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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그의 장례식은 영웅의 장례식이었다.

  테다스의 그 어느 엘프도 개러헬,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만큼 웅장한 의식 속에 잠든 이는 없을 것이다. 황량한 테다스의 겨울 대지를 가로질러 왕과 황제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려 줄을 이었고, 혹자는 왕자나 마지스터를 대신 보내기도 했다. 제단을 위한 향료와 귀한 나무들도 쏟아져 들어왔다. 마침내 당일, 맑고 청량한 차가운 스탁헤이븐의 야외에는 세상의 내노라 하는 명사들 전부가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표시하려 모여든 든 보였다.

  그들은 그의 시신을 닦아, 눈처럼 하얀 아마포로 감싸 제단 위에 눕혀놓았다. 마도사와 템플러, 회색 감시자, 개러헬의 전우들 모두 엄숙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돌의 사생아들과 주인없는 자들, 무너진 탑의 일원들 역시 그들을 추방한 다른 모든 이들과 동등하게 자리했다. 물론 루비 드레이크 역시 은빛 갑옷을 입고 애도의 검은 면포를 두른 아마디스와 함께 자리했다.

  굽은꼬리는 제단 위 주인의 발치에 몸을 말고 누워있었다. 털을 고르게 빗고 얼룩무늬 섞인 하얀 날개로 심한 상처를 덮어서 가려놓아, 녀석은 그저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털이 무성한 왼쪽 굽은 귀가 곧게 위로 뻗어있어, 다시 들을 일 없는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값비싼 향유와 단 향의 약재가 마른 장작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죽은 영웅을 위한 웅장한 흑요석 제단 아래, 악마의 군주의 뿔 중 가장 큰 한 쌍이 전리품 삼아 놓여있었다. 이세야는 그것들이 장작에 불을 붙이기 전 치워졌다가 개러헬의 무기와 갑옷과 함께 와이스하웁트로 보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감시자들은 동생을 위한 기념관을 만들 것이다. 용기와 희생과 그의 이름 위에 붙일 그 모든 가치들을 기리는 성소로.

  로브를 걸친 성가대가 제단 주위로 둘러서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회색 머리의 챈트리 주교가 푸른 연기가 나는 향로를 기울이며 성구를 읊었다. 이세야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보고 있지 않았고, 귀로 들으면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홀로 애도하는 중이었다. 이 날 모인 이들이 아무리 예를 다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들, 테다스는 지금 슬픔이 아닌 기쁨과 환희를 누리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가 죽었다. 네 번째 대재앙이 끝났다. 긴 악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앞엔 평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동생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아마디스조차도, 눈물을 뒤로 한 채 앞으로 전진해야 할 자신의 책무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스탁헤이븐과 루비 드레이크가 그를 필요로 했고, 그의 그리폰 스모크는 굽은꼬리와의 사이에서 생긴 알을 배고 있었다. 그의 앞날에는 광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세야에겐 그렇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의 죽음은 그 엘프의 육체를 잠식하는 타락을 늦추는데 조금도 도움되지 않았다. 마지막 머리 한 올까지도 다 빠져버렸고, 오염의 회색 얼룩은 머리통을 뒤덮었다. 머릿 속을 채우던 광기의 속삭임은 훨씬 미약하고 흐려져, 다급한 외침 같던 예전에 비하면 먼 꿈결에서 들리는 웅얼거림 같았지만...여전히 그곳에서, 조용한 순간이면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머지 않아 그는 콜링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는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그 생각은, 이제는 차라리 반갑기까지 했다. 형용할 수 없이 무거웠던 그 짐을 내려놓고, 마침내 쉴 기회가 오는 것이다.

  멀지 않았어. 이세야는 성화 봉송자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과, 붉은 불꽃이 동생을 감싸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멀지 않았어.

 

* * *

 

  한 달이 지나자, 그 안식의 약속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멀어졌다.

  이세야는 그 자신의 유령과의 싸움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길 그 무엇보다도 원했으나, 지금 그는 레바스를 타고 와이스하웁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폰 때문이었다. 대재앙이 끝난 뒤, 녀석들은 기묘하게 굴고 있었고, 감시자들 중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상현상은 헤인 요새에서 머물던 녀석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 수석 감시자는 이세야를 안더펠스로 불러들였다. 콜링을 위해 떠나기 전, 그 엘프가 그리폰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길 바라며.

  이세야는 자신이 달리 도와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문제가 뭐였던 간에, 헤인 요새의 개체들로부터 이미 널리 퍼져나간지 오래였다. 게다가 레바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그리폰들은 이제 타락이 급속도로 진행된 그를 회색감시자보다는 어둠의 피조물에 가깝게 여겨 경계하는 편이었다.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었고, 사실 그 영광스런 야수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에, 그는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와이스하웁트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한 때 그리폰이었던 것들의 음울한 모사품이었다.

  둥지는 거의 비어있었다. 어느 정도는 잔인했던 지난 몇 년 간의 손실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회색 감시자들이 여전히 테다스 전역에 흩어져, 갓 피어오르는 평화의 시기 앞에 각 국가와 새 협정을 맺으러 다니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와이스하웁트의 산 둥지가 이렇게 많이 비어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둥지지기에게 들은 그 이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놈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남자가 설명했다. 그는 둔세인이란 이름의, 작달막하고 옹골진 체구와 그을린 갈색 피부를 가진 사내였고, 얼굴엔 곰보자국과 미소 위를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있었지만, 성품만은 유순한 편이었다. 그는 젊은 신병 시절, 배고픈 그리폰의 부리에 왼손 손가락 세 개와 엄지의 일부를 잃고도 손으로 직접 먹이를 줘가며 그 녀석을 회복시켰다고 했다. 삽십 년도 더 된 그 사고 이후로도, 이 날개달린 피조물을 향한 그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 했다. 둔세인은 일평생을 와이스하웁트의 그리폰을 돌보며 살아왔고, 이세야는 그의 얼굴이 이토록 슬퍼보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세야는 물었다. 엘프는 후드를 이마까지 눌러쓰고 검푸른색 스카프로 얼굴 아래쪽을 가리고 있었다. 흉물을 가리려하는 나병 환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실이 오히려 더 끔찍했고, 그는 오랜 친구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이세야는 마지막 품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따라오십시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세야를 데리고 관리가 안된 계단을 따라 올라갔고,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은빛 겨울서리가 덧씌워졌다. 발 아래 사락사락 밟히는 눈을 딛고 높은 성벽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자, 그리폰들이 식사를 하는 마당 아래 감시자들이 염소나 양을 던져놓는 돌로 된 넓은 그릇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염소나 산양은 들어있지 않은데도, 연회색 돌바닥 위에 갓 흘린 듯한 김이 올라오는 선혈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하얗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뜬 이세야는, 한 마리 그리폰이 마당 주위로 뱅뱅 돌며 다른 한 마리를 쫓는 모습에 둘이 놀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 다른 한 마리의 피가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싸우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둔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무력한 태도로 답했다. "숫놈들이야 때때로 발정기가 온 암놈이 근처에 있을 때 싸운다곤 하지만, 최근 몇 주간 둥지엔 암놈이라곤 없었습니다. 새끼를 근처에 둔 어미들도 때때로 싸우곤 하지만, 그 역시 없던지가 꽤 됐고요. 허기 때문에 싸운다기엔 음식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놈들은 보통 이곳이 공동구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놈들이 서로와 싸워대고, 그 정도도 매일같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상대로 싸우는데 그쳤는데, 한 2주 전부턴 사람들까지 공격하더군요. 부상이나 사나움 때문에 잠재워야 한 개체가 열둘은 되는 것 같습니다."

  등 뒤를 쓸어내리는 차가운 손가락처럼, 어떤 불안감이 이세야의 머릿 속을 스쳤다. "한 녀석만 관찰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녀석을 원하십니까?"

  "누구든 괜찮습니다." 그는 잠깐 멈췄다가, 생각을 다시 했다. "아니, 잠시만요. 저들이 전부 싸우고 있는 거라면...헤인 요새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녀석이 좋겠군요. 부탁합니다."

  "이쪽으로." 둔세인은 그를 데리고 담 안쪽의 둥지와 밀짚으로 덮인 복도를 지나, 남쪽으로 창이 뚫린 와이스하웁트의 아프거나, 다치거나, 나이 든 개체들을 모아두는 요양 둥지로 데려갔다. 회색 감시자들은 새끼들 역시 이곳에 모아두었지만, 지금 그 둥지들엔 낡은 얼룩과 거미줄만이 무성했다.

  "터스크는 우리 그리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녀석입니다." 둔세인은 작은 나무문 앞에 멈춰서서 설명했다. 이세야는 눈높이에 뚫려있는 창구멍을 통해 다른 둥지와 비슷하게 생긴 내부를 확인했다. 물양동이, 밀짚과 산양가죽을 깐 작은 둥우리, 그리고 산맥 방향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햇살이 그대로 내리쬐는 넓다란 바위 하나.

  아주 늙은 그리폰 한 마리가 그 돌 위에 누워 햇살 아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녀석은 늙어서 발과 꼬리뭉치 끄트머리의 털빛이 눈처럼 하얗게 세었고, 부리주변과 머리 뒤쪽의 깃털도 마찬가지였다. 터스크는 날개가 너덜너덜했고, 꼬리 역시 비루먹어 볼품 없었다. 놈은 귀가 아예 먹었거나, 거의 안 들리는 듯 했다. 이세야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던 녀석이, 조심스레 옆구리에 닿은 그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쉰 울음을 내질렀다. 백내장으로 탁한 녀석의 두 눈은 이 가엾은 짐승이 안전히 날 수나 있을지, 혹은 날 수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웠다.

  놈은 단순히 늙은 게 아니라, 아파보였다. 콧구멍 주위와 부리 가장자리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맥박은 지나치게 빠른 와중에도 그륵거리는 숨소리는 한없이 느렸다.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잔기침이 섞여나왔다.

  무엇보다 거슬린 점은 짧게 깎인 네 다리 안쪽의 털과 깃털 위, 핥은 흔적인지 농포가 여기저기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부풀어오른 속살 표면이 꺼림칙하게 반들거렸고, 가까이 다가선 이세야는 늙은 그리폰의 피부 아래로 보랏빛 잉크처럼 얼룩이 번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의 피부 같았다. 마치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터스크?" 그는 작게 속삭였지만, 늙은 그리폰은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둔세인에게 등을 돌린 채로, 이세야는 손가락 끝을 찔러 피 한 방울을 내고 터스크의 발에도 똑같이 했다. 이 노쇠한 녀석이 배식장에서 싸우던 두 그리폰만한 분노를 품고 있을 거라 믿기는 힘들었지만...어느 쪽이든 그의 주문이면 진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영계의 자락을 붙들고 피와 마법의 흐름을 따라 터스크의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거친 붉은색 증오가 그를 맞이했다. 늙은 그리폰의 정신은 핏빛 분노의 바다 같았고, 그저 너무 늙고 쇠약해 행동으로 그 증오를 뿜어내지 못했을 뿐, 터스크의 머릿 속을 요동치는 감정에선 할 수만 있다면 모두를 죽여버리고 말았을 거라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감시자들과, 모든 그리폰들과, 마침내는 그 자신마저도. 놈은 근육을 따라 맥박치는 이형의 질병이 자신의 뼛속까지 파고든 걸 느끼고 있었고 - 감시자들에게도, 다른 그리폰에게도, 그가 파괴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느꼈다. 진저리쳐지는 혐오감이 놈을 소진시켰다.

