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12 숭고의 시대

 

  안티바 시티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우렁차고 길게 울리는 그 소리는 구리종 안에 천둥을 가둔 것만 같았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울림이었다.

  이세야가 계단을 다시 올라 그리폰들이 기다리는 성벽 위에 다다랐을 때, 발 아래 펼쳐진 도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찬란한 주홍빛이 챈트리 성당 창에 반사됐다. 거리는 마치 붉은빛 금빛 강처럼 보였다.

  석양 때문이 아니었다. 안티바 시티는 불타고 있었다. 두터운 연기가 질식시킬 듯 묵직하게 거리를 메웠다. 성벽을 타고 울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비탄 섞인 메시지를 전하는 종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적들이 공격해온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오고 말았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의 판단은 틀렸다. 안티바 시티는 며칠조차 버티지 못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이미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세야의 눈에 건물들 사이로 움직이는 거대한 뿔의 오우거와, 그 발치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쉬릭 무리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며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덴디가 계단 위로 올라서며 이세야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폰에 올라타. 움직이라고."

  젊은 엘프는 멍하게 끄덕였다. 그는 레바스의 등 위에 올라 아마디스에게 손을 뻗어 올라타는 걸 도왔다. 인간 여성은 여지껏 이세야가 그래왔던 것처럼 두 번째 안장에 자신의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세야는 고삐를 쥐었고, 검은 깃털로 덮인 목에 몸을 숙여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단어를 속삭였다. "날아."

  레바스는 왕궁의 돌바닥에 발톱을 박아넣으며 근육을 수축시켰고, 넓다란 검은 날개를 강하게 두 번 펄럭인 것만으로 공중으로 도약했다. 바람이 이세야의 얼굴 위로 몰아쳤고,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세상이 발 아래로 멀어져가자 순수한 환희가 차오르며 대재앙에 대한 공포조차 일순간 잊혀졌다. 그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안티바 시티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흥분은 찾아든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거리와 연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볼 수 없다는 게 차라리 고맙게 느껴졌지만, 이세야는 인형처럼 보이는 실루엣으로나마 놀이라도 즐기듯 창문을 통해 사람들을 끄집어내 불길 속으로 던지는 오우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체계적인 방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혼란 속에서 강이나 성벽 밖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작은 형상 하나가 까맣게 몰려든 어둠의 피조물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 그들은 대개 혼자이거나 작은 무리였고 금세 파도에 휩쓸린 나뭇가지 마냥 사라졌다.

  대재앙을 막겠다고 맹세한 회색 감시자들이,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니. 그 부당함에 이세야는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아마디스가 뒤에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엘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에게 동승이 있다는 걸 잠깐 잊고 있던 것이다. "살아남아. 복수는 그 다음이니까."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로 무슨 복수를 한다는 거지? 놈들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놈들에게 가책을 느끼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죽여버리면 되지." 아마디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세야는 주춤했다. 그는 동행을 돌아봤고, 무표정하게 학살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을 확인했다. 아마디스의 얼굴 위로 움직이는 거라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이세야가 물었다. "평범한 안티바 레이디로 보이진 않아. 그 검들을 다루는 솜씨만 봐도."

  아마디스가 웃었다. "안티바 레이디들을 별로 안 만나봤나 보네. 어떤 이들은 까마귀단으로부터 뜨개질 수업을 듣기도 하는걸. 굳이 말하자면, 틀린 지적은 아니야. 난 안티바 출신이 아니니까. 나는 스탁헤이븐 사람이야. 여기엔 친구나 좀 만들고 구혼자라도 얻어오라고 보내졌지. 둘째 딸이라면 응당 자기 살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니까."

  "스탁헤이븐의 레이디들은 다 사람을 죽일 줄 알아?"

  "몇몇은." 아마디스의 미소는 차가운 검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뛰어나기도 하지. 대재앙에는 꽤 쓸모있을 거야, 안 그래?"

  이세야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단단하게 땋아올렸던 머리가 그리폰의 빠른 비행속도에 휩쓸려 느슨해져 있었다.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의 긴 금갈색 머리는 눈앞으로 마구 휘날렸을 터였다. "죽여야할 어둠의 피조물이 너무 많아."

  "꼭 그렇진 않지. 딱 하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악마의 군주, 그놈만 죽이면 대재앙은 무너지는 거니까."

  아마디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재앙의 비정상적인 폭풍이 그들의 눈앞에서 쪼개졌다. 창백한 보랏빛 번개가 회색 장막 위로 갈래갈래 내려꽃히며 구름을 갈라놓고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그 위로 떨궜다.

  그리고 폭풍 한 가운데로 악마의 군주가 날아올랐다. 넝마같은 날개는 거대했고, 몸체 위로는 굽이치듯 돌기가 솟아 있었다. 두 눈 안에서 부정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생김새는 드래곤과 흡사해 보였지만 어떤 드래곤도 그렇게 끔찍한 것을 속 안에 담고 있진 않았다. 암흑이 그 주위에서 이글거렸고, 암흑 자체가 그것의 영혼이었다.

  그것은 쏘아올린 화살처럼 중력을 아무렇지 않게 거스르며 하늘 높이 치솟아 대열의 앞쪽에 있는 그리폰을 노렸다. 놈의 아가리 사이로 보라색 암흑이 뿜어져 나왔고, 끔찍하리만치 날카로워보이는 들쭉날쭉한 이빨이 아주 짧게 모습을 비쳤다.

  그리고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들은 새까만 눈송이마냥 빙글빙글 회전하며 하늘에서 곤두박칠 쳤다. 이세야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추락하는 저 작은 점들이 휴블과 덴디를 비롯한 안티바의 왕비와 그 부친, 삼촌, 혹은 누군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리폰 검은발톱와 스카이악스, 최고의 그리폰 두 마리도 함께라는 것을.

  씁쓸한 충격에 혀 안쪽이 얼얼했다. 분명 투랍과 다른 이들이 경고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투라고 할만한 것조차 없이 말이다. 그는 그들의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우리를 따라온다." 아마디스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활짝 날개를 뻗은 악마의 군주는 요동치는 하늘에서 폭풍을 뚫고 빠르게 몸을 돌려 나머지 감시자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뒷편에서는 층층이 쌓인 적란운 사이로 번개가 지그재그로 번쩍였다.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이세야는 안장 위에 꼼짝 없이 굳어 있었다. 그 때 그의 눈에 개러헬이 요격을 위해 경로를 바꾸는 게 들어왔다. 미친 거 아냐?

