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드럼 칠 줄 알아?"

 

  호비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실도피하듯 얼떨결에 발을 들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그웬은 생각과 다른 서먹한 분위기에 애를 먹었다. 막연하게 마일즈의 지구에서 만났던 다른 거미 친구들처럼 서로의 외로움과 고충을 이해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를 보는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시선은 뭔가 불편했다. 그웬도 딱히 스스럼 없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지만,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못 볼 꼴을 본 것마냥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걸 깨닫자 그웬도 뭔가 잘못 됐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네 이름이 주는 임팩트가 좀 있어서 말이야."

 

  라일라에게 들은 다른 우주의 수많은 '그웬 스테이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으나, 그웬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뛰게 억울한 일이었다. 지들은 죄다 피터 파커면서! 누가 누굴 보고 피할 상황인데, 지금?

  자신 내면의 소용돌이를 돌보기도 벅찬 마당에 넘쳐나는 피터 파커들의 정신적 고통까지 고려해줄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웬은 차라리 외톨이로 머무는 쪽을 택했다. 미겔은 당장 임무에 나서기엔 그가 너무 미숙하다며 쉽게 일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그웬은 제스의 지구에서 가끔 묵을 때 말고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주어진 임시숙소에서 최대한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홀로 방에만 있다 보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품안에서 눈을 감던 피터의 마지막 숨결. 포탈을 넘기 전 그를 보던 아버지의 눈빛. 아버지에게 애원하던 순간의 절망감. 머릿속을 뒤덮는 생각 속에서 잠들면 꿈에서마저 악몽이 괴롭혔다.

  드럼이라도 칠 수 있으면 나을 텐데. 도무지 안에만 있어선 안될 것 같아서 햇볕이라도 쬐기 위해 실내정원 분수가에 앉은 그웬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들겼다. 호비가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드럼 칠 줄 알아?"

  "뭐?"

  "드럼, 칠 줄 아냐고."

 

  강렬한 생김새의 - 이곳에 와서 천양각색의 수트 변주를 봐온 그웬 기준으로도 - 거미였다. 모히칸마냥 정수리를 따라 삐죽 솟은 파이크와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정신산만한 수트 무늬. 그리고 등에 멘 건...기타? 수트 위에 기타를 메고 있어?

 

  "응...밴드는 없지만."

 

  없다고 해야겠지? MJ도 이제는 그웬이 지긋지긋해졌을 테니까. 그웬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얼굴도 안 비친 지 한참이니 지금쯤 새 드러머를 구했을 터였다.

 

  "잘됐네. 딱 좋은 타이밍이야. 가자."

 

  타이밍? 뭐가? 하고 되묻기도 전에, 느닷없이 포털을 연 거미가 그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 얼떨결에 손을 붙잡자마자 열린 포털 속으로 웹슈터를 쏘더니 그대로 그웬과 함께 몸을 던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슬슬 익숙해져 가는 강렬한 속도감을 품에 안고 포탈 밖으로 쏘아져 나가자, 그곳은 무채색의 낯선 도시였다. 그웬을 데려온 거미와 똑 닮은, 흑백 신문을 얼기설기 오려 붙인 것 같은 낡고 음울한 도시.

 

  "그런 색으로는 좀 눈에 띌 테니까 일단 대충 걸쳐. 좀 크긴 할 텐데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이 선 곳은 희미한 네온사인 불빛이 전부인 어두침침한 골목길이었고, 거미는 여긴 어딘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슥슥 걸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스포츠백에서 후드집업을 꺼내 던졌다.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살피다가 옷을 받아든 그웬이 그제야 말할 기회를 포착했다.

 

  "잠깐만, 너 누구야? 여긴 무슨 지구고?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데?"

 

  가방에서 꺼낸 데님재킷과 청바지로 갈아입고 마스크를 벗은 거미가 그웬을 돌아봤다. 마스크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 건가 싶게 풍성한 레게머리가 퐁 튀어나오는 모양에 그웬은 잠깐 벙쪄서 또 말을 잃었다. 몇 갠지 셀 수도 없는 피어싱에도 묻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 나이는 그웬보다 한두 살 많을 듯 보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법 무서워 보일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웬을 보는 눈빛은 묘하게 따듯했다.

