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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는 밤

etc. 2023. 11. 21. 00:38

발더스 게이트 - 다크 어지 x 카를라크 로맨스

티플링 다크 어지 배경, 캐릭터 고유 이름 있음

다크 어지 3막 스토리 스포일러 포함

 

*

 

  야영지는 고요했다. 동료들 모두 개인 천막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분위기에 영향 받았는지 덩달아 스크래치도 동그랗게 몸을 만 아울베어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이해할 만했다. 오린을 죽이고 마침내 네더스톤 3개를 모았다는 흥분도 잠시,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엘더 브레인을 마주하는 것 뿐. 느슨해졌을 속박을 생각하면 머뭇거리거나 추스를 틈도 없었다. 결전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밤, 그게 오늘이었다.

 

  활줄을 갈고, 류트 조율을 마치고, 화살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큰 전투를 앞두고 늘 하던 일상적인 행동에도 묘하게 긴장이 스며 있었다. 부족한 물약을 채워넣고 마지막으로 가방끈을 단단하게 동여맨 뒤, 라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 말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은 따로 있는데. 라샤는 자신이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을 혼자 먹겠다는 핑계로 개인천막으로 빠져 나가면서도 등 뒤가 따갑게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카를라크와 이야기 해야하는데. 미루거나 외면할 시간조차 사치라는 걸 아는데도, 라샤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신병, 안에 있어?"

 

  아, 언제나 한 발 앞서 나가는 그의 연인이란. 망설이며 낭비하기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라샤는 천막 입구를 살짝 들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연인의 주홍빛 눈을 마주했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카를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좀 걷자. 오늘 별이 잘 보이네."

 

  그들이 정한 야영지는 도시 북쪽의 숲 속에 있었다. 너른 공터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동료들의 천막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불빛이 여전히 새어 나왔다. 다들 쉽게 잠들 수 없을 터였다. 라샤와 카를라크는 사람들의 발길로 빚어진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어슴프레한 별빛만으로는 어둠을 밝히기 부족했지만 티플링 두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따금 정적을 깨는 풀벌레 소리 외엔 적막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있잖아,"

  "저기,"

 

  야영지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걷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주고 받았다. 카를라크가 먼저 살풋 웃으며 라샤에게 우선권을 양보했다.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몇 번 입을 달싹이던 라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네가 내 곁을 지키던 밤에 있잖아."

  뚜렷하게 지칭하지 않음에도 카를라크는 즉시 라샤가 말하는 '그날 밤'이 언제인지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인데도 어쩐지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날의 일. 터져나오는 어두운 충동을 이겨내려 사투하던 라샤를 묶어두고 지켜보던 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욕과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끝없이 사랑한다 속삭이고, 몸부림치는 그를 품에 안고 다독이던 밤. 카를라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밤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처럼 피해지는 주제였다. 카를라크가 이 자리에서 듣게 될 거라 생각한 주제는 아니기도 했고.

  "나는... 그때 이미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 혹시라도 나를 갉아먹는 어둠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더 이상 네가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카를라크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 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의 시선은 걷고 있는 자신의 발끝에 머물러 있었다. 라샤 역시 카를라크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잠시 반응을 기다리던 라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물었었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거냐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죽음을 택할 만큼."

  이 또한 그들이 외면하던 묵은 주제 중 하나였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사랑만큼 불안과 두려움이 차오를 때면 라샤는 카를라크에게 아베르누스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물었고, 아무리도 달콤한 사랑의 말과 기약 없는 미래의 약속을 주고 받는 와중에도 카를라크는 한결같이 단호하게 거절로 일축했다. 일시적인 거라고, 아베르누스에 가서 심장을 고칠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몇 번이고 되물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묻는 라샤의 절박함을 아는지라 카를라크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 단단함에 지쳐 화내는 건 도리어 라샤 쪽이었다. 감정이 격해져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거냐며,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냐고 비수 같은 말을 쏟아낸 일도 있었다. 감언이설도, 폭언도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을 쯤에야, 라샤는 더 이상 그 일을 화제에 올리지 않게 됐다. 어차피 그들은 당장 내일에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삶을 사는 모험가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달콤한 약속은 시한폭탄 같은 심장이 없는 이들에게도 사치인 세상인 것을. 그런 라샤가 지금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는 이유는 카를라크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카를라크는 라샤가 죽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온몸을 짓누르는 살인의 군주의 존재감과 영혼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카를라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레이어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의 연인이 자신의 창조주를 마주하고, 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절대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피웅덩이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 어떻게 그의 심장이 그 순간에 재가 되지 않았는지는 카를라크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위더스가 나타나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독백을 하며 라샤에게 다가갈 때까지도 카를라크는 눈앞의 상황을 머릿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바알의 아이가 죽었다. 살인의 군주의 선택 받은 자가 되길 거부하며, 내면의 어두운 충동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그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인가. 그야말로 영웅의 귀감 같은, 그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이성의 목소리가 늘어놓는 말 같지도 않은 찬양은 현실도피를 위한 일말의 발악이었다. 그의 실제 내면은 그저 끝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 왜 네가. 어떻게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리고 라샤가 다시 눈을 떴다.

 

  위더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카를라크의 눈에 들어오는 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카를라크를 바라보는 라샤와, 그를 발견하자 빛을 되찾는 파란 눈동자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데, 카를라크는 그제야 자신의 심장이 다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계로 된 심장이니 정말 잠시 멈췄었는지도, 그대로 두었다면 과열로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해냈어. 자유를 찾은 거야. 네가 미친 듯이 자랑스러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품에 그대로 끌어안고 정말 그가 괜찮은지, 온전히 살아난 게 맞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라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전투의 여운을 음미하며 야영지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 할 때까지, 카를라크는 라샤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무지 평소 같은 마음으로 라샤를 대할 자신이 없었기에. 라샤 역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빠 그런 카를라크를 굳이 찾지 않았고.

  그들이 걷던 숲길은 작은 호숫가를 마주하고 커다란 그루터기가 놓인 공터로 이어졌다. 근처 사는 연인들의 밀회장소로 쓰일 법한 곳이었다. 카를라크는 사람들이 앉은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진 그루터기를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작은 그루터기가 빠듯하게 채워졌다.

 

  "...미안해."

 

  발끝만 바라보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라샤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사과였다. 카를라크는 그제야 연인의 얼굴을 돌아봤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물든 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보였다. 카를라크는 허둥거리며 벌떡 일어나 라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사랑, 왜 사과하는 거야?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아니, 아니야. 카를라크, 나는... 몰랐어. 그게 어떤 일인지. 어떤 마음으로 네가 그런 말을 했던 건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던 때에도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구름낀 듯한 기억 속을 되짚으며 내가 행했던 끔찍한 일들이 덩굴처럼 수렁으로 나를 끌어들일 때에도, 나는 살고 싶었어. 내가 누구였는지 모른다면, 내가 앞으로 행하는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주는 거라 자위하며, 모든 걸 덮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카를라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카를라크는 라샤의 우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독백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내 길을 밝혀줬어. 너는 빛나는 사람이야, 카를라크. 네 심장을 불태우는 파란 불빛 때문이 아니야. 너는 정말로, 태양 같은 사람이야.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모두에게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네 자신을 불태우는. 그래서, 나도 네가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내가 과거에 어떤 끔찍한 사람이었을지라도 그 빛으로 나를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아, 하지만 얼마나 순진한 기만이었던가. 그가 그저 '끔찍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그저 잘못된 길을 들어 악행을 저지르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평범한 악당이었다면, 과거를 후회하고 속죄를 추구하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인의 군주가 직접 빚은 그의 피조물은. 의심 없이 자신의 선택 받은 소명을 믿고 따르던 그의 과거는. 태어난 순간부터 부정한 그의 존재는.

 

  그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탓에, 라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알에게 복속돼버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네가 아는 라샤가 아니겠지. 네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지킬 수도 없을 거고. 모르겠어, 너라면 그런 나라도 살아서 함께 있어주길 바랐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만큼, 그렇게는 할 수 없었어."

 

  카를라크가 어떻게 그 마음을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단어 뒤에 올 수 있는 수많은 말들. 비장하게 장애물을 극복하겠다는 결심이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체념이든. 라샤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생의 의지를 넘어서서 스스로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상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엔 익숙한 카를라크였지만, 라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서 문득 치미는 열망이 느껴졌다. 그 순간, 라샤가 쓰러지는 그 순간에는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날 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때, 라샤가 본인의 선택을 앞두고 카를라크에게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살인의 군주의 도구가 되어 세상을 살육의 바다로 만드는 삶을 살지, 고귀한 영웅으로서 죽을지, 연인인 그에게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라샤, 내 사랑."

 

  어느 새 카를라크의 얼굴도 라샤와 똑같이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타오르는 심장만큼 뜨거운 두 손이 눈물에 젖은 연인의 뺨을 감싸안았다.

 

  "그 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네가 정말로 자랑스러워. 그 누구도 그 순간에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쉽게 내리진 못했을 거야. 혹여 네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해도, 그 누구도 널 탓하거나 재단할 수 없었을 거야. 아마 나는 네 선택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카를라크의 이마가 라샤와 맞닿았다. 말하는 숨결과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라샤에게 전해졌다.

