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5:20 숭고의 시대

 

  "병사들을 약속 받았어."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가 지쳐보이는 건 이세야에게 놀랍지 않았으나, 묘하게 들떠보이는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많이. 장비만 갖추면 바로 출발해도 될 거야. 2주나, 아니면 3주 정도. 빠를수록 좋겠지, 아무래도. 혹시라도 마음 바꿀만한 시간을 주진 말자고."

  "아마디스한테도 말했어?" 이세야가 물었다.

  "아니." 멋쩍어할 만큼의 양심은 있었기에, 개러헬는 일없이 이세야가 빌려쓰는 방 선반께를 서성였다. 포위 공세 전까지만 해도 그 선반은 안더펠스 왕실을 따라 수 세대에 걸쳐 내려온 성유물로 가득차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밀 포대와 바꿀 수 있는 건 어떤 잡동사니라 해도 전부 팔려나갔다. 금박을 입힌 기도서도, 드래곤 뼈로 된 안드라스테 조각상도, 지금쯤 어느 올레이 상인 저택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고, 선반에 남은 거라곤 회색 먼지에 뒤덮인 나무 조각품 따위 뿐이었다.

  텅 빈 선반에는 개러헬이 만지작거릴만한 게 딱히 보이지 않았고, 잠시 뒤에야 그는 누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두 손을 뒷짐지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한테 물어보지 마. 연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내 분야가 아니라고."

  "그래?"

  쿡쿡 찌르는 듯한 거슬림이 이세야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그 감각을 털어냈다. "응."

  "정말로?" 자기 코가 석자인 와중에도, 개러헬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칼린도 아니란 말야? 난 두 사람이 어쩌면-."

  "아냐."

  "상처받는 게 그렇게 두려워?"

  이세야는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이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 너도 봐왔잖아, 개러헬. 누가 그런 걸 원하겠어? 누가 필요나 하대? 굳이 그 위에 무게를 더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잃는 건 이미 충분히 괴롭지 않아? 난 이미 네 걱정이나, 레바스 걱정만으로도 충분해. 적어도 내 그리폰이 죽는다면, 아마 나도 함께 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 우리 둘 다 혼자 남을 필요 없을 테니. 하지만 이 이상 저 밖에 잃을까 걱정할 누군가를 늘릴 생각은 없어."

  "정말로 누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어떤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 없어?"

  나한텐 네가 있었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개러헬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 그들의 부모가 둘을 버리고 떠나 불확실한 인간 세상에 내던져졌을 땐 그의 보호자로, 그의 마법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돼 공포에 질렸을 땐 그의 인도자로, 차가운 마탑의 구속 안에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로. 그는 이세야와 함께 회색 감시자가 됐고, 혹은 이세야가 그와 함께 간 건지 - 어느 쪽이었는지 혹시 알았다한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결코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개러헬에겐 행복할 자격이 있었고, 그는 아마디스가 마음에 들었으니.

  하지만 그는 갈라서는 고통이 싫었다.

  "나한텐 내 그리폰이 있어." 이세야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동생에게 등을 돌렸다. "레바스가 내가 필요로하는 그 힘이야. 하지만 너는 좀 다르겠지, 그러니...아마디스를 둥지로 데려가. 그에게 그리폰을 고르게 해. 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 환상적인 순간을 겪고 나면, 용서할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제일 처음 제안한 건 그 사람이었다고." 개러헬이 투덜거렸다. "그 사람이 나한테 꼭 왕비한테 가야한다고 했단 말이야."

  "아무튼 간 건 너잖아."

  "물론 나도 알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긴장이 풀린 그 짧은 한 순간 이세야는 그의 남동생이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 볼 수 있었다. 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라면 그는 여전히 영웅적인 회색 감시자의 완벽한 표본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역시 야위고 지쳐 보였다. 그 눈썹과 입가를 따라 새겨진 주름은 훨씬 나이 많은 이에게나 보일 법한 것이었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러헬의 금발머리 사이로는 희끗희끗 새치가 보였다.

  "그를 둥지로 데려가." 이세야는 재차 말했지만, 이번엔 좀 더 누그러진 톤이었다. "하늘을 날고 나면, 분명히 용서할 거야. 그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고를 수 있을만큼 기수 없는 그리폰이 많이 남았던가?"

