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5:20 숭고의 시대

 

  이세야는 개러헬이 떠나자마자 둥지로 향했다.

  눈물이 온통 시야를 덮는 바람에 익숙하던 세상이 녹아내려 일그러진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리륨가루와 악마의 군주의 피가 강철 사슬이라도 된 것 마냥 천근같이 묵직하게 그를 끌어내렸다. 그리폰들이 머무는 탑으로 올라가는 그의 귓가에 휴식중인 그리폰들이 기분좋게 고르릉거리며 간헐적으로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세야는 그 소음을 기꺼이 만끽해야 할지, 혹은 눈앞에 닥친 상실에 애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폰들이 입단식을 거치고나면, 이 생기어린 소음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만족스럽게 내뱉는 콧김, 웅얼거리는 잠꼬대, 뻐기듯이 부리를 딱딱거리는 소리 모두. 그들이 내는 소리라곤 분노와 혐오에 찬 으르렁거림, 혹은 피에 섞인 오염을 털어내려 부질없이 쥐어짜낸 기침 소리 뿐일 것이다. 휘파람 소리도, 고르릉거리는 울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재앙은 너무 많은 걸 앗아갔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감히 그가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목적인 것을. 전장에 나설 때면, 어떤 그리폰도 혹은 그 기수도 누구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온힘을 다해 어둠의 피조물과 싸웠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 역시 개의치 않았으며, 오직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대재앙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라왔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그가 그리폰들에게 하려는 것과 같은 희생을 전부 거친 이들이었다. 그 둘이 그렇게까지 다른 일일까?

  물론 달랐다.

  아무리 높은 지능을 가졌다곤 하나, 그리폰은 동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말을 할 수도, 그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그가 하려는 일이 가져올 영향 역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들도 분명 동의했을 것이란 식의 생각은 자기 위안을 위한 환상일 뿐 -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세야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는 그 의식을 강제로 진행했을 테니까. 자유동맹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결과로 회색 감시자들이 대재앙을 끝낼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헤인 요새의 그리폰 열 마리 정도는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

  둥지탑은 조용하고 탁 트여있었다. 헤인 공은 이 탑을 끝까지 완공하지 못했다. 덜 갖춰진 채로 하늘을 향해 탁 트여있던 덕에 감시자들은 이곳을 그리폰 몫으로 할당했다. 그렇게 뚫려있는 공간이었음에도 탑에선 짐승의 짙은 사향이 상처입은 녀석들을 치료하는데 쓰인 연고, 고약 냄새와 함께 풍겨왔다. 냄새에는 놈들의 식사였던 생고기의 피냄새, 그리고 숫놈들이 영역표시 용으로 담벼락 꼭대기에 뿌려놓은 코를 찌르는 소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폰은 제대로 돌보는 사람 없이는 제법 지저분한 생물체였다.

  그는 이 모든 걸 거치고 나서도 그들이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마법은 간단히 작동했다. 이세야는 내심 주문이 실패하길 - 자신의 마법 능력이 갑자기 사라져, 양심를 괴롭히는 이 끔찍한 선택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 영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적인 기운을 그의 손아귀에 불어넣었다. 그는 피와 리륨가루,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을 넓게 흩뿌렸고, 되도록 그리폰들의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놈들의 정신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녀석들이 눈치채고 저항하려 했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들은 그를 알고 믿고 있었기에, 때까치 때 그러했듯 하나둘 충격에 빠져 거세게 반발해 왔을 때엔 이미 모두 혈마법의 영역 안에 단단히 붙들린 뒤였다. 이세야는 그들의 반발을 무시하곤 가차없이 주문을 마무리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 역시 그리폰들과 함께 스스로의 행위에 울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지만...그 어떤 슬픔이나 분노도 그의 주문을 흐트러 놓진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 머리가 아팠고 두 다리도 저려왔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파왔다. 불안정한 자세를 버티려 거친 돌벽에 한 손을 기대어 선 엘프는 탑을 떠나기 위해 시야가 다시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이번에 사용한 리륨과 악마의 군주의 피의 양은 개러헬이 준 것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수석 감시자가 이세야에게 정확히 얼마나 필요할지 알지 못해 넉넉하게 보낸 것이리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열 마리의 그리폰이 이 변형된 의식을 거쳤다. 그는 레바스를 그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 너무 잔혹한 배신일 것이기에 - 리스메의 사냥꾼 역시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야가 탑을 내려가기 위해 계단으로 돌아선 순간, 그 양성의 마법사가 그림자 속에서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메가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행했구나." 키 큰 마법사가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같은 남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 그는 여성 차림이었고, 짙게 칠한 아이라인 덕에 도적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세야가 답했다.

