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9:42 용의 시대

 

  "또 어둠의 피조물에 대해 읽고 있는 거야?" 도서관을 나가던 중, 발리야는 책장에 등을 기대 앉은 세카를 보고 멈춰섰다. 소년의 무릎에는 금박을 입힌 거대한 책 한 권이 놓여있었고, 스무 걸음 거리에서도 종이 위로 무시무시한 쉬릭과 헐록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 세카는 순박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잖아, 안 그래?"

  "이런 시간에까진 아니지. 자정도 지났다고." 발리야는 지팡이를 슬쩍 들어보였다. 푸른 마노석이 내뿜는 빛과, 세카의 지팡이에 달린 월장석에서 나는 빛만이 도서관 안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고, 다른 호스버그 마법사들은 저녁 식사 후 쉬러 간 뒤였다. 어둠이 내린 조용한 복도에 남아있는 건 두 사람 뿐이었다. 감시자들은 해가 진 뒤 촛불 사용에 제한을 뒀다. 밀랍은 비싼 재료였기에, 마법사들은 응당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야 했다.

  발리야도 감시자들이 초를 아끼는 이유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했지만, 해가 진 후의 조용하고 어두운 도서관은 유달리 마음을 동요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한두 명의 마법사로 넓다란 방 전체를 밝히기란 턱없는 일이었고, 그들이 만든 작은 빛의 구는 메아리 같은 어둠 속에 길잃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뭐한다고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있는 거야? 여기 있으면 뭔가 불편하지 않아? 뭔가...빈 느낌 말이야. 게다가 저 상자 안의 뼈라든가, 벽에 걸린 무기들 하며, 악마의 군주의 뿔까지..."

  세카는 다시 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는 책장을 넘겨 끔찍하게 생긴 브루드마더와 징그럽게 꿈틀대는 알을 묘사해둔 장을 펼쳤다. 삽화를 그린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훌륭한 해부학적 지식과 기괴하게 뒤틀린 정신을 가진 자인 듯 했다. "그냥 도서관이지, 뭐."

  "꺼림칙하고 기이한 것들로 가득찬 도서관이지." 발리야가 웅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어둠의 피조물에 대한 책을 읽고도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지 신기하단 말이야."

  어린 마법사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어쩐지 불편한 웃음이었다. "글쎄, 어느 정도는...소름끼치긴 하지, 그래. 밤이라면. 하지만 나를 잠 못들게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이 책들을 끝내지 못하고 잠든다는 것일 거야."

  "왜?" 발리야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이미 이세야의 일기를 읽는 것만 해도 충분히 그의 꿈을 어둡게 했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에 그 이상 공포스러운 기록을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최근 생각지 못했던 취향에 눈을 떠, 여가시간이면 궁정 낭만소설이나 개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읽곤 했다. 고전적인 안티바식 희극조차도 때론 너무 폭력적이라 그다지 즐길 수가 없었다.

  "이곳은 테다스의 가장 훌륭한 지식의 보고 중 하나야." 세카가 대답했다. 그는 펼쳐진 책장 위, 브루드마더의 부푼 몸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어둠의 피조물과 타락, 고대신에 관한 민간 전승, 이 모든 게. 여기선 손만 뻗으면 닿을 수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대재앙의 전쟁에 떠밀리지 않은 채, 평화로운 시기에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가 시간에 공부할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소수인 거야. 나는 어떻게 너희가 잠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전쟁이 없을 거라는 부분에 대해선 그리 확신하지 못하겠어." 발리야가 대답했다. "남쪽에서 불안한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오나본데, 점점 심해지나봐."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와이스하웁트 몫이 아니야. 회색 감시자는 언제나 중립이었어."

  "너는 회색 감시자가 아니잖아."

  "아직은 아니지." 두 사람의 지팡이가 얽혀 만들어내는 불빛 아래, 소년의 눈이 그를 마주봤다. 세카는 항상 나이에 비해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발리야보다 두 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발리야는 그가 항상 그들 누구보다도 성숙하고 현명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밤, 그의 얼굴에서 빛나는 확고함은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넌 정말로 감시자가 되고 싶구나." 그는 감탄하듯 말했다.

  "맞아." 세카가 대답했다. "회색 감시자는 테다스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마법사도 템플러도, 쿠나리도 엘프도 아닌, 그 모두를 위해. 동등하게. 그게...그게 나한테 중요한 거야, 발리야." 그 조숙한 확고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는 다시 반쯤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세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책으로 고개를 떨궈 민달팽이처럼 생긴 몬스터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에 함께하고 싶어. 이들이 자신들의 좋은 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들고 싶어."

  "감시자들이라고 언제나 좋은 일만을 해온 건 아니야." 발리야는 그렇게 말하며 도서관 벽에 걸린 으스스한 트로피들을 올려다 봤다. 전투 깃발, 전리품 무기, 오우거의 뿔...그 하나하나가 어찌보면 고난의 기록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세야의 기록이 그들이 내려온 미심쩍은 결정이나 감시자들이 치른 냉혹한 대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아닐 것이다. 네 번째 대재앙의 피묻은 시간동안, 테다스의 영웅들은 명백하게 영웅적이지 못한 결정 역시 내려왔다.

  "물론 아니겠지." 세카가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그 어떤 제국도, 어떤 신념도, 살아있는 존재의 그 어떤 노력도 결점이 없던 적은 없었어.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고, 그래서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성공에 가까웠다는 거야."

  "그럴지도." 발리야는 불확실한 태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노력하다가 장대하게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시도조차 안하는 것만한 실패가 있으려고."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건지 난 잘 모르겠어." 엘프는 어깨를 으쓱했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다시 문으로 향했다. 돌 아치 아래를 지나 떠나기 직전,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우리가 감시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할만한 걸 찾아야 한다고 네가 말했던 거, 기억해?"

  "응."

  "만약...만약 내가 그런 걸 찾았고, 다만 이게 그들이 가져도 될만한 건지 확신이 안 선다면 어떨 것 같아?"

  세카의 어두운 눈빛에 호기심이 스쳤지만, 그는 당연스레 묻고 싶을 질문을 잘 억눌렀다. 그 대신 그는 펼쳐진 책 위에 손가락을 모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왜 그렇게 느꼈냐고 묻고 싶을 거고, 혹시 그걸 맡을만한 더 나은 사람이 있을지, 아니면 그게 누가 가져도 될만한 물건이긴 한 건지 물어볼 것 같아."

  "그 질문들 중 어느 것도 답을 모르겠어." 발리야가 대답했다. "단지 그들이 애초부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만은 알아."

  "그럼 내 생각에 네가 해야하는 건, 그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은지 판단하는 거야."

  "그거라면 내가 알지." 발리야는 말했다. "아마도 말이야. 고마워."

 

* * *

 

  "붉은 신부의 무덤이 어딘지 알아요?" 발리야가 물었다.

  캐로넬은 땀에 젖은 웃옷을 벗던 도중 멈춰 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겨울의 초입, 차가운 공기 덕에 상쾌한 아침이었고, 훈련실의 열린 창문으로 새어든 산바람에 그의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는 한 시간 좀 넘게, 묵직한 감시자 훈련용 목검으로 천을 덧댄 훈련 인형을 두고 훈련하던 중이었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야?"

