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서 하루를 보내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돌아가자, 신기하리만치 이전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의 위치도, 상황도,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음에도, 바다 위를 부유하는 부표 같던 그웬의 발에 무게가 실렸다. 호비는 공연 기회가 있으면 또 연락하겠는 말과 함께, 언제든 그웬이 원한다면 다시 와도 좋다는 암시를 남겼다. 갈 수 없는 곳들과 있고 싶지 않은 곳들 사이에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런 그웬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제시카 드류였다.

 

  "호비네 지구에 다녀왔다면서?"

 

  안부를 묻듯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그웬은 순간 긴장했다. 혹시 안 되는 거였나? 미겔이 싫어하려나? 제스한테라도 미리 말을 했어야 했나? 물론 호비에게 거의 납치당하듯 끌려간 상황을 고려하면 미리 허락을 구할 틈은 없었겠지만, 뒤늦게야 걱정과 후회가 스물스물 올라오려는 찰나, 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골칫덩이 녀석, 평소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웬일이래? 오죽 신기했으면 별의 별 거미들이 다 그 얘기만 하던데. 재밌었어?"

  "어...네. 공연에 드러머가 급히 필요했다더라고요. 반정부주의 공연인 줄은 모르고 갔지만..."

 

  제시카는 그웬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호비 브라운이? 드러머 대타를 찾겠다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그웬이야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양한 거미들 개개인을 잘 알 리가 없었으나, 본부 주축 멤버로 오래 묵은 제시카는 이게 그렇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굳이 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젊은 친구들이 우정을 쌓겠다는데...

 

  "모처럼 안면을 튼 거미도 생겼겠다, 이제 슬슬 임무에 나서도 되겠는데? 단순한 임무 중에 페어로 맡길 만한 게 있나 한 번 찾아볼게."

 

  뭘 시키려 해도 저 내키는 대로만 구는, 스파이더캣보다도 말을 안 듣는 스파이더-펑크를 다룰 목줄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예상에, 제시카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뭐라 속단할 단계는 아니겠지만,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

 

  제시카의 말대로, 그웬은 새 임무를 몇 번 받게 됐다. 빌런이 휩쓸고 간 현장 뒷정리라든가, 변칙점 흔적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단순한 임무부터 시작해, 자기 차원을 방어하는 거미인간들의 사이드킥 역할로 업그레이드 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비는 함께 배정 받은 첫 임무에만 얼굴을 비치더니, 임무가 간단하다 싶을 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비가 오지 않는다며 라일라에게 연락하자 라일라는 '걘 원래 그래. 깍두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혼자 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개 그웬 혼자서도 해결 가능한 수준의 일이었지만, 간혹 상황이 예상대로 안 풀린다 싶을 때면 호비는 귀신 같이 알고 도와주러 왔다. 스파이더 센스가 이런 식으로도 작용을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웬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걸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 날은 단둘이서 임무에 나선 날이었다.

 

  "너는 그...막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날 보질 않네?"

 

  언젠가 호비가 썼던 표현을 인용한 질문에, 호비는 눈썹을 비죽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막 제압한 지구-1988 출신의 라이노를 통제 포드에 가둬놓고 천장에 구멍이 난 교회 건물 꼭대기의 앙상한 철골 끝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씹는 중이었다.

 

  "그웬 스테이시, 네 우주에서도 죽었다며. 엄청 전설적인 드러머였다던데. 팬이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그건?"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의 호비는 맨얼굴일 때보다 오히려 표정이 다채로웠다. 눈구멍이 비대칭적으로 쭉 늘어난 것이 그웬의 질문을 영 탐탁치 않아 하는 듯 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린 걸까? 그웬은 지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제긴 했다.