  그가 고른 하얀 얼룩무늬 그리폰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빨랐다. 굽은꼬리는 날개를 몸에 바싹 닿도록 접고 다리를 웅크린 채로 강하하는 독수리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그리폰이 악마의 군주가 감시자들을 덮치기 전에 놈에게 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 움직이는 둘의 각도와 궤도를 살핀 이세야는, 동생이 어떻게든 그렇게 해낼 것만 같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눈 깜짝할 새 휴블과 덴디를 부숴버린 놈에게, 아직 젠록 한 마리조차 죽여본 적 없는 개러헬이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군주조차도 그에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놈의 펄럭이는 날개가 돛처럼 바람을 끌어모아 활짝 펼쳐진 순간, 개러헬과 그의 그리폰이 놈에게 충돌했다. 악마의 군주의 하체가 앞으로 휘청였고, 놈은 뒷발 발톱으로 공중에서 갈퀴질하며 울퉁불퉁한 꼬리를 휘둘러 개러헬을 후려치려 했다.

  그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이세야는 그 순간 동생의 전략을 깨달았다. 그는 악마의 군주와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다른 이들이 날아서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놈을 교란시키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리폰은 그 시도가 거의 가능해보이게 할만큼 빨랐다.

  그 "거의"는 물론 그 둘을 죽게 할 테지만.

  일렁이는 보랏빛 광채가 밤하늘을 갈랐다. 악마의 군주가 그 번쩍거리는 오염을 개러헬에게 뿜어낸 거이다. 하지만 그리폰은 공중에 그대로 머물렀고, 그 찬란한 어둠이 스쳐간 경계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개러헬이나 그의 그리폰은 덴디와 휴블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악마의 군주가 쏟아내는 치명적인 공격이 미치는 범위를 계산해낸 것마냥, 딱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은, 눈먼 행운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그들에게 호의적이든가.

  이세야는 발꿈치로 레바스의 옆구리를 툭 쳐서 그리폰에게 그들을 향해 비스듬히 접근하라고 신호했다. 그 거대한 야수는 망설이는 듯 했지만 - 그는 레바스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까지의 찰나의 머뭇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 이내 앞으로 몸을 날려 개러헬의 반대쪽, 악마의 군주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세야에겐 다행스럽게도, 다른 이들은 누구도 그들의 멍청함에 함께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카이야와 타이야, 안더펠스 원주민 사내는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져 대재앙의 검은 구름 너머로 도망쳤다. 몇 분만 더 주어진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몇 분만. 2분, 3분 정도. 어쩌면 4분까지도. 그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그게 최대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레바스를 돌진시켰다.

  2,000 피트 정도의 거리가 되자 악마의 군주를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비인간적이고 압도적인 그 냄새는 대지 아래 차갑고 죽은 영역의 냄새였다. 썩은 이빨에서 나는 입냄새나 오염된 강물 바닥의 진흙 냄새 같기도 했다. 완전한 오염의 냄새.

  그리고 그 오염의 메아리가 이세야의 정신 끄트머리를 간질거렸다. 악마의 군주의 기묘하고 유혹적인 노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아주 미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감질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걸 원한다는 건 콜링의 신호기도 했고, 기실 그가 그걸 원한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그 소리는 차단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도 두렵고, 너무나도 낯선 기분으로, 그는 이 모든게 시험의 일부가 될 거라는 걸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고삐를 느슨하게 놓아버리고, 레바스가 자신의 경로를 고르게 내버려뒀다.

  무모하고 멍청한 도박이었다. 이세야는 자신의 새 그리폰에게 몇 년은 함께 움직여온 숙련자들이나 기대할 수 있는 호흡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가진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레바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폰은 강력한 검은 날개로 전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의 상승작용을 붙들고 위로 치솟았다. 이세야는 그 열기 속에 섞인 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악마의 군주 뿐이었다.

  놈에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1,000피트. 500피트. 이윽고 녀석의 그림자 속에 들어섰다. 넝마 같은 두 날개가 레바스의 머리 위로 절벽처럼 드리워졌다. 이세야는 이제 드래곤의 가죽과 그 안의 오염이 결정을 이룬 것 같은 붉은 피가 묻어있는 등의 돌기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

  100피트. 위험구역 안이다. 놈이 머리를 돌려 입을 벌리기만 해도 숨결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놈은 그들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악마의 군주는 탈출 중인 살아남은 감시자들로부터 놈을 떼어놓기 위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흰 얼룩무늬 그리폰과 그 기수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안장 위에서 자세를 다시 바로 잡은 이세야는 지팡이를 쥐고 영계와 접촉했다. 이세야는 레바스가 날렵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직전, 가까스로 마력을 끌어내 악마의 군주에게 어설프게 뭉쳐진 연보라빛 에너지를 쏘아보낼 수 있었다. 그 영혼화살은 드래곤의 단단한 돌기 위를 적중했고, 접시만한 크기의 비늘 위로 번쩍이고 쉿쉿거리며 퍼져나갔지만 악마의 군주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뒤 레바스가 공격했을 땐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 그리폰은 악마의 군주 옆구리에 발톱을 박아 두 주먹은 될 법한 비늘과 피부 돌기를 뜯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그리폰 옆으로 비구름도 없는 하늘에 진득하고 차가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은 영혼을 찢어놓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날개를 몸에 바짝 붙여 접은 레바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강하했다. 그리폰과 함께하는 이세야는 내장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 안쪽까지 공황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옆에서는 아마디스가 비명을 질렀다.

  악마의 군주의 꼬리는 그들의 머리 바로 위를 쓸고 지나갔고, 얼마나 아슬했는지 이세야의 머리칼 몇 가닥이 그 돌기 부분에 잘려나간 것 같았다. 거대한 머리가 뒤를 돌아봤고,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아궁이 같은 한쪽 눈이 그들을 바라봤다. 파괴적인 숨결이 그들을 노리기엔 각도가 좀 모자라 보였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드래곤은 굽은꼬리를 쫓던 걸 놔두고 그들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레바스는 요리조리 자세를 바꿔가며 맹렬하게 날개짓했고, 이따금 드래곤의 옆구리를 발톱으로 움켜쥐어 악마의 군주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쓰기도 하며 장단을 맞췄다 . 그 거대한 생물은 그 부피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방해물이 되었다. 그리폰이 그 근처에 붙어 제대로 이용하기만 하면 그들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2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다른 감시자들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이세야는 그들이 폭풍을 뚫고 안전한 곳에 다다랐으리라 생각했다. 개러헬 역시 도망칠 기회가 생겼을 테지...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굽은꼬리는 속도 때문에 귀를 납작하게 접고서 암회색 구름을 돌아 방향을 틀었다.

  마법의 사정거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개러헬의 동행인 칼린이 바다뱀이 휘감고 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영계로부터 불덩어리를 불러냈다. 불덩어리는 악마의 군주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사이 속도와 형태를 붙여갔다.

  드래곤의 몸체에 많이 흡수되긴 했지만, 불덩어리가 부딪힌 충격에 레바스의 털이 바짝 섰고 열기가 그들을 휩쓸었다. 불길은 타락한 고대 신의 가죽을 그슬렸고, 이어 분노의 포효가 울렸다.