  "거길 찾아야 해요." 발리야는 불편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연장자 엘프가 의자에서 수건을 집어들고, 살얼음 언 물그릇에 끄트머리를 적신 뒤, 어깨의 땀을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당신이 한 번 가본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캐로넬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땀에 젖어 짙어보이는 머리칼에 한 줌 물을 적셔 쓸어넘긴 뒤, 손을 털어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린 뒤, 새 웃옷을 몸에 걸쳤다. "살면서 한 번이면 족할 실수기도 했지.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도 들었을 텐데. 왜 그런 짓을 다시 하려는 거지?"

  "딱히 다시 하겠다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거기에 뭔가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차가운 바람에 나무 창틀이 덜그럭거렸다. 눈앞의 엘프와 달리, 발리야는 조금 전 훈련실까지 걸어온 거 외에 딱히 격렬한 활동을 하지 않은 터였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토끼털로 된 망토는 감시자들의 두터운 양가죽 여우털 외투만큼 따듯하진 않았지만, 가진 거라곤 그것 뿐이었다.

  "굳이 거길 가는 위험을 감수할만큼 중요한 게 있다고? 거긴 기어다니는 시체들 뿐이라고, 문자 그대로 말이야."

  "나도 알아요."

  붉은 신부의 무덤이 항상 그런 이름이었던 건 아니다. 떠돌이 언덕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은 한 때 붉은 신부의 성소라 불렸었다. 가파른 협곡 사이 절벽마다 작은 동굴 여러개가 파여있고, 바람에 깎여나간 안드라스테의 형상이 입구 사이 절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안더펠스의 성모상이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도 있지만, 메르다인의 하얀 바위를 이용한 이쪽이 더 거대한 규모이긴 했다 - 하지만 안더펠스의 성모상이 여전히 테다스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찾는 성소인 반면, 붉은 신부에겐 더 이상 방문자가 없었다. 그곳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은, 와이스하웁트의 회색 감시자들에겐 단순한 소문 이상의 이야기였다.

  한 때, 붉은 신부를 둘러싼 동굴에 안더펠스의 황량한 평야에서 고립된 채 창조주의 진리를 명상하고자 한 무리의 금욕주의 수도사들이 자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 그물로 엮은 사다리를 설치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혹은 성소를 찾아온 순례자들이 베푼 구호물품을 받는 용도로 사용했다.

  축복의 시대 말기, 어둠의 피조물이 성소를 습격했고, 오랜 포위에 시달린 끝에 수도사들은 동굴 안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발리야는 최선을 다해 역사서를 뒤져봤지만 정확히 어떤 것들이 그들을 죽인 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는 이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들 중 한 명, 혹은 몇몇이 마법사였을 수도 있고 - 미신적이거나 우둔한 이들이 자신의 마법능력이 처음 발현된 후, 창조주의 보호를 갈구하며 고립된 신앙의 삶을 택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마법사가 실수로 악령을 불러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절박한 상황에서 어둠의 피조물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부러 불러냈을 수도. 역사는 그 부분을 밝혀주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 수도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끔찍한 갈증과 허기로 죽어갔을 거란 사실이었다. 수도사들이 불러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악령들은 죽어가는 그들에게 이끌려 나타났고, 한 때는 성소였던 곳에서 그들은 유해조차 곱게 잠들지 못했다.

  발리야가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리고 캐로넬이 한 무리의 감시자들과 함께 폭풍 속에 조난되어 그 절벽 부근에서 쉼터를 꾸려야 했다는 것도. 떠난 인원은 일곱 명이었지만, 돌아온 건 세 명 뿐이었다. 그들이 붉은 신부의 성소에 일어난 일의 전말을 알아낸 것도 그 때였다.

  "내 생각엔." 발리야가 말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마주칠 것들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고 간다면, 붉은 신부의 무덤도 반드시 극복하지 못할 곳만은 아닐 거예요."

  "넌 거기 없었잖아."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 '우리'라니 무슨 말이야?"

  "혼자 갈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회색 감시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 서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뻣뻣이 굳은 턱을 움직여 느리게 입을 열었다. "발리야. 내가 그 저주받은 곳에 대체 왜 다시 가겠어? 거기에 있는 거라곤 악령과 시체 뿐이야 - 내 친구들의 시체들도 포함해서."

  "나도 알아요."

  캐로넬은 벽을 박차고 나가 의자 위에 내려놨던 연습용 목검을 집어들었다. 목검을 다시 선반에 돌려놓는 동작엔 필요 이상으로 힘이 실려있었다. 분노와 자책감으로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진 채,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을 사냥하러 간 거였어. 수상한 활동이 보고된 바가 있었고, 오우거를 봤다는 말도 있었지. 단순히 정치적으로 까다로운 손님들을 맞이하는 동안 우리를 와이스하웁트에서 치워버리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수석 감시자는 그 소문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서 한 무리의 회색 감시자를 파견했어.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 갔어. 떠돌이 언덕에서 모래폭풍에 발이 붙들렸고. 우린 옛 수도사들의 동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도 알다시피,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정확히 거기서 뭘 본 거죠?"

  "잠들지 못한 망령들, 그 밖에 뭐가 있겠어? 독니를 가진 스켈레톤, 날카로운 손톱으로 공격해오는 넝마주이 시체들. 놈들 사이엔 유령도 섞여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많은 형제들이 죽어나갔지. 우린 마법에 걸려 잠들었고, 일어나서 무기를 쥐었을 땐 악령과 그 꼭두각시들이 이미 우릴 둘러싼 뒤였어. 즉시 후퇴했지만, 그래도 반이 넘는 수를 잃어야 했어."

  "우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들어간다면, 좀 상황이 나을 수 있어요."

  "가정에, 또 가정 뿐이군." 캐로넬의 금빛 섞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곱슬거리는 회갈색 양가죽 외투를 웃옷 위에 걸치고 목부분을 단단히 채운 뒤, 차가운 겨울 햇살과 바람을 들여오던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왜 거길 그렇게 가려는 거야? 거기그 엔 아무것도 없어, 발리야. 그저 뼈와 오래된 절망, 그리고 그 둘을 사로잡은 악령 뿐이야. 이제는 거기에 넷이 더 추가 됐겠지. 이유가 뭐든 간에, 그만한 가치가 있진 않을 거야."

  "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 엘프가 대답했다. "붉은 신부의 무덤에는 테다스의 역사를 바꿔놓을 만한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오, 이런, 그렇다면야 당장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오늘이라도 출발해야지. 하지만 네 계획엔 그게 뭔지 알려주는 건 포함돼있지 않을 테지?"

  발리야는 유감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와이스하웁트의 모든 회색 감시자들 중, 캐로넬만이 그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감시자들은 죽거나 입단식을 치르지도 않을지 모르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싫어서이든, 그저 자기들 일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든, 신병들에게 무심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지만...감시자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은 외부인들을 철저하게 배제했고, 이세야의 일기를 읽으며 그 연대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설프게나마 이해한 발리야로서도, 완전히 적응하긴 힘든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친구 사이였지만, 캐로넬의 충성심은 아마 감시자들에게 속해있을 것이다. 발리야가 같은 위치였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지도. 하지만 그는 회색 감시자들이 자신을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세야의 비밀을 파헤치러 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출발하면 알려줄게요." 발리야가 약속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떨림은 없었다. "와이스하웁트에 있는 동안엔 말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일단 여길 뜨고 나면 전부 말해줄 수 있고, 혹시 다 듣고 나서 그게 붉은 신부의 무덤까지 갈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같이 돌아오기로 해요. 그럼 나도 받아들일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이건 회색 감시자들한테만 비밀인 거구나, 나 말고." 캐로넬이 대답했다. 그는 마지막 창문까지 닫은 뒤, 마침내 발리야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말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고통스런 기억의 흔적이 깊은 곳에 배어있긴 했지만, 그는 평소의 자신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거의.

