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퀴지터 합작에 제출했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커플이 탄생했다고 할 때, 으레 묻는 질문이 있다. '어떤 점이 좋아?' '언제부터 끌렸어?'같은 류의, 호기심을 채우면 그만인 가벼운 질문에서부터 '결혼 생각은 있어?' '그 남자 지참금은 있대?' 같은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질문까지.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스카이홀드 안에도 크고 작은 연애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이들의 연애사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그만이었기에 새로운 커플이 탄생하면 한동안은 이런 시덥잖은 질문으로 가십을 나누곤 했다.

 

"그래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

 

물론, 테다스를 구하기 위해 창조주가 보낸 그들의 구세주, 안드라스테의 전령이라 불리는 심문관 카라스 아다르에게 이렇게 서슴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건 배릭 테스라스 뿐이었다. 배릭의 개인 숙소는 두 사람, 한 명의 드워프와 한 명의 쿠나리를 수용하기엔 좀 비좁은 감이 있었고, 찻잔과 원고뭉치를 앞에 두고 앉은 배릭의 맞은 편에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한 자세로 앉은 카라스 아다르는 배릭의 심문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요. 특별히 어느 부분이라고 말하기엔...그녀는 심문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료이고...언제든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는 훌륭한 전사이고...또..."

 

"이봐, 누가 그런 고지식한 대답을 듣고 싶은 줄 알아?"

 

배릭이 던진 구겨진 원고뭉치가 아다르의 왼쪽 뿔에 맞고 튕겨나왔다. 타격감은 전혀 없는 그의 항의에 아다르는 괜시리 뿔끝을 긁적였다. 얼굴도 좀 붉어졌을 테지만 쿠나리의 튼튼한 피부 위로는 티가 잘 안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참, 애초에 당신이 말해달라고 졸라서 처음부터 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이 이걸 알고있다는 걸 카산드라가 알면 절 죽이려고 할 거라고요."

 

비밀을 털어놓기에 배릭 테스라스만큼 위험한 사람도, 그만큼 안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다르는 카산드라를 위한 꽃과 양초를 준비하고 시집을 고르는 과정부터 배릭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조언을 얻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꽃이라고 하면 가시 모양의 세장짜리 붉은 꽃잎을 가진 꽃은 독을 가졌으니 먹으면 안 된다, 부은 상처 위에는 잎 끝의 색이 연한 참엘프뿌리를 빻아서 붙이면 좋다, 이상으로 아는 게 없었고, 시라 하면 발로카스에 있을 적 허풍쟁이 자칭-시인 카리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외설스런 소설집에서 골라 읊어주는 것 외에 들어본 적도 없는 아다르였다. 처음 배릭에게 상담할 땐 그저 마음 가는 사람이 있다고 돌려말했지만, 이미 ‘검과 방패’ 사건 이후 카산드라와 아다르 사이의 미묘한 감정 교류를 눈치챈 배릭의 집요한 추궁을 피해 둘러대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가 구애하려는 대상이 카산드라임을 알게 된 배릭이 배를 잡고 웃어대는 바람에 거의 화를 낼 뻔도 했지만, 배릭과 카산드라의 복잡하고 깊은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법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배릭은 맹렬하게 폭소한 뒤 태도를 바꿔 사뭇 진지하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툭별한 꽃말을 가진 낭만적인 꽃들을 추천해준 것도, 심문회에 납품되는 고급 양초장인을 소개해준 것도, 아다르가 구해 온 시집 안에서 적절하고 매력적인, 다소 은근하기까지 한 사랑시를 골라준 것도 전부 배릭이었다. 물론 그 뒤에 홀로 숨어서 시를 외우다 들켜 한참 더 비웃음을 산 건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오, 이게 책으로 나온다면 그 땐 정말 추적자 양반이 날 죽이러 올 테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아무튼 좀 더 극적인 느낌이 필요하다고. 결정적으로 이거다, 하고 느낀 순간이 있을 거 아냐? 헤이븐에서 구하러 왔을 때? 아니면 서부진입로에서 탈진해서 쓰러진 자네를 들쳐메고 끌고 갔을 때? 아니, 이건 별로 로맨틱하지 않군."

 

아다르는 배릭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도 된다고 한 게 과연 잘한 결정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차피 심문회의 전설적인 업적도, 그 중심에 있던 심문회 구성원들의 무용담도,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 후대로 전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이야기의 중심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모두를 관찰한 배릭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 물론 아다르가 그의 ‘챔피언 이야기’의 열렬한 팬인 것도 결정에 한몫을 했다.