  "사냥꾼은 빼놨어. 왜지?"

  "레바스를 빼놓은 것과 같은 이유야." 엘프는 대답했다. "그리폰의 입단식은 우리가 한 것과 달라. 이건 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끔찍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거야. 너도 호스버그에 있었잖아. 때까치를 봤잖아."

  리스메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발을 쓰지 않은 대신 민머리 위로 칠해둔 구릿빛 소용돌이 문양은 그림자 속에선 어둡게, 햇빛 아래선 하얗게 반짝였다. "봤지."

  "그럼 내가 왜 사냥꾼에게 그러고 싶지 않은지도 알겠네."

  "아니. 네가 왜 네 그리폰에게 그럴 수 없었는지는 알아. 하지만 왜 날 제외한 거지?"

  "네가 내 친구니까."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라면 사냥꾼이 자기 모습대로 네 곁에 있길 바랄 것 같으니까. 이 변형을 그를 죽이고 말 거야. 이번 자유동맹 구출 작전에서 살아남는다 한들 - 죽을 수도 있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은 우리한테 작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그리폰들에게 작용할 거야."

  "그를 강하게 만들기는 하는 거지?"

  "응. 일시적이지만. 그래."

  리스메가 그림자 속에서 나와 이세야가 변형시킨 마지막 그리폰을 관찰하러 걸어가는 동안, 그의 바짝 민 머리 위를 장식한 구리 문양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그리폰은 나이 든 암컷으로, 날개는 수많은 전투를 겪어 구부러지고 흉터 투성이에, 주둥이 부분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녀석이 헤인 요새로 보내진 이유는 나이와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전장에 나설 수 없기 떄문이었다.

  이세야의 주문은 녀석의 고통을 제거했고, 그 그리폰은 혈마법의 혼란이 가랁고 나자 마치 젊어진 것 마냥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젊은 시절 같은 모습은 아닐 터였다. 때까치와, 그리고 변형된 입단식을 거친 다른 그리폰들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움직임은 짧고 급작스러웠고, 잠깐씩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이상하게 멈칫거리며 느려지기도 했다. 녀석은 고개를 휘저으며 기침을 한 뒤 앞발로 부리를 긁어댔고, 주문에 암시한 대로 이제는 그저 감기라고 느껴질, 불쾌한 타락의 기운을 억지로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그리폰은 다시 강해졌다. 하얗게 센 털과 기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녀석은 강해졌고, 동시에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야수를 올려다 보던 리스메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우리에게 이 힘이 필요한 거지?"

  이세야는 거짓말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힘을 가지고도, 실패할지도 몰라. 없이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거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스메를 따라, 소용돌이 문양이 반짝였다. "그럼 사냥꾼에게도 해줘. 뭐가 필요하든, 뭐든 내어줄게. 너나 나나 우린 회색 감시자고, 난 내 감상주의 때문에 임무를 망치진 않을 거야."

 

* * *

 

  그들은 안개낀 회색 달빛 아래 헤인 요새를 떠났다. 여명이 동쪽 지평선에 미약한 사파이어 빛을 비추었고, 해가 뜰 때까진 두 시간 가량 남아있었다.

  이세야는 가장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에 커크월에 도착해서 떠나길 원했고, 그러려면 아직 어두울 때 출발해야만 했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대재앙이 일으키는 끝없는 폭풍구름의 가호을 받긴 해도 밤보단 낮에 더 약하고 소극적이었고,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만한 이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긴 했다. 혈마법와 분노로 강화된 그리폰들과 함께여도 이세야는 승산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다. 회색 감시자들은 포위에 둘러싸인 도시를 뚫고 들어가, 나올 때에는 도움이라곤 안되는 민간인들로 가득한 캐러반을 끌고 나와야 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챙겨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라벨 역시 손상되지 않게 지켜야만 했다 - 이후에도 다시 써야 하니까.

