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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놈들이 오고 있어." 리스메는 놋쇠 망원경을 얹은 왼쪽눈을 찡그린 채 모두에게 알렸다. "스카이버너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양성의 마법사는 아직도 분홍빛으로 생생하게 남은 지하대로에서의 상처를 특유의 축제 같은 분장에 잘 녹여낸 듯 보였다. 오늘 그는 남성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맞춰 긴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막 아물고 있는 분홍빛 상처 주위에서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콧수염 사이로 얼굴 왼쪽면을 따라 한줄기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얼마나 돼보여?" 이세야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그에게 작은 무리의 마법사와 궁수로 이뤄진 그리폰 부대를 맡겼다. 그의 지휘 하에 있는 감시자들은 전부 노련한 숙련자들이었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 중요하지만, 큰 역할은 아니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예상보다 큰 규모로 몰려온다면 그들의 작전은 성공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의 임무는 호스버그의 남쪽, 라텐플루스 강줄기를 따라 보이는 어둠의 피조물을 전부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동맹군들은 거의 개러헬의 지휘 하에 도시의 북서쪽으로 집결했고, 그곳으로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집중될 예정이었다.

  남쪽 전방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지만...그 텅빈 모습은 전부 위장에 불과했다. 초대라도 하는 양 넓게 펼쳐진 벌판은 후방에서의 기습을 꾀하는 어둠의 피조물 군대를 제법 끌어모았고, 이제 감시자들이 해야하는 일은 화살이나 검보다는 함정이나 주문으로 놈들을 해치우는 일이었다.

  "대충...200마리, 아니면 250 정도." 리스메는 잠시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그는 망원경을 내리고 어깨 너머로 이세야를 돌아봤다. 바람에 펄럭이며 흩날리는 머리칼이 검은 비단 휘장처럼 그를 휘감았다. "거의 헐록들이고, 쉬릭도 몇 마리 있어. 오우거는 세 마리야."

  "악마의 군주는 없고?" 이세야가 물었다.

  "없어." 리스메의 대답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가 안더펠스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믿을만한 정보는 6일 가량 전 안티바시티의 폐허 근처에서 목격된 일이었다.

  안심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오늘의 전투에 악마의 군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놈이 나타난다면 대재앙을 끝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몰살당할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기에. 7년의 길고 긴 포위 공격에 시달린 탓에, 호스버그의 수비병력은 그런 거대한 적을 마주할만한 상태가 못 됐다.

  리스메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접근 중인 어둠의 피조물들을 관찰했다. 이세야의 눈에는 지평선 위에 한줄기 검은 선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재앙의 가뭄 속에 옛날 보다 20~30 야드는 더 얕아진 라텐플루스 강줄기가 앞장 선 무리의 들쭉날쭉한 대열 뒤로 일렁이며 반짝였다.

  그리고 놈들의 전방에, 감시자들이 그리폰과 함께 매복중인 지점과의 중간 정도 되는 곳에 스카이버너가 준비돼 있었다.

  드워프들이 지하대로 안에서 어둠의 피조물에 맞서기 위해 고안해낸 함정을 변형시킨 스카이버너는, 기본적으로 커다란 자기 항아리 안에 쇳조각이나 망가진 갑옷, 뾰족한 돌덩이 따위의 파편 같은 걸 가득 채워 파묻은 모양새였다. 각각의 항아리 중앙에는 룬 문자를 리륨으로 새겨둔 특별한 돌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드워프들은 적당한 자극만 가해지면 제대로 폭발할 거라고 동생에게 다짐했다. 비록 다소 부정확하고 때때로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그 리륨 룬은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확실한 타격을 입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죽은이들의 무기 주위로 묘비처럼 쌓아올린 돌무더기는 올레이식 전통이나 일부 티빈터 제국의 풍습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테다스를 지배하는 국가 중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가진 곳은 별로 없었고 - 악마나 악한 영들이 그 유골을 차지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으니 - 그들은 대부분 시체를 불태운 후 유품인 무기를 묘비로 삼곤 했다.

  하지만 안더펠스의 삶은 충분히 가혹했고, 죽은 이를 위해 남겨두기에 무기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인간들의 풍습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바위더미 사이에 꽂힌 귀중한 미늘창과 죽창의 흔적에 좀 더 의심을 품었을 터였다.

  하지만 개러헬은 어둠의 피조물들에게 그런 섬세함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놈들이 희생자로부터 성한 무기를 챙길 기회를 지나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헐록이나 젠록들에게는 세공 기술이라 할만한 게 없었다. 그들은 구울들이 조악하게 만들어내는 도구에 의지해야했고, 구울들은 그리 능숙한 대장장이라고 알려져 있진 않았다. 즉, 그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네 개의 돌무덤을 발견하면 신나서 무기를 차지하러 달려들 것이고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 죽창과 미늘창, 쇠를 덧댄 지팡이 더미에 손을 대는 순간, 놈들은 죽는 것이다. 무기더미 바닥 주위로 깔린 철망덫이 숨겨진 스카이버너와 연결돼 있었다. 리륨 룬 문자가 발현되기까진 짧은 간격이 있었고 - 운이 따른다면, 그 사이 더 많은 어둠의 피조물이 함정 안에 들어온 뒤에 - 스카이버너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치러줄 것이었다.

  이세야는 그 광경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불꽃놀이를 좋아했고, 이 드워프제 폭탄은 분명 훌륭한 품질을 선보일 것이었다. 이 물건은 동맹을 끌어모으기 위한 개러헬의 끝없는 노력의 성과로 고작 몇 달 전에야 받은 것이라 아직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드워프들은 전사들을 직접 보내는 건 꺼려했으나, 광부 계급의 두 자매와 다양한 재료가 담긴 짐마차 몇 대를 감시자들에게 보내왔다.

  "거의 다 왔다." 리스메가 속삭였다. "준비해."

  이세야는 끄덕이곤 다른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리스메도 뒤따라 와 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망원경으로 어둠의 피조물들의 위치를 계속 추적했다.

  작전에 참여한 회색 감시자는 고작 스물세 명이었고, 열두 마리의 그리폰이 동행했다. 그들은 호스버스의 광부들이 마른 호수 형태로 파놓은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골짜기엔 라텐플루스 강이 흘렀겠지만, 대재앙이 계속되는 사이 수위가 점차 낮아져 골짜기 바닥에는 끈적한 진흙만 남아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엔 모기들이 번창하기 딱 적당한 정도의 습도만 남아 대기 중인 회색 감시자들을 괴롭게 했다.

  구름떼 같은 모기들을 휘저어 쳐낸 이세야는 레바스의 안장에 올라탔다. 칼린은 이미 승객용 안장에 자리잡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 역시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모두들 두 사람씩 태우고 있었지만, 다나로의 때까치만은 입단의식 이후로 몹시 예민해진 터라 자신의 주인 이외에는 누구도 태우려 하지 않았다.

  때까치는 다른 그리폰들과 거리를 두고 어쩐지 풀죽은 듯한 모습으로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세야가 의식을 행한 후 회복한 듯 보였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어쩐지 앙심을 품은 것만 같았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난 그는 성미가 사나워졌고, 다른 그리폰들 역시 녀석에게 적대감을 보였다. 다른 그리폰과 위험할 정도로 싸운 것만 해도 두 번이었고, 마굿간지기 소년은 저녁 식사용 염소를 갖다주고 조금 오래 머물렀단 이유만으로 팔에 흉한 상처를 얻기도 했다. 오직 다나로만이 그의 증오에 찬 눈빛이나 패악을 겪지 않은 채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때까치에게 두 번째 승객을 태우지 말자는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세야는 오늘 일이 무탈하게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 멀리 북쪽에서는 신호용 북과 찢어지는 나팔 소리가 진군을 알려왔다. 호스버그의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주저하듯 고개를 돌리는 몇몇 놈들은 라텐플루스 여울을 건너야 할지 전장으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놈들은 무기 더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우거들이 가장 먼저 전진했고, 자신들이 쓰기엔 턱없이 작은 포상품을 향해 달려들며 작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이리저리 집어 던졌다. 뾰족한 주둥이의 쉬릭들은 오우거의 발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달리며 덩치 큰 놈들을 앞지르려 노력했다.

