "이건 무기일 뿐이야." 이세야는 눈 하나 깜빡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건 무기이고, 우린 대재앙과 싸우고 있어. 내가 이걸 원하는 건 당연한 거야. 속박의 힘만으로도 이미 강력한 도구이겠지만...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혈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많을 거야."

  "사실이기도 하고," 칼린이 말했다. "아주 많이 있지."

  "나한테 뭘 가르쳐줄 수 있지?"

  "모든 것을." 그가 답했다.

 

* * *

 

 아침은 이세야가 미처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와버렸다. 그는 지난 밤을 통째로 혈마법의 비밀을 파헤치며 보냈고, 새 날이 밝을 무렵엔 피로감 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칼린 역시 들뜸과 기진맥진 사이의 어드메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십 년 가까이 홀로 비밀을 지고 살아왔다. 누군가와 그것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짐을 던 듯 보였고, 새로운 능력이 가져다줄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세야의 열정이 그 자신이 혈마법에 대해 품고있던 껄끄러움을 완화시켜준 것 같았다. 이세야에 비하면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그는 오래 전 그가 덤벼들었던 무모한 도박의 효용을 찾았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이 깨어나 하루를 맞이할 무렵에도, 그 효용이란 건 그다지 뚜렷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첫 번째 하인이 여명빛을 맞으며 물을 긷고 아침 준비에 쓰일 장작을 챙기러 나올 때쯤 그들의 실험을 멈추었다.

  이세야는 주문을 증폭시키기 위해 스스로 냈던 자상 위로 가벼운 회복마법을 걸었다. 그들의 실험은 흔적도 없이 감춰졌고, 그는 칼린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감시자들에게 합류했다.

  "그래서, 오늘이 호스버그를 향한 포위공격을 무너뜨리러 가는 날이라고?" 펠리세는 포리지 죽과 건포도를 국자로 퍼담으며 나란히 선 이세야에게 질문했다.

  이세야는 붉은 머리의 궁수에게 눈썹을 슬쩍 들어보였다. "개러헬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펠리세는 쾌활하게 대꾸하고는 손에 든 국자를 엘프에게 건넸다. "네 동생이 그렇게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아니잖아."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에 두는 것도 잘 못하는 편이고." 이세야는 심드렁한 손길로 진득한 귀리죽 한국자를 접시에 퍼담았다. "포위공격을 무너뜨리러 가는 게 아냐. 잘 쳐줘 봐야 그러기 위한 험난하고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 수준에 불과할걸."

  펠리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태까지보단 나은 거네. 누가 작전을 이끌 거야?"

  "개러헬이지, 당연히. 그렇게 신이 나 있으니, 이끌기도 잘 할 거야." 그는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그는 실제로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가 지난 봄에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감시자 사령관 같이 고정된 지위는 아니었다. 그저 특수한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직함이었지만, 그 덕에 그는 관할 구역에 보내진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의 남동생은 대재앙과 싸워온 수 년 간 자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그의 그리폰 역시 어둠의 피조물 무리의 약점을 파악하고 파고드는 신묘한 능력으로 그를 보조했고. 둘의 조합은 감시자들이 지닌 가장 뛰어난 팀 중 하나를 이루었다.

  그리고 7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가장 오래 살아남은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럼 내가 끼워달라고 조르러 가야할 상대도 그 친구란 말이군." 펠리세가 말했다. 한 손에 접시를 가볍게 받쳐든 그는 피로에 찌든 눈의 병사들과 회색 감시자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 개러헬에게 향했다. 이세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하게 우린 차를 컵에 담아 그 뒤를 따랐다.

  칼린은 이미 동생과 아마디스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과 다른 회색 감시자 두 명은 엉성하게 그려진 지도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섰다. 사슴뿔로 만든 소금통 하나가 가운데 세워져 있었고, 메마른 건포도 몇 개가 왼편으로 삼각형 비슷한 형태를 이루며 늘어서 있었다.