 

  "리리가 알려줬어. 내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면서. 친척 아니냐더라. 사진 보니까 꼭 닮진 않았지만. 이름도 비슷하잖아, 마침. 그웬디라니, 너도 센스가 참."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펑크 드러머였으며, 그야말로 무대의 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리리가 보여준 옛 공연 영상 속엔 음악 취향만 다를 뿐 그웬이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뮤지션이 그 안에 있었다. 듣자하니 호비처럼 노골적인 반체제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아나키스트 세력에 상징적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죽은 걸까. 호비는 그 자리에 있었을까? 그웬이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머릿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웬의 생각을 끊어낸 건 호비의 대답이었다.

 

  "이름을 그대로 대면 너무 티나서 그런 거긴 한데, 그거랑은 별개지. 애초에 너와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웬디."

 

  단호한 대답. 호비는 입부분만 끌어올렸던 마스크를 쭉 잡아당겨 벗어버렸다. 진지한 두 눈이 그웬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도 알고서 드럼 치냐고 물어본 거 아냐?"

 

  그웬은 사실 호비가 그날 처음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거미들 사이의 다중우주적 상호작용이 빚어낸 우연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호비를 알면 알수록 그가 고작 드러머 대타를 구하겠다고 본부에 냅다 발을 들였을 리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음험하게 그웬 몰래 그를 관찰했을 거란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그건 뭐... 확률적인 문제지. 캐논 이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들은 잘 안 달라지니까."

 

  확률이라. 어쨌든 자신은 '그' 그웬 스테이시긴 하다는 거지. 그웬은 다른 우주의 그웬 스테이시들이 어떤 인물인지 딱히 알려 하지 않았다.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쌓여있는 시체 더미를 들춰 보는 느낌이라 꺼림칙하다고 해야할까.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가 제대로 확인한 첫 번째 그웬 스테이시였다. 적어도 그웬이 좋아할 수 있는 버젼의 모습인 건 참 다행이었다.

 

  그웬은 굳이 이렇게 물어서 자신이 어떤 답을 얻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호비는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의 흔적을 따라 자신을 찾은 걸까? 다른 스파이더맨처럼 그웬 스테이시의 연인은 아니었을지라도, 닮은 모습에서 뭔가 위안을 얻고 싶었다거나.

 

  "날 봤을 때... 기분 이상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가면을 벗은 호비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드라마틱한 표정변화가 있었다.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린 호비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웬디, 내가 미겔 오하라랑 닮았어?"

  "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맥락 없이 던져진 호비의 질문에 그웬이 대번에 정색했다. 호비는 샌드위치를 먹느라 입 위로 끌어올렸던 그웬의 마스크를 마저 쭉 끌어올려 벗겨버렸다. 그웬의 새파란 눈이 호비의 깊은 갈색눈을 마주봤다. 호비의 눈이 흥미로운 주제를 찾은 것마냥 즐겁게 반짝였다.

 

  "그렇지? 이놈의 다중우주니 뭐니 하는 거 말이야,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들을 자꾸 겹쳐 보려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가면 너나 나 같은 '별종' 몇몇을 빼면 반절이 피터 파커인데, 그놈들한테 너네 다 같은 사람 아니냐고 하면 그녀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소위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는 놈들의 하늘을 찌르는 자아를 깨달으면 너도 놀랄걸."

 

  그웬은 그 말에 본부에서 만난 수많은 피터 파커를 떠올렸다. 딱 한 번, 가면 아래 얼굴이 가려진 와중에도 지나치는 순간 강렬한 느낌이 온 적이 있었다. 이 애는 '그' 피터구나. 다른 피터들은 이따금 향수를 자극하긴 했어도 그웬의 피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 그웬은 그 가면 아래 있을 얼굴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그' 피터 파커는 그웬과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그웬을 잠깐 본 뒤, 알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갔다. 그뿐이었다. 어느 지구의 스파이더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웬은 감히 알아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는 취미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리 비슷한 캐논 이벤트를 공유하고 비슷한 특성을 공유해도 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중우주의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묶는다면, 너는 차라리 피터 파커에 가깝겠지. 혹은 나나 미겔 오하라에 가깝든가. 하지만 네 말대로, 그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지."

