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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숭고의 시대

 

  실제로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아라벨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에 불과했다.

  전설적인 데일리시 걸작품에 비하자면, 그것은 땅딸막하고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고기잡이용 조각배에 이것저것 덧댄 뒤 어설프게 수레바퀴를 달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감시자들은 주민들이 구해온 부품들을 그러모아 조립한 그 배를 가지고 잡초가 무성한 옛 양떼 목초지 위로 움직여보는 연습을 했다.

  그들이 시도하려는 게 뭔지 이해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개러헬의 노력에 동참하도록 선임 감시자두 명을 지원해줬다. 감시자 사령관은 그토록 하잘것 없어 보이는 작전에 그리 대단한 인력을 투입하려 하진 않았으나,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어떻게든 구해낼 수 있을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도 않았다. 둘의 차이는 두 명의 마법사를 지원한 데서 드러났다.

  두 마법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럭저럭 성공이라 할만한 것을 이뤄냈다. 그 아라벨은 비록 데일리시들 것처럼 부드럽게 숲 사이로 떠다닐 수는 없었지만, 이세야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듯 마력장을 조절하여 그 배를 일정한 높이 위에 안정적으로 떠있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맨 처음 그는 주문의 위력을 오판하는 바람에 처음 만든 아라벨을 10 피트 높이에서 날려버려 산산조각 냈었다.

  하지만 새로 만든 쪽은 좀 더 튼튼했고, 이세야의 계산도 좀 더 정밀해진 덕에, 3일 째에 그들은 다소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빠른 속도로 자유동맹을 뚫고 갈만한 이동수단을 만들어냈다.

  그의 능력으로는 그 배를 공중에 가만히 띄워두는 게 한계였다. 마법으로는 배를 띄울 수는 있어도 비행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끌고갈 수 있게 안장을 단 그리폰이라면, 그 아라벨은 훌륭하게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리폰의 속도에 맞춰 날아갈 수 있었다.

  "이제 딱 백 대만 더 있으면 되겠네." 개러헬이 한 때는 목초지 울타리를 지지하고 있었을 닳아빠진 돌기둥에 몸을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간신히 착지시킨 수제 아라벨이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감추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이끌 백 마리의 그리폰과, 그걸 띄울 백 명의 마법사도 말이지." 아마디스가 덧붙였다. 그는 무신경한 태도로 잔디 사이의 데이지 꽃 한 송이를 뽑아선 손가락 사이로 돌돌 말다가 목초지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이렇게 단순한 걸 여지껏 아무도 생각한 적 없다는 게 놀랍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런 생각이 괜찮아 보이려면 적어도 대재앙이 코앞에 닥쳐올 정도는 돼야지." 개러헬이 말을 받았다. "설사 그 지경이 돼도, 나는 주민들 중 기꺼이 저기에 올라탈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즐거워 보여서 나도 참 기쁘다만." 이세야는 다시 아라벨을 떠올렸다가 지상으로 착지시키며 웅얼거렸다. 부양과 착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배를 부숴먹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바퀴에 거의 충격이 가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내심 만족했다. "둘 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면, 가서 그 백 대의 아라벨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있기만 하다면야,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구해낼 수 있을 거라고."

  "세나스테도 이미 명령을 내렸어." 아마디스가 말했다. 카나리아를 입에 문 고양이라 해도 그보다 만족스런 웃음을 짓지는 못할 듯 보였다. "한 시간 전에 공식적으로 하달된 명령이지. 회색 감시자들은 와이컴 주민들을 공중부양 아라벨로 대피시킬 것이고 - 이거 은근 발음이 어려운데? - 스무 대의 배가 완성되면 짐을 싣는대로 출발할 거라고. 우리 셋과 너희의 두 그리폰이 첫 번째 무리를 스탁헤이븐으로 인도할 거야."

  이세야는 고기잡이 배 "아라벨"에서 물러나 바람에 흩날린 머릿결을 정리한 뒤 목초지를 가로질러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수레의 요란한 움직임에 놀라 덤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새들이 다시 지저귀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재잘거림과 지저귐이 풀밭을 따라 걷는 그의 뒤를 노래가락처럼 뒤따랐다. "또 판돈을 나눠걸고 있나보네."

  "당연히 그러겠지." 개러헬이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도 걸어보긴 하겠다잖아. 우리한테도 기회가 주어진 거야, 이세야. 우리가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어."

  일부겠지만, 이세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내 말하진 않았다. 동생의 눈에서 반짝이는 흥분과 전율을 굳이 꺼트리고 싶진 않았다. 희망찬 태도는 개러헬의 가장 훌륭한 재능이었고, 자유동맹인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절실한 것 중 하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라벨 스무 대라고?" 그가 말했다. "망치질을 슬슬 시작해야겠네."

 

* * *

 

  공교롭게도, 개러헬은 망치질에 끔찍히도 재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훌륭한 목수에게 요구되는 신중함과 인내심 같은 자질은 그 엘프 궁수의 대척점에 있는 요소였다. 아마디스가 투덜대며 말하길, 개러헬은 화살로 쏴버리거나, 꼬여내거나, 외설적인 이야기로 꾸며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면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자유동맹 여성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나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이 지적한 대로,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주민들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빠져 있기라도 했다. 대신 그는 자유동맹의 수많은 귀족 친구, 친척들이나 알고 지내는 용병대 대장들, 혹은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이라면 누구에게든 편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종종 개러헬에게 그리폰을 타고 편지를 전하고 오라며 내보내 새벽부터 황혼까지 와이컴 바깥으로 나돌게 했다.

  결국 아마디스가 동생에게 사람들 이름으로 빽빽한 명단과 편지로 가득찬 가방 하나를 안겨주는 모습을 본 이세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개러헬을 전령으로 이용하는 데 짜증 안 내?"

  "당연히 안 내지." 아마디스는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는 검은머리를 찰랑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쟤를 이보다 더 잘 써먹을 방법이 또 있겠어? 쟤는 마법도 쓸 줄 모르고, 톱질이라곤 끔찍하게 못한다는 걸 너도 봤잖아. 괜히 아라벨 만드는 걸 도우라고 뒀다간 분명 그 고기잡이 배를 땅 속으로 묻어버릴 방법을 찾아내고 말걸. 하지만 그 웃기게 생긴 그리폰의 특출나게 빠른 속도로 먼 테다스 구석까지 날아가는 건, 걔가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리고 걔의 매력을 뽐내서 귀족 나으리들과 가차없는 암살자들을 우리에게 동참하게 할 수도 있고. 루비 드레이크의 귀족 대장 아가씨가 서명한 개인 서신을 그리폰에 탄 회색 감시자로부터 전달받는다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큰 특권으로 여겨질지 짐작이 가? 제대로 오래 살아남기만 한다면, 대대손손 손주들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라고. 자기 친구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떵떵거리며 말할거리이기도 하지. 떵떵거리는데 관심이 없는 작자들에게는, 하다못해 우리가 어떤 무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환기시켜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간에, 감히 그 앞에 대고 도움을 거절하기는 매우 힘들 거라는 뜻이야."

  "결국 정치질이라는 거군." 이세야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게 바로 아마디스가 이렇게 개인 책상이 딸린 사무실이며 종이더미 뿐 아니라, 와이컴의 거위깃털이 몽땅 화살 만드는데 징발된 마당에 깃펜까지 제공받은 이유였다. 그 꼿꼿한 실용주의자 세나스테가 아무리 스탁헤이븐의 통치자와 연줄이 있다곤 해도 고작 손님 한 명에게 이 정도로 신경을 쓰는 게 묘하다고 생각은 했지만...결국 이 또한 감시자 사령관의 또 다른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결국 정치질이지." 아마디스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너도 빨리 이 게임에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전쟁이란 건 결국 칼질과 정치질 놀음인 거고, 우리는 이겨야 하니까."