 

  "네가 살기를 바랐을 거야. 내가 그 자리에서 널 말릴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살인의 군주에게 내 심장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냈을 거야. 네가 이렇게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감사하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 거야. 분명히. 널 내 눈앞에서 잃는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어. 아베르누스의, 아홉 지옥의 겁화를 끌어다 영혼 위로 쏟아 붓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다 잘 풀렸으니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라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알고, 그 결과가 어떨 수 있었는지 아는 이상.

 

  "그런데 내가... 네게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하려는 거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너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깊어갈수록, 사랑이 짙어질수록 괴로움도 커져갔으니까. 차라리 순간적인 육욕이나 외로움을 채우려는 절실함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주제에 어째서 다른 사람까지 마음에 담고 말았을까. 오래 전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 평범한 삶을 꿈꾸게 돼버린 걸까.

 

  "카를라크, 그건..."

 

  또 다시 지지부진한 언쟁으로 이어질까, 지레 물러서려는 라샤를 카를라크가 제지했다.

 

  "미안, 자기야.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자리에서 널 위해 내 결정을 번복하겠다고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감정에 휩쓸려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은 해보려고. 우리에겐 아직 남은 과제가 있고, 늘 그랬듯 어쩌면 엘더브레인과 맞서 싸우는 중에 우리 중 누가 어떻게 될 수도 있고, 그 전에 내 심장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마음 대로 끝을 내버릴 수도 있는 거지만. 우리는 늘 현재에 충실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래."

 

  라샤의 눈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 몰아쳤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감정에 호소해 카를라크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파고들어 억지로라도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가능할 테지. 하지만 라샤는 카를라크를 알았다. 여린만큼 고집있는 그의 연인이 이 정도로 말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고마워, 카를라크. 그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너는 모를 거야."

 

  라샤는 무릎 꿇은 카를라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와락 품으로 끌어안아 잘게 떨리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키 차이 때문에 자주 볼 일 없는 카를라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라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뤄놨던 피로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에겐 아직 구해야 할 세계가 있잖아. 제대로 쉬어놔야지."

  "...응."

 

  코를 훌쩍이며 일어선 카를라크가 라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철부지 어린 연인들처럼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돌아가는 숲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 했다. 내일의 결전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늘 한 고비 넘길 때마다 삶에 감사하는 영웅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연인의 존재를 등불 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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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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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 머무는 생활은 점차 익숙해졌다. 제 집 같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주 놀러가 묵는 친구집 같은 느낌? 첫날 썼던 그웬의 칫솔에는 이제 호비가 준 홀로그램 거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호비는 마치 길고양이를 챙기듯 그웬을 방치하며 돌봤다. 언제 온다간다 말도 없이 들락거리는 그웬을 위해 여분의 침대시트를 늘상 갖춰두고, 냉장고에는 언제나 보관기간이 긴 간편식 종류가 두어 개 들어 있었다. 소파에서 자겠다는 강력한 요청을 몇 번 거절당하고 난 뒤로는 호비의 흔적이 밴 침대에서 자는 데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웬은 호비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쉽게 정할 수 없었다. 피터 이후로, 그웬이 마음을 터놓고 친구가 됐던 건 마일즈가 유일했다. 허나 마일즈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고, 위기와 모험을 넘나드는 사이에 싹튼 감정이 그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에게 느낀 동질감이었을지, 우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는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대로 지구-1610에 머물며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웬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쉽게 담을 쌓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 대신 한 번 담을 허물고 나면 한도 없이 자신을 내주는 성격이라는 것도. 그런 그에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딱 편안할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곁을 내주는 호비의 존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웬에겐 굳이 자세히 물어 그들의 관계를 정립할 용기가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기꺼이 이 느슨한 줄다리기가 주는 안정감을 즐기기로 했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비의 밴드와 깜짝 객원 공연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좁아터진 호비의 보트에 밴드멤버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하게 뒷풀이를 하고, 다음 곡과 게릴라 콘서트를 벌일 장소를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도 그웬은 호비와 한참을 더 떠들다 잠자리에 들었다. 갓 구운 토스트의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일어나 샤워부터 마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말리던 그웬은 문득 수건으로 몇 번 두들기는 걸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길어진 머리를 인지했다.
 
  "여기도 미용실 같은 게 있나?"
 
  질문을 던지고 나니 꽤 바보 같은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머리 자르는 곳이 없을 리가. 욕실 문 너머로 소파 앞에 토스트 접시를 내려놓던 호비가 슬쩍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머리 자르게?"
  "아니, 옆머리가 제법 길어져서..."
 
  흘러내린 윗머리를 손으로 살짝 들추어 보이자 이제는 언더컷이라 부르기 애매한 길이가 된 애매한 옆머리가 드러났다. 문 사이로 빼꼼 들여다본 호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은 젖은 수건을 목 뒤에 두르고 걸어나와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호비는 그웬이 나올 시간에 딱 맞춰서 마시기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준비하는 재주가 있었다. 과연 영국인이라 이건가.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는 그웬에게 호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가 밀어줄까?"
  "어?"
  "클리퍼는 케빈한테 빌려오면 돼. 근처에 바버샵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긴 한데, 걔보단 내가 잘하거든."
 
  정작 본인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한 게 언젠지 짐작도 가지 않는 꼴을 하고서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여차하면 제시카네 집에 가서 클리퍼를 빌릴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지만, 그웬은 다소 미심쩍어 하는 얼굴로 고민했다. 밑져야 본전이고 실패해도 머리는 다시 자라는 거니까. 안될 것도 없지, 뭐.
 
  마침 바쁜 일정도 없었다. 최근 그웬은 아무 지구에서든 간단하게 할 만한 알바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서 숙식을 제공한다곤 해도 자잘한 생활비가 안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친구들의 선의에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식당 접시닦이 알바든 바쁜 주말 저녁 배달 알바든 - 스파이더우먼이 배달해준 피자를 드셔보세요! -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그날그날 먹고 사는 건 처음에만 좀 힘들었지 금방 적응이 됐다. 본부 임무 짬짬이 알바하랴 호비네 밴드와 공연 준비하랴 제법 바쁘게 지내던 중,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 싶어서 아무 계획 없이 호비의 보트에서 뒹굴거리겠다고 마음 먹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욕실 거울 앞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은 그웬 뒤에서 호비가 부산스럽게 도구를 늘어놓았다. 케빈이라는 친구한테 함께 빌린 건지 염색약이 덕지덕지 묻고 끄트머리가 헤진 미용가운을 그웬의 목 둘레에 두르고, 클리퍼에 남은 이전 사용자의 흔적을 작은 붓으로 털어내고, 클리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원을 잠깐 켜보는 일련의 과정을 그웬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많이 해봤나 봐?"
  "어어. 여긴 뭐든 자급자족하는 녀석들 뿐이니까. 너 같은 얇은 금발은 별로 만져본 적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 라니 남의 머리를 두고 제법 불안한 말을 한다. 아무렴, 미숙하다 한들 우리 아빠만 할까. 그웬은 엉망진창이었던 조지 스테이시의 클리퍼 실력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머리는 또 자라는 거니까.
 
  기타리스트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이 그웬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헤집었다. 밀면 안되는 부분을 따로 틀어올리면 좋을 테지만 당연하게도 호비의 집에 집게 따위는 없었다. 좀 더 머리가 길어지면 머리끈으로 묶어둘 수라도 있을 텐데. 조용한 가운데 딸깍 하고 전원 켜는 소리, 이어서 위이잉 하는 익숙한 클리퍼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그웬의 뒤통수를 집중해서 노려보느라 따로 눈을 마주쳐 오지 않았다. 정말 익숙해 보이네. 그 무심한 얼굴에 되레 그웬 자신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한다."
  "...응."
 
  목덜미 부근에 선뜩한 느낌과 함께 위잉거리는 날이 접촉해왔다. 호비는 머리를 틀어올린 왼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살짝 앞으로 밀며 클리퍼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날을 위로 밀어올렸다. 제법 자란 뒷머리가 바닥으로 사락거리며 떨어졌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집중한 눈을 훔쳐봤다. 연주에 심취해 있을 때 같은 표정이네. 그웬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집중해야 할 곳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처음 해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는 꽤 능숙하게 클리퍼를 다루었다. 어쩌면 그냥 손으로 다루는 건 뭐든 잘 하는 걸지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린 시간이 무색하게 클리퍼가 몇 번 위아래를 오가자 얼마 되지 않는 언더컷 부분이 금세 정돈됐다. 몇 번인가 멈추어 긴 머리 부분과의 경계를 확인하고 목 피부가 드러나는 끄트머리 부분에서 날길이를 바꿔 잔머리까지 꼼꼼하게 손질하는 데도 시계를 보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 했다. 그웬은 그 시간 내내 호비의 집중한 얼굴을 관찰했다.
 
  "잘하네. 익숙하다더니."
  "언더컷은 처음이긴 한데, 이 정도는 남자들은 대개 익숙하지."
 
  손질이라곤 영영 한 일 없는 것 같은 머리로 둘러대는 말이 뭔가 우스웠다.
 
  "잘하는 줄 알았으면 더 짧게 할걸 그랬나? 1mm로?"
  "3mm가 제일 보기 좋아. 금방 자란다 싶으면 자주 밀면 되니까."
 
  자기가 자주 밀어준다는 말인 걸까. 그웬은 흘러가듯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이 위잉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끝났어?"
  "아니, 경계 부분 아직 남았어. 지금부터는 움직이면 안 돼."
 