  "충분하고도 남지, 유감스럽게도. 너무 많이들 잃었으니까."

  "그럼 가서 우리의 비탄으로부터 약간의 기쁨을 발굴해 보라고." 이세야가 말했다.

 

* * *

 

  한 시간 뒤, 이세야는 하늘로 나가 그들이 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대장을 향해 환호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마디스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본래 계획은 지난 번 새로 구상한 혈마법 기술 변용이 어둠의 피조물에게 특별히 더 치명적일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용병들의 아우성 탓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피가 담긴 시약병이나 리륨 물약 따위가 그의 주의를 붙들어 놓을만한 건 아니긴 했다. 이미 충분히 주문 연구에 시달리긴 했으니. 화창한 햇살 아래 머리칼에 바람 좀 불어넣는 일은 그로서도 환영이었다.

  레바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그리폰은 주인이 들어서는 모습에 기쁜 울음을 내짖었고, 손길을 기다리며 귀를 납작하게 접었다. 이세야는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 쓰다듬는 와중, 레바스의 부리 및 납막 주변을 두르던 회색빛이 목을 따라 가슴께까지 하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그리폰 역시 늙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달콤쌉싸름한 감각이었다. 감시자들의 전투 그리폰은 대개 오래 살지 못했고,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그러했다. 레바스가 가장 끔찍한 전장에서 매해 살아남았다는 건 그의 힘과 의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는 여전히 강했고, 공중에선 빨랐으며, 전투에선 맹렬했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까? 어쩌면 이제 레바스를 은퇴시키고, 그가 오우거의 바위나 헐록의 화살에 맞아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와이스하웁트의 둥지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하는 걸지도.

  이세야는 눈을 감고 그리폰의 풍성한 검은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특유의 사향이 - 맹수의 거친 느낌과 스며든 햇살과 끼니에서 남은 피 냄새가 뒤섞여 콧 속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래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눈물로 이세야의 시야가 뿌얘졌다. 그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흘려보낸 뒤, 떨어지지 않게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마디스는 공중에서 상승 기류를 타고 선회하고 있었고, 개러헬과 굽은꼬리가 넓게 날개를 펴고 가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등에 탄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리폰이 누군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청회색 털과 날개를 두른 검은 띠 무늬가 특징적인 젊고, 작은 체구를 가진 녀석이었다. 초보 기수가 고삐를 잡았는데도 그 비행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녀석의 이름은 스모크였고, 원래 기수는 어둠의 피조물 어쌔신의 독 묻은 칼날에 한 달 전쯤 목숨을 잃었다. 젊은 그리폰은 그동안 연락병이 되어 전초지에서 전초지로, 어느 회색 감시자든 가리지 않고 태워 요새까지 데려오곤 했다.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을 거고, 전선에서 기수를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삶이었겠지만...유대감 있는 기수를 태우고 전장 한복판을 헤집는 것보다 연락병의 삶을 선호하는 그리폰은 거의 없었다. 이세야는 스모크가 아마디스를 택한 것도, 아마디스가 스모크를 택한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길 바라며, 그는 레바스를 이끌고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 짜릿함은 결코 퇴색하는 법이 없었다. 머리칼을 헤집는 바람, 폐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공기, 지상에서의 슬픔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창조주의 어떤 피조물도 이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는 불씨가 잦아드는 호스버그 전장 위를 지나, 하늘을 오염시키는 끈적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둠의 피조물 시체더미 위를 지나쳐 갔다. 이런 흉측한 꼴을 보러 나온 게 아니었다.

  전우들이 싸우고 죽어간 곳에서 멀어져 간 이세야는, 레바스를 이끌어 안더펠스의 바위 투성이 평원 위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라텐플루스 강이 녹색빛 드문드문 섞인 갈색 대지 위로 은사처럼 반짝였다. 이 정도 높이에서라면, 저 강이 강둑은 비록 낮을지라도 여전히 풍요로운 것처럼, 줄기를 따라 진흙 위로 줄지어선 나무들이 대재앙의 황폐와 미약한 태양빛 아래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것처럼 상상할 수도 있었다. 세상이 거의 - 정말로 거의 -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고 믿어버릴 수도.

