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하

etc. 2020. 11. 8. 18:19

2004. 06. ~ 2017. 01. 15

  처음 류하를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옆 반에 새끼 고양이를 데려온 아이가 있다고 왁자지껄 했던 날이었어. 당시에만 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많이 없었고, 내 또래 친구들 중에 고양이를 키우는 건 나 혼자였을 때였지. 가하조차도 그 때는 채 한 살이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옆 반의 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아이였지만, 길에서 새끼 고양이를 주웠다며 수건에 싸와서는 반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이 사람 저 사람 쓰다듬게 놔뒀어. 생후 한달 반, 두 달 정도 됐을까, 어린 그 애는 야옹거리며 활기차고 깨발랄한 모습으로 17살 여자애들의 지나친 관심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양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비전문가가 - 그저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 내 나이에 가질 법한 도덕적 우월함을 품고 - 그렇게 어린 고양이를 함부로 다루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나는 꽤 내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할 건지, 키울 생각인지 물어봤고, 그 아인 부모님 반대로 집에서 키우진 못할 것 같다며, 키울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 무턱대고 키우고 싶다고 나설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나는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있다며, 내가 잘 돌봐서 입양보내 주겠다고 그 앨 데리고 왔어.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지, 그 애가 무슨 병을 가지고 가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가하는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 외의 고양이에 맹렬한 적대감을 보였지.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한 일이야. 우리집 고양이들은 한번도 다른 고양이에게 호의적인 적이 없었는데. 사실 너무 옛날 일이고, 일기나 사진, 블로그 포스팅으로 남겨둔 거 외에 그 때 내가 어떤 생각으로 류하를 돌봤는 지는 기억나지 않아. 류하라는 이름은 편하게 가하랑 돌림자로 '하'자를 뒤에 붙이자고 생각하다가 나름 멋들어지게 - 물론 중2병이 한창 남아있을 때니까 - 지은 이름이었고, 류하를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바닥에서 냥줍한 아이에게 미하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하'자 돌림 고양이 셋이 잠시 집에 함께 있었어. 그 때 사진을 많이 찍어둘 걸 그랬나 싶은데, 후진 폰카메라로 찍은 것 밖에 없던 것 같고, 그마저도 미하 사진은 있는데 류하사진은 없네. 속상해라. 류하는 우리집에 오래 머물진 않았어.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오빠 친구한테 입양 보냈는데, 이것도 지금 생각하자니 무책임한 입양이었겠구나 싶어. 아마 자취하면서 키웠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쓰는 이제야 드는걸. 류하는 그렇게 입양을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어. 그 친구분 어머님이 알러지가 있어서 - 혹은 생겨서 - 더이상 키울 수 없다고 했는데, 자취하다 돌아가서 못 키우게 된 걸까, 아님 애초에 반대를 무릅쓰고 부득부득 우겨서 키우다 못 이겨낸 걸까 좀 궁금하네.

  입양 보내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던 류하는, 대부분의 아깽이가 그러하듯 꿩강하게 장난감을 쫓아 날아다니던, 어디에 눕혀놔도 금방 고르릉 거리며 잠들던, 사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같은 건 전혀 모르는 평범한 아깽이였는데, 1년만에 돌아온 류하는 중성화를 마친 토실토실한 - 그래봤자 4kg였지만 - 뚱냥이가 돼있었고, 말할 수 없을만큼 겁쟁이가 돼있었어. 이것 역시 궁금하단 말이야. 이전 집에서 괴롭혔던 걸까, 아니면 그냥 성품이 원래 소심했던 걸까? 내가 조금만 큰 소리로 말하거나, 옆에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거나, 예기치 못하게 빠르게 손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바빴고, 처음 오는 손님들은 류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돌아갈 때가 많았어. 침대 밑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당시 집에는 가하, 보리, 딸기 세 마리가 이미 함께 살고 있었고, 가하와 보리까지는 내가 키우기로 마음 먹고 데려왔던 아이들이었지만 엄마의 고집으로 딸기를 키우게 된 것만 해도 이미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던 나는 류하를 다른 집으로 보내고 싶어했어. 어떤 면에선 류하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 나는 가하와 보리를 내 고양이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긴 했지만 딸기만 해도 그리 정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류하가 안쓰럽고 짠했던만큼, 새 주인을 찾아서 그 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양이가 되길 바랐거든. 블로그며 카페에 입양글을 올리긴 했지만, 한 살이 넘은 코숏 삼색 고양이가 입양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게 미적미적 시간은 가고 어느 샌가 류하는 우리집 고양이 중 한 마리로 자리 잡았어.