  이세야는 충격에 빠져 물러났다. 그는 단연코 한 번도 터스크의 정신을 건드린 적이 없었고, 녀석을 입단식에 밀어넣어 악마의 군주의 피를 마시게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분노는 때까치나 그가 변형시킨 그 어떤 놈들보다도 격렬했다. 그리고, 비록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지만, 터스크가 품은 증오와 타락은 그가 다른 녀석들에게 걸었던 마법에 연결돼 있었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터스크의 정신에 드리운 분노의 붉은 장막에 묻혀 뚜렷히 구분하기는 힘들지언정, 그 그림자나 윤곽은 분명 그의 작업물이었다. 오염된 곰이 헐록으로부터 유래되어도 헐록과는 다른 것처럼, 변화하고 성장하여 다르고 새로운 모양이 되어 있긴 해도...그 기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물론, 그가 그리폰들의 정신을 왜곡시킬 때, 입단식을 마치 병처럼 생각하도록 하게 했지만, 그래서 놈들이 기침과 재채기로 피를 뱉어내긴 했지만...그렇다고 그가 심은 것이 실제 병인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놈들이 변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속임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정말 그랬을까?

  너는 혈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칼린이 그에게 기초적인 내용조차 제대로 가르치기 전, 그는 냅다 그리폰들의 입단식을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라 한들 과연 얼마나 더 잘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형태만 빌려온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실제로 병을 불러일으켰다 한들 누가 알 일인가?

  혈마법은 근본적으로 금지된 영역이었기에, 얼마 안되는 익힌 자들조차도 무지의 안개를 뚫어가며 개척하는 기술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직 대의를 위해 그 협곡을 침범한 것이라 생각했지만...동화 속의 멍청이들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다소 끔찍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어설픈 시도가 예기치 않은 재앙을 불러들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확신이 필요했다. 터스크에게서 물러나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지운 이세야는 복도에서 기다리는 둔세인에게 돌아갔다. "이 그리폰이 스탁헤이븐이나 아예슬레이그에 간 적이 있습니까? 그 어떤 전장에라도?"

  둥지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터스크는 그 어떤 전장에서도 싸운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 놈은 대재앙 전부터 이미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안전하게 날 수가 없었습니다. 안도랄이 눈을 뜨기 전부터도 이 녀석은 와이스하웁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래까지 버티고 있던 것만 해도 이미 놀라운 일이예요."

  이세야는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리폰들과 접촉한 적은 있고요?"

  "아주 잠깐씩, 놈들이 돌아왔을 때만요. 터스크는 가끔 요양중인 녀석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잘 못 보는 탓에 다른 녀석들을 거슬리게 하기 일쑤인데다, 이제는 누구랑 싸우게 둘만한 나이가 아니다보니. 다른 놈들이 재채기를 자꾸 하는 것도 걱정됐고요. 수석 감시자께선 별 일 아니라고 하셨지만, 터스크만한 나이에는 아무래도 조심해야죠. 아무튼, 이 녀석은 몇 년 간 따로 고립돼 있었습니다."

  "몇 년 정도입니까?"

  둔세인은 생각에 잠겨 미간을 찌푸렸다. "스탁헤이븐 전부터니까 - 5:21, 아니면 5:22 초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쯤 다른 녀석들과 마지막으로 같이 뒀던 것 같아요."

  2년. 어쩌면 3년 정도. 이세야의 머릿 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둔세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리고 터스크가 제한된 노출과 수 년에 걸친 잠복기를 거쳐 이렇게 된 거라면...그리고 그의 증상이 어떤 병,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면, 퍼질 시간은 충분히 길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엘프는 대답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셨습니까?" 둔세인은 말문이 막힌 그의 얼굴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동료들과 상의해볼게요. 지금으로선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 제가 뭘 어떻게 해야할까요?"

  "해야할 일을 하세요." 그는 흰색 부리의 늙은 그리폰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 * *

 

  세 달 뒤, 이세야는 수석 감시자가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제불능의 난폭함"을 보이는 그리폰을 전부 잠재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대재앙 시기에 참전했던 녀석들 중 기침이나 재채기로 피를 토하는 녀석들 역시 전부 사살하라는.

  안티바에 있던 이세야에게 그 소식은 심장에 꽂히는 단검처럼 닥쳤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그리폰들을 소리 소문 없이 죽여왔으니, 공식 명령이 내려온 것은 그저 다른 국가들에게도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분노의 전염병이 와이스하웁트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문제로 수석 감시자의 도움을 요청해왔다는 뜻이었다.

  도움은 오지 않을 것이다. 회색 감시자들이 가진 해결책은 죽음 뿐이다. 수석 감시자의 명령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이세야는 여전히 어쩌다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그의 탓임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을 잠식해가는 선홍색 질병은 그가 대재앙 때 전투용 개체들에게 걸었던 의식과 연결돼 있었지만...이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게 정말 질병이라면, 피를 뿜어대는 것이 전파원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실제 질병이 아니었다. 아니면 맞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그가 그저 만들어냈을 뿐인 것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을 찾는 그의 임무는 와이스하웁트부터 시작됐다. 테다스에서 그리폰에 관한 기록을 가장 제대로 남겨놓은 이들은 회색 감시자들 뿐이었고, 그들은 그 어느곳보다 방대한 마법 서적 역시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대로, 둔세인과 다른 감시자들이 이미 답을 찾아 이것저것 들쑤셔 봤음에도 특별한 소득이 없었듯, 이세야 스스로 뒤진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이스하웁트에서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자, 이세야는 자유동맹으로 향했다. 그가 둔세인에게 했던 말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자신과 칼린 외에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혈마법사를 한 명도 알지 못했다. 회색 감시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나섰던 얼마 안되는 이들은 전장에서 모두 죽었고, 많은 이들이 말레피카룸에 손댄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을 내던졌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책이든 비밀 일기장이든, 혹은 암호로 쓰인 두루마리든 - 답을 줄만한 어떤 거라도, 하다못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제시해줄만한 것이라도 있을 것이다.

  혹여 그런 단서가 어딘가 있었다한들, 이세야는 스탁헤이븐에서 그걸 찾을 순 없었다. 커크월도, 탄터베일이나 오스트윅, 앤스버그도 아니었다. 컴버랜드의 피에 젖은 진흙이나 바다에 둘러싸인 와이컴의 잿더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티빈터 제국이었다. 티빈터의 마지스터들이 혈마법에 제법 관대하고, 심지어 반기기까지 한다는 점은 테다스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소문은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혈마법사이고, 그만한 규모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티빈터만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피를 갈구하는 마지스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세야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었지만, 티빈터 국경에서 접한 냉담한 반응에 생각이 바뀔 뻔 했다. 물론, 회색 감시자는 테다스의 구원자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물론, 그들도 동생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티빈터는 이세야에게 줄 수 있는 특권은 그저 그 땅에 들어서서 즉시 노예시장에 팔려가지 않는 것까지임을 분명히 했다. 공공 도서관에서조차 그를 노골적으로 꺼렸고, 마탑의 마법 서적 역시 허가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 이상으로 말을 이어가려는 마법사도 없었고, 그마저도 냉랭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뇌물로도 그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고, 비밀스런 지식을 공유하자 해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단호하고 확고한 거절만이 있을 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는 결국 포기했다. 10년 전이라면, 하다못해 5년 전 정도만 됐어도 이세야는 티빈터의 침묵을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고, 차가운 예절로 된 그 벽에 머리를 박아대며 어느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덤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럴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병든 그리폰에 대한 보고서가 매일 새로이 들어오고, 하루하루 죽음이 쌓여가고, 밤마다 꿈에서 콜링이 들려오는 지금에는. 티빈터의 완고함을 저주하며, 이세야는 비참의 제국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다음이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칼린은 안티바로 돌아가, 산산조각난 국가의 영광을 재건하는 고향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륙지역에는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 잔당과 오염된 짐승들이 떠돌았고, 음식은 부족하고 오가는 길도 무사히 남아있지 않았다. 악령과 안식을 찾지 못한 시체들은 피에 젖은 전장을 맴돌았다. 나라를 떠난 이들 대부분은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굳이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안티바 시티나 리알토만 근교 도시들은 영원히 비워 두기엔 너무 입지가 좋은 지대였고, 몇몇 담대한 이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고된 작업에 착수했다. 칼린은 개러헬의 장례식이 끝나마자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 날 이후 이세야는 그와 만나거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특별히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었고, 그저 두 사람 다 그 엘프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예감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슬픔과 죄책감이 싸워대는 지금, 그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상대가 달리 없었다. 칼린은 분명 혈마법의 문을 열려는 그에게 경고를 던진 이였지만, 동시에 그에게 그 열쇠를 쥐어준 이기도 했다.

  스스로 짊어진 자기혐오의 짐을 떠넘기려는 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고, 테다스 어디에든 이세야가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었더라면, 그는 칼린에게 그가 품은 회한을 함께 떠안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는 안티바 시티로 날아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칼린은 해안가에서 장력마법과 화염주문으로 항구의 잔해를 정리중이었다. 안티바의 부는 항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으니, 해상 무역을 다시 여는 것이야 말로 망가진 나라의 재산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그 사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회색빛 도는 수염을 길렀지만, 이세야는 금방 그를 알아봤다. 갈매기 무리가 자신들의 아침을 망쳐놓은 마법사에게 날개를 펄럭이며 깩깩거렸다. 안티바에서 투덜거리는 새떼 따위의 순수한 광경을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이세야는 미소지었다. 그는 칼린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정리하는 걸 기다렸다가 자욱한 먼지를 뚫고 다가갔다. "아직도 뭘 부숴대고 있어? 그쯤 했으면 지겨워졌을 줄 알았는데."

  "이세야!" 나이 든 마법사의 얼굴에 즉각 진심어린 미소가 떠올랐고...걱정어린 기색이 그 위에 섞여 있었다. 겨울의 막바지라, 얼굴을 두른 겹겹의 천이나 두 손을 싸맨 장갑을 추위 때문이라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칼린은 이세야가 그렇게 많은 옷가지를 두르고 있는 이유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방문 차. 잠깐 시간 돼?"

  "물론이지." 칼린이 지팡이로 가리킨 멀지 않은 건물은 다른 곳보단 좀 더 방음이 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새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창문 위로 못박혀 있어 늦겨울의 찬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단 것인지 푸른 생선에 왕관을 씌워놓은 그림의 단순한 간판이 문 위에 걸려있었다. "푸른지느러미 대왕. 평소 식사하는 곳이야. 요리사 실력이 다른데보다 낫고, 요샌 물고기들이 돌아오고 있어서 더 괜찮지. 보통 땐 에일을 제공하고, 와인도 가끔씩 들어와."

  "개인 객실은?"

