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5:20 숭고의 시대

 

  "병사들을 약속 받았어."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서 개러헬이 말했다. 그가 지쳐보이는 건 이세야에게 놀랍지 않았으나, 묘하게 들떠보이는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많이. 장비만 갖추면 바로 출발해도 될 거야. 2주나, 아니면 3주 정도. 빠를수록 좋겠지, 아무래도. 혹시라도 마음 바꿀만한 시간을 주진 말자고."

  "아마디스한테도 말했어?" 이세야가 물었다.

  "아니." 멋쩍어할 만큼의 양심은 있었기에, 개러헬는 일없이 이세야가 빌려쓰는 방 선반께를 서성였다. 포위 공세 전까지만 해도 그 선반은 안더펠스 왕실을 따라 수 세대에 걸쳐 내려온 성유물로 가득차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밀 포대와 바꿀 수 있는 건 어떤 잡동사니라 해도 전부 팔려나갔다. 금박을 입힌 기도서도, 드래곤 뼈로 된 안드라스테 조각상도, 지금쯤 어느 올레이 상인 저택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고, 선반에 남은 거라곤 회색 먼지에 뒤덮인 나무 조각품 따위 뿐이었다.

  텅 빈 선반에는 개러헬이 만지작거릴만한 게 딱히 보이지 않았고, 잠시 뒤에야 그는 누이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두 손을 뒷짐지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한테 물어보지 마. 연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내 분야가 아니라고."

  "그래?"

  쿡쿡 찌르는 듯한 거슬림이 이세야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그 감각을 털어냈다. "응."

  "정말로?" 자기 코가 석자인 와중에도, 개러헬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칼린도 아니란 말야? 난 두 사람이 어쩌면-."

  "아냐."

  "상처받는 게 그렇게 두려워?"

  이세야는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이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 너도 봐왔잖아, 개러헬. 누가 그런 걸 원하겠어? 누가 필요나 하대? 굳이 그 위에 무게를 더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잃는 건 이미 충분히 괴롭지 않아? 난 이미 네 걱정이나, 레바스 걱정만으로도 충분해. 적어도 내 그리폰이 죽는다면, 아마 나도 함께 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 우리 둘 다 혼자 남을 필요 없을 테니. 하지만 이 이상 저 밖에 잃을까 걱정할 누군가를 늘릴 생각은 없어."

  "정말로 누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어떤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 없어?"

  나한텐 네가 있었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개러헬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 그들의 부모가 둘을 버리고 떠나 불확실한 인간 세상에 내던져졌을 땐 그의 보호자로, 그의 마법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돼 공포에 질렸을 땐 그의 인도자로, 차가운 마탑의 구속 안에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로. 그는 이세야와 함께 회색 감시자가 됐고, 혹은 이세야가 그와 함께 간 건지 - 어느 쪽이었는지 혹시 알았다한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결코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개러헬에겐 행복할 자격이 있었고, 그는 아마디스가 마음에 들었으니.

  하지만 그는 갈라서는 고통이 싫었다.

  "나한텐 내 그리폰이 있어." 이세야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동생에게 등을 돌렸다. "레바스가 내가 필요로하는 그 힘이야. 하지만 너는 좀 다르겠지, 그러니...아마디스를 둥지로 데려가. 그에게 그리폰을 고르게 해. 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 환상적인 순간을 겪고 나면, 용서할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제일 처음 제안한 건 그 사람이었다고." 개러헬이 투덜거렸다. "그 사람이 나한테 꼭 왕비한테 가야한다고 했단 말이야."

  "아무튼 간 건 너잖아."

  "물론 나도 알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긴장이 풀린 그 짧은 한 순간 이세야는 그의 남동생이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 볼 수 있었다. 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라면 그는 여전히 영웅적인 회색 감시자의 완벽한 표본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역시 야위고 지쳐 보였다. 그 눈썹과 입가를 따라 새겨진 주름은 훨씬 나이 많은 이에게나 보일 법한 것이었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러헬의 금발머리 사이로는 희끗희끗 새치가 보였다.

  "그를 둥지로 데려가." 이세야는 재차 말했지만, 이번엔 좀 더 누그러진 톤이었다. "하늘을 날고 나면, 분명히 용서할 거야. 그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고를 수 있을만큼 기수 없는 그리폰이 많이 남았던가?"

  "충분하고도 남지, 유감스럽게도. 너무 많이들 잃었으니까."

  "그럼 가서 우리의 비탄으로부터 약간의 기쁨을 발굴해 보라고." 이세야가 말했다.

 

* * *

 

  한 시간 뒤, 이세야는 하늘로 나가 그들이 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루비 드레이크 용병들이 대장을 향해 환호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마디스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본래 계획은 지난 번 새로 구상한 혈마법 기술 변용이 어둠의 피조물에게 특별히 더 치명적일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용병들의 아우성 탓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피가 담긴 시약병이나 리륨 물약 따위가 그의 주의를 붙들어 놓을만한 건 아니긴 했다. 이미 충분히 주문 연구에 시달리긴 했으니. 화창한 햇살 아래 머리칼에 바람 좀 불어넣는 일은 그로서도 환영이었다.

  레바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그리폰은 주인이 들어서는 모습에 기쁜 울음을 내짖었고, 손길을 기다리며 귀를 납작하게 접었다. 이세야는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 쓰다듬는 와중, 레바스의 부리 및 납막 주변을 두르던 회색빛이 목을 따라 가슴께까지 하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그리폰 역시 늙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달콤쌉싸름한 감각이었다. 감시자들의 전투 그리폰은 대개 오래 살지 못했고,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그러했다. 레바스가 가장 끔찍한 전장에서 매해 살아남았다는 건 그의 힘과 의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는 여전히 강했고, 공중에선 빨랐으며, 전투에선 맹렬했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까? 어쩌면 이제 레바스를 은퇴시키고, 그가 오우거의 바위나 헐록의 화살에 맞아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와이스하웁트의 둥지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야 하는 걸지도.