  "전투지도야?" 이세야는 손에 든 컵으로 소금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개러헬은 팔을 뒤로 젖혀 그가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공간을 확보했다. "이 정도면 정확해 보여?"

  "아침 식사로 만든 지도로선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는 포리지 그릇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예상보다 훨씬 끔찍한 맛이었다. 단순히 쓴 정도가 아니라 강한 떫은 맛이 혀를 마비시켰다.

  어쨌든 잠을 깨우는 데엔 효과적이었고, 애초에 그러려고 마신 거였다. 한잠도 못 잔 다음 날이니, 조금이라도 정신을 맑게 해줄만한 거라면 뭐든 환영이었다. 이세야는 신맛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시며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작전 지도까지 필요하겠어? 말했듯이 따로 지키고 선 어둠의 피조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대단한 저항을 마주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개러헬이 끄덕였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충분히 대비하는 게 좋겠지."

  "그게 호스버그의 방어를 느슨히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동의하겠어.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누가 알고? 우리가 그리폰을 전부 끌고 나간다면 아무리 어둠의 피조물이라도 기회를 알아챌걸."

  "전부 끌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의 남동생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네 마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네 마리 그리폰에 기수 여덟 명이면 이미 큰 전력이지만 우리 임무를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큰 것도 아니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지하대로 입구 쪽에서 합류한 뒤, 목표를 무너뜨리고 호스버그로 돌아오는 거야. 마법사 네 명과 궁수 두 명이 공중을 담당하고 지상전을 대비해 전사 둘을 보내겠어. 이 정도면 합리적이지?"

  "제법."

  "좋아. 칼린, 당신은 이세야와 함께 가. 펠리세, 우선 다나로랑 조락, 리스메, 그리고...오...퉁크랑 뭉크도 데려가."

  붉은 머리 궁수가 주춤했다. "그 드워프들? 그 둘은 하늘만 올라가면 멀미하잖아. 지난 번에 우리 방랑자 날개에다 토해놓은 거 닦느라 며칠이나 걸렸는데. 가슴줄에는 아직도 얼룩이 남아있다고."

  "그렇긴 하지." 개러헬은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그 둘만큼 든든한 방벽은 없잖아. 그 두 형제만으로도 호스버그 성문을 며칠은 지킬 수 있을걸. 게다가, 우리 중 그들만큼 지하대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들이라면 우리가 놓칠 수도 있는 땅 위의 흔적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을 태워달라는 부탁을 그렇게 자주 한 것도 아니잖아, 펠리세. 이번만 좀 부탁해."

  궁수는 짜증스럽게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좋아. 난 가서 다나로를 찾아볼게. 부디 그 드워프들이 아직 아침식사를 덜 마쳤길 바라야겠군. 뱃속에 든 게 적을수록 치울 것도 적을 테니까 말이야."

  "지당한 말씀이야."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리곤 이세야가 손도 안 댄 포리지 그릇을 그를 향해 슬쩍 밀었다. "반대로 우리 누님께선 좀 뭘 채워넣으셔야겠어. 지난 밤에 잠을 자긴 한 거야?"

  "별로 못 잤지."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가져갔다. 식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그는 찐득거리는 귀리죽을 어떻게든 우겨넣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래야지. 다 먹으면 마당으로 나와. 낮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으면 좋겠어. 해가 저물면 어둠의 피조물들이 다시 몰려들지도 몰라."

  "예예, 알겠습니다, 전투 사령관님." 포리지가 묻은 숟가락을 경례하듯 들어보이는 이세야의 동작에 아마디스가 옆에서 코웃음 쳤다. "너는 같이 안 가?"

  "나는 못 가지." 개러헬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누나 말마따나 나는 전투 사령관이잖아? 원한다고 아무 전투에나 튀어나가 어둠의 피조물들을 때려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우리가 정말 이 포위를 깨부수는 날이 온다면 선봉에 나서겠지만...이런 소규모 작전에는, 뭐, 누나가 대장이라고."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의 남동생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두 눈 위로 언뜻 슬픈 기색이 비쳤다. "나는 알아, 누나. 누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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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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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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