지금 배릭이 쓰고 있는 글은 심문회 이야기가 아닌 오로지 인퀴지터 아다르와 그의 일대기라고 했다. 이렇게 써 놓더라도 제대로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는 거라며, 배릭은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아다르를 방으로 불러 시시콜콜한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연애담을 들려주는 건 여간 민망하고 멋쩍은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봐도 아다르는 배릭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산드라의 어떤 점이 좋냐고? 그는 카산드라의 모든 점을 좋아했다. 이쯤 되면 거의 숭배에 가깝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강인한 성품과 굳건한 신념도, 그 안에서 드러나는 부드러운 유연함도, 다른 사람들에겐 잘 드러나지 않는 낭만적인 감성도, 무엇 하나 싫은 구석이 없었다. 사랑에 빠진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다르는 카산드라가 그에게 자꾸 의미없이 유혹하지 말라는 말을 할 때까지도, 그가 하고 있던 게 ‘유혹’이라는 걸 깨닫지조차 못했다. 쿠나리와 인간의 문화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다르 개인의 경험부족 탓이 컸다. 아다르는 살면서 그의 부모님과 발로카스 용병단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본 일이 없었다. 가벼운 친구 관계든, 진지하고 깊은 연인 관계든. 그저 끌리니 다가가고, 마음에 차는대로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 감정에 어떤 특별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카산드라가 정중하고 단호하게 그에게 선을 긋고 돌아선 순간에야, 이게 다른 친구들에게 느끼던 친밀감이나 호감과는 다른 감정이란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

 

긴 고민 끝에 내놓은 아다르의 대답에 배릭의 펜이 우뚝 멈췄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스스로 말해놓고 나서도 어이가 없어서 아다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 사람 취향 하고는...손목에 수갑 차고 목에는 칼이 들이밀어진 상황에서? 나도 비슷한 거 당해봤는데 그거 참 가슴 떨리는 일이긴 하지. 사랑으로 착각할만큼.”

“물론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첫만남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건 상황이 그럴만 했지 않습니까?”

 

킬킬거리는 배릭의 비웃음을 피해 아다르는 그의 말을 되받았다. 과히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챈트리 성당 폭발 후에 발견된 쿠나리 마법사라니. 카산드라가 그에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줬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아다르 본인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날이 선 터라 카산드라와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모두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신념을 따르는 강인한 의지. 개인의 사욕을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믿는 정의를 추구하는 고결한 성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쨌든, 그녀는 아름답잖아요."

 

"켁!"

 

이번에는 급격한 기침소리가 터져나왔다. 배릭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잔기침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는 듯한 반응에 되려 아다르가 이마를 찌푸렸다.

 

"왜요, 이상합니까? 드워프의 미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인간 기준으로 봐도 카산드라는 아름답잖아요. 아닙니까?"

 

얼굴까지 빨개져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배릭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다르의 확고한 표정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카산드라가 '그' 카산드라 펜타가스트이지만, 그와는 다소 악연으로 얽힌 사이이지만, 그 성품을 생각하면 차마 쉽게 나올만한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인간 여성의 기준으로 미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뻔뻔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눈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아다르의 태도라니.

 

"흠. 크흠. 그래. 얼굴, 그거 중요하지. 맞아, 인정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만났다 해도 얼굴은 눈에 들어올 수 있지. 아무렴."

 

얼굴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고 항변하기엔 변명이 궁했기에 아다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이 이야기가 배릭의 손을 거쳐 한 권의 책이 될 쯤에는 첫눈에 반한 아름다운 여기사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쿠나리 영웅의 로맨스 스토리가 돼있을 게 뻔했지만, 그에겐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할만한 근거도 없었다.

 

"아무튼 전 가봐야겠습니다. 몽틸리예 대사님이 저녁식사 전에 잠시 들러달라고 했어요."

 

어쩐지 이야기 할 때마다 비웃음만 잔뜩 사는 느낌이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가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게 썩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다르는 작은 의자에 구겨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문고리를 잡는 아다르의 뒤통수에 배릭이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충고를 흘리듯 던졌다.

 

"이봐, 인퀴지터. 방금 한 얘기,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 꼭 카산드라한테 말해주라고. 반응이 볼만할 거야."