  "꼭 그렇다기보단." 발리야가 말했다. "적어도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 뿐이예요."

  "그 이유란 게 대체 뭘까?"

  "붉은 신부의 무덤으로 날 안내해줘요." 그는 다시 말했다. "그럼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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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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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5:20 숭고의 시대

 

  이세야는 개러헬이 떠나자마자 둥지로 향했다.

  눈물이 온통 시야를 덮는 바람에 익숙하던 세상이 녹아내려 일그러진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리륨가루와 악마의 군주의 피가 강철 사슬이라도 된 것 마냥 천근같이 묵직하게 그를 끌어내렸다. 그리폰들이 머무는 탑으로 올라가는 그의 귓가에 휴식중인 그리폰들이 기분좋게 고르릉거리며 간헐적으로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세야는 그 소음을 기꺼이 만끽해야 할지, 혹은 눈앞에 닥친 상실에 애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폰들이 입단식을 거치고나면, 이 생기어린 소음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만족스럽게 내뱉는 콧김, 웅얼거리는 잠꼬대, 뻐기듯이 부리를 딱딱거리는 소리 모두. 그들이 내는 소리라곤 분노와 혐오에 찬 으르렁거림, 혹은 피에 섞인 오염을 털어내려 부질없이 쥐어짜낸 기침 소리 뿐일 것이다. 휘파람 소리도, 고르릉거리는 울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재앙은 너무 많은 걸 앗아갔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감히 그가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목적인 것을. 전장에 나설 때면, 어떤 그리폰도 혹은 그 기수도 누구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온힘을 다해 어둠의 피조물과 싸웠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 역시 개의치 않았으며, 오직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대재앙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라왔다. 회색 감시자들은 이미 그가 그리폰들에게 하려는 것과 같은 희생을 전부 거친 이들이었다. 그 둘이 그렇게까지 다른 일일까?

  물론 달랐다.

  아무리 높은 지능을 가졌다곤 하나, 그리폰은 동물일 뿐이었다. 그들은 말을 할 수도, 그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그가 하려는 일이 가져올 영향 역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들도 분명 동의했을 것이란 식의 생각은 자기 위안을 위한 환상일 뿐 -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세야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는 그 의식을 강제로 진행했을 테니까. 자유동맹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결과로 회색 감시자들이 대재앙을 끝낼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헤인 요새의 그리폰 열 마리 정도는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

  둥지탑은 조용하고 탁 트여있었다. 헤인 공은 이 탑을 끝까지 완공하지 못했다. 덜 갖춰진 채로 하늘을 향해 탁 트여있던 덕에 감시자들은 이곳을 그리폰 몫으로 할당했다. 그렇게 뚫려있는 공간이었음에도 탑에선 짐승의 짙은 사향이 상처입은 녀석들을 치료하는데 쓰인 연고, 고약 냄새와 함께 풍겨왔다. 냄새에는 놈들의 식사였던 생고기의 피냄새, 그리고 숫놈들이 영역표시 용으로 담벼락 꼭대기에 뿌려놓은 코를 찌르는 소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폰은 제대로 돌보는 사람 없이는 제법 지저분한 생물체였다.

  그는 이 모든 걸 거치고 나서도 그들이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마법은 간단히 작동했다. 이세야는 내심 주문이 실패하길 - 자신의 마법 능력이 갑자기 사라져, 양심를 괴롭히는 이 끔찍한 선택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 영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적인 기운을 그의 손아귀에 불어넣었다. 그는 피와 리륨가루, 어둠의 피조물의 오염을 넓게 흩뿌렸고, 되도록 그리폰들의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놈들의 정신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녀석들이 눈치채고 저항하려 했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들은 그를 알고 믿고 있었기에, 때까치 때 그러했듯 하나둘 충격에 빠져 거세게 반발해 왔을 때엔 이미 모두 혈마법의 영역 안에 단단히 붙들린 뒤였다. 이세야는 그들의 반발을 무시하곤 가차없이 주문을 마무리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 역시 그리폰들과 함께 스스로의 행위에 울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지만...그 어떤 슬픔이나 분노도 그의 주문을 흐트러 놓진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 머리가 아팠고 두 다리도 저려왔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파왔다. 불안정한 자세를 버티려 거친 돌벽에 한 손을 기대어 선 엘프는 탑을 떠나기 위해 시야가 다시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이번에 사용한 리륨과 악마의 군주의 피의 양은 개러헬이 준 것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수석 감시자가 이세야에게 정확히 얼마나 필요할지 알지 못해 넉넉하게 보낸 것이리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열 마리의 그리폰이 이 변형된 의식을 거쳤다. 그는 레바스를 그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 너무 잔혹한 배신일 것이기에 - 리스메의 사냥꾼 역시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야가 탑을 내려가기 위해 계단으로 돌아선 순간, 그 양성의 마법사가 그림자 속에서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메가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행했구나." 키 큰 마법사가 말했다. 그는 이세야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같은 남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 그는 여성 차림이었고, 짙게 칠한 아이라인 덕에 도적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세야가 답했다.

  "사냥꾼은 빼놨어. 왜지?"

  "레바스를 빼놓은 것과 같은 이유야." 엘프는 대답했다. "그리폰의 입단식은 우리가 한 것과 달라. 이건 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끔찍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거야. 너도 호스버그에 있었잖아. 때까치를 봤잖아."

  리스메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발을 쓰지 않은 대신 민머리 위로 칠해둔 구릿빛 소용돌이 문양은 그림자 속에선 어둡게, 햇빛 아래선 하얗게 반짝였다. "봤지."

  "그럼 내가 왜 사냥꾼에게 그러고 싶지 않은지도 알겠네."

  "아니. 네가 왜 네 그리폰에게 그럴 수 없었는지는 알아. 하지만 왜 날 제외한 거지?"

  "네가 내 친구니까."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라면 사냥꾼이 자기 모습대로 네 곁에 있길 바랄 것 같으니까. 이 변형을 그를 죽이고 말 거야. 이번 자유동맹 구출 작전에서 살아남는다 한들 - 죽을 수도 있겠지만 -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은 우리한테 작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그리폰들에게 작용할 거야."

  "그를 강하게 만들기는 하는 거지?"

  "응. 일시적이지만. 그래."

  리스메가 그림자 속에서 나와 이세야가 변형시킨 마지막 그리폰을 관찰하러 걸어가는 동안, 그의 바짝 민 머리 위를 장식한 구리 문양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그리폰은 나이 든 암컷으로, 날개는 수많은 전투를 겪어 구부러지고 흉터 투성이에, 주둥이 부분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녀석이 헤인 요새로 보내진 이유는 나이와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전장에 나설 수 없기 떄문이었다.

  이세야의 주문은 녀석의 고통을 제거했고, 그 그리폰은 혈마법의 혼란이 가랁고 나자 마치 젊어진 것 마냥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젊은 시절 같은 모습은 아닐 터였다. 때까치와, 그리고 변형된 입단식을 거친 다른 그리폰들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움직임은 짧고 급작스러웠고, 잠깐씩 빠르게 움직이다가도 이상하게 멈칫거리며 느려지기도 했다. 녀석은 고개를 휘저으며 기침을 한 뒤 앞발로 부리를 긁어댔고, 주문에 암시한 대로 이제는 그저 감기라고 느껴질, 불쾌한 타락의 기운을 억지로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그리폰은 다시 강해졌다. 하얗게 센 털과 기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녀석은 강해졌고, 동시에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야수를 올려다 보던 리스메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우리에게 이 힘이 필요한 거지?"