  이세야는 아라벨을 세 대씩 네 팀으로 나눠 각각 한 마리의 그리폰이 끌고 두 마리가 호위하도록 했다. 레바스와 사냥꾼은 가슴줄을 맨 쪽이었다. 이세야는 그 회색 그리폰과 리스메가 가진 연대감이 입단식 이후 생긴 긴장과 분노를 넘어 통제력을 잃지 않게 해줄 거라는데 승부를 걸었다.

  다른 둘은 그 자신이 직접 다루기로 했다. 특정한 기수도 없고 평범한 고삐조차 거부하는 광기에 찬 그 그리폰들을 자유의지대로 내버려두었다간 그대로 미쳐 날뛸 게 분명했다. 놈들은 가슴줄을 맨 채로도 잔뜩 날이 서서 가까이 오는 누구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 탓에 콧속이 다 헐어서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 녀석들의 육체가 타락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신호기도 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이성이라는 게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세야로선 그들을 장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지막 한 줄기 자유의지마저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 그리폰의 정신으로 파고들어, 붉은빛 혼돈으로 가득한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억눌린 분노가 옻나무 덩굴처럼 그의 정신으로 슬금슬금 스며들려 했으나, 그는 앞에 놓인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맞서 싸웠다.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

  칼린은 그 뒤에 앉아 장력마법으로 그들 몫의 수레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두 마리 그리폰을 장악한 채로 레바스를 이끄는 것까지가 이세야의 한계였고, 캐러반을 담당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는 칼린을 믿었고 - 만약 커크월 밖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혈마법사라면 변성된 그리폰들을 통제해 헤인 요새까지 끌고 갈 수 있을 터였다.

  "갈까?" 이세야가 물었다.

  짤막한 그의 말투에 칼린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그 역시 이세야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잠깐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레바스, 날아!"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세야는 장악된 그리폰들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리스메의 사냥꾼이 함께 날아올랐고, 다소 불안정한 대열이었지만 그리폰들은 그렇게 헤인 요새를 떠났다.

  내려가는 길은 덜컹거리고 삐걱대는 난장판이었다. 감시자들은 최대한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받친 고깔형 마법은 경로에 있는 있는 소나무 가지란 가지마다 잘게 잘라냈고, 그리폰들이 작은 협곡 위를 지날 면 바닥으로 쑥 꺼지곤 했다. 수레를 제대로 띄운 채 내려가기 위해 급격하게 방향을 왔다갔다 하는 일도 수 차례 벌어졌다. 겨우 나지막한 능선 부근에 다다랐을 즈음, 이세야는 이빨을 하도 딱딱 부딪힌 탓에 두개골 전체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악령들의 속삭임이 생각 주위에서 맴돌며 그를 장막 너머로 끌어들이려 들었다. 우릴 받아들여, 우리한테 저 그리폰들의 무게를 넘겨.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 없어. 우리에게 건네주고,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라고.

  그는 언제나처럼 그들을 몰아냈으나, 그 목소리는 - 그가 영계에 닿아있는 한 -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아직 긴 하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산기슭에 다다르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동쪽 편의 구름을 뚫고 동이 트고 있었고, 장미빛 섞인 금색 빛깔은 뒷편에 드리운 대재앙의 폭풍과 대비되어 한층 강렬하게 빛났다. 골짜기마다 드리워진 은빛 안개가 하얀 산 꼭대기 아래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 아래로 펼쳐진 신록의 숲이 자유동맹에선 사라진 지 오래인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머리 뒤쪽에서 타락한 그리폰의 분노가 이글거리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이른 아침의 평화에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언덕 아래 편으로, 대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갔다. 반경 수 킬로미터 안의 나무들은 그저 죽은 채 버티고 선 꼬챙이에 불과했고, 주변의 초목이나 야생딸기 관목 여시 비쩍 말라 대재앙의 타락에 물든 곰 털타락처럼 가늘고 뻣뻣했다. 그들이 마주친 동물이라곤 종괴가 덕지덕지 붙은 사슴 한 무리 뿐이었고, 죽은 소 시체를 게걸스레 파먹던 녀석들은 감시자들이 지나가자 피묻은 주둥이를 쳐들고 송곳니 사이로 위협하는 쇳소리를 냈다.