  별 말 아닌데도 그웬은 작게 심호흡 하고는 그대로 흡 하고 숨을 죽였다. 호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경계 부분은 자칫하면 멀쩡한 머리를 왕창 뜯어먹을 위험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아버지한테 처음 머리를 맡겼던 날의 경험으로.
 
  '여기는 좀 까다롭구나. 날을 옆으로 기울여 볼까?'
  '음, 미용사들은 그대로 하던데요, 보통.'
  '그 사람들은 전문가잖니. 잠깐, 움직이지 말고. 아, 이런...'
  '...'
 
  잡으면 그대로 붙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부친의 손이 허망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뭉치를 붙잡았다. 그웬은 처참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추었다. 원래 있던 언더컷 라인에서 눈에 띄게 삐죽 올라간 밀린 머리가 보였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부친이 그웬과 눈을 마주쳤다. 허공에서 위이잉 작동중인 클리퍼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꿨다.
 
  '...머리는...또 자라니까요.'
  '...미용실 비용이 얼마랬지?'

 
  미용사가 새로 설정된 언더컷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어준 뒤에도, 그웬은 부친에게 다시 머리를 맡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경계부를 다듬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그웬의 언더컷 라인이 2cm 정도 위로 올라간 건 사소한 부산물 같은 거였다. 둘 사이가 날로 서먹하고 어색해져 가는 사이에도 2주에 한 번, 일요일 저녁이면 그웬은 거울 너머로 집중한 얼굴의 부친이 클리퍼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긴 머리칼을 틀어올리는 호비의 왼손이 한층 단단하게 그웬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날을 바싹 붙이면서 본인도 몸을 기울여 머리 위로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나직하게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보이는 건 호비의 얼굴이 아닌 그의 풍성한 머리칼이었다. 망부석이라도 된 양 뻣뻣하게 굳은 그웬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클리퍼가 뒷머리에 닿았다. 시원시원하게 밀던 아까와 달리 여러 번에 나눠서 경계부를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클리퍼의 궤적에 그웬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머리 뒤의 감각에 집중했다. 머리를 붙든 호비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 특유의 체취, 스파이더 센스를 간질거리게 만드는 동질감 같은 게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미용사나 부친에게 머리를 맡길 땐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생판 남에게 등 뒤를 맡기는 느낌이 생경했다. 툭, 툭 하고 정교한 작업을 하듯 섬세하게 경계부를 정리하는 호비 역시 집중하느라 숨을 참는 것 같았다. 달칵, 하고 클리퍼 전원이 꺼지고, 얕게 숨을 내쉰 호비가 뒤로 물러났다. 그웬도 그제서야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클리퍼 대신 큼직한 브러쉬를 집어 든 호비가 그웬의 목덜미를 툭툭 털어냈다.
 
  "그거 미술용 붓 아냐?"
  "정확히는 페인트용 붓이지. 그래피티용. 걱정 마. 새 거야."
  "..."
 
  그는 귀퉁이에 금이 간 낡은 거울을 들어 그웬이 볼 수 있게 뒷모습을 비쳤다. 제법 깔끔하게 정돈된 민머리가 보였다. 그웬은 손을 들어 까끌거리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 뒤로 2주 뒤, 또 2주 뒤, 호비와 그웬 사이에 정기적인 약속이 생겼다. 그가 늘 호비의 지구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스의 우주, 혹은 본부에 있는 임시 숙소, 가끔은 마고와 함께 밤새 영화를 보다가 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라도 세수하고 나서 습관처럼 까끌한 뒤통수를 만지다 보면 슬슬 때가 됐구나, 하고 호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은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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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서 하루를 보내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돌아가자, 신기하리만치 이전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의 위치도, 상황도,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음에도, 바다 위를 부유하는 부표 같던 그웬의 발에 무게가 실렸다. 호비는 공연 기회가 있으면 또 연락하겠는 말과 함께, 언제든 그웬이 원한다면 다시 와도 좋다는 암시를 남겼다. 갈 수 없는 곳들과 있고 싶지 않은 곳들 사이에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런 그웬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제시카 드류였다.

 

  "호비네 지구에 다녀왔다면서?"

 

  안부를 묻듯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그웬은 순간 긴장했다. 혹시 안 되는 거였나? 미겔이 싫어하려나? 제스한테라도 미리 말을 했어야 했나? 물론 호비에게 거의 납치당하듯 끌려간 상황을 고려하면 미리 허락을 구할 틈은 없었겠지만, 뒤늦게야 걱정과 후회가 스물스물 올라오려는 찰나, 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골칫덩이 녀석, 평소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웬일이래? 오죽 신기했으면 별의 별 거미들이 다 그 얘기만 하던데. 재밌었어?"

  "어...네. 공연에 드러머가 급히 필요했다더라고요. 반정부주의 공연인 줄은 모르고 갔지만..."

 

  제시카는 그웬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호비 브라운이? 드러머 대타를 찾겠다고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 그웬이야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양한 거미들 개개인을 잘 알 리가 없었으나, 본부 주축 멤버로 오래 묵은 제시카는 이게 그렇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굳이 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젊은 친구들이 우정을 쌓겠다는데...

 

  "모처럼 안면을 튼 거미도 생겼겠다, 이제 슬슬 임무에 나서도 되겠는데? 단순한 임무 중에 페어로 맡길 만한 게 있나 한 번 찾아볼게."

 

  뭘 시키려 해도 저 내키는 대로만 구는, 스파이더캣보다도 말을 안 듣는 스파이더-펑크를 다룰 목줄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예상에, 제시카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뭐라 속단할 단계는 아니겠지만,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

 

  제시카의 말대로, 그웬은 새 임무를 몇 번 받게 됐다. 빌런이 휩쓸고 간 현장 뒷정리라든가, 변칙점 흔적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단순한 임무부터 시작해, 자기 차원을 방어하는 거미인간들의 사이드킥 역할로 업그레이드 되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비는 함께 배정 받은 첫 임무에만 얼굴을 비치더니, 임무가 간단하다 싶을 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비가 오지 않는다며 라일라에게 연락하자 라일라는 '걘 원래 그래. 깍두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혼자 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개 그웬 혼자서도 해결 가능한 수준의 일이었지만, 간혹 상황이 예상대로 안 풀린다 싶을 때면 호비는 귀신 같이 알고 도와주러 왔다. 스파이더 센스가 이런 식으로도 작용을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웬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걸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 날은 단둘이서 임무에 나선 날이었다.

 

  "너는 그...막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날 보질 않네?"

 

  언젠가 호비가 썼던 표현을 인용한 질문에, 호비는 눈썹을 비죽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막 제압한 지구-1988 출신의 라이노를 통제 포드에 가둬놓고 천장에 구멍이 난 교회 건물 꼭대기의 앙상한 철골 끝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씹는 중이었다.

 

  "그웬 스테이시, 네 우주에서도 죽었다며. 엄청 전설적인 드러머였다던데. 팬이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그건?"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의 호비는 맨얼굴일 때보다 오히려 표정이 다채로웠다. 눈구멍이 비대칭적으로 쭉 늘어난 것이 그웬의 질문을 영 탐탁치 않아 하는 듯 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린 걸까? 그웬은 지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제긴 했다.

 

  "리리가 알려줬어. 내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면서. 친척 아니냐더라. 사진 보니까 꼭 닮진 않았지만. 이름도 비슷하잖아, 마침. 그웬디라니, 너도 센스가 참."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웬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펑크 드러머였으며, 그야말로 무대의 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리리가 보여준 옛 공연 영상 속엔 음악 취향만 다를 뿐 그웬이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뮤지션이 그 안에 있었다. 듣자하니 호비처럼 노골적인 반체제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아나키스트 세력에 상징적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죽은 걸까. 호비는 그 자리에 있었을까? 그웬이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머릿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웬의 생각을 끊어낸 건 호비의 대답이었다.

 

  "이름을 그대로 대면 너무 티나서 그런 거긴 한데, 그거랑은 별개지. 애초에 너와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웬디."

 

  단호한 대답. 호비는 입부분만 끌어올렸던 마스크를 쭉 잡아당겨 벗어버렸다. 진지한 두 눈이 그웬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도 알고서 드럼 치냐고 물어본 거 아냐?"

 

  그웬은 사실 호비가 그날 처음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거미들 사이의 다중우주적 상호작용이 빚어낸 우연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호비를 알면 알수록 그가 고작 드러머 대타를 구하겠다고 본부에 냅다 발을 들였을 리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음험하게 그웬 몰래 그를 관찰했을 거란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그건 뭐... 확률적인 문제지. 캐논 이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들은 잘 안 달라지니까."

 

  확률이라. 어쨌든 자신은 '그' 그웬 스테이시긴 하다는 거지. 그웬은 다른 우주의 그웬 스테이시들이 어떤 인물인지 딱히 알려 하지 않았다.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쌓여있는 시체 더미를 들춰 보는 느낌이라 꺼림칙하다고 해야할까. 지구-138의 그웬 스테이시는 그가 제대로 확인한 첫 번째 그웬 스테이시였다. 적어도 그웬이 좋아할 수 있는 버젼의 모습인 건 참 다행이었다.