  이세야는 눈을 감고 그리폰의 풍성한 검은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특유의 사향이 - 맹수의 거친 느낌과 스며든 햇살과 끼니에서 남은 피 냄새가 뒤섞여 콧 속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래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눈물로 이세야의 시야가 뿌얘졌다. 그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흘려보낸 뒤, 떨어지지 않게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마디스는 공중에서 상승 기류를 타고 선회하고 있었고, 개러헬과 굽은꼬리가 넓게 날개를 펴고 가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등에 탄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리폰이 누군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청회색 털과 날개를 두른 검은 띠 무늬가 특징적인 젊고, 작은 체구를 가진 녀석이었다. 초보 기수가 고삐를 잡았는데도 그 비행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녀석의 이름은 스모크였고, 원래 기수는 어둠의 피조물 어쌔신의 독 묻은 칼날에 한 달 전쯤 목숨을 잃었다. 젊은 그리폰은 그동안 연락병이 되어 전초지에서 전초지로, 어느 회색 감시자든 가리지 않고 태워 요새까지 데려오곤 했다.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을 거고, 전선에서 기수를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삶이었겠지만...유대감 있는 기수를 태우고 전장 한복판을 헤집는 것보다 연락병의 삶을 선호하는 그리폰은 거의 없었다. 이세야는 스모크가 아마디스를 택한 것도, 아마디스가 스모크를 택한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길 바라며, 그는 레바스를 이끌고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 짜릿함은 결코 퇴색하는 법이 없었다. 머리칼을 헤집는 바람, 폐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공기, 지상에서의 슬픔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창조주의 어떤 피조물도 이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는 불씨가 잦아드는 호스버그 전장 위를 지나, 하늘을 오염시키는 끈적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둠의 피조물 시체더미 위를 지나쳐 갔다. 이런 흉측한 꼴을 보러 나온 게 아니었다.

  전우들이 싸우고 죽어간 곳에서 멀어져 간 이세야는, 레바스를 이끌어 안더펠스의 바위 투성이 평원 위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라텐플루스 강이 녹색빛 드문드문 섞인 갈색 대지 위로 은사처럼 반짝였다. 이 정도 높이에서라면, 저 강이 강둑은 비록 낮을지라도 여전히 풍요로운 것처럼, 줄기를 따라 진흙 위로 줄지어선 나무들이 대재앙의 황폐와 미약한 태양빛 아래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것처럼 상상할 수도 있었다. 세상이 거의 - 정말로 거의 -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고 믿어버릴 수도.

  물론 현실은 아니었다. 전혀. 그들은 금방 다시 악취 풍기는 연기 위를 지나 호스버그로, 대재앙에게로, 끝이라곤 모르는 끔찍한 전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세야는 가능한 한 오래 그 환상을 소중히 하기로 했고, 그 추억을 품은 채 성으로 돌아왔다.

  개러헬과 아마디스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리폰들은 이미 안장도 벗고 빗질을 마친 후였다. 굽은꼬리가 자기 몫의 갓 잡은 염소고기 한 덩어리를 아부하듯 스모크 앞으로 밀어놓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의 기수들 마냥 그 푸른빛 암컷에게 호의를 품은 듯 했다.

  레바스가 그 모습에 흥 코웃음을 쳤고, 이세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그는 검은 그리폰으로부터 안장을 벗겨내 레바스가 자기 몫의 염소를 즐길 수 있게 풀어준 뒤 요새로 돌아갔다. 요새의 그림자가 묵직한 망토처럼 그의 어깨 위에 걸렸다.

  금빛으로 빛나던 오후의 환상을 품고 최대한 다른 사람이랑 접촉을 피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건만, 맘처럼 되지 않는 것은 그의 숙명이었다. 빵과 와인을 찾아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린이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소식 들었어?" 마법사가 물어왔다. "우리가 헤인 요새로 보내질 거라는 거."

  "헤인 요새?" 이세야는 부엌 바구니에서 곡물 박힌 롤빵을 빼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었다.

  "빔마르크 산맥에 있는 곳이야. 빔마르크 산맥 깊은 곳에. 한 때 헤인의 노버트 공이라는, 칠성장어 절임 애호가이자 자유동맹을 자신이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유명했던 작자의 소유였고, 지금은 박쥐소굴이나 다름 없을걸. 까마귀단이 그 작자를 죽인 후 두 세대에 걸쳐 비어있던 성이니까. 회색 감시자는 그곳을 전초기지로 삼고 우리를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지."

  이세야는 구운 닭요리 약간과 와인병 하나를 추가로 챙겼다. 반쯤 남은 시큼한 적색 와인은 좋은 시절이었다면 요리용으로조차 쓰이지 않았을 법한 것이었지만, 대재앙을 견디고 병에 담기기까지 살아남은 포도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 "왜지?"

  칼린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자유동맹이 이미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오늘 연락병 셋이 도착했는데, 셋 다 별로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진 않았어. 컴버랜드와 커크월이 상당히 위태로운가봐. 스탁헤이븐은 함락 직전이고. 힘을 모으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어느 쪽도 자기 국민들을 어둠의 피조물한테 넘길 생각은 없지. 개러헬은 네가 와이컴에서 썼던 방법을 제안했어. 수석 감시자는 산속 깊이 헤인 요새에 기지를 꾸려서 자유동맹 사람들이 피난올 수 있을만한 규모로 준비하길 원해."

  "개러헬이 우릴 거기 배정했어?" 만약 동생이 그랬다면 이세야는 잔뜩 쪼아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물러나 꼬리를 감출 생각이라곤 없었다.

  칼린은 고개를 저었다. "감시자 사령관 알시아나가 네 이름을 직접 지명했어. 헤인 요새가 대규모 피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준비돼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할 테고, 네 역장 마법이 남들이 해내기 힘든 일을 해내는 재주가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와이컴에서 피난민들을 옮긴 공중 아라벨 있지? 난민들의 도피처에 그게 필요할 것 같다고 해."