  류하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덜 경계하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류하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먼저 쓰다듬거나 끌어안는 건 한없이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내가 관심 없는 척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의자 다리에 머리를 부비거나, 근처에 앉아 고르릉 거리곤 했으니까. 그리고 쓰다듬는 걸 경계하는 한편, 막상 붙잡아 두고 마구 쓰다듬거나 궁디팡팡을 해주면 금세 골골거리기 시작했지. 그렇게 사랑스럽기도 힘든데. 다른 고양이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와중에 딸기와 묘하게 사이가 좋기도 했어. 딸기가 어떻게 생각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류하는 딸기가 자기 새끼라도 되는 양 자주 붙잡고 그루밍도 해주고, 살갑게 붙어서 잘 때도 있었거든. 나중에 떨어져 사는 사이에 전부 리셋 돼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류하는 점차 내가 자길 예뻐하는 존재라는 걸 이해하게 된 것 같았어. 때때로 무릎 밑에 다가와 애옹 거리며 울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곤 했는데, 무릎에 올라오고 싶은 건가 싶어서 무릎을 톡톡 치며 '올라와도 돼'라고 대답하면, 마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부담스러워하는 눈으로 한참을 망설이며 울기만 했어. 대개는 그런 류하를 잔뜩 쓰다듬어주는 걸로 끝났는데, 어느 날인가는 정말 망설이다 말고 무릎으로 뛰어오르더라고.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그 순간의 감동만은 생생하게 기억나. 놀라서 도망갈까봐 큰 소리도 못내고 감격에 겨워하며 류하를 살살 쓰다듬는데 무릎 위에 서는게 어색한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몇초간 머무르다 내려갔어. 그 뒤로 다시 올라오게 되기까지는 몇번의 시도가 더 필요했고.

  무척 속상하게도, 내가 본과에 올라가면서 자취하러 나간 사이 류하와의 관계는 리셋이 됐어. 당시 나는 가하와 보리만 데리고 원룸으로 나갔었고, 집에는 엄마와 오빠만 살고 있었어. 두 사람 다 집에는 머리만 누이러 오는 타입의 삶을 살았으니까 - 함께 살 당시의 나도 비슷했지만 - 고양이들은 가족들과 밥주고 화장실 치워주고 물 갈아주는 것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지냈을 거야. 그나마 딸기는 원최 붙임성 있으니까 그 와중에도 쓰다듬도 많이 받고 했겠지만, 류하는 거의 침대 밑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두어달에 한번 집에 갈 때마다 점점 살이 쪄갔지. 오랜만에 갔더니 날 경계하느라 숨는 류하 때문에 엄청 섭섭했었어. 류하 입장에선 내가 자길 버렸다고 느꼈었을까? 그렇다면 역시 미안한데...어느 시점 쯤에, 이대로 뒀다간 류하가 너무 뚱뚱해질 것 같아서 류하도 데리고 자취방으로 왔어. 생각해보면 그 원룸에 고양이 셋이라니, 무모했지만 다행히 우리집 고양이들은 그리 파괴적이거나 활동적이진 않았어. 따로 다이어트 사료도 사서 먹이고, 낚싯대로 운동도 시켜가며 살을 빼보려 노력했는데 그닥 잘 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도 한 5kg 중반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싶네. 어느 순간 그렇게 살 빼는 걸 포기했던 기억이 나. 류하가 언제나 항상 배고파하는 태도로 내 눈치를 보는 게 너무 미안했거든. 다른 애들 밥이 남을까 기다리다가 내가 빼앗아 가거나 호통 치기 전에 한 알이라도 더 먹으려고 황급히 움직이는 태도가, 꼭 내가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느낌이었어. 어차피 짧게 사는 생인데 먹고 싶은만큼 먹게 두는 게 뭐가 나쁜가 싶었지. 아무튼 그렇게 새 환경에서 다시 낯을 가리고 소심해진 류하를 환경에 적응시키는데 또 한 반년쯤 걸렸을 거야.

  이렇게 쓰고 있자니 류하와의 시간은 끊임 없이 내가 -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 자길 해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이해시키는 과정의 반복이었던 것 같네. 그래도 대충 최근 3년 정도는, 류하가 낯도 꽤 안 가리고 여유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 어떨 땐 손님이 와서 경계할 일이 있으면 '아, 경계하기 귀찮은데 낯설잖아? 고민되네...'하는 태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곧잘 붙잡아놓고 배를 주무르거나 품에 안고 놔주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괴롭힐 때에도, 이전 같았으면 눈을 굴리면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었다면, 점차 적응해서 '아, 이것 참 곤란하네' 하는 얼굴로 1분쯤 견뎌주다가 슬슬 벗어나게 됐고 말이야.

  글을 쓰다보니 장장 12년을 함께 하고도, 류하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둔 게 너무 없어서 떠올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슬프네.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데, 그 애가 어떤 아이였는 지 좀 더 많이 적어둘 걸 그랬어. 지금 내가 가진 생생한 기억들은 최근 1년 사이의 기억이 대부분인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흐려질 거 아냐.

 

  많은 게 기억나. 요새 가하나 보리는 내가 불러도 영 들은 척도 안하고 귀 하나 까딱 안하는데, 류하는 내가 맨날 실없이 예뻐서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부르는 족족 귀라도 움찔 하거나 꼬박꼬박 돌아보곤 했어. '이리 와봐~'하고 손을 내밀면 아무 것도 없는 게 뻔한데도 와서 냄새라도 맡고 갔고. 혹시 먹을 게 있을까 기대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괜히 살 뺀다고 먹을 거 적게 주지 말고 많이 많이 먹게 해줄 걸 그랬어. 특히 마지막 주에 구토 하면서 식욕 없는 류하를 보면서 후회를 많이 한 것 같아.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먹고 싶어할 때 더 많이 줄 걸. 구토 증상이 나아지면 꼭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거 원없이 먹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애들이 밥 달라고 보채며 밥그릇 앞에서 패악을 부려도 한번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어. 하도 빨리 먹어버리니까 내가 항상 마지막 순서로 밥그릇을 채워줬고, 금세 그 순서에 적응했던 거지.