 

  그웬은 굳이 이렇게 물어서 자신이 어떤 답을 얻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호비는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의 흔적을 따라 자신을 찾은 걸까? 다른 스파이더맨처럼 그웬 스테이시의 연인은 아니었을지라도, 닮은 모습에서 뭔가 위안을 얻고 싶었다거나.

 

  "날 봤을 때... 기분 이상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가면을 벗은 호비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드라마틱한 표정변화가 있었다.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린 호비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웬디, 내가 미겔 오하라랑 닮았어?"

  "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맥락 없이 던져진 호비의 질문에 그웬이 대번에 정색했다. 호비는 샌드위치를 먹느라 입 위로 끌어올렸던 그웬의 마스크를 마저 쭉 끌어올려 벗겨버렸다. 그웬의 새파란 눈이 호비의 깊은 갈색눈을 마주봤다. 호비의 눈이 흥미로운 주제를 찾은 것마냥 즐겁게 반짝였다.

 

  "그렇지? 이놈의 다중우주니 뭐니 하는 거 말이야,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들을 자꾸 겹쳐 보려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가면 너나 나 같은 '별종' 몇몇을 빼면 반절이 피터 파커인데, 그놈들한테 너네 다 같은 사람 아니냐고 하면 그녀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소위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는 놈들의 하늘을 찌르는 자아를 깨달으면 너도 놀랄걸."

 

  그웬은 그 말에 본부에서 만난 수많은 피터 파커를 떠올렸다. 딱 한 번, 가면 아래 얼굴이 가려진 와중에도 지나치는 순간 강렬한 느낌이 온 적이 있었다. 이 애는 '그' 피터구나. 다른 피터들은 이따금 향수를 자극하긴 했어도 그웬의 피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 그웬은 그 가면 아래 있을 얼굴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그' 피터 파커는 그웬과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그웬을 잠깐 본 뒤, 알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갔다. 그뿐이었다. 어느 지구의 스파이더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웬은 감히 알아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는 취미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리 비슷한 캐논 이벤트를 공유하고 비슷한 특성을 공유해도 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중우주의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묶는다면, 너는 차라리 피터 파커에 가깝겠지. 혹은 나나 미겔 오하라에 가깝든가. 하지만 네 말대로, 그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지."

 

  호비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과장된 태도로 고개를 털었다. 그웬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겔 오하라와 호비 브라운이라. 두 사람은 같은 '스파이더맨'으로 묶는 것조차 모욕이라 할 만한 조합이긴 했다.

 

  "네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웬 스테이시일지언정, 너는 추락하지도, 스러지지도 않는, 스파이더우먼이잖아. 그건 오직 너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야. 누구도 그 위에 다른 걸 겹쳐놓을 수는 없어. 설사 너 자신일지라도."

 

  답지 않게 길게 열변을 토한 호비는, 자신의 대답에 그웬이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호비는 그웬의 머릿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추측할 정도로 그웬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가, 그의 섬세한 내면을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맞아. 나는 스파이더우먼, 그웬 스테이시이야. 단 '하나' 뿐인."

 

  단 하나 뿐인. 그 말은 참 외로운 동시에,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모르지, 또.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는 다중우주 중 어딘가에는 또 다른 그웬 스테이시가, 벤 삼촌이든 메이 숙모든 메리 제인이든 누군가 소중한 이를 잃고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우먼이 되는 우주가 있을지도. 허나 그런 것들이 '이' 그웬 스테이시를 퇴색시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어느 우주에서 추락하고 부서지고 목숨을 잃는 그웬 스테이시가 있어도 그가 결코 꺾이지 않는 것처럼.

 

  "호비."

  "응?"

  "고마워."

 

  똑바로 마주친 푸른 눈은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있지만 결코 눈물을 떨구진 않는다. 호비 앞에서 이 정도 모습을 보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변화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호비 브라운은 피식 웃으며 큰 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툭 하고 덮었다. 그의 드러머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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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라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웬은 난생 처음 보는 보트 하우스 앞에서야 깨달았다. 폭이 좁은 운하 사이에 빠듯하게 정박해둔 보트는 집으로 치면 침실에 부엌만 겨우 딸려 있을 정도 크기였지만, 외관에서 꼼꼼하게 관리해온 흔적이 느껴졌다.

 

  "여기에...산다고?"

  "정식 주소는 없지만, 나름 있을 건 다 있어. 맥주 마실래?"

 

  갑판 위에 훌쩍 뛰어 올라선 호비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엉거주춤 배 위에 올라서자, 호비는 문 옆에 쌓여있는 박스 틈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술한 보안이네,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안에 들어서자 딱히 누가 뭘 훔치러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스등에 불을 켜 안을 밝힌 호비는 입구에 그웬을 우두커니 세워둔 채 난장판인 거실을 가로질러 쪽문으로 사라졌다.

 

  무질서 속의 조화라고 해야할까. 거실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작은 공간은 한가운데 잡동사니에 잠식된 소파가, 한쪽 벽에는 LP 음반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그래피티에 뒤덮인 벽 위로는 공연 포스터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쪽문 너머가 부엌인 걸까. 큰 키에 맞지 않는 작은 문을 반쯤 허리 숙여 들어갔던 호비가 맥주병 두 개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가 들어오긴 하는 모양인지, 받아든 맥주병은 차가웠다. 호비는 소파 위의 잡동사니를 들어다가 한쪽 구석에 그대로 쌓아 놓고는 그웬에게 앉으라며 툭툭 손짓했다. 정작 자신은 주변에 쌓아둔 상자 하나를 간이의자 삼아 맞은 편에 자리 잡고서.

 

  "여긴 어디야? 지구-138이랬지?"

 

  이제 와서 묻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신비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주였다. 제스나 마일즈의 지구는 그웬이나 마일즈의 지구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미겔의 누에바 요크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미래 도시였다면, 이곳은 시대 배경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음에도 흑백 필터를 두른 것 같은 감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홀로 핑크색, 회색, 파란색을 오가며 번쩍이는 호비가 더 도드라진다고 해야하나. 저것도 거미 능력 중 하나인 걸까?

 

  "여기는 영국, 독재자 오지 오스번의 감시 하에 모든 게 통제되는 거지 같은 나라지. 나는... 너도 익히 알 방사능 거미에게 물렸고, 이 지구의 하나뿐인 스파이더맨으로 파시스트 개새끼들하고 맞서 싸우는 중이고. 밴드 활동 역시 반체제활동의 일부야. 호비 브라운일 때는 그리 잘나가진 않았는데, 스파이더 펑크는 제법 효과가 좋더라고. 너도 여기선 가면을 쓰는 쪽이 맨얼굴로 다니는 것보다 위험하단 거지."

  "와, 초면에 나를 반정부 공연에 냅다 들이밀었다는 거네, 그럼?"

 

  영국 맥주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 반쯤 비우고 내려놓은 그웬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스파이더맨이 어디서든 정부와 사이가 좋은 일이 있긴 하냐만은, 상당히 위험한 곳에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포털을 열어 돌아갈 수 있다손 쳐도.

 

  "그래도 재밌었잖아? 이대로 우리 드러머 할래?"

 

  씩 웃는 얼굴이 묘하게 얄밉다. 겨우 한 번 공연 해놓고 뻔뻔하기는. 제법 느낌이 좋은 멤버들이긴 했다. 문제는 그웬이 아직 어딘가 발을 붙일 마음이 없다는 것 뿐. 애초에 남의 지구기도 하고.

 

  "재미는 있었어. 가끔 객원 공연 정도라면.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 정도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호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이한 사람이다. 어떻게 딱 그 순간에 그웬을 발견한 걸까. 일종의 스파이더 센스였을까? 호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웬은 지금쯤 본부의 어두침침한 개인 숙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으리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신세를 졌다고 해둘까.

 

  무뚝뚝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호비는 일단 입을 열면 말이 많았다. 누가 스파이더맨 아니랄까봐. 그웬과 달리 그는 딱히 그웬에게 궁금한 게 없는지 사적인 질문이라곤 일절 던지지 않았다. 대신 대뜸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묻거나 처음 무대공연에 섰던 순간의 실수담 같은, 뮤지션끼리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펑크는 그웬에겐 다소 낯선 장르였지만 음악은 쉽게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맥주와 마른 육포를 곁들인 시덥잖은 수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어느 새 무거운 눈꺼풀로 꾸벅꾸벅 조는 그웬을 발견한 호비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자러 가, 그웬디. 욕실 거울 뒤에 새 칫솔 있으니까 꺼내 쓰고, 씻는 사이 침대 준비해둘게."

 

  그웬은 호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 여기 침실이라고 할 만한 방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기, 그 침대라는 게 말이야..."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는 그웬이 호비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초면의 또래 남성이고, 분위기에 휩쓸려 이렇게 오긴 했지만 뭔가 그 이상을 기대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웬의 의사를 거슬러 뭔가를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혹여라도...

 

  "난 여기서 잘 거야.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매트리스가 좀 꺼지긴 했는데 그래도 소파보단 나을걸."

  "어? 아냐, 내가 손님인데 그럴 순 없지. 내가 소파에서 잘게."

 

  신사다운 제안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웬은 손사래를 쳤다. 호비 말마따나 소파에서 자나 침대에서 자나 큰 차이는 없을 듯 싶지만, 주인을 내쫓고 침대를 차지하는 건 지나친 실례였다.

 

  "무대 땜빵해준 답례라고 생각해. 네가 뭐라든 난 여기 자리 잡았으니 알아서 해."