  "나는 마법 쪽이 나아서." 이세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인간 여자가 편지에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두고 나왔다.

  적어도 그 편지들은 효과가 있었다. 개러헬은 매일 같이 더 많은 지원 약속과 원조하겠다는 서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바엘 공작은 와이컴의 난민들이 스탁헤이븐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거란 전언을 보내왔고, 아마디스가 자신의 사촌이 하는 약속은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긴 했지만 충분히 승리감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그냥 적어도, 이 사람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기만 한다면, 그 승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고기잡이 배와 수레바퀴를 가져다가 아라벨을 만들어댔지만 - 혹은 당나귀 수레나 썰매 같은 것까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가져다 썼다 - 대재앙이 닥치기 전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서른 대나 만들면 다행일 것 같았다.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닥쳤을 때, 도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이 첫 번째 무리를 데리고 와이컴을 탈출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마치 무언가에라도 홀린 것처럼 움직였고, 유리 사과 주점에서 술에 취한 이세야가 제안을 던진 후로 딱 일주일 뒤, 그들은 와이컴에서의 첫 번째 탈주를 시도할 수 있을만큼 아라벨을 만들어냈다.

  열여덟 대의 아라벨은 두 줄로 연결돼 있었다.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던 건 열아홉 대였으나, 한 대는 이세야가 내구도를 확인한다고 목초지에 거칠게 착륙시키는 과정에서 망가지고 말았다.

  250여 명의 주민들이 그 안에 혼잡하게 올라타 있었고, 이들을 이끌고 자유동맹을 빠르게 가로지른다는 건 너무나도 허황되게 느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어린 아이들과 굳센 얼굴로 그들을 꼭 끌어안은 부모들 사이로 얇은 나무 상자 안에 식량, 옷, 귀중품 따위가 쌓여있었다. 잡동사니를 실을만한 자리가 부족했기에 사람들은 가진 옷 중에 가장 귀한 것들을 걸쳐입었고, 축제마냥 화려한 모양새가 이 모든 상황에 기괴함을 더했다. 배 옆면에 달린 엉성한 나무 닭장 안에 갇힌 닭들과 오리들이 불만에 차 요동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꽥꽥거리는 쇳소리와 이따금 흩날리는 깃털 역시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일조했다.

  행렬의 선두에 자리잡은 건 굽은꼬리와 레바스였고, 둘은 각각 아홉 대의 아라벨과 연결돼 있었다.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그리폰들에 맞춰 새로운 안장을 고안해냈고, 가죽끈 옆으로 매달린 빛나는 은제 메달이 안개낀 여명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아무리 그리폰이 강력한 생물이라 해도 이만한 무게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 실제로 마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이 있어도 그렇지 않을까, 이세야는 쓸데없는 불안감을 단호하게 옆으로 밀어냈다. 로브 소맷자락을 손목과 팔꿈치 부근에서 동여맨 그는 머리칼을 고정한 머리띠도 단단히 묶은 뒤 나란히 앞장 선 다른 감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를 옆에 둔 개러헬이 자리에서 자신의 그리폰을 다독이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굽은꼬리를 조종하긴 할 테지만 아라벨들을 띄우는 건 마법사의 일이었다.

  이세야는 레바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면 승객 한 명을 더 태울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그 일을 자처했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그는 다른 아라벨 쪽으로 외쳤다. "준비 됐어?"

  "준비 됐어!" 개러헬이 대답했다. 이세야에 비해 훨씬 쾌활한 태도였다.

  "준비 됐소." 다른 마법사의 대답은 좀 더 엄숙하게 들렸다.

  이세야는 왼쪽 손목에 레바스의 고삐를 감은 뒤 두 손으로 스태프를 단단히 붙들었다. 영계로 자신을 연결하자 영적인 에너지가 스태프를 매개 삼아 흘러들며 그를 채우는 게 느껴졌다. 생각의 가장자리로 영과 악마들의 속삭임이 영혼을 울리는 마법 사이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는 그 속삭임을 떨쳐내고 마법을 그러모았다. 지난 며칠 간 수차례 연습한대로, 이세야는 넓은 바닥을 가진 부드러운 고깔 모양을 그려냈다. 그것은 구름 같은 방석 형태로 펼쳐진 모양이었다. 그 무형의 평평한 바닥은 전체 대열을 받쳐줄 수 있을만큼 넓었고 주문의 위력을 넓게 퍼뜨려서 아라벨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보호했다. 안정적으로 주문을 형성하자, 다소 버겁긴 해도 주문을 따라 흘러드는 힘의 파동을 유지하는 건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바스를 불렀다. "날아." 그리폰은 이세야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무게를 이끌고 갈 수 있게 해줄 거란 신뢰를 품은 채 검은 날개를 피며 박차올랐고, 엘프는 고깔 형태의 마법장을 땅으로 향해 보냈다.

  아라벨들이 그리폰 뒤에서 요동치며 나무와 밧줄, 금속으로 된 거대한 애벌레마냥 허공을 향해 꿈틀댔다. 이세야의 뒤로 헉 하는 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뒤 굽은꼬리가 옆으로 나란히 두 번째 행렬을 이끌고 뒤따랐다. 아라벨끼리 연결한 밧줄과 사슬이 위험하게 삐걱댔지만 마법사들의 부유 마법이그것들을 단단히 붙들어 놨다. 지상 20 피트 높이에서 그들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더 이상 무게에 시달리지 않게 된 그리폰들은 안장을 단 채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부유 중인 고기잡이 배들과 잔뜩 흥분하고 겁에 질린 승객들을 이끌었다.

  그리폰들은 이렇게 낮게 비행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건 이세야도 마찬가지였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뒤로 납작 젖혀진 레바스의 귀와 뿜어져 나오는 콧김은 그 그리폰이 나무 꼭대기를 스쳐가는 느낌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이세야는 녀석이 자유롭게 높이 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아라벨을 띄우는 마력장의 고깔을 그보다 높이 떠올릴 수 없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더 높이 올라가면 마법은 흩어지고 말 테고, 그들은 전부 추락하고 말 것이다.

  "날 믿어." 그는 그리폰에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레바스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털에 덮인 한쪽 귀가 퍼드득 떨렸지만, 그저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그리폰은 고도를 유지한 채 곧게 나아가다가 높은 나무가 가로막으면 아라벨을 끌고 뛰어넘는 대신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동맹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바위지대와 황량한 숲 위를, 풀을 뜯는 양떼와 소떼가 수성을 위해 도축당하는 바람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목초지 위를 지나쳤다. 개울이나 강줄기는 이세야가 미처 눈에 담기도 전에 은빛 반짝임만 남기고 스쳐갔다.

  레바스는 평소처럼 빠르게 날고 있진 않았다. 굳이 치자면 그 그리폰은 긴 여정을 위해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땅에서 가깝게 날고 있자니 풍경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스쳐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 시간이 지나자, 와이컴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 대열이 근처로 흐르는 미난터 강 지류 위를 지나자, 이세야의 고깔 마력장 아래로 물결이 움푹 파여 흘렀다. 흐르는 물 위로 주문을 유지하는 건 다소 까다로웠기에 - 예측불허의 소용돌이 물결 탓이었다 - 그 엘프는 빠르게 물줄기를 가로질러 그리폰을 이끌었고 레바스가 강둑을 따라 날도록 했다.