  놈들이 항아리에 닿았을 때, 어둠의 피조물들은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은 놈들에게 유리하게 불고 있지 않았지만, 이세야는 긴장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의 능력은 예측불가였고, 때때로 놈들은 감시자들이 입단의식으로 획득해 놈들을 감지하는데 쓰는 것과 똑같은 동질성으로 회색 감시자들을 느끼곤 했다.

  혹여 놈들이 골짜기에 숨어있는 감시자들을 알아차렸는지는 기색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오우거들이 항아리로 몸을 숙였고, 쉿쉿거리는 쇳소리를 내는 쉬릭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놈들의 두툼하고 마디진 커다란 손과 바늘처럼 날카로운 비쩍 마른 손이 죽창과 지팡이를 붙잡았고, 함정과 연결된 무기들을 끄집어내 의기양양한 괴성을 지르며 들어올렸다. 느리게 도착한 헐록과 젠록들이 뒤를 이었고, 놈들은 부러운 듯 으르렁대고 툴툴거리며 쉿쉿거리는 쉬릭들에게 작은 무기 쪼가리라도 뺏으려 엎치락뒤치락 했다. 춤추듯 둥글게 둘러싼 녀석들의 무리가 포상품을 다투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그리고 대지가 그들의 발밑에서 폭발했다.

  태양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청록색의 불꽃덩어리 네 개가 흙더미를 이십여 피트 높이로 솟구쳐 올렸다. 이백 야드도 넘게 떨어진 곳에 대기하던 회색 감시자들에게도 압력의 여파가 몰아쳐 이세야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숨이 턱 막히게 했다. 마법 불꽃이 가장 가까이 있던 어둠의 피조물을 불태우며 눈 깜짝할 사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잿더미로 만들어놨다. 바위와 하얗게 달아오른 금속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어둠의 피조물들을 조각조각 베어내고 찢어냈다. 폭발 가까이 있던 놈들은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스카이버너의 위력은 이세야가 본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었다. 회색 감시자들을 향해 치솟은 바람은 살육의 흔적을 담아 끈적하고 무거운 냄새를 풍겼고, 언저리에선 태운 리륨의 매캐한 향이 감돌았다.

  "가자." 그는 동료들에게 명했고, 레바스에게 비행 신호를 보냈다.

  거센 날개짓과 함께 회색 감시자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의 임무는 혼란에 빠진 부상당한 어둠의 피조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가혹하리만큼 깔끔한 작업이었다. 화염구가 비틀거리는 헐록무리를 꿰뚫었고, 돌덩이가 죽어가는 오우거 위로 쏟아졌다. 얼음폭풍과 서리화살이 젠록의 검은피를 얼렸고, 쉬릭의 가느다란 뼈를 바스라뜨렸다. 무너진 대지가 리스메가 일으킨 지진과 이세야의 장력주문을 따라 흔들렸다. 난전 사이로 꽂혀드는 궁수들의 화살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강으로 유인할 생각이었으나, 그리폰 부대가 두 번 스쳐간 뒤엔 유인할 잔당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드워프들의 스카이버너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위력을 선보였고, 그들의 소박한 매복작전은 완벽한 학살극으로 마무리됐다.

  본격적인 전투는 좀 더 까다로울 듯 보였고, 이세야는 때까치가 이미 자기 앞쪽의 적들에게 달려드는 중인 걸 발견하자 즉시 감시자들을 가다듬어 공격에 나서게 했다. 

  다나로는 안장 위를 딛고 일어서서 있는 힘을 다해 고삐를 추스르고 있었지만, 완전히 격노한 그리폰을 멈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때까치의 분노는 이세야가 본 그 어느 것보다도 무시무시했다.

  그 그리폰은 한 무리의 무장한 오우거 떼를 향해 날아들었다. 인간과 드워프로 이뤄진 한 쌍의 회색 감시자가 놈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둘 다 어둠의 피조물의, 그리고 대부분은 그 자신들의 것일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오우거 무리에 시야가 가려 이세야는 아주 잠깐 밖에 그들을 볼 수 없었지만, 두 감시자가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때까치의 주의를 끈 게 그 감시자들의 위태로운 상태인지, 단순히 오우거가 가장 커다란 타겟이기 때문인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었든 간에, 그 그리폰은 저돌적으로 내리 꽂혔고, 가장 덩치가 큰 오우거의 뒤쪽에서 웅크린 발톱으로 목을 덮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머리가 전방으로 확 꺾였고, 그 거대한 괴수는 선 채로 즉사했다.

  다른 오우거 두 마리가 그리폰을 붙들었다. 한 놈이 때까치의 왼쪽 날개를 붙잡아 흉포하게 비틀었다. 이세야는 그 그리폰이 오우거의 손에 붙들려 고꾸라지는 것까지 보고 때까치도 그 기수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고, 레바스는 다시 전장 위를 훑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레바스가 다시 그쪽으로 향했을 때 그는 그 그리폰이 죽어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때까치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여전히 날고 있었다. 부상입은 날개는 휘저을 때마다 망가진 연처럼 퍼득거렸으나, 마법의 힘이든 아드레날린 덕이든 단순히 맹렬한 의지 덕이든 간에, 때까치는 여전히 공중을 날고 있었다. 다나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등에 매달린 채, 주문을 외울만한 여유가 주어질 때마다 반쯤 마무리한 주문을 오우거들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세야의 등 뒤에서 칼린이 숨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엘프는 자백하듯 대답했다. "나는 그저 그를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에서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내가 의도했던 건 아니라고. 나도 저게 뭔지 모르겠어."

  방향을 돌린 뒤, 이세야는 오른팔을 들어 다른 감시자들에게 신호했다. "비행 부대! 공격!"

  명령이 그의 입술 끝을 채 떠나기도 전에, 레바스는 이미 아래로 뛰어들고 있었다. 때까치와 달리, 레바스나 다른 그리폰들은 훈련받은 전술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전장을 주의깊게 훑으며 빠르게 요리조리 몸을 틀어 어둠의 피조물이 날리는 주문이나 검은 화살을 피해가며 그들의 기수가 준비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 보조했다.

  소규모의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젠록 어쌔신 무리에게 당하는 중인 걸 발견한 이세야는 레바스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붉은 드래곤 깃발 아래 남녀 가리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고 있었으나, 젠록 쪽이 다소 우세해 보였다. 놈들의 혈관을 흐르는 기묘한 마법 덕에, 그 단단한 어둠의 피조물은 그림자 사이로 안티바 까마귀단 못지 않게 은밀하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놈들은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그들을 마주하려 돌아설 때마다 사라져서는 측면에서 나타나 재빠르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법의 힘이라면 그 불리함을 극복할 수도 있을 터였다. 레바스가 젠록과 용병 무리 위로 스쳐가는 찰나, 이세야는 철저하게 계산된 초자연적인 냉기폭풍을 전장의 외곽을 따라 흘려보냈다. 뒤를 이어 칼린 역시 이차적인 서리 쐐기를 사이사이 박아넣어 이세야의 마법에 중첩되어 미처 붙들지 못한 적들까지 붙들어냈다.

  두 사람의 연쇄 마법은 대부분의 어쌔신을 잡아냈고 - 일부 루비 드레이크 일원이 포함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지만 - 놈들을 얇은 유리막 같은 얼음틀에 봉쇄해 버렸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던 놈들은 그 안에서 즉사하며 분홍빛 얼음고치를 만들었다. 나머지는 무력하게 묶여있던 치명적인 몇 초 사이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남아있던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장 곳곳에서 다른 그리폰 기수들 역시, 난장판 속에서 자잘한 충돌지역에 뛰어들어 아군을 돕기 위해 힘을 보태가며 비슷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법에 의해 피어오른 곳곳의 불길에서 연기와 재가 날아들어 눈과 코를 찔러댔지만, 모두들 고통에 아랑곳 않고 싸워나갔다. 감시자 보병들이 퇴각할 수 있게 엄호 화살을 쏘아댔고, 불꽃과 돌무더기를 날려 헐록과 젠록 무리를 밀어내 아군이 재편성할 수 있게 했으며, 오우거나 주문을 쏟아내는 에미서리를 교란시키기 위해 반짝이는 환영을 자아내어 지상의 병력이 그 혼란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넝마조각 같은, 마치 진짜 마법사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양 지나치게 큰 로브자락을 걸친 헐록 에미서리가 검은 불꽃을 내뿜어 그리폰 한 마리를 가격했다. 그 그리폰은 거칠게 나부끼는 와중에 중심을 잡으려 몸부림쳤으나, 오우거가 던진 바윗덩이가 그 전에 녀석을 격추시켰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두 감시자도 함께 떨어졌고,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달려들어 그 죽어가는 짐승을 발톱과 톱날같은 칼날로 찢어놓기도 전에 이미 그 밑에 깔려 죽은 뒤였다. 놈들의 야만적인 학살에 붉은 피가 안개처럼 흩뿌렸다.