 

  "호비 브라운. 스파이더 펑크라고도 부르는데 선호하는 건 이름 쪽이고. 여기는 지구...뭐더라, 138이던가. 일단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주섬주섬 후드를 걸치고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호비를 따라가며 그웬은 이 상황에 화를 내야할지 당황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이렇게? 스파이더맨으로 위장한 빌런 같은 건 아니겠지, 설마? 스파이더 센스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거니 하며 호비가 안내하는 낡은 철문을 따라 들어서자, 그웬도 익히 아는 쿵쿵거리는 앰프의 울림이 느껴졌다. 공연장이잖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호비! 공연 30분 전인데 이제 오는 게 어딨어?!"

  "드러머 구하러 간댔잖아. 구해왔어."

  "뭐, 진짜? 잘했어! 네가 최고야!"

 

  짧게 깎은 머리를 하늘색으로 탈색한 그웬 또래의 청년은 화내려던 기세를 금세 수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웬을 바라봤다.

 

  "친구, 이름이 뭐야? 시간 얼마 없는데 호흡만 잠깐 맞춰볼래? 셋팅은 다 돼있어!"

  "어, 난..."

  "그웬디. 이쪽은 그웬디야. 가자, 곧 시작이야."

 

  그완다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웬디... 그웬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비를 돌아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 해보이더니 그웬의 등뒤를 툭툭 밀었다. 공연? 지금? 여기서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휩쓸린 것은 여상스럽게 그를 이끄는 호비의 태도였을까, 아니면 간만에 접한 공연장의 두근거리는 울림 탓이었을까. 그 뒤는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합을 맞춰보기 위해 셋리스트를 빠르게 훑고, 속사포처럼 밴드 멤버들을 하나씩 소개 받고, 공연 시간이라는 외침에 부리나케 자리를 잡고 긴장할 새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멤버들은 급하게 합류한 그웬의 흐름에 쉽게 맞춰줄 만큼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다. 호비는 무대에 서기 전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야말로 스파이더 펑크, 라는 걸까. 대체 뭐하는 우주길래 스파이더맨이 수트 차림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건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고요해진 공연장 한가운데, 미뤄놨던 긴장감이 한 순간 몰려드는 느낌에 그웬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때, 재밌었지?"

 

  그새 다시 마스크를 벗은 호비가 그웬에게 다가왔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무대 위의 그는 쉴 새 없이 날뛰며 환호를 유도하고 보컬과 함께 마이크도 잡고 -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다 - 열정적으로 공연을 주도했다. 그래놓고는 공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상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그웬에게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다. 그웬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냅다 자신을 끌고 온 이 배짱 좋은 거미의 독단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대체 뭐야? 누가 공연 30분 전에 처음 보는 드러머를 데려와서 무대에 세워? 내 실력이 어떨 줄 알고?"

  "잘했으니 됐지? 펑크는 원래 그런 거야. 네가 잘 못했으면...뭐 토마토나 몇 개 맞고 말았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웬이 제대로 못했을 거란 가정은 전혀 안하는 듯한 얼굴에 그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그웬은 간만에 드럼스틱을 잡고 난 뒤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한동안 복잡했던 머리도 드럼을 치는 동안 한결 정리됐는지, 정말 오랜만에 잡념 없이 머리가 맑았다.

 

  "공연 대타 구하려고 본부에 왔던 거야?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어, 뭐. 나는 거기 잘 안 가니까. 어쩌다 타이밍이 맞았나 보네."

 

  값어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공연장 밖으로 나서자 어느 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호비의 우주는, 그가 사는 동네는 그웬의 우주와 참 달랐다. 많은 게 낡아 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을 것 같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우주에 와본 건 이걸로 네 번째인가. 마일즈, 미겔, 제스의 우주, 그리고 이곳, 지구-138. 임무 없이 다른 우주에 가 있으면 캐논의 위험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미겔에게 듣긴 했으나 그웬은 모처럼 방문한 다른 우주가 신기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꼭 미겔을 닮은 차갑고 낯선 누에바 요크에는...

 

  "늦은 김에 묵고 가. 돌아가 봤자 재밌는 일도 없잖아. 불쌍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한 피터 뭐시기들만 드글거리는 곳에."