  북쪽으로, 안티바 시티가 있었을, 혹은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재앙의 검은 구름장막이 지평선 위로 그을린 연기처럼 얼룩져 있었다. 고맙게도, 대부분 나무에 가려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는 구역을 지날 때면 이세야는 금방 끓어오를 듯한 구름에 덮인 보랏빛 하늘과 구름 사이사이 소리없이 내리치는 번개가 선사하는 고통의 현신에 흘끗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새벽의 여명도, 빗줄기도 없었다. 지평선을 따라 폭풍의 그림자만이 드러워져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곳에 안스버그가 있다는 걸 이세야는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상 20피트 높이에서 보이는 거라곤 보통 나무나 언덕 뿐이었다. 그들은 비쩍 마른 개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공허한 희망을 품고 짖어대는 텅빈 농장을 지나기도 했고, 비어있지 않은 어느 곳을 지날 때엔 거주민들이 나무창 사이로 던지는 의심스런 눈빛을 받기도 했다.

  오전부터 정오까지 차츰 떠오른 해는 거침없이 밤을 향해 저물어갔다. 아라벨은 딱 두 번 멈춰서 그리폰과 마법사들에게 짧은 휴식을 제공했고 승객들에게 잠시나마 요기를 하며 뻣뻣해진 팔다리를 풀어줄 시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두려움과 급박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마저도 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고, 이동이 다시 시작되면 그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스탁헤이븐의 성벽 뒤로 안전하게 숨길 원했다.

  그리고 붉은 황혼이 찾아들 무렵, 그 성벽이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굴곡진 산줄기를 따라 원형으로 둘러싼 회색 돌벽 위로 석양이 반짝임을 더했다. 북쪽으로는 미난터 강이 도시의 수로를 향해 몰아치는 소리가 바다의 거센 포효처럼 들렸다. 도시 자체의 모습은 녹색 언덕 위 넓은 대로에 둘러싸인 대리석 궁전의 영광스런 위용만이 아주 잠깐 시야를 스쳤으나, 무리가 다가감에 따라 성벽 너머로 금세 가려졌다.

  성벽 위 감시탑 쪽으로 걸린 깃발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성배를 둘러싼 세 마리의 검은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이세야가 보기엔 물고기 같았다. 어쨌든 그 뾰족뾰족한 가시와 소용돌이 무늬 속에서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체가 뭐든 간에, 그것은 사슬갑옷 위에 붉은 겉옷을 두르고 열을 이뤄 선 병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병사들 중 한 사람, 겉옷 아래 판금 갑옷을 걸치고 가슴팍에 금줄을 매단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가 닿을만한 거리가 되자 장갑 낀 손을 들어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스탁헤이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개러헬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피곤할 게 분명한데도 쾌활한 어조로 마주 소리쳤다. 엘프 감시자는 굽은꼬리를 이끌고 땅으로 내려섰고, 이세야와 다른 마법사는 내려앉는 그리폰들을 따라 아라벨을 하강시켰다. 안전하게 착륙하는데엔 5분 정도 소요됐다. 이 공중부양 아라벨이 제대로 먹힌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손상 없이 보존하는 건 매우 중요했다.

  다행히 아라벨은 부드럽게 미난터 강변을 따라 착지했고, 나무 삐걱대는 소리와 옆에 매달린 닭장에서 들려온 꽥꽥소리만이 잠시 이어졌다. 와이컴 난민들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비행 끝에 중심을 찾느라 다들 허둥거리는 가운데, 스탁헤이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음식과 물, 와인이 들려 있었다. "와이컴의 영웅들 만세!" 한 사람이 그렇게 외쳤고, 이내 군중들이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시자들! 회색 감시자들이여! 와이컴의 영웅들을 찬양하라!"

  "저 기세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이세야는 한숨 속에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은 어둠의 피조물로부터 거둔 승리로 스탁헤이븐도 흥이 나겠지만 - 고작해야 적들 손에서 와이컴 주민 한 줌을 구해낸 것에 불과한 승리일지라도 - 그들의 열기가 과연 이미 빠듯하게 들어 찬 도시에 수백의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유지될지 궁금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정말로?" 둥근 얼굴의 나이 든 여자가 불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이세야에게 질문했다. 푸른 공작새와 진홍빛 장미가 그려진 현란한 무늬의 비단 스카프가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싶었고, 그것은 직접 만들어 입은 것 같은 수수한 드레스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경비대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수성을 앞두고 군식구가 느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전쟁을 앞두고 추가 병력이라면 원할 테죠." 엘프는 대답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은 그 정도였다. 힘든 시기에 일손은 누구든 환영일 테니.

  여자는 스카프를 가슴팍에서 고정하고 있는 목각 브로치를 꼭 쥐었다. "나는 노인이지 군인이 아닌 걸요. 싸움 같은 건 할 수 없다고요."

  "이건 대재앙입니다." 이세야가 말했다. 냉혹한 날카로움이 그 목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그 둥글둥글한 여자가 그 대답에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피곤했다. "당신도 싸울 수 있고, 그래야 할 거예요. 이 아라벨에 올라탄 순간 당신은 결정을 내린 겁니다. 우리는 와이컴에서 모두를 데리고 나올 순 없었습니다. 전부를 구하기엔 배도 부족했고 그리폰도, 마법사도 부족했으니까요.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덕에 누군가는 죽겠죠. 그러니 당신은 싸울 겁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 노력과 더 용기있었을 누군가의 자리를 낭비해버린 당신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여자의 입이 충격으로 딱 벌어졌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웅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아라벨에서 짐을 풀고 있는 주민들 사이로 달려갔다. 잠시 뒤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굽은꼬리의 안장에서 마지막 고정끈을 풀어낸 뒤, 끝났다는 신호로 그리폰의 옆구리를 두들겨준 개러헬이 이세야에게 다가왔다. "그것 참...사람들을 복돋는 참신한 방법인데."

  "사람들을 복돋는 건 네가 해." 이세야는 동생에게 으르렁거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쟁 영웅은 너잖아. 사람들을 데려다 놓는 건 내가 하겠지만, 그 뒤는 내 알 바 아니야."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닌걸." 개러헬은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자고. 누나도 피곤한 거 알아. 자, 오늘 밤은 바엘 공작의 환대를 즐겨보자고. 오늘 뿐인 거 누나도 알잖아."

  "내일은 다시 와이컴으로 가야겠지, 나도 알아." 이세야는 지친 태도로 대답했다. 그들은 어둠의 피조물 군대가 와이컴 대문에 닥칠 때까지 최대한 많이 오갈 계획이었다. 하루 종일 대열을 이끌고 지지하며 이동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보기 전에는 제법 괜찮은 계획처럼 보였었다.

  "아냐. 카바로스랑 세 명의 스탁헤이븐 감시자들이 와이컴으로 아라벨을 이끌고 돌아갈 거야. 그 다음엔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그 자리를 대신할 거고, 다시 팀을 나눠서 아라벨을 가능한한 많이 오가게 하겠지. 하지만 누나랑 나는 와이컴으로 돌아가지도, 스탁헤이븐에 머물지도 않을 거야. 잊었나본데, 우린 안더펠스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고. 그러니 와인이나 실컷 마시고 흥에 취하라고. 오늘 밤만은 영웅으로서 즐기란 말이야. 내일 아침이면 다시 회색 감시자가 돼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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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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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 - 챕터 6  (0) 2020.04.26
LF - 챕터 5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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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5:12 숭고의 시대

 

  "자네들이 유일한 생존자라고?"

  "예." 이세야는 지친 얼굴로 천 번쯤 반복한 것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우리는 왕족들을 잃었습니다. 악마의 군주가 허공에서 그들을 날려버렸습니다."