  이세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어떻게 막아볼 수 있었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역시도 위험에 처해 있었으니. 석궁을 장전한 젠록 무리가 레바스를 공격하고 있었고, 그와 칼린이 날려대는 화염수가 궁수와 화살들을 불태우곤 있었으나 그리폰이 그 맹렬한 기세를 뚫고 나가기엔 너무 위험이 컸다.

  화살 하나가 이세야의 팔을 빗겨갔다. 이어 갑옷을 두른 안장 앞쪽으로 화살 두 발이 더 빗겨갔다. 엘프는 최대한 엄폐할 수 있게 몸을 웅크린 채로 레바스에게 퇴각 신호를 보냈고, 화염마법으로 최대한 시간을 벌려 했다.

  자잘한 자상과 석궁 화살에 맞은 채로, 검은 그리폰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젠록의 화살이 그를 뒤쫓았으나 놈들의 무기로는 수백 피트 위의 레바스를 맞출만한 능력도 정확함도 부족했다.

  그들은 뭔가를 하기엔 너무 멀지만 상황을 내려다볼 수 있을만한 높이에서 전장 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이세야를 놀라게 한 것은 때까치가 여전히 땅 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온통 피범벅이 된 모습 덕에 처음엔 바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다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광기에 찬 그리폰으로부터 도망쳤든가, 아마 이미 죽은 거겠지.

  어느 쪽이든, 때까치가 그 사실을 알기는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그리폰은 광란의 전투에 빠져있었다. 그는 오우거 하나를 발로 차 헐록 무리 위로 넘어뜨렸고, 그 돌진력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그 자신도 넘어졌다가 그대로 오우거 위로 올라타 온 발톱을 이용해 놈을 찢어대며 목줄기를 부리로 물어뜯었다.

  그 맹렬한 공세 탓에 그 자신은 헐록의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작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자세를 바로 잡고는 그에게 달려들어 찔러대고 베어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까치는 용케 대다수의 공격을 피해낸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디를 공격할지 미리 알기라도 하는 것마냥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 그러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았고, 때까치는 놈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 적어도 그가 어떻게 여지껏 살아남았는지는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의 힘과 속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돼 있었다. 그는 보지도 않고 헐록의 검으로부터 뒷다리를 당겨 피했고, 이어 - 여전히 보지도 않은 채, 이세야가 감히 눈으로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속도로 - 같은 다리를 기괴한 각도로 내뻗어 그 헐록의 내장이 다 드러나게 배를 갈라 대지 위에 흩뿌렸다.

  칼린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세야는 그저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연기를 뚫고 소리를 질러댄 탓에 건조해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나도 몰라. 아주 오래된 감시자들이 저럴 수 있단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아. 너무 오래 버티다보면, 거의 콜링을 듣기 직전 쯤이 되면, 어떤 이들은 어둠의 피조물과 너무 가까워져서 놈들의 생각이 메아리처럼 들린대. 그리 오래가진 않지만. 그건 아무래도 끝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때까치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군, 분명히." 칼린은 잠시 말을 멈췄고, 비록 그가 등 뒤에 앉아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이 혈마법사와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덕에 그가 지금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고심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해, 그냥." 그가 속삭였다.

  "네가 한 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가 원한 건 그저 때까치가 살아남는 것 뿐이었다. 저렇게 날개 달린 파괴의 화신이 되길 바란 게 아니라.

  "하지만 다른 이들이 원할만한 것이지." 그는 마침내 비틀거리기 시작한 때까치를 가리켰다. 그 그리폰의 회색 날개는 붉고 검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개깃에선 움직일 때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몸통 여기저기엔 동상과 자상이 가득했다. 부러진 화살이 목덜미에 하나, 오른 앞발에 하나씩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고, 그를 둥글게 둘러싼 시체의 산은 열마다 각각 다섯 구는 넘어 보였다.

  전방에서는 놋쇠나팔 소리가 아군의 승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들이 이겼다. 어둠의 피조물 부대가 무너졌고, 저 멀리 어딘가 있을 악마의 군주가 이 전투에 흥미를 잃고 패잔병들의 통솔에 손을 놓은 탓에 혼란에 빠진 졸개들이 우왕좌왕 했다. 헐록과 쉬릭 무리는 죽은 동족의 시체를 넘어 이리저리 흩어졌다. 도망치기엔 너무 크고 느린 오우거들은 마저 싸우며 최대한 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감시자와 동맹군 사이에서 환호성이 들려왔고, 그들은 충전된 사기로 무장한 채 패잔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내 그들의 승리는 추격전으로 바뀌었고, 어둠의 피조물들은 라텐플루스 강으로 쫓겨나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세야는 그 환호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쓰러진 때까치를 내려다봤다. 그들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악마의 군주가 살아있는 한, 그 어떤 승리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늘 호스버그가 해방됐다 해도, 한 주, 한 달, 혹은 일 년 안에 어둠의 피조물에게 다시 함락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칼린이 옳았다. 이세야는 감히 인정하고 싶지 않음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폰들이 지금보다 더 맹렬해지길 원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리폰 기수들은 원하지 않겠지만 - 그 짐승들을 친구나 신뢰하는 파트너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 동물을 그저 전략적으로 소모할 수 있는 전쟁의 도구로만 여기는 이들, 스카이버너나 투석기와 다를 바 없이 여기는 이들이라면 어떤 비용이 들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이건 내 주문이었어." 그는 큰 소리로, 칼린과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들은 전장 위 높은 상공에 떠 있었고, 바람에 실려 피냄새와 연기가 풍겨왔지만 다소 옅게 느껴졌다. 레바스의 털에서 풍기는 사향이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직 나만의 것일 거야. 누구도 이 비밀을 알지 못해. 그리고 나는 다시는 이걸 쓰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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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 - 챕터 12  (0) 2020.04.26
LF - 챕터 11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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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다나로가 물어왔다. 나직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이라곤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말하는 도중 무의식적으로 부상 입은 다리를 덮은 거친 재질의 담요 귀퉁이를 구겨쥐었다. 그 천자락은 지난 며칠간 초조한 손길에 시달린 흔적으로 때가 타 구겨져 있었다.

  하루이틀 정도 뒤면 그는 호스버그 의무실 밖으로 나설 수 있을 터였다. 치유사들은 이미 거의 모든 상처를 치료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그저 다리의 상처로부터 독이 더 번지지 않는지 이따금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마법사에게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 때까치의 상태였다.

  "나는 내 그리폰이 날 구하느라 죽는 걸 원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를 이대로...구울이 되게 둘 수는 없어."

  "그러지 않을 거야." 이세야는 약속했다. 다나로의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가서 마음이 아파왔다. 모든 기수들은 방랑자의 경우처럼, 전투 중 자신의 그리폰이 쓰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끔찍할 지언정 적어도 빠른 과정이긴 했다. 고통에 시달리며 느리게 구울이 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만큼 끔찍했다.