  "날 그 정도로 그리워한 줄은 몰랐는데." 칼린의 농담기 서린 눈빛은 그가 마주 웃어주지 않자 금세 잦아들었다. 가려진 얼굴 위에서 어색하게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던 칼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고마워." 그는 칼린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내부는 따뜻한 식사를 즐기는 어부 몇몇과 여관 주인에게 들고온 상품을 팔려는 구렛나룻 무성한 행상인까지 있어 제법 소란스러웠다. 가구는 짝이 맞지 않는 잡동사니 모음이었지만, 제대로 손본 티가 났다. 이세야에겐 그 모양이 마치 안티바의 회복을 약속하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칼린이 들어서자 여관주인과 행상인이 익숙한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객실로 올라가는 그들에게 달리 말을 붙이진 않았다. 아마도 마법사의 손님에 대한 불문율을 익힌 듯 했다.

  위층에 도착하자, 칼린은 문을 닫고 열쇠를 근처 탁자 위에 떨궜다. "그럼, 무슨 일로 이렇게 비밀스러운 거지?"

  이세야에겐 대답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혈마법 때문에."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 겨우 붙들고 있던 의지가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가까운 벽에 미끄러지듯 주저 앉아 까끌거리는 석고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칼린을 직접 보면서 말하는 것보단 그 편이 쉬울 것 같아, 두 눈을 감았다. "내가 그리폰들에게 한 일, 그 입단식이...다른 녀석들에게 퍼지고 있어. 놈들 전부가 병들어가고 있어. 대재앙의 질병이랑도 비슷하지만, 퍼지는 방식이 달라. 아마 공기를 통해서일 거야. 아니면 피. 어느 쪽이든, 그게 녀석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어.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어. 혹시라도 도와줄 방법이 있나 해서 온 거야."

  오랫 동안, 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이세야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때까지도 나이 든 마법사는 아무 말이 없었고, 마침내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없다고?"

  "도와줄 방법이 없어. 혹시 가능하다 한들, 내가 그럴지 모르겠지만 -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도와줄 수 없어."

  "왜지?" 이세야가 물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반가움은 금세 잦아들었고, 낡은 공허함이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한 한 걸음이겠구나 하는 막연한 느낌이.

  "챈트리의 비둘라스 수사의 저서에 따르면, 마법은 그 고유의 법칙과 논리가 있고, 각각의 주문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지. 그는 가설에서, 혈마법의 위험성이란 그 존재가 악령을 품고 태어나기에, 그 대가 역시 감춰져 있다는 데 있다고 했어."

  "비둘라스 수사는 마법사가 아니었어." 이세야가 반박했다. "나도 그 글은 읽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그 자는 일생 한 번도 주문을 써본 적이 없잖아. 그는 마도사가 아니라 신학생이었지. 그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적 없는 세상의 법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지어낸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 간, 나는 그 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어. 그래, 어쩌면 그건 그저 추측일 뿐이고, 그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하지만 어쩌면 맞는 것일 수도 있어. 어쩌면 그 생각, 혈마법의 진짜 위험은 그것이 희생에서 능력을 끌어내기 때문도, 탐욕스럽고 야심찬 이들을 유혹에 빠트려 주문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도록 하게 하기 때문도 아니라는 그의 생각에, 진실이 담겨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위험성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몰이해 때문에 우리의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일지도.

  네 말이 맞다면, 그리폰들이 우리가 대재앙 때 했던 일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라면 - 그리고 이것조차 그저 '가정'일 뿐이야, 이세야, 너는 아직 그게 정말 원인인지조차 모르고, 알 수도 없을 거야 - 그런거라면, 대의를 위한 우리의 시도가 이 일을 이끌어낸 거야. 우리가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고, 실제 대가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추측일 뿐이야 - 하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다시 혈마법에 손을 대서 이걸 낫게 하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내 시도가 이 세상에 더 안좋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어?" 칼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혈마법을 다시는 쓰지 않을 거야. 마탑은 대재앙 때 회색 감시자들에게 조력한 혈마법사들을 눈감아주고 있지만, 그 인내심은 내가 말레피카로 알려지는 순간 끝날 거야. 난 대재앙이 끝난 뒤로 피의 힘을 빌린 적이 없고, 누구도 날 의심할 이유는 없지...하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날 눈여겨 보고 있어. 그래서 널 도울 수가 없어. 하지만 설사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한들, 그렇게 할 것 같진 않아.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순간이 닥칠 때까지 혈마법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나는 다시는 그 눈먼 도박에 손대고 싶지 않아."

  그는 이세야의 눈에 담긴 고통스런 눈빛에 말을 멈추었다. "미안해-."

  이세야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다 자신의 망토에 넘어질 뻔 했다. 그에게 물어본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 전부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데, 이세야가 그에게 자신의 슬픔을 나눠지려 오다니. "아니, 괜찮아. 당신이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나는 도와줄 수 없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말한 건 혈마법이 네가 생각한 것보다 큰 대가를 요구할 거라는 거였어. 하지만 그게 꼭 아무 희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 뜻이야. 난 이미 모든 곳을 뒤져봤어. 와이스하웁트, 자유동맹, 심지어 티빈터 제국까지도. 그 어디에도 답이 없어.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어." 열쇠는 문 옆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여관주인이 어딘가에서 작은 조각품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점토로 빚은 통통하고 동그란 배를 가진 익살스러운 드래곤 형상의. 열쇠고리가 그 통통한 주둥이에 걸려 있었다. 이세야가 그걸 잡아채자, 드래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각은 깨어지며 형태없는 사기 파편으로 흩어졌다. 조각들을 넘어 열쇠를 문에 꽂은 이세야는, 칼린이 문을 잠근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칼린을 돌아봤다. 그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칼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쓰지 마. 내가 치울게."

  "그게 아니라, 여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칼린은 다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몸을 숙여 드래곤의 파편들을 바닥에서 줍기 시작했다. "어쨌든, 네가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야? 너는 언제나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어. 공중을 나는 캐러반, 도피처 건설...그리고, 그리폰들의 입단식까지도. 그 모든 주문들은 너만의 창작품이고, 너는 그걸로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한 일들을 해냈어."

  이세야는 한 손을 문고리에 짚은 채, 주의깊은 태도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너한테 말한 건 왜 내가 널 도와줄 수 없는지 뿐이야. 하지만 내 이유가 너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지. 날 가로막는 한계가 너까지 막을 필요는 없어. 이전에도 아니었는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나는 분명 혈마법의 위험과 함정에 대해 너에게 경고했지만 - 악마의 군주가 목줄기를 노리고 있는 순간에 가능한 한 최대한 말이야 - 한 번도 너를 막은 적은 없었어. 다른 마법사들에게 답을 찾으려 하지마. 책이나 두루마리, 악령도 아닐 거야. 네 안을 들여다 봐. 네가 이걸 만들었어. 너 말고 그 누가 이걸 되돌릴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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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5 : 챕터 내 세 번째 문단의 첫 번째 단어 (문장부호, 대소문자 전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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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북스 : https://books.google.nl/books/about/Dragon_Age_Last_Flight.html?id=PbpZAwAAQBAJ&redir_es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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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회색 감시자들은 동틀 무렵 집결했다. 이세야의 지친 눈으로 봐도 장엄한 풍경이었다. 윤을 낸 갑옷 위로 회색과 청색의 단복을 걸친 채, 하늘로 치켜든 창 끝에는 눈처럼 하얀 비단 깃발을 나부끼며 행진하는  50명의 그리폰 기수들. 빛을 가리는 폭풍구름의 방해를 뚫고 새벽빛을 받은 흉갑과 어깨갑주가 장밋빛으로 반짝였다. 기수의 흥분을 감지했는지 가슴줄을 맨 그리폰들도 콧바람을 내뿜으며 의기양양해 했다. 입단식을 거친 녀석들조차도 평소보다 누그러진 태도였다. 여상스런 기침마저 기대감에 찬 쇳소리에 불과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적의 피를 상상하는 양 피거품이 인 부리를 핥는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

  선두에선 개러헬이 짙은 청색의 망토를 두르고 번쩍이는 백금으로 회색 감시자의 그리폰 문장을 새긴 둥근 방패를 든 찬란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그는 중장 갑옷 대신 단순한 투구와 완갑을, 흉갑대신 무두질한 가죽을 둘러 다른 감시자들에 비해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축제에서 행렬이라도 하는 것 마냥 끄트머리가 하얗고 텁수룩한 꼬리를 병사들을 향해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 묘한 생김새의 그리폰은 끝없는 대재앙의 전장을 거치고도 천성을 잃지 않은 듯 했다. 납작하게 접힌 왼쪽 귀가 전장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펄럭였다.

  이세야는 후방에 위치했다. 두건을 푹 눌러쓴 그는 얼룩덜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위로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맨 상태였다. 비행 중 바람에 두건이 벗겨지더라도 아무도 그의 타락의 상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안장 아래 레바스는 잔뜩 짜증난 채,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려하면 귀를 바짝 세웠다가 납작하게 눕히곤 했다. 많은 그리폰이 동요한 것처럼 보였고, 이세야는 기수들의 긴장이 고삐를 타고 그들에게 얼마나 전해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회색 감시자들은 표정을 절제하고 있었지만, 많은 수가 두려움을 품고 있을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타락한 그리폰들은 그렇지 않았다. 놈들의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건 끓는 듯한 분노와 적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고픈 열망 뿐이었다. 이세야는 그 분노가 행동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놈들을 강철같이 붙들고 있었다. 그가 맡은 게 여덟, 칼린이 맡은 게 네 마리였다. 다른 두 명의 혈마법사가 그 사이 여섯 마리의 그리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입단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 그 죄는 다른 누구에게도 짊어지게 할 수 없는, 이세야만의 것이었다 - 그는 타락한 개체를 다루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그들은 구름낀 보랏빛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대재앙으로 멍든 대지로부터 높이 날아오르자, 폭풍구름이 병든 땅을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멀리 안티바 깊숙히, 멸망한 도시가 있는 해안가까지 물러난 상태라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세야가 본 것이라곤 그들이 거쳐온 황량한 흔적 뿐이었다. 아래로 스쳐가는 불에 탄 농장과 무너진 벽은 이름없는 마을의 묘석이나 다름없었다. 죽은 대지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이따금 느리게 흐르며 넓은 둑 사이로 회색빛으로 뭉쳐졌다가 비죽 솟은 바위 사이로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 순간, 아예슬레이그의 사체를 타고오르는 검은 구더기 같은 어둠의 피조물들이 나타났다. 이 정도 높이에선 이세야도 비죽 솟은 오우거의 뿔 외엔 세세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조차도 분별가지 않는 덩어리 속에 유달리 큰 뭉치로만 보였으니.

  그 정도면 조준하기엔 충분했다. 그리폰 부대의 선두에서, 개러헬이 선명한 진홍빛 비단 깃발을 꺼내들어었다. 그의 신호에 맞춰 기수들이 강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갔다.