  그 역시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가 화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모두들 분노에 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티바 왕족 전부를 잃고, 감시자 사령관 투랍마저 잃은 것은 회색 감시자의 전력과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예정대로 와이컴에 집결했다. 오스티버, 페나달 및 그들의 담당을 실은 배는 바다 너머에 머물렀지만 그리폰 기수들이 그들과 두 번의 접촉을 가졌고, 현재까지는 안전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안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확실했다. 대재앙은 바람 맞은 들불처럼 안티바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직 마땅한 저항군을 제대로 형성한 나라도 없었고, 자유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뿔뿔이 분열된 상태였다. 각각의 도시 국가는 그들의 생존보다도 독립된 자치권을 붙들고 있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둠의 피조물이 문 앞에 당도한 마당에, 그들은 안티바가 그러했듯 현실부정에 빠져 있었다.

  와이컴의 거리를 장악한 분위기는 여전히 불신과 확신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매일 시민들이 조잡하게 만든 무기로 급조된 민병대를 꾸려 훈련하는 모습이나, 흙 또는 갓 베어낸 나무로 보루를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동이 트기 무섭게 작업에 나서 깜박이는 횃불 빛에 의지해 늦은 밤까지 일했으나, 감시자들의 눈에 그 모든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해 보였다. 그들의 성벽은 어둠의 피조물에 대비해 지어진 게 아니었고, 그들의 가상한 용기에 비해 기술이나 숫자는 턱없이 뒤떨어졌다. 그들이 진짜로 해야하는 건, 이세야는 생각했다. 바닷가 섬쪽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뒤 병사들을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보내는 거지.

  하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와이컴은 어촌이었다. 그들의 배는 해안 정도만 오가게 만들어졌다. 넓은 바다의 깊은 수심이나 풍랑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 안되는 무역선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설사 자유동맹인들이 그들의 조각배에 도박을 건다 해도, 모두를 안전하게 나를만한 숫자는 되지 못했다.

  육로를 통해 스탁헤이븐이나 커크월로 향하는 것도 그리 나을 바 없어 보였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안티바 남쪽을 점령하는 바람에 와이컴 시민들은 어느 쪽이든 대도시로 가려면 대재앙을 똑바로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빠른 말을 탄다면 어떻게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피해 그 여정을 이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 걸어가거나 기껏해야 노새 또는 소가 모는 수레를 타는 게 전부일 사람들이라면 느려터진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겐 버티고 맞서 싸우는 것 외엔 아무런 선택지도 남지 않았고, 승리할 가능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스티버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보다 이 도시가 무너지는 게 빠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세야는, 세나스테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감시자 사령관은 누가 봐도 패배에 익숙치 않아 보였다. 20년 간의 회색 감시자 생활로 다져진 오만한 금발의 전사에게선 앞을 가로막는 무엇이든 순수한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은 엄격함이 묻어났고 - 여지껏 그런 방식으로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듯 보였다.

  하지만 대재앙은 그에게 달갑지 않은 실패의 맛을 느끼게 하고는, 그 위에 얼마쯤 더 얹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안티바 왕족들을 잃은 것이나 두 명의 훌륭한 회색 감시자와 그들의 그리폰을 잃은 것보다도 세나스테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투랍과 덴디도 빠져나오지 못한 곳에서 자네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그가 물었다. 감시자 사령관은 와이컴의 민병대 대장의 사무실을 사용 중이었다. 지난 임무에서 모은 깃발과 훈장들이 가장자리가 습기로 살짝 말린 못으로 고정된 낡은 지도들과 나란히 벽을 메우고 있었다. 말하는 와중에도 세나스테의 시선은 지도 위에 고정돼 있었지만 이세야는 감시자 사령관이 집중해서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제 능력 덕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요." 엘프는 대답했다.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를 꾀어내 자신들을 쫓게 했습니다. 저는 -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그리폰, 레바스가 - 약간 주의를 돌려놓긴 했지만 그 둘이 거의 다 했다고 봐야죠. 악마의 군주는 그...원래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둠의 에너지로 된 폭풍 같은 걸로, 저희를 허공에서 끌어내려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마법도 그런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영계와 전혀 이어져 있지 않았어요. 저희 전부 죽을 뻔 했는데, 개러헬의 동행이었던 마법사 칼린이,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발 같은 마법을 사용해서 저희를 풀어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 날의 주역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세나스테는 젊은 엘프에게 몸을 돌렸다. 사무실 높은 곳에 달린 창을 통해 비쳐든 햇살에 백색에 가까운 그의 짧은 머리가 빛났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쳐지며 엄격한 자세가 약간 풀어졌다. "악마의 군주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건 '아무 것도 안 한 게' 아니네. 자네의 첫 전투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상황을 벗어났군. 스탁헤이븐의 아마디스 바엘과 칼린 데발리스테는 귀중한 동맹이네. 자네의 개입 덕에 동행들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던 세 명의 회색 감시자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감시자 사령관은 결정을 숙고하는 것마냥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확답하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나와 함께 스탁헤이븐으로 돌아갈 걸세. 자네들 모두. 다만 자네와 남동생은, 도시의 방어를 구축한 뒤 안더펠스로 향해야 하네."

  "안더펠스로요?" 이세야는 멍하니 되물었다.

  "와이컴은 버틸 수 없네. 방어시설도 너무 열악하고 대재앙이 이미 너무 가까워졌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군대를 일으킨다 한들 - 불가능하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들이 해안을 따라 쏟아지기 전에 도착하도록 하려면 지칠 때까지 행군시켜야 할 것이고, 지친 병사는 죽은 병사나 다름없지." 세나스테는 가까운 지도 위로 굳은살 박힌 손을 쓸었다. "대재앙은 리베인도 덮칠 거야. 그 반도는 이미 본토와 너무 단절돼 있어.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쪽으로 향한다면 도저히 지켜낼 방법이 없겠지. 최대한 배와 그리폰 기수들을 보내서 구할만큼 구하려 시도는 해보겠지만, 그 나라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 없네. 하지만 스탁헤이븐과 커크월은, 어떻게 버텨낼 지지선을 만들 수 있을 수도 있어. 대재앙을 막아낼 시간이나, 군대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그의 연한색 푸른눈은 매처럼 냉정하게 이세야를 마주 봤다. "뜻을 함께 할 동맹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올레이나 티빈터 제국이 더 강력할 텐데." 이세야가 말했다. 반박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었다. "왜 안더펠스인 겁니까?"

  "그렇지."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는 동의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만하기도 하고. 자네나 개러헬은 지위도 고귀한 태생도 지니고 있지 않네. 심지어 엘프기까지 하지. 둘 중 어느 제국에 보내든 간에 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안더펠스에서는, 개인의 성취야말로 한낱 이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악마의 군주와 맞붙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네. 그러니 자네들이 가야하는 거고. 그들을 모으는 건 결코 쉽지도, 빠르지도 않을 거야. 안더펠스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대부분 작은 마을이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어. 도시라고 부를 만한 규모는 거의 찾을 수 없고.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데다가 대지는 그리 살만한 환경이 못 되지. 그리폰 기수만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유일한 수단이야."

  "그리고 제가 그 그리폰 기수가 돼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세야가 물었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는 아직 안장에 맞는 굳은살이 박히지조차 않은 신입이었다. 회색 감시자용 망토를 두르는 느낌 역시 어색하게 느껴졌고. 안더펠스의 주민들을 끌어내 어둠의 피조물과 맞서 싸우라고 할 그런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나스테는 매우 진지했다. "그들 중 하나가 되라는 거지. 그렇네. 자네와 남동생, 그리고 아마 다른 이들 중에서라면 칼린 정도일까. 그들은 분명 자네의 영웅적인 면모에 모여들 걸세."