  류하는 사람을 물 줄도 몰랐어. 내가 눕혀놓고 배를 주물거리거나 못살게 굴면 장난치듯이 뒷발로 차며 앙 물 때가 있었는데, 가하나 보리에 비하면 이빨이 스치는 수준에 불과하게 물어놓고도 화들짝 놀라선 금세 이빨을 뗐어. 예전 집에서 혼났던 걸까 생각하면 짠해. 나는 마음껏 물어도 혼 안내는데. 그렇게 착한 모습이 좋아서 장난칠 때도 많았어.

  류하는 이름을 부르면 꼭 다가오기 전에 벽이나 의자 다리, 식탁 다리 같은 곳에 머리를 부볐어. 내 손에 와서 부벼주면 좋을텐데, 나랑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로 벽에다 뺨을 슥슥 부볐어. 애정표현이었다고 생각해, 역시. 때때로 정말 예쁨이 받고 싶은 건지 눈을 마주친 채 야옹 하고 울면서 다가올 때는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세게 꾹꾹 눌러서 쓰다듬어줬어. 류하는 세게 쓰다듬는 걸 좋아했으니까. 바닥에 엎어놓고 궁디팡팡 해주는 것도 엄청 좋아했는데 맨날 변태고양이라고 놀리면서 두들겨줬어.

  새 집에서 류하가 좋아하는 장소는 소파 위, 컴퓨터 책상 서랍 뒤쪽, 침대 발치였어. 밤에는 항상 침대 발치에서 자서 다리를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어. 가끔 엎드려있는 류하를 붙잡아다 내 얼굴가로 끌어와 꼭 끌어안으면 숨만 색색 쉬면서 도망 안 가고 1분쯤 기다려줬어. 딱히 그게 편한 것 같진 않았는데, 내 애정표현을 이해해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이러다 말겠지~ 하는 느긋한 태도에 가까웠달까. 풀어주면 바로 발치로 돌아가 그대로 잠들었어.

모든 순간이 너무 생생해. 눈 안에서 류하가 계속 머물어서 매 순간 보고 싶어. 나는 침대에 누워서 허전한 발치 때문에 울고, 소파에 앉아서 빈 옆자리 때문에 울고, 세 개 밖에 놓을 필요 없는 밥그릇 때문에 울고, 화장실을 치우며 감자랑 맛동산이 적어서 울어. 병원에 온 삼색이가 류하를 닮아서 울고, 사진을 보다가 쓰다듬고 싶어서 울고, 이 글을 쓰다가 또 보고싶어서 다시 울어.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그때마다 많이 울 거야. 어떤 면에서는 추억이 흐려지는 게 겁나기도 해. 덜 보고싶어질 거라는 게 속상하기도 해. 아직도 사실 실감이 안 나. 왜 류하가 내 곁에 없을까? 왜 우리 집에 고양이가 세 마리 밖에 없을까? 왜 더이상 류하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없을까?

  내가 더 유능한 수의사였다면, 원장님만큼 많이 알았더라면, 그날 외출하지 말고 집에 있었더라면, 병원에 빨리 데려갔더라면, 흉수를 뽑자고 말했더라면, 부질없는 후회도 많이 들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게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넘치게, 충분히 많이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한 순간도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착하고 다정했어. 내 마음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류하는 우리집에서 내 네번째 고양이로 살아서 행복했을 거야. 이제는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랑하는 류하.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을 거고, 많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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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

8월 28일 공개 된 바이오웨어 드래곤 에이지 4 관련 영상 번역입니다. 공식 영상에 자막 다는 기능이 없어서 스크립트만 참조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JPvKbUgOA&feature=youtu.be)

 

00:02
6년 전 저희는 2014년 게임 어워즈에서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된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의 수상을 위해 무대에 섰습니다. 그 후 저희는 새 시대의 기술을 드래곤 에이지 세계와 인물들에게 삶을 불어넣는데 사용할 방법을 상상해 왔습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이제는 여러분께 바이오웨어의 열정 넘치는 개발자들이 이 특별한 게임을 어떻게 빚어내고 있는지 처음으로 보여드릴 때가 된 것 같군요.

(음악)

00:34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저는 바이오웨어에 꽤 오래 있어왔고, 35명 규모였던 회사가 300명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는 걸 봐왔습니다.
00:44
그레이엄 스콧 (수석 게임 디자이너)
이 산업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단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00:48
(회의 중) "나 이 캐릭터 진짜 좋아해." (일동 웃음)

00:51
멜리사 자노윅스 (게임플레이 디자이너)
바이오웨어는 굉장히 실험적인 편이고,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가져와요.

00:57
존 레니쉬 (기술 감독)
우리는 언제나 발전하고, 개혁하고, 새로운 캐릭터들에 삶을 불어넣어 플레이어와 팬들이 즐길 수 있게 합니다.