 

  꼭 그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호비는 툭 하고 별스럽지 않은 제안을 던졌다. 질색하는 호비의 표정에 그웬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냅다 이렇게 초대하는 거야? 재워줄 곳은 있고?"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닌데, 묵어가는 애들이 넘쳐나서 손님 맞을 구색은 갖춰놨거든. 급하게 갈 이유도 따로 없잖아?"

 

  분명 오늘 처음 만난 건데도, 호비는 그웬을 익히 안다는 양 말을 던졌다. 섣부른 오지랖에 불쾌감이 들 법도 했으나, 그웬은 어쩐지 누그러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이런 기분으로 그런 곳에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난데 없이 나타나 엉겁결에 기분전환을 시켜준 호비란 거미한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기에.

  그것이 그웬 스테이시와 호비 브라운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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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반추

etc. 2021. 2. 21. 05:32

  "...사적인 감정은 없어."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머릿 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허리춤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의 간격이 결과를 갈라놓았다.

 

  탕-

 

  총성은 거의 하나였지만, 총알의 궤적은 달랐다. 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타는 것 같은 감각에 뒤로 나동그라져 몸을 웅크린 채로, 벨은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애들러를 올려다 봤다. 그의 총알은 애들러의 왼쪽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왼쪽 얼굴 위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실금 하나를 만들어 그 위로 피가 주륵 타고 흘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벨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더듬더듬 흙바닥을 짚으며 뒤로 향하던 그의 등이 나무등치에 닿았다. 허나, 그가 예상한 다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들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버겁게 내쉬는 숨 사이로 탄식 같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총알이 빗맞은 거라면 아마도 왼쪽 어깨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총알은 정확히 노린 것마냥, 벨의 오른 어깨를 맞췄다.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오른팔의 감각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애들러가 빗맞췄을 가능성은 없었다.

 

  "너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그 정도는 알겠지."

 

  마치 지령을 내릴 때와 비슷한, 딱딱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나 정말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벨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그 말을 듣고 있지도 않으리라. 그는 왜-.

 

  "최대한 조용히 숨어 살아. 그 이상은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출혈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벨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할 것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수고했다, 벨."

 

  그 말을 끝으로, 벨은 의식을 잃었다.

 

*

 

  러셀 애들러. CIA 특수활동부의 정예 비밀요원. '페르세우스'를 위시한 러시아의 대규모 핵공격을 막아낸 구국의, 세계의 영웅. 그가 해낸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위기를 막아낸 건지 모르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일의 일부였기에, 그는 딱히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임무와, 국가에 닥칠 위협을 차단하는 일, 그 뿐이었다.

 

  솔로베츠키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와 꼬박 일주일에 걸쳐서 결과 보고와 잡다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애들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실상 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장소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현관키를 가방 밑바닥에서 끄집어내 열쇠구멍에 꽂아 넣으면서 그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어두컴컴한 거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주머니의 담배갑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천장으로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제서야 나른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이대로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씻고 끼니를 챙기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달리 없었다.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이,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잔상처럼 남은 이미지가 맴돌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던 바다 냄새. 신음 섞인 한숨 소리. 영영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을 것 같던 무기질의 눈동자에 맺혀있던-.

 

  "...멍청하긴."

 

*

 

  애들러가 변화를 눈치챈 것은 두 달 가량 정도 지나서였다. 집을 자주 비운다고는 하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침입을 눈치챌 수 있는 장치를 몇 가지 마련해 두었다. 그의 방문자는 보란듯이 그 모든 장치에 다녀간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집안을 살폈을 때 무언가 사라지거나 헤집은 흔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 설치된 도청장치나 카메라 등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지만 그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다. 애들러는 만약을 대비해 요원 몇몇에게 집을 감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일주일 간 아무 흔적도 없어 그마저도 해제해야 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방문자는 귀신 같이 애들러가 없는 날만을 찾아서 다녀갔다.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이란 창문에 다 이중잠금장치를 설치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일주일에 세네 번일 때도 있었다. 애들러가 집을 오래 비우는 때를 아는 건지, 심지어는 그가 없는 사이 먹고 잔 흔적마저 미세하게 남아있기도 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암살이라면 그렇게 숨어들 실력으로 이미 시도를 했을 것이고, 그가 가진 자료나 정보가 목적이었다면 무언가 훔치려는 시도가 있었을 법 했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것은, 애들러가 점차 그 상황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름없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마치 아는 것만 같았다. 딱히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방문자를 잡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마치 생활패턴이 다른 동거인을 둔 것 마냥, 그는 방문자와의 이상한 공생 관계에 적응해갔다.