  악마의 군주는 위로 치솟으며 길다란 몸을 뒤틀어 두 상대를 한꺼번에 시야에 확보하려 했으나 아무리 하늘에서 몸을 비틀어도 둘을 한 번에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레바스를 뒤에 둔 채로 굽은꼬리와 그 기수를 잡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 대신, 악마의 군주는 구름마저 삼키고 그리폰의 비행깃털이 날개 앞쪽으로 쏠리게 할만큼 강하게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소리지르며 악마의 군주가 빨아들이는 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 굽은꼬리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세야는 어둠의 피조물의 숨결이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보라빛 파동 에너지를 불러보려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놈이 숨을 내쉬었을 때, 이번에 나타난 것은 순수한 죽음의 소용돌이였다.

  악마의 군주가 내뱉은 것이 마법임은 물을 것도 없이 분명했으나, 이세야는 그런 종류의 마법을 한번도 본 적 없었다. 그 주문 안에서는 영계의 느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와 악몽의 영역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악마의 군주가 만든 것과 같은 것을 빚어낼 수 없었다.

  그 어둠의 소용돌이는 영과 육에 동시에 작용했다. 굶주린 바람은 그 아가리로 그들을 끌어당겼고, 동시에미지의 무언가가 그들의 생명력을 흐트러 놓았다. 악마의 군주의 소용돌이가 이세야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 느껴졌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힘은 강해져갔다. 더 이상 가까워졌다간 그대로 으스러지겠지만 - 그러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을 게 분명했다.

  멈추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레바스는 온힘을 다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지만 그 그리폰 역시 점차 굴복하고 있었다. 날개에서 깃털이 뽑혀나와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 치며 끌려들어갔다. 반짝이는 검은색 미늘은 하얗게 뼈대만 남았고, 선명한 분홍색 깃촉 역시 창백한 구멍만 남았다. 이세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며 자신의 두 손도 하얗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굽은꼬리가 그들과 똑같은 싸움을 버티다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칼린은 회백색 그리폰의 등에서 일어서려 애썼다. 그의 깃털 달린 후드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절박하게 지팡이를 잡고 버텨섰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허리에 매어둔 주머니가 빙글빙글 돌며 굽은꼬리의 커다란 비행깃과 하얀 솜털과 섞여 사라졌다. 하지만 마법사는 끝까지 버텨냈고,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선으로 이루어진 속박하는 감옥이 악마의 군주 주위에 생겨났다.

  그 마법은 고대신을 붙잡기엔 터무니없이 약했다. 악마의 군주가 붙들려 있던 시간은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 뿐이었다. 놈은 곧바로 빗물을 털어내듯 그 마법을 뿌리쳐냈다. 감옥의 형체가 흔들리더니 곧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마법은 칼린이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세야는 그가 쓴 마법이 뭔지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소용돌이에 다가갈수록 시야가 흐릿해졌다. 점차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쓸 수 없었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기도 전에 공기가 전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충격파는 느껴졌다. 칼린이 악마의 군주에게 날린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거의 흔적만 남아있던 그의 첫 번째 주문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진동이 퍼져나갔다. 그 충격에 두 그리폰은 소용돌이에서 떨어져나가 공중으로 하릴없이 빙글빙글 돌며 날려갔으나, 그 어떤 비행속도보다도 빠르게 악마의 군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세야의 머리가 마치 오우거로부터 얻어 맞은 것처럼 뒤로 꺾였다. 입 안에 피가 고여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유지했다. 힘겹게 피를 뱉어낸 그는 한 손으로는 안장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붙들었다. 허리를 붙든 아마디스의 두 팔이 철로 된 허리띠 같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옆으로, 위아래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했고 - 그리고 마침내, 어지러움 속에서, 헐떡이는 레바스가 수평으로 중심을 잡고 날았다.

  간신히, 그가 해낸 것이다. 그들은 처음 있던 곳보다 한참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땅까지의 거리는 고작 수백 피트에 불과해 보였다. 이세야는 그들이 거의 바닥에 충돌할 뻔 했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고, 대재앙을 따라다니는 폭풍구름이 별들을 가리는 바람에 어둠의 피조물 무리와 황폐화 된 대지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먼 곳에서도 안티바 시티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빛나는 성벽은 저주받은 성배처럼 보였다.

  그날 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창조주만이 알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탈출에 성공한 것 같았다.

  "내려가자." 이세야는 그리폰에게 말했다. 그날 밤 더 비행하기엔 그는 너무 피곤했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생존은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와이컴을 찾아가는 것 역시 그럴 것이다. 그는 창조주에게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기적을 바랄 생각은 없었다.

==

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7  (0) 2020.04.26
LF - 챕터 6  (0) 2020.04.26
LF - 챕터 4  (0) 2020.04.26
LF - 챕터 3  (0) 2020.04.26
LF - 챕터 2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

4

 

5:12 숭고의 시대

 

  "그리폰은 신중하게 골라라." 투랍은 햇살이 내리쬐는 계단을 올라 날개달린 야수들이 자리 잡은 높은 성벽 위로 향하며 젊은 감시자들에게 조언했다. 그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개러헬, 이세야, 대머리 쌍둥이 자매 한 쌍, 이세야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문신투성이의 안더펠스 원주민 사내까지. 전부 자신의 안장 가방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궁에서 하룻밤도 더 보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수 년을 함께 할 파트너를 고르는 일이다. 너희는 함께 먹고, 함께 싸우고, 길고 외로운 보초를 함께 설 것이다. 네 생명과 네 동반자의 생명 모두 너와 그리폰 사이의 신뢰 관계에 달려있지. 함부로 대했다간,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적을 만드는 셈이다."

  "꼭 배우자 같네요." 개러헬이 드워프 뒤로 따라 걸으며 비꼬듯 대답했다.

  투랍은 안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노릇이지. 네 배우자가 너보다 여섯 배쯤 무겁고, 매 끼니마다 살아있는 염소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한 발로 네 뼈를 조각조각 부숴트릴 수 있다면 말이야."

  "제가 쿠나리를 꼬셔본 적은 있는데 말입니다." 엘프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감시자 사령관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붉은 수염의 드워프는 옆으로 비켜 서서 그들이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세야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고 두 자매 역시 길고 무더운 등반 끝에 빛나는 이마에서 땀을 훔쳐내는 와중에도 투랍은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리폰들 중 몇몇은 이제 막 훈련을 마친 참이다. 나머지는 대재앙 때문에 기수를 잃고 새 기수를 찾는 중이고." 드워프는 벽 위로 하나둘 올라오는 젊은 감시자들에게 말했다. "페나달과 다른 몇명이 이미 마지막 평가를 위해 시승을 마친 상태이다. 아마 이들이 너희 중 대부분과 잘 맞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특정한 짝을 권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마지막 선택은 너희와 너희의 그리폰 사이의 몫이다. 그러니 자, 서로 소개부터 하도록."