  "퍼렐든에 자라나는 야생화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다나로는 입을 열었다가, 미처 생각을 끝내지도 못한 채 씁쓸하게 말을 줄였다. "어린애들용 이야기일 뿐이겠지. 너무 절박해서 멍청해졌나봐, 나도 참, 애들 얘기 속에서 희망을 찾다니. 설사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 한들, 지금 와서 뭐? 대재앙이 시작된지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꽃이 있어봤자 이미 뿌리까지 싹싹 뽑힌지 오래겠지. 차라리 저 창문으로 요정 대모님이 날아들어 반짝이는 지팡이를 휘둘러 그를 구해주길 바라고 말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이세야가 말했다. 침대 옆에 선 그는 확신 없는 눈으로 다나로를 내려다봤다. "네가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설마 입단 의식을?" 다나로는 그 단어를 내뱉으며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억눌렀다. 그는 큼직한 엄지손가락으로 콧잔등에 난 사마귀 문질렀다. "그런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리폰에겐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아. 그 시도만으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난장판이었어서 지난 50년 간 아무도 그럴 생각조차 안한 거라고. 그리고 설사 그 실험이 성공적이었어도...이미 타락으로 죽어가는 그리폰에겐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럴지도 모르지." 이세야는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것 뿐이야. 최초의 의식은 지금의 때까치 같은 운명을 앞둔 사람들로부터 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됐던 거였어. 이제 와서 더 잃을 게 뭐 있어?"

  "많지, 사실." 다나로는 미소 지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끌어올렸으나 결과적으론 찡그리는 모양새가 됐다. 그는 사마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담요 위로 떨구곤 천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때까치. 너. 어쩌면 다른 친구들까지도. 그리폰들에게 입단 의식을 시도했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들었던 거 너도 기억하잖아."

  "물론." 그런 시도가 마지막으로 있던 건 50년도 전의 일이었지만, 감시자들은 여전히 그 때의 교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마바리를 대상으로 한 입단 의식은 인간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죽는 놈도 있었고, 살아남는 녀석들은 회색 감시자들과 비슷한 면역력과 적응력을 획득했다. 충분히 오랫동안 살아남기만 한다면 아마 녀석들도 콜링을 겪었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은 개가 있었단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개들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짧았고, 전투견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리폰은,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야수는 입단 의식 도중 통제할 수 없는 맹렬한 분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공격성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만 위험에 빠트린 게 아니라, 그 자신마저 목표로 삼았다. 그리폰이 품은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증오는 스스로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타락에게까지 향했고, 그 고귀한 생물은 혐오감에 몸부림치며 스스로의 육신을 찢어댔다. 초기의 실험에서 발생했던 그 끔찍한 비극은 회색감시자들에게 감히 같은 일을 다시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감시자들은 혈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칼린이 그에게 가르친 내용들 속에 그리폰에게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이게 하는 열쇠가 숨어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만 있다면, 아주 약간만 뒤틀어놓을 수 있다면...완전한 속박이 아니더라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정도라면...어쩌면 그 맹목적인 증오를 뒤덮고 타락과 공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확률 낮은 도박이었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감히 고려조차 하지 않을만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게 때까치를 죽음이나 구울화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면? 물론, 당연히, 그런 결말보단 명백히 나은 선택지이고 말고. 그리폰의 충성심이 그런 끔찍한 운명으로 보답받는 건 어느 쪽에게든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다나로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 탐색하듯 그를 훑어봤다. 투박한 농부같은 인상을 가진 그 마법사는 정직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듬직한 친구였고, 그 얼굴 위에 서린 서글픈 희망을 감출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세야가 자신의 사랑하는 그리폰을 구할 수 있다고 믿길 바랐지만, 사실 믿고 있진 않았다. 그다지.

  "시도는 해봐." 그가 말했다.

  "그럴게." 이세야는 대답했고, 동생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개러헬은 성의 군사작전실에서 아마디스를 비롯한 십여 명의 사람들과 회의중이었다. 상급 회색 감시자와 군 사령관, 그리고 안더펠스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이끄는 용병 대장들. 이세야가 알기로 지금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지원병력이 끊긴 기회를 이용해 호스버그의 포위 공격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안더펠스 왕국군의 여성사령관인 우바샤 역시 자리하고 있었고, 남편이었던 헤놀트 국왕이 2년 전 오우거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서지며 짧은 재위기간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호스버그의 통치자로 군림 중인 섭정왕비 마리웬 역시 여느 때처럼 끝없이 툴툴거리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빛내고 있었다. 헤놀트에겐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지만, 국왕 그리바우드는 자신의 유아방을 통치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은, 그리 놀랍지 않게도, 기꺼이 섭정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세야가 왕성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마리웬 왕비의 통치에 대한 가장 불경한 내용은, 대재앙 덕에 안더펠스의 궁극적인 권력이 마리웬 왕비가 아닌 여성사령관 우바샤에게 가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 왕비는 마주치는 잘생긴 용병들마다 경박하게 유혹하는 태도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지만, 우바샤는 쉴 새 없이 묵묵한 태도로 일하며 필요한 일을 하나씩 해냈다.

  지도가 놓인 탁자 끝, 아마디스와 개러헬을 둘러싼 작은 무리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우바샤였다. 가까이 다가간 이세야는 지도 위의 표식들이 이동한 걸 볼 수 있었다. 우윳빛 대리석 조각들은 감시자, 마법사, 그리폰 외에도 호스버그를 둘러싼 용병대 무리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린애들 놀이에 이용되는 흑백의 돌조각들은 안더펠스 왕국군을 표시했다. 그리고 개러헬의 유별난 명령에 따라 왕궁 하인들이 모아온 말린 바퀴벌레 시체더미가 어둠의 피조물을 표시했다.

  그들은 라텐플루스 강 평야가 전장으로 가장 적합한 이유와,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들을 그 함정으로 끌어들일지에 대해 논쟁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악마의 군주가 이끌 때조차도 통상적인 군대가 싸우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급로를 지키거나 병력손실을 줄이는 일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으니. 놈들은 모든 걸 쏟아붓는 맹렬함으로 일반적인 인간이나 드워프 사령관이라면 경계하며 물러설 상황에조차 오로지 전진하곤 했다.

  물론,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떨 땐 악마의 군주가 교묘하게 자신의 군대를 파괴의 문턱에서 끌어내 적들에게 전략을 그대로 되돌려 줄 때도 있었다. 그 예측불가능함 탓에 작전을 짜는 건 언제나 크나큰 도전을 요했다

  하지만 그 몫의 도전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이세야는 탁자를 지나 개러헬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해."

  개러헬은 초조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지금?"

  오랜 포위공격과 다가올 전투로 인한 긴장감이 그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었고, 그건 아마디스나 우바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예전보다 야윈 모습이었고, 눈매와 입가는 피로로 주름져 있었다. 우바샤의 밝은 갈색 머리는 씻지 못해 탁한빛을 띠었고, 아마디스의 옷은 입고 잔 흔적으로 구깃구깃 했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그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 손은 곱고 부드러웠다. 호스버그의 포위공격을 무너뜨리기 하루 전 날인 지금, 작전실에 선 그의 손은 전장에서 얻은 상처와 에미서리의 주문이 남긴 흉터로 가득했다. "지금."

  "좀 기다리면 안될까? 지금 좀 바빠서."

  "너한테 하라는 게 아냐. 병만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개러헬은 여전히 망설였지만, 어느 새 성가심보다는 호기심이 그 녹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여지껏 한번도 누굴 감시자로 징집하려 한 적 없었잖아."

  "한번도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병 내놔, 개러헬. 지금은 다른 신경쓸 일이 훨씬 많잖아."

  "좋아." 그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철제 고리 하나를 풀어냈다. 열쇠 하나가 달려있는 고리였다. 탁한 회색으로 변색된 작은 은제 열쇠였고, 기껏해야 보석함 정도에나 맞을만큼 작은 크기였다. "내 방 책상 서랍 안에 상자가 있어. 다 쓰면 다시 돌려놔."

  "당연하지." 열쇠를 받은 이세야는 아마디스와 우바샤에게 살짝 고개숙여 양해를 구하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기 직전, 왕비 마리웬이 그를 붙들었다. 왕비는 분을 바른 부드러운 손으로 이세야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고, 가지런한 손톱은 새로 칠한 듯 윤기가 돌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엘프를 붙들어 세우기엔 나비 위로 꽂히는 쇠침만큼 강력할 따름이었다.

  "동생 얘기를 좀 듣고 싶네만." 왕비 마리웬은 청보라빛 눈을 크게 뜨고 음모라도 꾸미듯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콜을 바른 긴 속눈썹 위로 눈꺼풀 위에 바른 진주가루가 반짝였다. 장미향과 늦여름의 여름자두향이 물결치는 검은 머리 위를 맴돌다가 깊이 파인 푸른빛 벨벳 드레스 위로 흩어졌다.