 

  그래서 어느 밤,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때 거실에 앉아있는 그를 마주했을 때에도, 애들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애들러."

  "안녕, 벨."

 

  반 년만이었다. 애들러는 가장 먼저 가죽 자켓에 청바지를 차려입은 벨의 차림새에서 무기가 숨겨져 있을 만한 위치를 가늠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여위어 보였다. 머리는 그 사이 길어져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신 듯, 테이블 위에는 빈 캔이 두엇 놓여있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겠군. 눈 깜빡할 사이 빠르게 분석을 마친 애들러는 습관대로 현관에 열쇠를 걸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벨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지 그래? 맥주 갖다줄까?"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군."

 

  애들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고, 벨은 말한대로 맥주를 꺼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애들러는 어째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긴장은 별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듯한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맥주를 가져온 벨이 캔을 따서 내밀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받아서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벨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으면 더 일찍 했겠지. 와서 잠도 자고 간 것 같던데, 월세도 좀 같이 내지 그래?"

  "아, 다음 주에 주급 받으면 생각해 볼게."

 

  주급이라니,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길이 없는 실없는 이야기였다. 애들러는 머릿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을 골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든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라든가, 혹은...

 

  "당신을 죽이러 온 거 맞아."

 

  그의 생각을 끊고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러는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맥주에 독이라도 넣었나, 아니면 이제라도 총을 뽑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경각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켰다. 벨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냥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에 든 맥주캔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사실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눈치챘었나 모르겠네. 아무튼, 기왕 끝내는 거 얼굴이나 한번 더 볼까 해서 기다렸어. 그랬는데..."

 

  벨은 말을 잇지 않고 그제야 애들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항상 벨의 눈빛이 파충류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 때도 좀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는 차가운 무기질의 눈. 나고 자란 조국의 영향인지, 세뇌 과정에서 무언가 망가진 탓인지, 애들러는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벨의 눈빛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인간다워졌다고 해야할까.

 

  "관둘래. 어차피 당신은 신경 안 쓸 것 같으니까. 내가 죽이려 들든, 말든."

  "...아니, 죽이려 들면 신경 쓰겠지, 나도."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답하고 나자, 이 모든 대화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주한 벨 역시 비슷한 표정인 걸 발견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벨마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별 뜻도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주보고 한참 웃어댔다. 그리고 벨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총으로 손이 향한 애들러는, 후련한 표정의 벨을 보고 다시 자세를 풀었다.

 

  "...갈게.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

 

  벨이 현관으로 향하고, 문을 열고 반쯤 나설 때까지도, 애들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벨이 문을 닫기 직전, 그제서야 애들러는 그가 해야할 마지막 인사를 던질 수 있었다.

 

  "잘가라, 벨."

 

  벨은 말없이 문을 닫았고, 애들러는 그제서야, 정말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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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일상

etc. 2021. 2. 21. 05:10

  CIA라고 하면 으레들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두침침하고 은밀한 느낌의 비밀 본부. 온갖 암호화된 서류와 컴퓨터로 차있는 사무실. 시종일관 진지한 인상으로 작전 회의에 집중한 요원들. 실제는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24/7로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이기에 때가 되면 끼니도 챙겨 먹고 한숨 돌리면서 쉴 시간이 필요했다.

 

  "또 나야?"

 

  제비뽑기를 뽑아 든 벨이 끙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공평하게 숫자대로 종이를 넣고 뽑는 건데도, 유달리 벨은 식사 배달 당번으로 자주 뽑혔다. '나 모르게 뭔가 표시라도 해두는 거야, 다들?' 하고 물어도 실없는 소리 말라며 재빠르게 자기 몫의 뽑기를 집어들고 멀어지는 팀원들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을 텐데, 길게 물고 늘어져 봐야 이런 걸 알아채는 것 또한 스파이의 자질이라며 비웃을 우즈를 생각하며 벨은 얌전히 자기 역할을 따르기로 했다. 그 날의 메뉴는 중식이었다. 사실 굳이 '그날의'라고 꼽을 것도 없이, 그들의 메뉴는 주로 터키식 도너, 중식당, 얄팍한 이탈리아 피자 사이에서 로테이션을 도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그마저도 사치일만큼 바빠서 마른 빵쪼가리에 육포나 햄 따위를 씹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모두가 고른 메뉴가 적힌 쪽지를 들고 밖으로 나서기 위해 자켓을 챙겨입는데 따라 와서 자신의 가죽 자켓을 주워 입는 애들러가 눈에 들어왔다.