  "그게 작전명이야? 도피처라고? 불길하게 들리는 이름인데."

  "자유동맹은 이미 불길함 따위를 따질 것도 없이 궁지에 몰려있어." 칼린의 어조는 건조했다. "개러헬은 우리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어떻게든 원군을 끌어모을 생각인가봐. 이미 마리웬 왕비의 병력이 있고, 호스버그의 승리 덕에 다른 안더펠스인들도 합류하겠지. 그리폰을 선물한 덕에 루비 드레이크의 지원을 확보한 것 뿐만 아니라 대여섯 되는 용병단 수장들이 비슷한 꿈을 꾸면서 마음을 돌렸어. 사자 용병단 대장은 이미 오우거 머릿가죽을 벗겨서 자기 그리폰 안장에 깔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네 동생은 기적적인 인물이야, 이세야. 지금 누군가가 자유동맹을 구할 수 있다면, 오직 그 뿐이겠지. 그는 바로 올레이로 향해서 그 가면 쓴 늙다리들한테 뭐라도 지원을 얻어내볼 생각이야. 하지만 자유동맹의 힘도 분명히 필요할 거고, 그들이 자기 고향과 국민들을 지키느라 분산돼 있었서는-."

  "전부 잃고 만다는 거지. 그래, 나도 이해해."

  "좋아." 칼린은 와인병을 손짓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어? 혼자 다 마시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개러헬은 우리가 일몰 전에 떠나길 바라고 있어."

  이세야는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좁은 부엌창 사이로 푸른빛을 드리웠다. 오후 내내 레바스를 타고 날아다닌 덕에 예정된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칼린에게 병을 내밀었다. "아무쪼록. 이별의 한 잔일테니."

 

* * *

 

  헤인 요새는 그야말로 외딴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빔마르크 산맥의 서쪽 자락 끄트머리에 위치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토지는 상대적으로 대재앙의 황폐에 시달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울창한 녹색 숲이 무성했고, 가파른 바위 사이로 힘찬 물줄기가 따라 흘렀다. 근방에 서식하는 와이번 무리가 숲을 향해 하강하는 레바스를 향해 위협적인 높은 소리로 울어댔다. 야생과 싸워내 살아남은 거대한 야수들은 감히 다섯 그리폰과 열 명의 기수를 향해 도전할만한 담대함을 품고 있었다.

  그 밖에 대단한 건 없었다. 성의 영지는 오랫 동안 비어있던 듯 보였다. 잡초와 산딸기 덤불로 뒤덮인 들판에, 솔방울 투성이 목초지를 둘러싼 나무울타리는 전부 망가져 있었고, 집이란 집마다 박쥐와 여우에게 점거당해 있었다. 헤인 공의 영주민들은 아마 그가 반란을 선언하자마자 전부 그에게 등을 돌렸거나, 까마귀단이 그를 죽인 뒤 쫓겨난 모양이었다.

  "이걸 전부 재건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레바스를 성 안뜰로 하강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요새이긴 했다. 굳건해 보이는 돌벽이 높게 서 있었고, 솟아오른 첨탑이 멀리까지 시야를 뻗을 수 있게 했다. 헤인 요새가 공성 공격이 아닌 암살에 의해 함락당한 걸 생각하면, 긴 시간 방치돼 낡은 것 외에 방어 시설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쓸데없이 무성하게 자란 장식용 정원을 다듬고 정비해 모양새는 덜하지만 훨씬 실용적인 약초와 야채들로 대신해 놓았다. 마무리 덜 된 토끼우리랑 닭장 역시 작은 정원 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적어도 이번엔 충분한 재료라도 있겠네." 칼린이 대답했다. "나무도, 바위도, 깨끗한 물도, 목초지도 충분하지. 산기슭에서 사냥이나 채집도 가능할 거고. 요새 자체가 이미 충분히 굳건해 보여.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모든 게 훨씬 부족할 거야."

  "대신 할 일도 덜했겠지." 이세야가 말했다. "개러헬은 정말 이 곳이 자유동맹인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상당한 인원이긴 할 거야. 수천 명 정도?"

  "수천 명 정도라. 그 중 대부분이 비전투인원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 올 이유가 없을 테니. 대체 어디에 그들을 수용하란 거지? 큰 성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크진 않은걸."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레바스가 성벽 위로 착륙하며 총안 틈을 붙든 뒤 날개를 펄럭여 반동을 감속시켰다. 갑작스런 정지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두 기수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이세야는 안장에서 내려 성벽을 타고 내려왔다. 칼린이 목 뒤를 주무르며 따라 내려와 레바스를 째려봤으나, 녀석은 자랑스레 날개를 펼치고 뽐내듯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그리폰들이 마당으로 착륙하며 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모두가 내려서 마당으로 합류한 뒤, 이세야는 성의 방어시설을 점검했다. 이세야가 가진 정보가 정확하다면, 헤인 요새는 마지막 영주를 잃은 뒤 거의 30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다. 수십 년 간 손이 닿지 않은 것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상태란 점은 만족스러웠다.

  첨탑을 타고 올라 서자마자 부지런히 달려와 그를 반긴 문신 투성이의 얼굴은 그를 더욱 흡족하게 했다. 오자마 출신의 드워프 감시자 오고사는 고향에서 비계급층 소속이었다. 그 자신의 동족들이 그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대한 덕에, 그는 대재앙이 닥쳐 회색 감시자들이 드워프들의 원조를 요청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동족들을 등질 수 있었다. 오자마의 큰 손실은 아군의 큰 소득이었다. 오고사는 영리하고 유능한, 지칠줄 모르는 전사였다.

  "이세야!" 붉은 머리의 드워프가 햇살에 눈부셔 하는 두 마법사에게 소리질렀다. 그는 엘프를 번쩍 들어 숨막히게 껴안았다. "사람들이 네가 여기로 쫓겨났다고 했는데, 네 검은 새를 볼 때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 뭐야."