  화살의 범위 바로 위에서 하강을 멈춘 부대는, 진지를 떠나기 전 개러헬이 나눠준 가방 꺼내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십여 개의 묵직한 진흙 공이 허공을 가르며 어둠의 피조물들 머리 위로 회색빛 우박처럼 쏟아졌다. 도시의 자갈 바닥에 부딪힌 공들은 폭발을 일으켰고, 드워프제 스카이버너가 독구름과 산성 안개를 내뿜으로 대지를 파열시켰다. 빈 상점과 민가들이 무너지며 서까래와 기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일제 사격이었지만, 회색 감시자들이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은 아니었다. 개러헬이 한 번, 이세야와 전술을 논하던 중 그 폭탄들이 얼마나 비싼지 언급한 적이 있었다 - 아주 짧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저만한 폭탄 가격이면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금박에 싸인 루비를 뿌려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비는 이만한 파괴를 일으킬 수 없었다. 분노에 차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의 비명소리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회색 감시자들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놈들을 조종하는 악마의 군주는 아무리 지독하리만치 영악할지언정, 테다스의 정치나 경제구조까지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용을 닮은 어둠의 피조물도, 그의 졸개들도 감시자들이 그러한 공격을 열 번, 스무 번, 천 번씩 반복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에겐 공중의 그리폰과 맞서 싸울 방법이 아무 것도 없었다...악마의 군주 그 자신이 오지 않는 한.

  개러헬은 놈들이 그리할 거라는 데 걸었다. 어둠의 피조물 측에서 회색 감시자들의 포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그 뿐이었으니.

  붉은 깃발이 다시 올라갔고, 감시자들은 앞선 공격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재 사이를 뚫고 강하하여 두 번째 포격을 가했다. 다시 한 번 대지가 독에 물든 불꽃과 함께 폭발했고, 죽어가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울부짖음이 허공을 채웠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몇 채 안남은 민가의 창문으로 탁한 녹색 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놈들의 울부짖음이 좀 다르게 들리는 걸 감시자들은 느낄 수 있고, 공포보단 승리감 어린 그 소리에,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도전에 응해왔다는 걸 안장을 돌리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예슬레이그의 지옥을 뚫고 솟아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악몽에 육신을 입힌 듯한 형상이었다. 그들의 폭탄에서 피어오른 독안개가 놈의 너덜너덜한 검은 비늘 위로 미끄러졌고, 맹독의 망토를 형성하듯 놈의 갑주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세야가 악마의 군주를 본 건 안티바 시티가 무너진 후로 세 번째였고, 놈은 볼 때마다 이전보다 커지고 끔찍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대재앙 자체가 놈에게 힘을 주는지도, 아니면 그저 타락에 병든 그의 상상일 뿐인지도 몰랐다...하지만 악마의 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어닥쳤고, 이어 얼음장 같이 차갑게 영혼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다른 회색 감시자들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기수의 인도를 잃은 녀석들과, 굳어버린 마법사의 통제에서 잠깐이나마 풀려난 그리폰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혼란 속에 우왕좌왕했고, 당초 계획했던 것처럼 매복 지역으로 후퇴하는 대신 소중한 몇 초의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오직 굽은꼬리의 하얗고 구부러진 꼬리를 따른 몇 마리만이 동맹군이 숨어있는 지점으로 달아났다. 나머지는 혼란에 붙들리고 말았고 -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치명적인 잠깐이었다.

  이세야가 도무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르게, 악마의 군주는 이미 그들 위에 와있었다. 놈의 날개짓에 레바스가 옆으로 밀려났고, 놈은 그들을 지나쳐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감시자들에게 향했다. 검은 그리폰은 분노에 차 울부짖으며 중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둘을 지나친 악마의 군주가 뼈로 된 거대한 턱을 벌리자, 놈의 목구멍 안에 사악한 빛무리가 맺히며 타락한 드래곤의 뿔과 턱 주위 부러진 뼈 경계에 역광을 드리웠다. 그 뒤는 레바스의 비틀거림 때문에 이세야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잠시 뒤 그들이 제자리를 되찾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라곤 칠흑같은 죽음의 암흑을 둘러싸고 휘몰아치는 보랏빛 불꽃과, 들려오는 포효소리 뿐이었다.

  악마의 군주의 불길은 흐트러진 회색 감시자 편대를 뭉텅 베어냈다. 그리폰과 그 기수들은 화톳불 위로 던져진 낙엽처럼 튀어 올랐다. 이세야는 그들의 피부가 일그러지는 것을, 검은 구멍 같은 입이 벌어지는 걸 보았고, 그들이 부푼 구름 아래 기다리고 있을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빙글빙글 떨어져 내리는 것도 보았다.

  마법사 중 한 명은 떨어지는 도중 변화했다. 피부를 뚫고 나온 불길이 흘러내리며 영계에 대한 통제력을 놓쳐버린 - 혹은 굴복해버린 - 그의 육체를 타락의 괴물로 변화시켰다. 이세야는 폭풍 사이로 떨어지는 그 여자의 끔찍한 몰골과 비인간적인 분노로 뒤틀린 얼굴을 아주 잠깐 밖에 볼 수 없었고, 이내 그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눈 앞에서, 불타고 남은 로브자락이 기이할 정도로 느릿하게 휘날렸다.

  그리고 재 섞인 구름 사이로, 그리폰들이 방금 떨어진 타락의 괴물보다도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전부 돌아온 건 아니었다. 대다수라 할 수도 없었다. 추락한 마법사가 통제하고 있던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 중 두 마리만이 돌아왔고, 놈들에겐 이제 복수를 추구하는 걸 막아줄 고삐가 없었다. 이세야는 숨조차 멎은 채 바람 사이로 그들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놈들의 안장은 비뚤게 기울어졌고, 가슴줄을 맨 은색 띠는 악마의 군주의 부식성 숨결에 숯처럼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녹아내린 깃털은 끈끈한 검은 피로 - 그들 자신의,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뒤틀어진 피로 - 뒤덮여 있었고, 이세야는 너덜너덜해진 날개 사이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웅웅거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한 놈은 얼굴을 직격당했는지 두개골 반쪽이 으스러져 그대로 뼈와 검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구름 사이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더 보고 싶지 않을만큼은 봤다고 생각했다.

  그 그리폰들은 불가능을 뚫고, 살아있었다. 그들은 불가능을 뚫고, 날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불가능을 뚫고, 공격에 나섰다.

  악마의 군주는 놈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타락한 드래곤은 불타는 두 눈을 개러헬과 나머지 기수들에게 고정한 채, 대열을 회복하고 매복 지역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그리폰들이 놈의 노출된 복부로 한 쌍의 쇠뇌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그 충격에 한 쪽으로 밀려난 악마의 군주는 공중에서 거의 떨어질 뻔 했다. 피와 검은 비늘이 상처로부터 떨어져내려, 구름 사이를 뚫고 떨어지며 쉿쉿 소리를 냈다.

  그리폰 중 한 마리는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진 듯 했다. 이세야는 녀석의 시체가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봤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복부 아래쪽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잡아 뜯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움켜쥐고 뜯어냈다. 드래곤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몸 전체를 이리저리 흔들어대 그리폰을 떼어내려 했으나, 놈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둘은 몸부림치며 검푸른 구름막을 뚫고 가까운 만 근처까지 떨어져 내려가, 이내 이세야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레바스는 계속해서 날아가 개러헬과 나머지를 따라잡았다. 넓게 펼쳐진 검은 날개가 폭풍을 뚫고 빠르게 날아 남아있는 감시자들과 거리를 좁혔다.

  "어떻게 된 거야?" 개러헬은 목소리가 들릴 거리까지 가까워진 이세야에게 소리쳤다. 그와 다른 비행 부대는 악마의 군주를 갑작스레 붙든 게 무엇인지 보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저 그들이 추적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이 되돌아왔어!" 이세야가 소리쳐 대답했다. "타락한 놈들이. 그리고 공격했어.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가 아직도 싸우고 있나봐."

  "혼자서?" 개러헬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바람을 뚫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악마의 군주와 혼자 대적하고 있다고?"

  "그래." 하지만 이세야의 대답과 동시에, 악마의 군주의 뿔달린 머리가 등 뒤의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드래곤은 격류를 가로지르는 전함처럼, 날개짓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차없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다른 그리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놈이 남긴 상처가 악마의 군주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섬뜩한 느낌이 이세야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마법? 판단은 짧았고, 이내 보랏빛과 검은빛의 힘의 소용돌이가 감시자들 한가운데 생겨났다.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굽은꼬리였다. 얼룩덜룩한 흰색 그리폰은 날개를 접고 그대로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도 똑같이 따라하려 했으나, 나이와 부상이 늙은 그리폰의 반사를 늦췄고, 충분히 빠르게 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그리폰들은 양쪽으로 갈라서려 했다. 위로 타고 오르려는 무익한 시도를 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은 회오리 속에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갔고, 그 안에서 뒤엉켜 서로 부딪혔다. 레바스의 고삐에 절박하게 매달린 이세야는 귀를 찢어놓는 바람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뼈 부딪히는 소리와 갑옷의 마찰음에 움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깃털과 피와 살점이 섞인 회오리 속에서 그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천둥같은 불협화음으로 머릿 속을 울려오는 영계의 악령들의 속삭임조차 그를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의 공포와 고통에 찬 비명을 잠재워주진 못했다.

  악마의 군주는 방향을 잃은 감시자들에게 타락의 불꽃을 날리고 또 날렸다. 이세야의 눈꺼풀 위로 번쩍이는 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서늘함이 그를 휘감아 와 영혼까지 전율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공중에서 버티려 발버둥치는 레바스의 위에서, 악마의 군주를 이렇게나 가까이 둔 채,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혈관 안에서 요동치는 와중에, 영계의 악령들은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 하는 이런 순간에까지 혈마법에 매인 그리폰들을 붙들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놓아버렸다. 붙들려 있던 그리폰 중 세 마리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팽팽히 당겨져있던 빛줄기가 끊어지는 것처럼, 이세야의 머릿 속에서 마법이 무너지며 끝없는 어둠 속에 반짝임이 잠시 맴돌았다. 나머지는 아직 그가 붙들고 있었다.

  풀려난 그리폰들은 불길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에게 몸을 내던졌다. 한 마리는 보랏빛 불길에 휩싸여 날개짓을 할 때마다 불타는 깃털이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한 순간 회오리바람이 레바스의 왼쪽날개를 붙들어 그를 바깥으로 내던졌고, 이세야의 시야에서 악마의 군주가 사라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순간,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깃털들이 텅 빈 허공을 맴돌았다. 가느다란 햇살이 은총처럼 고요를 비추었다. 얼어붙은, 영원 같은 한 순간, 이세야는 스물네 명의 감시자가 있던 자리에서 느릿하게 춤추는 깃털과 햇살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곧이어 다시 악마의 군주가 시야에 들어왔고, 분명 죽었어야 할 순간을 한참 지난 한 쌍의 타락한 그리폰들이 놈과 얽혀 싸우고 있었다. 가시와 비늘과 그을린 깃털과 털로 된 덩어리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놈들은 공중에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간헐적으로 붉고 검은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귀찮은 적을 해치우려는 악마의 군주의 불길과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고대신을 향해 쉴새없이 마법을 쏘아대는 회색 감시자들의 주문이 허공을 갈랐다.