  이세야는 햇살 아래 눈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 위풍당당한 자태의 그리폰들을 확인했다. 성벽 위를 가로질러 다가가는 사이 묘하게 수줍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서 볼수록 그 야수들은 언제나 생각보다 더 크게 느껴졌고, 더 아름답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 검은색 암컷 하나가 다가오는 엘프에게 고개를 들어보였다. 그 그리폰의 눈은 보통보다 더 밝은 호박색이었다. 진하고 어두운 색의 깃털빛에 대비돼 그 눈은 마치 노란색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등 위에 옅게 퍼진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무늬는 가장자리로 갈수록 거칠고 듬성듬성해졌다. 그는 이세야가 본 그 무엇보다도 숨막히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는 흉터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살점과 깃털을 뜯어냈던 흔적인지 목 옆쪽으로 맨들맨들한 회색 피부가 물결치는 줄무늬 흉터를 이루고 있었다. 상처는 완전히 아문 것 같았지만, 이세야는 근처의 깃털들이 아직 짧은 것으로 미루어 그 상처가 최근에 생겼다가 마법으로 아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으로 상처가 아물었다면 그 깃털들은 온전한 길이로 자랐을 터였다.

  "이름이 뭐니?" 엘프는 그리폰의 가슴줄 앞쪽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 거대한 야수는 목줄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전투용 흉갑에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레바스." 그는 소리내어 읽었다. 엘프어였다. "자유."

  그리폰의 털에 뒤덮인 두 귀가 자신의 이름에 반응해 쫑긋 섰다. 그는 부리를 열어 작게 쉿소리를 냈고, 이어 거대한 머리를 이세야의 어깨 위에 얹었다. 야성적인 사향이 엘프의 코끝을 자극했고, 그리폰의 뺨 아래 흐르는 혈관과 골수의 맥박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무게에 이세야는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저는 찜 당한 것 같네요." 그는 옆을 지나치던 감시자 사령관 투랍에게 말했다.

  멈춰선 드워프의 수염난 얼굴 위로 생각하는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그가 동의했다. "레바스는 고작 몇 주 전에 자신의 기수를 잃었지. 그의 이름은 달시랄이었어. 데일리시 엘프였고. 혹시 그를 알았나?"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투랍의 질문은 그에게 미약한 짜증을 불러일으켰지만 - 모든 엘프들이 그저 엘프란 이유로 서로를 알아야 하나? -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의 질문은 진정성을 담고 있었고, 어쨌든 자신의 그리폰을 가지게 됐다는 흥분과 기쁨 앞에서 분노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훌륭한 감시자였네." 투랍이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낸 듯 보였다. "레바스의 상처는 오우거로부터 당한 것이네. 놈은 수직 하강하는 녀석을 잡아채 끌어내렸지. 거의 죽을 뻔 했어. 달시랄은 이 녀석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네. 만약 이 녀석이 다시 전장에 나선다면 큰 전력이 될 거야. 레바스는 가장 뛰어난 녀석 중 하나이니까."

  그는 성벽을 따라 다시 내려갔고, 그의 플레이트 메일이 햇빛에 불타는 듯 보였다. 이세야가 그리폰을 향해 다시 돌아서자, 그는 투랍이 말하는 걸 바라보느라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정말이니?" 그가 속삭였다. "너는 아직도 애도 중인 거야?"

  레바스는 다시 콧바람을 뿜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이세야를 짐승냄새가 나는 자신의 깃털 속에 파묻었다.

  개러헬은 40 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독특하게 생긴 수컷 그리폰의 목을 긁어주고 있었다. 그 녀석은 아직 덜 자란 듯 길다란 체구와, 남다른 색상을 지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회갈색 얼룩무늬인 몸체 위로 하얀색 반점이 배와 상체 부분에 흩뿌려진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그리폰은 회색빛 털을 가졌다. 완전한 하얀색이나 검은색 개체는 드물게 있었고, 복잡한 얼룩무늬는 더더욱 드물었다. 보통 그리폰은 색깔보다는 빠르기와 지능, 운동능력 같은 걸 따라 교배시켰지만 회색이 대부분이었다. 다른색깔은 열성인자기도 했고, 감시자들 사이에선 거의 볼 수 없었다.

  개러헬의 새 친구는 색깔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녀석의 귀 한 쪽은 다른 귀처럼 위로 솟아 뒤로 살짝 쳐진 형태가 아니라 앞으로 휘어져 있었다. 살짝 구부러진 꼬리는 덤불처럼 뭉쳐 일반적인 그리폰의 매끈한 사자 꼬리가 아닌 풍성한 여우 꼬리처럼 보였다.

  종합했을 때, 그 젊은 수컷은 매우 독특하게 생긴 그리폰이었다. 그리고 그는 개러헬이 목을 긁어주자 무려 고르릉거리고 있었다. 그 그리폰은 이마로 엘프의 가슴팍을 밀쳐 그의 동생이 뒤로 나자빠지게 했다..

  "완전 특이한 녀석이네." 이세야가 외쳤다.

  "당연하지." 개러헬은 가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뒤로 넘어졌다는 사실에조차 신나보였고, 곧바로 일어나 열정적으로 그 그리폰의 목을 긁어줬다. "이 녀석은 내 거야. 구제불능의 영웅들, 그게 바로 우리지."

  "그 녀석 이름은 있어?"

  "가슴판을 보자면 번개라는 것 같은데, 별로 어울리진 않는 것 같군. 어때, 넌?" 개러헬은 그리폰에게 물었다.

  거대한 짐승은 두 귀를 납작하게 하고 쉿소리를 냈고, 혀를 길게 내밀었다. 엘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걸 생각해 보자. 별난이, 라든가. 칠칠이? 아냐, 너무 뻔해. 울퉁부리? 흠, 아냐. 꼭 텁수룩이 늙은 해적 같잖아. 아! 알겠다. 굽은꼬리!"

  "굽은꼬리." 이세야가 따라했다. "네 전투 그리폰 이름을 굽은꼬리라고 하겠다는 거지."

  "얘도 이 쪽이 더 마음에 드나봐. 안 그래?" 개러헬은 그렇게 속삭이며 그리폰의 턱 아래를 긁었다.