 

*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최근 시작한 글쓰기에 열중해 있었다. 종이 위로 꼼작않고 고정된 시선과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펜 끝에는 검을 들고 적을 마주할 때와 같은 집중력이 서려있었다. 아다르는 그가 온 줄도 모르고 생각에 몰두해있는 카산드라의 옆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해질 무렵의 타는듯한 붉은 태양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역광을 드리웠다. 아다르는 하루 종일이라도 그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있었다.

 

"아, 카라스? 왔으면 부르지 그랬어. 무슨 용무라도?"

 

문가에 선 그를 발견한 카산드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번졌다. 최근 렐리아나가 카산드라의 그런 미소는 처음 봤다며 놀리던 일이 떠올랐다. 오직 그 한사람만에게만 보이는 미소. 아다르는 자신이 멍하니 바라보느라 대답도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니요. 용무는 아니고...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카산드라는 궁금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아다르는 그녀가 잉크병을 닫고, 깃펜을 내려놓고, 종이뭉치를 갈무리 해두고 그에게 다가와 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다르는 손을 뻗어 카산드라의 뺨을 감싸안았다. 다른 한 손은 가깝게 붙어 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가벼운 입맞춤이 오가고,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카산드라가 킥킥 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그래서, 할 말은?”

 

아다르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배릭의 말을 따라 카산드라를 찾아왔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껏 한 번도 이렇게 말한 적 없다는 게 이상할만큼, 그는 진심으로 카산드라를 경외하고 흠모했다. 아다르는 온기를 품은 부드러운 갈색눈을 마주한 채 그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카산드라.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다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붉게 물드는 카산드라의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

 

인퀴카산 달달한 이야기를 쓰려 했으나 내내 아다르와 배릭만 나왔습니다. 카산드라님 얼빠인 제 마음을 아다르에게 200% 투영했지만 카산드라님은 아름답고 존엄합니다. 반론은 받지 않습니다.

 

드에 합작 주소는 https://sleeplazycat.wixsite.com/dacollab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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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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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벨란에게 인퀴지터가 되고 나서 딱 하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각지에서 들여오는 고급 품질의 찻잎을 종류별로 마실 수 있다는 점을 꼽을 것이다. 데일리시 문화에도 차를 즐기는 문화는 있었지만 주로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허브잎을 이용한 종류 뿐이었다. 차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사치는 여기저기 떠도는 데일리시의 삶에 있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녀의 클랜은 솀렌 상인들과 교류가 있다보니 라벨란도 어릴 적 키퍼가 마시던 홍차를 몇번 얻어마신 적이 있었다. 사실 다소 떫고 쓴 맛이 강해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키퍼도 그 찻잎을 어떻게 우려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 라벨란은 죠세핀이나 비비엔이 권해오는 다양한 종류의 차와 그에 곁들이는 티푸드에 점차 적응해갔고, 이제는 하루의 시작을 따듯하게 준비된 티팟과 함께 하는 게 일상처럼 돼버렸다.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지위로 사람들에게 시중받는 걸 꺼리는 그녀가 부리는 얼마 안되는 특권이었다.

  솔라스가 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나 의외였다. 그는 차라리 찻잎의 종류나 차를 우리는 시간, 티팟이나 찻잔의 모양 등에 까다롭게 굴 지언정, 차 자체는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스의 개인 찬장에는 항상 두어가지 찻잎이 구비되어 있었다. 어찌 됐든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을 때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라벨란은 몇번 그와 이야기하러 갈 때 그녀가 좋아하는 찻잎을 골라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차를 우려낸 후 혹시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그의 기호품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럼 현실 세계에서의 당신 취미는 대체 뭐예요? 술도 안 마시고, 차도 안 마시고, 입맛도 까다롭고. 먹는 낙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이해가 안 가요."

  "말하신대로, 먹는 낙을 재미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외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편인 거지요. 그러는 당신도 여전히 체스에는 재미를 못 느끼지 않습니까, 베난?"

 

  지난번 솔라스에게 내리 세판을 지고 나서 체스판을 엎어버린 후 라벨란은 한동안 체스판만 보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초심자에게 한 수도 봐주지 않는 솔라스가 나쁜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솔라스에게 체스로 이겼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제는 곧잘 작전도 짜고, 그날그날 운에 따라 컬렌이나 불과는 호적수로 맞붙을 때도 있었지만, 라벨란은 솔직히 워테이블 밖에서까지 전략을 세우는데 몰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 그렇다 치죠. 오늘 밤에는 내가 좀 특별한 걸 가져와볼게요. 그건 어쩌면 마음에 들지도 몰라요."

