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신년'과 '축제'.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스카이홀드 광장 가운데 커다랗게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로 축제가 한창이다. 퍼렐던의 신년 축일은 오를레에 비해 가볍고 쾌활한 분위기이다. 사람들은 축일 오전에 짧은 예배를 드리고 서로에게 덕담을 건넨다. 마을 공동체 단위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밤이 오면 묵은 해의 액운을 부적에 담아 불태우는 의식을 치르며 새로운 해의 운을 기원한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나무 둥치에 앉은 솔라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활기가 그에게까지 미처 전해지지 않은 듯 그의 표정에선 특별히 들뜬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고요한 그의 시선 끝에 라벨란이 있다. 그녀는 류트 반주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무리 한 가운데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 평소 단정하게 차려입던 예복이 아닌 가벼운 평상복 차림을 한 그녀는 축제를 맞아 그녀의 무거운 책무를 내려놓은 듯 한껏 신이 나 있다. 자유롭게 풀어헤친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새빨갛게 상기된 두 뺨 위로 모닥불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잔뜩 흥에 겨워 누구든 앞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도는가 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는다. 심문회 사람들은 그들의 인퀴지터가 신분이나 종족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럼 없이 어울려 오는데 익숙하다. 사실, 왼손의 빛나는 앵커와 데일리시 특유의 발라슬린을 제외하면 그녀를 일반 사람들과 구분지을만한 특별한 특징은 없다. 지금처럼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때면 더더욱.

 

  "반짝이고, 바스락거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 손에 잡힐 듯 다가와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귀 옆에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솔라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친구를 돌아보았다. 콜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라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아. 기꺼이 손 안에 머물 거야."

  "네, 맞습니다. 콜."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연민의 영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했다. 연주하던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사이에서 라벨란이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숙여 인사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솔라스를 발견하고, 만개한 꽃 같은 미소가 그 얼굴 위로 순식간에 번졌다. 라벨란은 어둠 속에 있는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와 아직 가쁜 숨을 잘게 내쉬었다.

 

  "솔라스, 난 당신이 방에서 쉬는 줄 알았어요. 함께 어울리지 않을래요? 당신이 춤추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지만."

 

  솔라스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라벨란은 기대도 안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같이 좀 걸어요. 너무 뛰었더니 지치네요."

 

  콜은 어느샌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솔라스는 라벨란의 손을 마주 잡고 성의 외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느라 바빠 인퀴지터의 공백 쯤은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달빛을 조명 삼아 걷는 두 사람 사이엔 편안한 침묵이 함께했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라벨란에게 솔라스가 질문을 던졌다.

 

  "클랜에서는 신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평소 라벨란은 솔라스가 데일리시에 대해 물을 때면 늘 약간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대답에 뭐라도 꼬투리를 잡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말하곤 했지만 오늘은 축제의 기분에 취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요? 보통 새해 전야에 사냥꾼들끼리 다 함께 사냥을 나가 제의를 위한 사냥감을 잡았어요. 운이 좋을 땐 동면 중인 곰을 잡기도 했고, 보통은 여우나 산양 정도로 그쳤죠. 그렇게 잡은 사냥감 중 가장 큰 녀석을 제의에 올려 새해의 운을 기원하는 게 풍습이었어요"

 

  솔라스는 그 풍경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퍼렐던, 오를레, 티빈터 어디든 간에, 엘프든 인간이든 드워프든 간에.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한 해를 나누고, 그들의 마음을 새로 다잡고 목표를 정할 수 있게 기념할 날을 정한다. 고대 알라산에서도 그들은 비슷한 의식을 치렀다. 수백, 수천의 엘프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 그 옛날의 기도 중에는 펜하렐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현대의 데일리시는 그의 이름을 찾지 않는다. 오직 적의 이름을 저주할 때만 불리는 배신과 경멸의 이름.

 

  "그러고보니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 새해맞이 땐 늑대를 잡았어요. 늑대를 잡는 해는 특별하다고들 해요. 펜하렐의 마수를 피하는 한 해가 될 거라고 키퍼가 축복해 주셨는데, 이렇게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그 축복이 효과가 있던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옛날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달을 올려다 본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직접 잡은 늑대를 제단에 올리던 그녀는 스카이홀드에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새해를 맞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키퍼의 축복은 그녀를 콘클라베에서 살아남게 했을 지 모르겠지만 펜하렐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했다. 그 아이러니에 웃음이 났지만 솔라스는 익숙한 가면 아래 표정을 숨겼다. 그는 섣부른 위로의 말 대신 화제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조금 있으면 자정입니다. 이번에는 사냥감 대신 부적을 만들지 않았던가요? 사람들과 함께 태우려면 슬슬 돌아가야겠군요."