  7년에 걸친 포위 공격이 왕비에겐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에, 이세야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는 불쾌감을 감추려 했으나, 그리 많은 노력을 들이진 않았다. "제 동생이요? 이미 몇 년간 봐오지 않으셨습니까. 뭘 알고싶으신지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왕비는 순진무구한 양 달콤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던 건 동생에게 내 얘길 좀 해달라는 거였네. 전투 사령관께선 어찌나 바쁘신지 나한테 잠시 내줄만한 시간도 없는 것 같더군. 물론 이해하는 바이네. 바깥의 지저분한 일들 때문에 퍽 바쁘시겠지. 하지만 조만간 포위 공격도 끝난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그러길 바라고 있죠." 이세야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왕비에게 잡힌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그대들 모두 놀라우리만치 용감하니까. 그리고 전투 사령관 개러헬은 그 사이에서도 어찌나 늠름하고 용맹하신지. 아주 드문 남성이야.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네."

  "개러헬이 무척 영광스러워 할 것입니다."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거야 내가 알 수 있나." 마리웬의 미소가 잦아들었다. "나 역시 이러한 뜻을 그분께 전하고 싶었네만, 말했듯이 워낙 바쁜 분이어서 말이야. 하지만 포위 공격이 무너지고 나면 이 또한 달라질 거라 나는 믿고 싶네.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고, 우바샤가 좀 더 평범한 업무를 돌보게 될 때 쯤엔...어쩌면 그분도 왕비의 존경을 즐기는 사치를 누릴 때가 오지 않겠는가."

  이세야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더펠스의 차후 협력 여부를 인질 삼아 요구해오는 왕비의 제안에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며 - 그리고 아마디스는 어떨지 역시 궁금해하며 - 대답했다.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왕비 마리웬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수줍은 양 속눈썹을 팔랑이곤 돌아섰다. "안더펠스인들은 그대들의 수고에 매우 감사할 걸세."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이세야는 대답했다. 대화를 살짝 엿들은 상급 감시자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교환한 뒤, 그는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자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당장 마주할 과제는 위험스럽고 유쾌하지 않을 테지만, 왕비의 옹졸한 욕망을 마주하는 것에 비하면 천 배는 나았다. 엘프는 긴 한숨을 내쉰 뒤 개러헬의 개인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젊은 회색 감시자 하나가 동생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긴 했으나 긴장된 얼굴이었다. 젊은 청년은 이세야가 복도를 지나 시야에 잡히자 의식적으로 자세를 곧추세웠다. "충성."

  "그렇게 각잡고 서있을 필요 없네." 그는 엉성한 경례에 답하며 손짓했다. 이 젊은 감시자의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지만, 입단의식을 거친 지 한 달도 안된 신입이라는 건 떠올랐다. 다른 많은 안더펠스인들처럼, 그 역시 자원 입단자였다. "동생 방에 좀 챙길 게 있어서 온 거야."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이세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필요한 것 뿐이네."

  "아." 청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의 기대감과 끔찍한 기억의 불쾌감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새로 징집되는 겁니까?"

  "아마." 그는 청년을 지나쳐 개러헬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입단 의식 도구가 담긴 서랍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러헬의 방은 지극히 검소한 모양새였다. 책상 위에 놓인 몇 장의 전투지도와 편지뭉치, 씻는 용도의 물그릇, 정돈 안 된 침대 정도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 수 년 간 온 성을 채우고도 남을 작전 전리품을 모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동생의 방을 장식한 기념품이라곤 굽은꼬리의 빠진 날개깃을 모으는 작은 단지 하나 뿐이었고 그나마도 보통은 화살 끝에 다는데 사용되곤 했다. 침대 옆에는 아마디스의 수면용 로브와 양모 슬리퍼 한 쌍이 놓여있었고, 그의 향수에서 남은 잔향이 갑옷 윤활제와 가죽냄새 사이에 섞여 은은하게 맴돌았다.

  잠긴 서랍은 책상 왼쪽 아래편 서랍이었다. 이세야는 열쇠를 넣고 돌려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탁한 회색 금속으로 테를 두른 검은 나무상자가 놓여있었다. 어떤 인장이나 경고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극단적으로 단순한 모양새 자체가 이미 어떤 느낌을 풍겼다. 이세야는 그 안에 살아있는 전갈이라도 담겨있는 것마냥 신중한 손길로 상자를 꺼냈다.

  물론 그 안의 실제 내용물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뚜껑을 열었다.

  빛바랜 은잔과 리륨 가루가 담긴 주머니, 그리고 탁한 회색빛의 작은 유리병 세 개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반쯤 헤어져 안을 채운 뻣뻣한 말총꾸러미가 살짝 삐져나온 낡은 벨벳 쿠션이 상자의 내용물을 받치고 있었다. 두 개의 병에는 칙칙한 검은빛 액체가 가득 차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거의 비어 보였다. 병의 바닥에 고작해야 몇 방울 정도 남아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세야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다. 입단 의식엔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

  그는 상자를 닫아 망토 안에 챙긴 뒤, 개러헬의 서랍을 다시 잠갔다. 문 밖을 지키던 젊은 감시자 청년은 방을 나서는 그에게 다시 경례했다. "충성."

  "수고하게." 그는 청년을 따라 절도있게 인사했다. 딱히 규정으로 정해진 방식 같은 건 아니었다.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회색 감시자는 의전을 신경쓰는 집단은 아니었고, 전장에선 특히나 더 그랬다. 하지만 저 청년이 그런 규율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한다면, 이세야는 얼마든지 따라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달랠 방법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창조주가 당장 그 방법을 내줄 것 같진 않았고, 개러헬의 방 문지기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인 그는 왕궁을 벗어나 때까치가 머물고 있는 요양용 우리로 향했다.

  그 그리폰은 자신의 우리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아프고 상처입은 그리폰이라 해도 그들은 좀처럼 우리 안에 머무는 일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약간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들은 언제나 넓은 상공을 누비며 시간을 보냈고, 낮동안에는 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은 채 날개를 펼치곤 대재앙에 가려진 햇살 아래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리곤 했다.

  하지만 때까치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이세야가 들어서는데도 고개조차 들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개 안쪽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 자신의 배설물 위로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바람에 털도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이렇게나 자신의 긍지를 내팽겨친 그리폰을 보는 건 이세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고귀한 짐승이었고, 창공의 주인이었으며,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경외감에 걸맞는 기품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그는 우리 바로 바깥의 짚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가져온 도구를 내려놓았다. 개러헬의 박스 외에도 작은 단검과 전날 사냥한 헐록의 피가 담긴 병 하나를 따로 챙겨왔다. 헐록의 피는 검붉은빛이었지만, 개러헬의 상자에 담긴 오래된 병 안의 내용물만큼 진하고 진득한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병 안에는 200년 전 사냥꾼의 몰락에서 쓰러진 세 번째 대재앙의 악마의 군주, 토스의 피가 담겨있었다.

  때까치는 이세야가 도구들을 앞에 늘어놓을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은제 술잔에 살짝 깔리게 푸른 리륨 가루를 부어넣고 그 위에 가루가 전부 녹을 때까지 헐록의 피를 채웠다. 섞인 내용물 위로 고대 악마의 군주의 피 한 방울이 더해졌다. 차가운 검은 연기가 술잔에서 피어올랐고, 어둠의 피조물의 독특한 부식의 냄새가 끈끈하게 묻어났다.

  그 증기가 숨결에 와닿자 이세야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그 옛날 입단 의식의 악몽이 그를 휘감아와 그는 무릎 꿇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의식에서 동료 몇 명이 죽었던가, 목이 졸려서, 두려움으로, 들이마신 피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몸 안으로 침투하여 뼛속 깊이 파고드는 그 느낌...존재의 근본을 뒤틀어놓은 그 의식에서 그는 도무지 완전히 벗어났다고 느낄 수 없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입단 의식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 다르게 바꿔놓았고, 그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때까치에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을 영계와 연결시킨 이세야는 실낱 같이 미약한 마법을 끌어내 술잔으로 흘려보냈다. 어두운 색의 액체는 잔 안에서 빠르게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소용돌이 치는 표현 위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들의 환영이 떠올랐다가 흐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마법을 활성화해둔 채 술잔을 옆으로 내려놨고, 단검을 손에 쥐고 때까치에게 다가갔다.