  드래곤의 뒷발톱이 타락한 그리폰의 복부를 꿰뚫었지만, 그 작은 야수는 악마의 군주의 발톱이 놈의 갈비를 쪼개고 안장이 닿는 두터운 가죽을 찢어놓는 순간에도 죽음이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미친듯이 싸워나갔다. 빈 안장이 내팽겨쳐 나갔고,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구부러진 부리로 드래곤의 몸통을 찢어갈겼다.

  다른 놈은 악마의 군주의 머리를 노렸다. 강철빛 그리폰은 드래곤의 이빨이나 죽음의 불길에도 아랑곳 않고 악마의 군주의 두 눈에 발톱을 박아넣고 놈의 주둥이를 깊게 긁어놓았다. 공중으로 쏟아져내리는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피에 젖은 한쪽 눈을 가늘 게 뜬 고대신이 강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래곤의 들숨에 그리폰의 깃털이 앞으로 확 일어섰다.

  놈이 숨을 내쉬고난 자리에, 그리폰은 화염의 벽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영계의 악령들이 이세야의 머릿속에서 복수를 외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러 놈들을 잠재웠다. 시야가 한 순간 흐릿했지만, 악령들은 투덜거리며 잠잠해졌다.

  잠시 뒤, 다른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마저 드래곤의 발톱 아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떨어졌다. 놈들에게 벗어난 악마의 군주가 환희의 포효를 하며 발톱에 긁힌 머리를 치켜들고 도망치는 회색 감시자들을 뒤쫓으려 했을 땐 - 그들은 이미 공격태세를 갖춘 뒤였다.

  "감시자들이여! 감시자들이여, 내게로 오라!" 개러헬이 외치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던지 좀 된 것 같았다. 나머지 비행 부대는 그의 뒷편에서 이미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악령들에게 정신이 팔린 이세야는 그 부름도, 등뒤에서 미친듯이 재촉하는 칼린의 신호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레바스를 부대로 이끌려 했으나, 제대로 자리를 잡기엔 너무 늦은 뒤였다. 그는 오십여 미터 거리에서 나머지 동료들이 뱀 형상의 숙적을 향해 달려드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강철과 태양에 빛나는 은색의 물결로, 감시자들이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의 활이 폭우처럼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들의 지팡이가 영계의 빛줄기를 뿜어댔다. 구름조차 그들의 진격에 길을 터주는 것 같았고, 빛나는 태양 아래 이세야는 악마의 군주가 생각보다 많이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의 아래턱뼈 한 쪽이 통째로 뜯겨나가 선홍색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른쪽 눈꺼풀은 그리폰의 발톱에 찢겨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몸통 부분에 난 상처에서 비늘 아래 속살과 이어진 근육이 반짝였고 피부는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악마의 군주는 쉽게 질 기세가 아니었고, 놈은 아예슬레이그를 가로지르는 감시자들의 진격에 대항해 불길을 쏟아냈다. 진형의 왼쪽 선두를 맡은 그리폰들이 비명과 연기와 함께 회색 나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이세야가 붙들고 있던 몇 마리가 떨어지며 이세야의 주문에 걸린 부하가 한순간 가벼워졌다.

  남은 감시자들은 불길 주위로 선회하여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전 같은 깔끔한 대열은 아니었다. 그들은 널찍히 흩어졌고, 그리폰 한 마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놈의 주의를 흐트러놓으려는 듯 했다. 이세야가 우려할만한 일이라곤 그리폰들이 서로의 경로를 방해하는 일이었지만 - 하늘에 남아있는 기수는 열다섯 남짓, 혹은 그보다도 적어보였고, 동생은 아마 이 정도 숫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리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세 마리의 그리폰이 혼란통에 추락했다. 한 마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숨결에 휩쓸렸고, 다른 한 마리는 얼음 작살에 스치는 바람에 날개가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으며, 마지막 녀석은 이미 회색빛 혜성처럼 하늘 낮은 편으로 떨어진 모습을 이세야가 포착했을 뿐이었다. 놈은 무너진 성당 위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나머지는 하늘 위에 남아 싸워나갔다.

  악마의 군주는 마치 파리떼를 잡는 개처럼 그들을 상대했다. 놈이 하얀 가슴털을 가진 그리폰을 향해 몸을 돌려 그 작은 짐승의 꼬리에서 깃털 한웅큼을 물어 뜯었다. 그 공격으로 드래곤에겐 사각이 생겨났고 한 궁수가 어마어마한 운이든 혹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기술 덕이든,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그가 날린 궁수의 창이 악마의 군주의 왼쪽 날개 갈퀴를 꿰뚫고 오른쪽 날개의 관절부분에 깊이 박혔고, 두 날개는 폭풍우에 휩쓸린 돛처럼 무너졌다.

  부상입은 날개 방향으로 회전하며 악마의 군주가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칼린이 옆을 지나쳐가는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레바스 역시 매캐한 연기를 뚫고 놈을 쫓아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야를 가리는 구름을 지나 떨어지는 놈을 쫓아갔고, 아래로 도시의 무너진 성벽을 지나, 만을 내려다보는 까맣게 그을린 공터에 홀로 선 교회탑의 뼈대만 남은 돌담에 다다랐다. 연기와 바다 안개가 탑의 바닥과 근처의 묘지를 둘러싼 장식 울타리 난간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검은 그리폰이 상처입은 악마의 군주를 쫓아 하늘을 가로지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승리감을 느끼기엔 너무 놀라 있었다. 이게 정말로 끝인 걸까?

  그래 보였다. 정말로 거의 그래 보였다. 환희의 고함과 함께 영혼 화살과 감시자들의 회색 깃 화살이 추락하는 드래곤에게 날아들었다. 악마의 군주는 성한 날개 쪽을 접고 탑을 향해 떨어지는 속도를 가속했다. 승리가 코앞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감시자들이 그 뒤를 따라 강하했다.

  연기 아래에서, 시위를 튕기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검은 촉의 석궁 화살이 이세야의 오른편에 있던 감시자의 목을 꿰뚫었다. 남자는 안장에서 뒤로 펄쩍 날아 옆으로 쓰러졌고, 갑옷 앞쪽으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왔다. 이어 석궁 화살 두 개가 그가 탄 그리폰의 노출된 복부를 꿰뚫었고, 하나는 이세야의 왼쪽 종아리 뒤에 꽂혔다.

  그 충격이 그를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연기과 스물거리는 안개 사이로 이세야는 앞쪽의 버려진 민가에 어둠의 피조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젠록, 헐록, 깡마른 쉬릭들. 놈들은 빗물 이랑 사이, 풍파에 닳은 가고일 석상 사이에 웅크리고 숨어, 삭아빠진 지붕 사이 틈새로 엿보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감시자들의 전술을 그대로 이용했다. 놈은 날개 부러진 시늉을 하는 어미새처럼 교묘하게 그들을 낚아 매복의 늪에 그들을 빠트렸다.

  레바스가 공포와 분노로 울부짖으며 날아올랐고, 그 주위의 나머지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피해를 겪은 뒤였다. 개러헬을 따라 악마의 군주의 함정으로 달려든 그리폰들 중 여덟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여덟 마리의 그리폰, 열 명 남짓한 기수들 - 너무 적은,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엔 너무나도 적은 수였다. 이세야가 수를 세는 도중에도 치명상을 입은 그리폰 한 마리가 연기와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미친 녀석들을 풀어놔." 칼린이 등뒤에서 말했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굳어진 목소리였지만, 혼돈 속에서도 그의 제안은 침착하게 들려왔다.

  이세야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영계의 또 다른 악령이 아닌 그의 오랜 친구임을 깨닫는데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 얘기인지 깨닫는 데에도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로도 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두 마리로는 상처까지 입혔다. 셋이나 넷이라면 끝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러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입단식을 치른 그리폰은 네 마리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살아남아 돌아간다 해도, 회색 감시자들은 한동안 이만한 규모의 공격을 다시 시도할 수 없을 터였다. 혹은 다시는 불가능 할지도.

  이세야는 주문을 풀어놓았다. 영계 너머 악령들의 속삭임이 잦아들었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남은 고요한 머릿 속과...그리폰들의 울부짖음 속에 남겨졌다.

  그것은 영계 악령들의 장난질이 아니었다. 그 울부짖음만은 진짜였다. 엘프의 귀를 찢어놓는 날선 맹노와 복수에 대한 갈망은 - 마침내 마음껏 날뛸 자유를 얻었다.

  마법의 고삐에서 풀려난 그리폰들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어둠의 피조물의 화살은 놈들에겐 성가신 방해거리에 불과했다. 등에 탄 기수들이 금방 죽어나갔지만, 이세야가 얼굴을 찡그리는 와중에도 그리폰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사격을 뚫고, 안장에 시체를 태운 채, 신을 모독하듯 웅크리고 선 악마의 군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날개의 드래곤은 단순히 부상입은 척만을 했던 것 아닌 듯 했지만, 여전히 어설프게나마 날 수 있었다. 교회탑을 떠나 날아오르는 놈을 입단식을 거친 그리폰들이 뒤쫓았고, 그들은 리알토만의 납회색 물 위를 지나 동쪽으로, 늘어서 있는 버려진 배들 위로 날아갔다. 돛대들이 잎사귀 없는 나무숲처럼 물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악마의 군주는 그 숲으로 도망치기로 한 듯 보였다.

  놈은 반쯤 가라앉은 갤리온선의 위로 뻗은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지상에서든 바다에서든 공격이 닿지 못할 위치였고, 공중에서 노려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위치였다. 예측불가의 형태로 뻗어있는 배들의 돛과 돛대가 움직이는 협곡을 형성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 안개가 충돌의 위험을 더 높여주었고, 설사 공격자가 그 길을 뚫고 놈한테 다다른다 한들, 악마의 군주의 불길에 그대로 노출되는 격이었다.

  불가능해보였지만, 그들에게 남은 기회라곤 이것 뿐이었다.

  "진입할 거야." 이세야는 칼린에게 말했다. "방어막을 준비해줘." 그는 자신의 붉은 깃발을 들어 나머지 기수들에게 자신이 공격을 주도할 것임을 알렸다. 다른 이들이 등뒤로 늘어서자, 그는 레바스를 전진시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검은 그리폰이 스스로 경로를 뚫고 나가게 내버려두고, 다시 영계와 자신을 연결했다. 마법이 손아귀 안을 채웠고, 그는 장력마법을 빚어내 리알토 만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어둠의 피조물 궁수들에게 쏘아보냈다. 헐록과 젠록이 사정거리 안에 들자 이세야는 놈들의 희멀건 죽은 얼굴에 주문을 날려댔다.

  장력장이 젠록과 가고일들을 아예슬레이그의 무너진 지붕에서 쓸어냈다. 불길은 날아드는 헐록의 화살을 허공에서 태워버리고 놈들의 활시위를 오그라트렸다. 뒤를 따르는 그리폰 기수들도 어둠의 피조물을 향해 화염구와 얼음폭풍, 두개골을 깨놓는 돌덩이를 날려댔다. 빈 집 처마에 매달려있던 고드름이 증발하며 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증기 덕에 궁수들로부터 몸을 가릴 수 있었지만, 더 강력한 방패가 될 수 있는 건 장력장 쪽이었다. 이세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칼린이 그들 주위를 둘러싼 반짝이는 푸른색 얇은 구체를 형성했다. 안개를 뚫고 날아든 몇 안되는 화살은 마법 방어막에 부딪혀 부러졌고, 궁수들이 쏟아지는 주문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새 화살을 장전할 쯤이면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놈들을 지나친 뒤였다.