  광기어린 사슴 무리와의 조우가 타락한 그리폰들의 분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들을 제어하려 애쓰다가 혀를 깨물었는지, 이세야의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된 맛이 났다. 어쩐지 더 진하고 차가운, 오염이 젤리처럼 굳어진 것 마냥 진득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을 뱉었다.

  피, 그저 피일 뿐이었다. 이세야는 공기에 노출된 선홍색 빛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잘못된 느낌만은 사슴 무리를 지나쳐 그리폰들의 분노가 불씨처럼 잠잠해진 뒤에도 한참을 입 안에 남아있었다. 머릿 속의 악령들은 겁에 질린 듯, 혹은 신난 듯 무어라 지껄여댔지만 그로선 어느 쪽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안의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이 점차 강해져가고 있었다. 숙명적인 확신이 들었다. 대재앙 시기에 피 안의 오염이 더 빠르게 퍼진다는 건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선 익히 알려진 소문이었다. 타락은 사람마다 다르게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해 당당하게 터놓고 말하는 이들이 워낙 드물어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이세야는 그 소문의 진실을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었고, 타락한 그리폰들을 다루는 혈마법 주문 하나하나가 그 속도를 더 가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런저런 상념을 머릿 속에서 털어내려 애썼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커크월이 빠르게 시야에서 가까워지고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그리폰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세야는 커크월의 돌벽 주위에 낮게 설치된 검은 화로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빛나는 모습은 첨정석(spinel)이 박힌 철제 왕관처럼 보였다. 워낙 먼 거리라 성벽 주위를 바삐 오가는 마법사들의 작은 형상은 삐죽 솟은 지팡이나 이따금 마법의 연쇄작용으로 화로로부터 치솟은 불길이 어둠의 피조물 위로 쏟아지는 모습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로 쏟아지는 불길은 놈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몇몇 멍청하거나 운 없이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이세야가 언뜻 보기에도 커크월의 포위공세를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공격은 고작해야 어둠의 피조물들을 성벽에서 몇백 미터 가량 후퇴시키는 게 다였고, 도시 주위로는 분명 수천의 젠록과 헐록들이 둘러싸고 있을 터였다. 커크월 주위의 검은 대지에는 남겨진 민가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얼마쯤 남아있었다 한들, 이미 불타 없어진 지 오래일 테니.

  하지만 그 화로의 모습만으로도 어쩐지 기운이 났다. 개러헬은 그들이 캐러반이 들어갈 길을 터주고, 빠져나올 기회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란 말을 했었다. 이제야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칼린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우릴 보면 앞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 거야. 우리가 놈들을 성벽쪽으로 빠르게 몰아넣기만 해도-"

  "저 화로가 놈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겠지." 이세야가 말을 맺었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가야 해. 개러헬의 말대로라면 마법사들이 불길의 방향을 제법 조절할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방향을 틀어서 들어가도 우릴 맞추지 않을 거라 믿을만큼 안전해보이진 않아."

  "그럼 그렇게 해. 방향을 정하는 건 너잖아." 나이 든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래, 말이야 참 쉽지." 이세야가 코웃음을 쳤다. "길을 뚫을 준비나 하라고." 그는 안장을 딛고 일어서서 비행경로를 앞쪽으로 하도록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커크월로! 기수들은 길을 뚫어라. 리스메,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빠르게 전진하라!"

  기수들은 오른 주먹을 들어 명령을 들었다는 표시를 하곤 아래로 급강하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 기세를 느끼고 화살과 물매를 준비해 회색 감시자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그들은 이미 화염 세례와 뼈를 부숴놓는 빙결마법을 퍼부었고, 놈들 사이에 아주 잠시동안 유지될 길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궁수들의 정확한 사격이 이탈하는 놈들을 마무리했다.