  그리폰은 그가 다가가 건드릴 때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회색빛 콧잔등은 움푹 파여있었고, 부드러운 가죽털 위로 깃털은 바짝 말라 빛깔을 잃은 채였다. 턱주가리를 따라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검붉은 얼룩은 부리 안쪽면까지 이어졌다. 두 눈 위로 검은 눈곱이 시야를 가릴만큼 엉겨 얇은 기름막을 두르고 있었다.

  때까치가 어둠의 피조물의 혈액을 삼킨 지는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염은 빠르게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세야가 앞발을 집어드는데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귀는 무기력하게 축 쳐져 있었고, 눈곱 낀 두 눈은 멍하니 엘프의 뒤편 벽을 향해 있었다.

  "다 널 구하려고 하는 일이야." 이세야는 넋이 나가 있는 그리폰에게 속삭였다.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딱히. 그 짐승들은 기묘하리만치 영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짐승이었고, 인간의 언어는 그들이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그 말을 했다. "네가 다나로를 구하느라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그리폰은 더러운 짚더미 위로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단검이 발가락 끝을 찔러 핏방울이 맺히는데도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때까치의 털가죽 위로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고, 이세야는 피로부터 마법을 끌어내 미완성이던 그의 주문을 마무리했다. 그는 칼린이 가르쳐준대로 피로 이어진 때까치의 마음과 자신의 의식을 연결했고, 그리폰의 날뛰는 사고를 자신에게 맞춰 조정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여, 그의 바람대로, 때까치는 부리를 열었다. 유리 같은 두 눈은 텅 비어있었지만, 그의 사고는 급격한 혼란 속에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하는 외침이 때까치의 머릿 속을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절박하고 무력하게 그의 침입에 저항하려 노력했다. 싫어!

  받아들여, 이세야는 다시 반복했고,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리폰의 정신을 강제로 장악했다.

  그는 술잔을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때까치의 부리 사이로 기울였고, 꼼짝 못하게 붙들린 그리폰에게 주문이 걸린 리륨과 혈액의 혼합물을 몇 모금에 걸쳐 전부 삼키도록 했다. 때까치의 혼란이 점차 커져갔고, 이세야는 그의 정신이 속박을 풀어낼까 두려워졌다. 그는 더 강하게 정신을 붙들었고, 그의 감정과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어 이윽고 그리폰의 정체성의 근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찾아낸 기억과 감정의 실타래를 잘라내고 다시 짜내어 겹겹이 새로 덧씌웠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때까치의 증오를 약화시키고, 타락을 삼킨 이후 생길 변화에 대한 혐오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원래의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용과 망각을 짜넣었고, 닥쳐올 변화에 대한 자각을 무디게 해 그리폰이 그 사실을 끔찍히 여기지 않도록 했다. 그는 기묘한 병증 위로 가면을 덧씌워 그리폰에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감기, 가벼운 기침에 불과하고 잠시 아픈 탓에 일시적으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거라고 믿게 했다.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었고, 칼린이 가르쳐준 것에 비해 훨씬 섬세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먹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잘 먹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그는 자신의 정신을 끌어내 때까치의 의식이 변환된 길로 접어들도록 놓아주었다.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 안의 짚더미 위에 무릎꿇고 있었고, 빈 술잔은 손 옆에 놓여있었다.

  때까치의 호흡은 규칙적이었고, 창백한 회색빛이던 콧잔등에 혈색이 돌아왔다 두 눈은 거의 감겨 있었으나 틈새로 보이는 밝은 호박색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검은 구름 역시 씻겨져 내려간 듯 했다.

  그는 다시 그 자신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 자신인지는,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묶고있던 혈마법을 풀자마자 그리폰은 곧장 얕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의 움직임이나 몸에 딱 붙여 접은 두 날개의 모양은 아무렇게나 무기력하게 널부러져 있던 때까치의 모습에 비하면 일반적인 그리폰의 수면 자세에 가까웠다. 콜록, 하고 감기에 걸린 것마냥 기침을 한 번 했지만, 이내 편안하게 긴장을 풀었다. 그는 그게 입단 의식이 성공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

  조용히, 이세야는 쓰러진 술잔을 집어 망토 끝으로 안쪽 면을 닦아낸 뒤 개러헬의 상자 안에 리륨 주머니와 함께 다시 돌려놨다. 이어 헐록의 피가 담겨있던 병도 집어들어 주머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단검에 남은 붉은 혈흔을 닦아낸 그는, 조심스럽게 요양용 우리를 벗어났다.

  그는 다나로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그는 이세야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 아까 그대로의 페이지에 머물러 있을 게 분명한 고대 역사책이 협탁 위에 놓여있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희망을 품은 눈으로 방에 들어서는 이세야를 올려다 봤다. "잘 됐어? 그를 구할 수 있었어?"

  "잘 모르겠어." 이세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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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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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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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숭고의 시대

 

  지하대로 입구는 대지 위에 난 도끼 자국 같은 불규칙한 형태의 틈새였다. 오래 전 있던 지진에 의해 형성된 균열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가 대재앙에 의해 고요가 깨지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통로로 탈바꿈한 듯 보였다.

  허나 한낮에 찾은 그곳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안더펠스는 그 자체로도 황량한 땅이었지만, 대재앙의 손길 하엔 가장 튼튼한 토착종들조차 견뎌내기 힘들었다. 말라빠진 초목 아래 갈색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흩날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엔 참새 한 마리조차 앉아있지 않았다. 오전부터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미약하게 새어든 햇빛은 다행히 어둠의 피조물들을 땅속에 붙들어두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작은 대열의 선두에서 날던 이세야가 레바스에게 하강 신호를 보냈고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은 그리폰은 깔끔하게 작은 원을 그리며 내려가 대지의 균열 근처 언덕 위로 착륙했다. 잠시 뒤 그 주위로 일행들 역시 내려앉았다.

  그리폰에서 뛰어내린 이세야가 균열 근처로 다가갔다. 균열 주위의 대지는 메말라 바스라질 듯 보였다. 발 밑에서 부서진 자갈들이 땅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골짜기 아래에선 어둠의 피조물들의 차갑고 이질적인 악취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균열의 안쪽 부분은 오랫 동안 닦지 않은 찻잔처럼 기묘하게 얼룩져 있었다. 변색된 흔적 탓에 균열의 깊이나 그 안의 굴곡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세야는 지팡이 끝에 작은 빛의 구체를 생성해 틈새를 비춰가며 좀 더 윤곽을 살피길 원했지만...그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게 얼룩진 바위 때문에 눈이 아려왔다.

  어쨌든 붕괴시키기 어려워 보이진 않았고, 중요한 건 그 부분이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 칼린과 다나로,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리스메까지 - 함께 하도록 손짓했다.

  마법사들이 균열 주위로 모여드는 사이 조락과 펠리세는 활을 점검했고 드워프 형제 퉁크와 뭉크는 에일 병을 나눠 마시며 요란스럽게 입을 헹구곤 버려진 토끼굴 위에 뱉어냈다. 이세야는 그 드워프들이 이 붕괴작전에 좀 더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에일로 입을 헹구는데 더 집중한 듯 보였다. 요란한 목울림과 펠리세의 부루퉁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 궁수의 우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듯 했고, 아마 그 드워프들은 호스버그 상공 어딘가에 아침을 쏟아놓고 온 듯 했다. 이세야는 도시가 비어있었길 바랄 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싶어?" 무너진 언덕 바닥에 모두 모여서자 리스메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세 마법사 중 가장 키가 큰 리스메는 의도적으로 꾸며낸 불안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발과 물감, 분장도구를 이용해 잔뜩 과장된 비인간적인 외형을 꾸며내곤 했다. 때때로 그는 남성 모습이었다. 혹은 여성 모습일 때도 있었다. 이세야는 이미 수 년간 그 옆에서 싸워왔지만 여전히 그가 어느 쪽인지, 혹은 양쪽인 건지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 마법사는 옷을 갈아입듯이 간단하게 성별을 바꿔댔고, 어쩐지 공연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대 공연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이세야가 들은 바에 따르면 리스메는 마탑에서 생활하는 동안 적지 않은 핍박을 받았었고, 회색 감시자가 된 후 보이기 시작한 이 별난 변장 습관은 당시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려던 습관에 색이 입혀진 것이라고 했다. 존재의 부정에서 살아남은 뒤, 그는 온힘을 다해 존재를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오늘 리스메는 여성의 모습이었고, 머리에 두른 낡은 바다 그물은 소금과 햇빛에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창백한 느낌의 청록색 눈은 그물 끝자락에 매달린 유리구슬과 같은 빛깔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유백색의 생선 비늘이 뺨과 눈썹 위를 장식하고 있었고, 분장 아래 창백한 피부 덕에 그는 초현실적인 꿈속의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두 눈에 담긴 강렬함만은 꿈 같은 느낌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리스메는 어둠의 피조물을 증오했다. 그의 불타는 증오는 이세야가 7년 넘게 대재앙과 싸워오며 만난 어떤 사람들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둠의 피조물을 향한 그의 증오는 레바스의 그것과 비슷했다. 분별없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맹금류의 난폭한 영혼 같은 증오.