 

  호비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난 그웬을 슬쩍 밀어내고는 소파 위에 몸을 날려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웬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더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호비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공연 후의 아드레날린과 알콜의 혼합작용으로 그는 상당히 기분 좋게 나른한 상태였다. 지금 잠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웬은 소파에 드러누워 종이쪼가리 위에 뭔가를 끄적이는 호비를 내버려두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욕실문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작은 보트하우스에 걸맞게 모든 게 딱 최소한으로만 갖춰진 욕실이었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샤워부스,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것 같은 변기, 빛바랜 거울이 달린 찬장과 군데군데 이가 바진 세면대. 거울문을 열자 양치컵에 각양각색의 칫솔이 서너 개 꽂혀 있고, 구겨진 포장 안에 새 칫솔도 두어 개 담겨 있었다. 묵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칫솔을 구분하기 위해 스티커를 붙여두거나 매듭을 달아놓은 흔적도 있었다. 단골손님도 있다는 뜻이겠지. 많은 이들이 다녀간 흔적은 그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호비의 침대는 그 큰 덩치를 구겨넣기엔 다소 빠듯할 것 같은 크기였지만 그웬에겐 딱 적당해 보였다. 손님용인지 다소 사용감은 있지만 새로 세탁한 티가 나는 시트와 담요가 깔려 있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박스티셔츠와 조거 팬츠 한 벌과 함께. 딱 몸을 눕힐 공간만 빼고는 거실만큼이나 난장판인 방이었다. 벽에 붙은 악보, 그래피티 아이디어가 그려진 낙서 스케치, 문고리에 걸어둔 외출용 재킷.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 그 방에서, 그웬은 자신이 일면식 없던 낯선 사람 집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네. 즉흥적인 모험이라.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자 의식적으로 미뤄뒀던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동안엔 미처 몰랐는데, 조요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배의 진동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여름 휴가지에서 정원 해먹에 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익숙치 않은 느낌에 멀미가 날 법도 했지만, 새로운 일을 겪고 난 흥분과 피로 때문인지 금세 잠이 쏟아졌다. 수마가 밀려드는 가운데, 살짝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변주한 건가? 귀엽네. 미소 띤 얼굴로 잠든 그웬에게, 아주 오랜만에 악몽 없는 깊은 잠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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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팬픽션

* 호비 브라운 x 그웬 스테이시 커플링

* 이전에 쓴 Intimacy와 아마도 이어질 내용

* 선동과 날조 가득

 

 
  한가한 오후였다. 간만에 햇살이 따사롭게 비쳐드는 오후, 살아있는 화분을 그러모아 얼마 없는 일광욕 기회를 즐기도록 보트 천장에 줄줄이 올려놓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부두에 매어 둔 배는 땅 위에 서 있는 것마냥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호비는 소파에 앉아 빈 악보지를 바닥에 늘어놓고는 기타를 튕기며 부지런히 작곡중이었고, 그웬은 그런 호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호비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하나를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펑크의 역사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웬은 흥미있는 부분만 가려 읽으며 성의 없이 페이지를 넘겨댔다. 실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사이 집중한 호비의 얼굴을 훔쳐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듯 했다. 호비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무릎을 벤 그웬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곡을 쓸 때의 호비는 무대 위에서와 비슷한 눈빛을 했다. 혹은 수트를 입고 적과 맞서 싸울 때 같은 눈을.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갖고 집요하게 끝을 향해 달리는 자의 눈빛. 그의 안에서는 이 모든 게 같은 행위이기 때문인 걸까? 그웬은 어느 새 책은 가슴 위에 엎어 놓고 호비의 얼굴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호비, 키스해도 돼?"

 

  다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호비는 그웬이 ‘밥 먹을까?’ 하는 질문을 한 것마냥 놀란 표정 하나 없이 그웬을 가만히 내려다 보더니, 아주 잠깐 틈을 두고는 짧게 대답했다.


  “안 돼.”

 

  그 짧은 간격은 뭘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지만 빈말은 아니었고, 호비가 거절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그웬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진짜?”
  “응.”

 

  호비는 대답만 마치고 다시 기타와 악보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웬은 호비가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 봐라? 그웬의 손이 호비의 턱끝을 붙잡았고, 강하지 않은 손길로 살짝 당기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그웬을 다시 향했다.


  “호비, 날 좋아해?”
  “어.”

 

  잠시도 고민하지 않은 즉답. 그웬의 심장 속도가 빨라졌다. 언젠가 물어보려던 질문이긴 했다. 너는 왜 내게 잘해줘? 왜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모든 걸 해결해줘?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하게 굴어? 점점이 쌓인 질문은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수렴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넘치기 직전의 물잔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듯, 마음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럼, 키스는 왜 안 된다고 해?”

 

  호비의 눈빛은 참 읽기 어려웠다. 그웬이 아직 그를 잘 모르는 걸까. 혹은 그의 눈빛이 담은 감정이 늘 한결 같아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오직 그웬을 향해서만 유독 다정한 눈빛. 지금도 그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웬을 내려다 보고 있지만, 눈빛만은 언제나처럼 따듯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뭐든지 아는구나, 너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인지, 미안함인지, 당혹감인지. 그웬은 벌떡 몸을 일으켜 호비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내뱉은 말이 스스로를 찌르는 유리조각처럼 돌아와 가슴을 찔렀다. 어째서 여태까지 그 당연한 질문을 못했던가. 그것은 그웬이 그에게 돌려줄 대답이 없었기 때문인 것을.


  “그웬디.”

 

  등 뒤에서 호비가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웬디, 괜찮아. 날 봐.”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이 그웬을 달래듯 다독였다. 그웬이 꼿꼿하게 버티며 등돌리고 있을 기세이자, 작은 한숨과 함께 호비 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웬 앞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그웬과 눈높이를 맞춘 호비가 얼굴을 가린 그웬의 두 손을 붙잡았다.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운 제스쳐를 따라 그웬은 순순히 호비의 손에 잡힌 두 손을 스르륵 내렸고, 붉어진 눈시울로 호비를 마주 봤다.


  “미안해, 호비. 난…”
  “하지마, 그거.”
  “응?”
  “사과 할 일 아니잖아.”


  그웬은 호비의 표정에서 씁쓸함이나 아쉬움, 책망 같은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의 얼굴은 지극히도 평온했다. 마치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네게.

 

  “있잖아, 호비. 내가 아까 말한 건…”
  “키스, 해도 돼?”
  “...뭐?”

 

  너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웬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얼빠진 반문을 흘렸다. 하지만 호비는 진지해 보였다. 그의 큼직한 손이 그웬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웬은 잠시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감았다. 호비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웬에게 닿아왔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입술 위를 달싹인 호비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네가, 안된다며?”
  “나는 안된다고 했고, 너는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다고 한 적 없는데, 나도.”
  “거기서 눈 감으면 괜찮다는 신호인 건 전우주 공통이야, 그웬디.”

 

  장난스레 씩 웃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도 마주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긴장돼 있던 마음이 한결 느슨하게 풀렸다. 동시에 굉장히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웬디, 난 네가 여기 묵고 있는 상황을 착취할 수 없어. 네 마음이 취약해진 틈새를 이용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네가 돌이켜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전히 한쪽 뺨을 붙든 손이 부드럽게 그웬의 얼굴을 쓸었다. 소중한 걸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 모른 척 했던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웬은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방금 키스한 건...나는 언제나 네게 키스하고 싶은데, 지금 정도는 너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고, 아마?”

 

  번지르르하게 잘 말하다 말고 마지막에 말끝을 살짝 흐리는 것이, 어째 그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서 그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느낀 다른 사람의 온기가, 그를 향해 온전히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그웬을 느슨하게 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안 해, 후회.”
  “다행이네.”
  “누가 혹시 널더러 날 착취한다고 하면, 내가 덮쳤다고 해.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아, 우리 그웬디의 명예를 위해 결코 그럴 수는 없지. 그러느니 내가 파렴치한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아.”

 

  극적인 톤으로 과장하는 호비의 태도에 그웬은 그의 어깨를 찰싹 아프게 때렸다. 하여튼 거미들은 말만 참 잘한다니까. 그 기세에 떠밀려 뒤로 털썩 주저 앉은 호비는 뭐가 또 웃긴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호비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웬이 재촉하듯 눈을 치켜떴지만, 그는 그저 하하,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듣지 못한 말이 궁금했지만, 어쩐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호비의 얼굴에 그웬은 마주 미소지었다. 평화롭고 한가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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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드럼 칠 줄 알아?"

 

  호비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실도피하듯 얼떨결에 발을 들인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서, 그웬은 생각과 다른 서먹한 분위기에 애를 먹었다. 막연하게 마일즈의 지구에서 만났던 다른 거미 친구들처럼 서로의 외로움과 고충을 이해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를 보는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시선은 뭔가 불편했다. 그웬도 딱히 스스럼 없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지만,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못 볼 꼴을 본 것마냥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걸 깨닫자 그웬도 뭔가 잘못 됐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네 이름이 주는 임팩트가 좀 있어서 말이야."

 

  라일라에게 들은 다른 우주의 수많은 '그웬 스테이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으나, 그웬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뛰게 억울한 일이었다. 지들은 죄다 피터 파커면서! 누가 누굴 보고 피할 상황인데, 지금?