  이세야는 혀를 깨물었다. 세상에는 그의 남동생이 자신의 그리폰에게 고상치 못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보다 중대한 문제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 테다스에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리폰이 단 한 마리만 있다면, 분명 저 녀석이어야만 했다. 어쨌든 저 가여운 야수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몇 분 안에 나머지 감시자들도 자신의 그리폰을 고르거나, 그리폰에게 선택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방을 싣고, 안장을 얹은 뒤 고삐길이를 손에 맞게 조정했다. 이세야는 누구도 남겨지거나, 마음에 안 차는 녀석과 짝을 이루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개러헬은 무리 중 유일하게 독특한 녀석을 골랐고, 다른 이들은 자신과 비슷하게 동반자를 고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우리는 너희를 함께 훈련시켰을 것이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그들이 모두 짝을 이루자 입을 열었다. "가볍게 와이스하웁트 주변을 도는 것부터 저공비행 표적 훈련, 낙하와 착륙 훈련 같은 걸. 점진적이고 체계화된 훈련이었겠지. 수 개월에 걸친. 하지만 우리에게 수 개월은 없다. 지금은 대재앙 중이고,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너희는 약간이나마 훈련을 받았고, 나는 너희가 전장에 나설 수 있을 정도라고 믿고 있지만, 너희는 싸울 필요 없다. 알아들었나? 어둠의 피조물과 마주하지 말고, 전선을 지킬 필요도 없다. 공중으로 높이 날아서, 안티바 시티 밖으로 동행을 가능한 한 빠르게 데리고 나가라. 질문은?"

  이세야는 나머지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알기만 했다면 묻고 싶은 게 많았겠지만, 그러기엔 질문이 너무나 많았고, 모든 게 너무 빨랐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투랍은 진지하게 그들을 바라봤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알현실로 돌아가자. 상급 감시자들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레바스의 안장에서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세야는 이제 막 그의 그리폰을 만났고,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부서질듯한 유대감을 끊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한 그리폰 기수가 됐다는 흥분감과 팽팽하게 맞섰고, 그는 아마 그게 감시자 사령관의 의도한 바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들이 마주할 운명으로부터 이렇게 효과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법은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운명을 마주하러 가야했고, 그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레바스에서 내려 그리폰의 흉터 있는 목 부분을 작별인사 삼아 토닥인 뒤 감시자 사령관을 따라 왕궁의 서늘한 그늘 속으로 향했다.

  젊은 감시자들이 내려가는 사이 홀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벽 가득한 장미덩굴은 긴 낮동안 햇빛을 받고 석양에 맞춰 시들기 시작해 부드럽게 흔들리며 정원 안을 백단향으로 채웠다. 가시덤불 사이로 몸을 숨기는 노란 가슴깃의 작은 새들과 바람에 살랑이는 꽃송이의 움직임 외에 이세야의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경비대도 정원사도 전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친 것 같았다.

  "소문이 퍼졌나 보네." 개러헬이 말했다. 평상시 띠우고 있던 가벼운 미소는 간 데 없었고, 두 손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 한 쌍의 검은색 손잡이에 얹혀 있었다. "만약 이들이 공포로 날뛴다면..."

  이세야는 등 뒤에 맨 지팡이를 풀어냈다. 룬이 박힌 금속 위로 마법이 웅웅거렸다. 그는 그 금속에서 영계와 이어지는 진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기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그 형태없는 에너지는 불이 될 수도 있고, 번개, 얼음, 혹은 순수한 힘의 파동이 되어 지팡이 끝에서 뻗어나갈 것이었다.

  그 힘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크든 간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겨눈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세야는 지팡이를 꼭 쥔 채 동생과 함께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빈 홀을 따라 걸었다. "전투가 벌어질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개러헬이 대답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자신들의 통치자가 그들을 배신했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그렇게 느꼈고, 그 결과 폭동이 뒤따랐다. 이세야는 청동으로 된 새끼용 조각상 앞에서 첫 희생자를 발견했다. 동상의 활짝 펼친 날개 덕에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동상을 돌아서자 죽은 여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상의 눈을 장식한 루비만큼이나 붉은 피가 희생자의 하얀 리넨 드레스를 물들였다. 소매를 두른 금박 장식이 여자의 귀족 신분을 짐작하게 했고, 어쩌면 왕족일 수도 있어 보였다. 방어의 흔적 없이 깔끔한 상처로 미루어 눈치 채기도 전에 당한 듯 했다. 얼굴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세야는 부디 그 과정이 짧았길 바랐다.

  "아마 더 있을 거야." 개러헬은 우울하게 중얼거렸고, 죽은 여자를 지나 빠르게 걸어갔다. 잠시 뒤 이세야의 귀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영계에서 끌어낸 마법이 웅웅거리며 현실로 구현되는 소리.

  알현실 쪽이다. 모두의 머릿 속에 동시에 깨달음이 스쳐갔다. 그들은 전부 달리기 시작했다.

  안더펠스인이 그들 중 제일 빨랐고, 엘프들을 지나쳐 알현실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안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뒤집은 협탁을 엄폐물로 삼은 휴블과 덴디가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경비대의 시체가 덴디의 마법과 휴블의 검에 불에 타고 언 채로 조각 나 눈앞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배는 됨직한 인원이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피를 요구하는 그들의 분노가 벽을 메아리쳤다.

  시체들 사이에 국왕 엘라우디오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의 호위병 중 하나에게 당한 듯 했다. 안티바 왕궁 친위대의 굽어진 칼날이 왕의 가슴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고, 금빛 검날은 검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왕비는 아직 살아 있었다. 겁에 질린 몇 안 남은 귀족들과 함께 왕좌 뒤에 몸을 웅크리고서. 회색 감시자들이 가로 막고 있어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지만, 한 눈에 봐도 휴블과 덴디는 지쳐 있었다.

  "그 비겁자들을 포기해라!" 폭동을 일으킨 경비대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린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릴 배신한 저 뻔뻔한 새끼들을 원할 뿐이다!"

  "넘겨줄 수 없다." 덴디가 사납게 받아쳤다. "우리의 의무는 이들을 데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지팡이에서 서리바람이 몰아쳐 마주 선 두 명의 병사를 얼려버렸다. 세 번째 병사는 초자연적인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으나 혈관에서 터져나온 얼어붙은 피가 붉은색 얼음파편으로 흩어지자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몇몇 병사들은 문이 열리자 몸을 돌렸다. 개러헬은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는 문신을 한 안더펠스 남자와 몇 달은 연습한 것처럼 나란히 함께 싸웠다. 안더펠스인은 거대한 날이 달린 전투용 곤봉을 휘둘러 적들을 밀쳐냈고, 엘프가 재빠르게 파고 들어 중심을 잃은 상대의 틈새를 찔렀다.

  그 뒤에서 이세야는 영계로부터 재빠르게 마법을 끌어내 영혼 에너지가 형태를 채 갖추기도 전에 보랏빛 이글거리는 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보냈다. 조급하게 쏟아낸 공격은 적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비대는 쏟아지는 공격에 뒤로 비틀거렸고 나머지 감시자들이 그들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공포도 죄책감도 사람들을 해친다는데 대한 거리낌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 순간 느껴진 거라곤 마주한 적을 모두 파괴하겠다는 광기어린 열망 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정리됐다. 두 무리의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 갇힌 경비대는 금세 무너졌다. 마지막 몇 사람은 항복하려 시도했지만 덴디는 간청이 끝나기도 전에 얼음조각으로 그들을 끝내버렸다.