  삐걱거리는 뱃무덤이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바스는 뛰어들 순간을 최대한 기다렸다가, 몸을 뒤틀며 삭구 사이로 파고들어 출렁이는 돛대와 얼어붙어 축 늘어진 돛 사이로 길을 뚫었다. 늘어진 밧줄들이 채찍처럼 날아들어 칼린의 방어막에 부딪혔다. 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삐걱거림이 울려퍼졌고, 금방이라도 돛대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이세야의 솜털이 곤두섰다. 뒤에선 어둠의 피조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나무와 철을 때리는 차가운 바닷물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레바스가 뒤엉킨 밧줄과 돛으로 된 마지막 아치를 빠져나와 악마의 군주의 보루에 도달하자 그 소리 위에 분노한 그리폰들의 울부짖음이 더해졌다. 물에 젖은 뱃머리 끄트머리에 웅크린 거대한 검은 드래곤은 머리 주위를 맴도는 두 마리 그리폰을 향해 보랏빛 불길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난파선들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나무파편더미로 변해있었다. 수면에는 쪼개진 나무파편이 둥둥 떠다녔다.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부러진 날개는 수장된 세 번째 그리폰의 흔적이었다. 네 번째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제대로 역할을 다한 듯 보였다. 악마의 군주가 움직일 때마가 비늘 위에 난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렸고, 놈의 오른쪽 앞발은 따개비가 붙은 뱃머리 아래쪽에 무기력하게 늘어져있었다. 놈의 양날개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가시돋친 등 뒤로 부러져 접혀있는 두 날개는 그 자신의 등가시에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세야가 봐온 모습 중 처음으로, 그 고대신은 죽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타락한 그리폰 한 마리를 마침내 집어삼켰고, 녀석이 얼어붙은 닻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자 연기와 반짝이는 얼음조각이 흩날렸다. 마지막 녀석은 귀를 찢는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악마의 군주의 목 뒤로 뛰어올랐다.

  이제 다른 이들도 안개를 지나쳐 들어왔다. 그들은 난파선의 안개숲에서 튀어나온 육을 지닌 유령처럼 보였다. 굽은꼬리 위의 개러헬과 굴뚝새라는 이름의 검은 귀 그리폰에 타고 있는 에델리스라는 젊은 여자 드워프...그 뿐이었다. 남은 건 그들 뿐이었다. 영광스럽던 회색 감시자의 행렬은 전부 사라져, 아예슬레이그의 잿더미 위 어딘가, 혹은 리알토 만의 회색 바닷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었다.

  칼린의 장력마법이 바늘에 찔린 공기방울처럼 톡 터졌다. "끝내버리자." 그가 말했다.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나온 푸른빛이 악마의 군주를 맞추자 연쇄적인 번개가 터져나왔고 - 그가 다시 공격을 날리려할 때, 개러헬이 그에게 소리쳤다.

  "안돼! 감시자가 - 반드시 회색 감시자가 악마의 군주를 죽여야만 해!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거야!"

  "곧 죽을 녀석처럼 보이진 않는데." 칼린은 웅얼거리면서도 지팡이를 당겨 맺혀있던 마법을 잠재웠다. 그 역시 여기 걸린 중요성을 다른 이들만큼 잘 알고 있었다. 회색 감시자가 아닌 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경우, 악마의 군주의 정수는 가장 가까운 어둠의 피조물의 육체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고대신은 다시 태어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새 육체를 가지게 된다. 회색 감시자의 검이 아니고선 그 존재에게 진정한 죽음을 가할 수 없었고 - 그 대가로 그 회색 감시자의 생명을 바쳐야 했다.

  즉 그 역할은 에델리스나 개러헬, 혹은 이세야의 몫이란 뜻이었다.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저 드워프는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이세야는 바로 생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용맹하고, 다른 이들이 쓰러져나가는 사이 살아남을만큼 운이 좋기도 했지만 - 그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젊어, 신록의 여름 같았다. 그는 제 1 기수도 아닌 제 2 기수로 이 전장에 참여했고, 인간이 앉아있던 게 분명한 피로 얼룩진 납 안장 위에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 에델리스는 이런 전장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만큼 그의 그리폰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듯 했다.

  혹여 가지고 있다 한들...눈앞에서 수많은 죽음의 행렬을 마주한 탓에 그 드워프는 얼음처럼 굳어있었고, 화살을 날리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 화살마다 형편없이 빗나갔다. 혹여 눈먼 화살이 악마의 군주를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세야는 창조주가 그렇게까지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남은 것은 개러헬이나 그 자신 뿐이었다. 그 깨달음은, 달콤쌉싸름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세야는 고삐를 그러쥐고 레바스에게 마지막 돌격을 준비시키려 했으나 - 동생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추었다.

  "너무 좁아." 개러헬이 외쳤다. "서로 부딪힐 지도 몰라. 나 혼자 들어가야 해."

  "하지만-."

  "그래야만 해." 그는 이미 이세야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고, 삭구 옆에 선 둘의 그리폰끼리 날개가 맞닿아 있었다. 하얀색과 까만색, 그리고 까만색과 하얀색이.

  개러헬은 어깨 너머로 미소지어 보였다. 아예슬레이그 어드메에서 투구를 잃어버렸는지, 그의 금발머리가 안개낀 바람결에 느슨하게 흩날렸다.

  "아마디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고, 내 무기는 감시자들에게 전해줘."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세야 누나, 자신에게 좀 더 친절해져."

  이어 굽은꼬리가 얼룩무늬 하얀 날개를 펄럭였고, 그 엘프와 그리폰은 기다리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단단한 돛대 위에 웅크리게 했다. 그리폰의 목깃이 곤두섰다. 그 역시 전투에 나서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전투는, 다른 배의 삭구 위에 자리잡은 에델리스와 렌의 것이 아닌 것만큼,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의 군주의 사정거리 밖이었고, 그들 자신의 무기 역시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남은 역할은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라, 엘프는 기도했다. 물결에 삐걱거리는 난파선의 소음은 그 자신의 심장소리만큼도 크게 들리지 않았다.

  개러헬이 도착한 순간, 악마의 군주는 마침내 마지막 그리폰의 목을 부러뜨려 그 몸뚱이를 뒤집힌 갈레온선의 선체 위에 내동댕이쳤다. 피와 비늘 붙은 찢어진 살점이 드래곤의 주둥이 아래로 젖은 사자 갈기처럼 늘어졌다. 난도질 당한 등가시 사이로 드러난 뼈는 흰색이 아닌 칠흑같은 검은빛이었다.

  놈은 개러헬이 다가서자 고개를 들었다. 고대신의 눈 안에서 악의가 바람 맞은 불씨처럼 일렁였다. 놈의 길죽한 검은 이빨 사이로 보랏빛 불길이 맺혔다.

  굽은꼬리는 앞서 미친 그리폰들이 그러했듯, 피할 생각이라곤 없이 직선으로 빠르게 내려꽂혔다. 그리고 앞선 상대에게 그러했듯, 악마의 군주는 몰아치는 화염의 숨결을 날개달린 도전자에게 내뿜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 굽은꼬리는 하늘에서 돌덩이처럼 뚝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악마의 군주의 숨결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히던 녀석이 한 순간 가라졌다.

  그리고 놈은 곧바로 다시 소금 안개를 뚫고 치솟아 악마의 군주의 오른 편, 거의 먼 것이나 다름없는 다친 눈 쪽에 나타났다. 녀석은 날고 있지 않았다. 날만한 공간은 없었다. 굽은꼬리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갈레온선의 선체를 타고 올라 발톱을 나무와 등껍질 위에 박아넣었다. 잽싼 움직임으로, 녀석은 악마의 군주가 미처 보기도 전에 놈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도전적인 그리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달려들었고 - 굽은꼬리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검은 이빨이 그리폰의 줄무늬 어린 하얀 털 위에 박혔다. 악마의 군주는 쥐를 잡은 사냥개처럼 놈의 목을 물고 흔든 뒤 내팽겨쳤다. 소리없이, 굽은꼬리는 부유물 가득한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그리폰의 희생은 목적을 달성했다. 개러헬은 안장에 서서 악마의 군주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가, 놈이 머리를 숙이는 순간 뛰어 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등가시에 매달린 채로, 엘프는 드래곤의 이마 위로 기어올랐다. 놈은 그를 떨구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댔지만, 개러헬은 단단히 붙들고 버텼다. 한 발 한 발, 그는 놈의 뿔 사이 파인 곳을 지나쳐, 타락한 그리폰이 상처 내놓은 악마의 군주의 목 뒤편 틈새에 도달했다. 고대신의 거친 비늘 사이에 버티고 선 채, 개러헬은 그의 단검을 놈의 등가시 뒤로 치켜들었다가, 악마의 군주의 두개골 아래쪽을 향해 내리꽂았다.

  번개라도 지난 듯한 짧은 고요가 맴돌았다. 이세야는 동생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든, 미처 읽어낼 수 없었다. 그의 뺨 위에 묻은 핏방울이 안도감을 선사했고, 금색 머리카락 한 올이 그 위에 걸려 있었다. 머리 위에선 대재앙의 폭풍이 무너지며, 혹은 그저 끝나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오염이라곤 모르는 햇빛이 챈트리 대성당을 비추는 황금빛처럼 떠있는 배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의 죽음이 일으킨 충격의 여파가 그들을 덮쳤다. 나무 파편이 갈갈이 쪼개지고, 두꺼운 돛이 넝마처럼 찢어졌다. 밧줄과 삭구에서 얼음비가 쏟아졌다. 그 충격파에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납작하게 붙인 채로 숨을 멈추었다. 안장에 몸을 꼭 맞대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다로 날려갔을 터였다.

  그 순간은 리알토 만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휘저어 놓을 것처럼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지만...결국 모든 게 끝나, 레바스는 악마의 군주가 수장된 무덤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치솟았고, 태양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야는 죽은 고대신의 거대한 시체에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동생의 작은 육신이 반짝이는 걸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되찾은 세상의 해변에서 마침내 휴식을 맞이했다.

  끝났다. 그들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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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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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숭고의 시대

 

  스탁헤이븐 이후로, 이세야의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유동맹에서의 전투는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동맹군과 신병들은 이름을 기억에 새길 새도 없이 빠르게 왔다가 사라졌다. 열병으로 죽은 이도,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잠식당해 죽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이나 화살에 쓰러져갔다.  콜링을 듣고 응답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소수에 - 아주 극소수에 - 불과했다. 회색 감시자와 그 동맹군은 착실히 자유동맹을 수복하고 있었지만, 마을과 마을, 도시와 촌락을 되찾는 그 여정에는 걸음마다 피가 배어 있었다.

  아마디스는 그들이 이겨가고 있다고 했고, 개러헬도 그렇게 말했다.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유동맹을 되찾아봤자 그들은 올레이와 안더펠스를 잃는 중이고, 어쩌면 티빈터 제국도 무너지고 있는 중일 거라고.

  이세야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승리란 게 뭔지 잊은지 오래였다.