  "나도 반가워." 이세야가 숨막힌 틈새로 대답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숨을 골랐다. "난 네가 올레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고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랬지. 올레이 놈들은 비계급층 드워프한테 명령받는 걸 영 좋아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나 역시 굳이 그런 놈들을 돕겠다고 말씨름 하는 데엔 관심이 없고 말이야. 아무튼, 말 많은 슈발리에 한 놈의 가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나니까, 감시자 사령관도 거긴 내 적성이 아니다 싶은지 여기로 배정해 주더라고."

  "나한텐 잘 됐네." 이세야가 말했다. "그래서, 상황은 어때?"

  "대충 스물대여섯 되는 사람들이 있고." 오고사가 대답했다. "반은 회색 감시자고, 반은 농부랑 목수들이야. 둘 다인 사람들도 좀 있지, 물론. 다만...요새 주변을 손 보려면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할 거야. 많은 병사들, 많은 석공들, 많은 청소부들, 많은 요리사들, 뭐든 더 많이."

  "여기로 오는 피난민들 중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겠지. 필요사항을 저쪽에 전달하고, 이동수단 제작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네."

  오고사가 끄덕였다. 그의 밝은 붉은 머리는 수 갈래로 땋아내려 구멍 뚫린 구리 동전들로 끝이 매듭지어져 있었다. 그 드워프가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받아들인 체이신드 풍습이었다. 동족들에 대한 작은 반항의 표시기도 했고. "좋아. 성 자체는 상태가 괜찮아, 거의. 하지만 농토는 상태가 별로야.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할 테니까, 빨리 땅을 개간하고 파종할수록, 더 빨리 농작물을 비축할 수 있겠지. 농부들을 우선으로 해줘."

  "그럴게." 이세야는 태양빛을 뚫고 하얗게 빛나는 헤인 요새의 경계부를 바라봤다. "여기 몇 명이나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민간인들 말이야."

  "민간인?" 오고사는 이세야의 시선을 따라가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으로 식량이 풍족한 것도 아니고, 물 같은 경우엔 이백 명 남짓한 분량이 있어. 일단 그게 첫 번째 한계점이야."

  "그리고?"

  "두 번째 한계점은 물리적인 구조지. 이 성. 사람들이 직접 땅을 경작하고 마을을 꾸릴 생각만 있다면, 피난민을 어마든지 받아도 좋아. 빔마르크 산맥은 멀기도 하고 괴물들이 넘쳐나지만, 그 덕에 대재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지. 너도 오는 길에 이 땅이 자유동맹 그 어디보다도 비옥하다는 걸 봤을 거야."

  "그래, 나도 봤어."

  "그러니까, 마을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천 명, 이천 명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지, 순차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지만 어둠의 피조물이 닥쳐든다면...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할 텐데, 이 성은 그만큼을 수용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세야가 물었다.

  드워프의 적갈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 질문을 기다렸지. 때마침 내가 해결책을 생각해놨단 말이야."

  "훌륭하네. 뭔데?"

  "단순해." 오고사가 대답했다. "그들을 산 안쪽에 수용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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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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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숭고의 시대

 

  호스버그의 전투가 끝난지 3일 뒤, 그리폰 기수들이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더 이상 나타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하고 돌아오자, 왕비 마리웬은 7년 간의 포위 공세를 벗어난 걸 기념하는 연회를 베풀겠다 선언했다.

  개인적으로, 이세야는 그들이 지속될 만한 어떤 성과를 이뤄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끔찍하게 이어지는 대재앙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싸워왔고, 감시자들이 어디 한 군데라도 수복해낸들, 대재앙은 이내 다시 닥쳐들어 모든 걸 삼켜버렸다. 시간이 또 지나면, 그들은 다시 한낱 연기처럼 흩어질 승리를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치곤 했다.

  동생과 아마디스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듯 했고, 다른 최전선에서 그리폰 기수가 가져온 첫 번째 전갈을 받은 날, 그들은 개러헬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올레이와 자유동맹 지역의 회색 감시자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악마의 군주는 더욱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마주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날로 공격성이 증가했고, 더 쉽게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갈에 따르자면 감시자들의 공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고, 이는 동맹군을 매우 고무시키는 소식이었지만 - 동시에 어둠의 피조물들을 격렬함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듯 했다.

  새 소식은 그렇게, 포위 지역 하나를 해방시키는 정도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자유를 누리던 호스버그에 한 줄기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리 마리웬 왕비가 이미 악마의 군주를 해치운 것마냥 군다한들, 사람들은 승리가 아직 먼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직면한 도전은 더 가혹해졌고,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

  자유동맹이 죽어가고 있었다.

  대재앙의 저주의 여파로 그들의 해안은 메마른 바윗더미 사이에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해초의 뼈대만 남았다. 바다 역시 탁한 회색빛으로 죽은지 오래였다. 물고기는 전부 떠나갔거나 죽어버렸고, 와이컴, 헤르시니아, 바스티온 같은 도시를 먹여살리던 홍합이니 굴이니 하는 것들도 껍데기만 남아 파도에 음산하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내륙지역의 황폐함은 바다처럼 가려줄 만한 것도 없어 훨씬 심각해 보였다. 벌목당한 숲에는 메말라 죽은 나무등치들이 비정상적인 곰팡이에 잠식당해 있었다. 한때는 비옥한 농경지였던 대지는 버석버석 갈라져 먼지만 쌓인 채 알곡 하나 없는 앙상한 보리 줄기만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대재앙의 구름 아래 태어난 아이들이나 가축들은 대개 작고 비실비실했고, 기형으로 태어나 병으로 죽기 일쑤였다. 운 좋게 덫이나 절박한 자유동맹 사냥꾼들의 화살에서 살아남은 새나 짐승들 역시 굶어 죽거나 오염에 굴복하고 말았다.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살아남아 구울이 된 놈들조차 죽은지 오래였다.