  안더펠스인의 가슴팍과 팔뚝에 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상은 자칫 위험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지 않은 듯 했다. 개러헬은 눈썹 부위에 작게 긁힌 상처를 얻었고 철퇴에 빗맞은 갈비뼈에는 벌써 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의 도움이 필요할만한 심각한 부상은 아닌 듯 보였고, 감시자 기준에선 다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데리고 탈출해." 덴디가 모여있는 귀족 생존자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장."

  "국왕은 어쩝니까?" 카이야가 초조하게 질문했다. 대머리 소년은 이세야와 마찬가지로 급박한 전투가 끝나고나자 자신이 벌여놓은 살육의 현장을 직시하며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어둠의 피조물 손에 죽은 거야." 덴디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국민들의 손에 죽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대재앙이 안티바 시티를 덮치지만 않았더라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어둠의 피조물이 국왕 엘라우디오의 죽음의 원인인 거야, 비록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지라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네." 왕비가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창백한 뺨 위로 혈색이 일부 돌아와 있었다. "전혀 사실이 아니야."

  "폐하의 백성들이 사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진실입니다. 나중에라도 논쟁하고 싶다면 환영입니다만, 그럴만한 사치가 주어지면 좋겠군요." 덴디가 말했다. 그는 기운차게 귀족들을 앞으로 이끌어 하나씩 젊은 그리폰 기수 손에 넘겼다. 휴블은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이세야는 난무하는 칭호와 고귀함 넘치는 가문명을 거의 기억할 수 없었다.

  그의 담당은 단단한 체구의 무예가처럼 보이는 30대 여성이었다. 깔끔하게 자른 윤기나는 검은 머리는 귀족자제보다는 군인에 어울려 보였다. 이름은 아마디스라고 했다. 이세야는 가문명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디스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죽은 경비대원의 시체에서 무기를 훔쳐내는 건 놓치지 않았다. 금실로 된 술이 달린 사브르와 세 개의 휘어진 단검을 챙긴 인간 여성이 짧은 검들을 허리춤에 채우고 가볍게 정돈하는 모습은 한두 번 훔쳐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개러헬의 승객은 칼린이라고 했다. 그는 키가 큰 중년의 사내로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었다. 깃털 달린 후드가 그의 얼굴을 감췄다. 이세야가 받은 인상이라곤 뾰족하게 튀어나온 턱과 흑갈색 수염 사이로 보인 창백하고 얇은 입술 뿐이었다. 그가 맨 지팡이는 벼락 맞은 나뭇가지로 만든 것처럼 보였고 구리로 된 바다뱀이 줄기를 휘감고 있었다. 정교한 세공 뿐 아니라 그 지팡이의 생김새 전부에서 힘이 느껴졌지만 이세야는 그가 전투 중에 무언가를 하는 건 보지 못했다.

  이세야는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그저 왕이 눈 앞에서 죽는 걸 보고서도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이겠지.

  카이야와 타이야는 마지막 두 귀족을 넘겨받았다. 안더펠스인은 국왕이 죽는 바람에 한 자리가 남아 따로 담당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하얀 머리쓰개를 단단히 두른 땅딸막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손에 두른 창조주의 불타는 태양이 원 안에 그려진 금색 펜던트를 절대 놓지 않았다. 이세야는 다른 한 쪽이 그의 딸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 젊고 날씬했지만 동그란 뺨이 비슷한 인상이었다.

  "좋아." 덴디는 마지막 귀족을 소개하고 감시자와 짝 지어준 뒤 말했다. "가라. 와이컴을 목표로 하는 걸 잊지 말고. 혹여 누가 뒤쳐지더라도 기다리지 마라. 너희의 의무는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거야. 오직 그 뿐이다. 너희에게 그리폰이 주어지 이유도 그 뿐이고. 이제 가서 수행해라."

==

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6  (0) 2020.04.26
LF - 챕터 5  (0) 2020.04.26
LF - 챕터 3  (0) 2020.04.26
LF - 챕터 2  (0) 2020.04.26
LF - 챕터 1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

3

 

5:12 숭고의 시대

 

  다음 날 아침,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감시자들을 쌍으로 짝지어 하늘을 돌며 가능한 탈출로가 있는지, 안티바 시티가 혹시라도 방어에 나설만한 요충지가 있는지, 어둠의 피조물 군대의 규모는 어떤지 정찰하도록 보냈다. 안티바인들은 이미 가장 좋은 지도와 염소치기 목동이나 사냥꾼들로부터 도시 주변의 숨겨진 길 따위의 정보를 수집해뒀으나, 투랍은 하늘에서 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어둠의 피조물의 동향을 살피길 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마지막 발악인 셈이라고 이세야는 이해했다. 운이 좋아봐야 염소들이 다니던 길로 안티바인 백 명 정도 빼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마저도 그들이 대피하는 사이 충분히 어둠의 피조물 무리의 주의를 돌려놓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왕과 왕비가 빠르게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정도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두 손으로 휴블의 허리를 붙든 채 그리폰이 날아오르길 기다리는 사이 점점 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메워갔다. 검은발톱이 근육을 수축하며 박차오르자 발 아래 대지가 거친 바다처럼 물결쳤고, 그의 두 날개가 주위로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이세야는 반쯤은 먼지를 피하기 위해, 반쯤은 반사적으로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리폰의 마법 같은 비행에 압도되지 않기란 정말로,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내 공중을 날고 있었고, 나선을 그리며 왕궁 위로 올라 안뜰이 금박 섞인 자그마한 녹색 타일 정도로 보일 때까지, 성벽을 지키고 선 경비대원들이 꾸물대는 갈색 개미떼처럼 보일 때까지 높이, 더 높이 상승했다. 피난민들의 천막은 성벽 너머로 회갈색 덩어리처럼 보였고, 부두는 청명한 녹색 바다를 따라 하얀 술장식처럼 삐죽이 솟아 있었다.

  전날보다도 배의 숫자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다들 대피하고 있는 걸까요?" 이세야가 물었다.

  휴블은 고개를 저었고, 검은발톱이 바람의 흐름을 따라 해안 쪽으로 방향을 튼 뒤 대답했다. "국왕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들 중 기다릴 수 없는 자들도 많았지. 그들은 알현이 끝나고 감시자들이 도시를 지켜주지 않을 거란 소식을 듣자마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밤 사이 몰래 탈출한 배가 거의 열두 척은 될 거야. 왕궁 경비대가 그 선장들 중 하나를 체포해서 오늘 아침에 목을 매달았지만, 그 정도로 이 물결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목이 매달리는 게 어둠의 피조물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아마 없겠지." 휴블이 대답했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그는 검은발톱의 오른쪽으로 고삐를 잡아당겨 그리폰에게 오른편 아래로 하강하도록 신호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를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 적어도 그 왕족 분들을 겁먹게 할만한 뭔가라도 찾을 수 있겠지."