01:07
매튜 골드만 (크리에이티브 감독)
드래곤 에이지의 세계는 모든 걸 갖추고 있어요.
새로운 개척, 서사, 수수께끼 같은 것, 가차없는 탐정 소설 같은 이야기요.
물론 전부 판타지 세계관에 잘 포장돼 있죠.

01:22
에스더 코 (수석 크리쳐 애니메이터)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바로 영웅이야! 드래곤 에이지 세계에서! 사람들도 구하고!" 이런 느낌을 느껴요.

01:26
루크 크리스트 잰슨 (수석 작가)
제게 드래곤 에이지는 플레이하고 싶은 환상적인 세계예요.

01:34
매튜 골드만 (크리에이티브 감독)
드래곤 에이지의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기대가 돼요. 여기엔 독자적인 세계관, 독자적인 생태계, 독자적인 야생풍경과 독자적인 건축양식 등 흥미진진하게 탐험하고 발견할 것들로 채워져 있죠.

01:51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드래곤 에이지 차기작에서는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장소들을 보고, 그 안에서 살고 자라온 사람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요.

02:03
패트릭 위크스 (수석 작가)
지금 제작 중인 게임 안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힘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려 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이예요.

02:14
존 에플러 (내러티브 감독)
차기작에서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과 당신이 만들 친구, 가족들에게 집중하는 이야기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02:23
젠 셰버리 (Associate Producer)
드래곤 에이지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게임 캐릭터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진짜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예요.

02:31
존 레니쉬 (기술 감독)
우리는 캐릭터들이 아주 사랑받거나, 혹은 미움 받기를 원해요. 가장 좋은 예로 솔라스가 있죠. 팬들 중 절반은 그를 죽이고 싶어 하고, 다른 절반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해요. 둘 다를 원하는 분들도 있고요.

02:40
가렛 데이빗-로이드 (솔라스 성우)
그들은 나를 공포의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그들은 당신을 뭐라고 부를까요?

02:48
에스더 코 (수석 크리쳐 애니메이터)
바이오웨어와 EA는 모션 매직 테크놀로지의 선두주자였어요. 그 덕에 캐릭터들이 걷고, 움직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죠.

03:00
실비아 페케테쿠티 (작가)
플레이어들은 이 허구의 디지털 픽셀 모음이 진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그 아슬한 긴장감을 원해요.

03:08
한지영 (벨라라 성우)
아냐 아냐, 괜찮아! 이건 좋은 징조의 울림이야!

03:13
(아티스트 분 성함이 안나옴)
저는 보스 몹 디자인을 하는데, 크리쳐 디자인 팀에도 도움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이 마주할 그 거대한 위협들을 만드는 거예요.

03:19
아이크 아마디 (다브린 성우)
누구도 내 눈 앞에서 죽게 두지 않겠다! 워든을 위하여!

03:23
안드레 가르시아 (게임플레이 감독)
드래곤 에이지 프랜차이즈에서 중요한 선 선택지예요. 당신이 내린 선택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03:30
카트리나 바크웰 (RPG 프로그래머)
이 선택이라는 건 파티 동료가 사느냐 죽느냐 같은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와 반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기도 하고요.

03:42
(이름 안나옴)
저는 드래곤 에이지가 제안하는 가능성들을 사랑하고, 기꺼이 그걸 탐색하고 싶어요.

03:48
마크 다레스 (총괄 제작자)
제게는 바로 그런 것들이 아침에 눈을 뜨게 하는 원동력이고, 언제나 환상적인 기회인 겁니다.

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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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바이오웨어 온리전에 냈던 카피본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트레스패서 DLC 스포 포함.

 

 

*

 

비아투화 :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을 일컫는 말

 

*

 

  사랑하는 나의 베난,

 

  얇은 펜촉이 종이 위를 스쳤다. 첫 마디를 적고 난 라벨란의 손이 허공에서 머물렀다. 뒤에 이어질 내용을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적으려하니 쉽게 써지지 않았다.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손이 펜을 내려놓고 잉크병을 닫았다. 그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짚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추운 헤이븐의 겨울 하늘 아래, 나는 갈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지친 상태로 생전 처 음 보는 수많은 솀렌들 사이를 걸었어요. 하늘 위의 대균열도, 손을 태울 것 같은 녹색의 알 수 없는 마법도,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악마와 악령들도, 모든 것이 꿈속을 걷는 듯 한 꺼풀 너머의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 산 위에서 당신이 내 손을 잡아끌어 균열에 가져간 순간까지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순간. 그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세계의 구원이 달려있다고 했 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벨란은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혼돈 속에서 라벨란을 움직인 것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정의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살아남아서 클랜으로 돌아가겠다는 목적뿐이었다. 솀렌들이 그녀의 신에 대해 무지한 만큼 라벨란 역시 챈트리도, 안드라스테도, 메이커와 빛의 성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믿는 챈트리의 이념을 따라 심문회를 이끌겠다는 카산드라나 렐리아나의 신념은 존경할만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창조주를 신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임무를 하나씩 해결해나갔을 뿐인데 어느샌가 사람들은 그녀를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혐오의 눈길은 점차 경외와 신뢰의 눈빛으로 바뀌어 갔지만 라벨란은 점점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면 그녀는 솔라스를 찾았다.