  자신 내면의 소용돌이를 돌보기도 벅찬 마당에 넘쳐나는 피터 파커들의 정신적 고통까지 고려해줄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웬은 차라리 외톨이로 머무는 쪽을 택했다. 미겔은 당장 임무에 나서기엔 그가 너무 미숙하다며 쉽게 일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그웬은 제스의 지구에서 가끔 묵을 때 말고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에 주어진 임시숙소에서 최대한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홀로 방에만 있다 보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품안에서 눈을 감던 피터의 마지막 숨결. 포탈을 넘기 전 그를 보던 아버지의 눈빛. 아버지에게 애원하던 순간의 절망감. 머릿속을 뒤덮는 생각 속에서 잠들면 꿈에서마저 악몽이 괴롭혔다.

  드럼이라도 칠 수 있으면 나을 텐데. 도무지 안에만 있어선 안될 것 같아서 햇볕이라도 쬐기 위해 실내정원 분수가에 앉은 그웬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들겼다. 호비가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드럼 칠 줄 알아?"

  "뭐?"

  "드럼, 칠 줄 아냐고."

 

  강렬한 생김새의 - 이곳에 와서 천양각색의 수트 변주를 봐온 그웬 기준으로도 - 거미였다. 모히칸마냥 정수리를 따라 삐죽 솟은 파이크와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정신산만한 수트 무늬. 그리고 등에 멘 건...기타? 수트 위에 기타를 메고 있어?

 

  "응...밴드는 없지만."

 

  없다고 해야겠지? MJ도 이제는 그웬이 지긋지긋해졌을 테니까. 그웬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얼굴도 안 비친 지 한참이니 지금쯤 새 드러머를 구했을 터였다.

 

  "잘됐네. 딱 좋은 타이밍이야. 가자."

 

  타이밍? 뭐가? 하고 되묻기도 전에, 느닷없이 포털을 연 거미가 그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 얼떨결에 손을 붙잡자마자 열린 포털 속으로 웹슈터를 쏘더니 그대로 그웬과 함께 몸을 던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슬슬 익숙해져 가는 강렬한 속도감을 품에 안고 포탈 밖으로 쏘아져 나가자, 그곳은 무채색의 낯선 도시였다. 그웬을 데려온 거미와 똑 닮은, 흑백 신문을 얼기설기 오려 붙인 것 같은 낡고 음울한 도시.

 

  "그런 색으로는 좀 눈에 띌 테니까 일단 대충 걸쳐. 좀 크긴 할 텐데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이 선 곳은 희미한 네온사인 불빛이 전부인 어두침침한 골목길이었고, 거미는 여긴 어딘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슥슥 걸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스포츠백에서 후드집업을 꺼내 던졌다.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살피다가 옷을 받아든 그웬이 그제야 말할 기회를 포착했다.

 

  "잠깐만, 너 누구야? 여긴 무슨 지구고?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데?"

 

  가방에서 꺼낸 데님재킷과 청바지로 갈아입고 마스크를 벗은 거미가 그웬을 돌아봤다. 마스크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 건가 싶게 풍성한 레게머리가 퐁 튀어나오는 모양에 그웬은 잠깐 벙쪄서 또 말을 잃었다. 몇 갠지 셀 수도 없는 피어싱에도 묻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 나이는 그웬보다 한두 살 많을 듯 보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법 무서워 보일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웬을 보는 눈빛은 묘하게 따듯했다.

 

  "호비 브라운. 스파이더 펑크라고도 부르는데 선호하는 건 이름 쪽이고. 여기는 지구...뭐더라, 138이던가. 일단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주섬주섬 후드를 걸치고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호비를 따라가며 그웬은 이 상황에 화를 내야할지 당황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이렇게? 스파이더맨으로 위장한 빌런 같은 건 아니겠지, 설마? 스파이더 센스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거니 하며 호비가 안내하는 낡은 철문을 따라 들어서자, 그웬도 익히 아는 쿵쿵거리는 앰프의 울림이 느껴졌다. 공연장이잖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호비! 공연 30분 전인데 이제 오는 게 어딨어?!"

  "드러머 구하러 간댔잖아. 구해왔어."

  "뭐, 진짜? 잘했어! 네가 최고야!"

 

  짧게 깎은 머리를 하늘색으로 탈색한 그웬 또래의 청년은 화내려던 기세를 금세 수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웬을 바라봤다.

 

  "친구, 이름이 뭐야? 시간 얼마 없는데 호흡만 잠깐 맞춰볼래? 셋팅은 다 돼있어!"

  "어, 난..."

  "그웬디. 이쪽은 그웬디야. 가자, 곧 시작이야."

 

  그완다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웬디... 그웬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비를 돌아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 해보이더니 그웬의 등뒤를 툭툭 밀었다. 공연? 지금? 여기서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휩쓸린 것은 여상스럽게 그를 이끄는 호비의 태도였을까, 아니면 간만에 접한 공연장의 두근거리는 울림 탓이었을까. 그 뒤는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합을 맞춰보기 위해 셋리스트를 빠르게 훑고, 속사포처럼 밴드 멤버들을 하나씩 소개 받고, 공연 시간이라는 외침에 부리나케 자리를 잡고 긴장할 새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멤버들은 급하게 합류한 그웬의 흐름에 쉽게 맞춰줄 만큼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다. 호비는 무대에 서기 전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그야말로 스파이더 펑크, 라는 걸까. 대체 뭐하는 우주길래 스파이더맨이 수트 차림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건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고요해진 공연장 한가운데, 미뤄놨던 긴장감이 한 순간 몰려드는 느낌에 그웬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때, 재밌었지?"

 

  그새 다시 마스크를 벗은 호비가 그웬에게 다가왔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무대 위의 그는 쉴 새 없이 날뛰며 환호를 유도하고 보컬과 함께 마이크도 잡고 -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다 - 열정적으로 공연을 주도했다. 그래놓고는 공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상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그웬에게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다. 그웬은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냅다 자신을 끌고 온 이 배짱 좋은 거미의 독단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대체 뭐야? 누가 공연 30분 전에 처음 보는 드러머를 데려와서 무대에 세워? 내 실력이 어떨 줄 알고?"

  "잘했으니 됐지? 펑크는 원래 그런 거야. 네가 잘 못했으면...뭐 토마토나 몇 개 맞고 말았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웬이 제대로 못했을 거란 가정은 전혀 안하는 듯한 얼굴에 그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그웬은 간만에 드럼스틱을 잡고 난 뒤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한동안 복잡했던 머리도 드럼을 치는 동안 한결 정리됐는지, 정말 오랜만에 잡념 없이 머리가 맑았다.

 

  "공연 대타 구하려고 본부에 왔던 거야?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어, 뭐. 나는 거기 잘 안 가니까. 어쩌다 타이밍이 맞았나 보네."

 

  값어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공연장 밖으로 나서자 어느 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호비의 우주는, 그가 사는 동네는 그웬의 우주와 참 달랐다. 많은 게 낡아 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을 것 같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우주에 와본 건 이걸로 네 번째인가. 마일즈, 미겔, 제스의 우주, 그리고 이곳, 지구-138. 임무 없이 다른 우주에 가 있으면 캐논의 위험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미겔에게 듣긴 했으나 그웬은 모처럼 방문한 다른 우주가 신기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꼭 미겔을 닮은 차갑고 낯선 누에바 요크에는...

 

  "늦은 김에 묵고 가. 돌아가 봤자 재밌는 일도 없잖아. 불쌍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한 피터 뭐시기들만 드글거리는 곳에."

 

  꼭 그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호비는 툭 하고 별스럽지 않은 제안을 던졌다. 질색하는 호비의 표정에 그웬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냅다 이렇게 초대하는 거야? 재워줄 곳은 있고?"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닌데, 묵어가는 애들이 넘쳐나서 손님 맞을 구색은 갖춰놨거든. 급하게 갈 이유도 따로 없잖아?"

 

  분명 오늘 처음 만난 건데도, 호비는 그웬을 익히 안다는 양 말을 던졌다. 섣부른 오지랖에 불쾌감이 들 법도 했으나, 그웬은 어쩐지 누그러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이런 기분으로 그런 곳에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난데 없이 나타나 엉겁결에 기분전환을 시켜준 호비란 거미한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기에.

  그것이 그웬 스테이시와 호비 브라운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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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반추

etc. 2021. 2. 21. 05:32

  "...사적인 감정은 없어."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머릿 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허리춤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의 간격이 결과를 갈라놓았다.

 

  탕-

 

  총성은 거의 하나였지만, 총알의 궤적은 달랐다. 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타는 것 같은 감각에 뒤로 나동그라져 몸을 웅크린 채로, 벨은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애들러를 올려다 봤다. 그의 총알은 애들러의 왼쪽 뺨을 스쳤을 뿐이었다. 왼쪽 얼굴 위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실금 하나를 만들어 그 위로 피가 주륵 타고 흘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벨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더듬더듬 흙바닥을 짚으며 뒤로 향하던 그의 등이 나무등치에 닿았다. 허나, 그가 예상한 다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들러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버겁게 내쉬는 숨 사이로 탄식 같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총알이 빗맞은 거라면 아마도 왼쪽 어깨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총알은 정확히 노린 것마냥, 벨의 오른 어깨를 맞췄다.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오른팔의 감각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 애들러가 빗맞췄을 가능성은 없었다.