  그리폰은 구름 위에 머물며 회색 하늘을 보호막으로 삼은 채 안티바 시티를 둘러싼 산록의 대지를 날아 어둠의 피조물 군대에게 향했다. 그리고 검은발톱은 조심스럽게, 구름뭉치를 헤치고 나아가 정교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아래로 펼쳐진 어둠의 피조물 군대는 썩어빠진 육체들이 너덜너덜한 깃발 주위에 모여들어 옹이진 카페트처럼 보였다. 놈들은 누더기 같은 갑옷과 형편없는 모양새의 이가 빠진 무기를 걸치고 있었다.

  거리 때문에 이세야는 그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덩치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종류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젠록들은 작은 덩치를 웅크리고 네 발 달린 거미 마냥 낮은 자세로 허둥지둥 움직였다. 젠록 무리 옆에는 근육이 불거진 커다란 키의 헐록들이 마치 산맥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똑바로 곧추 선 자세는 사람과도 비슷했지만, 헐록의 코 없는 허여멀건한 얼굴을 인간과 헷갈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죽은 눈과 오염에 얼룩진 피부, 물고기 배마냥 볼록한 뺨 위의 검붉은 피딱지 같은 모습은 이런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그들 사이로 탑처럼 비죽 솟아있는 오우거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 멍자국 같은 피부색의 뿔 달린 야수. 하나하나가 도끼날 만한 크기의 검은색 손톱은 그 못지 않게 위협적이었다. 와이스하웁트에서 이세야가 배운 바에 따르면, 오우거는 비행중인 그리폰을 위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어둠의 피조물 중 하나였다. 멀리서도 가공할만한 정확도와 뼈를 으깨놓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바위를 던져대는 그 능력은 공중에 있는 그리폰과 기수에게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안티바 시티 바깥을 장악한 무리에는 놈들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세야는 곧 이어 오우거의 수가 적어보인 것이 전체 무리에 비해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수천의 어둠의 피조물 사이에서 적어도 오십 마리의 오우거를 볼 수 있었고 - 그 말은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들이 그리폰 숫자의 두 배나 되는 오우거를 맞닥뜨릴 것이란 뜻이었다. 헐록과 젠록을 제쳐두더라도 이미 불가능한 숫자싸움이었다.

  그리고 헐록과 젠록을 제쳐두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최소 몇 마리나 되는 어둠의 피조물들이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대재앙은 그에게 일반적인 군대와 비교해서 재볼만한 어떤 단서도 제시하지 않았다. 어둠의 피조물에겐 따라 다니는 대장장이들이나 하인들이 없었으니까. 보급용 수레나 취사용 모닥불, 하다못해 변소조차 없었다.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존재들이었으니.

  젊은 엘프는 떨리는 시선을 돌렸다. "우린 싸울 수 없어요."

  "그렇지." 휴블은 검은발톱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그는 몸을 숙여 그리폰에게 명령을 속삭였고, 그들은 다시 폭풍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 "안티바인들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윗분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는 봤다고 믿고 싶군."

  그리고 그리폰이 대재앙을 품은 구름 속을 헤치고 날아오르는 순간, 이세야의 마음 속으로 기묘한 음률이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그것은 결코 실재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 흥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결코 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선율이 아니기도 했다. 그 가락은 그가 들어본 그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아름다웠다. 가슴 저리게 하는 천상의 울림이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느낌의 환희로 그를 끌어당겼고 - 그 느낌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검은발톱의 삐익 하는 새된 소리가 이세야를 최면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난폭하게 머리를 휘젓는 그리폰의 움직임에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휴블은 고삐를 놓칠 뻔 했다. 선임 감시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고삐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이세야는 비록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뻣뻣하게 안장에 앉은 자세로 미루어 그가 자신과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의 대담함에 약간 주저하면서, 그는 눈앞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겼다.

  휴블은 욕설과 함께 안장에서 펄쩍 뛰며 깨어났다. 곧바로 고삐를 느슨하게 푼 그는 검은발톱이 긴장을 풀도록 내버려뒀고, 폭풍구름 사이로 다시 상승하는 사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이세야를 향해 반쯤 몸을 돌렸다. "고맙네."

  "방금 그건 뭐였죠?" 동요한 채로 엘프가 물었다.

  휴블은 구름이 그들과 어둠의 피조물 무리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을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악마의 군주."

  이세야는 안장 뒤로 몸을 기대며 고정띠가 자신을 자리에 단단히 붙들어 매주는데 감사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신음소리 같은 작은 탄식은 금세 바람에 휩쓸려 갔다. 다리도 척추도 젤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재앙이니 당연히 악마의 군주가 함께 할 테지. 악마의 군주가 대재앙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 저 어둠의 피조물 무리 어딘가에 그 타락한 고대신이 실제로 자리하고 있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이 하늘과 검은발톱의 날개 뿐이라는 사실은 그를 두렵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조만간 악마의 군주가 이 아름답고 불운한 항구도시에 가져올 헤아릴 수 없는 파괴가 아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안티바 시티로 돌아오는 동안 이세야는 검은발톱의 등 뒤에 조용히 앉아 어둠의 피조물의 끔찍함과 그 달콤한 노래의 부조화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오염 때문이다."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막사에서 왕궁 하인들이 저녁을 날라오는 걸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이 그렇게 설명했다. 이세야는 간신히 이 압도적인 인상의 드워프에게 말을 걸 용기를 짜낼 수 있었고, 생각보다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뻣뻣한 붉은 수염과 흠집 투성이의 회색 플레이트 메일 아래, 감시자 사령관은 부하들을 신경쓰는 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노병이든 갓 들어온 신입이든 모두에게 들릴만큼 크게 울렸고, 아무래도 후자를 향한 것임은 분명했다. "오염은 우리가 어둠의 피조물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타락이 옮는 걸 막아주지만,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도 하지. 악마의 군주의 부름은 그들을 향한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듣게 될 콜링과도 같은 노래일 거고, 오염이 너희의 육체를 깊이 파고들 수록 더 강해질 테지. 만약 너무 오래 버티려 들다간 결국 거부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너희의 의무는 아직 선택할 수 있을 때 콜링에 응답하는 것이고."

  "우리가 악마의 군주의 노래를 들을수록 더 빨라지기도 합니까?" 이세야가 물었다.

  투랍이 어깨를 으쓱하자 강철과 실버라이트가 철그렁거렸다. "그럴 수도. 사람마다 오는 속도가 다르니까."