  물론 현실은 아니었다. 전혀. 그들은 금방 다시 악취 풍기는 연기 위를 지나 호스버그로, 대재앙에게로, 끝이라곤 모르는 끔찍한 전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세야는 가능한 한 오래 그 환상을 소중히 하기로 했고, 그 추억을 품은 채 성으로 돌아왔다.

  개러헬과 아마디스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리폰들은 이미 안장도 벗고 빗질을 마친 후였다. 굽은꼬리가 자기 몫의 갓 잡은 염소고기 한 덩어리를 아부하듯 스모크 앞으로 밀어놓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의 기수들 마냥 그 푸른빛 암컷에게 호의를 품은 듯 했다.

  레바스가 그 모습에 흥 코웃음을 쳤고, 이세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그는 검은 그리폰으로부터 안장을 벗겨내 레바스가 자기 몫의 염소를 즐길 수 있게 풀어준 뒤 요새로 돌아갔다. 요새의 그림자가 묵직한 망토처럼 그의 어깨 위에 걸렸다.

  금빛으로 빛나던 오후의 환상을 품고 최대한 다른 사람이랑 접촉을 피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건만, 맘처럼 되지 않는 것은 그의 숙명이었다. 빵과 와인을 찾아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린이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소식 들었어?" 마법사가 물어왔다. "우리가 헤인 요새로 보내질 거라는 거."

  "헤인 요새?" 이세야는 부엌 바구니에서 곡물 박힌 롤빵을 빼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었다.

  "빔마르크 산맥에 있는 곳이야. 빔마르크 산맥 깊은 곳에. 한 때 헤인의 노버트 공이라는, 칠성장어 절임 애호가이자 자유동맹을 자신이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유명했던 작자의 소유였고, 지금은 박쥐소굴이나 다름 없을걸. 까마귀단이 그 작자를 죽인 후 두 세대에 걸쳐 비어있던 성이니까. 회색 감시자는 그곳을 전초기지로 삼고 우리를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지."

  이세야는 구운 닭요리 약간과 와인병 하나를 추가로 챙겼다. 반쯤 남은 시큼한 적색 와인은 좋은 시절이었다면 요리용으로조차 쓰이지 않았을 법한 것이었지만, 대재앙을 견디고 병에 담기기까지 살아남은 포도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 "왜지?"

  칼린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자유동맹이 이미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오늘 연락병 셋이 도착했는데, 셋 다 별로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진 않았어. 컴버랜드와 커크월이 상당히 위태로운가봐. 스탁헤이븐은 함락 직전이고. 힘을 모으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어느 쪽도 자기 국민들을 어둠의 피조물한테 넘길 생각은 없지. 개러헬은 네가 와이컴에서 썼던 방법을 제안했어. 수석 감시자는 산속 깊이 헤인 요새에 기지를 꾸려서 자유동맹 사람들이 피난올 수 있을만한 규모로 준비하길 원해."

  "개러헬이 우릴 거기 배정했어?" 만약 동생이 그랬다면 이세야는 잔뜩 쪼아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물러나 꼬리를 감출 생각이라곤 없었다.

  칼린은 고개를 저었다. "감시자 사령관 알시아나가 네 이름을 직접 지명했어. 헤인 요새가 대규모 피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준비돼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할 테고, 네 역장 마법이 남들이 해내기 힘든 일을 해내는 재주가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와이컴에서 피난민들을 옮긴 공중 아라벨 있지? 난민들의 도피처에 그게 필요할 것 같다고 해."

  "그게 작전명이야? 도피처라고? 불길하게 들리는 이름인데."

  "자유동맹은 이미 불길함 따위를 따질 것도 없이 궁지에 몰려있어." 칼린의 어조는 건조했다. "개러헬은 우리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어떻게든 원군을 끌어모을 생각인가봐. 이미 마리웬 왕비의 병력이 있고, 호스버그의 승리 덕에 다른 안더펠스인들도 합류하겠지. 그리폰을 선물한 덕에 루비 드레이크의 지원을 확보한 것 뿐만 아니라 대여섯 되는 용병단 수장들이 비슷한 꿈을 꾸면서 마음을 돌렸어. 사자 용병단 대장은 이미 오우거 머릿가죽을 벗겨서 자기 그리폰 안장에 깔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네 동생은 기적적인 인물이야, 이세야. 지금 누군가가 자유동맹을 구할 수 있다면, 오직 그 뿐이겠지. 그는 바로 올레이로 향해서 그 가면 쓴 늙다리들한테 뭐라도 지원을 얻어내볼 생각이야. 하지만 자유동맹의 힘도 분명히 필요할 거고, 그들이 자기 고향과 국민들을 지키느라 분산돼 있었서는-."