  어둠의 피조물이 휘두르는 칼 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궁핍이 테다스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폰 기수들, 연락이 닿는 영주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음울한 소식이 자유를 기념하는 호스버그 위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자유동맹으로 향해야 해." 개러헬이 말했다. "왕비께서 충분히 연회를 즐기게 두고, 필요한 예를 갖춘 다음, 부대를 이끌고 자유동맹으로 가자."

  그와 아마디스, 이세야는 방에 둘러 앉아 이미 천 번은 들여다봤을 커크월과 컴버랜드의 지도를 내려다봤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다음 날 있을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는 부엌 하인들의 투덜거림과 부산스런 소음 외에는 왕궁 전체가 고요했다. 야습해올지 모르는 어둠의 피조물을 경계하는 야경대의 끝없는 발소리도 없었다. 한밤중 경고를 알리는 나팔소리도 없었다.

  아마디스는 짙은 붉은색 와인을 잔에 채웠다. 마리웬 왕비는 감사의 의미로 마지막까지 보관해둔 와인 저장고를 열었고, 그 안엔 여전히 꽤 귀한 병들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개러헬의 유리병에 담긴 올레이 포도주는 이세야가 근 몇 년 간 마셔본 것 중 최고의 품질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갈 거라고 생각해?"

  개러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 소득 없는 논쟁을 이미 수 차례 반복한 뒤였고, 동생은 이세야가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낸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뭐 다른 선택지가 있나? 우리 중 누구에게든, 다른 선택지가 있어? 안더펠스의 어둠의 피조물 세력은 약화됐어. 현재 대재앙이 그 어디보다 심한 곳은 자유 동맹이야. 즉 악마의 군주가 거기 있는 거야. 우리가 가서 싸워야 할 곳도 거기란 뜻이고."

  "안더펠스인들은 전투로 지쳐있어." 이세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고향이 남아있기는 한지 확인하고 싶을 거야. 그들은 농작물을 심고, 아이를 가지고, 그렇게 대재앙의 손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이들이 애써 무시하려 노력하는 방식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할 거야. 누구도 스탁헤이븐으로 진군한 뒤 어둠의 피조물에게 뒤통수를 맞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어." 개러헬이 다시 대답했다.

  "루비 드레이크에겐 있지." 아마디스가 와인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의 검은 눈은 차가웠고 계산으로 반짝였다. 언쟁까지는 아니라도, 거의 그 직전까지 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 수 있었다. "내 부하들은 종이에 적힌 '언젠가 미래에 주어질 황금' 따위의 약속에 기대 싸우는데 지쳤다고. 어둠의 피조물들은 포로의 몸값을 지불하지도 않고, 죽여봤자 챙길 전리품도 남기지 않으니, 아무리 싸워도 손에 떨어지는 게 없잖아. 다들 그 사실에 꽤 불만에 차 있거든."

  "당신이 다룰 수 있는 정도의 불만이겠지." 개러헬은 초조해 보였다. 그는 빈 와인잔을 내밀었지만, 아마디스는 무시했다. 끙 하는 투덜거림과 함께, 엘프는 직접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여태까진 잘 다뤄왔지." 검은머리의 여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젠 전투가 끝났잖아. 적어도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싸우게 하려면 종잇장보다는 묵직한 걸 내밀어야할 거야."

  "무슨 뜻이지?" 개러헬이 물었다.

  아마디스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잔에 담긴 진홍색 액체를 흔들었다. 잔 가장자리에 불투명하게 남은 자색 흔적이 차차 옅어졌다. "마리웬 왕비가 원하는 건 당신 뿐이지? 잔치에 와서 예를 표하고, 하룻밤 함께하는 것. 원하는 건 그 뿐이야.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떠나기 전 순간의 쾌락을 선사해주는 것."

  "그래." 엘프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는 유리병을 밀어놓고 의자로 돌아왔고, 물 마시듯 와인을 들이켰다. "비밀로 한 일도 아니었어. 그 제안을 받자마자 당신한테 바로 말했다고. 거절하겠다고도 했잖아."

  "그리고 난 당신이 수락해야 한다고 했지."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래야만 해." 그의 잔잔한 미소는 - 그 불같은 성정을 생각하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세야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엄청 저렴한 대가야, 정말로. 나는 왕관 하나 안 쓰고도 당신을 밤마다 취하는걸."

  "당신에겐 부대가 있잖아, 어쨌든." 개러헬이 대답했다. 그는 와인을 비워버렸고, 잠시 갈망하듯 유리병을 바라보다가 빈 잔을 옆으로 치워놨다. "아마 그게 내가 당신이 거리낌없이 날 이용해먹도록 두는 이유일지도. 그저 당신의 루비 드레이크를 마음껏 이용하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디스가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이용하고 싶다면, 좀 더 괜찮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왕좌를 훔친 창부 따위보다 낮은 대가에 날 팔 수는 없어."

  개러헬이 짝 하고 두 손을 마주쳤다. "아,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는군. 훌륭해! 원하는 게 뭐지?"

  "그리폰 한 마리." 아마디스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아주 잠깐, 개러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커다래진 눈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확 기울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짚어 간신히 넘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리폰을?" 그는 마치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당신은 그 녀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는 이미 십년 가까이 그리폰과 그 기수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왔어." 아마디스는 신랄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충분히 가까웠단 말이지. 그 사이에서 내가 배운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좋아,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당신은 회색 감시자가 아닌걸."

  "나도 알아." 그가 대답했다. "그래서 더 원하는 거야. 와이스하웁트 밖에서 감시자가 아니면서 그리폰을 가진 건 오직 나 뿐이겠지. 그건 어마어마한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 될 거야. 그 정도라면 루비 드레이크가 자유동맹까지 따라가게 할만한 가치가 있을 거고, 얼마 간은 더 많은 약속들로 그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야. 그리폰은 당신의 신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녀석들이 다른 용병대 놈들에게 으스댈 자랑거리가 될 거고, 혹시 자기네도 그리폰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따라올 놈들도 생길 테지."