  "뭐, 참 기대되는 일이긴 하군요." 개러헬은 응원이라도 하는 양 자신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팡 내리쳤다. "그리고 오, 드디어 저녁이 나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식욕이 막 땡기는 걸요."

  이세야는 동생의 농담에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하인이 끌고 온 수레에서 나무그릇 하나를 집어 빵과 스튜를 채웠다. 음식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꿀 케이크이든 발효된 돼지 똥이든, 그에겐 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회색 감시자로 선택받았을 때 무척 자랑스러웠다. 감시자들이 최고만을 뽑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장 예리한 궁수, 가장 능숙한 마법사, 가장 뛰어난 전술가. 그에겐 노예나 다름없는 인간 도시에서의 엘프의 삶을 벗어나 도약하고, 동생과 함께 동등한 전장에서 자신의 기개를 펼칠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물론 그도 콜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회색 감시자에 대해 아는 이들은 감시자 입단식에서 받아들인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이 언젠가 그들을 광기와 죽음으로 이끌고 만다는 걸 알고 있었다. 30년 정도, 혹은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다지만 궁극적으로는 살아남는다 해도 모두에게 닥쳐올 운명이었다. 그 때가 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선택지는 지하대로로 향해서 마지막까지 어둠의 피조물을 하나라도 더 많이 죽이는 자살 임무 뿐이었다. 그것이 콜링 - 그 전에 죽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이었고 - 감시자들을 그림자처럼 두르고 있는 암울한 예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겐 항상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었다. 낭만적이고, 비극적이며, 이야기 속 영웅들에게 닥치는 결말 같은. 이세야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불꽃을 꺼트릴 무언가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 군대와 악마의 군주의 노랫소리는 그 안온함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맛을 느끼지 못하며 먹고, 생각 없이 마신 뒤, 본인이 뭘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빈 그릇을 하인의 손수레 위에 내려놓았다.

  식사 후, 감시자 사령관 투랍은 휴블을 비롯한 몇명의 상급 감시자와 함께 국왕 내외와의 두 번째 알현을 위해 사라졌다. 나머지는 카드놀이나 주사위놀이 따위로 시간을 보냈고, 천박한 농담이나 안티바 시티에 오기까지의 허무맹랑하게 과장된 무용담을 주고 받았다.

  이세야는 무리에 끼지 않았고 귀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개러헬이 떠들썩하게 허풍을 늘어놓으며 청중들의 요란한 웃음을 자아내는 건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은 동료들의 불쾌한 기분을 돌리고 본인의 주의 역시 돌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겐 없는 능력이었다. 그는 그저 앉아서 감시자 사령관이 일행과 함께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들의 음울한 표정은 일이 잘 안 풀렸음을 알려주었다.

  "왕비는 여전히 싸우길 원한다." 투랍은 거친 저음으로 그들에게 결과를 전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보니 안티바 시티엔 달리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몸이 성한 선장들은 전부 안전한 해안을 찾아 떠나갔고, 몸이 성하지 않은 이들은 이미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상태이지. 그들이 어제 움직이기만 했더라도, 국왕과 왕비는 질서있게 대피하도록 행동할 수 있었겠지만...이제 눈 앞의 상황은, 왕궁의 식솔들조차 실어나를 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감시자들은 이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때 개러헬이 그의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누가 봐도 명백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투랍은 우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붉은 수염을 땋아둔 황동고리가 서로 부딪히며 짤랑였다. 우리에겐 세 척의 배와 충직한 선장 몇 명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걸 이용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대피시킬 것이다. 마법사, 궁수, 템플러 - 대재앙에 맞서 싸울만한 능력과 힘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그리고 정치적인 연줄을 가진 사람들도요." 흉터가 있는 여성 감시자 하나가 비꼬듯이 말했다. 등 뒤에 매인 검은색 지팡이로 미루어 마법사인 것 같았지만 이세야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투랍이 끄덕였다. 몇몇 감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갑옷 두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들 역시 병력에 포함된다. 그들 중엔 우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군대를 가진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보급원이 될 영토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겐 식량과 말, 무기, 물자가 필요할 것이다. 상인들과 귀족들은 그것들을 제공해줄 거고. 그걸로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이들은 어둠의 피조물 앞에 남겨지겠죠." 여성 감시자는 코웃음을 쳤다. "이래선 우리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투랍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곤 터덜터덜 걸어가 중단된 카드놀이의 흔적 속에서 에일 잔 하나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어둠의 피조물보단 나아보이겠지. 창조주의 자비여, 덴디, 이건 대재앙이네. 나라고 이 결정을 좋아할 것 같나? 저 멍청한 왕족들이 하루 더 빈둥거린 덕분에 우리가 지킬 수 있었을 수백의 사람들이 죽게 생겼어. 심지어 최악은 그게 아니네. 우리는 그 왕족들을 직접 데리고 갈 거야. 나머지 대피인원은 배로 가겠지만, 국왕 엘라우디오와 왕비, 그리고 몇 명의 선택받은 보좌관들은 그리폰을 타고 안티바 시티를 탈출하게 될 걸세."

  흉터 투성이의 마법사, 덴디가 뒤로 주춤 물러서자 지팡이가 벽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누가 데려가는 겁니까?"

  "자네와 휴블이네, 사실. 검은발톱과 스크리악스는 우리 그리폰 중 가장 강하고 빠른 녀석들이니까. 공중에서 생길 수 있는 어떤 위험에서도 벗어날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오스티버, 페나달,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은 배로 갈 걸세. 그들의 재능은 수상전이 벌어질 때 더 유용할 테니.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가서 선장과 그 승객들이 이 거래의 명예를 확실히 지키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남은 그리폰을 타도록 해라. 전원이 한 명씩 데리고 탄다 - 단 한 명만."

  투랍은 그들 모두에게 시선을 돌렸고, 덥수룩한 붉은 눈썹 아래 그 눈빛은 엄격했다. "무리하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려다 그리폰의 기동성과 인내심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한다. 너희의 첫 번째 사명은 왕족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알겠나?"

  이세야는 다른 이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건 너무 생각없는 일이었다.

  "좋다." 투랍은 에일을 마저 들이켰다. "이제 너희를 그리폰들에게 데려가겠다. 빠르게 맞는 녀석을 찾도록. 아침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두 시간 안에 전부 떠날 수 있어야 한다."

==

기존에 여성형 대명사 she를 '그녀'로 번역한 부분을 전부 '그'로 수정하였습니다. 오역 / 오타 제보 환영합니다.

'Dragon Age > Last Fl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LF - 챕터 6  (0) 2020.04.26
LF - 챕터 5  (0) 2020.04.26
LF - 챕터 4  (0) 2020.04.26
LF - 챕터 2  (0) 2020.04.26
LF - 챕터 1  (0) 2020.04.26
Posted by 깜장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