  "전부 잃고 만다는 거지. 그래, 나도 이해해."

  "좋아." 칼린은 와인병을 손짓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어? 혼자 다 마시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개러헬은 우리가 일몰 전에 떠나길 바라고 있어."

  이세야는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좁은 부엌창 사이로 푸른빛을 드리웠다. 오후 내내 레바스를 타고 날아다닌 덕에 예정된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칼린에게 병을 내밀었다. "아무쪼록. 이별의 한 잔일테니."

 

* * *

 

  헤인 요새는 그야말로 외딴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빔마르크 산맥의 서쪽 자락 끄트머리에 위치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토지는 상대적으로 대재앙의 황폐에 시달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울창한 녹색 숲이 무성했고, 가파른 바위 사이로 힘찬 물줄기가 따라 흘렀다. 근방에 서식하는 와이번 무리가 숲을 향해 하강하는 레바스를 향해 위협적인 높은 소리로 울어댔다. 야생과 싸워내 살아남은 거대한 야수들은 감히 다섯 그리폰과 열 명의 기수를 향해 도전할만한 담대함을 품고 있었다.

  그 밖에 대단한 건 없었다. 성의 영지는 오랫 동안 비어있던 듯 보였다. 잡초와 산딸기 덤불로 뒤덮인 들판에, 솔방울 투성이 목초지를 둘러싼 나무울타리는 전부 망가져 있었고, 집이란 집마다 박쥐와 여우에게 점거당해 있었다. 헤인 공의 영주민들은 아마 그가 반란을 선언하자마자 전부 그에게 등을 돌렸거나, 까마귀단이 그를 죽인 뒤 쫓겨난 모양이었다.

  "이걸 전부 재건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레바스를 성 안뜰로 하강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요새이긴 했다. 굳건해 보이는 돌벽이 높게 서 있었고, 솟아오른 첨탑이 멀리까지 시야를 뻗을 수 있게 했다. 헤인 요새가 공성 공격이 아닌 암살에 의해 함락당한 걸 생각하면, 긴 시간 방치돼 낡은 것 외에 방어 시설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쓸데없이 무성하게 자란 장식용 정원을 다듬고 정비해 모양새는 덜하지만 훨씬 실용적인 약초와 야채들로 대신해 놓았다. 마무리 덜 된 토끼우리랑 닭장 역시 작은 정원 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적어도 이번엔 충분한 재료라도 있겠네." 칼린이 대답했다. "나무도, 바위도, 깨끗한 물도, 목초지도 충분하지. 산기슭에서 사냥이나 채집도 가능할 거고. 요새 자체가 이미 충분히 굳건해 보여.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모든 게 훨씬 부족할 거야."

  "대신 할 일도 덜했겠지." 이세야가 말했다. "개러헬은 정말 이 곳이 자유동맹인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상당한 인원이긴 할 거야. 수천 명 정도?"

  "수천 명 정도라. 그 중 대부분이 비전투인원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 올 이유가 없을 테니. 대체 어디에 그들을 수용하란 거지? 큰 성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크진 않은걸."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레바스가 성벽 위로 착륙하며 총안 틈을 붙든 뒤 날개를 펄럭여 반동을 감속시켰다. 갑작스런 정지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두 기수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이세야는 안장에서 내려 성벽을 타고 내려왔다. 칼린이 목 뒤를 주무르며 따라 내려와 레바스를 째려봤으나, 녀석은 자랑스레 날개를 펼치고 뽐내듯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그리폰들이 마당으로 착륙하며 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모두가 내려서 마당으로 합류한 뒤, 이세야는 성의 방어시설을 점검했다. 이세야가 가진 정보가 정확하다면, 헤인 요새는 마지막 영주를 잃은 뒤 거의 30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다. 수십 년 간 손이 닿지 않은 것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상태란 점은 만족스러웠다.