 

  그의 지적에 라벨란은 그제야 생각난 듯 품 안을 뒤적여 그녀의 부적을 꺼내었다. 사람 형태의 지푸라기 인형 안 쪽에는 새해의 소망을 적은 쪽지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인형 사이로 삐져나온 쪽지 끝에 머무는 것을 눈치 챈 라벨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무슨 기원을 적었습니까?"

  "비밀이예요. 남한테 말하면 부정 탄다고 했어요."

 

  '정말로 믿는 건 아니지만,' 하는 단서를 말꼬리에 흘리면서 그녀는 총총거리며 앞서 걸어간다. 솔라스는 그를 두고 멀어져가는 라벨란에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게 두어야 한다. 혹여 그녀가 머물기 원하더라도 그는 잡아선 안된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라벨란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같이 안 가요? 부적은 안 태워도 옆에 있어줄 수는 있잖아요. 춤 추자고는 안 할테니까 가요."

 

  언제나 먼저 다가서는 쪽은 그녀이다. 먼저 손을 내민 것도, 먼저 입맞춘 것도. 하지만 솔라스는 그에게 언제나 물러설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는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가까워진 그녀를 에워싸 품 안에 가둔다. 그녀가 사냥한 늑대는 펜하렐의 제단에 바쳐졌다.

 

===

 

옛날에 소리뼈님(@soribone)과 연성교환 하기로 했던 글을 너무 늦게 썼습니다ㅠ 분량도 짧네요...솔라스 시점에서 보는 라벨란은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포스타입 201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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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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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나 라벨란은 겨울에 태어났다. 데일리시는 겨울에 태어나는 아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유랑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픈 계절이기에. 그녀가 태어난 겨울은 그래도 한 곳에 정착하여 풍족하게 보내던 편이었기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자라나며 수많은 황량한 겨울을 겪는 사이,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겨울을 싫어하게 됐다. 달빛 외에 한 점 빛도 비추지 않는 긴 밤을 텐트 속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춥고 메마른 기억은 쌓이고 쌓여 겨울이라는 단어 위에 차가운 껍질 같이 덧입혀졌다.

*

- 그러고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뭐가?"
- 내가 보낸 선물.

수정 너머로 들려오는 초콜릿을 녹인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담겨있었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수정을 굴리며 듣는둥 마는둥 대답하던 라벨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선물? 그러고보니 죠세핀이 티빈터로부터 뭔가 왔다고 한 것 같았는데...

"오, 세상에. 그게 네 거였구나, 도리안. 아직 확인을 못했어."
- 저런. 우리 인퀴지터께선 여전히 할 일이 많으신가 보군. 괜찮아, 상하는 건 아니니까. 확인하면 꼭 연락하라고. 반응이 기대되니까. 아무튼, 미리 말해둘게. 생일 축하해, 인퀴지터.
"고마워, 도리안! 역시 도리안 밖에 없어!"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의 표정을 도리안이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몇개의 농담을 더 주고 받은 뒤 통화가 끝나자마자 라벨란은 재빠르게 죠세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녀의 책상 옆으로 쌓여있는 몇개의 소포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고풍스럽고 화려한 포장을 찾아 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우아한 필기체로 마기스테르 도리안 파부스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아, 도리안에게 온 거 말이죠. 아직 확인 안하셨군요?"
"맞아요. 늦게 열어본다고 혼났어요, 안 그래도."

금박으로 장식된 푸른빛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상아빗이 들어있었다.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눈색을 닮은 에메랄드로 장식된 상아빗은 도리안의 취향을 가득 담아 우아하고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사치품의 팔할은 도리안이 마련해준 것들이었는데 이로써 그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고보니 내일이네요. 이번에는 정말 우리끼리 소박하게 기념하는 거다보니 준비도 금방 끝났어요. 그래도 음식은 훌륭할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인퀴지터."