 

  "너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그 정도는 알겠지."

 

  마치 지령을 내릴 때와 비슷한, 딱딱한 어조였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나 정말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벨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그 말을 듣고 있지도 않으리라. 그는 왜-.

 

  "최대한 조용히 숨어 살아. 그 이상은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출혈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려 애썼다. 벨의 입술이 달싹였다. 말할 것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수고했다, 벨."

 

  그 말을 끝으로, 벨은 의식을 잃었다.

 

*

 

  러셀 애들러. CIA 특수활동부의 정예 비밀요원. '페르세우스'를 위시한 러시아의 대규모 핵공격을 막아낸 구국의, 세계의 영웅. 그가 해낸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위기를 막아낸 건지 모르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일의 일부였기에, 그는 딱히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임무와, 국가에 닥칠 위협을 차단하는 일, 그 뿐이었다.

 

  솔로베츠키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와 꼬박 일주일에 걸쳐서 결과 보고와 잡다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애들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실상 집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장소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현관키를 가방 밑바닥에서 끄집어내 열쇠구멍에 꽂아 넣으면서 그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어두컴컴한 거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주머니의 담배갑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천장으로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제서야 나른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이대로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씻고 끼니를 챙기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달리 없었다.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이, 감긴 눈꺼풀 아래로 잔상처럼 남은 이미지가 맴돌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던 바다 냄새. 신음 섞인 한숨 소리. 영영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을 것 같던 무기질의 눈동자에 맺혀있던-.

 

  "...멍청하긴."

 

*

 

  애들러가 변화를 눈치챈 것은 두 달 가량 정도 지나서였다. 집을 자주 비운다고는 하나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침입을 눈치챌 수 있는 장치를 몇 가지 마련해 두었다. 그의 방문자는 보란듯이 그 모든 장치에 다녀간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집안을 살폈을 때 무언가 사라지거나 헤집은 흔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 설치된 도청장치나 카메라 등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지만 그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다. 애들러는 만약을 대비해 요원 몇몇에게 집을 감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일주일 간 아무 흔적도 없어 그마저도 해제해야 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방문자는 귀신 같이 애들러가 없는 날만을 찾아서 다녀갔다.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이란 창문에 다 이중잠금장치를 설치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일주일에 세네 번일 때도 있었다. 애들러가 집을 오래 비우는 때를 아는 건지, 심지어는 그가 없는 사이 먹고 잔 흔적마저 미세하게 남아있기도 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암살이라면 그렇게 숨어들 실력으로 이미 시도를 했을 것이고, 그가 가진 자료나 정보가 목적이었다면 무언가 훔치려는 시도가 있었을 법 했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것은, 애들러가 점차 그 상황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름없는 방문자가 누구인지 마치 아는 것만 같았다. 딱히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방문자를 잡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마치 생활패턴이 다른 동거인을 둔 것 마냥, 그는 방문자와의 이상한 공생 관계에 적응해갔다.

 

  그래서 어느 밤,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때 거실에 앉아있는 그를 마주했을 때에도, 애들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애들러."

  "안녕, 벨."

 

  반 년만이었다. 애들러는 가장 먼저 가죽 자켓에 청바지를 차려입은 벨의 차림새에서 무기가 숨겨져 있을 만한 위치를 가늠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여위어 보였다. 머리는 그 사이 길어져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신 듯, 테이블 위에는 빈 캔이 두엇 놓여있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겠군. 눈 깜빡할 사이 빠르게 분석을 마친 애들러는 습관대로 현관에 열쇠를 걸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벨은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지 그래? 맥주 갖다줄까?"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군."

 

  애들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고, 벨은 말한대로 맥주를 꺼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애들러는 어째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긴장은 별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듯한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맥주를 가져온 벨이 캔을 따서 내밀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받아서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벨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으면 더 일찍 했겠지. 와서 잠도 자고 간 것 같던데, 월세도 좀 같이 내지 그래?"

  "아, 다음 주에 주급 받으면 생각해 볼게."

 

  주급이라니,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길이 없는 실없는 이야기였다. 애들러는 머릿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을 골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든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라든가, 혹은...

 

  "당신을 죽이러 온 거 맞아."

 

  그의 생각을 끊고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러는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맥주에 독이라도 넣었나, 아니면 이제라도 총을 뽑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경각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켰다. 벨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냥 쓸데없는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에 든 맥주캔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사실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눈치챘었나 모르겠네. 아무튼, 기왕 끝내는 거 얼굴이나 한번 더 볼까 해서 기다렸어. 그랬는데..."

 

  벨은 말을 잇지 않고 그제야 애들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항상 벨의 눈빛이 파충류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 때도 좀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는 차가운 무기질의 눈. 나고 자란 조국의 영향인지, 세뇌 과정에서 무언가 망가진 탓인지, 애들러는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벨의 눈빛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인간다워졌다고 해야할까.

 

  "관둘래. 어차피 당신은 신경 안 쓸 것 같으니까. 내가 죽이려 들든, 말든."

  "...아니, 죽이려 들면 신경 쓰겠지, 나도."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답하고 나자, 이 모든 대화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주한 벨 역시 비슷한 표정인 걸 발견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벨마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별 뜻도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주보고 한참 웃어댔다. 그리고 벨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총으로 손이 향한 애들러는, 후련한 표정의 벨을 보고 다시 자세를 풀었다.

 

  "...갈게.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

 

  벨이 현관으로 향하고, 문을 열고 반쯤 나설 때까지도, 애들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벨이 문을 닫기 직전, 그제서야 애들러는 그가 해야할 마지막 인사를 던질 수 있었다.

 

  "잘가라, 벨."

 

  벨은 말없이 문을 닫았고, 애들러는 그제서야, 정말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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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워] 일상

etc. 2021. 2. 21. 05:10

  CIA라고 하면 으레들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두침침하고 은밀한 느낌의 비밀 본부. 온갖 암호화된 서류와 컴퓨터로 차있는 사무실. 시종일관 진지한 인상으로 작전 회의에 집중한 요원들. 실제는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24/7로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이기에 때가 되면 끼니도 챙겨 먹고 한숨 돌리면서 쉴 시간이 필요했다.

 

  "또 나야?"

 

  제비뽑기를 뽑아 든 벨이 끙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공평하게 숫자대로 종이를 넣고 뽑는 건데도, 유달리 벨은 식사 배달 당번으로 자주 뽑혔다. '나 모르게 뭔가 표시라도 해두는 거야, 다들?' 하고 물어도 실없는 소리 말라며 재빠르게 자기 몫의 뽑기를 집어들고 멀어지는 팀원들을 보면 분명 무언가 있을 텐데, 길게 물고 늘어져 봐야 이런 걸 알아채는 것 또한 스파이의 자질이라며 비웃을 우즈를 생각하며 벨은 얌전히 자기 역할을 따르기로 했다. 그 날의 메뉴는 중식이었다. 사실 굳이 '그날의'라고 꼽을 것도 없이, 그들의 메뉴는 주로 터키식 도너, 중식당, 얄팍한 이탈리아 피자 사이에서 로테이션을 도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그마저도 사치일만큼 바빠서 마른 빵쪼가리에 육포나 햄 따위를 씹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모두가 고른 메뉴가 적힌 쪽지를 들고 밖으로 나서기 위해 자켓을 챙겨입는데 따라 와서 자신의 가죽 자켓을 주워 입는 애들러가 눈에 들어왔다.

 

  "같이 가게?"

  "담배 떨어졌다."

  "그럼 나가는 김에 당신이 가져오든가."

  "까불지 마라, 꼬마야."

 

  담배까지 사오라며 심부름 목록에 더 얹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지만, 웬일인지 애들러는 군말없이 문을 나섰다.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벨은 오토바이 열쇠를 애들러에게 던졌다. 열쇠를 받아든 애들러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였다.

 

  "빗길 운전인데 더 잘하시는 분이 해야죠."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오토바이에 올라탄 애들러의 뒷자리에 나란히 자리잡은 벨은 가죽자켓 안쪽으로 애들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티셔츠 너머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애들러는 손이 차다 어쩌다 하며 뭐라 궁시렁거리고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가장 가까운 시내까지도 오토바이로 20분은 달려야했다.

 

  "꽉 잡아라."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애들러는 냅다 급발진했다. 벨은 확 뒤로 쏠리는 몸을 끌어당겨 애들러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들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뒤를 따랐지만, 입밖으로 굳이 내진 않았다.

 

*

 

  쪽지에 따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애들러는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두침침한 조명의 식당 안에는 좁은 주방 안에서 큰 소리로 명령을 주고받는 종업원들의 목소리와, 촘촘히 들어앉은 테이블에 두세 명씩 자리한 몇 무리의 손님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했다. 푸른 드래곤. 아시아 식당들은 어째서 그렇게 이름들이 다 거창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벨은 습관처럼 손님들의 얼굴을 하나씩 곁눈질 했다. 이 식당이 팀의 단골인 이유는 손님 대부분이 아시안이기 때문이었다. 아시안, 혹은 동유럽계 이민자들. 문득 강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생강 냄새에 벨은 코를 찡그렸다. 한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어디선가 먹었었는데...

 

  "아직이냐?"

 

  문을 열고 들어선 애들러가 문가 테이블에 자리잡은 벨의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를 툭툭 터는 손길에 테이블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벨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긋이 눌렀다.