  레탈란,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사실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호칭을 쓴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끼기엔 그는 이질적인 존재 였다. 데일리시도, 시티엘프도 아닌 동족의 이단마법사. 그는 분명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라벨란은 그가 머무는 헤이븐 외곽의 작은 오두막에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 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일상적인 잡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경우 가 많았다. 하지만 라벨란은 토론에 가까운 그들의 대화방식에 점차 적응해갔다. 솔라스는 그녀가 던지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가볍게 흘려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계에서의 신비한 경험, 그가 세상을 떠돌며 본 인간들의 이야기, 고대 엘프의 신화, 잊힌 그들의 역사,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담, 그가 들려주는 것들은 어떤 하렌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신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날도 라벨란은 솔라스가 가볍게 던진 질문에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솔라스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해도 비웃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되도록 바르고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사람에게 없는 강대한 힘과 불멸성 아닐까요?"

  "그 옛날에 우리 엘프들은 불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신은 있었습니다."

 

  솔라스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아니, 보통 그들의 토론에는 정해진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길을 열어주었고 라벨란은 그와 대화하며 자신이 얼마나 폭 좁게 생각해왔는지 새삼 깨닫곤 했다.

 

  "단순히 힘이나 수명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군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 아닐까요? 세상을 창조하고 새 생명을 창조하는 건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하잖아요."

  "전설이라는 건 결국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사히 대균열을 봉인하고 테다스를 지켜낸다면 백 년 뒤쯤에는 당신의 손짓 한 번에 악마와 악령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겠지요. 그것이 백 년이 아니라 몇 천 년 을 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전에 솔라스는 그녀에게 어떤 영웅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었다. 그녀의 현재는 후대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란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니라 그들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의 기록이었다. 백 년 뒤 후세의 기록에는 그녀가 정말로 안드라스테의 화신이었다고 적혀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그마한 데일리시 클랜 출신의 평범한 엘프였다는 사실 같은 건 어디에도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가 믿는 신들이 사실은 강대한 힘을 가진 위대 한 마법사였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나요, 그럼?"

  "글쎄요. 세상을 창조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과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숭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레탈란."

 

  그날의 토론은 그렇게 끝이 났다. 라벨란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녀의 신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키퍼로부터 그들을 수호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믿고 따르는 이들을 수호한다는 신들은 그들이 할람쉬랄에서 쫓겨날 때 어디에 있었는지. 펜하렐이 그들을 장막 너머에 봉인해버린 탓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신들을 여전히 숭배해야 하는지. 키퍼 이스마토리엘은 그녀의 불경한 질문에 화내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간구하는 이들에게 신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들을 지켜주는 거란다."

 

  당시에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습관처럼 사냥을 나가기 전 안드루일의 석상 앞에서 기도문을 읊으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얼룩처럼 남아 맴돌았다. 장막 너머의 신들은 지금도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을까.

 

*

 

  혹자는 사랑을 두고 운명적인 것이라 하겠지요. 음유시인들이 첫눈에 반해 멈출 수 없는 이끌림을 따라 정신없이 빠져드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듯이. 나는 우리가 나눈 것이 그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해요. 우리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때에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들, 별 특별한 이유 없이 당신과 이야기하기 위해 찾아가던 나의 발걸음,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고 생각하던 작은 호기심, 그런 것들을 두고 운명적인 이끌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나 쉽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다가갔어요. 당신이 나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헤이븐이 무너지던 날, 라벨란은 그녀가 이제 다시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의 존재와 홀로 맞서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다. 어차피 성유골신전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기에,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을 지키는 데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걸으며 라벨란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이 길 끝에 살아남는다면, 정말로 그녀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비다쌀라는 솔라스가 그 모든 상황을 이끌었다고 했다. 닻이 그녀를 죽이지 않게 지키고, 심문회를 스카이홀드로 인도하고, 코리피우스에 게서 오브를 되찾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그녀의 죽음과 삶조차 솔라스가 의도한 거였다면 그들의 감정 또한 그가 이끈 것일까. 만약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어디부터가 그들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운명인 걸까.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 야영지에서 나눈 대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끼던 순간의 교감, 그 감정들조차 그에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까.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지게 된 호감조차도 그의 의도한 바였을까.

  라벨란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향하던 발걸음은 낯선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동질감 느껴지는 대상을 향한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정도 따라 변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올 때, 스카이홀드의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그가 머무는 원형돔을 향해 한 번 더 눈길이 갈 때, 야영지 천막 너머 부스럭거리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일 때, 라벨란은 서서히 그녀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영계에서의 키스는 다소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녀로 인해 온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그의 태도를 흩트려 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에게 끌리는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솔라스가 다시 키스해온 것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결코 충동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뿐더러, 그러한 충동이 그 안 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익숙한 가면 뒤로 자신을 감춰버렸다. 영계에서는 모든 게 쉽게 느껴진다는 변명 같은 말과 함께. 그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라벨란 역시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둘 사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간 듯했으나 정말로 그렇게 될 리는 없었다. 라벨란은 그와 이야기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연한 색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따금 그 시선을 깨달은 솔라스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한 번 벌어진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영계에서 보는 게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해도, 영계를 걷는 우리의 의식은 진실인 거죠?"