어느새 내일이었다. 그녀, 리아나 라벨란의 생일. 작년까지만 해도 수많은 친구들과 스카이홀드에 그녀를 아끼는 이들 모두 함께 파티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심문회 규모를 축소하기로 한 결정 때문이기도 했고, 최근 그들의 상황이 파티와 영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생일은 기념해야죠, 하는 죠세핀의 제안에 가볍게 저녁식사 만찬으로 끝내기로 결정한 바였다.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 선물받은 빗을 머리에 대 보았다. 오, 도리안. 이건 한낱 데일리시 엘프가 쓰기에 너무 고급이잖아,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직은 손에 익지 않은 감촉의 상아빗으로 머리를 빗어내리며 라벨란은 도리안의 생일에 맞춰 보낼 망토핀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

"생축! 위들이랑 내가 같이 손 본 거야! 새로 정제한 영혼 룬을 박았다고 하더라."

다그나는 그녀의 의수에 장착된 석궁을 개조하는데 단단히 재미를 붙인 듯 했다. 세라 또한 활에 있어선 자기가 선배라며 으스대는 와중에도 그녀가 새 무기에 적응하는데 아낌없는 응원 - 스무번의 야유와 한번의 칭찬을 두고도 응원이라 할 수 있다면 - 을 보탰다. 손볼 게 있다며 가져갔을 때 짐작하긴 했으나 다그나의 손길을 거친 석궁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고마워, 세라."

모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아이언불과 크렘, 컬렌, 죠세핀, 그리고 세라와 다그나. 멀리 떠난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올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도리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배릭 또한 자작 업무가 바빠 짬을 내기 힘들 거란 편지를 보내왔다. 다행히 아이언불은 최근까지 나가있던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교황이 된 렐리아나는 심문회에 공식적인 축하를 보내기보단 조용히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표했다. 비비엔은 심문회가 축소된 후로 다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으나 그녀 개인이 라벨란에게 가진 호의를 거둘 정도는 아니라 편지와 함께 '요긴하게 쓰일 지 모르는' 올레이 궁정식 반쪽가면을 보내왔다. 톰 레니에, 한때 블랙월이었던 친우는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지가 오래라 그녀를 떠올리고 들러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 때 전령의 쉼터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노래했던 걸 떠올리면 다소 쓸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인퀴지터!"

"축하해, 보스!"

"축하드립니다, 인퀴지터."

그래도 한동안 다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를 떨쳐내고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술이 들어가자 흥이 올라 웃음소리와 환호로 빈자리를 채우니 쓸쓸함도 금세 잊혀졌다. 그렇게 템플러의 규율 상 과음은 안된다던 컬렌마저 얼큰하게 붉어진 얼굴로 위키드 그레이스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을 때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일 없이 밤을 새워 즐겼다.

*

평소보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벨란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달간 그녀 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어색한 긴장 속에 시간을 보내왔다. 비어있던 왼팔 소맷자락을 의수 고정장치로 채우고, 미련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원형돔의 낡은 책상과 책장을 들어내 정리했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사실 라벨란은 3년 전, 코리피우스를 해치운 그 날 이후로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 진 느낌을 떨쳐본 적이 없었다. 솔라스가 그녀를 떠난 후로 단 한 번도.

그가 있을 땐 어땠더라? 라벨란은 일부러 묻어두고 떠올리지 않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와의 대화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생일 언저리였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 데이트를 위해 잠시 짬을 내기도 어려운 두 사람은 평소처럼 원형돔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 선물로 받았던 보호룬은 아직도 그녀의 서랍 안에 잠들어 있었지만, 선물 외에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일부러 잊으려 노력한 탓에 이제는 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 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먼지쌓인 기억을 뒤적이던 라벨란은 취기에 섞여 달콤하게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라벨란은 그녀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계인지, 그저 그녀 자신의 꿈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공기가 희박한 것 같은 특유의 느낌은 익숙했다. 눈 앞에는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마을이라기엔 폐허에 가까웠다. 불에 타 무너진 잔해 사이로 형체를 갖춘 건물이라곤 두어채 남짓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마을의 형태는 뚜렷해졌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조차 오래된 것이었다. 불에 타고 남은 건물 벽 일부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었다. 약탈과 대규모 학살의 흔적. 현실에서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풍경이었으나 라벨란은 한꺼풀 덧씌운 풍경을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으나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길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길은 마을 밖으로 이어져 높다란 언덕으로 향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녀를 기다리던 이가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지만 아직 어린 소년인 것 같았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소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언덕 끝에 마저 올라서자 야트막한 구렁 너머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희뿌연 지평선 근처로 하늘 높이 솟은 원형의 탑, 구름 위에 떠 있는 웅장한 도시의 윤곽. 라벨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 알라산.