  "글쎄, 어쩌면." 개러헬은 의자에서 넘어질 뻔 하며 흐트러진 셔츠 매무새를 정리했다.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그게 내 조건이야. 그리폰 한 마리. 짝을 지을 수 있는 암컷으로."

  "번식장까지 시작할 생각이야?" 엘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지도." 아마디스는 마시던 와인을 끝마치고 잔을 내려놓은 뒤, 무릎 위로 손을 깍지 껴 모았다. "당신도 내가 필요할걸. 지금 남아있는 그리폰이 얼마나 되지? 수천 마리 남짓? 그 중 절반 가량은 전투에 동원되었고. 대재앙이 끝나기 전에 많은 수를 잃게 될 거야. 남은 녀석들 중에 번식하지 못할만큼 늙은 놈들이 얼마나 될까? 너무 허약한 놈들은? 대재앙 기간동안 태어난 탓에 병으로 죽거나 기형으로 자랄 놈들은? 그 규모를 다시 복구하려면 분명 도움이 필요해질 거야, 개러헬. 나라면 할 수 있어. 스탁헤이븐 외곽, 아니면 그리폰들 기호에만 맞는다면 빔마르크 산맥도 괜찮겠지. 그 쪽에도 우리 가문의 영토가 있어. 어쨌든 당신은 번식장이 필요해질 거야."

  느릿하게, 개러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당연히 내 말이 맞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향하던 아마디스가 어깨 너머로 미소를 던졌다. "내가 어떤 그리폰을 가질지는 나중에 정하자고. 당신은 일단 단잠을 자두는 게 좋지 않겠어? 왕비한테 예쁘게 보이려면 말이야."

 

* * *

 

  그는 그렇게 했다.

  개러헬은 그의 눈동자 색을 더 깊어보이게 하고 그의 금발을 한층 빛나 보이게 할, 녹색과 금색의 비단 더블릿과 바지를 빼입고 눈부신 모습으로 마리웬 왕비의 잔치에 나타났다. 벨벳 재질의 반망토 위를 두른 회색빛 테두리의 담비 모피는 언뜻 귀족들이나 할법한 고급 흰담비 재질처럼 보였으나, 누구도 그 무도함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만 고급스러웠다. 다만 모피의 희미한 줄무늬를 제외하곤, 그의 복식에 회색빛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가 누군지 알았으니까.

  일련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이세야는 왕비가 준비한 연회장의 화려한 촛불장식 아래, 개러헬이 단연코 눈에 띄게 수려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마리웬 왕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모여있는 귀족이며 용병들 모두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쟤가 잘생기긴 했지, 이세야는 손에 쥔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게 정말 소용이 있기는 할지는 의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약속이란 원하던 욕구를 채우고나면 으레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폐하." 개러헬은 중앙에 자리한 왕비와 측근 귀부인들 앞에 멈추어 예를 갖추었다. 이세야는 그 자리에 없었고, 아마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색 감시자들의 자리는 왕비의 오른편으로, 칼린, 리스메, 그리고 전투에서 활약했던 몇몇 마법사와 감시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디스는 왕비의 왼편에 그의 부관들을 비롯한 용병 대장들과 함께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는 여타 귀족여성들 같은 화려한 드레스 대신, 갑옷처럼 황동 징이 박힌 검붉은색 가죽 누비 재킷을 입는 걸 택했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은 그들이 안티바 시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듯하게 잘려 그의 턱선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는 마리웬 왕비의 궁중에 모인 그 어떤 여성들과도 달라보였고, 개러헬이 그걸 분명히 인지하게 하려는 듯 했다.

  개러헬을 그를 인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는 그걸 능숙하게 감춰냈다. 예를 갖추고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완벽한 헌신만이 빛나고 있었으니.

  "회색 감시자 전투 사령관 개러헬이여." 마리웬 왕비는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휘황찬란하게 눈부셨고, 이 방 안에서 대재앙이나 오랜 포위 공세에 영향 받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듯 보였다. 청보라색 눈동자는 교묘한 눈화장과 분칠로 더욱 깊어 보였고, 진한 보라색 드레스는 어깨를 드러내 크림색 피부를 한껏 드러냈다. 주위의 귀족들은 7년의 고난 사이 여위고 단단해진 몸 위로 유행에 10년은 뒤쳐진 듯한 좀먹은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으나, 왕비의 아름다움에선 흠결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대가 우리 곁에 함께 해서 정말 영광이네." 그는 말했다. "온 안더펠스가 호스버그의 길고 가혹한 포위 공세를 무너뜨린 그대의 영웅적 행위에 감사하고 있다네. 이 보잘 것 없는 연회나마 그 감사의 일부로 받아주길 바라네."

  "충분히 너그러우신 제안입니다, 폐하." 개러헬이 대답했다. "저는 그저 험난한 시국에 모두가 그러하듯 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대의 의무는 다른 이들모다 무겁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저 혼자 짊어지기 힘들만큼이요. 저희 감시자들만으로도 그렇고요. 회색 감시자들은 어둠의 피조물에 맞서 싸운 안더펠스인들의 용기와 용맹함에 큰 빚을 진 셈입니다." 그는 세 개의 높은 단상을 차지한 이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희가 자유 동맹으로 진군하기 위해선 그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대재앙을 끝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한다면, 악마의 군주에게 멸망을,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고향에 안전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의 연설에 침묵이 뒤따랐다. 곧이어 용병 대장들이 술잔을 나무 테이블 위에 부딪히며 감시자들의 약속에 환호했다. 그 환호는 병사들에게로 이어졌고, 마침내 왕비의 측근들 역시 다소 열정이 부족한 태도로 합류했다.

  "우리 안더펠스는 우리의 몫을 다할 것이오." 마리웬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그 머리를 장식한 섬세한 황금 왕관이 연회장 횃불 아래 몰려든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에게 가장 맹렬한 적수였소. 우리 이웃 자유 동맹이 현재 얼마나 곤궁에 빠져있는지는 모두 알 것이오. 악마의 군주에게 마지막 한 방을 먹이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휴식이란 없을 것이고 -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이 바로 그 선두를 차지할 것이오." 그는 두 손을 마주 포개고 개러헬을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감시자들이여, 우리가 쟁취한 승리를 함께 기념합시다."