 

  호비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털었다. 그웬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겔 오하라와 호비 브라운이라. 두 사람은 같은 '스파이더맨'으로 묶는 것조차 모욕이라 할 만한 조합이긴 했다.

 

  "네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웬 스테이시일지언정, 너는 추락하지도, 스러지지도 않는, 스파이더우먼이잖아. 그건 오직 너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야. 누구도 그 위에 다른 걸 겹쳐놓을 수는 없어. 설사 너 자신일지라도."

 

  답지 않게 길게 열변을 토한 호비는, 자신의 대답에 그웬이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호비는 그웬의 머릿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추측할 정도로 그웬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가, 그의 섬세한 내면을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맞아. 나는 스파이더우먼, 그웬 스테이시이야. 단 '하나' 뿐인."

 

  단 하나 뿐인. 그 말은 참 외로운 동시에,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모르지, 또.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는 다중우주 중 어딘가에는 또 다른 그웬 스테이시가, 벤 삼촌이든 메이 숙모든 메리 제인이든 누군가 소중한 이를 잃고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우먼이 되는 우주가 있을지도. 허나 그런 것들이 '이' 그웬 스테이시를 퇴색시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어느 우주에서 추락하고 부서지고 목숨을 잃는 그웬 스테이시가 있어도 그가 결코 꺾이지 않는 것처럼.

 

  "호비."

  "응?"

  "고마워."

 

  똑바로 마주친 푸른 눈은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있지만 결코 눈물을 떨구진 않는다. 호비 앞에서 이 정도 모습을 보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변화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호비 브라운은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툭 하고 덮었다. 그의 드러머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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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라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웬은 난생 처음 보는 보트 하우스 앞에서야 깨달았다. 폭이 좁은 운하 사이에 빠듯하게 정박해둔 보트는 집으로 치면 침실에 부엌만 겨우 딸려 있을 정도 크기였지만, 외관에서 꼼꼼하게 관리해온 흔적이 느껴졌다.

 

  "여기에...산다고?"

  "정식 주소는 없지만, 나름 있을 건 다 있어. 맥주 마실래?"

 

  갑판 위에 훌쩍 뛰어 올라선 호비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엉거주춤 배 위에 올라서자, 호비는 문 옆에 쌓여있는 박스 틈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술한 보안이네,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안에 들어서자 딱히 누가 뭘 훔치러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스등에 불을 켜 안을 밝힌 호비는 입구에 그웬을 우두커니 세워둔 채 난장판인 거실을 가로질러 쪽문으로 사라졌다.

 

  무질서 속의 조화라고 해야할까. 거실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작은 공간은 한가운데 잡동사니에 잠식된 소파가, 한쪽 벽에는 LP 음반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그래피티에 뒤덮인 벽 위로는 공연 포스터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쪽문 너머가 부엌인 걸까. 큰 키에 맞지 않는 작은 문을 반쯤 허리 숙여 들어갔던 호비가 맥주병 두 개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가 들어오긴 하는 모양인지, 받아든 맥주병은 차가웠다. 호비는 소파 위의 잡동사니를 들어다가 한쪽 구석에 그대로 쌓아 놓고는 그웬에게 앉으라며 툭툭 손짓했다. 정작 자신은 주변에 쌓아둔 상자 하나를 간이의자 삼아 맞은 편에 자리 잡고서.

 

  "여긴 어디야? 지구-138이랬지?"

 

  이제 와서 묻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신비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주였다. 제스나 마일즈의 지구는 그웬이나 마일즈의 지구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미겔의 누에바 요크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미래 도시였다면, 이곳은 시대 배경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음에도 흑백 필터를 두른 것 같은 감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홀로 핑크색, 회색, 파란색을 오가며 번쩍이는 호비가 더 도드라진다고 해야하나. 저것도 거미 능력 중 하나인 걸까?