  이세야는 악령들의 끝없는 속삭임을 차단하려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도 장악중인 그리폰들의 정신을 조종해 동료들이 뚫어놓은 좁다란 경로로 그들을 전진시켰다. 그 길은 검은 바닷물을 노로 휘젓은 것마냥 아주 잠깐동안만 유지됐고, 어찌나 비좁았는지 그리폰의 날개깃 끄트머리에 얼어붙고 그을린 젠록 무리의 시체가 스치웠다. 하지만 그들은 직선으로 올곧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날아 엉성한 캐러반 더미를 이끌고 불벽에 둘러싸인 커크월의 안식처에 다다랐다.

  사냥꾼만 빼고.

  리스메는 타락한 그리폰을 탄 다른 기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시야에 들어선 순간부터 날뛰는 그리폰을 통제하느라 애썼고, 하필 그의 경로는 다른 이들보다 적들과 너무 가까웠다. 선두의 마법사와 궁수들은 최대한 고도를 높게 유지한 채 적들의 공격을 피했고, 길을 뚫기 위해 마법이나 화살을 퍼부을 때만 잠깐씩 하강했다. 이세야는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온통 분노에 찬 상태에서도 그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얄팍한 이성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오직 적들과 멀리 떨어진 거리 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은 캐러반에 묶여있어 리스메의 장력 고깔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밖에 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부짖은 헐록과 젠록 무리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놈들은 죽은 동료들로 생긴 경계선을 살짝 넘어 무기를 흔들며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에게 도전하듯 쉭쉭거렸고 - 사냥꾼은 그 부름을 지나치지 못했다.

  분노에 찬 울부짖음과 함께, 그 그리폰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에게 온몸을 내던졌고, 리스메는 안장을 딛고 서서 하릴없이 고삐를 잡아달길 뿐이었다. 마법사의 집중이 흐트러지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수레더미가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스물 남짓한 쉬릭과 헐록들이 나무 파편 밑에 깔렸고, 사냥꾼 역시 가슴줄에 딸려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몰려들었고, 어느새 이세야의 눈으로는 그 혼란통을 식별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칼린이 등뒤에서 날카롭게 말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해."

  이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이 위액이 역류하듯 목구멍 안을 가득 채워와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 전에, 그 둥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 바로 그가 한 일이 친구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말없이 레바스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검은 그리폰은 귀를 납작하게 접고 점차 멀어져가는 선두의 캐러반에 시선을 꼿꼿하게 고정한 채 앞으로 찌르듯 돌진했고. 어느덧 거의 성벽 아래에 다다랐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점차 양쪽에서 길을 좁혀왔지만, 레바스는 분노에 찬 사냥꾼의 울음과 리스메의 혼란에 찬 비명을 무시한 것처럼, 몰려드는 무리 역시 무시해버렸다. 헐록들이 도전하듯 측면에서 괴성을 질렀다. 칼린이 날린 빙결마법이 놈들을 순식간에 얼려버려 팽창한 뇌가 두개골을 터뜨리고 양 눈에선 검은 얼음조각이 터져나왔지만, 그 뒤의 놈들까지 조용히 시키진 못했다. 젠록들은 얼어붙은 동료들의 시체 뒤에서 그들의 조잡한 방패를 두들겨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으로 울부짖었다.

  그리폰에게 그 맹수의 천성을 억누르고 적들과 마주할 기회를 놓아버리는 일이란 굉장히 힘든 일임을 이세야도 알고 있었지만, 레바스는 해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지만, 그들은 커크월 안에 들어섰고, 성벽에서 쏟아진 불길이 좌절에 찬 헐록들을 저지해냈다.

  그리고 여지껏 벌어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난장판 속에서도, 이세야는 그의 그리폰이 보여준 의지력과 자율성에 자랑스러움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엘프는 레바스까지 이끌기엔 마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엔 그의 그리폰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줘야 했고, 레바스는 훌륭히 그걸 해냈다. 여전히 사냥꾼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고 영계의 사악한 악령들이 집중을 흐트러놓고 있었지만, 이세야는 기꺼이 그 사실을 감사하며 누렸다.