 고대 엘프 제국의 황금도시. 정말로 하늘 위에 있었구나. 라벨란은 태양빛을 머금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를 바라보다 등 뒤를 돌아봤다.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진 폐허. 라벨란에겐 오히려 더 익숙한 '엘프의' 것들.

"그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파괴해."

소년의 주변에는 서툴게 만든 봉분이 여러개 있었다. 나무판 위에 새긴 글자는 그녀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적혀있었다. 소년의 흙투성이 손에 작은 생채기가 여러개 나 있었다. 소년의 시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공중도시의 첨탑에 꽂혀 있었다.

"하늘 위에 사는 고귀한 이들에게, 땅 위의 우리는 벌레나 다름 없으니까."

소년의 남루한 차림은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군데군데 기우고 덧댄 흔적이 가득했다. 황금도시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갈망과 분노로 빛났다. 라벨란은 소년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곳에 속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이곳은 아마 영계일 것이다. 이 풍경은 그 옛날에 살았던 누군가의 기억인 것일까.

"언젠가, 저들을 무너뜨릴 거야."

라벨란은 시선을 돌려 소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르스름하게 민 흔적이 있는 옆머리와 길게 땋아내린 검은머리는낯선 형태의 매듭장식으로 묶여있었다. 세파에 찌들지 않은 단정한 이마. 그 아래 결의와 확신으로 빛나는 청회색 눈. 라벨란은 그 눈 안에 담긴 불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 불꽃.

"붉은 피를 흘리는 이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고귀하거나, 비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 거야."

라벨란은 그녀를 둘러싼 주위 풍경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그녀와 소년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들리지 않을 목소리임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너는 누구야? 그 때, 소년이 라벨란을 향해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 땅의 이름은 '오만'이야."

*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익숙한 방 안에서 익숙한 외로움 속에 홀로 누워있었다. 왼팔 소매 밑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그녀의 맨얼굴엔 발라슬린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벨란은 텅 빈 그녀의 왼팔을 끌어안았다. 그 언젠가, 그가 약속했었다.

'기회가 된다면, 제 고향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오만의 이름을 가진 땅. 오랜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벨란은 오랜만에 마주한 연인의 흔적을 눈 안에 담은 채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 속에 갈무리했다.

아주 특별한 생일선물이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오로지 그만이 줄 수 있는.

 

===

 

포스타입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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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덕과 가정을 수호하는 실라이세, 사냥을 수호하는 안드루일...정말 이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은?"

  흙바닥에 끄적거린 이름을 하나하나 세어 보던 브리알라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따라 빛의 성가를 외우던 때가 훨씬 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라산은 그녀의 투덜거림에 빙긋 웃을 뿐이었다.

  "어린 아이 때부터 듣는 이야기 속에 섞여 있으니까. 클랜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좀 차이가 있겠다만."

  "스승님은 그럼 창조주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안드라스테의 전설도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어린 브리알라의 머릿 속에서 두 가지 신화가 섞여드는 과정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신들의 수호와 함께 하던 엘프들의 마법 제국과 장막 너머로 영원히 사라진 신들. 엘프의 쇠락과 함께 나타난 솀렌들. 영생을 잃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 굴욕의 시간들. 희망을 찾아 안드라스테의 옆에서 싸운 사도 샬탄. 이어지는 배신과 쇠락. 많은 부분이 거의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엘프들에게 따로 신이 있다는 사실조차 그녀에겐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마법과 요정이 함께 하던 조상들의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의 어머니조차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 된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니까. 티빈터로부터의 해방을 주도한 안드라스테라는 인간이 존재했던 건 사실이겠지. 그 외엔..."

  "그럼 장막 너머의 신들은요? 그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와 우리를 구해줄까요?"

  그 말에 펠라산의 눈을 스쳐간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브리알라는 후에야 그것이 연민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

 

  "스승님은 몇 살이에요?"

  "먹을만큼 먹었지."

  "스승님의 클랜은 어디 있어요?"

  "찾아가기 귀찮을만큼 먼 곳에."

  "왜 따로 떨어져서 혼자 다녀요?"

  "다들 내 성격을 못 견디고 내쫓더라고."