  이세야는 거짓말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힘을 가지고도, 실패할지도 몰라. 없이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거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스메를 따라, 소용돌이 문양이 반짝였다. "그럼 사냥꾼에게도 해줘. 뭐가 필요하든, 뭐든 내어줄게. 너나 나나 우린 회색 감시자고, 난 내 감상주의 때문에 임무를 망치진 않을 거야."

 

* * *

 

  그들은 안개낀 회색 달빛 아래 헤인 요새를 떠났다. 여명이 동쪽 지평선에 미약한 사파이어 빛을 비추었고, 해가 뜰 때까진 두 시간 가량 남아있었다.

  이세야는 가장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에 커크월에 도착해서 떠나길 원했고, 그러려면 아직 어두울 때 출발해야만 했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어둠의 피조물들은 대재앙이 일으키는 끝없는 폭풍구름의 가호을 받긴 해도 밤보단 낮에 더 약하고 소극적이었고,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만한 이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긴 했다. 혈마법와 분노로 강화된 그리폰들과 함께여도 이세야는 승산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다. 회색 감시자들은 포위에 둘러싸인 도시를 뚫고 들어가, 나올 때에는 도움이라곤 안되는 민간인들로 가득한 캐러반을 끌고 나와야 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챙겨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라벨 역시 손상되지 않게 지켜야만 했다 - 이후에도 다시 써야 하니까.

  이세야는 아라벨을 세 대씩 네 팀으로 나눠 각각 한 마리의 그리폰이 끌고 두 마리가 호위하도록 했다. 레바스와 사냥꾼은 가슴줄을 맨 쪽이었다. 이세야는 그 회색 그리폰과 리스메가 가진 연대감이 입단식 이후 생긴 긴장과 분노를 넘어 통제력을 잃지 않게 해줄 거라는데 승부를 걸었다.

  다른 둘은 그 자신이 직접 다루기로 했다. 특정한 기수도 없고 평범한 고삐조차 거부하는 광기에 찬 그 그리폰들을 자유의지대로 내버려두었다간 그대로 미쳐 날뛸 게 분명했다. 놈들은 가슴줄을 맨 채로도 잔뜩 날이 서서 가까이 오는 누구든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 탓에 콧속이 다 헐어서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 녀석들의 육체가 타락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신호기도 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이성이라는 게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세야로선 그들을 장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지막 한 줄기 자유의지마저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 그리폰의 정신으로 파고들어, 붉은빛 혼돈으로 가득한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억눌린 분노가 옻나무 덩굴처럼 그의 정신으로 슬금슬금 스며들려 했으나, 그는 앞에 놓인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맞서 싸웠다.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

  칼린은 그 뒤에 앉아 장력마법으로 그들 몫의 수레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다. 두 마리 그리폰을 장악한 채로 레바스를 이끄는 것까지가 이세야의 한계였고, 캐러반을 담당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는 칼린을 믿었고 - 만약 커크월 밖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혈마법사라면 변성된 그리폰들을 통제해 헤인 요새까지 끌고 갈 수 있을 터였다.

  "갈까?" 이세야가 물었다.

  짤막한 그의 말투에 칼린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그 역시 이세야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잠깐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레바스, 날아!"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세야는 장악된 그리폰들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리스메의 사냥꾼이 함께 날아올랐고, 다소 불안정한 대열이었지만 그리폰들은 그렇게 헤인 요새를 떠났다.

  내려가는 길은 덜컹거리고 삐걱대는 난장판이었다. 감시자들은 최대한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받친 고깔형 마법은 경로에 있는 있는 소나무 가지란 가지마다 잘게 잘라냈고, 그리폰들이 작은 협곡 위를 지날 면 바닥으로 쑥 꺼지곤 했다. 수레를 제대로 띄운 채 내려가기 위해 급격하게 방향을 왔다갔다 하는 일도 수 차례 벌어졌다. 겨우 나지막한 능선 부근에 다다랐을 즈음, 이세야는 이빨을 하도 딱딱 부딪힌 탓에 두개골 전체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악령들의 속삭임이 생각 주위에서 맴돌며 그를 장막 너머로 끌어들이려 들었다. 우릴 받아들여, 우리한테 저 그리폰들의 무게를 넘겨.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 없어. 우리에게 건네주고,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라고.

  그는 언제나처럼 그들을 몰아냈으나, 그 목소리는 - 그가 영계에 닿아있는 한 -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아직 긴 하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산기슭에 다다르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동쪽 편의 구름을 뚫고 동이 트고 있었고, 장미빛 섞인 금색 빛깔은 뒷편에 드리운 대재앙의 폭풍과 대비되어 한층 강렬하게 빛났다. 골짜기마다 드리워진 은빛 안개가 하얀 산 꼭대기 아래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 아래로 펼쳐진 신록의 숲이 자유동맹에선 사라진 지 오래인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머리 뒤쪽에서 타락한 그리폰의 분노가 이글거리는 와중에도, 이세야는 이른 아침의 평화에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리 오래 가진 않았지만.

  언덕 아래 편으로, 대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갔다. 반경 수 킬로미터 안의 나무들은 그저 죽은 채 버티고 선 꼬챙이에 불과했고, 주변의 초목이나 야생딸기 관목 여시 비쩍 말라 대재앙의 타락에 물든 곰 털타락처럼 가늘고 뻣뻣했다. 그들이 마주친 동물이라곤 종괴가 덕지덕지 붙은 사슴 한 무리 뿐이었고, 죽은 소 시체를 게걸스레 파먹던 녀석들은 감시자들이 지나가자 피묻은 주둥이를 쳐들고 송곳니 사이로 위협하는 쇳소리를 냈다.

  광기어린 사슴 무리와의 조우가 타락한 그리폰들의 분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들을 제어하려 애쓰다가 혀를 깨물었는지, 이세야의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된 맛이 났다. 어쩐지 더 진하고 차가운, 오염이 젤리처럼 굳어진 것 마냥 진득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을 뱉었다.

  피, 그저 피일 뿐이었다. 이세야는 공기에 노출된 선홍색 빛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잘못된 느낌만은 사슴 무리를 지나쳐 그리폰들의 분노가 불씨처럼 잠잠해진 뒤에도 한참을 입 안에 남아있었다. 머릿 속의 악령들은 겁에 질린 듯, 혹은 신난 듯 무어라 지껄여댔지만 그로선 어느 쪽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안의 어둠의 피조물의 타락이 점차 강해져가고 있었다. 숙명적인 확신이 들었다. 대재앙 시기에 피 안의 오염이 더 빠르게 퍼진다는 건 회색 감시자들 사이에선 익히 알려진 소문이었다. 타락은 사람마다 다르게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해 당당하게 터놓고 말하는 이들이 워낙 드물어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이세야는 그 소문의 진실을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었고, 타락한 그리폰들을 다루는 혈마법 주문 하나하나가 그 속도를 더 가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런저런 상념을 머릿 속에서 털어내려 애썼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커크월이 빠르게 시야에서 가까워지고 있었고, 다른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그리폰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세야는 커크월의 돌벽 주위에 낮게 설치된 검은 화로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빛나는 모습은 첨정석(spinel)이 박힌 철제 왕관처럼 보였다. 워낙 먼 거리라 성벽 주위를 바삐 오가는 마법사들의 작은 형상은 삐죽 솟은 지팡이나 이따금 마법의 연쇄작용으로 화로로부터 치솟은 불길이 어둠의 피조물 위로 쏟아지는 모습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로 쏟아지는 불길은 놈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몇몇 멍청하거나 운 없이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이세야가 언뜻 보기에도 커크월의 포위공세를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공격은 고작해야 어둠의 피조물들을 성벽에서 몇백 미터 가량 후퇴시키는 게 다였고, 도시 주위로는 분명 수천의 젠록과 헐록들이 둘러싸고 있을 터였다. 커크월 주위의 검은 대지에는 남겨진 민가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얼마쯤 남아있었다 한들, 이미 불타 없어진 지 오래일 테니.