  그들은 말라붙은 강둗과 죽은 숲을 지나, 말라빠진 풀쪼가리 뿐인 황량한 평야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끝없는 모래바람이 저주받은 대지 위를 휩쓸며 시야를 가렸고, 하늘에는 결코 내리지 않을 비의 약속을 품은 구름이 멍든 색으로 부풀어 있었다.

  지원군이 찾아들었다. 일부는 음식이나 잠들 수 있을 정도의 안전한 거처를 얻고자 찾아든 피난민들이었다. 자비로운 영주, 야심찬 지도자, 혹은 대재앙의 영향을 덜 받은 영주들이 자신의 영역만은 지켜내기 위해 보낸 군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추방자 출신이었다.

  개러헬은 생각지 못한 이들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추방당하거나 무계급층이었던 드워프들은 쪼개진 산맥 모양의 깃발 아래, 스스로를 돌의 사생아들이라 부르며 언젠가 그들의 유골이 오자마로 돌아가, 돌의 이름 아래 묻히길 바라며 하나로 모였다. 티빈터 제국에서 주인을 죽이고 대재앙으로 도망쳐나온 엘프들은 주인없는 자들이라 스스로를 칭했고, 무기만 쥐어주면 누구와든 싸우겠다며 충성을 표해왔다. 마지막으로, 템플러들의 추적을 피해 회색 감시자들 편으로 모여든 이단 마법사들의 모임이 무너진 탑이란 이름을 가졌다.

  그들의 충성심은 특정한 국가나 대재앙을 무찌르겠단 희망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러헬 개인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세야는 동생 옆을 지키며 그가 부리는 마법에 조용히 놀랄 따름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아주 단순하고도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엘프였고, 이름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고, 가난하고 더러운 보호구역 출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호스버그를 구해내고, 커크월과 컴버랜드 사람들을 도우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맹군을 하나로 모아 스탁헤이븐의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낸 영웅이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자신의 공이었다고, 이세야는 생각했다. 따지고 든다면. 그 영광을 이용해 많은 걸 할 수 있는 건 개러헬 쪽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자신의 공을 동생에게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서서히 닥치는 죽음으로 그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을 때라면.

  그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 싸우기엔 적이 너무 많았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헐록, 젠록, 오우거를 상대로 싸웠다. 죽어가는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강도질과 식인을 행하는 굶주린 인간들과도 싸웠다. 오염에 물든 곰이나 거미, 끔찍한 몰골의 구울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이세야의 기억 속에는 이 모든 게 하나로 뒤엉켰고,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 펼쳐진 뼈의 융단에 하나씩 더해질 뿐이었다.

  이세야가 적의 얼굴을 잊어가는 건 비단 단조로운 살육의 나날 때문만은 아니었다. 타락은 매일 아침 조금씩 그의 기억에 안개를 드리워갔다. 한 때는 매일의 생각을 샅샅이 기록한 연대기였던 그의 일기는 몇 주씩, 혹은 몇 달씩 방치되곤 했다. 그는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재앙의 현실과 악몽 속의 공포를 분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때때로 그는 어디로 향하던 중인지, 누구와 싸우던 건지도 잊곤 했다. 그리고 그 엘프는 마침내 선임 감시자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혼란스런 표정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역시 밤마다 점점 강해지는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동료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 비록 그들 모두 언젠가 콜링에 응답해야 할 날이 온다곤 하지만, 그 날이 오길 기다리기엔 대재앙을 상대로 한 전쟁이 눈앞에 놓여 있었으니.

  레바스만이 그를 맨정신으로 붙들어주는 시금석이었다. 그 검은 그리폰 역시 나이가 들고 있었고, 부상의 흔적과 누적된 피로가 눈에 띄게 티가 났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1, 2년 전 쯤 이미 은퇴했을 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감시자든 그리폰이든 그 누구도 대재앙 아래 쉰다는 건 불가능했고, 이세야에겐 그가 필요했다. 그리폰마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바스는 변형을 거치지 않은 채였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녀석들이 전부 거치는 동안에도.

  분명 처음에는 헤인 요새의 몇몇 그리폰에게만 입단식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버랜드와 커크월을 비롯한 자유동맹 도시의 대피작전에서 변형된 그리폰들을 끌어올린 그 힘과 맹렬한 분노를 보고 말았다.

  그 후,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꾸준히, 끊임없이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입단식을 거친 개체보다는 전성기의 그리폰이 더 강하다는 걸 회색 감시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대재앙이 오래 지속된 탓에 많은 개체가 쇠약해져 있었다. 많은 수가 늙고, 영양이 부족했고, 부상을 입었거나 오랜 활동으로 지쳐 나가 떨어졌다. 그런 그리폰들에게라면, 혈마법에 의한 강화된 속도와 힘은 그들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잃는 것도, 혹은 의식 후 나타나는 피 섞인 기침의 거슬림을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전투 사령관들이, 때론 수석 감시자가 직접, 입단식을 거쳐 계속해서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리폰을 하나둘씩 보내왔다. 그리고 타락에 물든 동료를 견디지 못한 그리폰끼리 서로 물어뜯지 않게 하려면 한 마리의 그리폰 당 서너 마리의 다른 개체가 함께 변형을 겪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기수가 거부하지 않는 한 명령대로 입단식을 거행했다. 처음에는 그도 거부했으나, 매번 결정을 번복하도록 상부의 명령이 내려왔기에 그도 마침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더 이상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계속 거부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 인한 절망이 그 자신의 타락을 가속시켰고, 어쩌면 혈마법 역시 거기에 한 몫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러헬과 그가 스탁헤이븐의 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동생에 비해 20년은 더 오래 감시자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뭘 신경써야 하는지도, 왜 그래야하는지도 잊고 말았다. 끝없는 대재앙의 진창 속에서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겪고 또 겪으며, 이제는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폰이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지든 타락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들의 거친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 혈마법 위에 또 다시 혈마법을 더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모든 감시자들은 그와 비슷한 희생을 이미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파멸할 운명이었다.

  때때로 자신의 그리폰이 변하는 걸 거부하는 감시자들도 있었고, 그럴 때면 이세야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애초에 그가 이걸 거부했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어둠의 피조물의 부식이 침습한 그의 정신은 이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단 한 가지 - 매일 밤 기도처럼 스스로에게 읊조리는 그것은 - 이 모든 게 대재앙을 끝내기 위한 대가라는 것이었다. 자유동맹에서 어둠의 피조물을 몰아내는 것.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끝내는 것. 어마어마한 대가이지만, 그래도...그것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가 대가를 치른다면, 악몽도 끝날 것이다. 언젠가.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고 검푸른빛 오염이 혈류를 타고 멍처럼 전신에 번지는 가운데, 그는 그 희망 하나에 매달렸다.

  그걸로 충분했지만, 결국 그걸로 충분치 않은 순간이 오고 말았다.

  "끝낼 기회가 왔소." 자신의 막사 안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와 아마디스는 몇 안되는 숙련된 감시자와 군사령관들을 소규모 회의에 불러모았다. 그의 보좌관이 화로마다 단내가 풍기는 장작을 채우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세야는 그 향내가 천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디스는 소소한 사치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뭐였는지 일깨울 것들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차치하고, 어쨌든 이 막사는 개러헬의 것인 동시에 그의 것이기도 했다.

  "기회라고." 아마디스는 호화로운 양가죽이 깔린 접이식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리칼이 그 용병 대장의 움직임을 따라 털가죽 위로 나부꼈고, 그는 몸을 기울여 보좌관이 가져다준 향이 가미된 와인 잔을 집어들었다. "우리가 결단력 있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말이야. 우린 어둠의 피조물들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고, 놈들도 그걸 알 거야.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승리를 거머쥘 기회인 거지."

  "무슨 계획인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최근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은 으레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부피가 큰 회색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 부식의 증거를 감추고 있었지만, 목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속에서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말할 때면 단어마저 왜곡돼 들렸다. 그 자신에게도 거슬리는 일이라 점점 덜 입을 열게 된 탓에, 이렇게 가끔 입을 열면 유달리 반응이 날카로웠다. 최근에 들어온 용병 대장과 올레이 슈발리에 두 사람이 그가 안 보는 줄 알고 미신적인 손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개러헬은 완벽하게 침착해 보였다. "안티바를 치는 것." 그는 대답했다. "우린 놈에게 위협이 될만큼 가까워졌소. 우리는 악마의 군주의 영역 한복판에서 놈을 상대할 것이오."

  "그대가 장갑을 던지면 그 짐승이 응대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올레이 슈발리에가 코웃음쳤다. 그는 회색 감시자들의 낡고 흠집 투성이인 갑옷에 비해 한층 위엄 있는 외관을 하고, 그에 걸맞게 스스로를 엄청 중요한 인물인 양 굴었다. 그가 입은 갑옷은 섬세한 무늬의 금박이 덧입혀진 빛나는 강철 재질이었. 어깨 갑주 위의 장미 문양 은 세공은 어찌나 광을 냈던지 꽃잎 하나하나가 거울처럼 빛났다. "놈에게 모욕당할 명예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세야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올리려 하니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몬...몽...몽포트,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헤인 요새에 있던 자였다. 그가 떠나기 직전쯤 도착했을 것이다. 침침한 기억이었지만, 용감한 이였던 것 같다. 혼신을 다해 그래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오." 개러헬이 대답했다. "명예보단 자존심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여주긴 할 것이오. 우리가 코앞에 전쟁을 들이댄다면, 악마의 군주는 응대할 것이오."

  "왜 아니겠어?" 아마디스가 동의했다. "이미 참아 넘기기엔 너무 많이 얻어맞았는걸. 분명, 놈은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우릴 무너뜨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야." 그는 차고 있는 팔찌에 달린 장식물을 달그락거렸다. 그가 죽인 백 번째 오우거의 송곳니를 가죽끈을 꼬아 매단 것이었다. 그 이빨이 손에 든 술잔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쨍 소리를 냈다. 챙그랑, 챙그랑, 핏빛 음료가 담긴 컵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가 그곳에 다다르면, 그대들 모두 함께 진군하는 것이오." 개러헬이 말을 이었다. "그리폰 기수들이 진격을 이끌 것이오. 다른 이들은 악마의 군주를 이끌어낼만큼 안티바 깊숙히 들어갈 수 없으니. 하지만 그대들의 지원이 필요하오."

  "내가 가겠소." 몽포트가 즉시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서 부드럽게 예를 취했다. "기갑 부대를 이끌고 지원하는 영광을 내게 맡겨주시오." 그의 갑옷이 막사의 불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몇몇 회색 감시자가 그의 등 뒤에서 재밌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개러헬은 그의 제안을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그대의 용기는 기억될 것이오."

  "루비 드레이크도 당연히 함께 할 거야." 아마디스가 말했다. 뒤이어, 다른 용병대들 역시 저마다 자신들의 용맹과 기술을 경쟁하듯 뽐내며 함께하겠다 나섰다. 개러헬은 왁자지껄한 그들의 과시를 담담한 얼굴로 새겨들은 뒤, 그가 필요한 이들을 추려냈다. 마법사, 궁수, 그리고 강철의 벽으로 그들을 둘러싸줄 돌의 사생아들. 그를 따르는 추방자들 거의 모두가 선택받았다.