  엘프는 승락의 뜻으로 다시 예를 갖춘 뒤, 영광스런 왕비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원하던 것 - 군사 원조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을 - 얻어냈고, 이세야는 동생의 자세에서 미묘한 만족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오늘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왕비는 호스버그의 사령관과 장교들 앞에서 약속했다.

  "제대로 지켜야 할텐데." 이세야는 술잔을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칼린이 작게 코웃음쳤다. "의심스러운가?"

  "난 언제나 의심이 많아." 엘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나머진 개러헬한테 달렸다고. 그리고 이걸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는 건 걔 뿐이지."

  "그는 대재앙을 끝내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야, 안 그래?"

  "당신이라면 안 그러겠어?"

  하인들이 연회의 첫 요리를 들여오고 있었고, 칼린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포위 공세에 오랫동안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하인들은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만찬을 준비해냈다 : 비둘기 파이, 브랜디에 졸인 건사과 소스를 부은 사슴 고기, 꿀과 잘게 다진 대추야자를 얹은 빵까지. 성의 저장고에 얼마 안 남은 사치를 총 동원해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운반해온 여덟 코스의 만찬은, 이세야가 살면서 먹어 본 가장 호화스러운 식사였다.

  마침내, 시중인들과 와인 운반인들이 자리를 무르고 궁정 음유시인이 첫 번째 노래를 마쳤을 무렵 - 개러헬의 영웅성과 안더펠스인들의 용맹함을 칭송하기 위해 조잡하게 지어낸 듯한 가사였고, 이세야의 귀엔 유치하기 그지 없었으나 점차 취해가는 병사들이나 용병들은 신나게 구절을 따라불렀다 - 칼린이 몸을 기울였다.

  "아니." 그 혈마법사가 대답했다. "나라면 어떤 일들은 결코 하지 않을 거야."

  "오? 예를 들면?"

  칼린은 비둘기 파이를 포크로 쿡 찍었지만, 바로 입으로 가져가진 않았다. 요리사들이 급하게 왕비의 연회를 준비하느라 깃털 뽑는 걸 놓쳤는지, 작은 깃털 하나가 파이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푹 젖어 뿌리 부분이 구부러진 채 진득한 파이 내용물 사이에 파묻힌 모양새가, 어쩐지 불쾌한 메아리처럼 마음 속을 울렸다.

  "너라면 아마 그 답을 알텐데." 칼린은 그렇게 말하며, 파이에서 깃털을 끄집어냈다. "아니면 곧 알게 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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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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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9:41 용의 시대

 

  "혈마법사를 본 적 있어요?" 발리야가 물었다. 그렇게 소심한 어조로 물어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다소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에 템플러들이 함께하는 걸 받아들이려는 수 개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호스버그에서의 묵은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비록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는 레이마스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 다소 음울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그 여성은 진정성 있는 겸손함과 친절함을 갖추고 있었다. 호스버그의 템플러들이 전부 그와 같았다면, 탑에서 보낸 유년기가 그렇게 공포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발리야는 종종 생각했다.

  다른 템플러들과는 그런 유대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들도 자기네끼리 뭉쳐 다녔으니 말이다. 기사단장 디귀어는 몇 주 전 입단의식을 치르다 사망했고, 그 후로 발리야는 남아있는 템플러들을 이전보다 덜 마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마스와는 아침 티타임에서 계속 마주쳤고, 와이스하웁트 내 접근이 허용된 구역을 함께 걷기도 하며, 발리야에겐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둘은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이가 됐다.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 가깝다고 할만한 사이라고 할까, 이렇게 그를 괴롭히는 질문을 함께 나눌 수 있을만큼은 편안한 사이가 된 것이다.

  레이마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요새의 작달만한 사과나무 아래, 앞마당의 엉성한 돌벽을 따라 사냥할만한 벌레가 있나 폴짝거리며 뛰는 갈색 작은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날개와 목 둘레에 검은 반점 무늬를 가졌고, 배 부분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었다.

  와이스하웁트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종류 중 하나로, 물 저장소에서 빗물을 훔쳐마시고 높은 탑의 돌틈에 둥지를 트는 녀석이었다. 발리야 역시 종종 그 작은 새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고, 저들처럼 자유를 누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기도 했지만, 기실 그 새들조차도 자신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였다. 그들 또한 이 요새에 매여있는 몸이 아닌가.

  새는 뭔가에 놀랐는지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레이마스가 천천히 발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템플러들의 도착 후 몇 달 간 길어진 머리칼 위로 햇빛이 비쳐들며 넓게 퍼진 회색빛이 눈에 잘 띄었다. "물론이지요."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대부분은, 겁에 질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이마스는 굳은살 박힌 엄지로 비어있는 찻잔 가장자리를 쓸었다. 길죽한 얼굴은 언제나 슬픔이 배어있는 인상이었으나,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좀 더 깊은 비탄이 묻어났다. "하지만 템플러에게 발각된 혈마법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어요."

  "나쁜 사람들이었나요? 제 말은...그들 전부가 악한 사람들이었나요?"