  하지만 그 화로의 모습만으로도 어쩐지 기운이 났다. 개러헬은 그들이 캐러반이 들어갈 길을 터주고, 빠져나올 기회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란 말을 했었다. 이제야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칼린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어둠의 피조물들은 우릴 보면 앞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 거야. 우리가 놈들을 성벽쪽으로 빠르게 몰아넣기만 해도-"

  "저 화로가 놈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겠지." 이세야가 말을 맺었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가야 해. 개러헬의 말대로라면 마법사들이 불길의 방향을 제법 조절할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방향을 틀어서 들어가도 우릴 맞추지 않을 거라 믿을만큼 안전해보이진 않아."

  "그럼 그렇게 해. 방향을 정하는 건 너잖아." 나이 든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래, 말이야 참 쉽지." 이세야가 코웃음을 쳤다. "길을 뚫을 준비나 하라고." 그는 안장을 딛고 일어서서 비행경로를 앞쪽으로 하도록 신호했다. "감시자들이여! 커크월로! 기수들은 길을 뚫어라. 리스메, 빠르게 일직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빠르게 전진하라!"

  기수들은 오른 주먹을 들어 명령을 들었다는 표시를 하곤 아래로 급강하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이 그 기세를 느끼고 화살과 물매를 준비해 회색 감시자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그들은 이미 화염 세례와 뼈를 부숴놓는 빙결마법을 퍼부었고, 놈들 사이에 아주 잠시동안 유지될 길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궁수들의 정확한 사격이 이탈하는 놈들을 마무리했다.

  이세야는 악령들의 끝없는 속삭임을 차단하려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도 장악중인 그리폰들의 정신을 조종해 동료들이 뚫어놓은 좁다란 경로로 그들을 전진시켰다. 그 길은 검은 바닷물을 노로 휘젓은 것마냥 아주 잠깐동안만 유지됐고, 어찌나 비좁았는지 그리폰의 날개깃 끄트머리에 얼어붙고 그을린 젠록 무리의 시체가 스치웠다. 하지만 그들은 직선으로 올곧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날아 엉성한 캐러반 더미를 이끌고 불벽에 둘러싸인 커크월의 안식처에 다다랐다.

  사냥꾼만 빼고.

  리스메는 타락한 그리폰을 탄 다른 기수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시야에 들어선 순간부터 날뛰는 그리폰을 통제하느라 애썼고, 하필 그의 경로는 다른 이들보다 적들과 너무 가까웠다. 선두의 마법사와 궁수들은 최대한 고도를 높게 유지한 채 적들의 공격을 피했고, 길을 뚫기 위해 마법이나 화살을 퍼부을 때만 잠깐씩 하강했다. 이세야는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온통 분노에 찬 상태에서도 그 감시자들의 그리폰들이 얄팍한 이성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오직 적들과 멀리 떨어진 거리 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은 캐러반에 묶여있어 리스메의 장력 고깔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밖에 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부짖은 헐록과 젠록 무리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놈들은 죽은 동료들로 생긴 경계선을 살짝 넘어 무기를 흔들며 회색 감시자와 그리폰에게 도전하듯 쉭쉭거렸고 - 사냥꾼은 그 부름을 지나치지 못했다.

  분노에 찬 울부짖음과 함께, 그 그리폰은 어둠의 피조물 무리에게 온몸을 내던졌고, 리스메는 안장을 딛고 서서 하릴없이 고삐를 잡아달길 뿐이었다. 마법사의 집중이 흐트러지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수레더미가 어둠의 피조물 무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스물 남짓한 쉬릭과 헐록들이 나무 파편 밑에 깔렸고, 사냥꾼 역시 가슴줄에 딸려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몰려들었고, 어느새 이세야의 눈으로는 그 혼란통을 식별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칼린이 등뒤에서 날카롭게 말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해."

  이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이 위액이 역류하듯 목구멍 안을 가득 채워와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 전에, 그 둥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 바로 그가 한 일이 친구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말없이 레바스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검은 그리폰은 귀를 납작하게 접고 점차 멀어져가는 선두의 캐러반에 시선을 꼿꼿하게 고정한 채 앞으로 찌르듯 돌진했고. 어느덧 거의 성벽 아래에 다다랐고 어둠의 피조물들이 점차 양쪽에서 길을 좁혀왔지만, 레바스는 분노에 찬 사냥꾼의 울음과 리스메의 혼란에 찬 비명을 무시한 것처럼, 몰려드는 무리 역시 무시해버렸다. 헐록들이 도전하듯 측면에서 괴성을 질렀다. 칼린이 날린 빙결마법이 놈들을 순식간에 얼려버려 팽창한 뇌가 두개골을 터뜨리고 양 눈에선 검은 얼음조각이 터져나왔지만, 그 뒤의 놈들까지 조용히 시키진 못했다. 젠록들은 얼어붙은 동료들의 시체 뒤에서 그들의 조잡한 방패를 두들겨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으로 울부짖었다.

  그리폰에게 그 맹수의 천성을 억누르고 적들과 마주할 기회를 놓아버리는 일이란 굉장히 힘든 일임을 이세야도 알고 있었지만, 레바스는 해냈다. 어둠의 피조물 무리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지만, 그들은 커크월 안에 들어섰고, 성벽에서 쏟아진 불길이 좌절에 찬 헐록들을 저지해냈다.

  그리고 여지껏 벌어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난장판 속에서도, 이세야는 그의 그리폰이 보여준 의지력과 자율성에 자랑스러움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 엘프는 레바스까지 이끌기엔 마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엔 그의 그리폰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줘야 했고, 레바스는 훌륭히 그걸 해냈다. 여전히 사냥꾼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고 영계의 사악한 악령들이 집중을 흐트러놓고 있었지만, 이세야는 기꺼이 그 사실을 감사하며 누렸다.

  그는 안장에서 몸을 내렸다. 다른 캐러반 담당들도 내려서며 어둠의 피조물들이 불길에 밀려 성벽에서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그들을 호위했던 감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방어벽을 넘어 성 안으로 착륙한 뒤, 작은 관문을 통과해 캐러반에 오를 민간인들을 모으러 갔을 터였다. 리스메의 캐러반이 통째로 무너진 탓에 자리가 부족해진 지금, 이세야는 그들이 누구를 뒤에 남길지 어떻게 결정할지 궁금했다. 헤인 요새의 전투 사령관인 이상 그 결정은 그의 몫일 테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결정을 내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앞쪽의 작은 관문이 열렸다. 지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이내 화염주문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눈을 깜빡였다. 아기 요람을 품에 안거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세야가 이미 커크월의 챔피언에게 어떤 물품도 실을만한 여유가 없을 거라고 말해둔 터였다. 헤인 요새에도 음식이나 옷가지 따위는 있었다.