 

  "여기는 영국, 독재자 오지 오스번의 감시 하에 모든 게 통제되는 거지 같은 나라지. 나는... 너도 익히 알 방사능 거미에게 물렸고, 이 지구의 하나뿐인 스파이더맨으로 파시스트 개새끼들하고 맞서 싸우는 중이고. 밴드 활동 역시 반체제활동의 일부야. 호비 브라운일 때는 그리 잘나가진 않았는데, 스파이더 펑크는 제법 효과가 좋더라고. 너도 여기선 가면을 쓰는 쪽이 맨얼굴로 다니는 것보다 위험하단 거지."

  "와, 초면에 나를 반정부 공연에 냅다 들이밀었다는 거네, 그럼?"

 

  영국 맥주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 반쯤 비우고 내려놓은 그웬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스파이더맨이 어디서든 정부와 사이가 좋은 일이 있긴 하냐만은, 상당히 위험한 곳에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포털을 열어 돌아갈 수 있다손 쳐도.

 

  "그래도 재밌었잖아? 이대로 우리 드러머 할래?"

 

  씩 웃는 얼굴이 묘하게 얄밉다. 겨우 한 번 공연 해놓고 뻔뻔하기는. 제법 느낌이 좋은 멤버들이긴 했다. 문제는 그웬이 아직 어딘가 발을 붙일 마음이 없다는 것 뿐. 애초에 남의 지구기도 하고.

 

  "재미는 있었어. 가끔 객원 공연 정도라면.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 정도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호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이한 사람이다. 어떻게 딱 그 순간에 그웬을 발견한 걸까. 일종의 스파이더 센스였을까? 호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웬은 지금쯤 본부의 어두침침한 개인 숙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으리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신세를 졌다고 해둘까.

 

  무뚝뚝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호비는 일단 입을 열면 말이 많았다. 누가 스파이더맨 아니랄까봐. 그웬과 달리 그는 딱히 그웬에게 궁금한 게 없는지 사적인 질문이라곤 일절 던지지 않았다. 대신 대뜸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묻거나 처음 무대공연에 섰던 순간의 실수담 같은, 뮤지션끼리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펑크는 그웬에겐 다소 낯선 장르였지만 음악은 쉽게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맥주와 마른 육포를 곁들인 시덥잖은 수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어느 새 무거운 눈꺼풀로 꾸벅꾸벅 조는 그웬을 발견한 호비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자러 가, 그웬디. 욕실 거울 뒤에 새 칫솔 있으니까 꺼내 쓰고, 씻는 사이 침대 준비해둘게."

 

  그웬은 호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 여기 침실이라고 할 만한 방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기, 그 침대라는 게 말이야..."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는 그웬이 호비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초면의 또래 남성이고, 분위기에 휩쓸려 이렇게 오긴 했지만 뭔가 그 이상을 기대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웬의 의사를 거슬러 뭔가를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혹여라도...

 

  "난 여기서 잘 거야.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매트리스가 좀 꺼지긴 했는데 그래도 소파보단 나을걸."

  "어? 아냐, 내가 손님인데 그럴 순 없지. 내가 소파에서 잘게."

 

  신사다운 제안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웬은 손사래를 쳤다. 호비 말마따나 소파에서 자나 침대에서 자나 큰 차이는 없을 듯 싶지만, 주인을 내쫓고 침대를 차지하는 건 지나친 실례였다.

 

  "무대 땜빵해준 답례라고 생각해. 네가 뭐라든 난 여기 자리 잡았으니 알아서 해."