 

  "같이 가게?"

  "담배 떨어졌다."

  "그럼 나가는 김에 당신이 가져오든가."

  "까불지 마라, 꼬마야."

 

  담배까지 사오라며 심부름 목록에 더 얹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지만, 웬일인지 애들러는 군말없이 문을 나섰다.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벨은 오토바이 열쇠를 애들러에게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애들러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였다.

 

  "빗길 운전인데 더 잘하시는 분이 해야죠."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오토바이에 올라탄 애들러의 뒷자리에 나란히 자리잡은 벨은 가죽자켓 안쪽으로 애들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티셔츠 너머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애들러는 손이 차다 어쩌다 하며 뭐라 궁시렁거리고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가장 가까운 시내까지도 오토바이로 20분은 달려야했다.

 

  "꽉 잡아라."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애들러는 냅다 급발진했다. 벨은 확 뒤로 쏠리는 몸을 끌어당겨 애들러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들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뒤를 따랐지만, 입밖으로 굳이 내진 않았다.

 

*

 

  쪽지에 따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애들러는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두침침한 조명의 식당 안에는 좁은 주방 안에서 큰 소리로 명령을 주고받는 종업원들의 목소리와, 촘촘히 들어앉은 테이블에 두세 명씩 자리한 몇 무리의 손님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했다. 푸른 드래곤. 아시아 식당들은 어째서 그렇게 이름들이 다 거창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벨은 습관처럼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곁눈질 했다. 이 식당이 팀의 단골인 이유는 손님 대부분이 아시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안, 혹은 동유럽계 이민자들. 문득 강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생강 냄새에 벨은 코를 찡그렸다. 한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어디선가 먹었었는데...

 

  "아직이냐?"

 

  문을 열고 들어선 애들러가 문가 테이블에 자리잡은 벨의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를 툭툭 터는 손길에 테이블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벨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긋이 눌렀다.

 

  "뭐야, 괜찮아?"

  "어, 아무 것도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그나저나 애들러, 거기 이름이 뭐였지?"

  "응?"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눈앞에 빛이 명멸했다. 삐-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흡 하는 심호흡과 함께 벨은 다시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 파리 안전가옥 건물 건너편에 있던 중식당 말이야.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팔았는데..."

  "아아, 거기, 그래, 그거 맛있었는데 말이야."

  "특이하게, 무슨 꽃 이름이었어, 목...목..."

 

  다시 두통이 확 밀려들어 눈앞이 하얘졌다. 애들러는 눈을 질끈 감은 벨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시야가 확 또렷해졌다. 이명도 사라지고, 두통도 잦아들었다.

 

  "목련, 맞아?"

  "어, 그런 이름이었지. 맞아."

 

  애들러는 잠시 말없이 벨을 바라봤다. 그의 선글라스는 눈 부위가 유달리 까매 마주 보고 있어도 좀처럼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벨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음식이 나왔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배고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벨은 금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걸쳐둔 자켓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고, 청소당번을 정할 겸 벌인 주사위놀이 판에서 이번에는 불운을 피해 간 벨은 꼴지가 돼버린 라자르에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준 뒤, 회의 테이블에 걸터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애들러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쉬나? 다음 작전은 일주일 뒤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느슨하지. 그보다 너...목련이랬나?"

 

  벨은 애들러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련? 꽃 말야? 그게 뭐?"

 

  생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양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의 표정에 애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들러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손에 쥔 담뱃대에서 길게 탄 끄트머리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아니, 됐다. 너야말로 가서 쉬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 하고 한숨을 흘린 벨은 고개를 내젓고는 돌아섰다. 그가 이상하게 구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었다. 의자에 둘러 앉아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던 벨이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애들러는 늘 잠가두곤 하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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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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