  그는 안장에서 몸을 내렸다. 다른 캐러반 담당들도 내려서며 어둠의 피조물들이 불길에 밀려 성벽에서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그들을 호위했던 감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방어벽을 넘어 성 안으로 착륙한 뒤, 작은 관문을 통과해 캐러반에 오를 민간인들을 모으러 갔을 터였다. 리스메의 캐러반이 통째로 무너진 탓에 자리가 부족해진 지금, 이세야는 그들이 누구를 뒤에 남길지 어떻게 결정할지 궁금했다. 헤인 요새의 전투 사령관인 이상 그 결정은 그의 몫일 테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결정을 내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앞쪽의 작은 관문이 열렸다. 지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이내 화염주문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눈을 깜빡였다. 아기 요람을 품에 안거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세야가 이미 커크월의 챔피언에게 어떤 물품도 실을만한 여유가 없을 거라고 말해둔 터였다. 헤인 요새에도 음식이나 옷가지 따위는 있었다.

  "타시오." 한 회색 감시자가 난민들에게 명한 뒤, 세 대의 캐러밴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명령을 따르는 자유동맹 시민들의 얼굴은 억누르지 못한 혼란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린아이들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세야는 그들을 무시했다. 주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엘프에겐 승객들을 동정할 여유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아라벨이 거의 채워지고 불길에 둘러싸인 성벽 너머로 비행 호위대가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상공을 맴도는 그리폰의 모습은 회색 감시자들이 커크월에서 이들을 데리고 나갈 준비가 됐다는 신호였다.

  "스카이버너를 준비하게." 그는 레바스의 안장에 다시 올라서며 옆에 있던 감시자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들이여, 캐러반을 띄워라."

  상공의 감시자들이 신호하자, 방어탑의 불길이 갈라지고 잠잠해졌다. 곧바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들었으나, 날아드는 장력 마법과 빙결 마법에 이내 뒤로 밀려났다. 마법사들의 주문을 따라 떠오른 캐러반은 그리폰들에 의해 - 장악된 두 마리와 자유의지를 가진 한 마리에 의해 -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다시 호위대가 일시적으로 뚫어놓는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세야가 신호하자 마지막 캐러반으로부터 등 뒤로 따라붙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활성화된 리륨 룬이 떨어져내렸다.

  드워프제 폭탄은 너무 불규칙적이고 폭발 잔해물이 공중으로 심하게 날려서 들어가는 길에 쓰기엔 안전하지가 않았다. 그리폰들이 폭발의 연기와 재 사이로 제대로 날기가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나오는 길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덕에 회색 감시자들은 떠나는 길 뒤로 푸른빛 죽음과 혼란을 마음껏 뿌려댔다. 리스메의 부서진 아라벨 더미가 폭발 중에 휩쓸려 들어가는 걸 본 이세야의 마음 속에 기쁨과 착잡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성공했네." 대재앙의 손길에서 멀어져 조용한 곳에 들어선 지 몇 분 정도 지나 칼린이 말했다. 그는 어쩐지 멍한 것 같았다. "성공했어. 이렇게 계속 하면 돼."

  "그럴지도."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 타락한 그리폰들의 통제를 놓아도 될 정도로 커크월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악을 풀어가며 그 난폭한 야수들이 혹시라도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지 신중히 관찰했고...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그리폰들은 시야에서 적들이 사라지고 나면 흥미를 잃었고, 그들의 고된 여정 덕에 녀석들의 분노는 무거운 피로감 아래 잠들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영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악령들의 속삭임도 마침내 가라앉았다.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기대었고, 그제서야 그의 로브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을 유지하며 커크월에서 캐러밴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탓에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럴지도라고?" 칼린이 반문했다.

  이세야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런다고 눈 뒤의 저릿한 느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단 나았다. "녀석들을 자기파괴로부터 막기 위해 내 장악이 필요한 거라면, 이렇게는 할 수 없어. 멀쩡한 그리폰들의 정신을 파고들어서 녀석들이 입단식을 치른 녀석들을 버텨내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면...아니, 그건 못해. 그렇게까진 못해, 칼린. 난 못 해."

  혈마법사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난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세야의 지쳐서 둔해진 머릿 속을 스치고 간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악령들이 바로 그렇게 말했는데.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21  (2) 2020.04.26
LF - 챕터 20  (0) 2020.04.26
LF - 챕터 18  (0) 2020.04.26
LF - 챕터 17  (0) 2020.04.26
LF - 챕터 16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