  첨탑을 타고 올라 서자마자 부지런히 달려와 그를 반긴 문신 투성이의 얼굴은 그를 더욱 흡족하게 했다. 오자마 출신의 드워프 감시자 오고사는 고향에서 비계급층 소속이었다. 그 자신의 동족들이 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대한 덕에, 그는 대재앙이 닥쳐 회색 감시자들이 드워프들의 원조를 요청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동족들을 등질 수 있었다. 오자마의 큰 손실은 아군의 큰 소득이었다. 오고사는 영리하고 유능한, 지칠줄 모르는 전사였다.

  "이세야!"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햇살에 눈부셔 하는 두 마법사에게 소리질렀다. 그는 엘프를 번쩍 들어 숨막히게 껴안았다. "사람들이 네가 여기로 쫓겨났다고 했는데, 네 검은 새를 볼 때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 뭐야."

  "나도 반가워." 이세야가 숨막힌 틈새로 대답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숨을 골랐다. "난 네가 올레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고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랬지. 올레이 놈들은 비계급층 드워프한테 명령받는 걸 영 좋아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나 역시 굳이 그런 놈들을 돕겠다고 말씨름 하는 데엔 관심이 없고 말이야. 아무튼, 말 많은 슈발리에 한 놈의 가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나니까, 감시자 사령관도 거긴 내 적성이 아니다 싶은지 여기로 배정해 주더라고."

  "나한텐 잘 됐네." 이세야가 말했다. "그래서, 상황은 어때?"

  "대충 스물대여섯 되는 사람들이 있고." 오고사가 대답했다. "반은 회색 감시자고, 반은 농부랑 목수들이야. 둘 다인 사람들도 좀 있지, 물론. 다만...요새 주변을 손 보려면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할 거야. 많은 병사들, 많은 석공들, 많은 청소부들, 많은 요리사들, 뭐든 더 많이."

  "여기로 오는 피난민들 중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겠지. 필요사항을 저쪽에 전달하고, 이동수단 제작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네."

  오고사가 끄덕였다. 그의 밝은 붉은 머리는 수 갈래로 땋아내려 구멍 뚫린 구리 동전들로 끝이 매듭지어져 있었다. 그 드워프가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받아들인 체이신드 풍습이었다. 동족들에 대한 작은 반항의 표시기도 했고. "좋아. 성 자체는 상태가 괜찮아, 거의. 하지만 농토는 상태가 별로야.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할 테니까, 빨리 땅을 개간하고 파종할수록, 더 빨리 농작물을 비축할 수 있겠지. 농부들을 우선으로 해줘."

  "그럴게." 이세야는 태양빛을 뚫고 하얗게 빛나는 헤인 요새의 경계부를 바라봤다. "여기 몇 명이나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민간인들 말이야."

  "민간인?" 오고사는 이세야의 시선을 따라가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으로 식량이 풍족한 것도 아니고, 물 같은 경우엔 이백 명 남짓한 분량이 있어. 일단 그게 첫 번째 한계점이야."

  "그리고?"

  "두 번째 한계점은 물리적인 구조지. 이 성. 사람들이 직접 땅을 경작하고 마을을 꾸릴 생각만 있다면, 피난민을 어마든지 받아도 좋아. 빔마르크 산맥은 멀기도 하고 괴물들이 넘쳐나지만, 그 덕에 대재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지. 너도 오는 길에 이 땅이 자유동맹 그 어디보다도 비옥하다는 걸 봤을 거야."

  "그래, 나도 봤어."

  "그러니까, 마을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천 명, 이천 명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지, 순차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이 닥쳐든다면...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할 텐데, 이 성은 그만큼을 수용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세야가 물었다.

  드워프의 적갈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 질문을 기다렸지. 때마침 내가 해결책을 생각해놨단 말이야."

  "훌륭하네. 뭔데?"

  "단순해." 오고사가 대답했다. "그들을 산 안쪽에 수용하는 거야."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19  (0) 2020.04.26
LF - 챕터 18  (0) 2020.04.26
LF - 챕터 16  (0) 2020.04.26
LF - 챕터 15  (0) 2020.04.26
LF - 챕터 14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