  "그렇지 않는다면요?"

  감시자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음벽 같던 태도가 풀어졌고, 그는 벽에 걸린 지도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렇게 될 거야. 자네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세야는 그 말이 나가라는 신호임을 명백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무력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바깥에서는 파란 하늘 위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리본 같은 하얀 구름을 두른 눈부신 장관에는 바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대재앙에 따라붙는 끝없는 폭풍은 시야 끄트머리에서 겨우 보랏빛 멍처럼 흔적을 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만큼은 묵직하게 마을을 뒤덮었다. 수십개의 요리용 화덕에서 나는 연기 사이에는 끓는 역청냄새가 배어 있었다. 와이컴 사람들은 가축이란 가축은 모두 도축해서 염장하거나 훈제하여 요성을 대비했다. 줄지은 소와 염소 고기 옆에는 생선 꼬치가 나란히 열을 이뤘다. 해가 진 지 오래였으나 사람들은 준비에 여념 없었고, 방어벽 건설 중인 인부들을 위해 밝힌 불 위로 고기를 굽느라 바빠 보였다.

  참으로 용기있고, 가망 없는 노력이었다. 이세야는 도저히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도시의 하나뿐인 시장구역으로 향했다. 와이컴이 가진 네 개의 성문 중, 쌍두마차가 드나들만큼 큰 문은 하나 뿐이었다. 그 문 주위로 자그마한 시장 구역이 형성돼 있었고, 이세야가 향한 곳도 그곳이었다. 작은 술집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주민들로 가득 차 있을 테고, 이세야는 지금 같은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선술집은 문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유리 사과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았다.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터질 듯 가득했지만, 이세야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회색 감시자 문장을 보자마자 다시 마시던 음료와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엘프들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만 확실해지면 아무 문제도 없지, 이세야는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감시자든 하인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예상 범위에 있는 한 그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그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마 단순히 그가 감시자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유동맹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그들 종족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가 그들을 굳이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달갑지 않은 양심의 가책과 맞서 싸우며, 이세야는 바 쪽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터주며 회색 감시자에 대한 찬사나, 와이컴을 구하러 와줘서 고맙단 감사 따위를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와인으로."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별로 남은 게 없는 데다가, 남은 것들이라야 도저히 팔만한 품질이 못 됩니다. 감시자 분께 그런 걸 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남자는 자부심과 미안함이 섞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는 큰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제외하면 빼빼 마른 체구와 볕에 그을린 붉은 피부, 홍당무 같은 주황빛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불그스레한 얼굴과 머리색 중 어느 쪽이 더 밝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희도 도리라는 게 있어서요."

  "그럼 가진 건 뭔가?" 이세야가 물었다.

  "취향에 맞으신다면야, 드워프제 에일이 있습죠. 블랙워터 럼도 있고요. 겨울 사과주도 있지만 이것도 거의 남은 물량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시는 꼴을 봐서는 며칠 안에 침이랑 곰팡내나는 신발끈으로 주조한 맥주를 팔게 생겼습니다."

  "사과주를 주게." 이세야가 말했다. 주인은 능숙하게 잔을 채웠고, 돈을 내려는 그를 만류했다.

  주점 저 편에서, 시끌벅적한 사이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야!"

  그는 내부를 둘러봤다. 사람들 사이에서 개러헬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용케 차지한 것이든, 일부러 대접받은 것이든 간에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이야와 타이야도 함께였고, 드워프제 에일을 삼키느라 코를 찡그린 아마디스 또한 눈에 들어왔다. 암청색 후드로 얼굴을 가린 칼린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맞붙을 때 잃어버린 깃털달린 후드를 다시 장만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이세야의 눈에 그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마법사는 머리 위로 덜렁거리는 깃털모자가 없으니 좀 더 품위있어 보였다.

  이세야는 사람들을 뚫고 사과주 잔을 품에 안은 채 그들에게 향했다. "온 지 얼마나 됐어?"

  "감시자 사령관 세나스테께서 명령을 하달한 후부터 쭉." 개러헬은 과장된 몸짓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흔들며 인사했다. 냄새를 보아하니 동생 역시 사과주를 마시고 있는 듯 했고, 온 지 꽤 된 것 같았다. "훌륭하게 취할만큼은 있었지. 이리 와 앉아."

  "나도 그래야겠네." 이세야는 끄덕였다. 타이야는 자매와 같은 의자로 옮겨 앉아 다가오는 엘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세나스테랑 얘기했어?"

  개러헬은 어찌할 도리가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했지. 명령에 대해서야 굳이 말할 것도 없고. 누나는?"

  "너랑 똑같아. 스탁헤이븐, 그리고 안더펠스."

  개러헬은 자신의 사과주를 비운 뒤 두 손가락으로 빈 잔을 밀어서 이미 쌓여있는 빈 잔의 숲에 더했다. "뭐, 적어도 우리 모두 같이 다닐 수는 있겠네."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마디스가 끼어 들었다.

  개러헬은 금색 눈썹을 슬쩍 들어보였다. "감시자 사령관은 당신이 스탁헤이븐에 있는 게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던데."

  "감시자 사령관께선 병에 걸린 오우거와 달콤하고 끈적한 사랑을 나눌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디스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검고 긴 속눈썹을 살랑이며 대답했다. "나한테 명령을 내릴 위치는 아니지. 스탁헤이븐에서 내 도움을 받길 원한다면, 그 여자는 미소 뒤에 이를 악물 지언정 내가 원하는대로 가게 내버려 둬야할 거야."

  "왜 그분이 스탁헤이븐에서 당신 도움을 받으려 한다는 거지?" 이세야가 물었다. "당신은 까마귀단 소속도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아마디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림자 진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는 칼린을 가리켰다. "안티바 까마귀단은 저 사람이지. 하늘에서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고. 나는 페드라스 바엘의 둘째 딸이고, 스탁헤이븐 공작의 사촌이야."

  "그리고 루비 드레이크의 수장이기도 하지." 개러헬이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쪽일 거고."

  이세야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 역시 루비 드레이크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었고, 그 용병단의 새로운 수장이 자유동맹 출신의 젊은 귀족 여성이란 소문도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의 군대 규모는 천여 명의 보병과 삼백여 마리의 군마, 이백여 명의 궁수, 스무 명 가량의 훈련된 전투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도...그리고 그들의 막강함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는 챈트리의 템플러들이 그 이단마법사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색 감시자들이 드레이크를 우방으로 삼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만한 병력이라면 대재앙에 맞서 싸우는데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었다 - 유일한 대가라곤 그들 자신의 생존뿐인 전투에 그 용병들이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안티바 까마귀단이라고?" 타이야가 뒤늦게 칼린을 향해 눈을 깜박이며 질문했따.

  "그래." 그 마법사는 침착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드 아래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탁한 목소리의 짧은 대답이 그들을 침묵에 빠트렸다.

  "그렇구나." 타이야는 눈을 한 번 깜박이곤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댄 채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갈색 머리가 까끌까끌하게 두피를 덮고 있었다. "거기에 마법사도 있는 줄은 몰랐네. 대부분은 보통 그...뭐냐...있잖아. 암살자 같은 거인 줄 알았는데. 단도 같은 거 쓰고, 그러니까, 주문 말고 말이야. 당신은 그럼 무슨 일을 해?"