 

  마법사가 아닌 라벨란에게 영계의 개념은 아무리 들어도 모호했다. 그녀는 솔라스와 함께 헤이븐을 걸으면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인 걸까. 막연하게 이해하려 해봐도 모든 감각이 너무나도 현실 같았다.

 

  "쉽게 왜곡되고 휩쓸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행동했다면, 거기엔 어떤 왜곡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라벨란은 무심한 솔라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했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현실보다 영계를 걷는 일이 편하고 즐겁다고 했던 그인데 자신의 의지로 한 입맞춤이 단순한 감정의 흔들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주인 대신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기대선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 서서 눈을 마주쳐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셔츠를 그러잡고 가볍게 당긴 것만으로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레탈란."

 

  라벨란은 발꿈치를 들어 솔라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 한번, 그리고 다시 입술에 한번. 그리고 뒤로 물러서기 전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뒤로 물러서 마주한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면 그녀의 착각일까. 

 

  "나는 진심이었어요."

 

  아마 얼굴이 붉어져 있겠지만, 라벨란은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문을 나서기 직전 돌아보았을 때 얼핏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는 솔라스를 본 것 같았다.

 

*

 

  마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 작은 불꽃일 무렵에는 작은 손짓 한 번으로 쉽게 꺼트릴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게 두었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거예요.

 

  붓을 잡은 손이 느릿하게, 무게를 싣고 선을 그린다.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섬세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손놀림에는 이미 같은 행위를 수백 번, 수천 번은 한 것 같은 능숙함이 묻어있다. 그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 어느 잠 오지 않는 새벽에 스카이홀드를 돌아보던 라벨란은 당연히 비어있을 거라 생각한 그의 거처에서 장막화염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솔라스는 그녀의 기척에 잠시 눈짓만 해 보이곤 별다른 말없이 계속 작업에 집중했다. 그 무언의 허락에 라벨란은 종종 쉽게 잠이 들지 않을 때면 그의 작업을 지켜보러 원형돔으로 향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그를 보러 내려가기 위해 밀려드는 잠을 애써 깨우는 때가 더 많았다.

  라벨란은 예술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의 그림 실력이나 그림에 담긴 상징과 의미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솔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평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는 색다른 열정이 느껴 졌다. 그림과 그 자신 외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은 집중한 눈을 보고 있자면 은근한 질투심마저 들었다.

 

  "그림은 누구한테 배웠어요?"

  "따로 누군가에게 배운 건 아닙니다."

  "아, 또 그저 살다 보니 어디선가 익혔다는 거죠?"

 

  좀처럼 과거에 대한 단서를 흘리지 않는 그의 대화방식에는 어느정도 적응했다. 처음에는 그가 집중하는데 방해될까 봐 최대한 조용히 지켜보려 했지만 라벨란은 성실한 관객이 되기엔 예술적 소양이 부족했다. 어두운 주방을 뒤져 비스킷이나 사과 따위를 챙겨 자리 잡는 그녀를 보며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솔라스는 특별히 좋다 싫다 하는 말없이 그녀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에게 기습적인 질문이라도 던지면 자신에 관한 얘길 조금이라도 듣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라벨란은 여느 날처럼 그의 붓놀림을 지켜보다가,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들어 뒤적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초상화도 그려줄 수 있어요?"

 

  테이블 위에 엎드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는 방만한 자세를 죠세핀이 본다면 분명 인퀴지터의 체면을 운운하며 잔소리를 할 테지만 다행히 보는 눈은 없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진지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지금 그리는 것도 결국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그림은 읽어내기 어려웠다. 단순하게 축약되고 기호화된 이미지 속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어둠 속의 마법사들, 장막과 회색감시자 같이 큼직한 형상들뿐이었다. 라벨란은 굳이 그림의 의미를 캐물어서 예술에 대한 그녀의 무지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인퀴지터의 초상화라면 몽틸리예 대사께서 이미 좋은 화가를 구해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푸, 하고 반사적인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미 죠세핀에게 초상화 문제로 한참 시달린 후였다. 무슨 옷을 입을 건지, 어디를 배경으로 할 것인지, 심문회의 상징물로 뭘 들고 있으면 좋을지 등등 그녀에게는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정하는 데만 반나절은 걸린 듯했다. 그녀가 이 일로 불평하자 도리안은 실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열 배는 더 괴로울 거라 겁을 주기도 했다. 빛이 드는 창가를 배경으로 수 시간 동안 고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그건 순전히 심문회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잖아요. 그런 거 말고, 나는 당신이 내 얼굴을 보고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솔라스는 그제야 붓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원하던 관심을 끌었 지만 라벨란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언제나 묘하게 긴장됐다. 팔레트 위에 붓을 내려놓고 다가온 그가 가볍게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마주친 눈빛이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 라벨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에겐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내게 그럴 기회를 주긴 할 건가요?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라벨란은 이번엔 먼저 물러서기로 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위험신호가 울려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괜찮다. 지금 이대로 일어서 방으로 달려간다면, 그리고 다시는 새벽의 돔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불러일으키는 영계의 매혹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다면.