  영웅이 돼야만 하는 이들이군, 이세야는 생각했다, 평화가 찾아와도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고.

  개러헬이 대부분의 회색 감시자들을 선택받지 못한 용병들과 함께 빼놓은 것 역시, 그에겐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남긴 이들은 대재앙 바깥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들이었다. 많은 이가 이세야처럼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이미 콜링에 응해 떠났을 이들이었다.

  "우리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군요." 모두가 막사를 떠난 뒤 남은 감시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우울한 인상의 완고한 안더펠스 남자로,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바람에 센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통상적인 상흔이 뺨 위를 세로로 하얗게 가로질렀다. 이세야 기억에 따르면 레호르란 이름일텐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안더펠스인의 두 눈 위로 보랏빛 눈두덩이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회색 감시자들은 그게 피로에 지친 흔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동맹군들에겐 굳이 알리지 않겠지만, 감시자들은 그게 콜링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자신의 통제력을 잃게할만큼 진전된 상태일 것이다.

  "난 언제나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개러헬은 빚어낸 듯한 가벼움을 싣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승산이 낮은 것만은 사실일세. 걱정된다면, 뒤에 남아도 좋네."

  "싫습니다." 안더펠스인이 비웃듯 대답했다. "전장에서 뒤로 빠져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좋아, 그럼 정해진 거군." 엘프는 막사를 가로질러 간 뒤 접이식 책상 위에 놓인 전투지도 위에 손끝으로 선을 그었다. 그들의 진영으로부터 안티바 시티를 표시하는 성 그림까지 쭉 잇는 선이었다. "우리가 갈 경로이네. 적들의 머리 위를 바로 지나쳐서, 놈들이 우리가 가는 걸 알게 할 거야. 아마디스는 보병 부대를 이끌고 알바우드의 언덕까지 이끌고. 그 언덕이 어둠의 피조물들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들이 대기하는 사이 우리는 악마의 군주를 화살 사격 범위 안으로 유인하는 거야."

  "긴 비행이 되겠군요." 레호르가 개러헬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고 속도로 비행하기엔 너무 길 수도요."

  "그래서 가장 강한 그리폰들만 데려갈 생각이라네."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이세야가 물러나 서있는 그림자진 구석을 돌아봤다. "지치지 않을 녀석들로."

  레호르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회색 감시자들 역시 불편한 웅얼거림을 주고받았다. "우리더러 입단식을 거친 놈들을 타라는 겁니까?"

  "그대의 그리폰이 임무를 버틸만큼 강하고 빠른 게 아니라면, 그렇네."

  "놈들은 미쳤다고요." 레호르는 딱딱하게 말하며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그 안의 분노가 너무 커요. 어둠의 피조물 가까이 가면 놈들은 이성을 잃을 겁니다. 날뛰어서 적들에게 달려들고 나면 다시 붙들 수가 없어요. 악마의 군주와의 전투에 놈들을 타는 건...자살시도나 마찬가지입니다. 재앙이나 다름 없을 거예요."

  "그럴 것 같았다면 이런 작전을 짜지 않았겠지." 개러헬이 대답했다. "하지만 난 내 누이를 믿고, 이번 기회가 최선의 기회라고 믿네. 어쩌면 악마의 군주를 동맹군 근처까지 유인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놈이 우릴 따라오지 않는다면, 놈과 공중에서 맞붙어야 하네. 그렇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 있는 - 그리고 싸우려 할 그리폰들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들은 이세야를 돌아봤다. 눌러쓴 후드 안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움츠러들었다. 그를 보는 감시자들의 시선에는 의심과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들이 개러헬을 볼 때와 같은 희망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들에게 난 괴물이구나.

  탓하고 싶진 않았다. 한 때 엘프였던 그 자신은 이미 그 안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남아있지,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악마의 군주를 쓰러트리기 위해 역할을 다 할 정도로는. 딱 한 번만 더 싸우면, 그러고나면 이 끝없는 비탄과 희생의 행군에 작별을 고할 수 있다. 딱 한 번, 그러고나면 그는 이 묵직한 영웅의 업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내가 놈들을 통제하겠소." 그는 대답했다.

 

* * *

 

  개러헬이 작전을 짜는 사이 막사엔 밤이 찾아들었다.

  모든 걸 마쳤을 땐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였고, 이세야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막사로 걸어서 돌아갔다. 주위에선 모닥불이 검푸른 어둠을 밝히며, 고독의 바다 한 가운데 빛과 온기의 섬처럼 빛나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말들이 푸릉거리는 소리와 병사들의 코고는 소리, 그리고 서로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마치 그 옛날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만큼이나 익숙하게 들려왔다.

  그의 막사는 조용했다. 레바스는 북적거리는 곳에서 자는 걸 싫어해 야영지에서 먼 곳에 스스로 둥지를 트는 편이었고, 이세야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부식이 혈류를 타고 그를 갉아먹는 지금이라면, 혼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거의 자각도 없이, 그는 자신의 막사를 지나,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여러 천막과 울타리, 꺼져가는 모닥불들을 지나쳐 익숙한 곳에 도달했다. 칼린의 막사는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재앙으로부터 그의 꿈을 지켜주는데 도움이 된다는, 선명한 녹색과 금색의 천으로 얼기설기 기워져 있었다. 수년 간 색이 많이 바래기도 했고, 밤의 어둠에 그 반짝임이 많이 묻히긴 했으나, 주위의 단조로운 원형 천막에 비하면 단연 눈에 띄었다.

  이세야는 멈춰섰다. 불빛이 꺼져있으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그냥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불은 켜져 있었다. 천막 귀퉁이로 금색 불빛이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비쳐보였다.

  후드를 뒤로 젖힌 뒤, 이세야는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천 위로 소리가 많이 묻혔음에도, 칼린이 대답했다. "들어와."

  "방해하려던 건 아니야." 이세야는 고개 숙여 들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칼린이 대답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추레한 몰골에 두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모습이었지만, 그는 지친 미소로 말가죽 베개를 이세야에게 내밀었다. 엘프는 그걸 바닥에 깐 뒤 막사 안을 밝히는 하나 뿐인 기름등 옆에 어색하게 자리잡았다.

  마법사의 무릎께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이세야가 손짓했다. "책 읽느라 안 잔 거야?"

  "잘 수가 없었어. 이 정도 겪어왔으면 전투 전에 푹 자는 게 중요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악마의 군주와 맞서 싸우러 날아갈 생각을 하니 어쩐지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더군." 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잠시 경건한 독서시간을 가져보면 좀 안정을 찾을 줄 알았지. 아니면 지루해서 잠들든가, 어느 쪽이든 간에."

  "성서를 읽었단 말이야? 당신답지 않네. 우리가 이미 기도에 매달릴만한 단계를 한참 지났다는 거,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랬지.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는 건 아니더라고."

  "아, 선물받은 거란 말이지?" 이세야는 새로 솟은 호기심으로 책을 다시 확인했다. "당신한테 기도서를 준 게 대체 누구야? 아무래도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인가 봐."

  "아, 아무래도 그렇지." 칼린은 책을 덮고서 침낭 뒤로 안 보이게 밀어넣었다.

  이세야는 그의 목소리에 감춰진 상처받은 기색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과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

  "알아. 정말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 말이 맞아. 그이는 날 잘 알지는 못하지."

  "누가 그 책을 준 거야?" 이세야가 물었다.

  "내 목표물이었던 자의 어미." 그가 대답했다. 이세야의 놀란 기색에, 칼린은 찡그린 웃음과 함께 담요로 뒤덮인 그의 여행용 가방에 몸을 기대었다. "본인은 모르는 일이지만. 아들이 암살된 것조차 몰랐을 거야. 그이는 그저 아들이 운 없게도 망가진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에 맞고 만 거라 생각했을 거고, 나는 그저 애도의 시기에 그를 도와준 정 많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왜 그랬어?"

  "그이가 내 어머니와 같은 향수를 썼으니까." 칼린은 그 작은 책을 다시 집어들고 표지를 내려다봤다. 금박을 입힌 제목이 불빛 아래 반짝였다. 이세야 역시 불빛에 스친 은빛을 눈에 담았으나, 제목을 읽어내진 못했다. "그분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얼굴이든, 이름이든. 내가 아주 어릴 때 떠났으니까. 기억나는 거라곤 그분이 쓰던 향수 뿐...그마저도 이름은 모르지만 말이야. 레몬 꽃처럼 단 향이긴 한데, 정확히 같진 않아. 꽤 오랫 동안 나는 그것조차 내 상상일 거라 생각했지만, 목표물을 따라가던 중에 그 향을 맡고 말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 어미에게 관심을 둘 리도 없었을 거야. 그이는 올레이의 귀족 여성이었고, 힘 깨나 있는 작자의 정부이자 그 아들의 어미였지만, 내 어미는 이름이 남을 만한 이도, 그렇게 힘이 있거나 부유한 이도 아니었겠지. 하지만 어째선지 그 둘은 같은 향수를 썼고, 그리고 그 귀족여성이 마침 비슷한 연배였던 탓에, 내게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 짓을 하게 만든 거야. 물론 일은 제대로 마쳤어. 안티바 까마귀단은, 목표물이 그저 어쩌다 복잡한 상속의 굴레 안에 끼어있었다는 죄 밖에 없는 어린아이일지라도 계약을 반드시 완수하니까. 하지만 나는 일을 마치고도 예정보다 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고, 상중인 그 어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어. 그 후에도 우린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고. 몇 년 사이 좀 더 가까워졌지. 하지만 그이는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안티바가 무너진 뒤로 감시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 뿐."

  "그래서 당신한테 기도서를 보낸 거고?"

  칼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올레이에서 보냈더라고. 회색 감시자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갖다줬어. 그이가 창조주께 기도드리겠다더군, 나를 지켜달라고, 그리고 대재앙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달라고."

  이세야는 그 감상적인 태도에 코웃음 칠 수도 있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어린 표정에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창조주가 눈앞에 닥친 위험 앞에 누군가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은 진저리칠만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아들의 어미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 역시 끔찍한 일이었지만...그 모든 것은 어쩐지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그는 얼굴없는 모친의 유령과 어떻게든 이어지려는 칼린의 노력을 폄하할 수도, 잃은 자식을 어떻게든 대신하고자 하는 올레이 여자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둘 중 누구도 정말로 원하는 걸 얻지는 못하지만 그 대체품에서나마 다른 종류의 사랑을 얻고 있었고 - 그게 아무리 불완전할 지언정, 이세야 자신이 가진 것보단 충분했다.

  "아직 그 사람은 살아있나보네, 어쨌든?" 엘프가 말했다.

  "그래. 대재앙이 아직 그이에게 닥치진 않았고, 적어도 강도 떼나 빈곤한 피난민들이 도시에 밀려드는 것 이상의 해를 끼치진 않은 모양이야." 칼린은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조주께, 부디 계속 그러하길."

  "그럴 거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는 까칠까칠한 갈색 베개를 옆으로 밀어놓고 문가로 돌아섰다. "고마워."

  "뭐가?"

  "내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일깨워줘서." 엘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밤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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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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