 

  호비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난 그웬을 슬쩍 밀어내고는 소파 위에 몸을 날려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웬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더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호비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공연 후의 아드레날린과 알콜의 혼합작용으로 그는 상당히 기분 좋게 나른한 상태였다. 지금 잠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웬은 소파에 드러누워 종이쪼가리 위에 뭔가를 끄적이는 호비를 내버려두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욕실문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작은 보트하우스에 걸맞게 모든 게 딱 최소한으로만 갖춰진 욕실이었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샤워부스,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것 같은 변기, 빛바랜 거울이 달린 찬장과 군데군데 이가 바진 세면대. 거울문을 열자 양치컵에 각양각색의 칫솔이 서너 개 꽂혀 있고, 구겨진 포장 안에 새 칫솔도 두어 개 담겨 있었다. 묵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칫솔을 구분하기 위해 스티커를 붙여두거나 매듭을 달아놓은 흔적도 있었다. 단골손님도 있다는 뜻이겠지.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은 그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호비의 침대는 그 큰 덩치를 구겨넣기엔 다소 빠듯할 것 같은 크기였지만 그웬에겐 딱 적당해 보였다. 손님용인지 다소 사용감은 있지만 새로 세탁한 티가 나는 시트와 담요가 깔려 있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박스티셔츠와 조거 팬츠 한 벌과 함께. 딱 몸을 눕힐 공간만 빼고는 거실만큼이나 난장판인 방이었다. 벽에 붙은 악보, 그래피티 아이디어가 그려진 낙서 스케치, 문고리에 걸어둔 외출용 재킷.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 그 방에서, 그웬은 자신이 일면식 없던 낯선 사람 집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 즉흥적인 모험이라.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자 의식적으로 미뤄뒀던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동안엔 미처 몰랐는데, 조요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배의 진동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여름 휴가지에서 정원 해먹에 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익숙치 않은 느낌에 멀미가 날 법도 했지만, 새로운 일을 겪고 난 흥분과 피로 때문인지 금세 잠이 쏟아졌다. 수마가 밀려드는 가운데, 살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변주한 건가? 귀엽네. 미소 띤 얼굴로 잠든 그웬에게, 아주 오랜만에 악몽 없는 깊은 잠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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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팬픽션

* 호비 브라운 x 그웬 스테이시 커플링

* 이전에 쓴 Intimacy와 아마도 이어질 내용

* 선동과 날조 가득

 

 
  한가한 오후였다. 간만에 햇살이 따사롭게 비쳐드는 오후, 살아있는 화분을 그러모아 얼마 없는 일광욕 기회를 즐기도록 보트 천장에 줄줄이 올려놓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부두에 매어 둔 배는 땅 위에 서 있는 것마냥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호비는 소파에 앉아 빈 악보지를 바닥에 늘어놓고는 기타를 튕기며 부지런히 작곡중이었고, 그웬은 그런 호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호비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하나를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펑크의 역사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웬은 흥미있는 부분만 가려 읽으며 성의 없이 페이지를 넘겨댔다. 실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사이 집중한 호비의 얼굴을 훔쳐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듯 했다. 호비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무릎을 벤 그웬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곡을 쓸 때의 호비는 무대 위에서와 비슷한 눈빛을 했다. 혹은 수트를 입고 적과 맞서 싸울 때 같은 눈을.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갖고 집요하게 끝을 향해 달리는 자의 눈빛. 그의 안에서는 이 모든 게 같은 행위이기 때문인 걸까? 그웬은 어느 새 책은 가슴 위에 엎어 놓고 호비의 얼굴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호비, 키스해도 돼?"

 

  다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호비는 그웬이 ‘밥 먹을까?’ 하는 질문을 한 것마냥 놀란 표정 하나 없이 그웬을 가만히 내려다 보더니, 아주 잠깐 틈을 두고는 짧게 대답했다.


  “안 돼.”

 

  그 짧은 간격은 뭘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지만 빈말은 아니었고, 호비가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그웬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진짜?”
  “응.”

 

  호비는 대답만 마치고 다시 기타와 악보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웬은 호비가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 봐라? 그웬의 손이 호비의 턱끝을 붙잡았고, 강하지 않은 손길로 살짝 당기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그웬을 다시 향했다.


  “호비, 날 좋아해?”
  “어.”

 

  잠시도 고민하지 않은 즉답. 그웬의 심장 속도가 빨라졌다. 언젠가 물어보려던 질문이긴 했다. 너는 왜 내게 잘해줘? 왜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모든 걸 해결해줘?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하게 굴어? 점점이 쌓인 질문은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수렴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넘치기 직전의 물잔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듯, 마음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럼, 키스는 왜 안 된다고 해?”