  인간 여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텐데, 저는 그 답을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좀 더 깔끔한 대답, 더 명확한 대답이라면, 그들이 금지된 말레피카룸에 손을 댔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왜였을까요?" 발리야는 좀 더 치고 나갔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중요해야겠지요." 레이마스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요. 어떤 건 제법 설득력이 있을 거고, 어떤 건 헛소리에 불과할 거예요. 어떤 것들은 제가 감히 믿고싶을 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구분할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언제나 진실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그들 자신의 지각과 희망과 공포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정직하다 한들 - 혈마법사라는 게 당신들한테나 그 자신들한테 그럴 수 있긴 할까요? -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영계 안에서의 허상 정도로만 '진실'일 것입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곤 단 한 가지, 그들이 말레피카룸을 범했다는 것. 템플러로선, 그걸로 끝인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회색 감시자들도 혈마법을 써왔어요." 발리야가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긴 했으나, 사실상 다른 감시자가 엿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와이스하웁트는 수 세기 전에 비하면 굉장히 쇠락해 있었다. 수많은 홀과 마당은 - 그들이 있는 이곳을 비롯해 - 과거의 유물이자 현재의 빈 공터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마스는 또다시 대답을 미뤘다. 사과나무의 옹이진 나뭇가지에 마지막까지 매달려있던 마른 갈색잎이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졌다. 템플러의 얼굴 위로 회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나부꼈다. 그는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원치 않는 기억을 밀어내듯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챈트리는 우리에게 인간의 자만심과 야망이 어둠의 피조물을 만들어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바람이 멎은 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했다. "마지스터들이 혈마법을 이용해 영계를 침범하고 황금 도시를 약탈했고, 그들의 어리석은 짓의 대가로 테다스 전체가 파멸하고 말았다고. 혈마법이 바로 회색 감시자들이 목숨 바쳐 막으려 하는 그 악을 창조했다고. 그 저주받은 무기를 놈들과 맞서 싸우는데 똑같이 이용한다는 게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군요, 아무래도."

  "하지만 그들은 오염 또한 이용하잖아요." 발리야가 지적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을 받아들여 놈들과 맞서 싸워요. 도구로 이용한다고요."

  "사용자를 파괴하고 마는 도구겠죠." 레이마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혈마법이든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든, 파괴를 동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디귀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세요?" 발리야가 물었다. 일전에 예의를 갖춘 애도 인사를 전했을 때 이후로 기사단장의 죽음에 대해 레이마스와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니 어색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럴지도요. 그 의식은 나약함을 허용하는 종류가 아닐 테고, 디귀어 님은 결코 나약한 분은 아니었지만 템플러 기사단을 떠나기로 결정한 후로 꾸준히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의문이 그 분을 오염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을지도요. 그 부식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인한 의지가 필요할 테니까요."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발리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소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됐지만, 레이마스 자신도 같은 질문을 떠올린 적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닐 수 있겠는가? 젊은 마법사들 역시 두려운 상상에 시달리다 밤중에 깨어나 늦도록 침대 너머로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내가 시험을 치르긴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마스의 핏기 없는 얇은 입술이 고심하듯 일그러졌다. "수석 감시자는 디귀어 님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전까진 입단의식을 진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도 괜찮은 일이지요. 제가 오늘 그 잔을 받는다면, 저 역시 기사단장님 뒤를 따를 것 같으니까요."

  "왜죠?"

  "저 역시 제 자신만의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이들은 오래 된 영웅적인 집단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맞서 싸우는 악은...저는 제 삶을 회색 감시자의 사명에 바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템플러가 된 이유라면 잘 압니다. 저는 마탑의 벽 안에서 양쪽 사람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뭘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제 사명을 다하는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해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숙명적인 패배를 받아들이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제 동기는 순수하지도 확고하지도 않기에, 제가 그 독배를 마신다면 디귀어 님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회색 감시자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발리야가 작게 속삭였다. "제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제 생각에...영웅이 되려면 저보다는 훨씬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번엔 레이마스 쪽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가요?"

  발리야는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일기장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그는 불안한 듯 무릎 위에 얹은 손등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이미 끝까지 읽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이세야의 일기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감시자들이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 물론 네 번째 대재앙의 유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기야 했지만,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원한 것 같은 내용은 없어 보였다 - 나중에 이세야의 혈마법에 대한 고백과, 그걸로 뭘 했는지에 대해 읽은 뒤로는 충격에 빠져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의 영웅, 개러헬에게 혈마법사인 누나가 있었다니. 이세야는 회색 감시자였고, 혈마법사였다.

  그가 엘프였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야 했지만, 분명 중요할 터였다.

  개러헬의 이야기는 테다스 누구나 아는 영광스러운 전설이었고, 그의 위대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엘프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고 떠들든, 그들이 얼마나 경멸을 담아 "뾰족귀"를 음해하건 간에, 누구도 자신들의 터전, 혈통이 이어질 수 있게 기꺼이 스스로를 악마의 군주 안도랄 앞에 내던진 그의 희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세야의 고백이 밝혀진다면 그 빛나는 명예는 퇴색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이 벼랑 끝에서, 잿물이라도 삼킨 듯한 씁쓸함과 함께, 발리야는 자신이 동족들의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의 일기장이죠?" 레이마스가 물었다. 정중한 어투과 조심스러운 눈길은, 발리야가 대답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감시자 중 한 명이예요." 발리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도무지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네 번째 대재앙 당시의 감시자였어요. 그는 혈마법사였고,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죠...하지만 대단한 일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혈마법사에 대해 물어본 거예요 - 그 힘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한지. 만약 템플러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준다면, 제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덜해질까봐.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죠...그리고 그가 남긴 이 유산도...복원할 가치가 있을 수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갈색 작은 새가 다시 사과나무로 돌아와 옹이진 마디 위를 종종 뛰어갔다. 어쩌면 아까와 다른 녀석일지도. 발리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관찰해놓고도, 그는 아직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저는 더 이상 템플러가 아닙니다." 레이마스가 대답했다. 어찌나 작게 말했는지 거의 속삭이는 듯 했지만, 정적을 깬 목소리에 발리야는 화들짝 놀랐다. "말레피카룸의 존재에 호들갑을 떠는 건 더 이상 제 임무가 아니지요." 그의 지친 것 같은, 어두운 색의 눈 안에는 발리야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희망, 혹은 체념...아니면 일말의 두려움일지도?

  "무슨 뜻이죠?" 엘프가 물었다.

  "이제 저도 그 회색 지대를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입니다." 레이마스가 답했다. "그러니 어쩌면, 혈마법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요. 그 감시자가 남긴 유산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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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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