  "필요한 건 뭐든지." 칼린이 대답했다. 거친 목소리엔 씁쓸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이세야는 사과주를 비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은 탓에 그 탄산 음료는 곧장 머리를 울렸다. "필요한 건 뭐든지, 라고? 그럼 이 사람들을 와이컴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어?"

  후드 아래 깊은 곳에서 칼린의 두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잖나."

  타이야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 봤고, 옆에서 쌍둥이인 카이야도 똑같이 따라했다. "안 될 건 뭐야? 마법으로 그렇게는 못해? 그 뭐냐...통로나, 그런 걸로?"

  "안 된다." 칼린의 대답은 건조하고 단호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이세야는 미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공연히 타이야를 바보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민망했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을 여기서 저기로 뿅 옮길 수는 없는 거거든."

  "다른 걸로 변신시키는 건?" 개러헬이 빈 잔 무더기 사이로 거나하게 취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 눈에는 익숙한, 성가신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생쥐나, 아니면...바퀴벌레 같은 거? 엄청 작은 걸로, 우리가 마을 전체를 함선이나 어선에 싣고 옮길 수 있을 만한 거 말이야."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그냥 애들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내용이야."

  칼린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후드가 젖혀지며 각이 진 그 마법사의 얼굴이 주점에 새어들어온 햇빛에 드러났다. "이야기일 뿐인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능력 밖이긴 하고. 황무지의 마녀들이라면 어떤 종류의 짐승으로든 변신할 수 있겠지. 원치 않는 상대를 변신시킬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하지만 나는 황무지의 마녀가 아니고, 너희들도 아니지."

  짜증 섞인 태도로 의자를 뒤로 젖히는 개러헬의 몸짓에 나무의자가 주점 벽에 부딪혔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아라벨." 이세야가 중얼거렸다.

  그의 남동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디스는 코웃음 쳤다. "아라벨이라니." 검은 머리의 자유 동맹 여인은 그 말을 따라 읊었다. "지상선박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데일리시들이 쓰는 것 같은? 커다란 수레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건 진짜야." 이세야가 말했다. "그리고 마법이 그것들을 숲 사이로 이끄는 거고. 우리는 사람들을 마법으로 다른 곳에 보내거나 생쥐로 변신시킬 수는 없지만, 마법을 쓰면 - 그리고 약간의 목공질을 곁들인다면 - 그들의 어선을 지상선박으로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제안이 테이블을 둘러싼 회색 감시자들과 동료들을 파고드는 걸 지켜봤다. 어째선지,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개러헬은 흥미가 당기는 것 같았고, 아마디스는 회의적인 와중에, 쌍둥이는 그 참신한 발상에 순수하게 신이 나 보였다.

  칼린은 후드를 다시 온전히 눌러썼다. "아라벨에 마법을 걸 줄은 아나?"

  "몰라." 이세야는 인정했다. "나는 데일리시가 아니니까. 그들의 지식 또한 내겐 없지.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으니까, 우리 나름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진짜 아라벨만큼 튼튼하고 그럴싸하게 만들 필요도 없어. 대재앙이 와이컴 사람들을 삼켜버리기 전에 그들을 바다 건너나 강가로 옮겨줄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여전히 만만치 않은 목표야." 칼린은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새로운 마법을 고안해내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고는 있나?"

  "일주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최대니까." 그는 일어서며 자신의 빈 잔을 다른 잔 무더기에 더했다. "상황이 닥치면, 회색 감시자도 까마귀단과 같은 규칙을 따르지. 우리는 필요한 건 뭐든지 해. 우린 이걸 일주일 안에 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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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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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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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41 용의 시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와이스하웁트에 도착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그들이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발리야는 감시자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아침마다 웅장한 도서관으로 이동해 조사를 이어갔고, 저녁에는 먼지 쌓인 강당에 모여 어둠의 피조물과 싸우는 법에 대해 배웠지만, 정작 회색 감시자가 되는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듣지 못했다. 다른 탑 출신의 탈주 마법사 몇 명이 발리야 및 그 동료들과 같은 이유로 피난처를 찾아 요새를 찾아왔으나 그들 역시 호스버그 출신들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안심되는 일이긴 했다. 다섯 번째 대재앙이 끝난 지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다. 테다스의 역사 전체를 훑어봐도, 새로운 대재앙이 100년 안에 일어난 적은 없었다. 비록 발리야가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사명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곤 해도, 살아생전 대재앙을 볼 일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입장에서 어둠의 피조물의 광기와 오염을 굳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약 회색 감시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평범한 부랑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전우가 아닌 부랑자에 불과한 그들을, 챈트리가 찾으러 온다면 감시자들은 과연 얼마나 열성적으로 보호해줄까?

  그 불안정함이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어느 날 아침,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 그는 캐로넬이 낮의 열기가 찾아들기 전까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작은 뒷뜰로 찾아갔다. 뜰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녹색과 하얀색의 바닥돌이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빛이 바랬음에도 소담하고 단순한 형태의 기하학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의 작은 분수는 물을 뿜으며 청색 그늘 아래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그리 오래 갈 풍경은 아니었다. 안더펠스의 여름은 짧지만 무자비했고, 한낮의 열기는 이 뒷뜰의 축복받은 여유를 금세 불태워버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짧은 몇 시간이라 해도 충분히 축복 같았다.

  발리야가 굳이 가져온 질문을 던져 그 분위기를 깨놓지 않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는 이 평온을 가장한 환상만큼이나 대답이 절실했다.

  "우리는 언제 입단식을 거치는 거죠?" 그가 물었다.

  캐로넬이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기까진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가 그 질문에 반가웠는지 성가시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읽던 페이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놓고, 그는 금발머리를 뒤로 흔들어 넘긴 뒤 평온하게 질문했다. "날 어떻게 찾았지?"

  발리야 가방에서 접혀있는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그는 그 편지 안에 진한 라일락 향 만큼이나 진한 내용이 들어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리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소년적 욕망을 무모하게 밀어붙이려 한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선 퍽 인상적이었다.

  편지를 건네주며 그는 대답했다. "당신이 오고가는 모습을 신경쓰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 편지를 전해주기로 약속하고 나서 당신의 온 일정표를 얻어냈죠."

  한숨을 내쉬는 금발의 엘프는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받아든 편지를 책표지 사이에 꽂아넣고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라일락향이 그로부터 풍겨왔다. "정말 끈질긴 친구군. 어리기도 하고. 너희 전부 그렇지만."

  "그게 우리가 입단식을 거치지 않고 있는 이유인가요?"

  "그 중 하나라고 해두지. 다른 하나는 너희가 지금 한창 쓸모 있어서기도 하고. 너희들 중 절반 정도가 악마의 군주의 피에 목이 메어 죽어버리기라도 했다간, 그 따분한 옛날 편지나 지도 따위를 내가 직접 들여다봐야 할 텐데 - 얼마나 끔찍한 전망인지." 캐로넬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대체 왜 그렇게 입단식을 거치고 싶은 거야? 내 이기심은 제쳐두고라도,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데. 그 과정에서 죽는 이들도 많고. 지금은 대재앙 중도 아니고, 너희는 이미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잖아. 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발리야는 뒷뜰에 놓인 건너편 벤치에서 자갈 섞인 먼지를 털어낸 뒤 위에 앉았다.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벤치의 감촉은 차갑고 거칠었고, 그 전에 앉았을 수많은 회색 감시자들의 흔적으로 살짝 패여있었다. 그들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건 유령의 발자국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와이스하웁트의 역사가 그의 위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 느낌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역사는 그를 구속할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안전한 건지 모르겠어서 급한 거예요."

  캐로넬의 눈빛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아침 그늘 속에 그 눈이 더 파랗게 보인다고,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대체 누가 너희를 위협하길래?"