  "지진을 일으키는 게 가장 쉬울 것 같은데, 안 그래?" 이세야가 말했다. "언덕 꼭대기를 무너뜨려 덮어버리는 거야."

  "아니면 빠트리는 걸수도 있지, 이 구멍이 보기보다 깊다면 말이야." 리스메는 몸을 기울여 구멍 안쪽을 살펴봤다. 뺨 위의 유백색 비늘 구슬이 영계 너머의 눈물방울처럼 반짝였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주춤했다. "아냐. 고민할 시간 없어. 당장 무너뜨리자. 놈들이 왔어."

  "갑자기 무슨-." 이세야가 입을 열었지만, 곧이어 헐록의 발자국소리와 가래 끓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오는 소리였고, 속도가 제법 빨랐다. 지하동굴 안에서 반사되는 소리로는 유추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서른에서 백여 마리 가량의 헐록과 젠록 무리인 것 같았고, 귀를 찢는 쉬릭의 새된 소리로 미루어 그 지독한 암살자 놈들 역시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너뜨려." 그가 지시했다.

  비늘장식을 두른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인 뒤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들 중 대지 원소마법을 이용해 통제된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그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그 자신만의 파괴전략이 있었다. 이세야는 지팡이에 마력을 집중시켜 영계의 거친 에너지를 염력 파동으로 바꾼 뒤 리스메의 지진이 일으킬 타격을 증폭시켰다. 그의 주위로 다른 이들 역시 보조마법을 빚어내자 영혼이 바짝 긴장하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리스메의 두 눈이 번개가 내려치는 밤하늘처럼 하얗게 빛났다. 언덕이 발밑에서 진동했고, 골짜기 위로 눈에 보일만큼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세야는 시야 언저리로 햇빛에 반짝이는 어둠의 피조물들의 눈알을 언뜻 본 것 같았고, 그는 동료 마법사가 만들어낸 지진의 반향을 때리도록 작게 마력을 뭉쳐 조준했다. 대지 위로 더 넓고 빠르게 균열이 벌어져갔고, 발밑으로 바닥이 요동치며 꺼져내렸다. 자갈과 모래 섞인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이세야는 터져나오는 재채기를 억누르며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비벼 닦았다. 흐릿한 시야로 골짜기 안쪽으로부터 화산이 분출하듯 붉은 빛이 터져나오는 게 보였다. 어딘지 모를 저 아래에서 올라온 빛이었고, 그들 중 누구의 주문도 아니었다.

  "놈들 중에 에미서리가-." 그는 흙먼지 사이로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덩이와 바윗덩이가 언덕 비탈에서 터져나왔다. 달궈진 돌덩이가 감시자 무리를 덮치며 욕설과 비명이 들려왔다.

  시야를 뒤덮는 돌더미와 연기가 허공을 메우기 전부터 땅바닥은 이미 발 아래로 조금씩 꺼지고 있었다. 리스메의 추측이 맞았다. 지하대로로 이어지는 이 골짜기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고, 언덕은 그 위를 뒤덮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야는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꼬리뼈를 따라 통증이 타고 올라왔고, 그는 아마 뼈가 부러졌을 거라 생각했다. 대지는 고삐풀린 종마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무너진 땅 속에서, 손들이 튀어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괴물 같은 손들은 손톱이 깨지는 것도 아랑곳않고 탐욕스럽게 흙더미를 파헤쳤다. 어떤 손은 손가락이 세 개 뿐이었고, 여섯 개나 일곱 개인 것도 있었다. 비에 불어터진 지렁이마냥 부드럽고 창백한 형태도, 울퉁불퉁하게 굳은살로 굴곡진 형태도 있었다. 긁힌 피부에 난 생채기 위로 배어나온 검은 피가 먼지로 하얗게 뒤덮였다. 놈들의 공통점이라곤 오로지 그 피 뿐이었다.

  그 피와, 차갑고 진득거리는 갈망 뿐.

  이세야의 피부를 할퀴며 그를 땅 속으로 끌어당기는 손들 사이로, 놈들의 얼굴이 악몽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마냥 무너진 흙더미를 뚫고 튀어나왔다. 헐록과 젠록, 그리고 혈관만 도드라진 두개골 양쪽으로 뾰족한 귀가 납작하게 붙은 앙상한 얼굴의 쉬릭들이 이빨 사이엔 흙더미를, 두 눈에는 증오를 품은 채 솟아올랐다. 놈들은 닥치는대로 물어뜯고 찢어댔고 이세야는 끝없이 요동치는 비협조적인 바닥을 박차고 벗어나기 위해 절박하게 발버둥쳤으나, 다른 회색 감시자들이라고 상황이 더 나아보이진 않았다.

  상당히 심각해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궁수 조락은 덤벼드는 적들의 손길 속에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왼편에 흩어진 흙더미와 돌무더기가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왔을 피가 호선을 그리며 흩뿌려져 있었다.

  죽은 궁수로부터 이십 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펠리세가 허벅지와 발목을 붙드는 수많은 손들을 발로 차내고 있었다. 그의 화살더미는 손에 닿지 않는 위치에 쓸모없이 흩어져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땅속에 파묻혀있어 팔만 튀어나와 있는 헐록 한 마리가 커다란 돌덩이로 그의 머리 주변을 미친듯이 내려찍어대고 있었다. 땅 속에 반쯤 묻힌 젠록의 머리통에 난 자국으로 봐선 아마 감시자인 줄 알고 착각하고 공격했던 것 같으나, 그 어둠의 피조물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맹렬한 기세로 피묻은 돌덩이를 땅 위에 내리찍어대고 있었고, 머지 않아 펠리세를 덮칠 것처럼 점차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리스메가 있는 방향에선 끝없이 화염폭풍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양성의 마법사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정확히 조준해서 화염마법을 퍼부어댔고, 마치 그 자신 역시 함께 불태울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가발을 장식하던 그물에는 녹색 불꽃이 맺혀있었고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탁한 빛의 유리구슬들은 전부 타버린 뒤였다. 불에 탄 피부는 빨갛거나 검게 그을려 있었고, 뺨과 눈썹을 장식하던 비늘이 하얗게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는 게 놀라워 보일만한 상태였고, 그 상태가 오래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세야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은 잡히지 않았고, 굳이 알고싶은 것도 아니었다. 리스메에게 영감을 얻은 그는 영계와 접촉해 에너지를 순수한 힘의 형태로 끌어내어 흙속으로 그를 끌고가려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조준했다.

  그 충격파는 먼지와 피, 부서진 돌무더기로 이뤄진 구름을 일으켰다. 이세야는 폭발을 미리 예상하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돌조각에 이마가 찢어지자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운 피가 피부를 타고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주문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멀리 밀어내버렸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소매로 눈가를 대충 닦아낸 이세야는 벌떡 일어나 흙더미를 미끄러져가며 발목을 붙들어오는 반쯤 파묻힌 어둠의 피조물들의 손들을 떨쳐내고 언덕 사면을 따라 달렸다. 흘러내린 피가 무자비하게 두 눈을 찔러왔지만 그는 연분홍빛 눈물을 대충 훔쳐내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리폰의 날개짓 소리에 그는 위를 올려다 봤다.