 

  "뭐야, 괜찮아?"

  "어, 아무 것도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그나저나 애들러, 거기 이름이 뭐였지?"

  "응?"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눈앞에 빛이 명멸했다. 삐-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흡 하는 심호흡과 함께 벨은 다시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 파리 안전가옥 건물 건너편에 있던 중식당 말이야. 생강이 잔뜩 들어간 딤섬을 팔았는데..."

  "아아, 거기, 그래, 그거 맛있었는데 말이야."

  "특이하게, 무슨 꽃 이름이었어, 목...목..."

 

  다시 두통이 확 밀려들어 눈앞이 하얘졌다. 애들러는 눈을 질끈 감은 벨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시야가 확 또렷해졌다. 이명도 사라지고, 두통도 잦아들었다.

 

  "목련, 맞아?"

  "어, 그런 이름이었지. 맞아."

 

  애들러는 잠시 말없이 벨을 바라봤다. 그의 선글라스는 눈 부위가 유달리 까매 마주 보고 있어도 좀처럼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벨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음식이 나왔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배고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벨은 금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의자에 걸쳐둔 자켓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고, 청소당번을 정할 겸 벌인 주사위놀이 판에서 이번에는 불운을 피해 간 벨은 꼴지가 돼버린 라자르에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준 뒤, 회의 테이블에 걸터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애들러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쉬나? 다음 작전은 일주일 뒤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느슨하지. 그보다 너...목련이랬나?"

 

  벨은 애들러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련? 꽃 말야? 그게 뭐?"

 

  생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들은 양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의 표정에 애들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들러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손에 쥔 담뱃대에서 길게 탄 끄트머리가 재가 되어 떨어졌다.

 

  "아니, 됐다. 너야말로 가서 쉬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 하고 한숨을 흘린 벨은 고개를 내젓고는 돌아섰다. 그가 이상하게 구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었다. 의자에 둘러 앉아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던 벨이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애들러는 늘 잠가두곤 하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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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하

etc. 2020. 11. 8. 18:58

2003.08.02 ~ 2020.11.06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내가 네 마리 고양이를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가하에 대한 글을 쓰는 날이. 시간은 기억을 너무나 무색하게 흩어놓기 때문에 아직 생생할 때 조금이라도 기록해둬야 한다.

  의외로 가장 덜 힘든 이별이었던 것 같다. 제일 마음의 준비가 된 채로 보내서일까.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원하던 때에(그나마) 이별할 수 있어서였을까. 최근 몇 달 새 체중이 야금야금 줄어 처음 네덜란드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3.3kg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2.1kg였다. 체중의 1/3이 줄어드는 그 변화는 행동에서도 드러나 점차 걷는 모습도 버거워 보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자면서 보내는 걸 보면서 이제는 정말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7년 전에 가하를 만났다. 그 때 나는 16살이었고, 모부가 별거에 들어가면서 여섯 식구 살던 집에서 엄마랑 나와 10평 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둘이 살기 시작했다. 모부가 이혼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할머니랑 같이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두 다 너무 충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던 사춘기였다. 엄마는 아마 그런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는 분 건너건너 새끼 고양이가 태어난 집이 있다는데, 고양이를 키워볼까, 하고 나한테 제안했다. 그렇게 그 집에 가서 네 마리 형제 중에 골랐던 게 가하였다. 삼색이 하나, 턱시도 둘, 그리고 올블랙 아깽이 가하. 턱시도 친구들도 귀여웠지만 한창 중2병 터지던 새끼 덕후는 올블랙 고양이가 뭔가 특별하게 여겨져 가하를 골랐었다. 이름도 지금 와서 밝히자면 당시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에 나오던 주인공의 반려 호랑이 이름에서 따왔다. 나중에는 쪽팔려서 사람들이 물어보면 그냥 별 뜻 없다고 대답했지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도 많이 없던 시기였고, 아무 것도 모르고 데려온 거나 다름 없었다. 생후 6주 경에 우리집에 온 가하는 정말로 내 손바닥 만했다. 지금이야 아깽이들 목덜미 잡고 번쩍번쩍 잘 들어 올리지만 그 때는 가하가 정말 너무 작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잘 안아들지도 못하고 어떻게 쓰다듬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도 혹시 깔아 뭉개기라도 할까봐 겁났다. 엄마는 새로 찾은 자유를 만끽하느라 집에 잘 없었다. 그 작은 아파트에서 나에겐 가하 뿐이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이후에 업둥이도 잠깐씩 들이고 보리, 딸기, 류하 이렇게 고양이가 자꾸 늘어나는 동안, 가하는 내내 가족들에게는 '항상 까칠한 고양이', 나한테는 '나한테만 덜 까칠한 고양이'로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하는 퍼스널 스페이스도 중요하고 외동 고양이로 사는 게 제일 좋았을 성격인데, 고양이에 대한 이해도 별로 없는 가족들에 다른 고양이들 셋이나 부대끼며 사느라 항상 좀 탐탁치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가하는 참 나를 좋아했다. 나는 언제나 가하가 무슨 기분인지 알았다. 정확히 왜 기분이 나쁜지는 몰라도 언제 물 건지, 언제 쓰다듬 받고 싶은지, 언제 이불 속에 들어오고 싶은지, 항상 알았다. 둘만 침대에서 잘 때면 슬그머니 가슴께로 올라와서 고르릉 거리면서 쭉쭉이, 꾹꾹이를 했다. 좀 더 나이 들고 나선 그나마도 안했지만.

  대학 때는 집에 잘 안 붙어 있어서, 떠올려 보면 미안할 따름이다. 그나마 자취하러 나가서는 가하랑 보리만 데리고 나가서 원룸에서 셋이 옹기종기 잘 지냈지만, 집에는 머리만 누이러 오는 언니가 야속했을 법도 한데. 항상 지나고 나서야 생각한다. 가하는 네덜란드 와서 참 행복했겠구나. 그전까지 집에 잘 붙어있지도 않고, 집에서도 맨날 게임하고 어쩌고 잘 놀아주지도 않는 동거인을 잘도 참아줬구나. 좀 더 많이 시간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을.

  결국 가장 최근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에, 네덜란드 와서 가하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 창틀에 놓인 바구니에서 햇살 가득 누리며 괭합성 하던 모습. 가뜩 까만 털이라 따끈따끈해진 옆구리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으면 풍기던 가하 냄새. 늙어서 발톱도 잘 못 감추는 탓에 트친 분이 '쌀알 발톱'이라 부르던 하얀 발톱이 사진마다 꼭 찍혀 있었는데.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눈을 감아서 항상 반쯤 눈감은 사진만 찍혔다. 다른 트친 분은 멜론빛 눈이라고 하셨는데. 천년 만년 무릎고양이라곤 안하던 애가 보리, 딸기가 떠나고 외동 고양이가 되고 나니 고르릉도 너무 잘하고, 무릎 고양이로 사는 모습이 정말 놀랄 노자였다. 이렇게 혼자 관심 독차지하는 걸 좋아하는 고양이였을 줄이야.

  신부전 고양이들을 병원에서 많이 봐서,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는 이미 상상하고 있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소변량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구토를 보이고, 활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끝. 중간중간 활력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이번인가? 하는 생각에 울고 불고 마음 졸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그 때마다 변비약 먹이고, 구토억제제 먹이고 하면서 어떻게든 유지가 돼왔다. 요씨는 약 먹이는 걸 전혀 엄두도 못내는 사람이라 내가 매 번 약을 먹였더니, 나를 미워하고 요씨랑만 친하게 지내서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영영 미워하지는 못하고 5분쯤 화냈다가 다시 풀린다는 점이 또 고마웠다.

  사람은 떠날 때를 안다고 하는데, 고양이도 그럴까. 마지막 3일 정도, 가하는 고르릉도 전혀 안하고, 식빵 자세로 꼬리만 계속 탕탕 치고 있었다. 속도 더부룩하고, 통증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 마음 졸이며 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내일이면 정말 안녕인걸까 하면서 자던 그 밤, 몇 번씩 일어나서 가하가 아직 숨을 쉬고 있나 확인했다. 그런데 새벽 중에, 요씨가 나를 깨워서는 자기 가슴팍에 올라와 앉은 가하를 가리켰다. 아주 작게 고르릉을 하고 있다고. 그 뒤 가하는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구리에서 잠들었다. 마치 아프기 전 같은 모습. 요씨는 '다시 괜찮아지는 걸까?'하고 물어봤지만, 나에게는 그게 마치 마지막 인사 같이 느껴졌다.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하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사랑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아이를 내 뜻대로 보내주는 게 정말로 옳은 선택일까, 하는 질문을, 많은 보호자들이 품는다. 애들은 대답을 못하니까, 그리고 아마 묻는다고 해도 죽고 싶다고 대답하는 아이는 없겠지. 아이가 원하는 것은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 텐데, 어떤 방법으로도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프지 않게'라도 해주는 것이 보호자의 선택인 것이다. 불공평한 선택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 불공평함에 대한 죄책감까지도 보호자 몫이기 때문에.

 

  삶의 절반을 넘게 함께 했는데,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다니. 너무 이상하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 내 사랑. 내 새끼. 천사 같은 내 고양이. 언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누구보다도 오래 언니 옆에 머물다 간 천재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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