  하지만 라벨란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미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

 

  베난,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온기, 돔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면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얼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 이런 것들이 사랑을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 나를 사랑했겠지요. 나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몇 번이고 이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의 감정이 어떤 비극을 불러올지에 대해 경고하는 당신의 말은 당신 자신조차 멈추지 못했 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두려움을 나누겠다고 말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좀 더 빨리 진실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나의 감정에, 우리의 감정에 취해 눈이 멀어있던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을까요?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사랑이란 단어는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충분한 단어이긴 한 걸까. 대륙공용어의 ‘사랑’과 엘프어의 ‘lath’가 가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만큼,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을 한 단어 안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라벨란에겐 때때로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은, 특히나 어떤 이름을 붙이고 난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휩쓸려 가고 만다. 그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던 선은 그날 발코니에서의 키스 이후 너무나도 가볍게 무너졌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거리를 두려 한 그의 노력이 어떤 불안에서 기인한 것인지 라벨란은 알지 못했다. 솔라스는 마치 그때까지 억누른 감정의 반동인 것처럼 그 날 이후 세상없이 다정한 연인으로 변했다. 그의 변모에 놀란 것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내가 실실이라고 부르는 건 그 친구가 보통 입매만 슬쩍 웃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에 대한 반어법이었지 정말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단 뜻은 아니었어."

 

  야영지에 모인 동료들은 솔라스가 없는 틈에 라벨란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아무 데서나 실실거리진 않는데요, 라고 항변하려 해도 그가 이전보다 더 자주 웃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세라는 예상했던 대로 질색하며 싫어하는 한편 그럴 줄 알았다며 의외로 유하게 받아들였다.

 

  "같이 있을 때면 그 반질반질한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거 엄청 뻔했거든! 축하한다고는 못 해주겠다. 알지?"

 

  세라의 말처럼 그녀가 솔라스에게 가진 호의는 누구나 알 법한 명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벨란은 솔라스가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하려 했으나 라벨란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다른 연인들이 상대방을 사랑하게 하는 특별함과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사랑하기에 특별하다 믿고 싶었을까, 정말로 그녀가 특별하기에 사랑하게 되고 만 걸까.

  그들은 시작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난 지금에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리 진실을 알았다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정작 모든 걸 알고 있던 그조차도 자신을 멈추지 못했는데. 어느 밤,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내려다보는 솔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청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고요했지만 라벨란은 어쩐지 그 눈빛이 낯설었다. 서늘한 손끝이 그녀의 왼쪽 눈가를 따라 발라슬린을 그려냈다. 왜? 하고 입모양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어째선지 라벨란은 아다만트의 영계에서 보았던 그의 묘석을 떠올렸 다. 홀로 죽는 것. 모두의 두려움이 적혀있던 비석들 사이에서 유달리 그의 것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었다.

 

  "…솔라스."

 

  새벽의 정적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라벨란의 왼손이 그의 뺨을 스치자 희미한 녹색 빛이 그의 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라벨란이 이전에 본 적 없는 무방비한 얼굴 위로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빠르게 스쳐갔다.

 

  "베난."

 

  몸을 숙여 이마 위로 입맞춰오는 입술이 차가웠다. 누구보다 가까이 닿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선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벨란은 그런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껏 끌어안는 것으로 그에게도 따듯함이 옮겨갈 수 있다 믿는 것처럼.

 

*

 

  사랑에 눈이 먼다는 표현처럼, 나는 눈앞에서 나를 삼키는 절망을 마주하고도 물러설 수 없었어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우리의 감정이 위대한 과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당신의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의 어떤 애원도 당신을 되돌릴 수 없었지요. 어떻게 당신은 한결같이 사랑을 담은 그 눈으로 나를 보며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있었나요. 내가 어떻게 그런 당신을 그대로 놓아버릴 수 있었겠나요.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이 끝난다면 모든 것이 훨씬 간단해질 텐데. 라벨란은 모든 사랑이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상호합의 하에 이어지던 관계는 상대방이 끝을 선언하는 순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이다.

  분명 그녀의 삶은 홀로 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을 텐데도, 잠시 가졌던 온기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떠 빈 옆자리를 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대하는 솔라스의 태도였다.

 

  "인퀴지터,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말투도, 표정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말로 그녀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정말 그뿐이라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

 

  "베난."

 

  그녀는 고집스럽게 그 특별한 호칭을 고집했다. 오히려 이전에는 쓰지 않던 단어였다. 미련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부를 때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솔라스의 눈빛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무삼림그늘에서 병사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병력이 정리되는 대로 코리피우스의 위치를 추적할 인력을 나눌 예정이에요. 따로 조언 해줄 만한 게 있나요?"

  "그는 이제 궁지에 몰렸을 것입니다. 그가 준비한 군대는 심문회 앞 에 무너졌고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 테지요. 우리가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지도 모릅 니다."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라벨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당신은 정말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배신과 속임수의 신이라 했던가. 그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거짓과 기만에 능했다면 그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한 번도 라벨란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벨란은 솔라스를 놓을 수 없었다. 장막 너머에 홀로 남겨진 지금까지도.

 

*

 

  수많은 밤을 괴로워했어요. 모든 것이 끝나면 알려주겠다던 진실은 내 손 안에 없었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 외에 무엇도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좀먹어갔지만, 괴로움과 비탄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어요. 함께 한 시간에 거짓은 없었다던 그 말을. 더 이상 당신의 무엇을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는 순 간에도 그 말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요.