  솔라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며 의문을 표했지만 라벨란은 씩 웃고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

 

  "따듯하게 데운 우유에, 크게 두 스푼..."

 

  부엌의 고용인들의 초조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언불의 투박한 글씨가 적힌 쪽지를 내려다보는 라벨란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한손은 우유가 담긴 냄비를 국자로 휘저으면서 몇번씩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지만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대목에서 라벨란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 주방장을 바라봤다.

 

  "적당량의 설탕은 얼마만큼이죠?"

  "그...글쎄요. 저희도 처음 보는 레시피라서...제가 시도해봐도 될까요, 각하?"

 

  대뜸 주방을 빌리겠다고 찾아든 인퀴지터의 방문은 사실 그리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스카이홀드의 고용인들은 처음 그들의 인퀴지터가 데일리시 엘프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낯설어했지만, 생각보다 털털하고 소탈한 그녀의 성품에 금세 적응했다. 언제나 그들이 만든 음식에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오고, 고용인 한명한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그녀의 서슴없는 태도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이따금 세라와 함께 남은 비스킷이 없나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 과자바구니를 남겨두기도 하고, 그녀의 다과를 준비하는 담당을 일부러 제비뽑기로 돌아가며 정하기도 한다는 건 인퀴지터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불 앞에 서서 처음 보는 레시피를 두고 골몰하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주방과 친숙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걸 짐작하게 했고, 그들은 자신들과 인퀴지터의 안전을 위해 다소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예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하려는 거니까. 소금을 잘못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

  "앗, 각하. 계속해서 젓지 않으면 겉에 막이 생깁니다! 계속 저으세요!"

 

  조금의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약간의 소음과 다수의 한숨이 섞인 부엌의 소란은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었고, 라벨란은 직접 나르겠다며 손수 쟁반 위에 얹은 찻주전자와 잔을 가지고 원형돔으로 향했다.

 

  "솔라스!'

 

  책에 몰두하고 있는 솔라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라벨란 말고는 없을 거라는 도리안의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솔라스는 라벨란의 목소리에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라벨란의 얼굴에서 손에 들린 쟁반으로 살짝 내려가고, 그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어서 오십시오, 베난. 아까 말한 특별한 게 그것입니까?"

 

  라벨란은 설렘이 섞인 싱글거리는 얼굴로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쟁반을 내려놓고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자 분명 차라고는 할 수 없는 탁한 검은색의 음료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솔라스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코코아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솔라스, 이게 뭔지 알아요?"

 

  솔라스의 반응에 눈이 동그래진 건 라벨란 쪽이었다. 이어 김빠진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언 불이 귀한 기호품을 구했다며 신나 보이길래 호기심에 함께 청했다가 처음 맛본 이국의 음료는 그녀에게 신세계를 선사했다. 오를레식 마시멜로를 첨가하면 더 완벽한 맛이 난다며 아쉬워하는 불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고 쌉싸름한 맛 위로 달콤함이 뒤섞인 그 맛은 그녀가 마셔본 어떤 음료와도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배릭이 어렵게 구해준 거라 많이는 나눠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불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코코아가루를 조금 얻어내어 손수 주방까지 가서 주방 고용인들을 귀찮게 한 것은, 솔라스가 처음 맛보는 음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예전에 여행 중에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퍼렐던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케 구하셨군요."

  "불이 배릭한테 부탁해서 특별히 구한 거래요. 그럼 무슨 맛인지도 알겠네요. 에이, 아쉽다."

 

  실망한 라벨란의 표정에 솔라스는 작게 웃으며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두 사람의 잔에 각각 음료를 따른 그는 자신 몫의 잔을 집어 들고 가볍게 향을 맡았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것이긴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얼마 안되는 음료니까요."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라벨란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은은한 향을 음미한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걸리는 걸 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그가 입가에 잔을 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모금 음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

  "...어, 이상해요? 아닌데, 내가 맛 봤을 땐 괜찮았는데?"

  "너무 달군요."

 

  '보통은 뜨거운 우유에 설탕을 첨가하지만, 원래는 설탕 없이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더군'하고 말하던 아이언 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단 게 맛있잖아?' 하며 아낌없이 설탕을 부어넣은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솔라스의 표정은 굳이 말하자면 불쾌함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예상하던 맛이 아니라는 거겠지.

 

  "내 취향은 단 쪽이니까...정말 설탕 없이 마실 수 있는 거였어요? 이상할 것 같은데..."