  무엇 하나 제대로인 게 없는 대답 중에서도, 마지막만큼은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브리알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

 

  "어디로 가는 길이었니, 달렌?"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사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지만, 산 채로 불에 붙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아무리 직전까지 그녀를 죽이려 했던 이라 해도 차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던져 오는 상대의 목소리는 산책 중에 이웃이라도 만난 것마냥 쾌활했다.

  "제 이름은 브리알라에요."

  두려움 속에서도 브리알라는 은인을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두건 사이로 삐죽이 솟아 있는 귀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손에 들린 지팡이가 뿜어내는 은은한 녹색빛 아래 반쯤 그늘진 얼굴 위로 처음 보는 낯선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양쪽 눈가를 따라 콧등에서부터 가느다란 선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형태였다.

  "달렌, 이건 나이가 어린 상대를 부르는 우리의 말이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데일리시를 찾아가. 날 위해서야, 브리아. 넌 날 위해 살아남을 거야, 알아들었어?

  떨리던 손길과 타는 듯이 뜨겁던 찰나의 접촉이 떠올랐다. 그 날 이후 이 순간을 기다리며 견뎌 왔다. 생전 처음 겪는 굶주림과 추위.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저택 밖의 엘프들의 삶. 그 모든 고난을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당신은 데일리시인가요?"

  그 말의 어디가 웃겼는 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고향은 데일스가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자꾸나. 펠라산이라고 부르렴, 달렌."

 

*

 

  "저는 오늘로 열여섯 살이에요."

  모닥불 옆에서 화살촉 끝을 다듬던 그녀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펠라산은 반쯤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슬쩍 돌아봤다.

  "아, 그랬었나? 생일 축하한다, 달렌."

  그녀의 스승은 때때로 자상했지만 대부분 무심했으므로 딱히 어떤 기대를 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도 감회가 새로운 느낌에 감상에 젖었을 뿐이었다.

  "데일리시는 성년이 되면 얼굴에 발라슬린을 새기는 거죠? 그거 아파요?"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이 안나는데."

  이번에도 건성인 대답에 브리알라는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제 너무나도 익숙해진 그의 얼굴 위 문신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청회색 안료를 처음 새겼을 때는 더 진한 색이었을까. 그려놓고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일부러 작은 무늬를 고르기도 하려나? 그녀의 스승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도 데일리시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클랜을 찾아가면 안되냐는 질문에도 요리조리 말을 돌리기 일수였고, 브리알라도 이제는 그가 간혹 던지는 단서 같은 흔적들로 어렴풋이 유추하는 게 전부였다.

  "각 무늬마다 신을 상징하는 거 맞죠? 당신 얼굴에 있는 무늬는 누구의 것이에요?"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의외로 펠라산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진지한 얼굴로대답했다.

  "미쌀. 모두의 어머니이자 수호자이신, 정의와 복수의 신."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고, 그 목소리는 다소 슬프게 들렸다. 브리알라는 마음 속에서 피어 오르던 질문들을 내리 누르고, 스승의 눈을 마주 봤다.

  "이 문신을 새김으로서, 나는 그 분이 수호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고, 그 분의 신념을 따르기로 맹세한거란다. 그렇기에, 발라슬린을 새긴다는 건 그저 단순한 성년의식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뭐, 요새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그는 다시 가벼운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브리알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지껏 배워왔던 엘프들의 신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펜하렐을 상징하는 발라슬린도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펠라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때때로, 이렇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웃곤 했다.

  "아니, 그는 배신의 상징이기에, 아무도 그를 감히 섬기려 하지 않지. 왜, 그가 마음에 드니?"

  브리알라는 아직 엘프들의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이기 좀 어려웠다. 그녀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서 창조주의 이름을 외쳤다. 최대한 너그럽게 생각한다 해도, 장막 너머에 갇혀 돌아올 수 없는 신들을 섬기는 게 큰 의미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저랑 비슷하잖아요. 어느 쪽 편에도 속하지 않고, 모략과 술수로 앞길을 헤쳐나가는 게."

  그러니, 그녀에게 발라슬린을 새긴다면, 아마도 펜하렐의 것이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던 브리알라는, 머리 위로 묵직하게 얹히는 스승의 손길에 눈을 돌렸다.

  "그래, 너와 잘 어울리지."

  그는 언제나처럼 모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만큼은 장성한 제자를 대하는 스승의 다정함이 담겨 있었기에, 브리알라는 따라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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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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