  "타시오." 한 회색 감시자가 난민들에게 명한 뒤, 세 대의 캐러밴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명령을 따르는 자유동맹 시민들의 얼굴은 억누르지 못한 혼란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린아이들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세야는 그들을 무시했다. 주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엘프에겐 승객들을 동정할 여유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아라벨이 거의 채워지고 불길에 둘러싸인 성벽 너머로 비행 호위대가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상공을 맴도는 그리폰의 모습은 회색 감시자들이 커크월에서 이들을 데리고 나갈 준비가 됐다는 신호였다.

  "스카이버너를 준비하게." 그는 레바스의 안장에 다시 올라서며 옆에 있던 감시자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들이여, 캐러반을 띄워라."

  상공의 감시자들이 신호하자, 방어탑의 불길이 갈라지고 잠잠해졌다. 곧바로 어둠의 피조물들이 몰려들었으나, 날아드는 장력 마법과 빙결 마법에 이내 뒤로 밀려났다. 마법사들의 주문을 따라 떠오른 캐러반은 그리폰들에 의해 - 장악된 두 마리와 자유의지를 가진 한 마리에 의해 - 울부짖는 어둠의 피조물들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다시 호위대가 일시적으로 뚫어놓는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세야가 신호하자 마지막 캐러반으로부터 등 뒤로 따라붙은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활성화된 리륨 룬이 떨어져내렸다.

  드워프제 폭탄은 너무 불규칙적이고 폭발 잔해물이 공중으로 심하게 날려서 들어가는 길에 쓰기엔 안전하지가 않았다. 그리폰들이 폭발의 연기와 재 사이로 제대로 날기가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나오는 길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덕에 회색 감시자들은 떠나는 길 뒤로 푸른빛 죽음과 혼란을 마음껏 뿌려댔다. 리스메의 부서진 아라벨 더미가 폭발 중에 휩쓸려 들어가는 걸 본 이세야의 마음 속에 기쁨과 착잡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성공했네." 대재앙의 손길에서 멀어져 조용한 곳에 들어선 지 몇 분 정도 지나 칼린이 말했다. 그는 어쩐지 멍한 것 같았다. "성공했어. 이렇게 계속 하면 돼."

  "그럴지도."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 타락한 그리폰들의 통제를 놓아도 될 정도로 커크월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악을 풀어가며 그 난폭한 야수들이 혹시라도 어둠의 피조물들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지 신중히 관찰했고...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그리폰들은 시야에서 적들이 사라지고 나면 흥미를 잃었고, 그들의 고된 여정 덕에 녀석들의 분노는 무거운 피로감 아래 잠들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영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악령들의 속삭임도 마침내 가라앉았다. 이세야는 안장에 몸을 기대었고, 그제서야 그의 로브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을 유지하며 커크월에서 캐러밴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던 탓에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럴지도라고?" 칼린이 반문했다.

  이세야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런다고 눈 뒤의 저릿한 느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단 나았다. "녀석들을 자기파괴로부터 막기 위해 내 장악이 필요한 거라면, 이렇게는 할 수 없어. 멀쩡한 그리폰들의 정신을 파고들어서 녀석들이 입단식을 치른 녀석들을 버텨내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면...아니, 그건 못해. 그렇게까진 못해, 칼린. 난 못 해."

  혈마법사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난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세야의 지쳐서 둔해진 머릿 속을 스치고 간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악령들이 바로 그렇게 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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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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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5:20 숭고의 시대

 

  그 자신에게 매우 놀랍게도, 이세야는 헤인 요새를 쓸모있게 복구하는 이 임무를 제법 즐기고 있었다.

  물론 거기엔 생각보다 진행이 매끄럽다는 점이 큰 몫을 했다. 빔마르크의 숲은 이전에 와이컴에서 스탁헤이븐으로 사람들을 날랐던 것보다 크고 매끄러운 유선형의 배를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해봤던 일이라 배의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세야와 칼린이 이에 대해 오고사에게 설명했고, 그 드워프는 빠르게 구조를 보완해 더 무거운 중량을 싣고도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갈 수 있을만한 새 형태를 고안해냈다.

  이세야는 아래로 내려가 피난민 캐러반을 이끌고 돌아오는 매 작전마다 동행했다. 헤인 요새의 작전 사령관으로서 그 캐러반들은 전부 그의 책임이었다. 어쨌든 수레를 끄는데엔 레바스가 필요했고, 그 자신 또한 보호 병력으로서 한 몫을 했다. 도시 근방에선 어둠의 피조물이 도처에 깔려 있었고, 이세야는 외진 곳에 있는 촌락과 마을을 위주로 작전에 나섰기 때문에 언제나 정찰병이나 낙오병, 혹은 구울이나 대재앙에 물든 야수들이 출몰했다. 작은 접전조차 없이 끝나는 작전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한 위협은 으레 그러하듯 무서운 동시에 고무적이기도 했다. 의외였던 점은 천천히 요새를 재건하는 과정 역시 그를 고무시킨다는 점이었다.

  성 주위를 따라 걸으며 마을에서 새로 기와를 얹은 지붕이나 갓 잘라서 땔감용으로 말리는 중인 나무더미, 가지런히 손질된 수풀과 어린 소나무 숲 따위를 확인하는 건 제법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계절이 늦어 제 때 수확할만한 작물이 한정돼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농부들은 당근과 양배추, 완두콩을 심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닭들이 민가 주위를 서성이며 벌레를 쪼아먹었고, 축 쳐진 귀의 토끼들은 우리 안에서 잔반 야채를 주워 먹으며 살을 찌웠다.

  자유동맹 도시들의 혼돈과 황폐에 비교하자면 가히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이세야는 하루에 한 시간 쯤 마을의 발전상황을 확인하러 순회하고 나면 그의 진짜 업무로 되돌아 갔다.

  높다란 헤인 요새의 성벽 너머에서, 그와 오고사는 산을 파내고 있었다. 인접한 산의 한 쪽 면에 자그마한 자연동굴이 있어, 그곳을 시작점 삼아 도피처를 깎아내는 중이었다. 이세야와 칼린,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이 오고사의 지시에 따라 정밀하게 통제된 장력마법으로 돌을 깎아내 동굴 밖으로 빼내고, 새로 개선된 아라벨에 잔해를 싣고 마법으로 날랐다. 큰 바위들은 벽을 쌓고 담장을 짓는데 이용됐고, 작은 돌멩이들은 새로 확장된 마을의 자갈길을 까는데 이용됐다. 마법으로 깎아낸 굴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나면 오고사와 다른 드워프들이 손수 안쪽면을 단단하게 다듬었다.

  동맹군 전력이 점차 무너져 간다는 자세한 소식을 원동력 삼아 그들은 빠른 속도로 작업을 진행했다. 매일같이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듯 했다.

  자유동맹 전역에서 회색 감시자와 동맹군은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악마의 군주는 탄터베일과 커크월, 그리고 스탁헤이븐 상공에 나타나 도시를 검은 불길로 무너뜨렸다. 대재앙의 황폐는 내륙 지방을 휩쓸고 난 자리엔 얼마 안 남아있던 은둔자들과 저항세력 무리를 구울로 만들었다. 식인을 일삼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어쩌면 그 안에는 궁지에 몰린 농민들도 섞여 있을 터였다.

  전방에서 멀리 떨어진 헤인 요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하는 것 뿐이었기에 - 그들은 비와 안개를 뚫고, 잠을 쪼개가며 열심히 일했다. 때때로 부상을 입은 회색 감시자나 상처입은 그리폰이 회복을 위해 찾아들 때도 있었고, 이세야는 그들마저도 회복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작업에 참여하도록 투입했다.

  두 달 사이, 작은 도시 인구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만한 동굴 여러 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여전히 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이지." 오고사가 말했다.