 

  2년의 시간이었다. 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기도 했다. 라벨란은 그녀가 관성처럼 사랑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던 이는 이미 떠났는데,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이 했던 모든 약속도 맹세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녀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시간에 매여 있는 느낌이었다. 대균열이 사라지고 오브는 부서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녹색 균열이 남아있었다.

  균열의 통증은 하루하루 심해져 갔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언젠가 그것이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벨란은 죽음을 생각해도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을 발견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라벨란은 원형돔을 찾아가 솔라스가 사용하던 의자에 앉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밑그림뿐인 마지막 그림을 보고 있자면 대답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째서 떠난 건지, 들려주지 못한 진실이 무엇인지, 왜 말없이 떠나야 했던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끝에 따라오는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나를 사랑했나요, 정말로?

 

  더 이상 새벽의 돔을 찾지 않게 되고부터, 라벨란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로도 보낼 수 없는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사소했다. 오늘은 세라가 드디어 제대로 된 건포도 쿠키를 처음으로 구웠어요. 컬렌이 청혼을 거절한 오를레의 공작영애가 스카이홀드로 직접 찾아오는 바람에 소동이 있었답니다. 침대 장식을 연녹색으로 바꿔봤어요. 당신은 붉은 천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다 쓴 편지는 심문회의 인장으로 정성스럽게 봉인한 뒤 난롯불에 불태웠다. 그녀의 새로운 습관을 알아차린 렐리아나는 ‘흔적이 남지 않게 잘 태워주세요, 인퀴지터.’하고 짧은 코멘트만 남겼을 뿐 그 이상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아마 그녀가 상처를 딛고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벨란은 그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그녀를 불태우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커져 가는 불길이 언젠가 그녀를 집어삼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라벨란은 열병 같은 사랑을 놓지 못했다.

 

*

 

  그리고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기대했던 방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갈 수밖에 없던 당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의 Din’anshiral은 내가 함께 걸을 수 없는 길이었지요. 함께 걷게 해달라던 내 바람은 당신에게도 내게도 불가능한 선택지였고.

당신은 내 손에서 균열의 흔적과 함께 2년간의 의문과 불안, 고통도 가져가 버렸어요. 내가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은 웃을까요.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는 당신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내 마음을 이어나갈 수 있는 대답을 얻었는걸요.

 

  혼자 가야겠어, 하고 말하는 라벨란에게 동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엘루비앙 너머로 돌아온 그녀는 녹색빛이 꺼져가는 왼팔을 도리안에게 내밀었다.

 

  "팔을 잘라야겠어.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인퀴지터! 대체 무슨 일이…. 솔라스를 만났어?"

 

  라벨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만난 건 펜하렐이었다. 그들이 알던 솔라스는 그곳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을 무시한 채 라벨란은 옆구리에서 단검을 뽑아 오른손에 단단히 쥐었다. 이를 악문 채 칼을 치켜든 그녀를 카산드라가 붙잡았다.

 

  "…단검으로는 한 번에 잘리지 않을 거야. 내가 할게."

 

  라벨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쥔 단검을 입으로 가져가 이 사이에 물었다. 검을 꺼내 드는 카산드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리안의 지팡이 끝에 불꽃이 맺혔다. 라벨란은 눈을 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겨울궁에 돌아와서 모두를 모아두고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을 전했다. 숭고한 의회는 심문회의 규모를 줄여 챈트리 밑으로 들어 가겠다는 라벨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막으려면 그들에겐 아직 힘이 필요했다.

  오가며 마주치는 이들이 더 이상 그녀의 빈 소맷자락을 흘끔거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라벨란은 하얀 늑대가 찾아오는 꿈을 꾸기 시작했 다. 달빛만이 어슴푸레 비치는 숲 속에서 그들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라벨란은 거듭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솔라스,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라벨란은 답을 알고 있었다.

 

*

 

  아마 이 편지가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라 생각해요. 아무래도 한 손으로 쓰는 글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나는 빈 자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 거예요. Var lath vir suledin. 나는 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이 시간을 견뎌낼 것을 믿어요.

  사랑하는 나의 베난, 나는 내 마음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이 사랑으로 당신을 찾아갈 거예요. 내가 줄 수 있던 내 마음, 내 영혼, 내가 지키고 추구하던 모든 것들은 이제는 모두 잿더미 속에 잔해로 남아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가져갈 수 있는 건 내가 주는 죽음뿐이겠지만,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걸 나는 알아요.

  내 사랑,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나는 당신의 가슴에 칼을 꽂을 거예요. 그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 순간 당신이 지어 보일 표정을 상상해봐요.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질 때면 보이곤 하던 조금 놀란 듯한,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짓겠지요.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서로를 품에 안는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거예요.

 

  잔 구김 하나 없이 바르게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심문회 문장이 박힌 도장으로 봉투를 봉했다. 라벨란은 봉인 위로 한번 입을 맞추고 촛불에 봉투를 가져갔다. 모서리 끝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봉투를 완전히 불살랐다. 책상 위로 검은 재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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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바이오웨어 온리전에서 판매했던 솔라벨란 카피본을 전체공개로 전환합니다. 이전에 구매해주신 분들, 새롭게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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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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