  그리폰들이 자신의 기수를 구하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나로의 검은 줄무늬를 가진 회색 그리폰 때까치가 사면을 타고 빠르게 강하했다. 이세야는 붕괴 후로 다나로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 마법사는 이미 전투 초반부에 쓰러져 땅속의 어둠의 피조물들의 덮쳐대는 손길에 뒤덮힌 지 오래였으나, 때까치는 공중에서 그를 포착해낸 듯 했다. 그리폰은 괴성과 함께 착륙해 쓰러진 자신의 기수를 둘러싼 어둠의 피조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댔고, 헐록과 젠록들이 땅속을 뚫고 나오는 족족 발톱과 부리를 써서 놈들을 찢어놨다.

  황갈색 몸체를 가진 펠리세의 방랑자가 그 위로 나타났고, 태양 아래 두 날개가 구릿빛과 은빛으로 번쩍였다. 급강하 하여 궁수 근처에 착륙한 그는 발길질로 먼지폭풍을 일으켰다. 방랑자는 혐오에 찬 앞발질로 돌덩이를 든 헐록의 팔뚝을 뜯어버렸고, 다른 발로는 펠리세의 허리를 붙든 뒤 거칠게 날개짓하여 떠오르려 했지만 -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지반은 그리폰이 박차고 날아오를만한 여건을 제공하지 않았다.

  바닥은 계속해서 요동치며 아래로 꺼져갔다. 이세야는 순식간에 땅밑이 한 뼘 가량 내려앉는 바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사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마냥 순식간에 발 아래로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돌멩이와 자갈들이 사이사이 이리저리 튀어댔다. 엘프에게 도달하지 못한 레바스가 무너지는 언덕 위를 빙빙 돌며 좌절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방랑자가 싸우고 있던 언덕은 부서진 멜론처럼 무너져버렸다. 한 가운데 난 구멍으로 비탈을 이룬 지반이 빠르게 빨려들어갔고, 그리폰 역시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갈 따름이었다. 방랑자는 미끄러지는 흙더미를 붙잡고 미친듯이 날개짓을 해댔으나 도무지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고, 무너진 대지에서 솟아나온 어둠의 피조물들이 지렁이 같은 징그러운 손을 뻗어 맞서싸우는 그를 찢어댔다. 놈들의 손톱이 그리폰의 밝은빛 털가죽을 파고들며 선명한 붉은피로 물들였다.

  때까치 쪽은 상황이 약간 나았다. 그는 축 늘어진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반쯤은 달리며, 반쯤은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며 날아오를 순간을 재고 있었다. 그 자신은 상처가 별로 없어 보였으나 부리 주위로 어둠의 피조물의 피가 검은 수염처럼 얼룩져 있었다. 그 맹금은 언덕 너머로 이세야와 잠시 눈을 마주쳤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수 년의 시간을 함께 해오면서 그리폰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이해와 수용의 눈빛을 발견했다.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은 때까치를 죽일 것이다. 회색 감시자들이 그리폰을 훈련시킬 때 전투 중 절대 물어뜯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심지어는 전투에 나서기 전 쇠로 된 주둥이마개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한 피는 입으로 섭취할 경우 대상을 뒤틀어놓고 광기로 몰아넣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알려진 치료법도 없었고, 그 치명적인 결말을 피해갈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까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폰의 눈빛에 깃든 체념이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체념은 했으나, 그 안에 후회라곤 없었다. 때까치는 바람을 타고 날개짓해 하늘로 솟아올랐고, 다나로를 앞발에 쥔 채 호스버그를 향해 사라졌다.

  이세야는 자신의 염력마법으로 방랑자를 풀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잠시 망설였지만...이런 혼란과 난장판 속에서는 제대로 조준할 자신이 없었다. 그 그리폰은 너무 빠르게, 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펠리세는 시야에 잡히지조차 않았다. 방랑자의 어깨부분의 움직임을 봐선 아마 그 그리폰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것 같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혹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 위에선 레바스의 귀를 멎게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 젠록의 붙들어오는 손을 발로 차버린 뒤 그는 재앙에서 벗어났다. 레바스는 그의 위치를 확보하자마자 강하하여 그를 안장으로 이끌었다. 그 자신의 끓어넘치는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리폰은 결코 놈들과 맞붙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삭히며 쉿쉿거린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내려자보자 이세야의 눈에 상황이 더 뚜렷하게 들어왔다. 절망적이었던 지상에서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언덕의 붕괴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땅을 빨아들이던 구멍이 점차 메워져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흙더미를 파헤쳐 올라오는데 성공한 어둠의 피조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대지의 가차없는 압박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비록 안더펠스의 풍광을 요란스럽게 바꿔놓긴 했지만, 감시자들은 승리를 얻어냈다. 지하대로로 향하는 통로는 봉인됐다.

  분명 승리처럼 느껴져야만 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지도. 하지만 피에 젖은 방랑자의 유해를 내려다보며, 이제는 영광의 흔적만 남은 조각난 털가죽과 깃털을 내려다보며, 가슴 속을 묵직하게 채운 공허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후회는 지금 감당할만한 사치가 아니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칼린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뒤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탈출 중인 리스메를 방해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용케 그 자살행위에 가깝던 불꽃연쇄폭발에서 살아남은 데서 그치지 않고 비틀거릴지언정 전장을 벗어날만한 기운을 끌어낸 듯 했다. 왼발은 쓸모없이 질질 끌려 걸음마다 패인 자국을 남겼고, 그을린 로브자락 역시 걸을 때마다 재가 되어 길 위로 흩어졌다. 그는 살아있는 존재보다는 악마에 사로잡힌 시체에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었고, 그의 그리폰이 그를 발견하곤 기쁨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흉터 투성이의 하얀 부리를 가진 사냥꾼이라는 야수였고, 개러헬의 굽은꼬리 다음으로 가장 빠른 그리폰 중 하나였다. 나이 탓에 속도가 좀 느려졌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을 향해 날개를 접고 하강하는 그의 움직임에선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힘겹게 비틀거리던 리스메는 사냥꾼이 미처 그에게 닿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화염구를 날려 마지막 어둠의 피조물을 처리한 칼린이 황급히 달려갔고, 지팡이 끝 수정구에서 치유마법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창백한 푸른빛 에너지가 양성의 마법사에게 닿아 퍼져나갔고, 피가 흐르던 화상부위가 약간이나마 아물며 거친 숨결도 조금 잠잠해졌다. 그가 둥글게 몸을 만 채 기운을 회복하는 사이 그의 그리폰이 가까이 내려섰다. 칼린을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접근한 사냥꾼은 한쪽 날개를 펼쳐 상처입은 그의 기수와 마법사 간에 거리를 띄웠다. 이세야는 걱정스런 얼굴로 레바스에게 낮게 날도록 신호했다.

  "드워프들이," 리스메는 부상을 입은 왼쪽 다리를 들어 어색한 동작으로 사냥꾼의 안장에 올라서며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들이 아직 저기 있어."

  "내가 남아있을게." 이세야가 말했다. 그는 퉁크와 뭉크가 서 있는 방향을 내려다봤다. 그 드워프들은 닥쳐올 어떤 위협에든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어 보였지만 이제는 위협이 될 어둠의 피조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응당 지켰어야 하는 수호자들은 도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였다. "날 수 있겠어?"

  "응." 리스메가 대답했다. 그는 사냥꾼의 고삐를 느슨하게 속목에 감은 뒤 안장의 앞가림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은 그는 고통으로 떨리는 한숨을 크게 들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까맣게 타버린 가발의 그물장식에 마지막까지 달려있던 구슬들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날 수 있어. 더 이상 싸울 일만 없다면."

  "좋아. 호스버그로 돌아가. 개러헬에게 드워프들을 태워갈 한 쌍의 기수와, 입구가 완전히 막혔다는 걸 확인할 정찰팀을 보내라고 전해. 어쨌든...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놈들의 증원군을 끊어놨어. 이제 포위공격을 무너뜨릴 때야."

  리스메는 부서질 것만 같은 지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전할게." 대답과 함께, 그는 사냥꾼에게 날아오르도록 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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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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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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