  그들은 산 속 깊은 곳, 마법사들이 부서놓은 돌무더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작은 틈새를 따라 햇빛과 맑은 공기가 새어들어왔다. 오고사는 감시자들에게 환기용 틈새 주위로 작은 구덩이를 여럿 파놓도록 했고, 그 안에 흙과 비료를 채워 나중에 피난민들이 햇빛을 이용해 작물이나 혹은 빛이 부족해도 버섯 정도는 키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직은 구덩이 안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세야는 그 잠재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감당할만한 물을 대체 어디서 구하지?" 엘프는 질문을 소리내어 말했다. 빔마르크 산 꼭대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로 지금의 소규모 인원까지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인구가 두 배로 들어나면 그 물줄기마저 고갈될 것이고 - 이 피난처는 지금의 스무 배는 되는 인원을 위해 설계중인 곳이었다.

  "와이스하웁트에선 빗물을 모으지." 오고사가 제안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산맥은 이 시기에 비가 거의 오지 않고, 다음 여름에 올 폭풍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머지 않아 비는 눈이 될 거고, 그러고나면..." 그는 생각에 잠겨 말끝을 흐렸다.

  "뭔데?"

  "그러고나면 정상에 그대로 머물겠지." 엘프는 말을 맺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바로 그거야. 산에서 물을 채굴하는 거야."

  오고사는 한 걸음 물러나서 키 큰 동료를 향해 고개를 젖혔고, 흥미가 가긴 하나 다소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정상까지 날아가서, 동굴을 파는 것처럼 얼음덩이를 캐내고, 자갈을 나를 때처럼 수레에 싣고 돌아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세야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기대만큼 빠르지도 않을 거고, 영구적인 해결책도 되지 못해. 공격이라도 받아서 그리폰들을 데리고 방어하러 나가면 그대로 물 공급이 끊기는 거잖아. 내가 생각한 건, 충분한 물을 한꺼번에 저장하는 거야, 가능하다면 한 백 년은 갈만한 양으로."

  "무슨 방법을 생각한 거지?"

  "도피처에 저수지를 만드는 거야. 네가 설치한 경작용 구덩이 같이, 대신 수천 배 크기로. 그리고 눈덮힌 정상까지 이어지는 굴을 판 다음, 화염주문과 장력주문으로 눈사태를 일으켜서 눈더미가 호수로 바로 쏟아지게 하는 거지. 그 정도면 도피처 인원 전체를 수 년 간 먹여살릴 수 있을 거야."

  "좋은 계획이야." 오고사가 대답했다. "딱 하나만 빼고."

  "뭐지?"

  "통로를 만드는 걸 먼저 하는 게 낫겠어." 드워프가 대답했다. "그 편이 거대한 호수 바닥에서 잔해를 하나하나 퍼내는 것보다 작업이 깔끔할 거야. 그것만 빼면...정신나간 계획이긴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해보자고."

 

* * *

 

  그로부터 3주 뒤, 지금 이세야는 눈에 덮인 거대한 푸른빛 빙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판 굴은 백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 까만 점처럼 보였고, 여기서 일으킨 눈사태가 그 목구멍에 쏙 들어갈 거라 생각하기엔 너무 작고 멀어 보였다. 눈밭 위에 여기저기 꽂힌 녹색 깃발은 오고사가 깨진 얼음을 인도할 통로로 표시해둔 것이었다.

  그는 가슴과 허리를 밧줄로 단단히 고정해둔 상태였다. 밧줄의 다른 끝은 레바스에게 연결되어, 이세야의 계산이 잘못돼 눈사태에 휩쓸려 내려갈만한 위험이 닥칠 경우 그 검은 그리폰이 그를 끌어올릴 예정이었다. 그리폰은 엘프보다 위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 뾰족한 바위 꼭대기에 자리잡았으니 마법의 사정거리 밖이길 바랄 따름이었다.

  산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칼린과 리스메는 도피처 아래에서 화염주문으로 얼음을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세야는 얼어붙은 협곡으로 원조하러 오겠다는 다른 마법사들의 제안 역시 거절했다. 오고사의 계산만 정확하다면 그 자신의 주문만으로도 빙벽의 틈을 뚫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준할 수 있을 터였다. 얼어붙은 빔마르크 산맥 꼭대기의 극히 일부만 깎아내는 걸로도 그들의 도피처에 물을 공급하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얼음을 내려보냈다간 힘들게 깎아놓은 동굴에 홍수를 일으킬 위험마저 있었다.

  그는 드워프의 계산이 정확하길 기도했다. 잠시 뒤면 알게 되리라.

  이세야는 매섭게 몰아치는 얼음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빛바랜 금발 머리칼을 입에서 뱉어낸 뒤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언덕 아래 굴 입구를 노려봤다.

  이어 그는 영계와 접촉하여 지팡이로 순수한 힘의 뭉치 한 타래를 이끌어냈다. 그 뭉치는 그의 의지를 따라 파이프로 녹인 유리를 부는 것마냥 가늘고 길게 늘어났다. 마침내 그 뭉치가 충분히 정제된 순간, 이세야는 가장 먼 곳에 꽃힌 오고사의 녹색 깃발을 향해 힘의 창을 조준하여 날려보냈다.

  깃대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귀를 멀게 할 것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아랫편의 빙벽이 갈래갈래 쪼개지며 점차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준비된 굴로 쏟아져내렸다. 부서진 얼음의 대부분은 온 산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곧바로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덩어리들이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 역시 오고사가 예측한 바였다. 이세야가 날린 두 번째 힘의 창에 얼음 덩어리들은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 시야를 가리는 얼음가루를 흩뿌리며 아래로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반짝이던 조각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는 다음 녹색 깃발을 확인하고 그 아랫부분을 향해 새로운 힘의 창을 날렸다.

  깃대가 폭발하며 매달려있던 깃발 역시 눈폭풍에 휩쓸린 나뭇잎마냥 펄럭이며 날아갔다. 마지막 얼음덩어리가 사라진 걸 확인하면 이세야는 다시 다음 깃발, 또 그 다음 깃발을 노렸다.

  전체 봉우리의 3분의 2 가량이 대략 3미터씩 높이가 깎여 내려갔을 때 쯤, 엘프는 얼음산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움직이는 걸 느끼며 앞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장력마법이 일으킨 반향, 그리고 지지할 얼음층이 사라지는 바람에 남아있던 얼음 봉우리들이 기반을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이세야의 머릿 속을 스친 바로 그 순간,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지고 미끄러졌다. 그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고, 아가리를 벌린 굴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호흡이 빨라졌다. 얼음자갈과 거친 눈더미가 시야를 가렸다. 태양은 번쩍이는 금빛으로 점멸하듯 시야에 잡혔다 사라졌다. 얼음덩이가 팔다리와 머리통을 세게 때려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두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한 순간, 거인의 주먹 같은 강력한 압력이 그의 상체를 꽉 붙들었고, 그는 순식간에 공중 위에 떠올라, 밧줄 끝에 매달려 하릴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레바스가 그를 구한 것이다.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 흥분으로 어질어질한 기쁨을 만끽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폰이 높이 날아오름에 따라 엘프의 옷가지에 붙어있던 눈이며 얼음 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먼 아래에서는 무너진 얼음 봉우리가 우르릉거리며 굴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세야는 바람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신중하게 조준한 장력마법으로 커다란 덩어리 몇 개를 마저 부숴 경과를 가속했다.