  발리야는 유쾌하지 않은 태도로 으쓱해 보였다. "호스버그에서 우릴 위협하던 그치들이죠. 템플러. 챈트리. 이단마법사를 무서워하는 모든 사람들. 얼굴에 데일리시 문양이 없는 걸 보면 당신도 나처럼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 아녜요. 그렇다면 우리를 자신들과 같은 족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알겠죠."

  연장자 엘프의 미소는 조금 슬퍼보였다. 그들 종족 중 동족들과 함께 데일즈의 위태롭고, 그만큼 소중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데일리시 엘프들의 얼굴에 새겨진 야성적이고 독특한 문신은 그들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표식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구역에 사는 엘프들에겐 주어질 수 없는 기회기도 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잊혀지길 바라며 얼굴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다. 보호구역 엘프에게 주목을 끈다는 건 결코 안전한 일도, 현명한 일도 아니었으니. "알지." 잠시 말을 멈춘 캐로넬이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너는 감시자가 되고 싶어?"

  발리야는 초조하게 자신의 해진 소맷단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손가락 하나만큼 올을 풀어낸 상태였다. 그는 풀어진 올을 돌돌 말아 회색 실뭉치로 만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도전하듯이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당신은요?"

  "나도 몰라."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책을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빼내고 책을 완전히 덮어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그 땐 상황이 좀 달랐지. 완전 다른 세상이었어. 퍼렐든은 대재앙의 초기 단계에 있었거든."

  분수로 옮겨간 그의 시선은 퐁퐁 솟아나는 물줄기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무덤덤했다. "내가 보호구역에서 자랐을 거란 추측은 맞았어. 그리고 대재앙의 그림자가 온 나라로 스며들고 있는 시점의 퍼렐든 보호구역이라면, 그리 좋은 거주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어. 음식은 부족했고. 케일런 왕이 오스트가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폭도들이 보호구역을 덮쳤어.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 일도 아니었지. 폭도들은 우리 부모님 가게를 불태웠어. 그분들은 구두장이였어. 소박했지만, 성실하게 장사하셨지. 우리가 가진 거라곤 그것 뿐이었어. 내가 회색 감시자가 된 건 세상을 대재앙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도,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 굳이 원한 게 있다면, 우리 가족들을 불태우려 했던 그 솀렌들이 똑같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었지. 가능하기만 했다면, 그놈들을 하나하나 악마의 군주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던진 뒤, 그렇게 해낸 자신을 행운아라 여겼을 거야."

  캐로넬의 목소리에 분노라곤 담겨있지 않았고, 이야기하는 그의 어조는 간단한 레시피와 재료를 읊는 것마냥 단조롭고 침착했다. 그 온화함 속에 감춰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던 발리야의 마음 깊은 곳이 울려왔다.

  "어쨌든 당신은 입단식을 거치기로 결정한 거잖아요." 그가 말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아,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어." 캐로넬은 벤치 옆에 검집 째 풀어서 기대놓은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손길은 자루 끝에 새겨진 그리폰문양 위에 머물렀다. "난 아직 여기 이렇게 살아있고, 세상도 멀쩡하게 남아있는걸. 대재앙은 내 희생을 요구하진 않더라고. 게다가 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젠록 몇 마리 말고는 별다른 전투조차 치르지 않았다고."

 서늘한 푸른 눈은 발리야에게 고정돼 있었고, 그리폰 문양 위에 머물던 엘프의 손길이 미끄러졌다. "내가 상처 하나 없이 대재앙에서 벗어났다곤 하지만, 20년 안에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이 날 끝장낼 거야. 운이 좋으면 30년 정도일 거고. 그렇지 않다면 훨씬 짧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내가 선택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 - 너희가 아직도 젋고, 당장 감시자가 돼야 할 급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내게도 그렇게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으면 해서야."

  "템플러들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리야가 물었다. 풀려난 올은 마침내 툭 끊어져 손가락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는 휙 던진 실뭉치가 모래색 돌바닥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당신들은 우리가 감시자가 아니어도 보호해줄까요? 정말로?"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캐로넬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미소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 미소는 조금 흐려졌지만. "그래. 너희는 여기서 다른 모든 사람들만큼이나 안전해. 그러기 위해 굳이 입단식을 거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다른 질문에 대해서라면, 글쎄, 수석 감시자 본인조차도 모르지 않을까. 그는 아마 챈트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뭐라고 하는지 기다려 보겠지. 그리고 챈트리와 템플러 사이의, 혹은 템플러 집단 내부의 균열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 들 거고. 또 마법사 반란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기다려 볼 거야. 그러고 나서야, 수석 감시자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거야. 그는 신중한 사람이거든."

  "그보다는 겁쟁이에 가깝겠죠." 발리야는 씁쓸하게 말했다.

  캐로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 문제는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거나 아예 손을 떼야 하는 놀이판인데, 우리 수석 감시자 분은 도저히 판에서 손을 떼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럴 바에야 그렇게 신중한 편이 낫지." 그는 일어서며 책과 검을 집어들었다. "충분히 빈둥댄 것 같군. 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네겐 도서관에서 해야 할 임무가 있을 테지. 살아있어야 끝마칠 수 있는 임무 말이야."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템플러들이 나타났다.

  무리가 피워올린 먼지가 그들보다 몇 시간 일찍 다다랐다. 감시자들이 그들을 포착한 건 정오 무렵이었고, 오후 내내 이뤄진 부러진 이빨까지의 여정을 쭉 관찰할 수 있었다. 안더펠스를 가로지르는 붉은빛 먼지구름 사이로 무기에 반사된 빛이 간간이 새어나왔지만, 탑에 정찰용 망원경이 없었다면 와이스하웁트의 누구도 그들이 템플러라는 걸 알지 못했을 터였다.

  수가 많진 않았다.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다섯 명의 템플러가 한 무리의 당나귀를 이끌고 수레만한 무게의 강철을 두른 채 험난한 지형을 따라 묵묵히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발리야는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과 함께 요새의 궁수용 들창 사이로 그들을 관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이 치미는 걸 느꼈다. 망원경이 없어 먼지 사이로 템플러 각각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굳이 보고싶은 건 아니었다. 혹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는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편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안더펠스를 통과하는 그 여정이 휴대용 화덕 안에 몸을 욱여넣고 있지 않은 채로도 충분히 고난스러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그 템플러들을 향해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동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지만 발리야는 궁수용 들창 옆에 몇 시간을 머무르며 템플러들이 황량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관찰했다. 마침내 부러진 이빨의 기저부에 도착한 그들이 와이스하웁트 정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을 땐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는 이세야의 일기장을 건성으로 넘겨가며 시간을 때우려 했으나 좀처럼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눈앞의 잉크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는 안정감을 찾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지팡이를 움켜쥐는 일이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잦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내,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와이스하웁트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대는 대화소리가 귀에 와닿았다. 질문, 대답, 특별한 말은 없었다.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템플러 대장이겠지, 발리야는 생각했다. 호기심과 공포가 반반 섞인 상태로, 그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정문으로 향했다.

  부러진 이빨 쪽으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그 템플러들을 붉게 물들인 건 석양이 아니었다. 갑옷 위를 두텁게 뒤덮은 흙먼지가 땀에 젖은 피부 위로 말라붙어 있었다. 지친 눈을 꿈뻑거리고 있는 먼지투성이의 당나귀는 붉은 털의 품종마처럼 보여다.