 

  솔라스는 더 마셔야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손에 든 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라 치겠다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걸까. 라벨란은 그녀의 잔을 들어 아직 따듯한 음료를 한모금 삼켰다. 맛있는데.

 

  "아직 불한테 뺏은 가루가 좀 더 있어요. 다음엔 한 번 설탕을 빼고 만들어볼게요. 내가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배려 감사합니다, 베난. 지나치게 달긴 하지만, 오랜만에 좋아하던 향을 맡는 건 나쁘지 않군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실없는 미소가 오갔다. 음료보다는 그녀의 시도를 높이 사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결국 그날의 도전은 라벨란이 두 사람 몫의 핫초코를 몽땅 비우는 걸로 끝이 났다.

 

==

 

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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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스패서 DLC 스포일러 포함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왼손의 고통을 억누르며 거울 너머로 들어간다. 거울 너머의 세상은 고요하다. 역동감 있는 동세 그대로 굳어진 쿠나리 석상들을 걸으면서 호흡을 고른다.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여지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당신들의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돌아가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비다쌀라의 분노에 찬 괴성, 그리고 순간의 번쩍임과 함께 그녀 또한 다른 동료들과 같이 돌로 굳어지고 만다. 라벨란은 정돈된 걸음으로 천천히 익숙한 뒷모습을 향해 다가간다. 곧이어 다시 온몸을 찢을 것 같은 격통이 찾아든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그녀를 향해 그가 돌아선다. 한번의 눈짓으로 불타는 균열을 잠재운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솔라스.”

  “이걸로 시간을 좀 더 벌겠지요.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라벨란은 그의 팔에 의지해 일어선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입 속에서 말을 고른다. 또 다시.

 

  “당신은 펜하렐이지요.”

 

  그의 눈이 잠시 커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잘 알아냈군요. 지나오는 길에 있던 단서들로...”

 

 

  라벨란은 차분하게, 단호하게 그 말을 끊어냈다.

 

  “아니요. 그게 아니예요.”

 

  눈시울이 뜨겁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라벨란은 그녀가 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솔라스. 펜하렐. 공포의 늑대. 당신은 에바누리스의 일원이었고, 알라산의 타락한 신들이 세상을 무너뜨리기 전 그들을 막으려 했던 유일한 진짜 신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가져버린 이 세상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준비했지요. 심문회에 합류하기 전, 코리피우스에게 오브를 넘겨줬을 때부터.”

 

  그녀를 부축하던 팔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결코 알 리 없는 진실을 늘어놓는 사이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베난, 어떻게...”

 

 라벨란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독한 기시감에 뼛속깊이 피로감이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언제부터 세는 걸 포기했는 지도. 처음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땐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을, 혹은 나를, 우리의 미래를, 주어진 선택지를. 하지만 아무 것도 소용 없더군요. 나의 어떤 시도도, 어떤 선택도.”

 

  잠깐 사이에 솔라스의 얼굴 위로 깨달음이 찾아든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단편적이고 축약된 라벨란의 말에서도 금세 진실을 찾아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차라리 심문회를 떠나버렸더라면, 아니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은 가치를 찾아냈더라면...그 어떤 가정도 소용 없었어요. 언제나 마지막은 이 곳. 엘루비앙 너머에 마주 선 당신과 나, 두 사람.”

 

  솔라스의 얼굴에 맺히는 비통한 절망감조차도, 라벨란에겐 낯설지가 않다. 라벨란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 솔라스와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반복일 뿐이다.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한없이 반복되는 절망뿐인 그들의 론도.

 

  “하지만 솔라스, 그 어떤 사실보다도 절망적인 게 뭔지 알아요?”

 

  라벨란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대답을 읽는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를 리가 없겠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간을 돌이켜 몇 번을 거듭해 당신을 만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번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어요.”

 

  아마 그녀의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했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슬슬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신음 한번 내지 않고, 균열이 맺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등 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베난.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서려는 솔라스에게, 라벨란은 타오르는 녹색빛 왼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솔라스, 이제 나에게 더 이상 남은 선택지는 없어요. 나는 너무 지쳤거든요. 이제는 내가 어떤 결말을 원했는 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그걸 떠올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요.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세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카로운 단검이 라벨란의 가슴 위를 찔렀다. 절망 섞인 솔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무너져내리는 라벨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다. 두번 다시 눈 뜨지 않을 것이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좌절도, 후회도, 절망도, 사랑조차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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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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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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