  끝났다. 도피처에 물이 생긴 것이다. 엘프는 긴장을 풀고 가슴줄과 도취감에 몸을 의지한 채, 흰색과 갈라진 푸른 선으로 반짝이는 산맥을 내려다봤다. 이어 뾰족하게 솟은 회색 바위 봉우리로, 그리고는 넓게 펼처진 이끼 밭으로, 마침내는 높이 솟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풍경이 바뀌어갔다.

  목울대가 금색빛인 와이번 한 마리가 달랑거리는 짐을 매달고 날아가는 레바스에게 도전하듯 큰소리로 울었다. 이세야는 혹여 그 와이번이 그를 노릴까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그 엘프를 잠재적 식량으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건지, 혹은 그리폰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법을 익힌 건지, 놈은 쫓아오지 않았다.

  반 시간 뒤, 그들은 헤인 요새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레바스는 매달린 승객을 데리고 착륙하는 걸 크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세야는 그리폰의 하강에 맞춰 자신을 감쌀 구형 방어막을 준비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레바스는 자신의 기수를 매단 채 그대로 난간 위로 착륙했고, 준비한 방어막이 성벽에 부딪히며 튕겨져 나왔다. 보호막이 없었다면 그대로 곤죽이 됐을 뻔 했다.

  방어막이 성벽에 안정적으로 정지하자 이세야는 다소 안전해진 기분으로 주문을 해제했고, 가슴에 고정된 밧줄을 풀어낸 뒤 약간의 높이가 있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비행 중 냉기와 압력에 시달려 뻣뻣해진 팔을 주물렀다. 내일이면 밧줄로 묶었던 팔과 가슴팍에 멍이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오고사는 이미 마당에 나와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드워프의 붉은 머리 타래와 목에 건 구리 메달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기름 먹인 가죽 장화에도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임무가 성공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의 얼굴 위엔 이세야가 기대한 것 같은 흥분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엘프는 옷에서 마지막 눈송이를 털어내며 질문했다. "굴이 중간에 막혔어? 뭐가 잘못된 거야?"

  오고사는 고개를 저었다. "굴은 문제 없어. 리스메가 마지막 덩어리를 부숴서 호수에 쳐넣었고,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녹길 기다리기만 하면 돼. 양은 충분해. 오백 명이든 오천 명이든, 수석 감시자가 보내고 싶은만큼 보내도 말이야."

  "그럼 뭐가 문제야?"

  "수석 감시자는 바로 지금 사람들을 보낼 생각이야." 드워프는 길게 숨을 내쉬곤 부츠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차냈다. "안에 들어가봐. 네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

  "개러헬이? 전장을 떠나 여기에 와 있다고?" 날아오는 사이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으나, 지금은 빗질해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이세야는 헝클어진 금갈색 머리뭉치를 통째로 잡고 가죽끈으로 대충 둘러 묶었다. "급한 일이야?"

  "명백하게." 오고사가 대답했다. "작전실에 있을 거야."

  이세야는 서둘러 움직였다.

  동생은 혼자 있었고, 작고한 헤인 공 소유였던 곰팡이 슨 커크월 역사책을 눈으로 훑는 중이었다. 이세야가 들어서자 책을 내려놓은 그는, 옅은 미소로 누이를 반겼다. "누나. 얼굴 보니까 좋네."

  "개러헬." 마법사는 동생을 살짝 끌어안고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여윈 것 같았다. 부드러운 가죽과 모직 옷 너머로 뼈가 만져지는 듯 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거야?"

  "뭔들 안 급하겠어?" 개러헬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한눈에 봐도 희끗희끗한 빛깔이 전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자유동맹이 위기에 처해 있어. 악마의 군주는 각각의 주요 도시를 산발적으로 공격하며 마치 열세에 몰린 듯 가장해서 그들을 분산시켜 놨어. 그리고 놈이 가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누나, 착각이 아니라.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게 책략이라고 믿으려 하질 않아. 누구도 자신들의 무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병력을 깎아먹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야. 몇 달이 더 지나면, 그들이 마침내 우리의 지휘 아래 하나로 힘을 모으겠다고 결심해도 아무 의미도 없어질 거야. 어둠의 피조물을 상대할만큼의 병력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 이세야는 어쩐지 이미 그 답을 알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각 도시를 대피시켜야 해. 컴버랜드랑 커크월부터 노리는 게 낫겠지. 그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잃었고, 남은 인구 정도라면 헤인 요새에 전부 데려와도 괜찮을 거야.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주한 뒤라면, 지도자들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바로 지금이어야만 해. 하루가 다르게 악마의 군주가 그들의 무력을 갉아먹고 있어. 더 이상 잃어서는 안 돼."

  "많은 병사들을 보내서 피난민들의 이주를 돕는 것 역시 위험부담이 크다는 뜻이겠네, 그럼." 이세야가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개러헬이 인상을 찡그렸다. "각 도시의 병사들이 나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러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유동맹을 가로지르는 여정 전부를 동행해주진 못할 거고, 나 역시 더 많은 회색 감시자들을 붙여줄 수가 없어. 대부분의 과정에서, 누나의 병사들은 그들만의 힘으로 사람들을 호위해야 할 거야."

  이세야는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미친 짓이야." 마침내 입을 연 이세야의 대답이었다. "여기엔 스물한 명의 감시자가 있고, 그 중 여섯은 전투에 나서기엔 부상이 너무 깊어. 그리고 고작해야 열 마리, 잘 해봐야 열두 마리의 그리폰만이 캐러반을 끌 수 있고, 그 중 반 정도만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태지. 나머지는 너무 흥분해서 날뛰다 다치고 말 거야. 그리고 피난민 중에는 이런 임무에 적합할만한 인원이라곤 없을 거잖아. 이건 불가능해, 개러헬. 날더러 도시를 대피시키라고 한다면, 좋아, 해볼게...하지만 적어도 이게 자살시도가 아니려면 충분한 병력이 필요해."

  "우리에겐 그게 없지." 동생은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누나한텐 있어."

  "아니, 없어.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한 거야?"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망토 안에서 거친 재질의 천 가방을 끄집어냈다. 더럽고 핏자국이 묻어있는 모양을 보아 전장에서 수습한 물품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개러헬은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두 번째 주머니를 꺼냈고, 이번 것은 부드러운 가죽재질에 마법사의 금빛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색과 금색 비단끈으로 된 매듭에 이세야는 그 내용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리륨 가루. 한 근은 될 법한 양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할 터였다.

  이어 그는 리륨 가루가 든 주머니 옆에, 끈끈해 보이는 검은 액체가 담긴 세공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가고일의 두상과 발톱을 새겨놓은 그 유리병은, 화려해보이는 장식으로 그 안의 내용물이 품고 있는 끔찍함을 - 그리고 그게 이 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끔찍함을 가리는 듯 했다.

  이세야는 고개를 저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등 뒤의 벽에 부딪혔다. 그는 부딪힌 충격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니야, 안 돼, 안 된다고."

  "이것 밖에 방법이 없어." 동생이 말했다. 이세야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봐선, 그 역시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우리는 반드시 그 도시들을 대피시켜야 하고, 가장 최소한의, 기동성 있는 병력으로 진행해야 해. 여기엔 그리폰이 그리 많지 않고, 그 중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야. 하지만 누나가 때까치에게 했던 걸 다시 한다면, 그들은 열 배도 넘는 그리폰이 있는 것마냥 싸울 수 있고, 부상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자유동맹을 살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어, 이세야 누나.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두면서까지 누나의 비밀을 지킬 수는 없었어. 수석 감시자가 명령을 내렸어. 헤인 요새의 그리폰들에게 입단식을 치르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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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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