 

  호비의 눈빛은 참 읽기 어려웠다. 그웬이 아직 그를 잘 모르는 걸까. 혹은 그의 눈빛이 담은 감정이 늘 한결 같아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오직 그웬을 향해서만 유독 다정한 눈빛. 지금도 그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웬을 내려다 보고 있지만, 눈빛만은 언제나처럼 따듯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뭐든지 아는구나, 너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인지, 미안함인지, 당혹감인지. 그웬은 벌떡 몸을 일으켜 호비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내뱉은 말이 스스로를 찌르는 유리조각처럼 돌아와 가슴을 찔렀다. 어째서 여태까지 그 당연한 질문을 못했던가. 그것은 그웬이 그에게 돌려줄 대답이 없었기 때문인 것을.


  “그웬디.”

 

  등 뒤에서 호비가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웬디, 괜찮아. 날 봐.”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이 그웬을 달래듯 다독였다. 그웬이 꼿꼿하게 버티며 등돌리고 있을 기세이자, 작은 한숨과 함께 호비 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웬 앞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그웬과 눈높이를 맞춘 호비가 얼굴을 가린 그웬의 두 손을 붙잡았다.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운 제스쳐를 따라 그웬은 순순히 호비의 손에 잡힌 두 손을 스르륵 내렸고, 붉어진 눈시울로 호비를 마주 봤다.


  “미안해, 호비. 난…”
  “하지마, 그거.”
  “응?”
  “사과 할 일 아니잖아.”


  그웬은 호비의 표정에서 씁쓸함이나 아쉬움, 책망 같은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의 얼굴은 지극히도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네게.

 

  “있잖아, 호비. 내가 아까 말한 건…”
  “키스, 해도 돼?”
  “...뭐?”

 

  너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웬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얼빠진 반문을 흘렸다. 하지만 호비는 진지해 보였다. 그의 큼직한 손이 그웬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웬은 잠시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감았다. 호비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웬에게 닿아왔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입술 위를 달싹인 호비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네가, 안된다며?”
  “나는 안된다고 했고, 너는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다고 한 적 없는데, 나도.”
  “거기서 눈 감으면 괜찮다는 신호인 건 전우주 공통이야, 그웬디.”

 

  장난스레 씩 웃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도 마주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긴장돼 있던 마음이 한결 느슨하게 풀렸다. 동시에 굉장히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웬디, 난 네가 여기 묵고 있는 상황을 착취할 수 없어. 네 마음이 취약해진 틈새를 이용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네가 돌이켜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전히 한쪽 뺨을 붙든 손이 부드럽게 그웬의 얼굴을 쓸었다. 소중한 걸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 모른 척 했던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웬은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방금 키스한 건...나는 언제나 네게 키스하고 싶은데, 지금 정도는 너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고, 아마?”

 

  번지르르하게 잘 말하다 말고 마지막에 말끝을 살짝 흐리는 것이, 어째 그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서 그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느낀 다른 사람의 온기가, 그를 향해 온전히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그웬을 느슨하게 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안 해, 후회.”
  “다행이네.”
  “누가 혹시 널더러 날 착취한다고 하면, 내가 덮쳤다고 해.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아, 우리 그웬디의 명예를 위해 결코 그럴 수는 없지. 그러느니 내가 파렴치한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아.”

 

  극적인 톤으로 과장하는 호비의 태도에 그웬은 그의 어깨를 찰싹 아프게 때렸다. 하여튼 거미들은 말만 참 잘한다니까. 그 기세에 떠밀려 뒤로 털썩 주저 앉은 호비는 뭐가 또 웃긴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호비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웬이 재촉하듯 눈을 치켜떴지만, 그는 그저 하하,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듣지 못한 말이 궁금했지만, 어쩐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은 마주 미소지었다. 평화롭고 한가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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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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