  워낙 지쳐 있어 그다지 위압적인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발리야는 홀의 그림자 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템플러에 대한 공포심은 너무나도 뼛속 깊이 배어있었다. 그는 적대감과 경계 속에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고는 그 흉갑에 새겨진 타오르는 검 문양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과 템플러들 사이를 가리며 반원형으로 마주 선 회색 감시자들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쪽의 동지들로부터 소식은?" 술웨가 묻고 있었다.

  "없소." 대장 템플러가 대답했다. 앞서 들었던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땀에 젖은 흙먼지가 콧수염을 덮고 있어 원래 색을 구분할 수 없었고, 발리야의 방향에선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호스버그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곳의 상급 템플러라면 전부 알고 있었고, 저 자는 기억에 없는 자였다. 게다가 그의 억양은 어딘가 낯설었다.

  "우리가 들렀던 두 요새 모두 텅 비어있었소." 그는 말을 이었다. "완전히 버려져 있었지. 이유를 아는 사람도 없었소. 지역 주민들은 감시자들이 여분의 말이나 생필품 따위를 그들에게 팔았다고 했소.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서두르는 것 같았다고들 하더군. 하지만 왜 떠나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핸 일절 말하지 않았다고 했소. 그 근방에 어둠의 피조물이 출현한다는 소문도, 우리가 직접 마주친 놈들도 없었고."

  "탈영인 것 같소?" 술웨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 템플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그 동작을 따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흩날렸다. 그 모양이 횃불 덕에 붉은빛 후광처럼 보였다. "그들은 떠난다는 걸 숨기려하지 않았소. 어쨌든, 요새 하나 정도라면 탈영일 수도 있겠으나, 둘 다 그럴 리가?"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설득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숫자로는 얼마 되지 않는 감시자들이니." 흉터의 여성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리 믿지 않는 듯 했다.

  "그럴지도." 템플러가 어깨를 으쓱하자 철컹 소리와 함께 또다시 붉은 흙먼지가 일었다. "나로선 모를 일이오. 그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뿐. 두 번째 요새를 지난 뒤 우리는 제국대로를 따라 체뉴어로 향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기까지 왔소. 오는 길에 편지나 서신 몇 개를 받기도 했고. 짐 안에 있긴 하나 전부 징집자들의 가족이나 귀족들이 보낸 서신 뿐이오. 회색 감시자들로부터의 소식은 전혀 없소. 말했듯이, 오는 길에 마주친 이도 없고. 만약 있었다면 이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겠지."

  술웨는 고개를 끄덕인 뒤 캐로넬을 앞으로 불렀다. "서신을 가져와 주신 것에 감사하오. 내 동료가 당신들을 방으로 안내할 것이오. 우선 편히 쉬시길. 아침이 되면 당신네 탈주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합시다."

  저들도 탈주자라고? 그 생각에 발리야의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템플러들이 호스버그 마법사들을 추적해 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온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호스버그 마법사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체뉴어 남쪽의 어딘가에서 왔다면...거의 대륙 절반을 가로질렀단 뜻이었다. 지난 두 달간 그는 테다스 지도를 들여다 보며 지냈다. 그렇기에 그 여정이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지 알고 있었다. 채집이 어렵지 않고 기후가 따듯한 여름이라곤 하지만, 산책처럼 가볍게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마법사와 템플러 사이의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것일까?

  그랬다. 이후 몇 주에 걸쳐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그 템플러들은 셀레스틴 호수에서 멀지 않은 올레이 남부에서 왔다. 그들의 대장인 디귀어는 기사단장 계급이었다. 그는 커크월의 학살과 백색탑의 혼란에 대해 듣고 난 뒤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아 이 일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총 여뎗 명이었다고 했다. 두 명은 오는 길에 사망했고, 한 명은 중간에 탈영했다. 처음 발리야는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얼마 안 가 두 명의 죽음이나 탈영이 템플러들의 리륨 중독과 관련 있다는 걸 연결지을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이 도주할 때 빼돌렸던 양만으로는 와이스하웁트까지 오는데 충분치 않았으리라.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빈약한 소문들을 모아 추론해냈다. 결코 템플러들과 직접 얘기하진 않았다. 그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홀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문간에 몸을 숨겨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멍청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 그들에겐 그를 추궁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있다 해도 그럴 권리가 없었으니 -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오랜 습관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슴이 늑대 무리를 관찰하듯 그들을 지켜봤다. 라로스라는 드워프 템플러는 체중을 조절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 탓에 갑옷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꿀 케이크나 설탕에 절인 아몬드를 먹어댔다. 그들 중 유일한 여성인 레이마스는 시종일관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조금도 웃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온 벌레를 붙잡아 날씨나 시간에 아랑곳 않고 바깥에 풀어주는 그의 태도는 항상 점잖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난 디귀어는 이따금 회색 감시자들과 함께 연병장에서 대련을 하거나 자그마한 성소에서 열의 있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았고, 발리야나 다른 마법사들에겐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오직 기도할 뿐이었고, 하루가 다르게 걱정으로 주름이 깊어가고 체중은 감소했다.

  "그는 평화를 원해." 어느 아침, 도서관에 모인 호스버그 마법사들에게 세카가 말했다. 계절은 가을이 되어갔고, 안더펠스의 타는 듯한 더위도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낮 시간은 건조했고, 서늘한 기운이 정오 무렵까지 머물다가 쌀쌀한 밤을 경고하듯 녹아내렸다.

  "마법사와 템플러 간에 말이야?" 발리야가 물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와이스하웁트의 끔찍한 외풍을 막기 위해 빌린 회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었지만 몇 주 안에 더 두툼한 걸 마련해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도서관에 몇 시간 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건 온기를 유지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린 마법사는 고개를 젓고는 읽고 있던 닳아빠진 지도 위로 주의를 돌렸다. 방을 채운 자료의 절반 정도는 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지도나 일지, 피에 젖은 서신 따위가 새로 나타났다. 그렇게 작업한 결과, 그들은 수상쩍게 실종된 감시자의 흔 적 네 개와,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진 기괴한 어둠의 피조물의 흔적 하나, 그리고 회색 감시자 행정관이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한 번 확인할만 하다고 주석을 남긴 애매한 사건 두세 가지 정도를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 말이야." 세카가 말했다. "자신이 한 일이 옳다고 말해줄 창조주의 신호 같은 걸.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회색 감시자가 되더라도 의무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신호 같은 거겠지."

  발리야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회색 감시자가 되려 한다고?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그와 얘길 나눠 봤으니까." 세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커다랗고 까만 눈은 진지한 빛을 띄었다. "너도 템플러들과 이야기 나눠볼 수 있어, 알고 있겠지만."

  "너나 가능하겠지." 발리야가 웅얼거렸다. "나는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

  "시도나 해봐." 세카가 말했다. "머지 않아 그들은 우리와 등을 마주하고 싸우는 동료가 될지도 몰라. 우리가 운이 좋다면. 창조주가 디귀어에게 그가 원하는 계시를 내린다면, 그리고 수석 감시자가 이 갈등 속에서 결국 어느 쪽 편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발리야는 머뭇거렸다. "어떻게 해야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뜻은 그 분에게 달린 일이겠지. 우리가 어찌 할 여지가 없을 거야. 하지만 수석 감시자라면..." 세카는 보고 있던 지도의 끄트머리를 살짝 말아서 발리야에게 그 누런빛 양피지를 강조해 보였다. "우리가 유용한 걸 찾아내는 거야. 우리의 가치를 입증할 만한 걸. 회색 감시자들이 네 번째 대재앙에서 찾으려는 게 뭐든 간에 그 답을 찾아내자고. 혹시 뭐 건진 거 있어?"

  "아직은." 발리야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찾아내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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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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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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